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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커 칼럼] 9-11 이후: '1984'의 현실

9-11 이후: '1984'의 현실 이광석 / 네트워크 편집위원 9-11 동시다발 테러 이후 미 우익 매파들은 '빅브라더'로 둔갑했다. 타국민에겐 제국의 무력과 폭탄을 들이대고, 자국의 시민들에겐 온갖 감시의 제도와 기술로 옥죈다. 절차상의 민주주의를 갖추고 합리성이 통한다는 미국 사회에서 이젠 시민에 대한 국가 폭력이 일상으로 벌어진다. '경찰 국가'로서의 면모는 지난 5월말 의회에 제출된 사법부의 반테러 목적의 활동 보고서와 국방부의 감시기술에 대한 해명 보고서를 통해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9-11 이후 시민 감시를 상시화할 명분으로 만들어졌던 '애국자법'은, 4,500건의 무분별한 테러 파일들을 만들었고, 혐의만으로 50건에다 불법 체류자의 경우 762명의 물적 증거없는 강제 구금, 수백건의 영장 발부없는 압수 수색, 그리고 50여개 도서관들의 도서 대출기록 임의 조사 등에 악용됐다. 이는 사법부가 순순히 밝힌 공식 수치만 따졌을 때다. 9-11은 자본의 이권과 짝패를 맞춘 여러 감시 기술과 시스템이 국가 보안의 핵심으로 나서는 계기도 됐다. 대표적으로 국방부의 '종합 정보인지'(TIA) 체계는 미국 시민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거대 통제 기술로 아직도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패턴 인식 프로그램은 시민들 개개인의 신상 기록과 거래 내역들을 수집해 한데 모아 분석해 잠재적 위협 요인을 미리 막겠다는 야심찬 구상을 세우고 있다. 너무나 노골적인 정보 오남용과 인권 침해의 소지가 뻔히 보여서인지, 지금에 와선 '테러분자 정보인지'로 이름을 바꿔 단 채 활보하고 있다. 그 아류도 줄줄이 나온다. 바깥 세계의 '이방인'이 미국 영토를 밟으려면 여행객 감시 체계인 '비지트'(VISIT) 시스템의 검증을 거쳐야 한다. 유학생과 교환 방문객은 미국에 체류중인 이방인들을 사찰하기 위해 만들어진 '세비스'(SEVIS) 시스템에 등록·관리 받아야 한다. TIA의 일환으로 구상중인 '사전적격심사시스템'(CAPPS II)은 비행기 탐승객들의 신원 조회용 프로그램으로 개발되고 있다. 이에 수시로 벌어지는 인터넷 감청, 위성을 이용한 무선 감청, 바이오 신원 감지 기술 등을 덧붙여 보면, 부시행정부가 원하는 시민 통제욕의 끝이 가늠조차 힘들다. 노골적인 국가의 감시와 폭력에도 군말없이 순종하는 미국 시민들의 정서는 이를 묵인하는 가장 큰 악재다. 극단의 애국주의에 취해 하루아침에 동강난 자신들의 인권을 치유하거나 수습하려는 기미란 처음부터 없다. 국가가 나서 밖으론 수시로 적을 만들어 준전시 국가관리 체제를 꾀하고, 안에선 테러에 대한 심리적 두려움과 공포를 끊임없이 유포하여 감시와 통제의 명분을 쌓은 까닭이다. 자신의 신상 정보가 국가에 의해 늘 관리되고 감시의 족쇄를 차야한다는 사실을 하루속히 깨닫거나 분노조차 못한다면, 그 사회는 조지 오웰의 '1984년'에 멈춰 있는 꼴이다. (<네트워커> 2003. 7.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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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육] 서평: 우리는 '자유의 새로운 공간'을 원한다!

<자유의 새로운 공간 (갈무리)> 서평 - 이광석 우리는 '자유의 새로운 공간'을 원한다! 우리교육(99년 1월호 게재) 9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도 운동의 차원과 지향에 변화가 일고 있다. 운동의 역사적이고 정세적인 쇠퇴가 모순을 혁파하고자 하는 실천적 인간 본성을 사그러지게 할 수 없듯이,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이 일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새로운 물결의 파장은 이탈리아의 아우토노미아(autonomia) 운동과 프랑스의 1968년 5월혁명에 개입했던 신좌파들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아우토노미아의 가장 널리 알려진 이론가인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와 프랑스 신좌파 운동가들 중 가장 실천적인 인물로 평가받는 펠릭스 가따리(Felix Guattari)의 공저인 {자유의 새로운 공간}은, 바로 이 거대한 파장을 일으켰던 핵심적인 동인이다. 이탈리아에서 시작한 아우토노미아 운동은 1950년대말에서 70년대말까지 학생, 여성, 인종, 동성애 등의 부문운동이자 비정당적 소수집단의 자율적 저항 운동을 가리킨다. 실지 가따리도 아우토노미아 운동의 일환이었던 독립 라디오운동에 가담하였고, 귀국후 파리에서 '라디오 93'의 운영을 돕기도 했다. 정치적으로 그는 단일체적 정치 정당을 신사회운동의 참여민주주의에 기반한 '욕망의 미시정치'로 대체하기를 고대했다. 이렇게 본다면 그들은 인식 기반과 정치적 관점 모두에서 공유된 정서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역사적으로 68년 프랑스에 일어난 5월혁명은 그들에게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시발점이 된다. 이들이 새로운 근거는 기존 좌파들의 노동계급 중심, 거시정치 중심, 대중과 전위의 이분법, 중앙집중적 조직형, 단일의 분파적 기획 등을 거부하는데 있다. 이들은 5월혁명을 통해 사회적으로 다양한 소수자들(학생/여성/환경/동성애/인종/문화운동)의 주체적 '욕망'에 직접 노출됨으로써, 자본/사회주의 공히 개인과 소수를 억압하는 기제였다고 주장한다. 이제까지 양체제의 초월적 권력은 모두 개인/사회, 사적/공적, 가족/국가, 여자/남자, 하위/상위 등 단순화된 이원론의 위계적인 대립구도를 통해 대중의 순응을 강요했다고 본다. 그래서 그들은 복수적인 것에 대비된 '단수적'(singular)이고, 몰적인(molar) 것에 대비되는 '분자적'(molecular) 욕망이 자유롭게 발현되는 커뮤니케이션 투쟁을 선택한다. 단수적이고 분자적인 투쟁이란 주체의 이질적이고 고유한 특질을 상실하지 않는 자율적 과정이다. 이들은 새로운 자율적 주체들의 목소리를 담은 정치적 실험 속에서 위계적이고 초월적인 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감지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통일되고 고정된 이미지로 정형화할 수 없는 것들의 분출을 통해 진정한 저항의 가능성을 찾아보려 한다. 문제는 각각의 분출된 욕망들을 어떻게 연합하고 조직화할 것이냐이다. 이 말은 곧 소수적인 것을 분자적 그물망으로 어떻게 정치 세력화할 것인가의 질문이다. 물론 이들에게 전제는 전통적으로 실천적 운동의 폐해였던 동질성이나 위계적/양가적 가치에 의해 억압되는 조직적 조건은 철저히 배제한다는 것이다. 가따리와 네그리의 경우에는 과거의 노동자 중심주의적 담론을 버리면서, 새로운 연합의 가능성을 노동계급, 제 3의 생산부문들, 모든 유형의 주변화된 소수집단들의 연합을 통한 운동과 저항의 구성적 과정으로 언급하고 있다. 즉 "진정한 문제는 동일화의 체계를 창안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주체적 세력들을 차이의 그물망으로 연결하는 과정 속에서, 그리고 동시에 자본주의적 권력의 여러 블록들을 파괴하는 과정 속에서 존재하는 모든 사회적 세력들의 다가적 참여의 체계를 창안하는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각각의 운동체들이 이행의 동일한 프로젝트를―사회주의 이건 공산주의이건―향해 가기보다는, "반체제적 담론 배열들의 초한적(超限的) 연결망"을 통한 "직접적 투쟁의 경험만이 그것들의 윤곽을 결정할 것"이라 본다. 결국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대안적인 사회의 청사진을 구상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과정적이고 복수적이고 풍부한 해방적 프로젝트를 끊임없이 발현하고, 이를 분자적으로 연결하는 '새로운 생산적 협력'의 운동이다. 한국 사회에도 이미 통신 동호회, 마니아들, 동성애자 모임, 언더그라운드밴드 등 과거에 볼 수 없었던 소수의 문화 주체들이 권력의 경계와 여백을 따라 '자유의 새로운 공간'들을 만들어나가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이전에는 억압되어 있었던 각 개인들의 창조적 에너지의 잠재력이 단수적이고 자율적인 방식으로 분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들이 과연 새로운 정치적 대안 세력이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일단 보류하기로 하자.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 책의 필자들이 지적하듯, "집단적 잠재력은 단수적인 것이 자유롭게 될 때에만 비로소 실현될 수" 있으며, 자유의 새로운 형식은 이 속에서 마련된다는데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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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가상현실의 커뮤니케이션 응용

By Frank Biocca & Mark R. Levy, Communication in the age of virtual reality (1995) 가상현실의 커뮤니케이션 응용 (이광석 옮김) 가상현실의 최종 지향점은 다목적 커뮤니케이션 매체 - 감각 주위를 섬세하게 둘러싼 텔레비전과 전화의 결합체 - 일 것이다. 나사의 과학자인 스티븐 엘리스 (Steven Ellis, 1991a, p. 321) 조차도 "가상 환경이...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라는 점"을 인정한다. 가상현실 입문서들 대개가 커뮤니케이션 미디어 역사에 있어서 가상현실은 필연적인 다음 단계로 묘사하고 있다. (예를 들어 Hamit, 1993; Rheingold, 1991). 델피 Delphi 패널 조사를 한 결과, 기술의 성숙기에는 가상현실의 커뮤니케이션 응용이 시장의 60%이상을 차지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Miller, Walker, & Rupnow, 1992). 그런데 가상현실의 커뮤니케이션 응용이란 무엇인가? 혹자는 가상현실의 모든 응용 부문이 커뮤니케이션 응용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몇 가지 측면에서는 이러한 주장이 유효하다. 결국 그렇다면 응용의 전 부문은 인간-기계간 커뮤니케이션과 인간대 인간 커뮤니케이션을 포함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마도 보다 국한된 질문을 해야 할 것이다. 전통적인 오락, 뉴스와 정보, 텔레커뮤니케이션 영역에서 가상현실 응용이란 무엇인가? 그 응용은 어떤 형태를 띨 것인가? 그 응용은 어떠한 밑그림을 제시할 것인가? 도입부의 장들에서 지적했던 바처럼, 1990년대 중반은 커뮤니케이션과 컴퓨터 산업의 급격한 변화로 가득찬 때이다. 가상현실의 응용은 이처럼 부글부글 끓는 냄비 속의 활동 가운데에서 형성되고 있다. 이 장에서 우리는 가장 유효한 증거를 이용하여 몇 가지 중요한 가상현실의 커뮤니케이션 응용에 대해 그 대강을 제시하고 있다. 시장의 출현 미국내 커뮤니케이션 기술과 서비스 지출액은 "커뮤니케이션"에 포함한 내역인 7조 달러에서 11조 달러에 이른다. 또한 세 가지 경향성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보다 확대된 상호연결, 커뮤니케이션 지점간의 보다 확대된 정보대역, 그리고 사용자와 인터페이스 사이의 보다 확대된 정보대역, 이 세 가지 경향으로 시장은 점점 확장하고 있다. 첫 번째 경향, 즉 보다 확대된 상호연결은 언제부터인가 계속 진행되어 왔다. 예컨대 지난 10여년간 케이블 텔레비전은 미국 내 300%의 가입 비율로 증가했으며, 결국 미국 가정의 대다수가 시청하게 되었다.(미 상무부, 1992). 한편 커뮤니케이션 확장의 증거는 과거 컴퓨터 업계의 활동을 지켜봄으로써 관찰할 수 있다. 소프트웨어 발매업자 협회에 따르면, 1992년에 오락용 소프트웨어의 수입은 29%가, 교육용 소프트웨어의 수입은 47%가 증가했다고 밝혔다. (Gilder, 1993). 동시에 모뎀이 장착된 컴퓨터 판매고는 1,000%라는 놀랄만한 성장을 보였고, 인터넷은 매달 15%의 놀랄만한 성장률을 보이면서 급격히 발전했다. 단지 이는 시작일 뿐이다. 일반 대중의 단지 소수만이 진정으로 이 커뮤니케이션 팽창을 접촉하였다. 반면에 미국의 거의 모든 가정은 텔레비전 (98%)을 보유하고 있는데, 그 가정의 40% 미만이 개인용 컴퓨터를 소유한다. 매개 커뮤니케이션과 관련한 이 모든 성장이 어디로 갈 것인가? 커뮤니케이션 인터페이스의 변화만을 고려해 보자. 어떤 미디어 환경에서는 대개 지배적인 하나의 커뮤니케이션 매체 (인터페이스), 즉 우리가 세계를 보고 의사소통하는 방법을 가장 강력하게 형성하는 매체가 존재한다. 20세기의 신문, 라디오, 그리고 텔레비전 각각은 정상에 이르렀고 천천히 지배력을 잃었는데, 이러한 각 새로운 매체의 상승과 하강 주기는 매우 빨라졌다. (Shaw, 1991). 미디어 기술의 발전은 가상현실이 다음 세기의 주도적 커뮤니케이션 매체로 부상할 것이라는 점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의 몇몇 장들(1장 Biocca, Kim, & Levy의 논문; 3장 Steuer의 논문)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미디어의 역사는 각각의 채널에다 증가된 감각의 현실감을 부여하여 감각전달 통로에 더욱 많은 정보를 전달하는 인터페이스의 역사이다. 어떤 점에서는 커뮤니케이션 서비스의 성장에 있어서, 결국 우리는 몰입 가능한 가상현실의 형태가 일반적이고, 가정과 사무실에 기초한 커뮤니케이션 인터페이스가 될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일반적 커뮤니케이션 인터페이스에 의해, 우리는 대인간 텔레커뮤니케이션, 정보 검색, 그리고 정보 창작에 이용되는 인터페이스, - 일종의 전화, 텔레비전, 그리고 퍼스널 컴퓨터 융합 - 즉 오랫동안 기다렸던 메타매체를 계획한다. (Kay & Goldberg, 1977). 마침내 인터액티브 멀티미디어 시스템은 최초로 국내의 각 가정에 도달하고 있다. 이 멀티미디어 시스템은 가상현실 지향의 입·출력 장치와 결합하면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예컨대 윈도우형의 그리고 입체의 디스플레이가 이미 시장에서 적정한 가격으로 보급되고 있다. (예를 들어 심사라빔 시스템스 Simsalabim Systems, 스테레오그래픽스 Stereographics, 브이렉스 VREX). 일반 가정에서 언제 가정형 리얼리티 엔진을 가지게 될 것인가? 가상현실 기술의 정확한 유형과 확산 정도는 아직 예측하기 어렵고 불확실하다. (11장, Valenti & Biardini를 참조). 하지만 몇 가지 유형이 나타나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간에 이미 컴퓨터 게임회사들은 로우엔드 low-end 시스템과 더불어 가정에 근거한 네트워크 계획을 발표했다. 가상현실의 시장 형태가 출현하기 시작했다. 90년대 중반경에는 아직까지 가상현실의 커뮤니케이션 응용 분야의 시장은 상대적으로 그 규모가 작았다. 1993년에 가상현실의 전 시장 규모는 1억 1천만 달러가 못되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Latta, 1993). 혹자는 1997년에 이르러 규모가 5억 5천만 달러로 커지면서 그 시장이 서서히 성장할 것이라 믿는다. 다른 혹자는 가상현실의 기술과 서비스에 대한 요구가 보다 빠른 비율로 성장할 것이라 여긴다. 하지만 대부분의 분석가들은 가상현실의 확산이 커뮤니케이션 응용 분야, 특히 오락적 응용에 의해 추동될 것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가상현실과 놀기 가상현실의 오락 응용이 수위를 차지한다면, 우리는 오락의 궁전, 즉 배치 장소형 오락산업 복합체에서 가상현실을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배치 장소형 시장은, 예컨대 디즈니 월드, 라스 베가스, 그리고 다양한 국제 엑스포 등의 국내와 범지역을 포괄하는 오락 복합체들에서의 하이엔드 high-end 오락 체험을 포괄하고 있다. 이들 센터는 소비자가 접근할 수 있고, 다중감각적인 오락 체험을 생산해낸다. 과거에는 다중감각 체험은 수동형, 운전형 시뮬레이터로 이루어졌다. 수동형 시뮬레이터는 360도의 대형 스크린, 혹은 시각 정보를 담은 3차원 필름, 그리고 동작 기구대를 동시화한 고음질의 오디오를 이용한다. 100명중 40명은 거의 10분 이상 지속되는 그 짜릿한 체험으로 들어간다. 매 해 3백만명 중 50만 정도의 사람들은 이러한 여러가지 시뮬레이터를 경험한다. 그 전통적 예로는 1987년에 개장한 디즈니사의 스타 여행이 있다. (6장, Hawkins를 참조). 이 커뮤니케이션 산업 부문은 가상현실의 커뮤니케이션 응용을 소개하는데 적절한 역할을 하는데, 이는 자연스럽게 일치한다. 여기에 해당하는 기업들은 가상현실 기술을 이용하여 놀랄만한 감각 체험을 제공한다. 이들을 약간만 열거하면 휴즈 Hughes, 스펙트럼-홀로바이트 Spectrum-Holobyte, 이웍스 Iwerks와 같은 기업이 있다. 이들 기업은 값비싼 가상현실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는 자본과 기술, 그리고 이 시스템에서 이익을 낼 수 있도록 하는 환경 모두를 갖출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한다. 테마 파크의 가상현실 체험이 미국, 캐나다, 일본의 테마 파크에서 발전하고 있다는 점은 그 지표일 수 있다. (이 책 Hawkins를 참조). 이들 장소에서의 오락은 보다 복잡한 내용을 지닌 체험으로 숙성하여 발전할 것이다. (8장, Meyer 참조). 배치 장소형 오락은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최초로 하이엔드 가상현실 체험을 할 수 있는 장소이다. 가상현실 오락은 주요 여행 장소의 신기함뿐만 아니라 되풀이할 수 있는 체험이 필요하다. 최초 가상현실의 소비자형 응용은 배치 장소형 오락 산업의 저-중범위에 해당하는 부문에서 출현했다. 이들 부문에는 지역의 오락 센터와 대규모 쇼핑몰의 복합건물을 포함한다. 버츄얼 월즈사 Virtual Worlds Inc.의 배틀텍과 버츄어리티 Virtuality의 다양한 게임은 가상현실의 상호작용 개념을 그들 오락에 결합한 최초의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Hamit, 1993; 이 책의 Hawkins; 소비자 반응에 대해서는 이 책 Heeter 참조). 이 시스템하에서 이용자는 운전형 가상현실이나 머리에 쓰는 디스플레이를 통해 몰입한다. 이용자는 네트워크화된 가상현실 시스템 내부의 3차원 세계에서 무제한의 자유를 누린다. 이 시스템에서 이용자는 전투, 탐험, 구출 등의 주제하에서 타인과 경쟁이나 협동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한 저-중범위 가상현실 체험(이 책 Biocca & Delaney 참조)은 이용자에게 보다 가까워지고 보다 쉽게 반복할 수 있는 종류이다. 가상현실의 커뮤니케이션 응용을 완전하게 확산시키는 것은, 주요 가상현실 체험이 가정에 진입하게 될 때, 이미 시작 단계를 넘어섰다. 가정에까지 가상현실이 확산되는데 가장 적절한 역할로 비디오 게임 시스템을 들 수 있다. 1990년대 초반경에 미국 가정의 30%와 자녀가 있는 가정의 90% 이상이 이미 일종의 컴퓨터 게임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1980년대에 연간 45억 달러에서 50억 달러 이상의 수입액을 기록하는 이 소규모 시장에 얼마나 많은 고려를 할 수 있었겠는가. 가상현실의 몇 가지 개념은 컴퓨터 게임의 여러 가지 새로운 입·출력 장치의 형태에서 도입되었다. 예컨대 1990년대 초에 아브람스-젠틸 엔터테인먼트 Abrams-Gentile Entertainment와 마텔 Mattel사는 VPL의 데이터 글로브 (이 책 Biocca & Delaney 참조)의 미완성된 버전, 즉 파워 글로브 Power GloveTM를 도입하였다. (Rheingold, 1991). 1993년에 컴퓨터 게임기의 가장 큰 제조업체 중 하나인 세가는 단 몇 백 달러밖에 안되는 로우엔드형의 머리에 쓰는 디스플레이를 발표했다. 이 디스플레이가 보여주는 가상현실 체험은 질적으로 떨어지는 것이며 대개가 1인의 이용자로 제한되어 있지만, 이 기술은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가상현실 기술을 소비자들이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있게 하였다. 이들 초기 형태는 새로운 그리고 미래의 소비자에게 가상현실 인터페이스에 쉽게 익숙해지도록 하며, 장차 보다 생생한 체험을 하게 만드는 입·출력 장치에 부착된 고품질 컴퓨터 플랫폼이 도래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한다. 가정에 오락을 실현하는 이 시스템은 또한 정보용, 교육용 가상현실 응용 분야에 대한 미래도 전망하게 한다. 실제로 몰입적이고 소비자형의 가상현실 시스템이 보다 넓은 공간에 걸쳐 네트워크화될 수 있다면, 커뮤니케이션 응용은 더욱 더 질적인 도약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이버공간은 "교감적 환상" (Gibson, 1984)에 이르는데 보다 가까워질 수 있다. 일부 네트워크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이 "가상현실"을 제공한다고 주장하더라도, 진정으로 몰입적이고 네트워크화된 가상현실은 가상현실 확산의 후기 단계, 즉 가상현실적이고 일반적인 커뮤니케이션 인터페이스의 도래를 최종적으로 알리는 단계에 출현할 것 같다. 나이넥스와 유에스 웨스트 등의 전화 회사에 소속된 연구자들은 가상현실의 이용을 텔레커뮤니케이션에다 적용시킨다. 그러나 네트워크화되고 몰입적인 가상현실은 하이엔드의 케이블 대역이나 전화용 전송 채널이 필요하다. 몰입적, 네트워크화된 가상현실의 일부 예상으로는 각 가정에서의 인터액티브 텔레비전의 폭발적인 대중성과 일단의 강력한 그래픽을 동원하는 멀티미디어 컴퓨터 ("블랙 박스")의 출현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것은 최우선에 와야만 한다. 예를 들어 벨 애틀란틱 Bell Atlantic사는 다가오는 1997년에 이 고성능 가정용 터미널의 수요가 1백만개 이상에 이를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Cook, 1993). 일부 대중적인 가상현실용 워크스테이션을 제작하는 실리콘 그래픽스사는 300 달러 미만의 그래픽 워크스테이션의 능력을 가진 스크린탑 블랙 박스를 제공하기 위해 거대 케이블사와 제휴 관계를 맺었다. 이와 같은 예상에 따르면 (예를 들어 Biocca, 1993), 이 강력한 상호작용 시스템은 결국 새로운 입·출력 장치를 "개발하여" 더 한층 네트워크화된 몰입적 체험을 지원할 것이다. 또한 가정형, 몰입형, 네트워크형 가상현실에 대한 가정은 "정보 초고속도로" 형태의 성공적인 시작을 전제한다. 그러한 네트워크는 필수적인 데이터의 광범위한 교환에 대한 골격을 제공할 수 있다. 가정형, 고성능 네트워크형, 완전 몰입형 가상현실의 전국 시스템은 현격하게 차이나는 커뮤니케이션 시스템 (2장, Biocca & Levy 참조)과 전례없는 범위의 커뮤니케이션 응용을 구축하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성공이 비록 배치 장소형 오락시장에서 이루어졌지만, 가상현실의 다소 성공한 커뮤니케이션 응용 분야가 존재한다. 하지만 가상현실 커뮤니케이션 응용에 대한 현재 상황은 단지 도래할 응용 분야에서 제안적 수준에 해당하는 그 대강일 뿐이다. 이렇게 미성숙한 응용 상황은, 1950년대 밀튼 베를러 Milton Berle의 생방송 쇼와 MTV, 혹은 최초의 게임 퐁 Pong과 씸시티 2000 SimCity 2000의 관계가 그러했던 것처럼, 성숙기의 응용 상황과 비교하여 차이가 있는가 하면 그 비슷함을 지니기도 한다. 가상현실 시대의 커뮤니케이션에 관해 사고한다는 것은 우리가 지난 해의 상업적 성공에 제한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점을 요구한다. 이후의 각 내용에서 우리는 현재의 응용 분야에 스스로를 속박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미래의 보다 성숙한 응용 분야의 외양과 설계 목표를 고려할 것이다. "오래전 그리고 아득한 어떤 장소를 상상해보라..." 오락의 여러 형태는 한 가지 사실이 잘 되길 시도하는데, 이는 전혀 다른 세계로 청취자/시청자/역할자/이용자를 빠져들게 하는 것이다. 즉 상상의 도달 범위가 훨씬 확대된 원격재현에 빠져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성공적인 소설은 당신이 단지 그 매체 내에서만 접할 수 있는 인물들의 의식과 동기를, 혹은 당신으로부터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장소들을 "전달해준다". 고대의 종교적 의식을 지닌 종족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공간은 축조된 사회심리적 공간이다. 그곳은 이용자가 그 속에 들어가 종교적 "불신을 정지시켜야만" 하는 제한된 세계이다. 혼자 아니면 타인과 함께 소설의 청중은 소설, 연극, 영화, 혹은 아케이드 게임의 "믿게끔 하는 세계"의 모사성으로 빠져 들어간다. 이러한 응용 분야에 대한 논의에서 우리는 종종 두 가지 근본적인 요소에 대해 언급한다. 상상력. 이는 일상의 감각 현실을, 어떠한 매체의 암시에 의해 추동된 이용자의 환상으로 대체한다. 예를 들어 소설가의 글, 동화책의 그림, 액션으로 가득찬 자동차 추적 등등. 환상 공간. 서로간에 인정하여 믿게끔 하는 공간, 즉 "교감적 환상," "오래전 그리고 아득한" 그 곳에서 소설, 게임, 혹은 오락이 일어난다. 이러한 환상 공간에 관해 언급하는 오락 용어에는 다음과 같은 것을 포함한다. 소설 공간, 영화 공간, 연극 공간, 경기장 등등. 이러한 것들은 오래전의 요소이다. 가상현실을 이용하는 오락은 몇 가지 점에서 부족간 전쟁과 관련하여 그 신화를 만들어내는 고대 마술사의 주술을 듣는 것과 동일하며, 혹은 고대 아테네에서 소포클레스 Sophocles의 〈오이디푸스 왕 Oedipus Rex〉이란 최초의 연극을 매우 찬 대리석으로 된 의자에 앉아 보는 것과 동일하다. 소설 공간으로의 몰입은 동일시, 역할 수행, 대립, 그리고 깊게 느끼는 격한 감동과 같은 인간 내부의 심리적 엔진을 자극한다. 가상현실 기술은 새롭지만, 그 감동이란 매우 오래 전에 연출된 것이다. 하지만 보다 오래 전의 미디어와 달리 가상현실은 일부 예술가의 꿈을 실현하려고 시도하는데, 이는 상상의 창조물들을 보다 사실에 일치해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자주 인용되는 구절을 여기에 적어보면, 우리들 사이에 시인은 가능성이다 "상상력의" "사실주의자" 오만함과 평범함 위에 서있는, 그리고 시인은 줄 수 있다 자세히 살필 수 있는 기회를, "그 안에 실제 두꺼비가 살고 있는 상상의 정원", 만약 우리가 이를 가질 수 있다면. (Moore, 1951) 드라마의 전개에서 "상상의 정원"을 생각해보라. 드라마의 서사는 우리의 가장 강력한 오락의 형식 중 하나이다. 어떻게 설계자는 가상현실에서의 멋진 이야기에 대해 감응을 일으킬 수 있는가? 혹자는 가상현실이 매우 풍부하고 상호작용적인 이야기의 가능성을 열어놓을 것이라고 느낀다. 예를 들어 로렐 (Laurel, 1991)은, 지능 컴퓨터 프로그램에 해당할 수 있는 "상호작용적 극작가"라면 이용자의 행위에 기초하여 "쉼없이" 상호작용적인 서사를 쓸지도 모른다는 점을 추론했다. 가상현실의 상호작용 능력은 이용자에게 대단한 자유의 가능성을 약속하는 듯 하다. 즉 이용자가 가상현실의 이야기 공간 안에서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한다. 이 사실이 제안하는 바는, 이용자가 어떤 이야기의 주인공일 수 있으며, 어떠한 등장 인물을 선택할 수도 있으며, 이야기 도중 등장 인물을 바꿀 수도 있으며, 이야기의 사건 전개를 변경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다른 이들은 가상현실의 줄거리에 있어서 이용자가 단지 그 이야기를 체험하는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생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가까운 미래에 가상현실이 이와 같은 사실을 효과적으로 행할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일부 비관론적 해석자는, 인공 지능에 관한 초기 연구에서처럼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이야기 전개에 관한 생각이, 이야기가 전개되는 환경을 프로그래밍하는데 있어서 그 복잡성에 대해 너무 무심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당신이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감정적으로 강력한 서사에 이르는 길은 수만개가 아니라 단지 몇 개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8장에서 메이어는 가상 환경 내에서 고전적인 드라마의 서사를 수행하려는 목표에 대해 논의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가상현실의 연출가는 어떻게 가상현실 내에서 드라마의 서사를 연출해내는가? 메이어는 이야기 매체로서 가상현실의 이용이 여러 측면에서 보다 잘 이해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우선 어떻게 드라마 서사 형식이 작동하는가를 생각해보자. 드라마의 서사에 관한 고전 이론들은, 연극 서사의 감정적 힘과 그 효과가 등장 인물의 동기, 줄거리의 구조, 감정효과의 타이밍 등을 통제하는데 의존하는 방식에 그 초점을 둔다. 책과 영화와 같은 단선적인 이야기 구조의 매체에서는, 이들 요소를 통제한다는 것이 더욱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 예컨대 야영장의 모닥불 둘레에서, 소설책 속에서, 혹은 영화에서 얘기하던지 간에, 이야기 구조, 타이밍, 감정 효과가 어떻게 미스테리 소설에 생명을 불어넣는지를 생각해 보라. 극작가 혹은 연출가는 주의깊게 독자/시청자에게 유용한 양의 정보와 그 서사 형식을 보임으로써 통제한다. 사건의 연속과 타이밍은 사건의 미결 상황을 연출하기 위하여 독자/시청자의 감정적 반응을 주의깊게 자극한다. 이용자가 만약 완전하게 그 이야기의 서사틀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유롭다면, 가상현실에서도 그러한 효과가 연출될 수 있을까? 책이나 영화와 달리 가상현실은 비단선적인 매체이다. 그 설계자는 가상현실 세계의 모든 내용에 대해 여러 유형의 통제를 가하지만, 일련의 사건 연쇄에 대한 통제로만 제한했다. 가상현실의 서사 내에서 자유롭게 거니는 이용자는 수 천 가지 경로의 가능한 사건 연쇄를 발생시킬 수 있다. 인공 지능 (AI) 형태의 이야기꾼은 이 모든 사건 연쇄에서 적절하게 반응할 준비가 돼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현재에 혹은 가까운 장래에 등장하는 인공 지능형의 이야기 구성 프로그램인가? (이 책에서) 메이어는 초기 인공 지능형 서사 프로그램의 출현에 있어서 그 일부 프로그램의 한계점을 논의한다. 그 프로그램이 항상 다소 반응을 일으킨다 하더라도, 대체적으로는 이용자에게 극적인 만족감을 주지 못한다. 가상현실의 드라마 서사를 구성하는 제작자는 어려운 균형 관계에 직면하기가 쉽다. 예컨대 이용자에게 너무도 많은 자유를 부여한다면 그 이야기의 균형있는 효과 측면에서 문제가 생긴다. 역으로 이용자가 보다 더 감정적으로 서사 체험에 이끌리게 만들기 위하여 그 구성원의 선택권을 제한한다면, 아마 당신은 가상현실의 잠재력을 평가절하하여 이용하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이것이 가상현실의 서사적 모순이다. 일부에게는 인공 지능형 이야기 프로그램이란 다가올 미래에서나 있을법한 것이라 본다. 설사 훨씬 나은 프로그램을 가지고서라도, 항상 그 갈등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즉 효과적으로 드라마 내용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사건과 등장 인물을 통제할 필요가 있으며, 가상현실 이야기 내에서 "관객" 구성원이 잠재적으로 자유를 누릴 필요도 있다. 