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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디연합회보] 언론의 '열린자원' 운동을 위하여

언론의 '열린자원' 운동을 위하여 이광석(뉴미디어평론가) (피디연합회보: 2002년 1월 넷째주) 인터넷은 사회 자원의 이용 방식을 뒤바꿔놓았다. 저작, 권위, 기밀, 전문, 보안 등의 수식어가 따라붙는 정보에는 의례 이중삼중의 철통같은 가로막이 놓여있기 십상이다. 이렇듯 위계화된 정보도 잠금 장치가 한번 풀리면 무한히 복제돼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에 이른다. 네티즌들간의 교류는 협업의 가치도 배양한다. 하나의 정보를 가지고 수백, 수천이 모여 지속적으로 갈고 닦아 쓸만한 형태로 발전시키기도 한다. 이것이 네트에서 벌어지는 '열린자원 (오픈소스)' 운동의 새로운 가치다. 언론도 예외가 아니다. 컴퓨터 소스 공개와 협업 과정을 통해 성장한 컴퓨터 운영 소프트 웨어 '리눅스'가 초국적 독점체인 마이크로소프트에 위기감을 불러왔다면, 뉴스룸의 직업적, 전문가적 영역으로 남아있는 언론의 보도 관행에 경종을 울리는 시도들이 네트를 통해 이뤄 졌다. 일명 '언론의 열린자원운동'(open source journalism)이 그것이다. 이 개념은 99년말경 미국내 컴퓨터 전문가들의 한 공동체 사이트에서 알려지기 시작됐다. 한 저널의 편집인이 10만여명에 가까운 회원으로 조직된 한 커뮤니티 사이트에 자문을 얻 기 위해 자신의 기사 초고를 올려놓은 것이 발단이 됐다. 곧장 300여명의 네티즌들이 그 기 사의 오류에 수많은 답글을 붙였고, 그 편집인은 기사를 다시 수정해 내보냈다. 그 일화가 알려지면서 언론인들 사이에 작은 논쟁이 일었다. 일부 언론인들은 편집인의 행동이 네티즌 대중에 의한 사전 검열을 불러들일 수 있는 징후라고 쏘아붙였고, 그 편집인은 기사의 사실 확인을 위한 자문 과정에 불과하다고 반박했다. 여론은 저널 편집인의 행동에 손을 들었고, 사태는 한발 더 나가 언론계 직업윤리의 혁신에 대한 요구로 기울어졌다. 기사의 오류를 최 소화하는 장치로 '열린자원'이라는 인터넷 정보공유의 정신을 저널리즘에 적극 도입해야한다 는 주장이 제기됐다. 기성 언론의 문제점은 알려진대로 심각하다. 사주에 목매는 비정상적인 운영 체제, 광고주 에 휘둘리는 편집권, 비공개 정보원 중심의 기사들, 게재 여부에 관여하는 정치적 편견들, 사실 확인없이 찍어내는 수많은 오보들 등 고질적인 병폐들이 언론의 뒤꼭지를 당기는 걸림 돌이었다. 게다가 조선 등 족벌 언론들의 정치 국면에 따른 보신성 논조 변화도 이에 한몫 거들었다. 이런 모든 관성화된 언론 체계에 도전하는 징후들이 네트를 먹고 자라난 새로운 '열린' 언론들에서 발견되고 있다. 얼마전 창간 2돌을 맞은 '오마이뉴스'나 인터넷상의 안티조선 사이트 '우리모두'는 이런 열린 언론의 국내 사례로 꼽을만하다. 1만 7천여명에 이르는 시민기자들이 '게릴라'식으로 기사를 자체 생산하여 여과 게재하는 뉴스 생산체계는 기성 언론의 상식과 바탕에서는 도저히 내오기가 힘든 민주적 과정이다. 한편, '우리모두'와 같은 커뮤니티는 언론의 2차 여과지 구실을 한다. 이곳에선 누구나 자발적으로 따서 옮긴 주요 기사들을 등록해 새로운 뉴스터를 만들어낸다. 한번 누군가에 의해 내던져진 글은 덧붙이고 수정하고 논쟁하는 난리굿을 치른 다. 그러면서 글들에 생명력이 붙는 것이다. 모든 자원들은 완벽히 열려있고, 그 자원들은 아래위 없이 수많은 네티즌들에 의해 철저히 검증되는 협업 과정을 밟는다. 하지만 아직은 '열린자원운동'을 활용한 언론의 궁극적 틀은 없는 듯하다. 이제까지 다양 한 실험사례들을 고려해보면, 보다 체계화되고 장기적 안목을 갖춘 뉴스 체계의 구축도 가 능하리라 보인다. 기계가 찾아주는 자동 검색 방식을 거부하고 2만여명의 네티즌들이 일일 이 직접 손으로 구축했다던 한 사이트의 '열린검색운동'과 비슷한 모델이 등장할 법하다. 상 업적 검색엔진이 찾아주는 검색 순위와 분류 결과를 마주해서나, 편견과 오류로 가득찬 뉴 스를 대할 때 무너지는 심정은 거의 비슷하리라. 자발적 협업을 통해 뒤틀린 기사들을 일일 이 골라 사실을 재확인하고 재가공된 내용들을 체계적으로 축적·관리한다면 중요한 '열린' 뉴스원이 될 만하다. 게다가 기성 언론의 무사안일한 보도 관행을 감시하는 효과도 적지않 게 얻을 것이다. 우선 그 협업의 시작은 각 시민언론단체들이 고생해서 만들어 철지나면 묵 혀두는 정례 모니터링 보고서들의 디지털화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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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예총] 열린채널도 "찢어라"

열린채널도 "찢어라" 이광석(뉴미디어평론가) 우리 일상에 기생하는 "찢고" "찢겨져야" 할 악습, 권위, 폭압 등이 어디 한둘이랴.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 국민 통제의 상징인 주민등록증이 아직까지 버젓이 힘쓰는 현실 또한 당연 "찢겨야할" 것들 중 하나다. 이번 KBS 열린채널의 편성에서 사라진 이마리오씨의 영상 보 고서, <주민등록증을 찢어라>는 바로 "찢겨야할" 구시대 악습을 "찢자"는 의도를 지닌다. 그런데, 당연 우리 사회의 "찢어야할" 것들에 대한 고민을 영상에 담아내야할 열린채널의 시청자프로그램운영협의회(운영협의회)가 오히려 "찢어라"라는 문구를 겁내해 문제삼고, 내 친 김에 자의적 검열의 칼까지 휘둘렀다. 시민단체들이 수년간 각고의 노력으로 어렵사리 방송법에 명문화하여 이룬 시청자 참여 프로그램들이 방송된지 이제 겨우 한 해가 지났건만, 벌써부터 편성 심의 권한과 관련해 운 영협의회의 실체가 의심을 받게 됐다. 이 협의체가 왜 시청자의 직접적인 방송 접근권을 고 무하기보다 이를 막는 사전 검열의 기구가 되었을까? 이 문제는 근원적으로 우리 공익 방송 의 현주소와 한계로부터 따질 문제로 보인다. 우리 공중파 방송의 비정상적 수준을 이해하면 사실 "~을 찢어라"는 그리 겁나는 문구가 아니다. 어느 채널에서든 더 겁나는 말도 겁나지않게 마냥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실 상 업화와 비정치화가 화면을 지배하는 우리의 영상 문화에선 "찢기는" 대상이 겁나는 문제다. 예컨대, 광고에서 청바지 "찢는" 것을 무슨 젊은이들이 만든 하위문화의 분출인냥 표현해도 별 문제없이 전파를 타지만, 주민등록증 따위를 "찢으면" 탈이 생긴다는 얘기다. 이것이 우 리 방송 문화의 정치적 한계치다. 따져보면 방송 불가 판정도 결국 "찢어라"를 문제삼기보 다 "찢는" 대상으로 주민등록증이 거론되는 것을 불경죄로 몰아 벌어진 결과다. 주민등록증 =준법정신의 고취(방송심의규정)라면, 이를 "찢어라"는 무시무시한 탈법이자 정치적 선동에 해당한다. 따라서, 박정희 생가 장면 삭제 등에 이어 제목의 순화까지 요구하며 편성 결정을 지루하게 미루다가 일방적으로 불가를 결정한 행위는 애초에 공중파를 통해 내보낼 의사가 없었다는 정황으로 읽힌다. 열린채널은 그야말로 방송사와 운영협의회의 저급한 정치 수준 만큼만 빼꼼히 '열린' 상태였던 셈이다. 어렵사리 상업화된 언론의 틈새를 뚫고 만들어 시민들이 꾸리는 공공 시간대를 정치 영역 이 거세된 불구화된 영상만으로 채우게 놔둘 수 없다. 우리는 옴부즈맨 프로그램이나 시청 자 비디오 등으로 공중파 방송이 어떻게 자신의 민주적 성격을 과대 포장해왔는지 잘 배워 왔다. 이번 기회로 시청자들이 직접 참여해 제작하는 KBS의 열린채널 또한 방송사들의 현 실 포용 능력을 내세우는 선전 수단이 될 위험성이 짙다는 점 또한 쉽게 파악됐다. 운영협 의회가 독립 기구로 운영되는 듯 했지만, 정작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가 돌출되자 기존 방 송사들의 편성권자들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줬다. 물론 열린채널에 대한 체념은 궁극적 해결이 못된다. 체념은 사태의 진실을 정확히 보는 데 쓰이는 것으로 족하다. 문제는 관련 시민단체들의 요구처럼 당장 <주민등록증을 찢어라 >의 편성 불가 철회와 함께, 민주적이고 개방적으로 시민참여를 보장할 수 있도록 열린채널 운영협의회의 권한과 위상에 대한 재점검이 뒤따라야 한다. 쓰레기더미에서도 억세게 커가 는 생명을 키우려고 힘들게 마련했던 소통로가 아니었던가. (일일문화정책동향, 2002. 5. 10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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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대학원신문]네트의 기생수, 날강도, 그리고 반칙왕을 조심하라.

네트의 기생수, 날강도, 그리고 반칙왕을 조심하라. 중앙대 대학원신문 2000. 7. 미국의 좌파 지리학자인 데이빗 하비는 몇 년전 한 알튀세리앙의 잡지에 실은 그의 글에 서, 현대 자본주의의 미래상을 점검하면서 자본주의를 "모든 것을 파괴하면서 달리는 브레 이크 없는 기차"와 같다고 표현한 적이 있다. 이는 인간 삶과 의식의 미시적인 결 하나 하 나에까지 자본의 거대한 기차가 무참하게 휩쓸고 지나감을 의미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브레 이크 없이 휘몰아가는 현대 자본주의의 의식적 체제 '동원'(mobilization)의 속도전을 연상시킨다. 이는 물질과 의식 모든 영역에서 질곡을 만들어가는 자본주의 미래의 우울한 비전이 다. 미래에 대한 암울한 비전은 희망의 가능성을 절대적으로 부정하고 출발하지는 않는다. 항상 그 둘의 긴장 관계를 놓치지 않는다. 예컨대, 인터넷이란 새로운 매개체를 통해 우리는 억압과 희망의 꿈을 동시에 꾼다. 마찬가지로 이 꿈은 분명 미래에 대한 전혀 근거없는 상 상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즉 현실에 근거한 꿈이고 그래야만 한다. 미래의 감지는 그 래서 냉혹하다. 1. 산소같은 기생수(寄生獸) 현재 남한 국민 3명 중 1명이 인터넷을 이용한다고 한다. 이 추세대로 가면 내년 상반기 에 인터넷 인구가 2500만명이라는 진단도 나온다. 이 작은 나라에서 인터넷은 우리의 미래 의 사활이다. 광고, 쇼, 퀴즈, 뉴스 할 것 없이 인터넷에 광분하고 있다. 코스닥이 생기고, 수많은 벤처에 젊은이들이 몰려든다. N세대가 격상되고, 젊은 벤처사장이 잡지의 표지 모델을 장식한다. '정보사회'론도 이제 한물간 논의가 되어버렸다. 요즘은 노골적으로 '신경제'라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앞세워, 경제 논리를 그 중심에 세워버렸다. 미국 다음의 인터넷 강국이란 수식어도 나온다. 이제 386세대의 귀하신 몸들은 운동의 전망을 벤처에서 구상한다. '정보', '신(新)', '지식' 등의 수사는 대학의 학과 명칭, 학제 등 온갖 곳에 달라붙는다. 이 수사 없이는 우리는 미래에 숨도 쉴 수 없는 상황에 이를 것이다. 마치 MIT 컴퓨터사이언스 랩의 마이클 더투조스가 미래 컴퓨터가 사물 속에 이동하고 감춰지는 미래를 예측하며 내놓은 '산소 프로젝트'처럼, 이 정보의 수사들은 우리 인간의 '산소' 역할을 자임한다. 그 기술적 미래의 판단을 유보하더라도, 앞서 열거한 남한 현실의 '산소 프로젝트'들은 '동원'의 체제 논리이다. 어디서든 발견하고 유포되는 '산소'라고 주장하는 것들. 정보의 수사는 산소와 같이 육신의 영위를 조율하는 자원이 아니다. 마치 이와아키 히토시가 그린 '기생수'에 가깝다. 현재의 과도한 수사들은 외계생물로 인간의 몸에 기생하여 인간을 장악하는 잔인하기 그지없는 괴물과 같은 '기생수'다. 그들에 의해 자율 신경이 장악당한 인간처럼, 정보의 수사는 그렇게 유포된다. 인터넷을 둘러싼 논의는 계속적으로 기생수들의 장악 과정에 처할 것이다. 사방팔방 매체들을 점거한 기생수들의 프로파겐더는 그들이 단지 인간들에게 산소같은 존재임을 설득하는 장미빛 메시지로 가득찰 것이다. 2. 코드를 휘두르는 날강도 이제 인터넷에서 장사하던 닷컴들의 사망 신고가 줄줄이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슈퍼닷 컴'들만이 살아남는 시대가 도래한다는 얘기다. 현실 자본의 규모 논리가 닷컴에도 예외가 아니라는 소리다. 인터넷이 희망과 경쟁의 프런티어인 시대가 진정 몇 년이던가. 자본주의의 산업혁명 시기 이후 자본의 역사를 상기만 해봐도 이렇게 독점의 구도가 철저하고 빠르게 엮어지진 않았다. 아이러니 한 것은 오히려 이 새로운 디지털 경제의 시대에 독점을 뒤엎는 기회가 더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근거는 기술적 '코드'에 있다. "삼성의 기술이 만들면 '표준'이 됩니다"라는 광고의 사기성 발언은 사실 이에 근거한다. 독점이 기술적 코드를 장악하면, 이를 뒤집는 작업은 극히 힘들어진다. 이런걸 가지고 신경제 이론하는 자들은 '록 인'(lock-in)이라 부른다. 안에서 걸어 잠근다는 얘기다. 최근 신경제와 관련한 재밌는 글을 서술한 하버드대학의 로렌스 레씩 또한 '코드'의 논리 가 신경제 논리의 핵심임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자본 독점체가 장악한 기술적 코드는 표 준이 된다. 