이용자가 이야기의 모든 요소를 바꾸는 것이 자유로울 땐, 그 이용자는 또한 일종의 극작가가 되는 것이다. 근본적 모순이 존재한다. 이용자와 인공 지능형 제작자 사이에는 갈등이 생길 수 있다. 인공 지능형 제작자가 가상현실 프로그램을 통제함으로써, 이용자는 내용 전개와 감정 효과의 가장 효과적인 타이밍을 망칠 수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불만족스러운 드라마의 서사나 비서사적인 사건의 연쇄, 혹은 보다 무정형의 이야기 구조를 이끈다. 아직까지 이것은 서사 형식을 띠고 있지만, 매우 흡족스럽거나 감정적으로 만족할만한 형태는 아니다. 물론 뛰어난 가상현실 이야기가 가능하다. 하지만 다른 미디어의 예술적 세련감을 통해서만이, 가상현실 극작가와 감독자는 가상현실 기술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이해력을 동시에 발전시킬 것이다. 감각의 관리, 변화, 증폭 구미디어의 이야기 전개에 대한 필요성과 가상현실의 이야기 구성에 대한 비슷한 필요성 사이에는 몇 가지 흥미로운 발전적 연관성이 존재한다. 보다 오래된 이야기 공간에 진입한다는 것은 종종 감각으로부터 수취한 정보를 가로막는 것을 의미했다. (예를 들어 조용한 장소에 앉아 글을 읽거나, 혹은 극장의 안락하고 어두운 좌석에 앉아 그 속에 빠져드는 것과 같은 행위) 감각의 부정적인 현실감을 제어하는 것은 때론 상상력을 해방시켰다. "이것은 실제가 아니다" 혹은 "이는 단지 이야기일 뿐이다"라는 문구는 관객 구성원을 둘러싼 물리적 현실과 이와 겨루는 가상 이야기의 공간 현실 사이에 놓인 심리적 줄다리기를 드러낸다. 환상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순간에서는, 참여 구성원은 물리적 현실을 무시하게 되고 스스로 그 이야기 공간에다 객체화한다. 코울러리지 (Coleridge, 1817)의 말로 표현하자면, "그 순간만은 불신감을 기꺼이 거두고, 시적인 믿음을 만들어낸다." (p. 87). 물리적 현실로부터 생기는 감각의 영향을 막는 행위는 가장 강제적인 가상현실 체험의 중요한 일부이다. 감각은 가상세계에 몰입한다. 따라서 신체는 리얼리티 엔진에 맡겨진다. 두 눈은 머리에 쓰는 디스플레이로 덮힌다. 따라서 실제 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두 귀는 헤드폰을 쓴다. 따라서 사방을 둘러싼 음향이 뒤덮는다. 양손은 "단지 가상 신체를 접촉하는" 글러브나 받침대 prop로 덮힌다. 가상현실은 구석진 조용한 곳에서 책을 읽으면서도 공통의 요소를 공유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모든 방향으로 뻗쳐있고, 독자의 감각을 에워싼다. 즉 독자는 책 이야기에 빨려들어간다. 고대의 이야기 공간은 감각을 무시하는 대신에 이를 변화 혹은 증폭하곤 했다. 이는 상상력의 환상을 일으키는데 도움을 주었다. 주술적 이야기로부터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축제까지 그 다양한 형태의 오락은 마약 혹은 술의 소비, 힘이 넘치는 춤 혹은 노래의 의식, 거대한 환호와 빛의 작열을 포함한다. 이를 통해 이용자는 신화, 이야기, 혹은 당신이 갖는 어떠한 형태이건간에 보다 수월하게 환상의 공간으로 진입할 수 있다. 일종의 "마술"의 뿌리 혹은 버섯을 가지고서, 이용자는 신들과 "친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몇 가지 점에서 가상현실은 이 동일한 전통을 계속해서 이어받고 있다. 가상현실 체험을 화학적이고 기술적으로 확대하려는 수사적 표현은 《몬도 2000》Mondo 2000과 같이 사이버공간을 지향하는 잡지류의 내용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것은 우연한 사례가 아니다. 1960년대 환각제의 일종인 LSD의 주술사, 티모시 리어리 Timothy Leary는, 가상현실 내부에서 그가 과거의 화학 작용에 의한 "미디어"에서 발견했던 일종의 신화형성의 힘을 보았다. (Wooley, 1992 참조). 그가 여타 수단들에 의해 추구했던 체험을 대신하여 가상현실 기술의 가능성에 경외감을 느낀, 그는 초기의 가상현실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공표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 이 회의는 인류에 의해 열렸던 모임 중 가장 중요한 것이다." (Wooley, 1992에서 인용). 과학적 발견, 예술가적 통찰, 그리고 종교적 현현은 세계에 대해 우리 감각 관계를 재배치하므로써 발생한다. 가상현실 과학자는 종종 감각 재배치나 지능 증대의 기술에 관해 언급하지만, 그들은 동시에 "떠돌이", 티모시 리어리가 그 기술을 환영했던 그 당시를 몹시 혐오한다. 리어리의 자기 중심적인 "기분 전환"을 강하게 기각하고자 할 때, 우리는 정신 기능을 변화시키고자 화학적이고 기계적인 인공물을 이용하는 과거 인간의 전통과 연결된 심층을 놓칠 수 있다. 가상현실 개척자인 쟈론 라니어는 가상현실 체험과 관련한 숨겨진 이야기를 전하는데, 그 체험이 일어나는 곳에서 VPL사의 엔지니어들은 신체 운동과 감각 피드백간의 연관성을 재조직하기 위한 실험을 하고 있었다. 예술적 효과를 탐구하면서 각 신체의 부위들은 가상현실 내에서 지각 효과를 위해서 각기 다른 비율로 제시되었다. 따라서 신체 운동은 비신체적 활동과 연결되었다. 그는 "동료의 입 안에서 기어가는" 것과 같은 가상현실 안에서나 유용한 비정상적인 감각 체험의 가능성까지도 논의했다. (Lanier & Biocca,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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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문화정치]: 개요 & 목차

문화과학 게릴라북 [사이버문화정치](1998), 문화과학사 1. 서문 2. 21세기 문화정치 전략의 재구성 3. 최초의 정보 게릴라운동: 사빠띠스따의 네트전 4. 네트에서의 정치적 교육: 배드 서브젝츠 5. 디지털 미래의 도안가: 사이버펑크 작가들 6. 아나키스트의 적자들: 해커 전위대 7. 네트의 시민운동가들: 전자프런티어재단(EFF)과 그 구성원 8. 사이버 문화정치를 위하여 1. 개요 이 책은 20세기말에 다음 세기를 위한 디지털 문화정치 실험의 사례들을 분석하고 있다. 이 책은 후기자본주의사회의 신흥자본가들, 즉 글로벌 지배권력의 강화에 맞서 새로운 대안 기획을 짤 것을 역설한다. 특히 저자는 기존 실천 운동가들의 한계로 지적될 수 있는 재정적 영세성, 소속 대중과의 커뮤니케이션 부재, 지역적 한계로 인한 실천운동의 국지성 등을 넘어서, 전자적으로 매개된 새로운 실천양식으로 이를 극복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해 보고자 한다. 이 책의 전체 내용은 크게 보아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현실 실천집단들이 지닌 과거의 구매체 전략을 수정하여, 전자양식의 대안 매체적 실천의 모델을 재구성하고 있다. 즉 지배 혹은 대중매체에 대항한 미디어 운동영역의 실천 활동을 우회하여, 소규모의 전자 게릴라전을 펼칠 것을 제안한다. 지배의 약호를 교란하는 각 집단들의 해방적 디지털 약호들이 미시적 정치 투쟁의 전략으로 기능할 수 있고, 이 흩어진 해방의 약호들을 엮을 수 있는 힘은 네트를 통해 거둘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이 새로운 형태의 탈중심화된 소통로가 새로운 정치 형성과 집단화를 위한 접합제 역할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현실 운동집단들의 역학에 달려 있다는 데 동의한다. 저자는 본문에 해당하는 다섯 가지 사이버 문화정치의 실험 사례들을 통해, 이같은 전자 게릴라운동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우선 최초의 정보 게릴라운동인 사빠띠스따의 네트전. 이미 국내에서도 글로벌 자본에 대항한 실천의 전범으로서 다루어진 적이 있는 멕시코 농민운동그룹인 사빠띠스따를, 주로 그들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활용과 관련하여 자세히 풀어나가고 있다. 두번째로, 버클리 대학의 대학원생들이 정치토론을 통해 만들어낸 배드 서브젝츠. 인터넷 웹상의 잡지, 즉 웹진으로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배드 서브젝츠 실험을 분석함으로써, 지식인들이 전자공간을 통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적절한 실천 지침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저자는 그 외 나머지 세 가지 사례를 그 발생적 수순에 따라 사이버펑크 작가들, 해커 전위대, 전자프런티어재단(EFF)과 그 구성원으로 나누고 있다. 이들 세 집단들의 관계는, 사이버펑크 작가군이 해커에게 미래사회의 전망에 대한 이론적 자양분을 제공했고, 전자프런티어재단이 해커들의 억압사를 통해 발생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한다. 사이버펑크 작가군의 평가와 관련하여, 이들 집단은 사회이론과의 연동을 통해 미래사회에 대한 사회적 예측이론으로서, 그리고 문화정치적 저항 실험의 이론적 토양으로서 기능했다고 본다. 한편 10대를 중심으로 한 해커들은 정보공유 정신에 있어서 그 진보적 측면을 인정할 수 있으나, 집단 구성원들의 특권적 지위, 예컨대 남성, 백인, 중산층, 고학벌 등을 고려해볼 때, 그들이 과연 미래 전사로서의 대항적 면모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 의심스러워 한다. 문제는 그들을 개인적이고 사적인 해킹 행위자로 치부해버리는 것이 아닌, '사회적' 해킹 능력을 지닌 세력으로서의 가능성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정리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전자 시민단체로는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그 집행위원들의 명망성으로 이름을 날리는 전자프런티어재단에 대한 정치적 평가를 시도하고 있다. 저자는 미국의 보수정당들이 정보초고속도로 정책에 그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전자프런티어재단과의 동침을 모색했고, 결국 실패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고자 한다. 또한 이들 재단이 외치는 암호화, 표현의 자유 등의 주장이란 실제 시장에 기반한 최소 자유주의 원칙에 다름아니라고 평가한다. 그렇지만 그들의 사회적 자유주의의 논리를 일정 부분 정책에 현실화시키는 입안 능력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그 전술적 가치를 사고 있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각각의 정치 실험 단위들을 역사, 성격, 활동, 한계, 목표, 매체전술 등의 내용들로 구성해보고자 했다. 결론에 해당하는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다섯 가지 저항 실험들을 운동 주체, 이론 기반, 적대 세력, 사회적 목표, 매체 전략의 다섯 가지 유형분석에 입각하여 평가하고, 새로운 사이버 문화정치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한 몇가지 화두로써 마무리를 짓고 있다. 마지막 결론에서 저자는 먼저 새로운 문화 실험의 사례들의 발굴 작업과 동시에 문화정치학의 새로운 정초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21세기 정치 지형속에서 문화의 집단적 표현 형식에 대한 새로운 징후를 테크노 문화정치 실험 속에서 읽어내어 이론화하는 것과 사이버문화의 집합적 실천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 이 두 가지가 바로 21세기 문화정치를 해킹하기 위한 화두이자 출발이라고 평가한다.// *디지털 사이방가르드 아트의 후속탄을 작업 중이다. 현실화가 될지 말지는 내 게으름이 끝나면 가능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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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하비, 범지구화란 문제설정

David Harvey, 1995 (Winter), "Globalization in Question," Rethinking Marxism(Vol.8, No.4), AESA. 범지구화란 문제설정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 이광석 옮김, "범지구화의 문제설정", {공간과 사회}(1999, 12호) '범지구화'(globalization)는 우리가 지난 20여년 간에 걸쳐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한 사고를 형성하는데 핵심적 단어로 자리잡았다. '범지구화'가 우리들 한가운데로 들어온 이유와 그 이동의 방식은 꽤 흥미로운 주제다. 하지만 이 글에서 나는 이같은 사고 방식이 출현하는 것과 관련한 그 이론적, 정치적인 함의에 초점을 두고 있다. 나는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두 개의 일반적인 논제로 시작하고자 한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다수의 사회주의 운동을 포괄하여 서구의 논의틀 내에서 어떤 중요한 정치적 변화가 나타난다는 점을 (설령 그것이 현실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강조하기 위함이다. (1) 최근 들어 '범지구화'란 말이 왜 스물스물 우리의 논의 속으로 끼어들고 있는가? 누가 그리고 왜 이 용어를 쓰고 있는가? 그리고 선진 자본주의 세계의 수많은 '진보주의자'와 '좌파' 사이에서조차, '제국주의', '식민주의', '신식민주의'와 같은 용어를 후미진 곳으로 보내고, 그 자리에 사고를 조직화하고 정치적 가능성을 계획하는 방도로서 '범지구화'를 앉힌다는 사실이 어떤 중요성을 지니는가? (2) 범지구화의 개념은 정치적으로 어떻게 이용되고 있는가? 이런 식의 용어가 일부 국가, 지역, 지방에 근거한 노동계급 운동의 무기력을 실토하는 신호인가? 범지구화에 대한 믿음이란 것이 지방은 물론이고 일국의 정치적 행동조차도 막아내는 강력한 방해 요인이었나? 국제화된 자본주의하에서 지방의 그리고 일국의 노동계급 운동은 거대한 악마와 같은 글로벌 기계의 하찮은 작은 톱니바퀴 신세이므로, 이제 어디서든 스스로의 정치적 전략을 세울 수 있는 여지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가? 이상에서 범지구화라는 용어 그리고 이와 관련된 내용은 심각한 정치적 대가를 요구한다. 하지만 우리가 전적으로 이 용어를 거부하거나 혹은 포기하기 전에, 우리에게는 그 용어가 사용된 짧은 내력을 통해서 이론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과 그 용어와 결합하고 있는 것에 대해 제대로 천착하는 시각이 유익하다. 나는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시작할 것이다. 즉 '범지구화'를 최근에 출현한 정치·경제적 조건이기 보다는 과정(process)으로 파악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 곧 그 과정이 영구적이란 점을 전제하지는 않는다. 한편 그 과정이, 예컨대 아주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거나 혹은 그 과정 자체가 특수하거나 "최종적인" 상태에까지 이르렀다는 점을 배제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과정에 기반한 정의를 통해서 어떻게 범지구화가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는가에 대해 보다 집중할 수 있다. 1492년 이후에, 그리고 그 이전에도 자본주의의 범지구화 과정은 확실히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진행 과정은 결코 중단됨이 없이, 자본주의 동학에 있어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범지구화가 시작된 이래로 그 진행 과정은 자본주의 발전의 필수적 요소였다. 그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자본의 축적은 항상 지리적이고 공간적인 문제와 깊게 연결되어 있다. 지리적 팽창의 고유한 가능성, 공간의 재조직화, 불균등 지리적 발전이 없다면, 자본주의는 벌써 오래 전에 정치경제적인 체제로서의 기능을 중단했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모순 가운데서 이른바 '공간적 조정'(a spatial fix)이라 불렀던 이 영속적인 전환은 일종의 범지구적 자본 축적의 역사적 지형을 만들어냈는데, 이 지형의 특성은 잘 숙지할 필요가 있다.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점을 강조한다. 그들이 적은 바처럼 현대의 산업은 단지 세계 시장을 창출하는 것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시장을 확대하려는 욕구 또한 "부르주아지를 전 지구상으로 내몬다." "부르주아지는 도처에서 뿌리를 내려야 하며, 도처에서 정착하여야 하고, 도처에서 연계를 맺어야 한다." 이어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부르주아지는 세계 시장의 개발을 통해서 모든 나라들의 생산과 소비를 범세계적인 것으로 탈바꿈시켰다... (중략) 오래된 민족적 공업은 파멸되었고, 또 나날히 파멸되어 가고 있다. 이 공업들은, 그 도입이 모든 문명국가의 사활 문제가 되고 있는 새로운 공업에 의해, 즉 더 이상 현지 원료를 가공하지 않고 아주 멀리 떨어진 지방의 원료를 가공하는, 그리고 그 제품이 자국 내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대륙에서 동시에 소비되는 공업에 의해 밀려나고 있다. 국산품에 의해 충족되었던 낡은 욕구 대신에 새로운 욕구가 등장하는데, 이 새로운 욕구는 그 충족을 위하여 아주 멀리 떨어진 나라 및 풍토의 생산물을 요구한다. 낡은 지반적 및 민족적 자급자족과 고립 대신에 민족들 상호간의 전면적 교류와 전면적 의존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는 물질적 생산에서나 정신적 생산에서나 마찬가지이다. 개별 민족들의 정신적 창작물은 공동의 재산이 된다. 민족적 일면성과 제한성은 더욱 더 불가능하게 되고, 수많은 민족적이고 지방적인 문학으로부터 단일의 세계 문학이 형성된다.(1952, 72) 만약 이것이 범지구화에 대한 무리한 표현이 아니라면, 장차 일어날 수 있는 것을 짐작하는데는 냉혹함만이 기다린다. 물론 이러한 분석을 거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범지구적 정언명령으로써 반자본주의적이고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혁명을 위한 필수 조건, 즉 "만국의 노동자들의 단결"을 정확하게 이끌어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이후로 자본주의가 어떻게 지형을 구조화하는지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들이 이루어졌다.(예컨대 레닌의 제국주의 이론, 룩셈부르크의 자본 축적의 구제 형태로서 제국주의의 적소화(positioning), 계급투쟁에 관한 마오의 주요 모순과 부차적 모순에 대한 묘사.) 결과적으로 이들 해석은 더욱 종합적인 설명 방식으로 보완되었는데, 세계적 규모의 축적(아민S. Amin),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생산(왈러스틴I. Wallerstein), 저발전의 발전(프랭크와 로드니A. Frank and W. Rodney), 부등가 교환(엠마뉴엘A. Emmanuel), 종속이론(카르도소F. Cardoso)이 이에 해당한다. 마르크스의 이념과 정치적 실천이 (계급 투쟁의 범지구화 과정과 같은 방향으로) 전지구에 걸쳐 퍼져나간 것과 동일하게,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침략, 파괴, 의도에 저항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지방적/민족적인 해석들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다지 가시적이지 않지만 일군의 광범위한 사상가들과 실천가들은, (생산제력과 사회관계의 양자의 측면에서) 자본주의적 공간내 불균등 지리적 발전 과정의 일부로 기능하는 도시화의 역할과 지방적/지역적 차이들, 그리고 반자본주의 투쟁의 불균등 지리적이고 불균등 사회적인 형태들에 보다 주의를 기울였다. 전술적으로 그 효과는, 계급 투쟁의 토양이 꽤 장소 특수적이란 점과, 사회주의가 바라는 보편주의란 서로 차이를 지닌 장소 특수적인 요구, 관심, 열망 모두의 적절한 결합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했다는 점이다. 레이몬드 윌리엄스(R. Williams, 1989, 242)가 제안한 바에 따르면, 사회주의의 정치적 토양은 항상 장소 특유의 '정서 구조'(structures of feeling)와 '삶의 방식'(ways of life)에 아로새겨진 이른바 '전투적 당파성'(militant particularism)에 근거한다. 그는 다음 첫 번째 예문에서 이와 같은 내용을 상술하고 있다. 노동계급 자신들의 유일하며 특수한 조직적 특성은... 보편적 투쟁에다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당파적 투쟁을 연결한다. 일종의 운동 형태로 볼 때, 철저하게 함께 모인(properly brought together) 당파적 이익의 방어와 향상이 사실상 보편적 이익이라는 특수한 주장이 현실화하게 되었다.(1989, 249; 하비의 강조) 다수의 사회주의자들이 받아들이길 꺼릴 수도 있는, 보다 폭넓은 함의는 다음과 같다. 사회주의의 새로운 이론은 이제 그 중심에 장소(place)를 포함시켜야 한다.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을 유산 계급으로부터 차별화하는 요인, 즉 그들이 어떠한 나라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관해 상기하라. 그렇지만 장소는, 국제 경제의 폭발과 과거 공동체에 대한 파괴적인 탈산업화 효과로 인해 ― 아마도 자본 소유계급보다는 오히려 노동계급을 ― 서로 묶는 과정에 있어서 중대한 요소임이 입증되고 있다. 자본이 계속해서 이동할 때, 장소의 중요성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242) 본인의 의도는 자본주의 발전과 계급 투쟁의 공간적, 지리적 측면을 다루었던 광대한 문헌 모두를 논평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설사 그러한 작업이 실행 가능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로는, 이론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자본 축적과 계급 투쟁의 지리적 역학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한, 마르크스 전통 내부의 일련의 긴장, 그리고 종종은 불유쾌한 타협에 관해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예를 들어 레닌과 룩셈부르크가 민족 문제로 충돌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일국내(혹은 심지어 한 도시내) 사회주의의 가능성에 관한 논쟁이 벌어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1차 세계대전 중 제 2인터내셔널이 민족주의와 타협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결과적으로 코민테른 스스로가 국제주의를 해석하는 방식에 있어서 동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은 정치적으로 그리고 이론적으로 계급 투쟁의 지형학과 자본 축적의 지리적 동학을 이해하는데, 결코 정확하거나 만족스럽게 진전시켜 나가지 못했다. [공산당 선언]의 내용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이 딜레마의 핵심적인 근원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선언]의 인용구에 따르면 부르조와지의 계급 지배에 대한 탐색이 매우 지리적 사안이란 점이 분명한 반면에, 놀랍게도 거의 그 내용에서는 순전히 시간적이고 통시적인 설명만으로 그 즉시 전도되기 때문이다. 시간은 "공간이 용인하고 대등해지는 지점을 배제하고 복속시키므로, 시간이 변증론자의 특권적 범주"(Ross 1988, xxx)라고 생각했던 포이에르바하를 따르는 수많은 실천적 마르크스주의자를 제외한다면, 공간에 대해 변증법적이지 못했던 듯 싶다. 본인이 주목하건대, '역사적 유물론'이란 용어조차도 지리적 중요성을 삭제하고 있으며, 그리고 내가 지난 수년간을 싸워서 '역사-지리적 유물론'의 개념을 고취시켰다면, 그것은 우리가 후자의 개념으로 이동하는 것이 범지구화와 불균등 지리적 발전 과정의 계급적 중요성에 대해 보다 유연하게, 그리고 희망컨대 보다 적절하게 볼 수 있도록 준비하자는데 있었다. 그리고 최근 내 저술(Harvey, 1996)을 통해 공시성(spatiotemporality)의 변증법에 관해 분투하고 있는데, (그리고 본인은 이 합성어가 그 자체로 보아도 대단히 중요하다고 보는데), 이는 우리가 정치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해석 내부에 근본적인 이중의 긴장 상황을 풀지 못한다면 한결 나은 이해 방식이 필요할거라 보기 때문이다. 그 긴장 상황이란 (이제 역사의 종말을 표명하는 부르주아지의 목적론적 계급 신봉주의에 의해 거의 부정되는) 계급 신봉주의의 목적론적 시간성으로, 혹은 겉보기에 뿔뿔이 흩어지고 통제 불능 상태인 계급의 지리적 분열로 종종 퇴보하는 것과 자본주의 세계 모두의 구석구석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투쟁의 또 다른 형식들로 가는 것, 그 두 가지를 일컫는다. 실천의 영역에 있어서도, 통시적 계급 투쟁의 해석은 대개 주요 관심사가 그 해석이 기반하는 지리적 분할 영역들의 정당한 평가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영토적으로 경계를 확정짓는다. 그래서 우리는 영국, 웨일즈,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카탈로니아, 남아프리카, 남한 등에서의 노동자계급 형성이란 수많은 설명을 접하게 되는데, 이는 마치 이들 국가를 자연적인 지리적 실체로 보는 것과 같다. 우리는 어떤 둘러싸여진 공간 내에서의 계급 발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좀 더 가까이에서 관찰해보면, 그 공간이란 그 자신의 특성을 지닌 수많은 작은 공간으로 구성된, 자본, 노동, 정보 등의 국제적 흐름의 공간내에 위치한다는 점이 분명하다. 예컨대, 우리가 에드워드 톰슨(E. Thompson)의 {영국 노동자계급의 형성(The Making of the English Working Class)}의 고전적 해석에서 묘사된 내용을 잘 관찰해보면, 이는 종종 공간에 느슨하게 결합된 일련의 고도로 지역화된 사실들이 존재함을 입증하고 있다. 포스터(J. Foster)가 {산업혁명 시대의 계급투쟁(Class Struggle in the Industrial Revolution)}이라는 자신의 저술에서 다소 기계적으로 그 차이들을 과대하게 묘사했는지 모르겠으나, 본인 생각에는 영국의 올덤(Oldham), 노르탬턴(Northampton), 사우스 쉴즈(South Shields) 지역(프랑스의 콜마르 Colmar, 렐 Lille, 산타티엔느 St. Etienne 지역, 혹은 미국의 미네아폴리스 Minneapolis, 모벨 Mobile, 로얼 Lowell 지역을 참조하라.)의 계급 구조, 계급 의식, 계급 정치가, 대개 인정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는 국민국가 내부에서 지리적 차이를 형성하면서, 꽤 다르게 구성되고 구조화된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자연적인' 지리적 실체에 가정한 무비판적인 사고 방식은, 마치 지금 자본주의의 범지구적 공간 경제 내부에서 서로 경쟁을 하는 모든 국가들, 즉 독일, 영국, 일본, 미국, 스웨덴, 싱가포르, 브라질 등의 서로 다른 버전들이 자연스럽게 존재하고 있는 (때로는 이탈리아, 브라질, 영국... 내부의 남과 북처럼 보다 지역화된 형태로 나누어진) 것처럼 여기게끔 하는데, 이는 자본의 (특히 '조절이론'에 자극받은 부류들인) 네오마르크스주의적 해석에서 영속화 하고 있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전통 내부에는 분명한 긴장선이 존재한다. 한편에서는, 자본주의적 발전을 순전히 시간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비공간적이고 지리적으로 무차별적인 해석(우리가 아직은 비록 논쟁적이고 정치적인 버전들을 찾아볼 수 있지만, 오늘날의 주된 이론적 경향)이 존재한다. 계급투쟁은 일차적으로 다른 계급에 의한 한 계급의 착취의 문제로 제시되며, 그리고 역사는 그 투쟁의 산물로 여겨진다. 다른 한편에서는, (종종 레닌이 노동조합적 의식의 한계성으로 비난했던 것에 의해 특징화되는 노동 계급을 포함한) 하나의 계급동맹이 (아마도 대리인으로서의 매판 부르주아지와 함께) 여타 다른 장소들의 계급동맹을 착취하기 위하여 어떤 장소들에 형성하는 것에 관한 지리적 해석이 존재한다. 다른 계급에 의한 어떤 계급의 착취와 동등하게 다른 장소에 의한 어떤 장소의 착취를 관찰하는 태도의 이론적 정당성은 전혀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리고 공간 해방의 투쟁(예컨대 민족 해방의 투쟁)에 대한 가정은 계급 투쟁의 의미에서 진보적이지만, 그 역의 논리로 아주 찬찬히 살펴보면, 이는 동등한 자격으로 맞설 수 없다. 사실상 후자의 논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투쟁의 수많은 여러 사례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문제를 혼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본인이 생각하기로는 현재 '범지구화'란 용어의 적용이 의미하는 것들 중 하나가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지리적 재조직화라고 본다. 동시에 범지구화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궤도가 진행하는 '자연적인'(natural) 지리적 단위들에 대한 (만약 그 가정들이 이전에 존재했다면) 수많은 그 가정들을 점차 무의미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본주의의 지형이라는 건드리기 어려운 것을 움켜잡기 위한, 그리고 자본 축적과 계급 투쟁의 역학 내부의 본질적 계기로써(그리고 그 역학에 의해 파생적으로 구성되는 어떤 것에 대응하는 형태로써) 공간의 생산을 바라보기 위한 역사적 기회에 직면해 있다. 이는 불명료한 힘을 통해 우리의 사고와 우리의 정치 양자의 논리를 지배해왔던 (그리고 자주 혼동케했던) 감춰진 공간성의 속박으로부터 마르크스주의를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기회이다. 또한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계급 투쟁과 장소간 투쟁 서로를 혼동할 수 있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하며, 그리고 그 투쟁의 지리적 분할과 지리적 법칙을 통해서 계급 투쟁을 억압하기 위한 자본주의의 힘에 맞서도록 한다. 게다가 우리는 자본주의에 고유한 공간·시간적 모순을 이해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이해를 통해 우리 스스로가 보다 나은 입장에 서서 가장 약한 고리를 유리하게 이용함으로써, '창조적'이라 하나 폭력적 파괴를 지향하는 자본주의의 실로 소름끼치는 경향을 분쇄할 수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론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측면 모두에서 이와 같은 문제 의식을 따를 수 있을 것인가? 물론 변화하는 공간성과 재영토화의 이론적 함의를 수용하는 여러 연구물들이 존재한다. 예컨대, 들뢰즈와 가따리(G. Deleuze and F. Guattari)의 {앙띠 오이디푸스(Anti-Oedipus)}의 경우,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의 영토화와 재영토화가 진행 중에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많은 해석들에서 보여주는 바처럼, 이들 논의에서 드러나는 사회적 사고의 재공간화라는 효력이 (이론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측면 모두에서) 마르크스적 정식과 부분적으로 그리고 때로는 확실하게 단절하는 대가로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나는 필연적으로 중심 명제를 폐기하지 않으면서 마르크스 이론과 실천에 공간성을 통합하는 방법이 존재한다는 점을 입증하려고 노력했다. 설사 그 통합의 과정에서 이론과 실천 양자에서 일종의 부분적인 수정이 제기되더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나의 이런 주장에 기반하여 몇 가지 중요한 특징들을 요약해볼 수 있다. 나는 우선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명제들로 시작해볼까 한다. 거기에는 자본의 순환 과정에 대한 유물론적 해석 내부에 깊이 새겨진 이중의 긴장이 존재한다. 이 긴장은 역사-지리적 모순의 강력한 계기들로써, 주기적으로 그리고 불가피하게 폭발한다. 첫째, 자본주의는 회전 시간을 가속화하기 위한, 자본 순환의 속도를 증가시키기 위한, 그리고 결과적으로 발전의 시간대를 혁명화하기 위한 추진을 진행 중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예컨대 생산, 소비, 교환, 커뮤니케이션 등을 위한 정교하고 안정된 기반 하부구조뿐만 아니라 건조환경과 같은) 장기투자를 통해서만이 달성될 수 있다. 게다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주요 전략은 (예컨대 경기 침체 시기에 국가가 시행하는 그 유명한 '공공 사업'과 같은) 장기 프로젝트에서 과잉축적된 자본을 흡수하는 것이며, 이것은 자본의 회전 시간을 단축시킨다. 결과적으로 일련의 특이한 모순들이 존재하는데, 그 모순은 서로 다른 자본들이 기능하는 시간대라는 문제에 집중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그리고 현재에도 어떠한 예외도 없이, 이러한 긴장 상황은 일차적으로 (회전율이 현재는 거의 즉각적인) 화폐와 금융자본을 한편으로, 그리고 상업, 제조, 농업, 정보, 건설, 서비스, 국가 자본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이 양자의 모순관계를 통해서 지켜볼 수 있다. 하지만 모순 관계는 (예를 들면, 통화와 증권 시장간에, 혹은 토지 경작인과 투기꾼간의) 분파들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서로 다른 시간대와 리듬으로 전개되는 자본의 동학들을 조정하기 위한 모든 종류의 기제가 존재한다. 그러나 아주 강력한 금융 부문의 시간대를 최근에 붕괴함으로써 창출된 회전 시간과 시간성의 불균등 발전은 자본주의 국가에 깊게 각인되는 것은 물론이고, 자본의 다른 분파들에게 긴장을 크게 야기하는 환영받지 못할 시간의 압축을 만들어낼 수 있다. 월스트리트가 창출한 시간대를 사회적이고 생태학적인 재생산 체계의 시간성에 반응하는 방식으로 적응시킬 수 없다. 그리고 금융 시장이 창출한 빠른 회전 시간은 노동자들에게 (그들의 고용조건과, 그들의 숙련도 등), 그리고 사회적·생태학적 재생산의 생활세계에도 더욱 심대한 긴장을 조성한다는 점은 말할 나위가 없다. 둘째, 자본주의는 마르크스가 적고있는 바와 같이 "시간을 통해 공간을 괴멸시키기 위하여" 모든 공간적 장벽을 제거하려고 추진 중이지만, 이는 오로지 고정된 공간의 생산을 통해서만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차후에 축적을 원활하게 만드는 지리적 조망을 단지 파괴하거나 재구축하면서, 역사의 특정 시기에 그 자신의 축적의 동학에 적합한 (공간 관계의, 영토적 조직의, '범지구적' 노동 분업과 연계된 장소 체계의, 그리고 기능의) 지리적 조망을 생산한다. 이러한 과정에는 여러 특징적 측면들이 존재한다. 1) 공간 이동의 비용과 시간 감소는 지속적으로 기술혁신의 초점이 되어 왔다. 유료 고속도로, 운하, 철도, 전기력, 자동차, 항공과 제트 수송은 원거리 마찰의 속박으로부터 상품과 사람의 이동을 점차 자유롭게 하였다. 이와 동일한 방향에서 우편 체계, 전신, 라디오, 텔레커뮤니케이션, 월드 와이드 웹(WWW)의 혁신은 이제 정보 이전비용을 거의 제로에 육박하게 만들었다. 2) 이와 같은 움직임을 촉진할 뿐만 아니라 생산, 교환, 분배, 소비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고정된 물리적 기반 하부구조의 구축은 지리적 경관에 대해 꽤 차별적인 힘을 발휘한다. 점점 자본주의적 성장 궤도를 가로막는 지리적으로 조직화된 자원구조와 '제 2의 자연'(second nature)을 만들어내는, 토지에 고정화된 자본, 즉 토지자본 형태로 진행하면서, 더욱더 자본은 공간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하룻밤 사이에 도쿄-요꼬하마, 또는 뉴욕시의 도시 기반 하부구조를 얼마간 해체하려는 생각,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다시 한 번 새로 세우려는 생각은 바보스러운 이야기일 뿐이다. 이러한 하부구조 구축의 효과는 자본주의의 지리적 경관을 더욱 더 시간에 의한 병리적 경화(硬化) 상태로 몰아감으로써, 점증하는 이동의 자유와 주요 모순 관계를 만들어낸다. 그 경향은 특정 장소의 건물들이 강하게 접합되는 정도에 따라, 그리고 장소 충실성(과 장소 특유의 성질)이 정치 행위의 중대한 요인이 되는 정도에 따라 더욱 두드러진다. 3) 세 번째 요소는 영토 조직의 구축이며, 이는 (이것이 유일하다고 볼 수는 없으나) 우선적으로 주권 영토적 (그리고 가끔은 부가영토적) 의지에 따라 동의와 폭력의 수단을 독점화하고 화폐, 법, 정치를 조절하는 국가 권력의 구축에서 이루어진다. 물론 국가에 대한 수많은 마르크스 이론들이 있는데, 그 이론들 가운데 대부분은 마치 가봉과 라이베리아와 같은 국가들을 미국 또는 독일과 동등한 것처럼 다룸으로써, 그리고 세계의 대부분 민족적 경계들이 1870년과 1925년 사이에 만들어졌음을 (그리고 이 국가들 경계의 절반 정도가 단지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서 독단적으로 그어졌음을) 깨닫는데 실패함으로써, 역사와 지리로부터 해로울 정도의 추상화로 빠져들었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1945년 이후가 되서야 독립이 되었고, 그 대다수 국가들은 그 이후로 줄곧 국가를 찾기 위한 작업을 계속적으로 벌여왔다. (하지만 이는 최근 나이지리아나 르완다에서 만큼이나 역사적으로 45년 이후의 프랑스와 멕시코에서 국가를 찾기위한 시도가 이루어졌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각 국가들이 타국가의 자율과 영토 보전을 인정하는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해 독립 주권국이 자본주의 세계에서 공존할 수 있는 당위적 원칙을 세운 것이 사실이었으나, 그 원칙에 따르는 자본주의 세계의 영토 조직을 범지구화하는 과정까지 가는데는 (상당한 폭력을 수반하면서) 수 세기가 걸렸다. 현재 몇몇 논평자들이 주장하는 바처럼, 실제로 (유럽연합과 같은) 초국가적 조직체들과 국민국가 내부의 지역 자치운동들이 스스로 작동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 만큼이나, 그 체계를 낳는 범지구화 과정들은 쉽게 주권국의 원칙들을 해소시킬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범지구화/영토화의 불안정한 과정들을 통해 국가 형성과 해소의 과정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지형에 대한 지속적 작업속에서 영토화, 탈영토화, 재영토화의 과정을 보게 된다. (이는 들뢰즈와 가따리가 {앙띠 오이디푸스}에서 지적했던 근본적 요점들 중의 하나였다.) 내가 보기에 우리가 영토화와 관련한 개념들에 무게를 실어준다면, 불균등 시간적·지리적 발전의 생산과정으로서 범지구화에 대해 훨씬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나는 영토화의 관련 개념들로 가는 것이, 범지구화란 전능한 과정의 더욱 억압적이고 제한적인 언어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면서, 다소 유익한 정치적 결과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본인은 이를 염두에 두면서, '범지구화'란 용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왜 그 용어가 새로운 유혹의 역할을 담당하는지, 왜 그 용어가 최근에 그리 중요하게 취급되는가의 문제로 되돌아 갈 것이다.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중요하고 두드러진 이동이 존재한다. 1) 금융 자유화는 1970년대 초 미국에서 그 당시 내부적으로 일고 있는 스태그플레이션에 대한 강제화된 반응으로써, 그리고 (대개 유럽달러 시장의 제어하기 어려운 성장으로 말미암은) 국제 무역과 교환에 대한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에 따른 강제화된 반응으로써 시작되었다. 내가 볼 때, 금융 탈규제의 물결이 자본에 의해 고안된 의도성이 짙은 전략적 사고라기 보다는, (비록 일부 자본 분파가 다른 자본에 비해 더욱 특혜적 입장에 서있는지는 몰라도) 현실이 주는 특권이라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브레튼우즈는 범지구적 체제였으며, 정말로 브레튼우즈 체제 붕괴하에서 일어난 사실은 (위계적으로 조직되고, 대개 미국에 의해 정치적으로 통제되는) 범지구적 체제로부터 자본주의의 금융 조건들을 훨씬 변덕스럽게 그리고 훨씬 불안정하게 만드는, 시장을 통해 더욱 분산되고 공동의 조정이 가능한 또 다른 범지구적 체계로의 이동이었다. 이러한 이동을 동반했던 수사는 미덕으로서의 '범지구화'란 용어의 선전과 깊게 연루되어 있다. 더 냉소적으로 보자면, '범지구화'가 국제 금융체제에서 필사적으로 필요한 조정을 하기 위한 새로운 선전의 고안물이었다면, (내 자신을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이 용어를 어떤 새로운 것이라고 사기쳐 믿도록 한 것이 다름아닌 금융 압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동시에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점에서는 현재의 금융 압박이 금융시장들(분명한 권력 블록으로 존재하는 일본 공영 영역, 나프타, 유럽연합)에서 진행중인 지역화를 더욱 강조하게 만든다는 점이며, 그리고 자본주의의 압박 시기에 범지구화의 지지자들조차도 범지구화에 대항한 "반발"(backlash)이 (대개는 다양한 인민민족주의의 형태로)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으며, 범지구화는 "모든 것을 파괴하면서 달리는 브레이크 없는 기차"와 동일하게 될 위험에 처해있다고 경고한다.(Friedman 1996, A 19) 2)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그 중에서도 이른바 정보혁명은 전적으로 새로운 요구와 수요에 대한 개념 변화와 함께 생산과 소비 조직의 몇 가지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커뮤니케이션 영역에서 최종적인 '공간의 탈물질화'는 군사적 장치들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나, 그 즉시 다국적 자본과 금융기관에 의해 점유됨으로써 즉각적으로 공간에 걸쳐 그들의 활동을 조정하는 수단이 되었다. 그 효과는 이른바 탈물질화된 사이버공간을 형성하는데, 그 공간 내에서는 일종의 중요한 거래(일차적으로 금융거래과 투기거래)가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텔레비전에서 생중계되는 혁명과 전쟁을 시청하게 되었다.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의 공간과 시간은 미디어 권력의 독점화가 (인터넷의 경유를 통한 자유주의적 민주화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더욱 더 문제시되고 있는 세계에서 내파(內破)하고 있다. '정보혁명'의 이념은 최근 강력하게 제시되고 있으며, 정보사회가 최고의 자리로 군림하면서 범지구화의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여명으로 간주되곤 한다. 이것은 너무도 많은 것을 수월하게 이루도록 도왔다. 그 새로움 모두가 깊은 인상을 심어주지만, 철도와 전신, 자동차, 라디오, 전화가 태동했던 시기에 있어서도 그 새로움의 인상은 동일했다. 이 초창기의 기술적 사례들은 교훈적인데, 그 이유는 이들 각각이 그 나름대로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 생산과 소비가 조직되고 정치가 실행되는 방식, 그리고 사람들간의 사회 관계가 광범위한 규모의 사물들간의 사회 관계로 전환되는 방식 등을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 정보 기술에 반응하여 작업장에서의, 문화 형식들 내에서의 노동과 생활간의 관계가 매우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이 미국내 우익의 정치적 안건에 핵심적 구성 요인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은 흥미롭다. 뉴트 깅그리치(앨빈 토플러가 그의 자문을 맡고 있으며, 토플러의 우익 유토피아적 이상주의는 전적으로 '제 3 물결'의 정보혁명 이념에 의존한다.)는, 새로운 기술이 고유의 해방적 속성을 지녔지만, 정치적 속박으로부터 이 해방력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는 '제 2 물결'의 산업 사회의 모든 제도들― 정부 규제, 복지 국가, 임금 단체 교섭의 관행 등등 ―을 해체시키는 일종의 정치적 혁명을 추구하는 것이 필수적이라 얘기한다. 우리는 이것이 바로 생산제력의 변화가 사회 관계와 역사를 추동한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을 통속화한 형태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아마도 마가렛 섀처의 "어떠한 대안도 없다"라는 그 유명한 선언에 가장 잘 부합하는) 이 우익적 수사의 강한 목적론적인 논조 또한 무시해서는 안된다. 3) 또한 주기적으로 자본주의 역사에서 일어났던 그 각각의 상품과 사람의 이동 비용과 시간은 단계적으로 차츰 줄어들게 되었다. 이는 생산, 소비, 인구 등의 입지들을 보다 빠르게 조정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이전의 공간적 속박으로부터 모든 종류의 활동들을 자유롭게 만들었다. 범지구화 과정의 역사가 기록될 때, 공간을 극복하기 위한 이 단순한 이동이 이른바 정보혁명 그 자체(per se)보다 (실제로 둘 다 중요하지만) 훨씬 중요하게 간주될 것이다. 범지구화 과정에서의 세 가지 이동축은 여러 가지 중요한 특징들을 수반했는데, 아마도 이는 일차적으로 노동 인력에서 파생된 것에서 가장 잘 관찰할 수 있다. 1) 상품과 정보 이동을 축소된 비용으로 풍부히 이용할 수 있도록 (수많은 소규모의 기업들 또한 새로운 기회를 잡았으나, 특히 다국적 자본의) 생산과 조직 형태들이 전환되었다. 1960년대에 시작한 현지 법인생산(offshore production)이 갑자기 더 한층 일반화되었다. (일본의 경우 최근 현지 법인에 의한 생산이 더욱 강하게 확산되고 있다.) 종종 국가의 경계를 초월하는 합병, 인수, 혹은 합작 생산협정을 통해 기업의 집중력이 증가하는 도중에도, 생산 체계, 노동 분업, 과업의 전문화란 형태로 지리적 분산과 파편화가 계속되었다. 더더욱 기업의 변덕스러움에 개별 공간들이 취약해지면서, 기업은 공간을 통제하는데 훨씬 강한 힘을 지니게 되었다. 범지구적 텔레비전, 범지구적 자동차는 정치·경제적 삶의 일상적 측면으로 자리잡았다. 어떤 장소에서의 생산 중지와 어떤 다른 장소에서의 조업 개시는 친숙한 얘깃거리가 되었다. ― 지난 20년 동안 꽤 대규모의 생산 공정들의 이동이 과거에 비해 네 배 혹은 다섯 배로 증가했다. 2) 전세계의 임금 노동은 채 20년도 못되어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이는 부분적으로 급속한 인구 성장을 통해서 이루어졌으나, 점점 더 전세계의 인구 중, 예컨대 구소비에트 연방, 중국과 함께 남한, 대만, 아프리카에서의 임금 노동력(특히 여성)이 유입됨으로써 이루어졌다. 범지구적 프롤레타리아는 (모든 사회주의자의 눈에 희망이라는 강한 섬광을 확고하게 심어야만 했던) 이전 그 어느 때 보다 훨씬 거대해져 가고 있다. 하지만 이 계급은 극도로 여성화되고 있다. 또한 이 계급은 지리적으로 분산되어 있으며,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연유로 단일화된 운동으로 조직화하기가 훨씬 어렵다. 3) 인구이동 또한 범지구적 규모로 진행 중에 있다. 미국은 1920년대 이후로 현재 자국의 외국인 출신 비율이 최고치에 이르렀으며, 외부의 인구를 억제하려는 모든 종류의 시도가 이루어진 반면 이민 인구의 엄청난 유입을 막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국가간 경계는 사람과 노동 보다 자본에 있어서 더 허술하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그 경계는 전반적으로 허술한 편이다. 런던, 파리, 로마는 이전 보다 훨씬 더 이민 도시화되고 있으며, 이런 사실로 말미암아 이전의 어떤 때보다 이민 유입이 (노동 운동권을 포함하여) 전세계의 핵심적인 문제로 부상하고 있다. (심지어 도쿄에서조차도 이와 같은 과정에 있다.) 또한 인구이동이란 동일한 표상을 통해서 보자면, 이것에 의해 야기된 중요한 민족적, 인종적, 종교적, 문화적 다양성에 직면하여 사회주의 운동이 노동을 조직화하는데 쉽게 해결책을 찾기가 어려운 특수한 문제점들을 종종 드러내고 있다. 4) 도시화는, 특히 1950년 이후 전세계 인구의 공간 조직 측면에서 중대한 환경적,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혁명의 창출을 가속화한 도시화의 국면과 함께, 점차 초도시화(hyperurbanization)로 옮겨가고 있다. 도시에 거주하는 인구 비율이 전세계적으로 30년 사이에 두 배로 늘어났으며, 그리고 우리가 이제까지 상상도 못할 것으로 여겼던 엄청난 규모의 인구 집중이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어 1870년대에 맨체스터나 시카고에서 계급 투쟁을 조직한다는 것은, 2천만 이상 내지는 이에 근접하는 인구를 지닌 현대의 상 파울로, 카이로, 라고스, 샹하이, 봄베이 등의 도시에서 계급 투쟁을 조직하는 것과는 (혹은 대의 민주주의제도를 발전시키는 것과는) 꽤 다른 문제였다. 5) 단지 냉전의 종결로 인해서 전세계의 영토화가 변화한 것으로만 볼 수는 없다. 아마도 국가의 변화하는 역할이 가장 중요했는데, 국가는 자본(특히 금융과 화폐자본)의 이동성을 통제하기 위한 전통적 권력을 (다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상실했다. 그 결과 국가 운영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화폐자본과 금융에 의해 더욱 강도높게 제약을 받았다. 구조조정과 재정긴축이 국가가 벌이는 게임의 상징이 되었고, 다소 유리한 기업 풍토를 증진하기 위한 방도들을 추구하는 역할로 국가의 지위가 격하되었다. 현재 일본에서조차도 본국의 기지로부터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비교적 값싼 여러 노동지역으로 생산공정들을 신속하게 이동시키는데 분주하다. 여기에서 '범지구화 테제'는 사회주의자들, 복지국가론자들, 민족주의자들 등을 때려눕히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수단이 되었다. 강제로 긴축정책을 수행하려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요구에 영국 노동당이 굴복당했을 때, 이는 재정 정책에 대한 민족적 자율성에 제한이 가해진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1981년 이후 프랑스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상황에 처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런 연유로 빈자를 위한 복지는 대개가 자본에게 넘겨주는 공공 보조금으로 대체되었다. (최근 메르세데스-벤츠는 자신의 자사를 유치하기 위해 설득 작업에 나선 알라바마주로부터 2억 5천만 달러의 일괄 보조금을 지급받았다.) 재영토화는 국민국가의 틀 안에서만 멈추지 않는다. 경제, 환경, 정치의 범지구적인 관리제도들(나프타와 유럽 연합 등)은 지역 블록들과 동일하게 민족을 초월하는 규모로 증식하고 있으며, 동시에 강력한 분산화 과정이 (때로는 지역 자치를 위한 ― 일부는 극단적으로 분리주의적인 ― 정치 운동을 통해서, 혹은 미국에서처럼 연방체계 내부에서 각 주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 게다가 현재 국가 조직은 시·공간 압축과 범지구적 상품화에 직면하여 인종적, 문화적 정체성과 환경적 특성을 방어하기 위한 핵심적 수단으로 여겨진다. 다른 한편 국가는 범지구화에 대항하여 인민민족주의에 호소하는 '반발'의 근원적 장소로 간주된다. 6) 개별 국가들이 자신의 권력 일부를 상실한 반면, 내가 명명한 지정학적 민주화(geopolitical democratization)란 점에 있어서는 새로운 기회를 창출했다. 핵심부 권력이 여타 권력들에 제재를 가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지고, 주변부 권력들 스스로가 자본주의의 경쟁 게임에 참여하는 것이 보다 수월해지고 있다. 화폐 권력은 "평등주의적이고 냉소적"이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바로 그 때 강고한 모순이 야기된다. 즉 질적으로 "화폐는 그 효력에 있어서 어떠한 한계도 없는" 반면에, 개인 (그리고 국가)의 수중에서 화폐의 양적인 한계는 이 둘(개인과 국가)의 사회적 권력을 중대한 방식으로 제한하거나 증대시킨다. 예컨대 금융의 탈규제가 주어진 상황에서, 일본이 주요 금융 권력으로서의 영향력 행사를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개별 국가들은 더욱 더 자국의 경쟁력(범지구화 논의에서 매우 중요하게 된 하위주제)에 관심을 가져야했다. 경쟁적 국가들만이 범지구적 경쟁에서 성공할 수 있다. ― 그리고 대개 이는 강한 노동 규율을 가진 저임금 국가들이 여타 국가들보다 우위에 서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노동 통제는 범지구화를 옹호하는 진영에서 사회주의적 주장을 수세로 밀어넣는데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현안이 되고 있다. 기업주의적 원칙하에 조직된 권위주의적이고, 상대적으로 동질적인 ― 싱가포르, 홍콩, 대만과 같은 ― 영토들은, (현 자본주의를 다음과 같이 명명한다면) '자유시장의 스탈린주의'(free-market stalinism)가 자본주의적 범지구화 과정에서 더욱 더 규범이 되어가는 시대에 상대적인 번영을 누리고 있다. 이 경향들에 관해서 두 가지의 폭넓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현재 진행중인 양적인 변화 과정을 인정하더라도, 우리가 진짜 논의해야만 할 사안은 이 양적 변화 과정이 (우리의 열망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의 이론적 개념들과 정치적 장치들에 대한 급격한 수정을 요구하는 동시에, 자본주의의 질적 발전의 새로운 시대를 향해 우리 모두를 함께 데려갈 수 있을 정도로 이러한 변화들이 아주 거대하고, 충분한 시너지를 일으키는가이다. 이에 대한 이상적 개념화는 우리 주위의 모든 '포스트류'(posts)(예컨대, 포스트산업주의, 포스트모더니즘)에서 가장 먼저 관찰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양적인 이동에 의해 구성된 질적인 전화가 과연 이루어졌는가? 이 질문에 대한 내 자신의 답변은 조건부를 단 "그렇다"이다. 실지 생산양식과 이와 관련된 사회관계에 어떠한 근본적인 혁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그리고 만약 실제로 어떤 질적인 경향이 있더라 하더라도, 그것은 자본 축적의 기본 동학과 관련하여 전세계 인구의 대부분을 영구적으로 과잉화하면서 자본의 세력권내로 모든 사람들(그리고 교환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끌어당기는 21세기적 취향과 딱 어울리는 19세기초 자본주의적 가치를 다시 재탕하는 경향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국제 자본이 동시대의 범지구화란 강력한 이미지를 지닌 채 공포심을 유발함으로써, "모든 것을 파괴하면서 달리는 브레이크 없는 기차"가 활동하게 되는 지점이다. 우리가 이러한 한계 혹은 단서를 수반하는 질적인 이동에 대한 논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문제는 이론과 정치 모두를 어떻게 재공식화할 것인가에 있다. 그리고 내가 제출한 '범지구화'로부터 자본주의의 '불균등 시·공간 발전'으로의 언어 이동이 이 지점에서 제안되어야만 한다. 그 이유는 불균등 지리적·시간적 발전의 조건들이 특수한 어려움을 노정함과 동시에 정치 조직화와 정치 행위의 풍부한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 어려움들을 이해하는 것은 정치의 적절한 정식화에 있어서 중요하다. 좌파에게 있어서 이 모든 변화들의 일차적 중요성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계급이 상대적으로 누리는 특권적 지위가 나머지 세계의 노동 조건에 더욱 더 좌우된다는 점이다. (이 변화는 대체로 지난 20년을 넘게 뉴욕과 로스엔젤레스에서 산업 조직의 기본 형태인 착취공장들이 재출현하는데서 관찰할 수 있다.) 이차적 중요성은 선진 자본주의내에서 삶의 조건들이, 지방의, 지역의, 그리고 민족의 경제적 전망에 대해서 극도로 즉흥성을 조장하는, 자본주의의 '창조적 파괴' 능력의 완전한 공세에 놓여 있다는데 있다. (올해의 호황 도시가 내년에는 빈곤 지역이 된다.) 이 모든 것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정당화는, 가능한한 어떠한 국가의 개입도(그리고 여기에 신자유주의자들은 ― 대개는 그들이 독점에 대해 운위하지 않지만 ― 독점력을 덧붙여야만 한다) 배제한다면,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모두의 이익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그 효과는 풍요와 과시적 소비를 상징하는 특수한 기술이 일련의 열망들을 지닌 가능성으로써 즉각적으로 전세계에 걸쳐 연결되는 동안에, 불균등 지리적 발전의 폭력성과 창조적 파괴(예를 들어, 생산의 지리적 재조직화를 통해)가 여타 다른 장소와 똑같이 자본주의의 전통적인 중심부에서도 널리 감지된다는데 있다. 범지구화의 홍보자들조차 여기서 반발이 발생할 수 있는 조건을 다루고 있는 것은 전혀 놀랄만한 일이 못된다. 최근 클라우스 슈밥(Klaus Schwab)과 끌로드 스마쟈(Claude Smadja)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경제적 범지구화는 임계(臨界) 국면에 진입하고 있다. 이 범지구화의 효과에 대항해 그 반발의 수위가 높아짐으로써, 특히 산업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수많은 국가들의 경제 활동과 사회 안정에 매우 파괴적 충격으로 위협하고 있다. 이 민주주의 국가들의 분위기는 일종의 무능과 불안인데, 이는 질적으로 새로운 대중적 정치인들의 등장을 부채질하고 있다. 이 분위기는 쉽게 봉기로 전환될 수 있다.(Friedman 1996, A19에서 인용.) 사회주의 운동은 물론 이러한 혁명적 가능성을 활용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사회주의 운동은 지역화된 파시즘의 노골적 호소로 에워싸인, 여러 형태의 다양한 우익 인민민족주의적 경향에 타격을 가해야만 한다. 운동은 사회적으로 정당한, 그리고 생태학적으로 민감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려는 계급 투쟁에 초점을 맞추어야만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일을 행하기 위해서 사회주의 운동은, 조직화를 너무나도 불안정하게 만들며 극히 어렵게 만드는 불균등 시·공간 발전의 엄청나게 강력한 조류들과 결합해야만 한다. 마르크스가 주목했던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하여 부르주아지의 범지구화와 투쟁해야 한다는 필연성과 정확히 동일한 방식으로, 사회주의 운동은 자본주의 계급이 공간에 유연하게 대처했던 바로 그만큼 공간의 이론과 그 정치적 실천의 유연한 방식을 탐색해야만 한다. 본인은 이러한 운동의 단초를 제공하는 유용한 길이 있다고 믿는다. 먼저 어디서 반(反)자본주의적 투쟁이 벌어지는가를 질문하라. 본인은 그 답이 모든 곳이라 생각한다. 전세계 어느 곳을 막론하고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분노와 불만이 표출되지 않는 곳이 없으며, 일부 장소에서의 반자본주의 운동은 나약하기 보다는 강고하게 뿌리내리고 있다. 지방의 '전투적 당파성'(그리고 본인은 의도적으로 레이몬드 윌리암스의 문구로 돌아가려 한다)은 미시간 삼림의 국민군 운동(militia movement, 이 운동은 대개가 인종주의적이고 배타적인 동시에 반자본주의적이고 반기업적인 폭력성을 갖고 있다)에서부터 나프타, 세계 은행의 개발 계획 등에 대항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는 멕시코, 인디언, 브라질 농부들의 운동에 이르기까지 도처에서 관찰할 수 있다. 그리고 자본 축적의 핵심부내에서 조차 수많은 계급 투쟁이 진행 중에 있다. (1995년 가을 프랑스에서 벌어진 엄청난 전투성의 폭발에서 1996년 초 뉴욕의 사무실 청소부들의 파업에 이르기까지 계급투쟁의 사례는 다양하다.) 만약 우리가 자본주의의 불균등 시·공간 발전의 틈새를 주의깊게 살펴본다면, 현실의 들끓어오르는 저항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저항세력의 전투적인 면모에서 불구하고, 이 저항은 종종 당파적으로 남아 있으며(때로는 너무나 극단적인 당파성으로까지 나아가며), 그리고 항상 배타적이고 인민민족주의적인 정치 운동의 외곽에서 이와 유착하려는 위협을 지닌다. 저항이 반자본주의적이라 하여, 꼭 친(親)사회주의를 일컫거나 어떤 자본주의적 대안이 필요로 하는 이해 지점에 다가서 있다는 점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광범위한 기초위에 놓인 반자본주의 운동은, 반자본주의적 대안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라고 얘기할만한 응집력과 구체적 전망이 결여돼 있다. 또한 방향성이 결핍되어 있다. 즉 어떤 요소의 운동이 다른 요소의 운동을 혼동케 하고, 때로는 억제하기도 하는데, 이는 자본 계급의 관심사를 위해 지배의 분할통치 형식의 유지를 보다 수월하게 한다. 간단히 말해서 반자본주의 운동은 어떻게 서로 다른 투쟁이 결합할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반자본주의의 범지구적인 안건을 형성할 것인가에 대해 이해할만한 합의된 틀거리가 결여돼 있다. 마르크스 운동의 역사적 강점들 중 하나는, 서로 나뉘어지며 다수의 목적들을 지닌 다양한 투쟁을 범지구적 목적을 지닌 보다 보편적인 반자본주의 운동으로 종합(synthesis)하려는 지속적인 헌신에 있었다. 이제 본인은 이러한 전통으로부터 얻은 유산을 통해 특히 현재의 위기 상황에 적합하게 여겨지는 수많은 논의들 가운데 그 핵심만을 간추려내고자 한다. 투쟁 범위와 영역은 자본주의의 동학, 그리고 범지구적 조건들이 변화함에 따라 영속적으로 변하기 때문에, 반자본주의적 종합으로 나아가는 전(全) 과정 또한 지속적이어야 한다. 