주먹과 힘의 현실 논리가 닷컴들에 누적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삼성이 '국내'에서 표준을 호언장담하는 카피 문구는 공식 협박이기도 하다. 날고 기어봐야 사실상 삼성의 손바닥에 있다는 얘기다. 로베르토 디 코스모의 표현을 빌린다면, 이는 '날'로 먹는 '강도'의 논리다. 공정한 게임의 룰을 더욱 찾기 힘들어진 자본주의의 미래는 이렇게 또 다 시 기술적 코드로 힘을 배가한 디지털 '날강도'들의 자본 증식과정의 연장일 수 있다. 3. 포크를 휘젓는 반칙왕 인생살이의 쓴맛처럼, 외연상 인간에게 미래의 억압과 희망의 가능성, 즉 '양날의 칼'로 보이던 것들이 억압의 식칼로 바뀌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버팅기는 다수의 자율적 힘에도 불구하고, 삶의 모순이 착착 쌓여 고스란히 네트에 실려 우리의 등짝을 억누를지도 모른다. 자본주의의 링 위에서 페어플레이를 순진하게 요구하다 '반칙왕'의 흉기에 무참히 마빡이 깨지듯, 장미빛 가능성을 포함한 미래 예측의 순진한 구도는 링 안과 밖에서 무자비하게 휘두르는 자본의 반칙을 충분히 전제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래야 각자의 마빡이 터지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칙왕'이 휘젓는 포크를 조심해야, 이 괴 물을 때려눕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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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넷] 네트의 삐끼들

네트의 삐끼들 물리적 공간에서 특정 목적지에 이르는 길까지 꼬시는 이들을 점잖지 않은 말로 '삐끼'라 부른다. 한마디로 호객하는 이를 지칭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삐끼들은 사람에서부터 추상 적인 형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발전한다. 호객은 음침할수록 소구 효과가 크다. 즉 삐끼 가 추상화되고 비가시적일수록 받아들이는 사람의 거부감을 제거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삐 끼는 소비의 덕목과 공생한다. 호객의 목적이 궁극적으로 소비를 유발시키는 과정이라면, 삐 끼는 소비와 함께 살고 죽는다. 예를 들어, 텔레비전 광고는 소비자를 상품 구매의 최종 목 적지까지 유인하는 추상적 형태의 삐끼다. 광고주와 프로그램 제작자들은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 별의별 기법들을 동원해 왔다. 텔레비전은 매체 특성상 시청자의 시선과 밀접하다. 그 시선을 지속적으로 잡아둘 수 있는 힘이 시청률이자 미디어 기업의 수익원이었다. 그래서 텔레비전은 끊임없이 광고와 프로그램의 시각적 연쇄를 통해 시청자의 눈을 잡아두려 한다. 하지만, 텔레비전은 시청자의 의지에 의해 리모콘으로 영상의 흐름을 중단하기가 수월한 편이다. 물론 그 중단까지의 과정이 어렵다 하더라도, 보여주는 이미지들이 내키지 않는다면 그저 이를 무시하고 꺼버리면 그만이다. 사실 텔레비전은 시청자들에게 보길 강요하는 가장 강력한 밑천이라곤 시각 영상 이외에는 없다. 형식상 강제로 시청자의 머리를 자신의 모니 터 속으로 쑤셔넣지는 않는다. 이에 반해 자유의 공간이라고 칭송되는 네트는 어떠한가? 아이러니하게도 네트는 텔레비전보다 훨씬 강력하지만 눈에 쉽게 띄지않는 삐끼들이 잘 자랄 수 있는 토양을 갖춰가고 있다. 특히 네트 기술의 상업적 전용은 사용자의 자율 의지 를 기술적 수단을 통해 가로막으면서도 동시에 교묘하게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해롭다. 대체 로 네티즌을 골탕 먹이는 네트의 삐끼들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부류들이 있다. 우선, 초보 적 수준의 삐끼는 인터넷 사용자가 다른 사이트로 이동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전(back) 버 튼이 아예 작동하지 못하게 한다. 주로 자바스크립트(Javascript)로 그러한 루프(loop)를 꾸 미는데, 윈도우창을 하염없이 닫아도 계속해서 또 다른 창들이 뜨게 만드는 것도 이와 비슷 한 기법이다. 이를 벗어나는 길은 모든 창을 닫고, 삐끼에게서 도망치는 길밖엔 없다. 두번째는 좀 더 점잖은 부류이다. 이들은 주로 메타태그(metatag)를 활용한다. 메타태그에 는 인터넷 문서의 기본 확장자(html) 코드내에서 그 페이지가 담는 정보가 위치한다. 예컨 대, 문서 제작자와 갱신일 등과 해당 페이지를 검색할 수 있는 주요 검색어들이 자리한다. 검색엔진에 주로 오르는 단어들, 예를 들어 '섹스' '야사', '공짜', 'mp3' 등의 검색어를 이 메타태그에 넣는다면, 이러한 사이트들의 검색률은 당연히 증가할 것이다. 메타태그의 삐끼란 경쟁자의 키워드를 자신의 메타태그에 심거나, 확률 높은 검색어를 자신의 메타태그에 끼워 넣어 네트 사용자를 끌어들이는 방식이다. 이런 삐끼들에게 걸리면, 사용자는 자신도 모르게 엉뚱한 곳에서 길을 잃고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세 번째 부류로 위장된 상업 광고들을 연결시켜주는 삐끼가 있다. 이것은 주로 포르노 사 이트들에서 볼 수 있는데, 아이콘이나 텍스트 자체의 상징성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트릭을 주로 사용한다. 네트에서 보여주는 아이콘은 기본적으로 소비자와의 인터페이스를 고려하여 제작되기 마련이다. 즉 어떤 아이콘이나 텍스트를 누르면 그 것에 연결된 페이지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대충은 이용자가 알게끔 고려한다. 그런데, 일부 사이트들은 그 연결 페이지의 추측을 무위화한다. 수많은 상업용 웹페이지들은 광고를 전혀 광고라고 눈치챌 수 없는 도 상과 텍스트로 위장하여, 다시 한번 덫을 친다. 마지막으로 한번 온 손님을 기억하는 삐끼들이다. 특정 방문객의 정보를 기억하는 쿠키 (cookies)란 기술은 소비자를 맞춤화하는데 제격이다. 이 기억력 좋은 삐끼들은 이용자에게 형식상 초대받은 손님이란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는데, 결국은 최종 소비까지의 클릭을 단숨 에 유발하기 위한 덫으로 돌변한다. 이처럼 네트의 삐끼들은 사용자가 가는 길을 막거나, 엉뚱한 수렁으로 빠뜨리기도 한다. 재수없으면 못빠져나가게 이들에게 억지로 잡히는 수도 있다. 이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용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정해진 길을 잡아주기도 한다. 상황이 이렇다면, 어쨌거나 네트 의 삐끼들은 인간이 고안한 어떠한 기술보다 사용자와 '인터렉티브'한 듯 하다. 지루한 정보 의 바다를 항해하는데 이만큼 스릴넘치고 완벽한 키잡이가 어디 있겠는가. 정 자신의 자율 신경이 떨어지는 자들은 삐끼들의 뒷꽁무니를 부지런히 쫓을 법하다. (진보넷 2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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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 대학주보] 미국의 정보 패권과 음울한 미래