이 마르크스적 전통은 종합으로 나아가는 전 과정에 있어서 매우 막대한 공헌을 하는데, 그 이유는 마르크스적 전통이 다중성과 차이들 내부에서 일반성을 발견하게 하는, 그리고 착취와 억압의 제 1·2·3차적인 조건들을 확인하게 하는 도구들을 개척해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나는 레이몬드 윌리암스가 언급한 "철저하게 함께 모인 당파적 이익의 방어와 향상이 사실상 보편적 이익"이란 문구를 상기하면서, 제기된 중요 임무로써 "철저하게 함께 모일"(1989, 249)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 내용은 다시 새롭게 구성될 필요가 있다. 우선 우리는 현재 (엄청난 자기파괴, 평가절하, 도산을 내용으로 하는) 자본주의적 발전의 궤도뿐만 아니라 점차적으로 다운사이징, 실업, 서비스의 붕괴, 삶의 지표와 환경의 질적인 저하 등의 폭력 상황에 취약해진 대중의 영역 내부에 현존하는 불균등 시·공간 발전과 그 강력한 모순의 생산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특수 상황을 뛰어넘어서 이와 같이 계속되는 손상의 질적 체계와 양상(pattern)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아마도 그 양상은 범지구화를 통해 작동하는 신자유주의의 영향력을 간파하므로써 가장 최선의 답을 얻을 수 있다. 게다가 우리는 이러한 분석을 외부로 돌려 다양한 계열의 문제들로 확대하여 다룰 필요가 있다. 우리는 에이즈, 지구 온난화, 지역 환경의 훼손, 지역 문화전통의 파괴와 같은 문제들이 얼마나 고유의 계급 문제를 드러내는지, 그리고 사회 행위의 광범위한 스펙트럼에 걸쳐 계급투쟁의 연대를 구축하는 것이 얼마나 억압의 조건들을 크게 경감시킬 수 있는지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다원주의에 대한 호소가 아니라, 우리가 지닌 광범위한 계열의 반자본주의적 관심사의 계급적 내용을 밝혀내려는데 있다. 이 주장은 급진적 좌파 내부에서 저항에 부딪힐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계급의 정식화에 관한 주장이 (학계에서 한물간 퇴물로 거부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과거의 전위적 부류에서 나타나는 순수 분파주의로 물러나는 사태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자본주의적 투쟁에서 "하나를 위한 모두, 그리고 모두를 위한 하나"는 계속해서 어떤 정치 행위의 효과적인 중심 슬로건이 되고 있으며, 이 문구는 일종의 계급 정치를 내포하고 있다. 이 종합에 이르는 전 과정은 그렇지만 일상 생활의 유기적 조건하에서 그 과정 자체를 다시 공고히 해야만 한다. 이는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우리에게 유산으로 남긴 추상적 개념들을 포기하지 않고 대중투쟁에 몰입하므로써 발생하는 이 개념들을 재유용화하고 재평가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 일부 투쟁들에서는 전통적으로 프롤레타리아적이라는 것의 의미가 표면에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점에서 마르크스주의는 개념, 제도, 실천, 정치등 그 자신에 각인되고 고정화된 자본과 투쟁해야만 하는 이론적 경화의 경향을 지니는데, 이 고정화된 자본은 한편에서 뛰어난 자원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행위의 도그마적인 장벽으로 기능할 수도 있다. 우리는 유용한 것, 그리고 우리의 지식과 정치 등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으로 고정화된 자본 내부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으며, 때론 포기할 것과 유지할 것에 관해 격렬한 논의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아직도 이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이제는 시작되어야만 한다. 예컨대 본인이 서두에서 꺼낸 전통적 마르크스의 범주들―제국주의, 식민주의, 신식민주의―은 너무나 단순화하여 등장함으로써 불균등 시·공간 발전의 복잡함을 포착할 수가 없다. 아마도 그 범주들은 여전히 그렇게 단순화한 형태로 등장하겠지만, 특히 지난 30년간에 걸쳐 자본주의의 재영토화와 재공간화로 말미암아 이 전통적 범주들이 너무나도 조야하게 됨으로써, 현재 계급투쟁이 나타나는 지정학적인 복잡성을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사회주의와 반자본주의 운동을 무력화하는 방식으로 '범지구화'란 용어가 앞서 제기한 범주들과 동일한 오류를 반복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 수사에 대항한 역의 논리로 정치적 주도권을 다시 쥘 수는 없다. 설사 제국주의와 신식민주의란 용어가 갖는 정치적 함의가 범지구화란 용어 보다 뛰어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여기서 나는 또 한번, 극복될 과업을 판단하며 결합될 필요가 있는 다양한 전투적 당파성의 정치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불균등 시·공간 발전(혹은 보다 단순하게 불균등 지리적 발전) 개념이 유익하다고 믿는다. 마지막으로 나는 한 가지 다른 조직적 관점을 들고자 한다. 마르크스적 개입의 전통적인 방법은 전위적 정치 정당을 거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의적 목적들을 지닌 반자본주의 운동에 있어서 단일의 목표, 하나의 목적, 단순한 지향점을 상위에 놓는데 어려움이 야기되었다. 마르크스적 전통내에 많은 비판자들이 지적했던 바처럼, 마르크스주의의 해방적 추진력은 그 자신 속에 부정(negation)의 위험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주의적 발전에 있어서 인류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은, 차이들을 억누르기 보다는 차이들 사이와 차이들 내부에서의 논쟁 영역을 개방화하는 것을 포함하여, 차이의 생산을 개방화한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핵심이다. 근본주의로의 우익적 회귀가 보여주는 것처럼, 이는 때로 우익이 주장하는 류의 것이다. ― 비록 우익이 이를 실천으로 옮기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우익적 주장에서의 힘을 주목해야 한다. 예컨대 상품화된 문화적 일탈에 대응하는 실제적 일탈의 생산은 반자본주의적 투쟁의 한 가지 목표로 쉽게 놓여질 수 있다. 단일의 동질적인 사회주의적 인간형을 만들어내려는 목표는 결코 현실적이지 않으며, 만약 이러한 목표가 유용하다면 보다 주의깊은 절합을 필요로 한다. 결국 자본주의는 상대적으로 동질적인 자본주의적 인간형을 생산해내는 헤게모니적 힘을 가지고 있으며, 이렇게 모든 존재들과 모든 문화적 차이들을 보편적인 상품화된 토대에 단순히 환원하려는 경향은 반자본주의적 여론에 표적이 되어 왔다. 사회주의적 대의는 확실히 어떤 유사한 조건을 창출하려는 것만큼이나 그 느슨한 동질성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 대의는, 대조되지 않은 상대주의나 구속받지 않는 포스트모던적 절충주의에 대한 호소가 아니라 일반성/차이(전자는 보편성이며 후자는 특수성)의 관계들에 대한 깊이있는 논의를 호소하는데 있다. 그리고 이 점에서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 사회 관계가 발현되는 방식, 그리고 인간의 잠재 능력이 현실화하는 방식을 위한 대안적 전망으로서 사회주의 그 자체가 개념화 작업의 초점이 된다. 아직 우리는 사회주의적 전위를 몹시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우리는 단일의 목표를 내놓는 과거 전위 정당식의 형태를 꼭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반면에 우리는 데리다(J. Derrida)의 "지위도 없는, 명칭도 없는, 이름도 없는... 정당도 없는, 나라도 없는, 민족 공동체도 없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환상만으로 무장해서는 제 구실을 할 수 없다. 이글턴(T. Eagleton, 1995, 37)이 강조한 바와 같이, 이와 같은 데리다의 주장은 "최후의 포스트구조주의적 환상이다. 즉 그것은 모든 정식화된 담론을 초월한 반대이며, 약속 이행 그 자체를 거스를 수 있는 약속이며, 도래할 것과 마찬가지로 최후의 어떤 것을 행함으로써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편이 훨씬 좋을 수 있었던 메시아에 대해 우리가 영원히 흥분된 채로 지닌 열려있음이며, 그리고 너무 체계적인 것 혹은 아주 단순히 '정통의' 것이 부재한 저항"이다. 데리다에게 있어서 이같은 주장을 가능케 하는 것은, '변증법적 유물론'으로부터 유형화되고 조직화된 정치의 토착성과 역사적·지리적 조건들의 모든 유형화된 감각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순수한 이상주의가 된 데리다 유형의 관계적 변증법과 결별하고, 사회생태적이고 정치경제적인 변화의 역사적 지형에 힘을 부여하는 모든 문제가 사고와 담론으로 환원되는 이른바 '새로운 이상주의'를 산출하는 것에, 그리고 사고의 변증법적이고 관계적 방식에 기초하여 등장한 이 데리다류의 전위적 경향에 반대한다. 우리는 이 특수한 형태의 전위주의를 버려야 하는데, 이 전위주의는 이제 학계에서 너무나 유행이어서 학계의 사고와 이상성의 흐름에 몰입한다는 것 자체가 다소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는 조직, 제도, 노선, 계획, 형식화된 구조 등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이 것들을 만들어낼 필요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행동들은 인간 행위가 전개되는 구체적인 역사적이고 지리적인 조건들에 굳게 기초해야 한다. 공산당의 전통적 전위와 이상화된 전위(이른바 데리다의 유령) 사이에는 필사적으로 계몽을 부르짖는 정치조직과 정치투쟁의 영역이 놓여 있다. 이 영역은 가능성으로 충만하다. 여기에는 우리의 주의를 끄는 몇 가지 본질적인 운동들이 존재한다. 예컨대 1996년 1월 30일자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EZLN)의 "신자유주의에 저항하고 인간애를 옹호하는 전세계의 모임, 즉 전 범위에 걸쳐 범지구화를 통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대륙간 회의"에서의 글을 상기하라. 그들의 주장은 어떻게 화폐 권력이 도처에서 "존엄성을 해치고, 정직성을 공격하고, 희망을 압살하는가를" 지적한다. "신자유주의로 재명명되고, 특권, 부귀, 면죄부가 모여 이루어진 역사적 범죄는 비탄과 절망을 보편화한다." '범지구화'란 이름은 "압살하고 무시하는" 자본의 "현대전"을 가리킨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신자유주의는 우리에게 인간애 대신에 주식 시장의 가치 지표들을, 존엄성 대신에 범지구적 비탄을, 희망 대신에 공허를, 삶 대신에 국제적 테러를 제공한다. 사빠띠스따는 "우리가 희망의 인터내셔널을 제기해야 한다"고 결론내린다. 만약 신자유주의적 범지구화의 폭력을 당한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함께 모일 수만 있다면, 그들은 이 "모든 것을 파괴하면서 달리는 브레이크 없는 기차"의 시절이 끝날 때가 머지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불균등 지리적 발전의 변화하는 영역에서 반자본주의적 투쟁을 조직화하고 종합하는 작업은 빠르게 진행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이제 어떠한 전위 정치조직을 중심에 놓아야 하는가에 대한 일이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작업을 해야만 한다. 자, 이제 그 작업을 시작할 때다! 참고문헌 Amin, S. 1974. Accumulation on a World Scale,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Cardoso, F. and Faletto, E. 1979. Dependency and Development in Latin America,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Deleuze, G. and Guattari, F. 1984. Anti-Oedip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New York: Viking Press. Derrida, J. 1994. Specters of Marx, London: Routledge. Eagleton, T. 1995. "Jacques Derrida: Specters of Marx," Radical Philosophy 73: 35-37. Emmanuel, A.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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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으로서의 가상현실

By Frank Biocca & Mark R. Levy, Communication in the age of virtual reality (1995)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으로서의 가상현실 (이광석 옮김) "미디어"? 당신은 종종 이 거대하고, 와이어드되고, 강력한 동물에 관해 언급하는 것을 읽거나 듣는다. 그러나 "미디어"란 말의 대중적 사용은 자칫 우리를 잘못 이끌 수 있다. 우리는 이 문구를 때때로 의사소통하는데 필요한 기술적 도구(예를 들어 점토 clay나 비디오 테이프)뿐만 아니라 매체의 내용물(예를 들어 뉴스, "폭력성" 드라마)과 그 매체를 지원하는 조직체(예를 들어 공중파 네트워크, 케이블 회사, 혹은 "언론")를 뜻하는데 사용한다. 심지어 미디어란 용어는 텔레비전과 같은 전송채널 또는 인터페이스를 둘러싼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전 체계를 포괄하는데 쓰이기도 한다. 문제점: 이 용어는 너무 많은 요소를 융합하고 있다. 가 상현실(VR)이란 용어도 유사한 문제점을 지닌다. 사람들은 가상현실의 전망을 논할 때 종종 그 기술의 서로 다른 수준 사이를 넘나든다. 혹자는 부분적으로 인터페이스 하드웨어(예를 들어 머리에 쓰는 디스플레이), 그 응용(예를 들어 의학 화상(畵像), medical imaging), 가상현실 산업(예를 들어 가상현실 오락산업), 혹은 가상현실 기술을 이용하면서 등장하는 문화환경(예를 들어 가상소설, 사이버공간, 사이버펑크 등)에 관해 얘기한다. 가상현실이라는 문구는 점차 기술의 일부가 아니라 현재 등장하고 있는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으로 여겨진다. 커 뮤니케이션 시스템이란 무엇인가? 그림 2.1은 그 시스템의 기본 요소를 설명하고 있다.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은 커뮤니케이션 인터페이스, 전송 채널, 그리고 조직적 하부구조를 그 내용으로 한다. 각각의 구성요소는 그 자신의 동학과 행위자를 지닌 실제적인 하부체계이다. 그림 2.1을 이용하여 우리는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으로서의 가상현실이 출현하면서 맞닥뜨린 몇 가지 문제를 논의하고, 이 책의 각 개별 장들이 어떻게 가상현실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의 다양한 측면에 빛을 발하기 위한 시도를 하는지에 대해 전체적인 개관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상현실 인터페이스 커뮤니케이션 인터페이스는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커뮤니케이션 인터페이스 = (물리적 미디어, 코드, 정보) + 감각전달sensorimotor 통로 맥 루한(1964, 1966, 1988)은 신체가 근본적인 커뮤니케이션 인터페이스이고 물질 세계가 그 신체의 내용임을 분명히 했다. 맥루한에게 있어서 모든 미디어는 "감각의 확장" (혹은 보다 중요하게 감각전달 통로이다. 대다수는 가상현실이 인터페이스 설계에 대한 근본적이고 흥미있는 접근을 구체화한다고 생각하는데, 이 때 가상현실의 초점은 감각의 확장에 맞춰진다. 그러나 가상현실은 메타매체 metamedium의 출현을 향한 텔레비전, 컴퓨터, 그리고 전화와 같은 커뮤니케이션 인터페이스를 총체적으로 혁명화 하기위한 단지 한 측면일 뿐이다. (Kay, 1984; Kay & Goldberg, 1977). 현재 등장하는 메타매체에 해당하는 가상현실의 형태는 전자의 바다에 뛰어들어 탐험할 수 있는 잠수복과 동일하다. 가상현실을 차별적으로 만드는 것은 메타매체의 진보로 나아가는 목적지를 분명하게 구체화한다는 점이다. 1장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가상현실은 기술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목적지이다. 가상현실 인터페이스를 설계하는 궁극적 목표는 단지 인간의 감각전달 통로의 완전 몰입을 통해 컴퓨터로부터 생생한 경험을 하는 것이다. 이상적인 시스템에서 신체는 커뮤니케이션으로 감싸여지고 정보로 맥박친다. 미디어는 항상 외부 환경이었다. 다시 말해서 라디오와 텔레비전 두 매체는 그 매체가 이용되는 방들과 그 매체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지배한다. 그러나 가상현실의 환경은 인간의 감각들을 에워싼다. 낙관론자는 가상현실이 감각을 둘러싼다고 말할 것이다. 따라서 비관론자는 가상현실이 감각을 낚아채어 간다고 말할 것이다. 가 상현실 인터페이스의 논의는 항상 근본적인 커뮤니케이션 미디어, 즉 신체와 그 신체의 감각전달 통로가 확장되는 방식에 대한 문제로 돌아간다. 감각전달 통로가 어떻게 물리적 미디어, 코드, 그리고 가상현실 기술의 정보와 상호작용하는가? 바이오카와 드레이니 Biocca & Delaney가 구성한 4장의 내용은 가상현실의 물리적 미디어, 즉 가상현실의 몰입을 가능하게 하는 입·출력 장치, 머리에 쓰는 디스플레이, 공간 오디오 spatial audio, 포지션 센서 등의 장치를 연구한다. 4장은 가상현실에 대해서 서로 다른 커뮤니케이션의 모든 논의를 전개하는 기본적인 질문에 답하려 한다. 즉 어떻게 가상현실 기술이 작동하는가? 또한 이 질문을 미래형으로 바꾸면, 어떻게 가상현실 기술이 진전할 것인가?라고 묻게 된다. 4장은 이미 논의된 인터페이스의 정의가 옳다고 여긴다. 4장의 논의는 센서 정보와 각 구성요소가 감각전달 통로의 정보욕구가 어떻게 완전히 일치하려 애쓰는 가에 그 초점을 둔다. 4장에서는 어떻게 가상현실 출력장치가 감각을 깜쪽같이 속이려 하고, 어떻게 입력장치가 이용자의 신체를 가상세계에 보다 깊게 빠져들게 하는데 조력하는가이다. 기술 발전의 경향은 정신지각적 설계의 요청으로 인해 주목받는다. 이 새로운 인터페이스에서 코드는 어떤가? 여기에는 임의적인 센서의 "자극" 그 이상이 있다. 물리적 미디어는, 정보를 내포한 송·수신 패턴을 가지면서, 감각에 대해 일종의 모르스식 코드를 치고 있다. 즉 머리에 쓰는 디스플레이(HMDs), 우리 귀에 정보를 발신하고 소리내는 공간 신호, 손의 역할을 확장하는 직물화된 힘, 가상환경 내부에 부유하는 "지성을 지닌" 형상들이 이러한 신호를 배분하여 내보낸다. 가상세계가 만들어지는데는 회선 뭉치, 액정 디스플레이(LCD) 패널, 컴퓨터 칩보다 그 이상의 많은 것이 들어 있다. 유명한 방송기자인 에드워드 머로우 Edward R. Murrow는, 그의 동료들이 만드는 "소프트웨어"가 없이는 텔레비전이 "컬러빛의 상자"일 뿐이라고 말하곤 한다. 컬러빛은 어떤 양식 - 감각의 코드와 우리 문화의 코드 - 을 발산해야 한다는 점이다. 머 리에 쓰는 디스플레이, 데이터 장갑, 그리고 포스 피드백force feedback은 단지 가상현실의 경험을 정의하는 일부분일 뿐이다. 우리는 대개 잡지에 나온 그림을 통해 가상현실의 하드웨어만을 봄으로써 잘못 이끌린다. 1950년대에 우리는 오로지 음극선 주입기, 진공관, 전선을 감싸고 있는 호두나무로 만든 캐비넷을 연구하는 것만으로는 텔레비전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초기 단계 - 텔레비전 발전의 초기 단계에서처럼 - 에서는 공중의 관심의 초점은 하드웨어이다. 이렇게 되는 데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가상현실의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이 발달하면서 인터페이스 내의 코드와 정보는 더욱 더 큰 주의를 끌게되었다. 커뮤니케이션 연구자들은 인적 요인들의 설계라는 기술 과제에 부응하기 위해서 가상현실의 정신기호적인 측면을 더 잘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스튜어 Steuer는 재현에 관해 기술한 3장에서, 원격재현의 감각을 우리에게 부여하는 변인들을 살핀다. 다시 말해 정밀한 코드와 과학기술이 가상세계의 정보를 어떻게 구조화하여 그 정보에 의미를 부여하는지를 살핀다. 가상현실의 경험은 푸른 하늘색의 세상, 신비한 모험, 인간과 그 대리격 로봇, 방 크기만한 분자, 도시 블록만한 막대그래프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인간이란 내용과 세계라는 정보를 반영하여 둘러쳐진 거울이다. 과학철학자인 칼 포퍼 Karl Popper는, 우리가 인간 행위의 영역을 생각할 때 세 가지 세계에 관해 생각해볼 수 있다고 제안했다. "첫째, 물질세계가 존재한다.- 물질대상의 영역... 이것을 본인은 ''''제 1세계''''라고 명명할 것이다. 둘째, 정신 상태의 세계이다. 마찬가지로 이것을 나는 ''''제 2세계''''라고 명명할 것이다. 하지만 또한 마찬가지로 세 번째 세계가 존재한다. 사고 내용의 세계, 그리고 실지로는 인간 정신의 산물인 세계. 따라서 나는 이것을 ''''제 3세계''''로 부를 것이다..." (Popper & Eccles, 1977, p.38). 가상현실과 더불어 포퍼의 제 3세계는 성장의 새로운 단계를 접어든다. 제 3세계는 제 1세계로부터 천천히 빠져나오기 시작한다. 수천년간 신체라는 커뮤니케이션 매체는 제 1세계, 즉 물질적 본성과 제 2세계, 즉 정신 상태간에 일종의 인터페이스가 되어왔다. 실제로 인간의 신체는 그러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데 훌륭한 도관(導管) 역할을 하도록 진화되었다. 그래서 신체는 공간을 설계하며, 움직이는 동작을 취하며, 그리고 그 외의 여러 행위들을 취하는 정신을 보조하게 되었다. (Gibson, 1979; Ornstein, 1991). 가상현실을 통해 제 3세계의 환경이 성장함으로써 제 1세계를 위해 설계된 신체를 둘러싼다. 서덜랜드의 가상현실의 최종 디스플레이에서는 제 3세계, 즉 전자적이고 "수리적인 형태의 이상한 나라"에 신체를 완벽하게 몰입시킬 수 있다. (Sutherland, 1965). 우리의 정신을 만드는데 몰입된 감각들이 정상적인 제 1세계를 덮어버린다. 제 2세계의 변화하는 정신 상태와 제 3세계의 감각 경험 사이에는 피드백 고리가 구축된다. 객관화한 정신과 그에 따른 감각 경험 사이에는 피드백 고리가 항상 존재했다. 그러나 이제 이 피드백 고리가 물질 세계의 그 모든 생생함과 주장을 지닐 것이다. 어떻게 이 피드백이 제 2세계의 정신 상태, 혹은 우리의 정신 상태에 영향을 줄 수 있는가? 가상현실 설계자들이 제안한 바처럼, 우리가 보다 쉽게 대상화된 문화적 사고의 내용들을 익힐 수 있게 하므로써, 인간이 "좀 더 현명해질" 수는 없는가? (Furness, 1993; Krueger, 1991). 혹은 맥루한이 보았던 것처럼, 우리는 이 피드백 고리를 통해서, 매체(제 3세계)의 형태(코드)와 인간의 정신 상태(제 2세계)가 왜곡되고 정신병적인 이종동형(異種同形)으로 합쳐지는, 자아도취적 황홀경에 몰입할 것인가? 아직 우리는 알 수 없다. 여 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고자 한다. 우리는 어떻게 가상현실 인터페이스를 이용하여 최대한 효과적으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가? 최선의 답은 확실하지 않다이다. 하지만 우리는 곧 그것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가상현실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을 아직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가상현실 인터페이스는 현존하는 인간의 커뮤니케이션 코드를 이용할 것이며, (Eco, 1976; Ekman, 1974) 그 인터페이스는 다른 미디어에 장착되었던 기술에 의존할 것이다. 예를 들어 10장에서 팔머 Palmer는 고대의 대인 커뮤니케이션 코드를 관찰하고, 가상환경에서 그 코드를 확장하고 코드의 지형을 그려내기 위한 도전을 논의한다. 하지만 가상현실이 도래함으로써 분명히 어떤 새로운 것이 덧붙여졌고, 의미구성과 의미수용의 과정을 민감하게 바꿀 것이다. 서사구조를 지닌 영화는 극장용 영화의 형식만을 띠지는 않는다. 비록 초기에 제작자들 중 일부는 그러한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어냈지만 말이다. 영화는 내용 전개와 서사가 전개되는 공간을 경험하는데 있어서 새로운 방식을 낳았다. 아마도 그렇다면 가상현실 내에서 커뮤니케이션 코드의 가장 다양한 이용을 볼 수 있고, 정의할 수 있고, 희망적으로 확대할 수 있는 부분은 오락에서 일 것이다. 이 책 대부분의 장들에서는 어떻게 커뮤니케이션이 가상현실의 오락 인터페이스를 위해 설계될 수 있는가를 연구한다. 6장에서 호킨스 Hawkins는 배치 장소용 location-based 가상현실 산업의 성숙과 가상현실 경험의 여러 장르에 대한 그 설계 계획을 논한다. 7장에서 히이터 Heeter는 가상현실의 초기 이용자들에 대해 얘기하고, 배치 장소용 오락시스템의 이용자가 어떻게 폭력적이거나 군사용 유형의 가상현실 경험에 감응하는지 논한다. 8장에서 메이어 Meyer는 이야기 전개 방법에 밀착하여, 고대극의 서사 기술을 가상환경에 적합하게 만드는 방법을 제안한다. 9장에서 가상현실의 음향에 귀기울이는 크래머 Kramer는, 풍부한 정보의 심포니를 연주하는데 가상현실을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논하기 위해 청각 코드에 관해 연구한다. 이 네 개의 장을 종합하면 우리는 이용자가 가상현실을 경험하는 방식을 구체화할 수 있는 설계상의 몇 가지 결정적인 문제들에 직면한다. 실 지로 가상현실은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설계를 부른다. 즉 타인과 의사소통할 수 있는, 그리고 문화 양식, 우리 문화를 구성하는 관습과 의사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을 부른다. 대부분의 초기 가상현실 견본에서 보여주는 정태적 가상환경은 썰렁할 정도로 텅 비어있다. 이러한 가상환경은 한정된 정착자, 황야의 술집, 사이버무법자, 그리고 사명을 지닌 기자에 대한 이야기들을 초대하기 위해 기다리는 유령도시와 비슷하다. 그러한 "배역들"은, 가상현실 내의 회오리치는듯한 기호의 흙먼지 폭풍 속에서 재생되고, 교정되고, 그리고 초월적인 형태로, 과거의 장르들에서 단지 인용된 것이다. 엿보기 좋아하는 자 voyeur는 배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가상마스크가 얼굴을 대체해버린다. 가상현실이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이 기술 책략적 연구에 현실적 real 커뮤니케이션을 끼워넣으려는 시도가 진행 중이다. 빈약한 연구소의 가상세계에 대한 견본과 비교하여, 메시지, 형상, 수백만 사람들의 신체가 연결되어 고동치는 가상세계 사이에는 현실적 커뮤니케이션이란 면에서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 현실적 커뮤니케이션은 항상 우리의 집합적 창조와 이 기술 책략적 연구 artifice의 지배권에 관한, 즉 포퍼의 제 3세계를 세우는 것에 관한 내용이었다. 커뮤니케이션 코드에 대한 탐구는 가상현실 내의 경험과 커뮤니케이션 표현을 탐구하는데, 그리고 대상화된 사고의 대륙과 메트로폴리스, 즉 제 3세계의 가상세계를 세우는데 그 열쇠가 될 것이다. 전송 채널 가상현실 시대의 커뮤니케이션은 몇 가지 점에서 수송에 관한 내용이다. 원격-재현 tele-presence은 원격-비전 tele-vision을 대체한다. 신체의 감각전달 통로는 원거리의 현실세계와 가상세계에 연결된다. 경험을 전송하는 것이다. 전송과 수송은 본질에 있어서 동일어라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19세기에 전신과 철로는 미국 서부 개척지의 들판과 숲을 따라 나란히 뻗어 있었다. 이 두 전송 채널, 기차와 전신은 정보를 "수송하기"위해 서로 경쟁적 지위를 누렸다. 아직도 기차, 비행기, 트럭은 종이와 잉크로 구성된 물질적 미디어, 즉 우편, 신문, 잡지에서 처리된 정보를 수송한다. 예컨대 우편 시스템을 상기해보라. 비록 전신이 기차보다 정보 운송의 가용량에서 적지만, 전신은 물리적 수송 채널을 그 속도에서 쉽게 앞지른다. 전신이 갖는 정보유통이 적다고 하지만 기차 화물칸 짐의 정보가 느린 것에 비교할 때 보다 가치있는 것이었다. 정보유통은 이제 다양한 전송 채널, 즉 구리선, 광섬유 케이블, 전자마그네틱 스펙트럼 등을 통해 시·공을 가로질러 이루어지고 있다. 수백만 마일에 걸쳐있는 선들은 거대한 공모양의 실타래처럼 전 지구를 교차하고 감싸고 있다. 이 거대한 공을 에워싼 전자마그네틱 스펙트럼은 수백만 메시지의 노래를 연주한다. 정보의 끊임없는 전송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가상현실 시대의 커뮤니케이션이 발생하는 때는 전송 채널간에 경쟁이 눈에 띠게 보이는 시기이다. 한 때 전신의 정보유통이 보잘 것 없이 얄팍한 갈대에서 이동했다면, 이제는 거대한 파이프가 정보를 분출하고 있다. 보다 오래된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이 지닌 가용 능력의 한계가 효과적으로 제거되고 있다. 다음 세기에는 결국 전신의 후속물들 - 예를 들어 광섬유 채널 - 이 수백의 기차 화물에 맞먹는 정보를 운반할 것이다. 40 가닥으로 이루어진 광섬유선은 130만의 전화 통화나 1,920개의 텔레비전 채널을 전송할 수 있다. 이것을 1,000의 전화 통화도 동시적으로 전송할 수도 없었으며 단 하나의 채널도 전송할 수 없었던 과거의 꼬여있는 구리선에 비교해 보라. 정보의 가용 능력이 크게 증대하면서, 철로와 같은 대표적인 구채널을 이용하여 정보재를 물리적으로 수송한다는 것은 가면 갈수록 내키지않는 정보 수송 수단이 되기 쉽다. 인적 교류가 물질 공간에서 사이버공간으로 이주하고 있는 것이다. 사이버공간에 이르는 가상현실의 길 전기 전송시스템은 이니스 Innis와 맥루한의 용어로 단지 공간을 붕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스템은 새로운 대응 영역, 즉 사이버공간으로 확장되었다. 특히 사이버공간은 포퍼의 제 3세계의 유연한 형태이다. 사이버공간의 성장은 어떤 결정적 단계 - 새로운 전자 개척지의 개막-에 들어감을 말한다. 이 새로운 개척지에 관해 스카우츠 Scouts는 다음과 같이 일관되게 얘기하고 있다.(예를 들어 Lucky, 1991). "강은 광대하다." (정보압축에 의해 가능해진) 각 전송채널의 전반적 가용력에 증가가 이루어진다. "많은 공간이 존재한다."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의 범지구적인 정보 가용력에 팽창이 이루어진다. "당신의 차를 떠나 광대한 강에 합류하라." 커뮤니케이션 교통 traffic에서 광섬유와 같은 새로운 전송 채널을 향한 이동이 이루어진다. "우리는 산맥을 따라 이어진 다른 경로가 필요할 것이다." 각 전송 채널에 대한 커뮤니케이션 전문화와 적소화 niche building가 이루어질 것이다. 또 한 전자 개척지에 대한 기업측의 전망가들도 존재한다. 2천년에 디지털 금광에서 수십억 달러를 예견하는 그들에게는 그 개척지는 고대할만한 것이다. 예컨대 1993년 미국에서 가장 큰 케이블 회사 TCI와의 합병을 시도했던, 벨 아틀랜틱 Bell Atlantic의 최고 경영 책임자, 래이 스미스 Ray Smith를 들어보자. 전망가적 재능이 번뜩이는 그는 그 현대적 등가물을 지칭하듯 "저 구릉 지대안에는 금이 존재한다"고 발표하였다. "그것은 단지 500개 채널만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무엇이든지, 어디서든지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Schniedawind, 1993, p. B1). 무엇이든지 존재하게 하거나 어디서든 갈 수 있다는, 물질 초월의 꿈은 또 다른 형식을 취한다. 