미국의 정보 패권과 음울한 미래 최근에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가 공동으로 펴낸 {제국}이란 역작을 보면, 제국의 3대 통제력으로 폭탄, 화폐, 정보(ether)를 들고 있다. 역사적으로 폭탄을 통한 힘의 독점이 나 화폐의 규제가 부분적으로만 그 힘을 행사해왔다면, 현재 정보의 영향력은 범지구적이다. 이는 모든 대안적 경로를 억압하고 자본의 힘 아래 전 지구사회를 복속시키는 가공할 힘이 다. 어쨌거나 미국은 이미 이러한 제국의 세 가지 요건을 두루 갖춘 국가다. 저자들의 재미 있는 지적처럼, 미국은 워싱턴(폭탄), 뉴욕(화폐), 로스엔젤레스(정보) 모두를 지니고 있다. 지구화가 미국화와 등치되는 이유에 대한 적절한 지적임에 틀림없다. 제국의 기획은 바깥이 없는 지구 영토의 구상이다. 외부가 없는 공간의 아이디어는 21세 기 정보 패권을 노리는 미국의 아이디어와 일치한다. 미국의 글로벌 정보 초고속도로의 기 획은 이와 맞닿아 있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미국은 일찌감치 '서비스경제모델'을 도입하여, 경제의 정보화를 적극적으로 수행한 나라다. 1930년대에 안토니오 그람시가 {옥중수고}를 정리하면서 예견했던 '미국주의'의 상이 현재 미국이 갖고있는 정보 패권의 힘인지도 모른다. 그람시가 보았던 미국의 모습은, 유럽에 비해 청산할 과거의 기생적 유산들이 적어 자본 축적의 고도화를 빠르게 수행하고, 내부적으로 경제적 '구조'가 상부구조를 더욱 직접적으로 지배하는 단순 합리화된 거대 부르주아 국가였다. 미국이 신경제 이론과 현실을 전세계에 강요하기까지 과거 공장시대의 본원적 축적이 현재에 이르는 바탕이 되었다는 얘기다. 작년 미국 상무부 보고에 따르면 정보기술 분야의 국가간 경쟁력에서 단연 1위는 미국이 었다. 미국의 대외 경제정책 중 전자상거래는 대통령의 필수 과업이었다. 미국에게 정보와 정보망은 전세계의 주권과 국경을 빛으로 무너뜨려 세계시장을 구성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이 지닌 패권의 유지와 확대는 거대 자본에 의한 기술의 독점에서 비롯된다. 지난 수 년 동안 사상 최대의 기록을 세우고 있는 미국내 인수합병은 특히 정보산업에서 크게 두 드러진다. 이처럼 미국은 내부적으로는 고전적인 타자본 흡수를 통해 독점력을 배가하고, 국 제적으로 지적 재산권 등의 국제적인 공인을 외교나 협상 채널 등을 통해 강제화하면서 성 장했다. 물론 미국이 지닌 글로벌 하이테크 독점은 개발국가들에게 미국식 모델을 따르고 따를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글로벌 동원의 기제를 필요로 한다. 일례로 한국과 같은 정보입국의 꿈 을 꾸는 나라에 심어진 벤처기업의 신화는 신경제론을 강화하는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미 국식 자유주의 정신과 시장주의를 적절히 뒤섞어 정보경제를 자본주의의 미래로 추켜세우는 미국의 전략은 개발국들에게 쉽게 먹혀들고 있다. 즉 개발국들에게 이루어지는 새로운 정보 모델의 이식은 미국이 지닌 정보 독점력을 확장하는데 기여한다. 정보의 독점은 코드의 독점이다. 기술적 코드의 독점은 기업간, 국가간 불균등을 영속화한 다. 일단 한 기업에 의한 코드의 독점이 이루어지면 또 다른 관련 코드들도 독점적 기술로 편입되고, 이를 깨기가 힘들어진다. 산업 시대의 자본 독점의 폐해에 비해 정보 독점이 더 심각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미국은 이러한 코드의 독점력을 움켜쥐고 전세계를 새로운 미 국식 자본주의의 비전인 정보경제로 끌어들인다. 이것이 과거 제국주의의 위상과 비교해 새 롭게 달라진 미국이 가진 위험천만한 모습이다.// (경희대 대학주보 11/04/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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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넷] '딴지일보'에 딴지걸고 넘기

'딴지일보'에 딴지걸고 넘기 진보넷 2000.6. 지금으로부터 30여년전, 독일의 한 인문학자, 엔ㅤㅉㅔㄴ스베르거(Hans Magnus Enzensberger) 란 사람이 뉴미디어 시대의 새로운 실천적 전략을 구상한, 아직까지도 미디어 활동가들에게 지침이 되는 유명한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의 글 속에서 전자 미디어의 새로운 가능 성을 점치고 있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꼭 현재 진행하는 인터넷의 기술적 태동을 이미 알고 이에 대비했던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그의 글이 아직까지 살아 숨쉰다는 점이다. 그가 내논 대안 미디어의 실천 명제들이 이제 다시 보더라도 가장 핵심적인 사안을 건드리고 있다. 그 가 보는 뉴미디어의 장점은 탈중심성, 수평성, 상호작용성이고, 이를 통해 뉴미디어의 '해방 적 이용'을 꾀하자고 주장한다. 즉, 그는 뉴미디어의 기술적 혁명성을 통해 이를 대중 동원, 정치적 학습과정, 집합적 생산, 사회의 자율적 통제 등의 도구로 활용하자고 외친다. 요즘 지겹도록 듣는 인터넷의 기술적 장점들이 30년전 그의 글에서 똑같이 예견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뒤에 열거한 뉴미디어의 해방적 이용 방식에 관한 것이다. 기술 적용의 과정을 고려한다면, 어떤 기술의 장점이란 기술 이용의 주체와 무관할 수 없다. 그래서 새로운 기술의 새로운 이용 방식에 대한 대안이 더욱 필요하다. 바로 엔ㅤㅉㅔㄴ 스베르거가 얘기한 뉴미디어의 해방적 이용은 이러한 대안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한다. 그의 문제의식은 개인의 고립, 탈정치화, 전문가 생산주의, 재벌 혹은 관료통제에 맞서기 위한 뉴 미디어 전략이었다. 조회수 수천만을 훨씬 넘는 초유의 인터넷 패러디 신문 <딴지일보>는 엔ㅤㅉㅔㄴ스베르거의 명 제를 감안할 때 이같은 미디어 운동의 새로운 대안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서 있는가? <딴지 일보>의 위상을 그저 '건강한' B급 패러디로 보자면, 실천 운동으로서의 기대 심리가 웃긴 발상이겠으나, <딴지일보> 자체가 이미 'B'급에서 '특'급으로 격상한 상황에서는 뭔가 '딴지'를 걸어보며 평가하는 작업이 필요한 듯 하다. 패러디는 보통 현실, 특히 우리에게는 정치'쇼'에 대한 냉소에서 비롯한다. 거대 권력들, 특히 정부, 언론 등에 대한 패러디는 관객에게 권력에 대한 말로 이루어진 배설과 독설의 헛웃음을 선사한다. 패러디의 치명적 약점은 소재는 다양한데 소구 방식(언어의 B급화)은 동일하다는데 있다. 소구 방식의 동일성은 '관객'을 지치게 만든다. 도저히 '동 원'(mobilization)할 수 없는 '관객'과 함께, 비생산적 패러디의 반복되는 지루함은 의도했건 아니건 정치적 학습을 방해할 수 있다. 실지 <딴지일보>에서 보여주는 패러디의 효과란 다름아닌 언어 형식의 냉소적 비틀림인데, 이를 거세하면 '관객'은 뿔뿔이 사라진다. 어쨌거나 <딴지일보>는 인터넷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름없는 소수가 자신의 미디어 수단을 만들고 자신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관심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글을 기고하고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집합적 생산의 힘을 보여주었다. 다시 말해 언론 재벌의 막강한 유통망을 비집고 힘없는 소수가 자신의 디지털 매체를 통해 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소수 매체적 영향력이 <딴지일보>의 역량 그 자체보다도 그 패러디 소재들에서 근원한다면 문제 가 크다. 거대 권력의 노는 꼴이 정치쇼라면, <딴지일보>가 이 정치쇼 덕분에 스타가 되었 다는 설명도 가능하다. 삶에 지쳐 그 답답함을 풀기 위해 대포집에 거하게 취해 열변을 토 하는 아저씨들이나 손님 올라타자마자 정치 얘기 꺼내는 택시 기사 아저씨들의 풍경이 이 시대 서민의 억압에 대한 상보적인 배설 습관이라면, <딴지일보>에서도 비슷한 동기가 충 분히 감지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맹목의 배설이 되지 않으려면 상호작용하고 이슈화하고 동원하여, 그 힘으로 사회적 통제 를 가능하게 만드는 자율적 상호 '연결'의 힘들이 중요하다. 현실의 실천적 힘이 충원되지 못할 때, 그 매체는 이미 공허하다. <딴지일보>의 운명은 권력의 쇼가 진행되는 한 영원하 다. 우리의 3류 날나리 정치권력 하에서는 제2, 제3의 정치 패러디 사이트가 생길 수 있으 며, 짭짤한 조회수를 계속해서 기록할 수 있다. 그 속에서 패러디의 소위 '건강성'은 다른 집단과 연결하고 관계맺고, 이를 공론화된 힘으로 바꿔내는 노력이 없을 때는 쉬 노쇠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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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종합예술대학원 신문] 0과 1로 본 디지털 문화의 변증법

0과 1로 본 디지털 문화의 변증법 이광석(뉴미디어평론가 CyberMarx.org) 無와 1 수학자인 브라이언 로트먼(Brian Rotman)은 1987년에 쓴 {무의 의미작용: 0의 기호학}에 서 13세기부터 시작된 서구문화를 바라보며 현실에 대해 맺고있는 인간의 관계가 급격히 변 하게되는 세가지 발명을 들고 있다. 그는 '무의 기호'인 0의 사용, 경제적 등가교환을 위해 고안된 '가상' 지폐의 출현, 원근 재현에 있어 소멸점의 이용을 지적한다. 로트먼이 얘기한 이러한 '무'(nothing)의 지표들은 인간에 의해 구성될 상대적이고 인공적인 세계관의 출현을 예고한다. 하이데거는 '무'란 부정과 없음보다는 '존재'(being)의 근원을 설명하는 열린 자원이라고 본다. "무가 존재를 배회한다"는 샤르트르의 유명한 문구 또한 '무'의 생성적 가능태를 보고 있다. 물론 샤르트르는 한발 더 나아가 '무'는 존재를 배회할 뿐만 아니라 존재의 자유로움 을 낳는다고 주장한다. 자유로움이 곧 '무'를 규정하는 힘이라 여긴다. 무는 말끔히 삭제된 상태를 뜻한다기 보다는 존재를 위해 무한히 열려있는 가능태에 가깝다는 논리다. 그렇다면 로트먼이 제기한 인간이 고안한 무의 세가지 추상적 지표들은 인공적이고 상대적인 존재를 위해 무한하고 자유로운 가능성으로 '배회하는' 것들이다. 인간에 의해 비실제적인 것을 현 실화하는 조건인 셈이다. 현대에 이르러 다시 한번 무의 새롭고 강력한 지표가 등장했다. 0이란 무의 숫자에 1을 덧붙임으로써 만들어진 추상의 디지털 조합은 샤르트르가 얘기했던 존재를 위한 배회에 더 해, 자유로운 존재를 위한 혁명적 토대로 등장한다. 디지털은 가상의 존재를 통해 '무'의 자 유로움을 구체화한다. 이제까지 0의 발명이 현실 세계와 인간에 의한 추상적이고 가상적인 고안물 사이의 근본적 분리를 재촉했다면, 0과 1의 결합은 그 분리와 차이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인간이 존재하는 현실과 인간에 의해 투사된 가상간의 경계 자체를 흐리 고 있다. 디지털 무로부터 존재론적 배양이 무수히 일어나고, 현실의 모사물들이 끊임없이 복제되고, 의식의 새로운 상상물들이 현실로 자리잡는다. 0 혹은 1 디지털 시대의 문화는 바로 0이란 가능태 더하기 1의 존재 형식을 가장 자유롭게 드러낼 때 빛을 발한다. 모든 디지털 인공물의 회귀적 단위인 0과 1을 가지고 은유적으로 놀아보면, 0은 디지털의 가능성을 담고 있고, 1은 0을 규정하는 현실적 권력으로 표현할 수 있다. 1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가능태로서의 0은 항상 1에 의해 조건화된다. 1을 배제한 채 디지털 0을 극한으로 밀고 올라가면, 디지털 현실은 이지러진다. 마찬가지 로 1의 논리로 0의 상상력을 억압하면 디지털의 가능성은 출구를 잃는다. 후자는 0의 무한 한 가능성을 외면하거나 용납하지 못하면 발생한다. 