다른 이들은 미소한 차이의 또 다른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벨 연구소와 벨코어의 이전 연구 소장, 로버트 럭키 Robert Rucky는 거대하게 확장되는 사이버공간을 주시하면서, 이 사이버공간의 평원뿐만 아니라 거대한 블랙홀도 동시에 보고 있다. 1992년의 시그래프 SIGGRAPH 회의에서, 그는 청중으로 참석한 컴퓨터 그래픽 프로그래머들에게 이 진공을 채워넣을 수 있을지에 대해 혼란스러워 했다. 그는 그 진공이 채워질 수 있는지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오직 집중적이고 "상호작용적인 그래픽의 교통"으로서만이 그 진공을 채울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그래픽의 교통이란 오직 네트워크화된 가상현실 시스템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일종의 디지털 교통이다. 사이버공간은 광대한 개척지이며, 오직 가상현실만이 그 개척지를 채워낼 수 있다. 사고의 거대한 도관으로서의 가상현실 우 리는 이른바 "정보 초고속도로"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가상현실 인터페이스가 가느다란 광섬유로 이루어진 사이버스페이스의 고속도로를 통해서 그 의식을 이동시키는 전달 수단의 일부가 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정보 초고속도로"와 같은 문구가 함유하는 수송에 관한 비유는 커뮤니케이션에 있어 근원적인 비유 형태이다. 이 문구는 적어도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로크 Locke의 정의, 즉 사고의 전달 수단인 "거대한 도관"으로서의 커뮤니케이션 -원격 정신작용 telementation -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정보의 수송 - 그 정보는 사고 혹은 캡슐화된 경험일 수 있다 - 은 인쇄된 단어, 이미지, 그리고 혹은 필름 클립와 같은 지나치게 불명확한 코드와 질이 떨어지는 인터페이스에 의해 그 능력이 떨어진다. 정보를 유실하는 것이다. 잡음, 모호성, 그리고 정신적 노력이 전통적 코드와 미디어의 분명치 않은 연막 신호에 의해 나타나는 진공을 채우기 위해 등장한다. 우리는 강제적으로 추상적 코드가 많아질수록 이를 통한 보다 적은 정보를 전송받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의 모든 전송 채널이 수행할 수 있는 능력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목소리를 지닌 잡음을 모래 위에 휘갈겨 썼으며, 종이 조각 위에 애매모호한 흠집을 내어 왔다. 결국 가상현실이 이러한 모호성을 해결하고, 누군가의 생각으로부터 다른 어떤 누군가에게 그대로 정보를 전달하는 순수한 방식을 선사할 것인가? 사이버공간의 여행은, 특별히 그 정보가 "현실적으로" 보다 많은 감각을 표현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가상현실 인터페이스와 거대한 전송관을 통해 정보가 보다 순수해질 수 있고, 보다 현실화될 수 있는 개념이다. 보다 적은 잡음으로 인해 커뮤니케이션은 보다 분명해진다. 어쨌든 가상현실을 통해 우리는 추상화된 코드와 상징을 극복할 수 있다. 쟈론 라니어는 우리가 "탈상징적 커뮤니케이션" 시대에 진입했다고 주장한다. (Lanier & Biocca, 1992). 탈상징적 커뮤니케이션이란 무엇인가? 라니어에 따르면 그것은 사물 그 자체 안에서 거주하는 시대이다. 예컨대 생생한 3차원 주택은 "주택"이란 단어와 같은 어떤 빈약한 상징 대신에 수신자/청취자에게 디스플레이될 수 있다. 라니어는 이와 같은 사실이 커뮤니케이션을 바꾸게 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상징은 상징화된 사물에 가까운 어떤 것, 사물 그 자체 thing-in-itself로 대체된다. 그것은 흥미있는 개념이다. 그러나 가상현실의 "감각 리얼리즘"내에서 커뮤니케이션 추상의 문제는 소수 사이버개척자들이 희망하는 것처럼 이미 끝난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그 문제는 새로운 코드를 통해서 굴절된 형태로 진행되고 있을 뿐이다. 만약 로크가 오늘날 사이버공간에 있는 우리에게 다가온다면,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주택의 3차원 모델이 "주택"이라는 단어 만큼이나 모호한 기호임을 지적할 것이다. 기호학자인 챨스 샌더스 퍼어스 Charles Sanders Peirce가 이에 대해 덧붙인다면, 아마도 가상현실 내의 그 주택의 아이콘이 상징보다 우위에 선다는데 찬성할 것이다. 하지만 라니어의 개념이 보여주는 바처럼 결코 탈상징적 아이콘이 곧 탈기호적 아이콘을 뜻하지 않는다고 그는 생각할 것이다. 주택의 3차원 모델이 "주 택"이란 단어보다 더 명확한 어떤 것을 뜻하는가? 비록 주택의 3차원 모델에서 더욱 많은 정보가 전달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주택의 의미 -그 의미는 결코 전달되지도 전달할 수도 없다-가 더욱 분명해지리란 보장은 없다. (아이콘 숭배 iconcism와 절대 아이콘 absolute icons의 논의는 에코를 참조; Eco, 1976, 1979). 가상현실의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은 진짜 사물 혹은 진짜 경험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군가의 생각으로부터 다른 누군가에게 관념을 전달하는 것이다. 가상현실 안에서 3차원 주택은 단지 대상화된 관념, 즉 그 주택의 경험에 대한 정신 모델을 시뮬레이션한 것일 뿐이다. 이것은 정보를 훨씬 나은 방식으로 코딩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념 혹은 경험을 전달하는데 "순수하거나 본래적인" 코드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우리가 "주택"이란 단어를 읽기 보다는 오히려 주택의 시뮬레이션을 전송받길 원한다는 것을 라니어가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올바르다. 우리는 인간의 정신 모델의 그 모든 역동성과 뉘앙스를 담아낼 수 있는 코드와 인터페이스를 원한다. 이는 바로 최대의 대역폭을 가진 코드이다. 감각의 전달 정 보의 원거리 전송 - 특히 감각 정보 - 은 가상현실의 외피를 밀어내려는 거센 소망이다. 공군의 가상현실 개척자이자 선도적 엔지니어링 연구자, 톰 퍼니스 Tom Furness (1993)는 IEEE의 제 1회 가상현실 연례 심포지엄 (VRAIS)의 인사말에서 다음과 같이 표명하였다. "인류에게 가공할만한 새로운 유동성을 지닌 향상된 인터페이스를 제공할 것이다. 우리는 감각을 전하는 전송 시스템을 세우고 있다... 이는 우리가 그 공간 내부에 우리 자신의 신체를 집어넣지 않아도 다른 장소나 공간에 갈 수 있다는 놀랄만한 약속이다..." (p. i). 우리는 다시 한 번 현대 커뮤니케이션의 초창기 시절로부터 되풀이되는 말을 듣는다. "공간이 붕괴될 것"이란 외침은 최초에 전신의 발명과 더불어 의심없이 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Carey, 1988; Czitrom, 1982). 전신 키에 손가락을 조용히 두드림으로써 수 마일의 거리를 붕괴시켰다. 오늘날 이 신체의 나머지 부분은 전신의 기술적 후속물들에 부착되고 있다. 원격재현에서, 가상현실은 경험을 전달하는 과업을 실행하는데 있어 다른 미디어와 결합한다. 가 상현실의 원거리 개척지에 대한 전송이라는 사명에 있어서, 그 유일한 사명은 공간을 붕괴하려는 힘에 있다. 나사 NASA는 외계 행성에 대한 원격재현의 체험을 전달하는 수단으로서 가상현실을 발전시키고 있다. (McGreevy, 1993). 지구상의 인류는 태양계의 험준한 황무지의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대리 로봇을 조정한다. 우리 자신의 감각을 공간으로 확장할 수 있을 때 왜 인간을 외계 행성으로 수송하는 위험을 감수하겠는가! 이것은 우주적 규모에서의 원격재현을 위한 열망이다. 그러나 이것은 커뮤니케이션의 혁명이 아니라 진화이다. 미디어 이론가, 해롤드 이니스 Harold Innis (1951)는 커뮤니케이션을 공간을 통제하기 위한 오래된 시도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현재는 외계 행성을 움켜잡기 위한 시도 단계일 뿐이라는 점도 알고 있다. 공간적 규모의 또 다른 목표에는 원자로 둘러싸인 공간에 강제로 감각을 밀어넣으려는 가상현실 시스템이 존재한다. 북부 캐롤라니아 대학의 연구 (Robinette & Williams, 1991)는 가상현실의 인터페이스를 터널식 주사(走査)형 scanning-tunneling 현미경의 목표와 합치시킨다. 원자들은 해변의 핑크빛 모래처럼 보이는 언덕이 된다. 원자는 "만져질" 수 있고 심지어 이동도 가능하다. 핑크빛 모래는 스스로의 형태를 바꿔 새로운 언덕으로 나타난다. 미디어는 무차별로 공간을 붕괴함으로써 물질 세계, 제 1세계의 미시 세계로 확장된다. 사이버공간에서의 정보 위기 해결 사 이버공간은 광대하다. 이러하 광대함 자체가 사이버공간에서의 위기 근원일 수 있다. 인터넷과 같은 컴퓨터의 범세계적인 상호 연결과 전송 채널 가용능력의 팽창은 그 가능성 뿐만 아니라 문제점도 만들어 낸다. 정보 여행과 정보 여과 filtering의 문제는 정보의 광대한 바다 위에 안개를 피워올린다. 가상현실이 가능한 해결책으로 제시되고 있다. 다음과 같은 예에서 그 유사성을 생각해보라. 당신이 거대한 도서관에 갔다가 당신 스스로 어디에 서 있는지 잘 알지 못했던 적은 없는가? 그 긴 서가가 너무나 유사해서, 그 선반에 붙은 분류 기호는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 이것이 고대 이집트인가 아니면 두뇌 화학 작용 brain chemistry인가 - 에 대한 어떠한 안내 역할도 제공하지 못한다. 아마 여태까지 쓰여진 모든 책들이 있다는 보헤스 Borges의 그 유명한 도서관의 규모만큼 거대한 도서관을 이제 상상해보라. 모든 세계의 책들이 저장된 어떤 장소를 상상해보라. 그리고 그 안에는 수백만개의 신문과 잡지 기사, 셀 수 없는 그림, 포스터, 필름 클립, 그리고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다고 상상해보라. 그 도서관의 통로들은 의회 도서관의 수 마일 길이의 복도보다 더 길게 뻗어있으며, 그 도서관은 세계 각국의 도서관을 한 지붕밑에 모이게 한 것보다 더 크다. 당신이 이 거대한 도서관의 마치 굴과 같은 내부에서 멍한 상태로 당황하여 헤맬 때, 도대체 당신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당신이 찾고자 하는 정보는 어디에 있는가? 당신은 사이버공간에서 길을 잃고, 표류한 상태다. 어떤 이에 게 사이버공간의 무정부적 구조 내부에 세워진 정보의 서고는 중요한 공간 여행 navigation의 문제를 보여준다는 점은 명백하다. 오늘날 인터넷 주위를 맴돌면서 자신의 길을 찾으려고 애쓰는 용맹스러운 정보비행사 infonauts는 아직도 정찰 - 참고 도서, 프로그램, 대리인, 그리고 같은 일에 종사하는 동료를 통한 - 의 수준에 머문다. 사이버공간은 통제 불능이다. 이 공간에서는 도시를 구획하는 법이 존재하지 않으며, 초고층 빌딩과 빈민촌이 어떤 명확한 질서도 없이 난립하는 도시와 비슷하다. 질서는 강력한 커뮤니케이션 방식과 관계가 있다. 현대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은 산업 체제의 통제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출현하였다. 제임스 베니저 James Beniger에 따르면, "상업 혁명이 농업이 발전함에 따라 이로부터 벗어나 자본과 노동에 의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컨대 산업 혁명은 산업화의 진전으로부터 야기된 문제 - 통제 위기의 끝없는 상승 -에 대응하여 발전한 가장 최신의 기술 혁명이다. 또한 이 기술 혁명은 자본 할당과 재화의 분배를 위한 상업 시스템을 전제로 한다." (p. 15). 이 통제 위기는 물질, 에너지, 정보의 처리 과정에 있어서 그 규모와 속도가 증가하므로써 대두되었다. 이후 현재에 와서 사이버공간을 구성하는 네트워크는 정보의 통제 위기를 처리할 수 있는 수단으로 제시된다. 예를 들어 1945년에 배니버 부시는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점점 더 어마어마한 연구량이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를 꼼작 못하게 하는 증거들이 증가하고 있다... 인간의 경험은 놀랄만한 속도로 확장되고 있다. 그리고 중요한 문제에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필연적인 미궁을 빠져나오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수단은 횡범선(橫帆船)의 시대에 행했던 것과 동일하다." (Bush, 1945, p. 101-103). 부시는 중요한 정보가 수 십년간에 유실될 수 있는 "대재난"에 관해 경고했다. 그는 정보를 여행하고 정보를 조직화하기 위하여 정보 압축, 새로운 감각 인터페이스, 하이퍼미디어 시스템과 같은 다양한 해결책을 제안했다. (Bush, 1945). 이러한 모든 것들이 충족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부시와 같은 사람들에 의해 착상을 얻은 컴퓨터와 그 네트워크의 성공은 정보 통제의 새로운 수준의 문제를 우리에게 가져왔다. 현재 사이버공간의 팽창은 정보 처리과정의 규모와 속도를 더욱 증가시킨다. 전송 채널의 진전과 함께 우리는 또 다른 종류의 통제 위기에 직면할 지도 모른다. 가상현실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통해 이 위기에 응답한다. 사이버공간이 물질 공간의 특성을 떠맡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추상 정보를 포함한 모든 정보가 정차 공간화되고 감각화된다면 어찌 되겠는가? 우리가 3차원 공간, 음향, 촉감, 냄새, 그리고 움직임의 물질 세계를 거닐 수 있도록 기술은 진전하게 되었다. 당신이 결국 그 정보와 맞닥뜨리는 곳을 거닐거나, 그 정보를 주의해서 볼 수 있거나, 심지어는 그 정보의 냄새를 골라낼 수 있다면, 추상 정보까지 포함하여 정보를 찾는다는 것을 보다 수월하게 한다. 정보는 본체 noumena에서 현상 phenomena으로 전화한다. 정신의 환경, 즉 정보는 육체를 위한 환경이 된다. 정 보 환경을 어떻게 구조화하고 통제할 수 있을까? 박물관과 도서관같은 과거의 정보 통제의 표현물들은 은유적으로 몇 가지 제안점을 보여준다. 베네딕트 Benedikt와 같은 가상현실 건축가들은 사이버공간의 "건조된 환경"을 위한 계획을 제시한다. (Benedikt, 1992). 또 다른 공간적이고 물리적인 시나리오로, 정보의 박물관 벽을 따라 나있는 끝없는 나선형 통로(그 예로는 Benedikt, 1991), 당신도 들어갈 수 있을만큼 거대한 서류함, 포스트잇 Post-itTM의 메모지로 가득찬 벽(그 예로는 제록스 팍 Xerox Parc의 투시벽 시각화 Perspective Wall Visualization), 정보의 가지를 연결하는 지식이라는 나무(그 예로는 제록스 팍의 원추형 나무 Cone Trees)와 같은 모델을 통해 정보위기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다른 어떤 시나리오로 비행 시뮬레이터에서 나온 "이리저리로 날아다닌다 fly over"는 은유는 우리가 정보의 지형을 가로질러 이동할 수 있는 또 다른 방식 (그 예로는 실리콘 그래픽스 Silicon Graphics의 내비게이터 Navigator)을 보여준다. (Bylinsky, 1993; Fairchild, 1993의 예시 참조). 사이버공간의 바다에 일어나는 정보의 높은 파도를 통제하기 위한 수많은 제안들이 등장하고 있다. 대부분의 제안들은, 정보를 보다 물질화하는 것 - 이는 보다 감각적 특성을 부여한다 -이 우리가 사이버공간의 거대한 정보 바다를 항해하는데 수월할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 정보의 바다를 위에서 내려다 본다면, 우리는 밑바닥에서 정보의 물결이 일어나는 행위 양식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몇 가지 가상현실 시나리오에서, 정보 항해의 문제는 분명한 이동의 자유로움과 그 수월함에 의해 해결될 것이다. 펠리컨이 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뛰어들 듯, 이용자는 어떤 정보를 구하기 위해 바다로 잠수할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항해사라도 알고있는 바처럼, 당신의 유일한 참고사항이라고 해봐야 그 바다에서만 구별되는 물결의 행위 양식뿐이라면 십중팔구 길을 잃기 마련이다. 가상현실과 전송 채널. 가상현실 인터페이스의 성장은 현재 등장하는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의 수많은 전송 채널의 변화 방식과 관련된다. 따라서 양자는 상호 연계하여 발전한다. 가상현실과 관련하여 그 연계성을 요약해보면, 1. 전송 채널의 변화로 사이버공간이 확장될 때, 전송할 정보 재화에 대한 엄청난 수요가 있기 쉽다. 이에 따른 공급 부족은 영화와 쇼와 같은 구매체의 생산물뿐만 아니라, 체험과 관념과 같은 또 다른 새로운 정보 형태의 "컨텐트"에서 일어날 것이다. 공용(共用) 가상환경내의 정보는 이러한 정보의 진공 상태을 채워내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2. 사이버공간이 확장되면, 정보의 어마어마한 양과 그 속도로 인해 사이버공간은 위기에 처할 수 있다. 이 정보 위기는 네 가지 내용을 지닌다. 첫 번째는 정보 조직, 두 번째는 정보 여행, 세 번째는 정보 여과의 문제, 그리고 네 번째는 행위 양식의 감지와 관련이 있다. 이 네 가지를 포함하는 정보 위기는 베니저(1986)가 통제 기술의 위기라 명명했던 그 위기의 현대적 진전 형태라 할 수 있다. 당 신은 수많은 기술 단체와 정부 단체에서의 다음과 같이 얘기를 들을 수 있다. 가상현실 기술의 3차원 인터페이스는 사이버공간의 광대한 데이터의 바다에서 정보를 조직하고, 여행하고, 찾아내는데 도구 역할을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가상현실의 사이버공간 인터페이스를 착수하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는 이어지는 글에서 이러한 정부적, 기술적, 그리고 사업적 하부구조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하부구조의 등장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의 인터페이스로 가상현실이 등장하므로써, 이 매체에 대한 관심은 연구 네트워크, 즉 조절적이고 재정적인 산출, 그리고 조직의 지원과 결합한다. 가상현실 하드웨어는 이러한 조직이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나 사 NASA, 미 공군, 벨 연구소 등의 전문화된 연구소의 조직적 요구는 초기의 선도적 역할을 하므로써 연구의 진행를 추동하는 것이다. (R&D 발전의 간단한 역사에 대해서는Hamit, 1993; Kalawsky, 1993; Rheingold, 1991; Rolfe & Staples, 1986 참조). 군사적이고 우주적 응용과 관련된 3가지 제도적 요구사항은, 몇 가지 향상된 인터페이스의 초기 형태에 대한 그 준거를 제공한다. 1. 군사용, 일반 시민용, 그리고 우주 항공용 산업에서의 비행 훈련은 정교하고 현실감있는 비행 시뮬레이터를 점차적으로 필요로 하며, 그로부터 이익을 얻는다. 2. 점차 조종실이 복잡해지면서, 비행 조종실의 설계를 통해 선진적 비행 장비에 요구되는 복잡한 인간-컴퓨터간의 정보 교환을 영상으로 처리하며 관리하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하는데, 비행 시뮬레이터 기술을 적용했다. 3. 원격로봇 공학 telerobotics(군사, 핵, 해양학 등의 응용 형태로써 원거리의 로봇 통제)의 초기 시도는 원격재현 시대에 들어와서 초기 인터페이스의 몇 가지 원형이 발전하도록 하였다. 북부 캐롤라니아 대학과 같은 학술 기관은 이와 같은 작업을 통해 과학적, 건축학적, 의학적 시각화의 다른 영역으로 확장시켰다. (Holloway, Fuchs, & Robinett, 1991의 평론 참조). 이 기관들의 개척자적 핵심집단의 외곽에 놓여있는, 기술지원 조직과 기업 조직은 가상현실의 응용과 가상현실에 기초한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의 출현을 지원할 정도로 급속히 성장하게 되었다. 그 조직들 중 일부에는 컴퓨터 그래픽스(예를 들어 실리콘 그래픽스), 소재지에 근거한 오락(예를 들어 디즈니)과 같은 핵심적인 연관 산업이 있다. 가상현실의 약속에 대한 이러한 공개와 자극으로 인해 수많은 기구의 재원을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여기에는 가상현실 인터페이스의 초기 발전에 있어서 연관성이 적었던 일부 커뮤니케이션 기업들(예를 들어 유에스 웨스트 U.S. West, 나이넥스 NYNEX, 세가)이 존재한다. 많은 기업들은 사이버공간의 진입 채비를 갖추고 있다. 전 세계에 걸쳐 학술, 정부, 기업 기관의 가상현실 연구센터가 팽창하는 중요한 시점은 바로 1990년대이다. 각 기관은 가상현실의 기술, 설계, 지원 측면에서 작게 혹은 전적으로 헌신을 다했다. 90년대 초에는 단지 몇 안되는 조직들만이 - 대단히 광의의 뜻을 지닌 - 가상현실 센터로 취급될 수 있을 뿐이었다. 1993년의 명단 내용을 보자면 가상현실의 창출과 확장에 참가하는 400개 이상의 학술 연구소, 정부의 연구기관과 기업을 기록하고 있다.(예를 들어 Panos, 1993). 대부분의 이전 기관들이 빠르게 시대에 뒤떨어지게 되었고, 소규모 기업이 이 분야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대규모 군사, 커뮤니케이션, 혹은 가전 회사들은 갑자기 "가상현실의 멋"에 따르게 된다. 소수 방위 산업체의 개편은 가끔 텔레커뮤니케이션, 정보 시각화, 그리고 통제와 같은 가상현실의 커뮤니케이션 응용을 향한 움직임을 의미했다. 가상현실 기업가의 제 1의 물결은 대체로 초소형 기업군으로 구성되었다. 서부 해안에 집중된 이 수많은 기업들은 가상현실 시장의 거대한 물결을 올라타 서핑하기를 바랬다. 많은 기업들은 재정적 지원에 갈망하거나, 거대 기업과의 제휴를 꿈꾸었다. 1993년 주도적인 창업 회사이자 제 1의 가상현실 미디어 대열에 있었던 VPL은 이 기업 전쟁의 불길 속에서 사라졌다. 마쓰시타 Matsushita와 같은 거대 가전 기업은 VPL과 같은 기업들에 일시적으로 손을 댔으나, 대부분의 기업들은 분주한 가상현실 시장의 등장을 너무도 오랫동안 기다리는 동안 그들 기업의 호주머니에는 엄청난 금이 쌓이고 있는 실정이었다. 모든 기업들, 그리고 기술적 하부구조와 정부의 하부구조에 있어서, 가상현실과 관련된 활동의 증가가 가상현실에서의 정보에 대한 엄청난 열망을 만들어냈다는 점은 그리 놀랄만한 것이 못된다. 일군의 기업가, 기술관료, 그리고 사이버해적 Cyberpirates은 소형 망원경을 통해 바로 앞에 놓인 험난한 바다를 개관하는데에 이른다. 이러한 정보 탐구는 산업 회보(예를 들어 《사이버에지 저널》 CyberEdge Journal, 《가상현실 리포트》 Virtual Reaity Report, 《가상현실 뉴스》 VR News와 같은 다양한 발행물), 리서치 저널(예를 들어 《프레즌스》 Presence), 연례 회의(예를 들어 가상현실, VRAIS, Cyberthon 등)에 의해 강화된다. 이 모든 활동의 윙윙거림은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제어하게 된 기관과 사회에서 나오는 소리이다. 그것은 등장하고 있는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의 조직 하부구조에서 나오는 소리이다. 가상현실에 대한 거대한 양의 공중의 논의에서 보다 이 소리가 더 잘 들리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1장의 가상현실 기사에 관련된 그림들이 이의 실례이다. 이 그림들은 동시에 새로운 기술을 논의하는 수백만의 목소리를 포착한 일종의 사회적 지표일 뿐이다. 미국내에서 보도되는 정보에 대한 조직들의 업청난 요구가 그 어느 때보다 계속될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가 바렌티와 바르디니 Valente & Bardini가 11장에서 논의한 제 1의 확산 단계에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우리가 평가하기에는 이 가상현실 기술을 인지하고 있는 비율이, 커뮤니케이션, 컴퓨터, 그리고 정보 처리과정을 구비한 지역 공동체에서는 그 기관엘리트 중 90% 이상이며, 일반 대중의 50% 이상을 차지한다. 이 두 비율은 가상현실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정부의 장갑낀 손 18세기에 정부와 법은 결과적으로 신개척지로 향해서 쇄도하는 정착자들을 따랐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그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 정부의 장갑낀 손이 사이버공간에 들어갔다. 정부의 손은 개방적이고 교육적이며, 동시에 규제적이고 인색하다. 18세기의 법률가의 손이 총을 집으려고 했다면, 현대 정부의 손은 규제장치에 해당하는 녹이 슨 통제 패널의 핸들을 조정하려 한다. 미디어 엘리트들, 특히 전송 채널을 통제하는 사람들은 규제 시스템이 재검토되어야만 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불평한다. "현재의 규제틀은 희소성 개념하에서 만들어졌고, 이 속에서 주의깊게 규제되어야만 하는 한정된 양의 가용력만이 존재했었다... 그러나 국내의 전 지역과 전세계는 풍부함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앤드류가의 경쟁력에 관한 위원회 회장, Daniel G. Burton, 1994, p. C3). 정 부의 화폐는 가상현실 기술을 발전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한다. 미국 국립과학재단 (NSF)과 같은 정부의 자금관리 기관은 북부 캘로라이나 대학과 MIT의 대학 연구센터에 많은 작업을 지원했다. 미 공군, 해군, 그리고 나사와 같은 또 다른 형태의 기관들은 초기 의견들에다 다량의 구성 요소들을 첨가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정부 관료와 정부 기관은 신용을 얻으려 하는데는 민첩하다. 앨 고어 Al Gore부통령은 광대한 포괄 영역을 지니는 컴퓨너 네트워크 기술에 관해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진정으로 이 분야에서 맨 선두에 선 발견들 모두는 정부의 지원에서 나온 것이며, 정부는 계속해서 사적 부문의 투자 경계를 넘어서는 첨단 기술에 대한 투자를 독려할 것이다." ("Conversation," 1993, p. 62). 간단히 애기해서 정부 기관은 그 기술이 이미 연구소를 떠나고 각 가정으로 진입하는 때에 산업 관리 혹은 입법에 의한 규제를 추구하기 바란다. 가상현실이 사이버공간에 진입하기 위한 인터페이스가 된다면, 규제 요구는 표준화, 접근의 평등, 그리고 소비자 안전지역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십상이다. 앨 고어 부통령에 따르면 "정부는 촉매 역할을 맡을 것이며, 상호접속, 호환성, 그리고 보편적 접근을 보장하는 표준과 프로토콜을 만들 것이다." ("Conversation," 1993, p. 62). 시뮬레이션 질병 (Biocca, 1992)의 성격과 관련된 건강과 안전 문제는 규제 방식에 있어서 안전 설계를 행하는 쪽으로 유도될 것이다. 아마도 더욱 불안하게 하는 것은 가상 소유권과 관련된 문제일 것이다. 가상 탁자, 가상의 바다 바람, 혹은 모나리자의 3차원 얼굴을 누가 소유하는가? 14장에서 하비 Harvey는 사이버공간 내부에 다중 감각적 체험과 체험의 "소유권"이 증가함에 따라, 몇 가지 법적이고 규제적인 부분의 문제 제기를 시도한다. 가상현실의 시대? 새 로운 지배적 매체의 요소는 다음과 같은데 있다. 전형적으로 다른 커뮤니케이션 인터페이스 설계, 감각 정보의 새로운 채널, 그리고 새로운 매개 커뮤니케이션 양식. (4장, Biocca & Delaney를 참조). 전송 채널에 있어서 새로운 채널들의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는데, 즉 증가된 가용량, 그리고 채널을 지나는 증가된 경쟁과 불안정이 동시에 발생한다. 이러한 사실이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이 출현하고 있다는 것인가? 우리는 그 답에 대부분이 긍정할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이 새로운 시스템을 가상현실 혹은 사이버공간이라 부를 수 있는가? 아마도 그렇게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명칭은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현재 부상하는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에 근본적으로 다른 커뮤니케이션 가능성을 시도하고 있으며, 가상현실 인터페이스가 이 새로운 가능성의 본보기임은 분명하다. 이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수많은 반응이 있을 수 있다. 혹자는 가상현실의 가능성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는 설계를 짠다. (Heeter; Kramer; Meyer; Palmer의 각 장들을 참조). 혹자는 뒤돌아서서 가상현실이 가져오는 정신적, 사회적, 문화적 효과의 가능성을 고대한다. 예컨대 12장에서 샤피로와 맥도날드 Shapiro & McDonald는 사이버공간의 "리얼리티"에 관한 이전의 심한 혼란을 바라본다. 혹자는 가상현실 기술의 설계자들에게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의 사회적 구성물을 논의하고 재고할 것을 제기한다. (이 책의 Harvey; Lanier & Biocca, 1992 참조). 13장에서 발사모 Balsamo는 우리에게 현재 사이버공간에서 부상하는 몇 가지 문화적 특징을 소개한다. 많은 이들 은 커뮤니케이션 시스템과 그 실천의 어떤 근본적인 변화가 우리의 커뮤니케이션 사고방식을 변화시키기 쉽다고 믿는다. 커뮤니케이션 연구는 종종 커뮤니케이션의 기술 변화로 대체되곤 했다. 이러한 사실은 부분적으로 다소 기술 결정론의 형태를 지닌 일반적인 믿음에 기인한다. 기술 결정론적 개념이 우리 사회에서 너무나도 흔해서, 그 개념은 국내의 지도층에 이르는 수많은 보수 엘리트의 사고에 널리 퍼져 있다. "실제적 의미에서 인쇄 매체가 현대의 국민국가와 대의제 민주주의를 만들어냈다"고 고어 부통령은 말한다. "인쇄 매체가 그러한 일을 행한 것처럼, 만약 우리 국민이 고용량의 컴퓨터 네트워크가 보급할 수 있는 지식 능력으로 그 힘을 얻는다면, 우리의 국민 정신에 있어서 얼마나 풍부해질 것인가!" ("Conversation," 1993, p. 62). 정보, 교육, 기술의 힘을 변형하고 해방하려는 미국의 전통적인 믿음은 여전히 매우 강하다. 가상현실과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모든 가정이 진술되어야 하며 연구 성과물로 제출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부분적으로 가상현실과 같은 신기술의 함의에 대한 일반적 수준의 연구이다. 우리는 어딘가 다른 데에서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의 구조 이동은 커뮤니케이션 연구자들에게 역사적 기회와 도전을 나타낸다고 제시했었다. (Biocca, 1992). 또한 이는 커뮤니케이션 연구의 다학문간 접근을 요구한다고도 말했다. (Biocca, 1993) 가상현실은 일종의 배가 되어서, 우리가 광대한 사이버공간의 바다를 항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눈 앞에는 험난한 바다가 놓여 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가상현실 시대에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삶)의 징후를 보여주는 수평선을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종이 망원경을 만들려고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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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대학원신문]: 엔트로피의 전자적 파장을 높여라!