현실의 권력을 반영한 1을 극대화하면, 디지털 정보의 가능성을 과거의 잣대로 억압하는 경향이 발생한다. 거대 복제기계인 네트에 서 피어오르는 자생적이고 자율적인 정보공유의 흐름을 지적 재산권 등의 수단을 동원해 통 제하려는 자본의 욕구는 0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는 시도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0 과 1의 디지털 인공물은 김빠진 맥주처럼 생동감을 잃는다. 예술적 표현에 있어서도, 인간의 오감이 시대에 따라 변하면 그것을 담을 새 그릇도 같이 준비하기 마련이다. 디지털 매체의 다양한 표현 양식이 1의 오만과 권위로 천박함의 딱지를 달고 변방만을 전전한다면 그것 또 한 0의 압살에 해당한다. 디지털 예술의 정착도 시장주의에 입각한 주류와 비주류 구분에 놀아나도 똑같은 결과를 얻기는 마찬가지다. 1의 시장 논리에 위장된 가짜 0이 판치기 시작 하는 것이다. 한편, 1을 배제한 0의 무한은 '엽기'로 판명되거나 결국에는 1을 위협하기까지 한다. 소위 디지털 행위 예술가들의 몇몇 작업에서 그 극한적 형태를 발견할 수 있다. 호주 출신의 행 위예술가인 스텔락(Stelarc)은 이미 80년대부터 디지털과 합일되는 신체의 '소멸'을 위한 기 획으로 신체확장 실험을 꾸준히 지속해 왔다. 그의 실험의 최종 목표는 신체에 이식된 기계 가 신체의 명령에 종속되는 단계를 넘어서 기계가 신체의 리듬을 지배하고 하나되는 단계 다. 디지털 0으로만 채워진 극단의 모습은, 신세기 밀레니엄 여성으로 추앙받는 프랑스의 '카날 아트'(carnal art)의 대가 올랑(Orlan)에게서도 관찰된다. 수십차례의 성형 수술을 통해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그녀의 신체 모델은, 비록 대상화된 외모의 가치를 부정하면서 다중적 정체성을 보여주기 위한 작업의 의의를 갖지만 그 궁극적 목표는 스텔락과 마찬가지로 목적없는 신체 소멸관에 귀결한다. 0만을 위한 가능성의 집착은 역으로 그 가능성의 해체만을 부른다. 이들에게 존재하지 않 는 1의 현실적 측면은 정치적 기획의 상실이다. 디지털 기술을 코드화하는, 패권화하는, 그 리고 상품화하는 1의 권력 실체에 대한 의문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이들에게 0의 천국은 물리적 신체의 디지털화를 위해서만 유용하다. 그래서, 1에 의해 조건화된 0의 사회적 구조 를 극단적 0의 실험에서는 좀처럼 찾기 힘들다. 이들의 퍼포먼스에 충격을 먹은 관객들이 구토와 실신을 거듭하는 것은 그 카니발적 면모 때문이기도 하지만, 1이 빠진 0의 과다 주 입에서 생기는 현기증 때문이다. 0+1, 그리고 α 새로운 '무'의 현대적 지표인 0과 1이 초기 디지털 문화로 정착하는데는 이처럼 시장잡배 와 디지털 광신도들이 설치기 마련이다. 새로움과 자유로움을 상징하는 디지털 '무'의 존재 는 문화계의 일부 광신도를 낳고, 이를 현실의 이윤과 권력에 종속시키려는 자본 건달들을 키운다. 그러나, 서서히 디지털 코드의 0과 1은 동전의 양면처럼 조화롭게 공생해야 한다는 관점이 늘고 있다. 사람들은 둘 중 어느 하나라도 억눌리면 문제가 생긴다는 점을 터득하기 시작했다. 0의 새로움과 1의 현실성이 제대로 결합된 디지털 '존재'일수록 완성도가 높다는 당연한 상식을 조금씩 인정하는 것이다. 디지털 문화의 형성과 적용에 주체적으로 개입하는 움직임이 관찰된다. 크리티칼 아트 앙 상블(Critical Art Ensemble)의 기획도 그 중 대표적 사례로 들 수 있다. 앙상블은 1986년 여섯 명이 모여 결성한 미디어 예술 창작집단이다. 그룹 내에서 각각은 자신이 지닌 독특한 능력들, 퍼포먼스, 북 아트, 그래픽 디자인, 컴퓨터 아트, 필름/비디오, 텍스트 아트, 사진, 그리고 저술 활동 등을 펼치고 있다. 앙상블은 예술적 수단을 청중의 성향과 그 특수한 상황 에 맞춰 선택하고 창작 작업에 들어간다. 창작물을 만드는 매체 수단에 중심을 두기보다, 특 수한 문화적 상황이나 맥락을 중시한다. 매체는 말하고자 의도한 토픽과 상황/맥락을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 유용하다. 장소에 있어서도 화랑, 박물관, 라디오, 텔레비전, 페스티발, 클 럽, 술집, 인터넷, 길거리 등 예술적 표현이 극대화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리지 않는다. 이들은 단지 예술가들의 모임이라기보다는 폭넓은 학제간 연구의 실험 집단과 같다. CAE 는 예술, 테크놀러지, 비판이론, 정치적 행동주의가 서로 삼투하는 접점을 찾고자 한다. 예술을 정해진 경계안에 가두는 행위는 폭넓은 지식 체계의 접근권을 스스로 막는 행위라 본다.이러한 운동을 수행하는 근거는 기본적으로 서구문화에 깊게 가로놓인 권위주의적 토대들을 드러내고 이에 도전하려는데 있다. 특히 앙상블은 저항 정신을 중심에 놓고 사고한다. 하지만 과거에 있었던 혁명처럼 일시에 권력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환상도 거부한다. 현대 권력은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는 총체화된 힘이라고 본다. 이들에게 혁명은 죽은 아이디어다. 설사 혁명이 일어나더라도 일상화된 문화에 각인된 권력의 흔적들은 제거할 수 없다고 본다. 그래서 앙상블이 취하는 저항은 영구적이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권력의 다양한 층위와 형태 들을 계속해서 뒤집고 조롱하고 비판하는 작업을 끝없이 벌여나갈 수밖에 없다. 차츰 권력 으로부터 벗어난 자율의 영역을 개척해서 세워나가는 것이 그들의 예술적 목표이다. 앙상블이 '무' 혹은 디지털 0의 가능성을 취하는 방식은 이렇듯 디지털 1의 조건을 고려하 면서 이루어진다. 예술적 시연에 있어서 거의 모든 매체들을 이용하는 것과 학제간 영역을 넘나드는 것은 0의 생성적 가능성이다. 매체의 다양성뿐만 아니라 창작의 각종 장소들 또한 원하는 결과를 얻기위해 고려되는 선택 범주다. 다시 이들에게 0은 1로 현실적 의미를 얻는 다. 인터넷 시대의 저항 전술에 대한 그들의 기획 저술들과 실천의 고민을 통해 새롭게 변 화된 전자적 저항의 다양한 층위를 구체화하고 있다. 0의 극단을 타면서도 1의 현실감을 결 합하는 앙상블의 집단 창작 속에서 디지털 문화의 변증값, 알파가 엿보인다. 이제까지 디지 털 문화에서 0과 1의 관계는 서로 서먹서먹하거나 각기 평행선을 달렸다면, 이를 가로지르 는 방법을 앙상블과 같은 디지털 시대의 아방가르드로부터 배울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국예술종합학교 200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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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오늘] 거대언론 후원의 FCC