엔트로피의 전자적 파장을 높여라! 이화여대 대학원신문 (98년 12월 게재) 이광석 네트의 디지털 정보가 여러 개의 조각들(packets)로 쪼개져 꼬리에 꼬리를 물고 주소지를 찾아다니다 결국 하나의 정보로 합쳐지듯, 광통신에 떠다니는 각양각색의 정치적 주장과 논쟁의 경합(flame wars)은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전자게시판에서, 뉴스그룹에서, 채팅공간에서 이합집산하며 꾸물꾸물 전자조직을 구성한다. 물리적/물질적 공간이 주던 지역적 한계는, 전자공간의 네트워크적 속성으로 말미암아 그 틈새가 메워지고, 그 외연을 비트로 확장시킨다. 전자네트워크로 인해 전세계의 내노라하는 비정부기구들(NGOs)의 활동 폭이 더욱 커져가고 있다. 범지구적으로 집단과 집단, 조직과 조직의 연대와 연합의 활로가 새롭게 펼쳐지고 있다. 이제 권력과 자본이 새롭게 직면한 문제는 이같은 네트워크형 조직들을 재흡수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NGOs의 힘을 확장하는 비트적 공간이란 바로 이 굳건한 현실에서의(on the ground) 투쟁을 대체하기 보다는, 현실의 투쟁을 가시화하고 이를 엮어내는 전자적 격자인 셈이다. 대 항 집단들이 시도하는 아래로부터의 횡단적 연결이, 그 수위에서 ''가상코뮨''(virtual commune)이나 붉은 기가 휘날리는 ''제 5인터내셔널''(fifth international)의 이상적 전망으로부터, 마을공동체의 신화에 사로잡힌 비트적 연장물, 즉 가상공동체라는 조금은 철부지한 영토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나, 이와 같은 미래적 전망은 실천 주체들이 가늠하는 구체적 현실과의 목적의식적 결합 속에서만 가능하다. 어쨌거나 네트 문화정치의 미래 기획에 있어서 이 모든 동적인 실천의 움직임들이 현재 정보자본주의를 배회하는 유령임에는 분명하다. 네트워크 공간에 대한 디지털적 해석과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려는 수많은 그룹들이 번창하고 있는 것이다. 80년대 극소전자혁명에 의한 ''비트뱅''(Bit-bang)의 파고가 좀 더 특이하게 네트행 동주의에 영향력을 발휘한 사례로는 맨 먼저 사빠띠스따의 정보 게릴라전을 꼽을 수 있다.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EZLN)은 지구촌의 이름없는 남부 멕시코 치아빠스(Chiapas) 지역의 라깡도나(Lacandona) 정글에서 나와, 최근 20여년간 지속된 멕시코 정부와 해외 다국적자본의 억압과 침탈에 분노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이들의 유명세에는 매체에 비친 부사령관 마르꼬스의 인텔리적 카르스마도 한몫 했으나, 기실 그 근저에는 기술적으로 글로벌 투쟁의 촉매제가 되었던 커뮤니케이션 전략과 수많은 정보 네트워크의 확장 능력이 존재했다. 그들은 지배력에 대한 국지적인 물리적 저항과 실천 활동과 함께, 전세계적인 전자 게릴라전을 펼칠 것을 제안한다. 그들은 지배의 약호를 교란하는 각 집단들의 해방적 디지털 약호들이 미시적 정치 투쟁의 전략으로 기능할 수 있고, 이 흩어진 해방의 약호들을 엮을 수 있는 힘은 네트를 통해 거둘 수 있음을 우리 모두에게 인지시켰다. 즉 그들은 조직화의 주요 매체로써 인터넷이 갖는 속성을 충분히 활용하여, 현실의 게릴라전과 말과 이미지의 정보전을 동시에 병행하는 방법을 시사했던 것이다. 이것이 한 이름 모르는 치아빠스 지역을 보편적인 실천 사례로써 짚어보게 만드는 근거이다. 두 번째 사례로써 버클리 대학의 대학원생들이 정치토론을 통해 만들어낸 배드 서브젝츠(Bad Subjects)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지식인들이 전자공간을 통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적절한 실천 지침과, 21세기 지식인 운동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BS는 새로운 사이버영토가 사회적 불평등과 불의를 제거하기 보다 실천의 엘리트 영역으로 남아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들은 온라인 실천을 통해 유용한 정치 조직체 건설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은 현재 또 다른 좌파적 냉소주의 혹은 주변화에 다름 아니라고 얘기한다. 현재 사이버공간이 비록 이윤의 장으로 활용된다 하더라도, 현재 진행형의 새로운 인간관계의 네트워크이기에, 반자본주의적 경제 공간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사이버공간에서의 정치적 잠재력의 추동이 최종 목표가 아니며, 그 공간을 현실세계의 사회변화를 위한 추진력으로서 활용하는 것을 그 궁극에 둔다. 이들은 현재 인터넷 웹상의 잡지, 즉 웹진을 40호까지 발행하면서, 신좌파적 기획, 다양한 의사소통로, 체계적인 웹진 발행 등등으로 인해, 그리고 사이버공간에서 대중적이고 진보적인 입지를 확보한 그룹이라는 점에서, 어느 웹진 보다도 중요한 관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미래 운동의 새로운 징후로 해커 전위대와 전자프런티어재단(EFF)을 들고자 한다. 이들은 20세기의 막바지에 등장한 새로운 실천 부류들이다. 또한 어느 개인 혹은 단체들보다도 훨씬 기술적 이용에 능숙한 전문가 부류들이다. 10대를 중심으로 한 해커들은 그들 자신의 윤리, 즉 컴퓨터 접근권, 정보의 공개성, 권력의 분권화 등 그 진보적 측면을 지닌다. 문제는 이같은 해커들의 아나키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본성을 그들의 개별성과 계급적 특권에서 분리하여 사회적 저항으로 접합시킬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한편 권력에 의한 해커의 억압적 조건을 간파한 일부 지식인들이 전자 시민단체를 결성하게된 계기는, 1990년 미국에서의 일명 ''선데블 작전''(Operation Sun Devil)이라 불리는 디지털 지하세계에 대한 대검거 작전이었다. 이들은 해커들에 대한 정부의 과잉 검거, 수색과 압수가 부당하게 인권과 표현권을 침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바로 EFF는 이같은 해커사냥에 대응하여 만들어진 시민자유론자들의 단체이다. 예컨대 검거 중 보여주었던, 컴퓨터장비와 데이터 압류, 출판 등의 표현물에 대한 제한, 부당한 폭력 등에 맞서, 그들은 기금 모금, 법적 행동과 후원 등으로 정세를 반전시켰다. 이같은 정부의 독단적, 억압적, 비합의적 월권에 반응하여, 네티즌들을 보호하는데 사법적, 제도적 투쟁을 거쳤던 사람들이 모였던 것이다. 특히 그 구성원들의 명망성으로 이름을 날리는 EFF는 암호화, 표현의 자유 등의 주장을 통해 전자 시민권 보호에 앞장서고 있다. 우리 실정에서 보면 최근 도청, 감시카메라, 전자주민카드 등 시민의 사생활과 관련된 문제들을 쟁점화하는데 요구되어지는 전문 시민단체들이 아쉽다고 볼 때, 이들의 사안별 공론화와 일정 부분 정책에 현실화시키는 입안 능력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눈여겨볼 점이 많다.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이같은 실험들의 밑바닥 정서에는 단수적 욕망이 자유롭게 발현되는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투쟁이 자리잡고 있다. 이들 실험은 다양한 공간에서 소수적 주체들의 목소리를 담아 권력의 정보에 충돌시키는 커뮤니케이션 행위인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지배적인 스펙터클에 대한 ''교란'', ''단절'', ''중단'', ''전복''이다. 이는 공학적 저항이자, 소위 정보이론에서 얘기하는 엔트로피(entropy)의 요소들이다. 섀논-위버(Shannon-Weaver) 송수신 모델에 기초해보면, 커뮤니케이션 상황에서 엔트로피가 크면 클수록 전적으로 혼동된 무작위성과 예측 불가능성이 증대한다. 송/수신 모델에서 송신자에서 수신자로 이르는 정보 전달과정이 위계적 질서 혹은 초코드화(overcoding) 과정이라면, 이를 흩뜨리는 파장이 엔트로피이다. 그렇다면 엔트로피는 정보/권력에 대한 다양한 도전적 소음/힘이다. 소음/힘이 증가할수록 정보/권력은 증가하나, 그것이 어느 임계 수준을 넘어버리면 정보/권력은 ''교란''에서 ''단절''과 ''중단''을 거쳐 정보/권력 모델 자체가 ''전복''되어 버린다. 소음/힘은 분자적 활동의 집합화이자 반(反)정보이며, 정보/권력은 대중매체 등에서 나오는 초코드들이다. 권력의 초코드화를 다양한 소음/힘들의 연합으로 전복하는 것이 이들 대안 기획의 핵심이다. 이제 90년대 새로운 엔트로피의 생성 가능성은 인터넷이 마련하고 있다. 인터넷은 다양한 소음/힘들의 흐름을 거대한 저항의 파장으로 전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영역이다. 그러나 인터넷에 열광하기 보다는 현실에 정초한 새로운 네트 저항 실험들의 발굴 작업과 동시에 인터넷 정치의 가능성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21세기 정치 지형속에서 엔트로피의 집단적 표현 형식에 대한 새로운 징후를 전자 저항 실험들 속에서 읽어내어 이론화하는 것과 이들의 집합적 실천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에 모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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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문화정치: 2장]: 최초의 정보게릴라 운동: 사빠띠스따(Zapatista)의 네트전

[사이버문화정치] (1998) 제 2 장 최초의 정보게릴라 운동: 사빠띠스따(Zapatista)의 네트전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EZLN)의 정치력은, 비트에서 비트로 연결되는 조용한 힘의 축적에 의해 세워졌다." ― 부사령관 마르꼬스(Marcos) 1) 사빠띠스따의 역사와 목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의 실행 개시일인 1994년 1월 1일,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은 남부 멕시코 치아빠스(Chiapas) 지역의 라깡도나(Lacandona) 정글을 나와 인근의 주요 도시들을 장악했다. 부사령관인 마르꼬스를 포함한 소수 인텔리 지도자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부가 원주민 농민들로 구성된 이들의 작은 봉기는, 멕시코 전역은 물론, 전세계로 그들의 활동을 알리기 위한 서곡에 불과했다. 멕시코는 1980년대초에 시작된 재정 위기 이래로, 보호무역주의에서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펼쳐왔다. 하지만 국민경제를 개방하고, 수출의존적 성장을 추진하면서, 멕시코 정부에 의한 노동자, 농민 압박이 점차 극도에 이르게 된다. 특히 신자유주의 개혁은 제도혁명당(PRI)과 함께하는 살리나스(Salinas) 정권의 재임기간(1988-94)에 정점에 이른다. 농업 분야에서, 살리나스의 NAFTA 대비 프로그램은 멕시코에 해외 투자가들을 끌어들이고, 미국과 캐나다와의 보다 확고한 경제통합을 가속하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그로 인해 멕시코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과 글로벌 자본의 침투는 과거 수십년간 멕시코 소농민들의 농지 박탈, 궁핍과 함께, 사회적인 양극화와 환경파괴를 자행했고, 결국 이 응축된 모순의 폭발이 1994년 벽두에 발생하게 된 것이다. 달리 보면, '사빠띠스따'의 근원이 1911년 멕시코 혁명의 원주민 영웅, 에밀리아노 사빠따(E. Zapata)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은, 원주민·농민운동의 역사와 함께, 오랜 기간에 걸친 그들의 억압적 상황을 반영한다. 결국 사빠띠스따 봉기의 연원은 20세기초의 농민 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고, 가장 가깝게는 최근 20여년간 멕시코 정부와 해외 자본의 억압과 침탈에 대응한 치아빠스의 신(neo)사빠띠스따 혁명으로 요약될 수 있다. 사빠띠스따의 대안과 목표는 과거 레닌주의적 기획을 철저히 거부한다. 오히려 그들 자신의 계급적 다양성에 기반한 풀뿌리 대중조직의 기초 위에, 그들 자신의 민주주의적 자치공간을 원한다. 그 속에서 권력으로부터 배제되고, 억압박는 광범위한 대중의 결속, 그리고 이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과 상호 부조의 통일이 중요하다. 유럽에서 최근 나타나는 민족·인종적 분리주의와 대별해 볼 때, 그들의 차이점은 자본과의 고리를 단절하고, 공동의 연대를 달성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그들은 저개발국들의 자본주의적 개발 논리를 벗어나, 그들만의 자율적이고 상호 협력적인 자치권을 이룩하고자 한다. 현 멕시코정권에 의해 사빠띠스따적 의의를 축소하려는 시도에 대한 저항과 함께, 전세계적에밀리아노 사빠따 '야만적 자본주의'에 대항한 투쟁은 자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같은 국제적 반응의 원인은, 대체로 자국내 현대화 프로그램이 농민과 원주민을 배제하는 배타성에 대한, 그리고 국제적으로는 미국중심의 신세계 질서의 규정성에 대한 반발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게릴라운동의 지역적 특수성, 즉 원주민의 정체성 회복과 농민의 토지 획득을 넘어서서, 그리고 제국주의와 그 이론적 표현인 신자유주의의 새로운 지배형식에 맞서, 정의와 민주주의를 위해 무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들의 '간대륙주의'(intercontinentalism)는 "희망을 근거로 한 인간의 존엄한 삶"을 지키기 위한 것이자, 스스로를 다른 지역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시도에 반대하는 것이다. 한편 사빠띠스따 봉기는 최초의 정보 게릴라운동이라는 점이다. 그들에게 기술적으로 글로벌 투쟁의 촉매 역할은 커뮤니케이션 전략에서 시작했다. 그들에 대한 지지를 조직화하는 주요 매체로써 인터넷이 갖는 속성을 충분히 활용하여, 현실의 게릴라전과 말과 이미지의 정보전을 동시에 실행했다. 이것이 한 지구촌의 이름 모르는 치아빠스지역을 보편적인 실천 사례로써 짚어보게 만드는 근거이다. 2) 게릴라 실천운동의 특수성을 보편성으로 (1) 사빠띠스따의 커뮤니케이션 전략 "인터넷과 사이버공간은, 처음부터 끝까지 대체로 광범위한 수의 자율적이고 상호 연결된 개인들에 의해 창조되는, 경합의 지형으로 간주되어야만 한다. 오늘날 그 경합은 다면적이며, 의심할 바 없이, 사이버공간을 에워싸서 그것으로부터 이윤을 수취하려고 하는 기업의 노력과 그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이버공간을 정교화하고, 또 그것을 이용하려는 수백만의 사람들의 독립적인 노력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사빠띠스따는 지역적 기초를 글로벌 운동과 결합시키는 '전자미디어 이벤트' 전략을 취한다. 역으로 볼 때, 이미 그들은 현대 지형에서 지역적 투쟁의 고립성이 패배의 운명을 자초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깊이 깨닫고 있었다. 멕시코 사회를 비롯한 전세계와 소통할 수 있고, 대중과 지식인의 상상력을 사로잡을 수 있는 능력으로 인해, 그들은 일개 지역의 소규모 투쟁을 전세계 정치의 전면으로 나서게 만들었다. 그 이면에는 네트 전략이 존재한다. 미국내 국가안보의 두뇌집단들이 모여있는 랜드연구소의 연구원, 론펠트(D. Rondfeldt)가 다른 맥락에서 그 현상을 지적했듯이, 사회적 '네트전'(netwar)은 21세기의 새로운 초국적 정보전쟁의 원형이며, 사빠띠스따는 그 실천의 전범이다. 마르꼬스전세계적 연대를 도모하는데, 네트는 최상의 도구였다. 사빠띠스따의 미디어 '이벤트'는 네트 이외에도 다양한 차원에서 그들만의 전술 감각이 동원되었다. 우선 사빠띠스따의 부사령관이자 대변인, 마르꼬스의 역할과 이미지. 자의건 타의건 마르꼬스가 뿜어내는 미쟝센 효과들(예컨대 출신배경, 스키 마스크, 파이프, 인터뷰의 셋팅 등)을 통한 미디어 '이벤트'의 활용은, 그를 포함한 사빠띠스따 그룹의 혁명적 이미지를 대중화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전세계의 모든 사람이 똑같이 마스크를 걸침으로써 사빠띠스따가 될 수 있다. 둘째, '이벤트'적 차원과 함께 동원되는 것으로는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매체의 구사를 들 수 있다. 물론 정글에 있는 사빠띠스따의 성원 모두가 그 매체들을 직접 활용할 수 있는 여유를 지니지 못하며, 더불어 그들의 메시지가 정부의 군사적 포위망을 뚫고 손으로 직접 전해져야만 하는 것은 분명하나, 이는 멕시코와 해외 비정부기구들(NGOs)의 연대 운동을 통해 전세계로 전달되었다. 초보적 형태의 팩스, 전화에서, 투쟁현장 비디오의 신속한 제작과 유통, 오디오 테잎과 씨디롬에 담긴 인터뷰와 음악, (비)합법 라디오와 커뮤니티 텔레비전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전술적 기제들이 동원된다. 특별히 네트의 매체적 기제로는 기간의 논문을 모은 전자책, 투쟁자료의 영구 보존을 위한 FTP나 고퍼사이트의 구축, 웹페이지를 통한 홍보, 비공식적 토론과 논쟁을 위한 포럼 등이 만들어졌다. 셋째, 지역적·국제적 네트연대의 형성. 1990년대 사빠띠스따의 변화는 치아빠스와 멕시코 지역을 엮는 대안적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인 라 네따(La Neta)의 구축과 IGC와 같은 전세계 NGOs와의 연결을 꼽을 수 있다. NGOs는 사빠띠스따의 외곽에서 그 공동체의 말들과 메시지가 사이버공간의 외진 구석까지 확산되도록,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멕시코 정부의 무력진압을 무위화하도록 이끌었다. 마지막으로, 메시지의 신속성과 그 확산. 기존 대중매체가 가지지 못한 네트에서의 신속한 정보유통은, 전세계적 공감대와 연대를 위한 조건이 되었다. 이어 이들 정보에 관심을 갖는 단체들이 사빠띠스따의 정보를 수집, 정렬, 편집하여 알렸고, 추가정보까지 덧붙여 재확산시켰다. 이와 같이 글로벌한 수위에서 진행된 무수한 정보원의 끝없는 가지치기가 종국에는 미세한 글로벌 직조 구조를 만들어냈다. (2) 사이버전(cyberwar)의 궁극적 의미 1996년에 이어 97년 여름, 사빠띠스따는 신자유주의가 강요하는 지구화에 반대하고, 인간의 존엄성, 희망, 삶의 기치아래 소집한 1, 2차 대륙간 회의를 개최함으로써, 세계 각지의 풀뿌리 활동가들이 참석하는 결집력을 과시했다. 이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실재하는 차이들을 벗어나, 모든 개인들, 집단들을 아우르며, 세계 전역의 저항과 반역으로부터 생겨났다. '복수의 울림들과 목소리들의 네트워크', '어조와 수준이 다양한 여러 목소리들의 네트워크', 그리고 신자유주의에 대항한 저항과 희망의 네트워크. 이들 네트워크의 현실적 차원은 두 가지 핵심적 네트워크를 통해 구성되었다. 하나는 '개개의 투쟁들과 저항들의 집합적 네트워크', 다른 하나는 '전자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 전자는 지배적 권력자가 없는 다양한 저항의 연결체이고, 후자는 유연성과 가변성을 지닌 현실적인 전자 직조구조이다. 응집력있고 글로벌한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체제의 지배적 현실에 대응할 수 있는 조건은 네트워크적 실천을 통해 마련된다. '말들의 전쟁', 혹은 사이버전은 "총알보다 더욱 강할 수 있다". 정보와 상호작용을 통해 개개의 투쟁들과 저항이 엮일 수 있는 가능성이 배가된다. 물론 사빠띠스따 내부에서 사용하는 모뎀, 팩스, 이메일이라는 외양이 그들 투쟁의 의미일 수는 없다.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통제권이 생산수단의 통제권을 대체할 수는 없다. 즉, "네트는 민주주의, 혁명 그리고 자기결정에 대한 새로운 정치적 논의들을 위한 새로운 공간을 제공해 주지만, 존재하는 차이들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해 주지는 못한다. 네트는 다만 그러한 해결책들을 향한 모색을 가속화하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네트는 여러 실천 도구들 중 단지 한 측면만을 보여준다. 가장 중요하게는 현실속에서 농민들의 사투를 건 게릴라전이 그 중심에 있을 수밖에 없고, 네트를 사용하여 말하는 주체들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같은 네트의 현실적 한계를 인정하고, 네트의 가능성을 열려고만 한다면, 그 안에서 자율적인 실천들과 가치들의 반항은 반복적으로 통제 메커니즘을 벗어날 수 있다. 특히 네트의 변형적 이용이 객관적으로 개방성, 자율성, 즉시성, 소통성 등의 특성을 지닌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사빠띠스따의 기치, 즉 통치와 권력에 대한 전면적 거부, 자율과 자치에 입각한 글로벌 연대 등과 만날 때에만 그 효과가 극대화된다. 즉 현실 공간에서의 실천 내용이 네트의 유연적 속성과 조우할 때만이, 식민화된 자본주의 공간으로부터의 완전한 탈주의 가능성이 열린다. 1. EZLN은 본래 하나의 정치·군사적 게릴라 집단으로 출발했지만, 원주민 투쟁과의 결합 과정에서 원주민 봉기 조직의 군사부대로 스스로를 전화시켰다.(이원영, [사빠띠스따의 '간대륙주의'와 '민족 자율' 문제], {사빠띠스따}, 갈무리, 1998, 380쪽.) 2. 신자유주의 정책과 꼭 어울리게, 살리나스대통령은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교육받은 경제학자이다. 70년대 이후 저개발국가내 통치엘리트들의 재생산이 미국의 고등교육기관을 통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상기하라. 3. NAFTA에 따른 멕시코의 신자유주의적 재구조화 과정에 대해서는, Barkin, D., "Mexico's Integration into the North American Economy", in Callari, A., Cullenberg, S., & Biewender, C. (eds.), Marxism in the Postmodern Age: Confronting the New World Order, NY: Guilford Press, 1995, pp.472-479 참조. 4. 신자유주의 개혁프로그램은, NAFTA를 통한 국제 경제와의 통합과 더불어, 구체적으로 국영기업의 사유화, 수입관세 삭감, 외국인의 기업소유권 제한 철폐, 농민 보조금 삭감, 농가 신용프로그램 수정 등으로 구체화되었다. 특히 치아빠스 농민과 원주민들이 반발한 직접적 원인으로는, 우선 1992년에 이루어진 농지개혁법(27항의 수정)을 들 수 있다. 정부는 과거 1917년 농민과 원주민들의 혁명을 통해 얻은, 토지의 코뮨적 공동소유권(ejidos)을 농지의 효율성이라는 명목하에 사유화하여, 이를 쉽게 처분할 수 있게 조항을 바꿨다. 이로 인해 초래된 토지가격의 하락, 거대 지주와 자본에 의한 토지 취득 등은 농민과 원주민들을 토지로부터 박탈당하는 현실을 만들어냈다.(Roman, R., & Arregui, V., E., "Zapatismo and the Workers Movement in Mexico at the End of the century", Monthly Review, Vol.49, No.3, July-August 1997, pp.99, 115 참조.) 둘째로는 멕시코의 주농산물인 옥수수와 커피 분야의 타격을 들 수 있다. 북미와의 자유무역 여파로, 특히 치아빠스 지역의 농산물인 옥수수와 커피는 미국의 거대 자본과 경쟁이 될 수 없었으며, 게다가 정부의 농민보조금 삭감으로 인해 이중고를 당해야만 했다.(Otero, G., Scott, S., & Gilbreth, C., "New Technologies, Neoliberalism, and Social Polarization in Mexico's Agriculture", in Davis, J., Hirschl, T., & Stack, M., (eds.), Cutting Edge: Technology, Information, Capitalism and Social Revolution, London: Verso, 1997, pp.264-5 참조.) 5. Otero, Scott, & Gilbreth, ibid., p.254. 6. 이원영, 앞의 논문, 403-438 참조. 7. Cleaver, H., "The Zapatistas and the Electronic Fabric of Struggle", /이원영·서창현역, [사빠띠스따들과 투쟁의 전자적 직조 구조], {사빠띠스따-신자유주의, 치아빠스 봉기, 그리고 사이버스페이스}, 갈무리, 1998, 192쪽 수정하여 인용. 8. Arquilla, J. & Ronfeldt, D., "Cyberwar is Coming!", 1993 참조. 9. 멕시코 정부의 정보에 따르면, 그는 멕시코와 파리에서 사회학과 커뮤니케이션을 수학한 후, 멕시코의 대학에서 사회과학을 가르쳤고, 1980년대초에 치아빠스 지역으로 들어간 것으로 추정한다.(Castells, M., The Power of Identity, Vol. II., Oxford: Blackwell, 1997, p.76.) 그래서 까스텔은 여러 정황으로 볼 때, 마르꼬스가 군사적 전략가로서의 의미를 보여주는 징후가 없는 반면, 그의 엘리트적 능력에서 나오는 전자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활용에 대한 탁월함에 그 비중을 두고 있다.(ibid., p.79.) 10. Castells, M., ibid., pp.79-80 참조. 국내에서 80년대 민주화 운동과 관련하여 학생운동권에서 사용했던 시위 도구들의 상징성과 비슷하게, 치아빠스 농민들의 마스크는 멕시코 원주민의 문화 의식(ritual)의 재발현임과 동시에, 그룹의 각 주체들이 공유하는 평등성, 저항 정신을 표현한다.(p.80.) 11. Cleaver, H., 앞의 책, 216-9쪽 참조. 전통적 매체에서 전자매체로, 혹은 전자매체에서 전통적 매체로 가는 다양한 사빠띠스따의 매체전술은 여론 형성의 새로운 형식을 보여준다. 12. 라 네따는 치아빠스 지역의 NGOs와 다른 멕시코 지역의 수많은 인권 조직들을 연결하는 네트워크이다. 13. 이원영, 앞의 논문, 403, 406-7쪽.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사빠띠스따의 실천적 대의인 네트워크 개념을 보드리야르의 저항매체적 실천 개념에다 일치시킬 수 있는 지점이 발생한다. 보드리야르의 '응답없는 발언'을 복구하는, 네트 저항의 현실적 근거의 사례! 14. 이원영, 위의 논문, 407-8쪽. 15. Castells, M., op. cit., p.81. 16. Cleaver, H., 앞의 논문, 209쪽. 한편 북미 지식인들의 사빠띠스따 평가와 관련하여, 네트의 기술적 속성을 극찬하거나, 심지어 '포스트모던 정치운동'으로 보려는데 대한 비판적 문제 지적은, Nugent, D., "Northern intellectuals and the EZLN", in Wood, M., E. & Foster, B., J. (eds.), In Defense of History: Marxism and the Postmodern Agenda, NY: Monthly Review Press, 1997, pp.164-173 참고할 것. 여기서 필자는 지식인들이 '담론의 정치'를 주장하기 이전에, EZLN을 제대로 이해하고, 과장없이 독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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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디지털 패러독스: 사이버공간의 정치경제학

*책의 원문을 잃었습니다. 우선 목차만 소개합니다. 출판사에다 알아봐야 하겠지만, 글이 수집이 되면 공개를 하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저작권이 걸린 문제라 쉽진 않겠지만... [디지털 패러독스: 사이버공간의 정치경제학] (2000) 커뮤니케이션북스. 머리말 제1장. 디지털 미래의 명암 사이에서 제2장. 자본주의의 위기와 정보/공간화 1. 축적 위기와 정보화 1) 축적 위기의 구조 2) 축적 위기와 정보화 3) 축적 시스템의 유연적 전환 2. 흐름의 공간과 정보/공간화 1) 자본주의적 공간의 의미 2) 정보/공간화 3) 공간의 불균등 발전 제3장. 글로벌 자본의 사이버 지형 1. 사이버 지형의 조건들 2. 하이테크 공간의 위상학적 지형도 1) 단일체, 모나드, 노드:정보 도시 2) 지원 구조, 서버:테크노폴 3) 다리/고리들, 네트워크:인트라넷과 CALS 4) 추상 지도, 네트의 표준화:지구방화 3. 사이버 공간 통제의 추상적 지형 제4장. 정보 상품의 반미학 1. 정보 상품 분석의 유산 2. 정보 상품의 반미학적 얼굴 1) '아톰' 시대의 흔적들 2) '새로움'의 물신 3) 디지털 중독 4) 디지털 덫 5) 이종/혼종 교배 3. 정보 미학적 가치의 복원 제5장. 테크노 공간과 소비 문화 1. 일상 공간과 소비 문화 2. 소비 공간의 후기자본주의적 풍경 3. 테크노 소비 공간들 1) 결연한 하이테크의 시연장:엑스포 2) 과잉 생산의 집중된 탈출구:테마 공원 3) 전자 게릴라 공간들:전자 게임방 4. 테크노 소비 공간의 사적 변형 제6장. 네트의 신화와 현실 1. '생각의 속도', 그러나 신체의 경련 2. 디지털 계급의 인터넷 죽이기 3. 테크노 시대의 물신들 1) 사이보기즘(Cyborgism) 2) 구역사의 초월과 청산 3) 정치적 비/탈정치화 4) 디지털 환각 기술 5) '지구촌을 위한 솔루션™ 4. 영구적 '인간의 조건' 제7장. 전자 대안 매체론 1. 대안 매체는 아직도 유효한가 2. 구매체를 위한 '진혼곡' 3. 전자 대안 매체론의 기획 1) 분자운동의 역사 2) 리좀과 네트 3) 전자 저항의 아방가르드 4. 전자적 대안 모델 참고문헌 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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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사이버공간과 문화의 글로벌화