거대언론 후원의 FCC 이광석(뉴미디어 평론가) 다음달 2일 표결 결과에 따라 미 연방통신위원회(FCC)의 각종 언론 독점 규제안들이 일 거에 풀려나갈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것도 부시 행정부와 FCC의 공화당계열 위원들이 사 려깊은 논의없이 표결을 속전속결로 밀어부칠 태세여서 여론의 비난이 더욱 가중되고 있다. 이제까지 공식 공청회라곤 단 한번 열렸고, 9건의 임시 공청회마저 FCC 위원장 마이클 파 월이 불참한 반쪽으로 치뤄졌던 터였다. 자연히 이번 표결에 대한 우려와 반대의 목소리가 거세다. 언론 관련 연구단체들이 FCC 에 보낸 18,000여건의 의견서들 중 거의 대부분인 97% 정도가 기업 집중을 막아야한다고 주장한다. 여러 시민단체들과 3백여 학계 인사들, 그리고 가수들까지 언론 독점을 가속화할 이번 표결에 분노해 서명 작업에 나섰다. 1백여명의 국회 하원의원들은 예정된 표결을 한달 뒤로 미뤄 신중하게 언론 규제안을 검토할 것을 촉구했다. 시장 집중에 대한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역시 파월이 꿈꾸는 약육강식의 시장 신념은 끄떡없다. 지난 2월에 '언론발전기획'(Project for Excellence in Journalism)에서 내논 보고서가 5년간 기업군별로 뉴스를 비교 분석, 언론 독점의 해악을 구체적으로 밝혀 여론의 큰 지지를 이끌었지만(<미디어오늘> 2003년 3월 6일자.), 여전히 파월의 독점 옹호론을 흔들기엔 역부족이다. 예상대로 2일 표결은 파월의 의도대로 갈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파월에 다시 악재가 생겼다. 그를 비롯해 FCC의 도덕성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됐 다. 최근 '공공성 보전 연구소'(The Center for Public Integrity)라는 미디어 연구단체는 3년간에 걸쳐 FCC 핵심 직원들의 외유 자금 조사 과정을 수행한 보고서 (www.openairwaves.org)를 펴냈다. 보고서는 FCC 직원들이 지난 8년간(1995. 5월부터 2003 월 2월까지) 각종 행사 명목으로 받은 외유성 자금 지원이 200만 달러 정도의 국가 지원금 을 빼면 도합 280만 달러며, 그 출처가 대개 정보통신기업과 언론 기업들의 주머니로부터 나왔다고 적고 있다. 여러 차례 언론 시민단체들에 의해 FCC와 대기업들의 밀월 관계가 지 적됐지만, 이번 보고서는 외유 경비, 행선지, 방문 횟수, 수뢰자 명단, 후원 단체나 지원 자 금 액수 등 그 규모가 대단히 구체적이고 최신 것이라 그 신빙성을 더 높이고 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직원들은 지난 8년간 총 2,500건의 외유를 다녀왔고, 가장 즐겨찾는 행 선지로 330회를 기록한 라스베가스, 그리고 뉴올리언스, 뉴욕, 런던 순으로 나타났다. 44회의 외유를 기록한 파월은 기업들로부터 역대 위원장 중 가장 큰 접대를 받은 것으로 기록된다. 한편 '전국방송협회'는 206명의 FCC 직원들에게 191,472 달러의 여행 경비를 조달해 가장 큰 자금줄로 드러났다. 재밌게도 이 단체는 지난 수개월간 현행 소유권 제한 규정을 풀려고 무던히도 애쓰던 중이었다. FCC의 핵심 직원들이 이렇듯 기업들과 '푸근하고 돈독한' 관계를 맺으면 정책이 올바를 리 없다. 기업의 돈을 덥석 물어 쉽게 흥청거리는 국가 공무원들의 도덕 불감증도 문제지만, 이로 인해 이들이 각종 향응성 외유를 통해 기업가들과 주로 만남으로써 눈과 귀가 쉽게 멀 어 다른 재야 의견들이 비집고 들어설 틈이 없다면 문제는 더 근본적이다. 그러다보니 FCC 가 기업들이 만들어낸 언론 독점 홍보용 자료나 보고서 등을 그대로 비판없이 정책용 자료 로 차용하는 우를 쉽게 범해왔다. 이번 표결에서 "FCC가 공정하고 독립적인 판단을 하리라고 본다면 개가 웃을 일이다". 이번 보고서를 만든 연구소의 찰스 루이스(Charles Lewis) 소장이 내뱉은 독설이다. FCC와 독점 언론간의 내연 관계가 폭로됐음에도 파월은 또 한번 외부 비판에 의연하다. 하지만, 독 점 강화에 대한 각계각층의 비판과 연대에 그토록 보수적인 전국총기협회까지 가세한 분위 기를 따져 보면, 이제까지 힘을 쓰던 파월의 독단도 그리 쉽게 가거나 오래갈 것 같진 않아 보인다. (미디어오늘 2003.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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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오늘] '폭스 효과'와 미 언론의 보수 우익화

'폭스 효과'와 미 언론의 보수 우익화 이광석(뉴미디어 평론가) 미 언론에 보수 우익의 칼바람이 분다. 이라크 방송에 출연한 까닭으로 NBC에서 쫓겨난 피터 아넷이야 그의 유명세 덕으로 언론의 주목을 끈 경우다. 얼마전 <샌프란시스코 크로니 클> 일간지는 이라크 침략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는 명목으로 소속 칼럼리스트를 가차없이 잘라냈다. 미 정부의 외교 정책을 나치 독일에 비유했다는 이유로 CBS 방송사는 소속 피디 를 길거리로 내쫓았다. 멋모르고 반전 기사를 썼던 지방지 기자들의 해고 행렬도 여기저기 줄을 잇는다. 이들의 정확한 해고 사유는 애국에 취한 독자와 시청자의 흥분 유발죄다. 미 전역의 거의 모든 라디오 상업 방송을 틀어쥔 언론 재벌 클리어(Clear) 채널은 이라크 침략과 동시에 반전 무드를 조장하는 음악 모두를 자진 일소됐다. 한 유명 컨츄리 여성 3인 조는 겁없이 부시를 비판해 클리어의 모든 방송에서 자신들의 음악이 사라지는 수모를 겪어 야 했다. 참다못해 영국 BBC 방송의 그렉 다이크 사장은 어떻게 이처럼 미 주류 언론들이 애국주의의 "성조기 속에 꼭꼭 싸일" 수 있는 지 경악했다고 밝혔다. "언론의 이데올로기적 다양성 면에서 보자면, 지금보다 소비에트 스탈린 시절이 훨씬 낫 다"라는 냉소가 터져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라디오와 방송은 완전 보수화의 진지가 됐고, 신 문은 거대 언론사들 중심으로 상당 수준까지 오염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무엇이 이렇듯 미 언론의 보수화를 급격하게 가져오고 그나마 존재하던 자유주의적 시각을 후미진 곳으로 밀 어내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루퍼드 머독이 이끄는 거대 보수 언론의 공이 크다는 지적이 일 리 있다. 91년 이라크 침략 때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케이블 방송 <폭스 뉴스채널>은 9-11 동시다 발테러 이후 급격하게 시청률을 늘리며 이번 2차 침략에서 뉴스 경쟁사 CNN과 MSNBC를 한참 따돌렸다. 머독은 케이블 뉴스의 선두 장악과 함께 자신의 일간지 <뉴욕포스트>와 주 간지 <위클리 스탠다드> 등 골수 우익 매체를 한목소리로 이끌며 이번 침략 전쟁의 당위성 을 진두 지휘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AOL 타임워너의 부회장 테드 터너가 "머독은 전 쟁 미치광이"란 쓴소리까지 한 정황이 십분 이해가 간다. 더 큰 문제는 폭스가 안팎으로 우익 이데올로기를 세포 분열하는데 있다. 이것이 이른바 새롭게 우려할만한 미 언론의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는 '폭스 효과'다. 전쟁의 놀자리를 마련 해준 미 매파의 공조가 후광이 되고, 폭스는 애국주의로 자신의 매체를 적극 선전 도구화하 고, 다시 여러 경쟁 매체들은 폭스를 따라잡고 배우려는 모방 심리에 이끌림으로써 폭스는 보수 논리를 확대 재생산하는 숙주로 자리잡는다. 일례로, 전쟁내내 MSNBC는 폭스의 애국 주의에 의한 상업적 성공에 감격해 폭스를 모방하는 폭스 효과에 철저히 감염된 모습을 보 였다. 폭스 효과는 보도의 윤리도 퇴색시킨다. 잣대는 공정과 객관이 아니라 국익과 애국이다. '우리', '해방'등의 수식어를 남발하고, 성조기를 늘상 텔레비전 화면에 드리우고, 때아닌 늘씬한 외모의 통신원들이 피로 얼룩진 사막에서 미군의 승전보를 전하고, 정말 찾기도 힘든 골수 우익 정객들을 한자리에 불러들여 스튜디오를 이들의 성토장으로 만들던 폭스의 보도 태도가 타 언론사들에 오염되고 학습된다. 미디어 평론가 에릭 앨터만(Eric Alterman)은 그의 새 책 <리버럴 미디어라고?>(What Liberal Media?)에서 보수 극단의 길에 들어선 우익 언론과 논객들에 신랄한 비판을 해 언 론계 내부의 보수-혁신간 이념 논쟁을 이끌고 있다. 앨터만은 골수 우익들이 미 언론의 자 유주의 분위기를 경계하고 비난하지만, 실상 공화당계 극우 보수들이 거대 자본력을 이용해 거의 모든 미국의 주요 매체들을 장악함으로써 좌파는 고사하고 자유주의자들이 마땅히 설 땅조차 사라졌다고 본다. 그의 판단에 의거하면 필자가 보기에 미 언론은 순도 99.9% 보수다. 더구나 폭스 효과의 자가 증식 능력에다 또 다른 침략을 준비중인 매파의 차기 행보를 따져보면 그마저 남은 0.1%의 리버럴한 희석 성분마저 극우 매체들의 위세에 눌릴 처지다. 온통 천지가 폭스들이 다. (미디어오늘 2003.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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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오늘] '임베드'? 동행취재 혹은 동거취재

'임베드'? 동행취재 혹은 동거취재 이광석(뉴미디어 평론가)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명분을 쌓는데 거대 언론사들의 노고가 지나칠 정도다. 이라크 침 략이 시작되자 거의 모든 매체가 전쟁반대의 목소리를 지면과 화면에서 일제히 제거했다. 신문에선 단 몇 줄의 개별 기사나 일부 외부 기고문에만 반전의 목소리가 겨우 유지되는 형 편이다. 미친 극우 매파의 희생양들이 곳곳에서 피흘리며 비명을 지르건만 텔레비전 화면을 채우는 건 첨단 살인 병기들의 시뮬레이션과 황량한 사막에서 분주한 미국 군인들 모습뿐이 다. 이라크쪽에 붙잡힌 미군 포로들에 '제네바협정'을 들먹이며 인권을 부르짖던 언론들이 이라크의 민간 방송사 건물을 한번에 날려버린 미군의 '전쟁 범죄' 행위는 애써 눈감는다. 미 국방부가 마련한 종군기자들의 동행취재 프로그램 '임베드'(embed)는 전쟁의 실상을 알리는데 더욱 무심하다. 임베드는 기자들을 스포츠 중개 아나운서 수준으로 만들었다. 민간 인들의 살상 등 전쟁의 잔악함을 알리는 임무는 온데간데 없고, 마치 큰 스포츠 행사를 취 재나와 경기를 마친 선수들을 인터뷰하듯 군인들의 시시콜콜한 감상문 받기에 분주하다. "사상 최초 연합군 부대 동행 취재"라며 으스대는 우리 선택받은 몇몇 언론들의 취재 행태 는 미 언론들이 국방부와 맺은 '동거' 수준을 넘어 한술 더 뜬다. 그러다보니 임베드가 선의 의 미 국방부 동행취재 프로그램으로 보이기 보단 사실상 민간인 참상으로보터 전세계 언론 을 멀리 떼어놓으려는 꼼수로 보일 수밖에 없다. 이미 이라크 침략 전에도 언론과 미 정부의 동거 수준은 심각했다. 언론기사 전문 검색 회사인 '넥시스'(Nexis)가 올 연초부터 3월 중순까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동안 공중파 3 사 ABC, CBS, NBC의 뉴스 프로그램들은 미국 공격이 몰고올 민간인 참상과 피해를 심각 하게 보도하지 않았다. 그보단 첨단 살상무기들의 '정확성'을 신뢰하는 기사들이 줄을 잇는 다. 전시에 앞서 공중파 뉴스들이 "정부의 확성기" 노릇을 했다는 한 언론 시민단체의 평가 가 그리 낯설지 않다. 전쟁 전의 확성기가 이제 국방부의 부름을 받아 전시 동거 취재의 외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침략의 명분이 너무나도 궁해서일까? 91년에 이어 이번 걸프전 작전명이 "이라크 자유"란 다. 한 아랍권 언론의 사설은 "미국과 영국은 살육으로 이라크를 해방"한다고 한탄한다. 칼 로 도려내듯 자로 오차없이 재어 터뜨린다는 첨단의 폭탄이 눈이 멀어 같은 편을 죽이고 이 라크 양민들의 저자 거리와 마을을 피로 물들인다. 뇌가 날아가 머리가 빈껍질처럼 우그러 진 한 이라크 아이의 처참한 몰골은 임베드 내부에선 죽었다 깨나도 기사화되긴 힘들다. 이번 전시 언론처럼 철저하게 피의 현장을 의도적으로 외면했던 적이 없었노라는 일부 양 심있는 언론인들의 개탄이 점점 늘고 있다. 이같은 언론의 무책임한 방관에 임베드가 크게 일조하고 있는 셈이다. 전쟁 게임에 부지런히 임하는 초정예 아군들의 꽁무니만 연일 쫓아 다니느라 힘이 부치도록 만들어놨으니 어찌 소소한 양민 학살의 현장까지 둘러볼 여력이 있 겠는가. (미디어오늘 2003.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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