*우연치않게 발견한 글입니다. 제 번역글을 다른 사람이 곱게 보관하고 있을 줄이야... 사이버공간과 문화의 글로벌화 - 존 스트래튼 J. Stratton, "Cyberspace and the Globalization of Culture", in D. Porter (ed.), Internet Culture, London: Routledge, 1997, pp.253-275. 사이버공간과 문화의 글로벌화 존 스트래튼 (이광석옮김) -------------------------------------------------------------------------------- 윌리엄 깁슨은 1984년 {뉴로맨서}란 그의 소설에서 컴퓨터 네트워크들의 광범위한 상호접속망으로 매개되는 인간과 기계간의 근본적인 변형을 묘사하기 위해, '사이버공간'이란 개념을 도입한다. 로버트 애드리언(R. Adrian)은 이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깁슨의 뉴로맨서에서 등장하는 주인공(케이스)은 네트에 '빨려들어간다'(jack in). 그는 단순히 이용자도 아니며, 정보고속도로로 쾌속 질주하는 데이터 자동차의 바퀴 위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는 네트로 사라져 데이터 흐름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깁슨은 자신의 상상력을 성차에 대한 열망과 정체성 구축의 장소인 신체의 상실에 집중한다. 네트워크나, 깁슨이 명명한 '매트릭스'로 빨려들어가는 카우보이나 쟈키는 남성적이다. 그 명칭이 보여주는 것처럼, 매트릭스 그 자체는 여성적이다. 동시에 매트릭스는 어머니이며 연인이다. 이 매트릭스의 이미지 안으로 자궁과 질이 합해지며, 그리고 신체를 뒤로 한 채 매트릭스로 사라지는 그 남자(케이스)는, 프로이트가 언급하듯 여성의 생식기를 신비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그 욕망을 채우는데 성공한다. 곧이어 그는 '고향'으로 귀환한다. 이같은 욕망 실현의 대가는 신체의 상실이다.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인터넷 이용자들이 (상대적으로) 새로운 신체상실의 가상 정체성과 결합되어 느끼는 쾌감과 열망은 이같은 매트릭스의 이미지 안에서 억압받는다. 하지만 어머니/연인으로서의 사이버공간 이미지를 압도하는 또 다른 주제가 있다. 어머니/연인으로서의 매트릭스는 재생산의 장소이다. 그러나 무엇을 재생산하는가? 간단한 답은 자본주의이지만, 그 내용은 보다 뒤얽혀 있다. 마르크스는 {그룬트리쎄}에서 "순환시간은... 노동생산성에 대한 장벽이 된다"고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잇는다. (자본)은 장소간 이동에 소요되는 최소시간을 줄이는 등, 시간을 통해 이 자본(순환) 공간을 괴멸시키려.... 애쓴다. 자본이 더욱 더 발전할수록, 그에 따라 자본이 순환하고, 자본 순환의 공간적 범위를 형성하는 시장도 더욱 확장된다. 동시적으로 자본도 더욱 더 시장의 가일층 거대한 확장을 위해서, 그리고 시간에 의한 공간의 더 큰 소멸을 위해 애쓴다. 순환시간을 줄이려는 자본의 대안은 하비가 간명하게 얘기했던 '공간적 조정'(spatial fix)이다. 이 간결한 용어는 우리에게 새로운 지리적 공간으로의 자본주의 경제질서의 확장이란 원재료, 새롭고 값싼 노동 재원, 그리고 새로운 시장을 찾으려는 의도에 있음을 얘기한다. 본인이 주장하고자 하는 사이버공간은 단지 1980년대 후반기에 형성되어 등장하진 않는다. 오히려 사이버공간은 자본의 순환 시간을 가속화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진 19세기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이 공간은 소비지향 자본주의의 글로벌화와 공간적 조정 가능성의 종결로 새로운 중요성을 담당하게 되었다. 사이버공간의 시작을 고대하면서 찾은 가장 비옥한 지점은 19세기 전반에 발명된 전신에서였다. 제임스 케어리(J. Carey)의 유명한 통찰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전신 발명의 가장 단순하고 가장 중대한 점은 '수송'과 '커뮤니케이션'의 결정적인 분리가 이루어졌다는데 있다." 내 생각으로는 사이버공간의 생산을 알리는 시발은 컴퓨터 도입에 있다기 보다는, 메시지가 일정 거리를 통과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송·수신자가 체험하는 무시할만큼의 시간으로 변한다는 점에서 거리를 극복하는 커뮤니케이션 속도의 증가에 있다. 지리적 공간을 통과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줄어듦으로써, 우리는 은유적으로 지리적 공간이 아주 다른 비지리적 하이퍼공간으로 탈맥락화되고 대체된다고 말할 수 있다. 케어리가 설명한 바처럼, 그 공간내에서 "상징은 지형과는 독립적이 되며, 수송활동보다 더욱 빠르게 독자적으로 움직인다." 달리 말하면 이 공간은 우리가 컴퓨터시대에 당연히 여기게 된 정보를 물신화하는데 있어서 그 전제 조건이다. 우리는 여기서 전신 도입의 또 다른 측면이 있음을 관찰해야 한다. 케어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전신의 효과는 아주 단순하다. 즉 전신은 공간내 시장들을 균등하게 한다. 전신을 통해 모든 사람들은 교역 목적을 위한 동일 장소에 있게 된다. 전신은 지형을 무관하게끔 한다. 전신은 모든 시장의 수요와 공급의 조건이 가격결정에 관계맺도록 한다. 고전적 의미에서 완전한 정보소비의 실현은 아주 미미한 예외를 제하곤 여기저기서 자의적인 가능성을 제거한다. 케어리는 여기서 전신이 자본주의적 교환에 복무한다고 여긴다.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바처럼, 만약 화폐가 보편척도라면, 그 이유는 상품이 거래될 때 모든 상품의 비교 가능한 교환가치로 기능하기 때문이며, 그렇다면 전신은 모든 지역 시장들을 단일의 하이퍼마켓으로 해소하는 과정을 시작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중개 거래가 지리적 공간에 걸쳐 정보 전송의 무능력을 드러낸 지점에서, 실시간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는 하이퍼공간내에 동질화된 하이퍼마켓을 만들어내고 있다. 20세기 후반기, 특히 1970년대 초 이래로 화폐 스스로가 상품으로 물신화되었을 때, 이 하이퍼공간의 시장은 화폐 그 자체만을 거래하는데 이상적이다. 이 과정은 실질상 금본위제를 벗어난 글로벌 운동과 결합되나, 점차 금융자본의 중요도가 증가한다는 점이 이러한 과정의 가장 분명한 사실이다. 화폐와 생산은 이제 직접적으로 연계하지 않으며, 이 화폐는 (세계) 주식교환, 환차 이익을 노린 투기, 혹은 고금리 추구를 통해 훨씬 많은 돈을 만들어내는데 이용된다. 하비는 이 새로운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1972년 이후 시기에 특별한 점은 금융시장의 예외적인 융성과 변형이라는데 있다. 거기엔 금융자본이 자본주의 내부에서 최고의 (하지만 제한되게) 중요한 지위를 점한 듯 싶던 시기―예컨대, 1890년에서 1929년의 시기―와 같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국면이 존재했었고, 오로지 뒤이어 오는 투기성 자금의 붕괴에서만 그 지위를 상실했을 뿐이다. 하지만 현재 국면에서 전지구적 규모의 고도로 복잡한 금융 조정시스템의 도래와 맞물려서 진행되는 새로운 금융장치와 시장의 폭발만큼이나, 주요 금융기관의 권력집중은 그리 크지 않다. 이 고도로 복잡한 글로벌체계의 번영은, 점차 복잡해져가는 컴퓨터의 발전과 일국을 막론하고 국제적으로 각각의 지점들을 연결하는 자동화되고 디지털화된 텔레커뮤니케이션 시스템과의 결합으로 가능해졌다. 정보와 동일하게 화폐의 상품화로 인해 우리는 다시끔 전송체계로서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를 재구성하게 된다. 우리는 거리가 소멸되고 순수 이동이 장소와 외연을 대체해버린 하이퍼공간을 통해 이 새로운 상품들을 전송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교환체계 내부에서 지리적 공간이 생산 (그리고 소비)의 장소로 바뀌고 식민화되었다면, 하이퍼공간 그 자체는 자본주의 맥락안에서 발전된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산물일 뿐이다. 사이버공간의 영역은 근본적으로 탈영토화되어 있다. 들뢰즈(G. Deleuze)와 가따리(F. Guattari)는 [앙띠오이디푸스Anti-Oedipus]란 책에서 어떻게 자본주의가 탈영토화하고 재영토화하는가를 묘사하면서 장소의 역사를 구성한다. 로버트 영(R. Young)은 이들이 주장하는 부분을 잘 정리해 놓았다. 생산과 노동을 포함하여 모든 사물을 추상적인 화폐 가치로 변화시키기 위해, (자본주의는) 흐름을 해독하고, 사회성(socius)을 '탈영토화' 한다. 자본주의는 교환의 보편형식을 손에 넣기 위해, 곧장 재영토화한다.―지역, 국가, 가족과 같은 '모든 종류의 잔여적, 인공적, 상상적, 혹은 상징적 영토성을 세우거나 탈환한다'. 영은 다음과 같이 계속해서 {앙띠오이디푸스}를 재인용하고 있다. 이중의 운동이 존재하는데, 그 하나는 해독과 탈영토화의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폭력적이고 인위적인 재영토화에 관한 것이다. 자본주의 기계가 흐름을 해독하고 공리화하여 이것으로부터 잉여가치를 추출하면서 탈영토화를 거듭하면 할수록, 정부 관료, 사법권, 질서 등의 종속장치들은 그 과정에서 잉여가치의 훨씬 큰 몫을 흡수하면서 재영토화를 위해 더욱 매진한다. 영은 이같은 묘사가 '서구' 산업화의 역사에 적합할뿐더러 '서구의' 식민화 과정에 적절하다고 지적한다. 자본주의의 교환은 새로운 공간조직을 생산하는데, 이 공간은 교환과 함께 투영되고 판옵티콘적인 관심사로 구성된다. 장 보드리야르(J. Baudrillard)가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는 투영되고 판옵티콘적 공간과, (그 공간에서는 '객관적' 권력의 실체에 대한 모든 고전적인 분석과 밀접한 도덕가설만 잔존한다.) 그런 연유로 인해 스펙타클적 요소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비록 그가 과장되게 스펙타클 세계의 종말을 선언한다 하더라도, 앞으로 정보초고속도로로써 사이버공간을 재개념화하려는 시도는 자본, 커뮤니케이션 미디어, 그리고 국민국가간을 연결하고자 하는 향수를 보여주고 있다. 상호작용적 인터넷의 확산으로 말미암아 민주적 유권자와 '수동적' 청중―후자는 현대 민주국가 내부에서 전통적 대중매체의 등장으로 인한 그 결과물로서 작동한다―간에 이루어져온 균형 상황이 깨져 나갈 것이다. 사이버공간의 개막은 현재 자본주의의 교환체계 내부에서 하이퍼 탈영토화의 새로운 운동으로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이버공간의 나날의 새로운 표현, 즉 인터넷은 맥켄지 워크(M. Wark)의 용어인 일종의 벡터(vector)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자본과 군사력 양자 모두는 벡터와는 일정한 간격이 있다. 즉 벡터는 장소, 문화, 영토, 전통 등의 특수성에 해당하는 시·공간을 가로질러 이를 추상화하는 기술이다. 벡터의 가속적 발전은 예외없이 모더니티와 동질적이며, 군사력과 기업의 결합된 이해가 그 후원자이다. 2차대전 이후의 역사에서 나타난 경제 국제화의 맥락하에서 볼 때, 우리는 이 새로운 형태의 하이퍼 탈영토화를 자본주의의 글로벌화의 일환으로 진행된 공간적 조정의 확대로 해석할 수 있다. 애퍼듀라이(A. Appadurai)가 주장하는 바처럼, "우리는 신글로벌 문화경제를 중층적이고 이접적(離接的, disjunctive)인 질서로 이해해야만 하며, 이러한 질서는 더 이상 현재의 중심-주변부 모델로는 (다중의 중심과 다중의 주변부로 설명하는 모델조차도) 설명될 수 없다." 애파듀라이의 강조점은 글로벌 자본주의가 이원적 위치성보다는 흐름의 견지에서 볼 필요가 있다는데 있다.그는 '글로벌 문화흐름'의 다섯 가지 차원―에스노스케이프(민족적 영역), 미디어스케이프(미디어 영역), 파이넌스케이프(금융 영역), 이데오스케이프(이데올로기 영역)―을 확증하는 구조물을 제안한다. 그는 들뢰즈와 가따리와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다른 방식으로 주장하는데, 이러한 다섯 가지 문화흐름이 점차 사람, 이미지, 상품, 돈, 이념의 탈영토화나 본인이 앞서 얘기한 하이퍼 탈영토화로 이끈다. 그는 인터넷―1994년 약 3천만의 인터넷 이용자들 가운데 대략 2천 5백만이 미국인이며, 모든 사람들은 컴퓨터, 전화, 정보 공급업자에 액서스하고자 한다―접속에 관한 중대한 한계를 인정한 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은 애파듀라이가 묘사한 글로벌 흐름의 강화에 있어서 중요한 벡터이다. 애퍼듀라이의 중심-주변부 모델에 대한 메타포는 17세기 식민주의의 확산으로부터 전개된 글로벌 질서를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 그의 메타포는 '서구'에 대한 주변부의 관계가 일차적으로 잉여가치의 원천으로 기능하는 것을 상정하면서 펼치는, 궁극적으로 현대의 '선진'국들로 구성된 유럽과 미국의 핵심부에 반대한다. 이와 같은 국민국가의 개념은 '서구' 모더니티 수출의 가장 성공적인 것 중 하나였다. 사실상 서구의 국민국가 내부에서, 그리고 그 국민국가를 통해서 그 초점을 맞추는, 포상 관계(emplaced relations)의 개념은 중심-주변부 모델에 중요하다. 애퍼듀라이는 어떻게 이 관계들이 전화되었는지를 얘기하고 있다. 문화의 글로벌화는 문화의 동질화와 동일한 것이 아니라, 글로벌화는 동질화의 다양한 장치들(군비, 광고 테크닉, 언어 헤게모니, 의류 스타일 등등)의 사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지역의 정치·문화적 경제는 이 동질화의 장치들을 흡수하며, 단지 주권, 자유기업, 근본주의 등과 같은 이질적 대화로 귀환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서 국가는 글로벌 흐름의 완전 개방화라는 점차 미묘한 역할을 수행한다. 또한 완전 개방을 막음으로써, 중국 신드롬 등의 폭동이 국민국가를 위협하며, 그리고 국민국가는 미얀마, 알바니아, 북한이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낸 민족적 단계를 벗어난다. 메타포의 변화를 통해 나타난 글로벌 자본주의의 재조직화는 국민국가의 체험을 변경시키고 있다. 중심-주변부 축을 따라 조직된 자본주의 세계는 공간, 특히 국민국가와 그 국민국가의 식민지적 부속국들로 조직된 지리적 공간에 의해 지배된다. 글로벌 흐름은 국민국가의 자본주의적 역동성이 발휘된 결과물이지만, 동시에 이 흐름은 강제적으로 과거의 국민국가적 현실을 자명하게 드러낸다. 다른 어떤 것도 인터넷만큼이나 이를 분명하게 드러내진 못하고 있다. 전신·전화의 등장으로 인한 커뮤니케이션의 즉시성은, 두 가지 이유로 인해 국민국가를 묶는데 일조하고 있다. 첫째는, 이 두 가지 기술은 국민국가의 이데올로기를 동질화하려는 맥락에서 이용되고 있다. 이 기술이 국가의 관료적·관리적 시스템 내부에서 이용되고, 기술과 시민과의 직접적 연계와 이 기술들이 군사력과 경찰 통제력을 제어하도록 하는 권력의 집중화 경향, 이 양자 모두는 이 국가간 결합의 과정을 강화한다. 둘째는, 국민국가 내부에서는 이 기술들을 우선적으로 이용하였다. 하지만 1970년대 새로운 텔레커뮤니케이션 기술은―예컨대 위성의 이용을 포함하여― 국제 전화 통화를 더욱 값싸게 이용할 수 있게 만들었으며, 무엇보다도 시민 이용자들에게 보다 분명해졌다. 케어리의 주장을 재정리한 워크는, "철도와 더불어 전신과 전화의 벡터는 국가간 커뮤니케이션의 확장을 가능하게 했다"고 논평했다. 케어리는 "어떤 의미에서 철도와 운하가 시장을 지역화했다면, 전신은 그 시장을 국제화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 통신기술들은 내적 동질화로의 경향, 즉 국민국가의 주요 테마 중 하나이다. 이용자가 하이퍼공간을 정적이고 포상된 공간으로 인지한다는 것은 커뮤니케이션이 순간적으로 기능한다는데 있다. 정보와 화폐―다른 상품과 달리 이 두 가지는 그 자체내에 사용가치를 지니지않으며 단지 교환기능만을 지닌다―모두의 질적 특수성은 인터넷의 벡터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순화된다. 이 특수성은 그 두가지 상품이, 특히 중요하게는 다른 국민국가로 "단지 들어갈 수" 있는지를 떠보면서, 더욱 더 "다른 쪽 세계에 거주하는"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경우로 바꾸고 있다. 국민국가는 스스로를 다른 국민국가들과는 차별적인 것으로 한정하고 동질화를 꾀하려 한다, 과거의 예로 봐서, 국가는 타국들과의 차별성을 국민국가의 경계와 그 경계에 의해 구획지어진 내부에 공간적으로 한정되었으며, 물질적이고 문화적 환경으로 표현하였다. 사람들이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를 국제적으로 사용했을 때, 수송으로부터 커뮤니케이션의 분리가 의미하는 것은, 특유의 지리적 공간성으로 표현된 국민국가의 민족 의식이 감소되었다는데 있다. 이러한 전망에서 볼 때, 인터넷의 하이퍼공간은 민족문화의 권리를 유지하고자 하는 국민국가의 지리적 공간편성을 제거해 버렸다. 일본과 싱가포르같은 수많은 국민국가들이 그들 국가내의 시민들이 인터넷에 접속 가능해지는 것에 대해 주저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일반적인 이유 때문이다. 대부분의 국민국가들이 국제 전화 통화의 일대일 상호작용성에 대한 통제력의 결핍을―아마 내부의 폭동의 시기를 제외하곤―기꺼이 허용할 채비를 갖춘 반면, 인터넷은 증가된 커뮤니케이션의 질적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고로 논리상 현재 인터넷을 장악한 국민국가내 시민들은 인터넷 기술을 보다 덜 위협적으로 느끼게 되며, 역으로 그러한 장악이 자신의 문화적 통합성을 위협한다고 느끼는 국가들은 더욱 적대적 반응을 보여줄 것이다. 이는 영어의 보편화와 로마식 알파벳 문자의 사용뿐만 아니라, 사이버공간을 지배하는 여러 유용한 정보와 문화적으로 특수한 상호작용 방식의 결과이기도 하다. 예컨대 최근 중심적으로 논의되는 자유, 검열, 인권의 수사학. 하지만 인터넷의 글로벌 흐름에 대한 미국의 지배가 지속되리란 보장은 없다. 여기에는 실제로 아이러니가―혹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내 모순으로 묘사했던 것이―숨어있다. 현재 미국은 인본주의적 사명의 분위기를 만들어낸 프로젝트, 즉 '글로벌 정보하부구조'(GII)를 구축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떠맡고 있다. 미부통령 앨 고어는 1994년 일본 쿄토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 GII를 구축하려는 노력은 이데올로기를 뛰어 넘을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부여하므로써, 전세계의 모든 시민들에게 혜택이 돌아 갈 수 있는 하부구조를 제공한다는 공통의 목표로 나아가고 있다. 우리는 이 정보하부구조를 이용함에 따라, 개별 경제단위를 원조하고, 보건·교육·환경보호·민주주의를 증진할 것이다. 보건·교육·환경을 끼워넣은 의미는 경제적 목표와 정치적 목표에 대한 이중성을 크게 강조하는 것이다. 고어는 인터넷이 부여한 정보접근의 '자유'가 권위주의적 국민국가들 내부의 민주화 운동과 절대적으로 상관성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달리 말해 미국은 경제적(그리고 이데올로기적)우위를 지키기 위해 GII를 촉진하고 구축하고 있다. 그러나 보다 많은 비미국인들과 비영어권 사람들이 그 대열에 합류했을 때, 인터넷 사용에 대한 미국의 헤게모니가 좀 더 강하게 지속되고 있다. 경제질서와 인터넷의 결합은 국제전기통신협회(ITU)이 GII에 적용했던 5가지 원칙으로 집약될 수 있다. 이는 '사적 투자, 시장중심의 경쟁, 유연 규제체계, 비차별적 접근, 그리고 보편적 서비스'이다. 앞의 세가지 원칙은 GII의 구축, 소유권, 그리고 경영에 대한 자본주의적 형식을 강조한다. 나머지 두가지 원칙은 시청자에 관한 내용이다. 후자의 내용은 전세계의 시민을 일종의 시청자로 구성한다는 취지 혹은 부여받은 유토피아적 특성, 이념이다. 여기서 우리가 진행되고 있는 현실을 완전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고어가 행한 인터넷에서 정보초고속도로의 수사적 이동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가 이 연관성에 주목한다면, GII의 구축이란 무한 팽창의 미디어기업들에게 인터렉티브 상품 전달시스템의 기초를 제공에 다름아님을 알 수 있다. 어떻게 이 시장자본의 꿈이 성취될 것인가? 워크는 군사적·기업적 용어를 사용하여, "더욱 빠르고, 더욱 값싸고, 보다 유연적이고, 훨씬 광대역의 벡터들을 통해서, 이 벡터들에 전략적 우위를 가지고 접근할 수 있는 자본들이 어떻게 무장하는지"에 대해 잘 묘사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애드리언은 전화가 지닌 부가가치 서비스의 성장 전망의 한계성을 유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대역폭의 증가가 미치는 그 결과를 알고 있다. 전화 공간은 대역폭의 증가로 상업 선전에 적합해진다. 즉 정보오락 상품들이 그 공간을 점유하고, 쇼핑몰로 뒤바꾼다. 이 기업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인터렉티브 케이블 TV이다. 이 케이블 TV는 케이블상에 거의 어떠한 공간도 요하지 않기 때문에, 그 상호작용성은 일종의 경품처럼 제시되는 온라인 쇼핑, 비디오게임, 전화를 통한 유료 영화 등으로 한정된다. 이처럼 한정된 의미의 정보고속도로는 온라인으로 구입하고 소비할 수 있는 생산, 서비스, 정보, 오락의 전시장일 뿐이다. 앞서 기업들이 이념적으로 상호작용성을 제한하고자 한다는 점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전화는 라디오와 텔레비전에 비교해서 대중 커뮤니케이션 매체로 진전되지 않았다는 점이 특이하다. 전화는 탈중심적이고 인터렉티브하다. 전화와 동일한 통신기술에 기초한 인터넷은 전자우편이나 '대화'와 같은 일대일 상호작용, 그리고 동시적이고 다발적인 상호작용의 유즈넷, 리스트서브 리스트(LISTSERV lists), 인터넷 릴레이 채팅(IRC)와 같이 매우 다양한 일대다 상호작용을 행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현대 국민국가의 조직과 함께 전개된 라디오와 텔레비전 기술방식과는 그 기능적 연관성에 있어서 대조적이다. 앤더슨(B. Anderson)은 현재를 적절하게 드러낸 이미지란 점에서 국가를 상상된 공동체(imagined community)로 묘사했다. 그는 일련의 신화와 지식의 공유가 국민적 정서를 생산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신문이 신화와 지식의 공유를 발생시키는 한 수단으로 출발했다고 주장한다. 앤더슨은 남미에 관해 서술하면서, 신문의 전신으로 다음의 내용을 실은 가제뜨(gazette)를 언급하고 있다. 가제뜨는 식민지에 대한 정치적 임명권, 그리고 중심도시들에 관한 뉴스―선박이 입·출항할 때, 어느 항구에서 어떤 상품들을 가지고 얼마에 거래되었다는 따위의 상업적 뉴스―와 나란히, 부자들의 결혼 등도 다루고 있다. 달리 말해서 이 곳에서는 선박, 저 곳에서는 결혼, 그리고 이 곳에서는 주교, 저 곳에서는 가격을 얘기하는 것은 바로 식민통치와 시장체계, 그 자체내 구조를 보여준다. 이러한 식으로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의 신문에 실린 선박, 교량, 부교, 가격 등은 특수하게 모인 비슷한 독자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이들 사이에 상상된 공동체를 창출했다. 앤더슨은 신문의 '뉴스'적 측면이 발전됨에 따라, "신문 그 자체의 개념으로 인해 '세계의 사건들'이 각 지방의 독자들에게 특수한 상상의 세계로 굴절된다"고 지적했다. 우리는 신문의 '발명'과 국민국가의 등장간의 연관성 속에서 또 다른 두 가지 발전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현대 공론장의 형성과 대중 시청자의 형성이다. 하버마스는 현대 공론 영역의 등장에 대한 영향력있는 논의를 통해서, 부르조아적 발전이 자본주의 시장의 확산이라는 맥락하에서 발생했던 것처럼 공론장 또한 이 맥락 속에서 진화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공론장을 민주주의의 기능에 핵심 요소라고 본다. "정치영역의 기능 요소로서 공론장이, 시민사회의 욕구에 따른 국가권력과 함께 시민사회의 자체 접합을 위한 일종의 기관처럼 규범적 지위를 얻었다"고 그는 제안한다. 인쇄 문화, 그 중에서도 특히 신문 문화에 기초한 하버마스의 공론장 개념은 민주사회의 주된 정치적 논쟁장이다. 이 점에서 신문은 일차적으로 공개된 논쟁을 모사하거나 보조한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신문의 역할이 존재한다.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앤더슨은 신문이 독자에게 정보를 알림으로써 국민국가내에 상상된 공동체를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이후에 등장하는 대중매체인 라디오와 텔레비전처럼, 신문 또한 상호작용적이 아니라는데 있다. 신문의 국가내 상상된 공동체 구성은 침묵하는 대중을 구축하므로써 이루어진다. 존 하틀리(J. Hartley)는 공론장 구성에서의 대중매체의 역할에 대해 훨씬 비판적 관점을 강조하면서, 앞서의 접근 방식을 한 단계 높이고 있다. 하틀리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상황과 현대적 상황을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오늘날에는 물리적인 공론 영역이 부재하며, 정치는 '민중적'이지 않다. 동시대의 정치는 두 가지 의미에서 대리적이다. 즉 선택된 소수만이 시민을 대표하며, 정치는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매체를 거쳐 공중에게 제시된다. 대리적 정치공간은 말 그대로 영상들로 이루어지며, 그 영상들이 공론 영역을 구성한다. 공론장의 구성을 영상들로 국한할 필요는 없다. 공론장은 (신문의) 인쇄물이나 (라디오의) 음성도 포함하고 있다. 하틀리는 공론장의 발생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 토마스 홉스가 현대의 정치 국가를 이론화한 {리바이어던Leviathan}(1651)의 최초 시도로 회귀하여 살피고 있다. 리바이어던이 한치의 에누리없이 완전하게 대표자의 권력을 승계하여 생명을 얻는 바로 그 때..., 이제부터 시민 주체들(사적 개인들)은 리바이어던이 그 주체들에게 '위임하거나' 양도한 것들을 수행한다. 간단히 말해 공중은 자신의 주권을 리바이어던에게 이양하며, 그런고로 리바이어던은 공중의 창조자가 된다. "종종 절대군주제와 동등하게 취급하는 초강력 국가, 즉 리바이어던은 이제 민주주의가 가능한 정치적 조직체가 되버린다. 이는 정치 참여가 공중의 사라짐이라는 표상으로 전화되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공중이 시청자로 전화되었다. 이엔 앙(I. Ang)은 대중매체 시청자의 광범위한 구성을 논하면서, 기본적으로 시청자 구성을 두가지 형태로 구분한다. 즉 텔레비전의 분화가 상업서비스 형태와 공공서비스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을 반영하여, 이른바 시장형 시청자(audience-as-market)와 공적 시청자(audience-as-public)로 나누는 것이다. 비록 그 두 가지가 본질적인 측면에서 구분되나, "두 종류의 제도가 불가피하게 정복 대상으로서의 시청자에 관한 도구적 관점을 강화한다.... 두 가지 경우에 시청자는 구조적으로 단선적이고 일방향적인 과정의 끝에 수동적으로 놓인다"고 그녀는 지적한다. 시청자는 이 지배적인 시청자의 광범위한 구성으로 인하여 집중하고, 대량화하고, 수동적으로 된다. 앙이 텔레비전에 집중하여 저술하고 있지만, 그녀가 천착한 시청자에 대한 이해란 현대의 국민국가내 공론장의 보편화된 특성일 뿐이다. 앤더슨은 어떻게 국가의 탄생이 시청자로 하여금 상상된 공동체로 전화하여 국가의 성원들을 구성하는가를 묘사한다. 하틀리는 유사하게 민주주의 국가의 통제 과정을 제시한다. 하버마스에게는 신문의 역할, 그리고 공론장의 퇴보를 가져온 새로운 시·청각 매체간에 불연속성이 존재한 반면, 하틀리는 이 시·청각 매체를 신문이 항상 그 일부가 되어 동일한 과정을 연속하는 것으로 본다. 하틀리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현재 왜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집중화된 커뮤니케이션 전달체계로 발전했는가를 이해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 간단히 말해 국민국가의 상상된 공동체, 그 국가의 공론장, 그리고 그 국가의 시청자는 관념적으로 공통의 경계에 서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누구나 여러 포럼 가운데에서 자신의 관점을 제시할 수 있는 권한과 함께, 인터넷의 보편적 상호작용성은 (저널리스트적인 객관성 개념에 전형적인) 공공 정보, 그리고 민주주의적 국민국가의 상상된 공동체 형성에 중심적 특성, 즉 개인 견해간 차이에 위협을 안겨주고 있다. 지난 수 년간에 걸쳐 대중매체와 시청자 형식을 재구성하기 시작한 미디어 발전의 두 경향이 존재한다. 첫째는 케이블 TV의 확산으로 채널 다양화로의 이동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는 내로우캐스팅과 '대중매체'라는 범주에 대한 의문을 보편화시켰다. 둘째는 보다 확대된 상호작용성으로의 이동이다. 이는 VCR의 사용에서 페이퍼뷰까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시청하길 원하는 프로그램을 주문할 수 있는 능력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인터넷은 이 두 가지 발전에 대해서 질적인 이동을 촉진한다. 앙에 의해 묘사된 수동적인 미디어 시청자는 인터넷의 경우에 (상호)능동적이 되며, 완전하게 미디어 생산물의 제작에 참여한다. 그것은 '정보초고속도로' 개념을 향한 수사학적 이동의 중심부에 있는 또 다른 대중매체 전달체계로 인터넷을 '재형성하려는' 시도이다. 전통적인 대중매체의 시청자가 이미지를 소비한다면, 정보초고속도로의 잘 은폐된 목적은 대중매체의 수동적이고 수신만 하는 시청자를 능동적이고, 소비하는 시청자로 전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새로운 시청자는 단지 이미지들뿐만이 아니라, (댓가를 지불하고) 온라인상에서 유용한 광범위한 상품과 서비스를 소비한다. 시민들이 형식상 국민국가의 물질적이고 규율적인 표현물에 의해 규정되는 일상생활의 생산에서 능동적인 역할을 맡을 것이라는, 미셸 드 세르토(M. de Certeau)의 {일상생활의 실천The Practice of Everyday Life}의 급진적 내용에서, 그는 "주변성(marginality)이 오늘날 더 이상 소수집단으로 제한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중적이고 침투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계속해서, "주변성이 보편화되고, 주변 집단은 이제 침묵하는 다수가 되었다"라고 주장한다. 드 세르토가 얘기한 내용은 앤더슨, 하틀리, 앙이 표현한 과정들을 이어받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논의는 탈대중화와 상호작용성에 의해 위협받음으로써 표현되며, 이 두 가지 특성은 모두 과거 대중매체로 인해 침묵하는 대중의 '공론적' 주장으로 여겨지고, 대중매체의 현대 형식내에서 인터넷의 액서스 구조에 중심이 된다. 멕시코의 아메리카 인디언들인 치파스와 같이 소수의 침묵이 강요된 집단이 인터넷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펼칠 수 있으며, 누군가 그들의 의견을 뉴스그룹을 통해 강력히 알린다면, 미디어 조직과 시청자의 구성뿐만 아니라 단일의 특수적인 상상된 공동체(규율적이고 그 규율에 따르는 공론장)의 형성과 국민국가 그 자체의 이해 방식도 바뀌어간다. 인터넷은 글로벌 흐름내에서 하나 이상의 벡터로 기능하면서, 국민국가의 수사학을 동질성에서 다문화주의로 이동시키고, 국민국가의 정치를 계급 중심에서 이익 중심으로 이동시켰다. 우리는 이제 처음에 고어가 인터넷에서 정보초고속도로로 수사(와 물질 형태)를 바꾸는 것에 대한 관심사와 함께, 완전하게 겹쳐있는 필연적인 두 번째 이유를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은 경제적 고려점에 더하여 인터넷이 현대 대중매체 보다 훨씬 나은 것으로 재구성하며, 그리고 인터넷이 장차 국민국가의 제도형태에 덜 위협적인 것으로 될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과거의 '시청자'가 자신의 관점을 능동적으로 제시하게끔 하는 매우 새로운 공론장 개념과, 공동체 개념 사이를 주의깊게 구분해야만 한다. 특히 미국의 인터넷에 대한 논의에서는, 이 두 가지 개념이 통합되는 경향이 있다. 기본적으로 현대 공론장 개념은 사적 생활과 공적 생활 사이의 구별에 따른다. 공적 생활영역인 공론장은 현대에는 공유된 지식 공간과 정치 공간에 해당한다. 앤더슨과 하틀리는 18세기 이래로 전개된 전통적인 신문의 여러 정보가 현대 공론장 형식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 동의할 것이다. 본인은 앞서 시민/시청자는 현대의 공론장내에서 침묵하기를 강요받는다라고 제안했다. 이 상황은 실제 조금 더 복잡하게 이루어진다. 18세기 런던의 살롱문화(coffee house)에서 오늘날 사무실내 차마시는 시간의 토론에 이르기까지, 여기에서 진행된 문제 설정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문제 설정이란 대중매체에서 제시한 정보로 제한받으며, 미디어와 시청자의 구조적 관계는 미디어 조직 내부의 편집자에게 보내는 편지와 토크 라디오의 표현 이외에는 거의 어떠한 응답이나 다른 가능성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인터넷은 시청자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포럼을 제공한다. 제이 웨스톤(J. Weston)은 "구자유와 신기술-공동체 네트워킹의 진화"이란 논문에서, 인터넷의 잠재력을 매우 분명하게 제시한다. 인터넷은 대체로 사람들 스스로의 발언대를 구하는 것과 관련되며, 공적인 방식으로 서로가 발언하고, 서로간에 전달되는 내용은 중요성에 있어 분절적이고 심지어 이차적이다. 대중매체는 (개인의) 존재를 확인하지도, 확인할 수도 없다. 시청자의 시장은 존재하지만, 독자, 청취자, 혹은 관객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웨스톤의 논문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그는 시민이 공론장에서 발언할 수 있는 가능성이란 대중매체의 전개에 의해 제한받았던 일종의 '구자유'라고 믿는다. 나는 본질적으로 이것이 전혀 구자유가 아니라, 실제로 현대국가의 존재 방식인 민주주의가 현존하는 자유의 환상 가운데에서 구축되었다고 보고 싶다. 공동체 논의는 현대―서로간에 얘기를 주고받는 사람들에 대한―인터렉티브 커뮤니케이션 개념의 공론장 논의와 일치하여 나타난다. 그러나 현대 서구에서 '공동체'는 한편으로 향수적인 내용을 함축하여 전한다. 공동체는, 현대의 기초적 변화―통속화, 도시화, 자본주의, 산업화, 그리고 물론 국민국가의 출현―로 인해 대인간 상호작용의 분열과 당연한 도덕 질서의 상실이 발생하기 이전에, 생활양식이 신비적인 방식으로 이해되는 근본적 '공유감'에 속한다. 미국내에서 현대 이전 시기의 공동체에 대한 이 향수적 신비화는 '소규모 마을'의 이데올로기의 일종이다. 루스 로젠(R. Rosen)은 그 근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835년 초 토크빌은, 미국인들이 대리적 공동 생활을 제공하는 광범위하게 결합된 네트워크를 구성하느라고 분주하다고 지적한다. 도시가 팽창하는 것처럼, 아직도 미국인들은 아득히 지나쳐 버린 소규모 마을을 슬퍼한다. 미국인들이 강제로 익명성이나 도시 생활에 맞닥뜨리도록 강요받을수록, 그들은 안정성, 면대면 면식, 공유 가치들, 마을의 도덕적 책임성을 더욱 더 신비화했다. 20세기 초의 수십년간 그러한 신비화는 진보당의 개혁자들이 미국 도시를 소규모 마을로 새롭게 고치려는 시도에 자극을 주는 만큼이나 더욱 강화되었다. 하워드 레인골드(H. Rheingold)의 {가상공동체-컴퓨터화된 세계에서 연결하기}(1994)란 책은 아마도 가장 널리 애독하는 인터넷 입문서이다. 레인골드의 책 제목은 그가 바라보는 인터넷의 이용의 전제 조건을 시사하고 있다. 그는 서문에서 WELL에 대해 언급한다. 현재 인터넷에 연결된 WELL은 "중규모의 컴퓨터 컨퍼러싱 공동체"이며, 그는 이 가상공동체의 성원이기도 하다. 수년전의 가상마을과 구별되는 여러 특성들을 지닌 통일체로서, WELL은 소규모 마을이지만, 이제는 네트의 활발하고, 윙윙거리는 혼돈으로 인해 그 마을 입구가 개방된 채로 유지된다. 여기서 WELL은 소규모 마을과 닮은 어떤 것이기 보다는, 바로 그 소규모 마을로 묘사된다. 인터넷의 WELL은 비교적 도시에 가까운 것 같다. 레인골드는 이 가상 '도시'안에서 비슷한 관심사를 지닌 사람들로 구성된 가상공동체내의 일원이 되는 것을 가능케 한다. 흥미롭게도 로젠의 주장대로라면, 레인골드는 그 연결점을 멜로드라마에서 찾고 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특이한 가상공동체의 변화를 지켜본다는 것은 자신만의 인류학적 스릴과, 그 공동체는 관객을 배역과 분리시키는 어떠한 경계도 지니지 않으면서, 끝없이 아마츄어적인 멜로드라마를 훔쳐보는 흔하디 흔한 관음증 증세를 갖게 한다. 인터넷의 미국적 체험에 있어서, 공동체 이미지의 중요성은 개인적 회상을 통해 얘기될 수 있다. 1994년 11월 19일, 피터 맥더모트(P. F. McDermott)는 CPSR-GLOBAL LISTSERV의 질문에 대한 장문의 답장을 보냈다. 질문인 즉슨, "누군가가 왜 인터넷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미국내에서 그토록 대중적이 되었는가를 물었고, 여타 동일 수준의 선진국들과 미국이 다른 어떤 특별한 이유가 존재하는 지도 묻고 있었다." 맥더모트는 인터넷을 찾아 다니고, '공동체 의식'에 잠기는 그 자신의 즐거움을 묘사한 후, 계속해서 그는 인터넷에서 제공하는 그 공동체에 대한 근거들을 깊이 생각한다. 얼마나 많은 종류의 미국문화가 공동체 의식과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대해 내 스스로 놀란다. (그렇다, 우리는 바로 이 공동체 기반 위에서만이 우리 자신의 문화를 지닌다.) 나는 지난 2,30년간을 거치면서 미국내 공동체가 파괴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놀란다. 나의 부모가 어른이 되가면서, 부모세대의 가족들 모두는 이웃과 알고 지냈다. 하지만 나는 내 친구들이 이제 거의 어떠한 이웃도 알지 못하며, 동네에 사는 다른 가족에 대해서도 전혀 모른다고 말하는 것을 수도 없이 들었다. (이와 같은 것이 내가 단지 상상하는 것들이 아니라면) 이것이 바로 공동체의 상실이며, 공동체에 대한 대응적 모색이 바로 미국에서 인터넷이 대중화되는 한 이유가 되지 않겠는가. 맥더모트는 이 의미심장한 설명을 통해서 부모 세대와 자신의 세대 사이에 '공동체' 파괴가 자리하고 있음을 얘기하고 있다. 인터넷은 그에게 그의 부모가 속해있던 현실 공동체에 대한 가상 대체물이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미국내 삶의 질이 하락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으며, 인터넷에서 구성된 가상공동체가 그 균형을 되찾는데 일조하리라 여긴다. 우리는 그와 유사한 관점을 CPSR-GLOBAL에 베른트 프로만(B. Frohmann)이 쓴 메일에서도 볼 수 있다. 프로만은 유럽적인 시각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수사적 질문을 던진다. "사이버동료들(Cyber-buddies)의 공동체 개념의 매력성이, 미국내 공론장의 퇴보에 직접적으로 비례하여 그 힘을 획득하고 있으며, 공론장이 쇼핑 몰과 디트로이트의 르네상스 센터와 같은 거대 기업본부 등의 사적 공간으로 대체된다." 프로만은 계속해서 미국 도시와 유럽의 수많은 도시들의 건조환경과 비교하고 있다. 나는 최근 그라즈의 회의석상에서 동료들에게 말을 건넸을 때, 그들 중 대부분이 미국의 사이버공동체에 대한 전형적인 자만심을 어리둥절해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당신이 확대된 공론장을 지닌 도시안에 거주하며, 그리고 도시안의 사람들이 (공적으로 유지되는) 공간에서의 교류에 실제적 기회와 장소들을 갖는다면, 그들의 반응은 이해할만한 것이다. 결국 당신은 사람들 사이의 의미있는 연결 장소로써 '정보초고속도로'에 대한 선전이란 조금은 웃기는 짓이라 여기기 십상이다. 단지 하이퍼공간에 존재하는 가상공동체가 인간 서로간에 지리학적 간격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을 포함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이라면, 프로만의 오류는 현실 공동체와 가상공동체를 글자 그대로 동등하게 다루는데 있다. 하지만 그가 유럽과 미국 도시의 물질적 형식을 비교하면서 지적하는 바는 시사적이며, 그의 지적은 신비적 공동체를 향한 미국 문화의 특별하게 진전된 갈망과 같은 것으로 그 의미가 보충될 수 있다. 결국 유럽도시는 광장들로 구성된 현대 이전의 센터들이 조성되어 있는 반면에, 미국의 모든 도시는 현대적이며 자본주의적 교환, 특혜 사업, 그리고 지금의 쇼핑몰의 요구에 따라 형성되었다. 현재 미국의 소규모 마을에는 공공 특수기관, 교회, 마을 사무소 혹은 우체국까지도 있다. 소규모 마을과 같은 미국의 공동체 이미지는, 그 동일한 이미지를 이용하여 이른바 커뮤니티 네트워크, 혹은 프리넷(Freenet)을 기획하게 되었던 실제 근거이다. 레이 아취(R. Archee)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프리넷의 주된 철학과 근본적 전제는 커뮤니티 컴퓨터 네트워크에... 힘을 불어넣는 일이다. 이러한 철학과 전제는, 그 네트워크들이 자유롭거나, 혹은 요금을 지불한다 하더라도, 그리고 일반인들이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상품, 즉 정보에 접근하는 것을 허용한다 하더라도 유효하다. 제이 웨스톤은 캐나다의 내셔널 캐피털 프리넷을 기초로 삼으면서, 이 상호 의사소통의 네트워크들에서 강화되는 힘의 본질을 강조한다. 내셔널 캐피털 프리넷은 개인, 집단, 조직 모두가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는 무언의 플랫폼, 즉 상상된 공론장이다. 그곳에서의 분쟁과 논쟁은 그 공동체 내부에서 이미 발생하고 있는 분쟁과 논쟁의 징후로써 발생할 수 있다. ...그러한 공간은 프리넷에 대신한 어떤 공적이거나 사적인 조직에 의해서가 아니라, 공동체로서의 네트에 의해서만 오직 구성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어떻게 공동체 개념과 광범위한 기초하에 놓인 새로운 상호작용의 공론장 구성이 불투명해지는가를 지켜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인터넷이 소규모 마을의 공동체 모델을 (재)창출한다고 여겨지는 반면, 우리는 여기서 캐나다의 내셔널 캐피털 프리넷이 새로운 공동체를 위한 조건을 제공한다기 보다는 기존에 존재하는 공동체로부터 발생했으며, 이전에 침묵하는 사람들의 발언이 가능해진 가상 공론장을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웨스톤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공적인 소속'과 '참여 민주주의'와 같은 표현들은 우리의 수사적 전통에 아로새겨져 있으나, 이 표현들에 대한 자명한 수용은 항상 동일하게, 확실한 접근 무능성을 그 전제 조건으로 하였다. 언제나 우리에게 소속과 참여는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기술을 앞서지 못한다는 점을 확인시켜 준다. 달리 말해 웨스톤은 대의제 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란 전형적으로 민주주의의 실제와 반목하면서, 최소한 공공 미디어의 영역내에 머무른다고 봄으로써 하틀리와 그 주장이 일치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여기서 지적해야 할 것이 있다. 인터넷(혹은 프리넷)은 실제 소규모 마을과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면, 누가 그 안에 거주하는가? 본인의 이 질문은 누가 현재 인터넷에 실질적인 접근권을 지니는가를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터넷이 공동체의 신화를 (특히 미국인들에게) 현실화하는 역할을 한다면, 그리고 공동체 신화가 미국의 소규모 마을에 대한 신화적 이미지의 노스텔지어로 표현된다면, 누가 이 신화적인 소규모 마을의 거주민들인가? 오늘날 정체성의 구체화는 대개 코베너 머서(K. Mercer)가 지적한 이른바 "아주 근친한 '인종-계급-성'에 대한 주문"의 세 가지 구도를 통해 드러나며, 정체성은 점차 서구의 거주민들이 타민족의 정체성과 마주쳤을 때 이를 판독하는 세 가지 표식들을 반영한다. 이러한 점에서 그것은 현대 도시생활의 기호 체험에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도시의 기호 현상은 형상과 외관을 필요로 한다. 인터넷의 신화적인 가상의 소규모 마을 공동체에서는 이와 같은 분명한 기호 체험이 부족하다. 인터넷 거주자들이 육체가 이탈된 결과는, '현실' 생활에서 차지하는 내용 보다, 서로 다른 성별, 계급적 배경, 혹은 개인사를 보여주는 이름, 프로필, 목소리 등의 가상 정체성 구축이 가능해지게 한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너무나도 자주 온라인 세계가 스스로의 준거틀로 삼는 전형적인 소규모 마을간에, 얼마나 많은 현실적인 차이점이 실제 조정 가능할 수 있을까? 어쨌든 미국적 견지에서 보자면, 인종적 다양성은 널리 공유된 이상으로 여겨지는 만큼이나 현대 도시에서 진행되는 공동체의 쇠퇴과 붕괴에 대한 완곡한 표현인 듯 하다. 특히 이엔 앙과 본인이 다른 지면을 빌어 설명했던 것과 같이, 항상 미국내 흑인의 인종적 차이는 오늘날 이미 벌어진 간극으로 영구 존재하는데, 이는 미국내 동질적 정체성을 구성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로젠이 지적한 미국의 신비화된 소규모 마을, 그리고 그 안에 공유된 도덕 질서는 미국내 흑인(혹은 아시아인)이 아니라 유럽태생의 (아마도 대개는 2세대인) 백인 정착자만을 그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 분명하다. 이 근면한 반(半)-전원의 백인들은 소규모 마을을 도시로 변형시키는 한편, 미국내 부르조아의 구체화된 노동 윤리(개인의 자조를 통한 성공)를 제시하면서, 중산층으로 상향 이동하였다. 그리고 모든 도시의 중요한 공직은 남성들만이 차지했다. 인터넷 그 자체의 순수성과는 별도로, 우리는 미국인이 공동체를 인터넷으로 신비화하는 작업이란, 우선 백인 중산층 남성의 지배와 그들의 문화 소비를 재창하고자 하는 신비화된 초창기의 현대적 공동체에 대한 향수적 꿈을 재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차이를 인정하는 바탕 위에 세워진 이질적 국민국가를 구성하려는 현대의 시도와 무관하게, 소규모 마을 공동체의 이미지는 뒤죽박죽의 동질화된 정치의 도가니속에서 단일의 새로운 미국민의 정체성으로 자리잡는다. 본인이 앞서 지적했던 바처럼, 아직까지는 어떤 미국인도 인터넷이 미국문화에 미치는 위협에 관해 불평하지 않는다. 글로벌 정보하부구조에 대해 고어가 천명한 감춰져있고 순진하기까지한 발상은, 유럽의 계몽주의적 가치들에 기초한 미국 이데올로기가 인터넷 공동체을 향한 동질적 기초를 형성할 것이라는데 있다. 인권, 개인주의, 민주주의와 같은 계몽주의적 가치들은 자본주의의 확산이라는 고어의 또 다른 관심사와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 인터넷을 정보초고속도로로 전화시키고자하는 이같은 결정은, 현대의 대중매체적 관계로 인터넷을 되돌리고, 작금의 공공 언로에 대한 접근을 차별적인 소비상품에 대한 제한되고 인터렉티브한 선택으로 변형시키고, 그 과정에서 국민국가의 재구성을 둔화시킴으로써, 소수 집단의 액서스란 '문제점들'과 대치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미국인의 하이퍼공간에 대한 자본주의적 지배가 계속되거나, 서로 다른 언어, 문화, 그리고 비경제적 관심사가 자리잡는 어떤 공간이 있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같은 대치상황이 온존할 것이다. -------------------------------------------------------------------------------- 미주 1. 이 논문의 출처는 J. Stratton, "Cyberspace and the Globalization of Culture", D. Porter ed., Internet Culture, London: Routledge, 1997, pp.253-275. 2. 그는 커틴 기술대학의 커뮤니케이션과 문화연구학부내 문화연구 상임강사이다. 그의 가장 최근 저작은 Writing Sites: A Geneology of Postmodern World(1992)와 The Desirable Body: Cultural Fetishism and the Erotics of Consumption(1996) 이다. 3. Robert Adrian, "Infobahn Blues," CTHEORY, article 21, 1995. ctheory@concordia.ca의전자메일을 통한 접촉도 가능. 그리고 William Gibson, Neuromancer, New York: Ace Books, 1984. 4. 마이클 하임(M. Heim)은 [사이버공간의 에로스적 존재론], {가상현실의 형이상학}, 옥스퍼드출판사, 1995, p.88에서, 깁슨의 매트릭스에 대한 정확한 에로스적 기원을 보여주고 있다. 즉 "매트릭스라는 말은 에로스 발생의 근거, 즉 "어머니"란 뜻의 라틴어에서 생겼다"고 지적한다. 5. Karl Marx, Grundrisse, London: New Left Review, 1973, p.539. 6. David Harvey, The Limits to Capital, Oxford: Basil Blackwell, 1982. 7. James Carey, Communication as Culture: Essays on Media and Society, Boston: Unwin Hyman, 1988, p.213. 8. Carey, ibid., p.213. 9. Carey, ibid., p.217. 10. David Harvey, The Condition of Postmodernity: An Enquiry into the Origin of Cultural Change, Oxford: Basil Blackwell, 1989, pp.192-4. 11. Robert Young, Colonial Desire: Hybridity in Theory, Culture and Race, London: Routledge, 1995, p.169. 12. Gilles Deleuze and Felix Guattari, Anti-Oedip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London: Athlone, 1984, pp.34-5. 13. Jean Baudrillard, Simulations, New York: Semiotexte, 1983, p.54. 14. McKenzie Wark, "What does Capital Wants? Coparate Desire and the Infobahn Fantasy," Media Information Australia 74(Nov. 1994), p.18의 내용을 Howard Rheingold, The Virtual Community: Homesteading on the Electronic Frontier, Mass.: Addison-Wesley, 1993, p.67에서 재인용. 여기서 레인골드는 인터넷의 기술적 역사를 1960년대와 70년대 미국방성의 DARPA로부터 성장한 것으로 보고 있다. 15. Arjun Appadurai, "Difference in the Global Cultural Economy," in Mike Featherstone, ed., Global Culture: Nationalism, Globalization and Modernity, London: Sage, 1990, p.296. 16. Appadurai, ibid., p.307. 17. Wark, ibid., p.19. 18. Carey, ibid., p.217. 19. 일본은 인터넷이 일본 문화에 대한 외부의 영향력이 증대하고 있다는데 그 관심을 둔다. 밥 죤스턴(Bob Johnstone)은 Wired 2.2(Feb. 1994), pp.38-42의 "Wiring Japan"이란 글에서 일본이 인터넷과의 연결에 더딘 이유를, "인터넷의 자유롭게 굴러가는 민주주의적 방식이 일본의 가장 권위주의적인 전통과 맞부닥뜨리는 두 문화의 정면충돌" 효과에서 찾고 있다. 싱가폴에서는 최초 관료들의 수많은 주저 이후에, 현재는 일반 대중이 고무되어 인터넷을 싱가폴의 현대화 드라이브의 일부로서 접근중이다. 동시에 아직은 '서구의' 타락상에 대비되는 '아시아의' 도덕적 효과들에 대한 관심이 잔존한다. 20. 1994년 9월 22일, 일본 교토의 국제 전기통신협회(ITU) 주최 전세계 컨퍼런스에서 앨 고어 부통령이 위성을 통해 전송된 연설문. 이 글에서는 뉴스그룹인 LISTSERV CPSR-GLOBAL에서 그 내용을 취하고 있음. 21. Gore, ibid., "Remarks." 22. Wark, ibid., p.18. 23. Adrian, ibid., "Infobahn Blues." 24. Benedict Anderson, Imagined Communities: Reflections on the Origin and Spread of Nationalism, London: Verso, 1983. 25. Anderson, ibid., pp.62-3. 26. Jurgen Habermas, The Structural Transformation of the Public Sphere: An Inquiry into a Category of Bourgeois Society, Cambridge, Mass.: MIT Press, 1989, p.74. 27. John Hartley, The Politics of Pictures; The Creation of the Public in the Age of Popular Media, London: Routledge, 1992, p.35. 28. Hartley, ibid., pp.124-5. 29. Ien Ang, Desperately Seeking the Audience, London: Routledge, 1990, pp.31-2. 30. Michel de Certeau, The Practice of Everyday Life,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4, p.xvii. 31. 예를 들어, Richard Sennett, The Fall of Public Man,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7.을 참조할 것. 32. Jay Weston, "Old Freedoms and New Technologies: The Evolution of Community Networking," electronically published in cyberjournal@Sunnyside.Com, Dec. 22, 1994. 33. Ruth Rosen, "Soap Operas; The Search for Yesterday," in Todd Gitlin ed., Watching Television: A Pantheon Guide to Popular Culture, New York: Pantheon, 1986, pp.47-8. 34. Rheingold, The Virtual Community, pp.10-1.(레인골드 책의 부제는 여러 판에서 다양하게 나오고 있다.) 35. Peter F. McDermott, "US NII for GII," CPSR-GLOBAL LISTSERV, nov. 19, 1994. 36. Bernd Frohmann, "Electronic Communities," CPSR-GLOBAL, nov. 23, 1994. 37. Ray Archee, "The NII and Community Computer Networks: Highway, Tollway or Backroad," Media Information Australia 74, 1994, p.51. 38. Weston, ibid. 39. Weston, ibid. 40. Kobena Mercer, "'1968': Periodizing Politics and Identity," Welcome to the Jungle: New Positions in Black Cultural Studies, London: Routledge, 1994, p.288. 41. Jon Stratton and Ien Ang, "Multicultural Imagined Communities: Cultural Difference and National Identity in Australia and the USA," Continuum 8.4, pp.12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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