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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e세상] 자유로운 풍경이 우리 인터넷을 살린다

자유로운 풍경이 우리 인터넷을 살린다 이광석(뉴미디어 평론가) 얼마전 새 정부 출범에 맞춰 정통부의 대국민 캐치프레이즈 공모가 난 적이 있다. 공모 내용은 언제 어디서나 초고속 접속이 가능한 우리 인터넷의 강점을 잘 살릴 것을 주문했다. 이게 정말 딱이다 싶었던 적격이 없었던 모양인지 심사 결과 대상은 없었다. 당시 필자도 몇 자 끄적이다 보내길 포기한 것들이 있다. '자유로운 풍경이 우리 인터넷을 살린다'와 '생 긴대로 냅둬라, 우리 인터넷' 이 둘을 놓고 고심했다. 심사에 올랐다면 대상감은 고사하고 그대로 구겨질 처지였지만. 생긴대로의 자유로움이 뭘까 고민하면 최근 텍사스주 오스틴시에서 열린 한 정보문화 관 련 행사가 퍼뜩 생각난다. 무엇보다 '자유소프트웨어재단'의 리처드 스톨먼(Richard Stallman)의 강연이 머리에 스친다. 내겐 정보 자유의 철학을 외치는 그의 거친 입보다는 자유스런 발에서 그 멋대로의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3년전 국내에 초청되어 강연한 후 두번 째 보는 그의 모습은 한마디로 무격식이다. 덥수룩한 수염, 멋대로 튀어나온 배, 벗어제낀 신발, 망가진 히피가 따로 없다. 공석에서 서양인들이 여간해선 내놓지않는 발을 시원스레 내놓고 강연 내내 서서 이를 꼼지락거리며 거친 입담을 늘어놓는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여 전했다. 스톨먼의 발치 밑에 있던 나를 포함해 어느 청중도 그의 발냄새가 구리다고 박차고 나가는 이가 없다. 그의 말에 주목하려들지 누구 하나 발을 문제삼지 않는다. 오히려 청중은 예정 시간보다 2시간을 더 머무르는 진지함을 보여줬다. 그의 강의에 유난히도 동성애자들이 많았던 것도 새롭다. 누군가 자기 옆에 게이가 앉았 다고 수군거리는 이는 전혀 없다. 갑자기 홍석천이 떠오른다. 인터넷 방송으로 최근 방황과 재기를 꿈꾼다는 그의 모습에서 안스러움이 느껴진다. 한 사람의 '커밍아웃'을 왕따시키는 우리 사회의 위선과 폭력에 섬뜩하다. 그저 생긴대로 봐주지 않고 기득권에서 나오는 독선 과 아집으로 모든 것을 재려는 광기가 느껴진다. 이어 다른 방에서는 문신의 수준으로 보건 대 조폭의 우두머리쯤으로 보이는 이와 젖비린내 날 정도의 어린 사람이 강연을 한다. 그들 의 외모와 지위는 여전히 문제될 게 없었다. 오히려 자유분망한 외모가 그들의 정보업계 종 사 경력에 빛을 더한다. 과거 몇 년전부터 시작해 요즘 부쩍 늘어나기 시작한 미 젊은이들의 하위문화의 한 형태 로 '혀찢기'(tongue splitting)란 것이 있다. 문신이나 피어싱(piercing)이야 이미 보편화됐다. 하지만 혀를 가르는 행위는 좀처럼 따라잡기 어려운 문화 현상이다. 잘못하면 언어 능력을 상실하거나 미각을 잃을 정도라니 섬뜩하기조차 하다. 그럼에도 젊은이들은 열광한다. 혀찢 기의 근원 파악이 어렵지만 뱀을 모방해 그 혀를 형상화한 것만은 분명하다. 어쨌거나 이 극단의 문화 현상으로 충격받은 윤리주의자들이 곧바로 법석을 피웠지만 표현의 자유를 존 중하자는 의견이 우세하다. 합법적인 시술에 의해 혀를 가른다면 인정못할 이유가 없다는 지적이다. 스톨먼의 발만큼이나 문화 현실의 자유로움이 지켜진다. 혀찢기와 같은 신체 변형 행위를 변두리의 극단적 문화 양식으로 치부할 수 있지만, 이의 인정이 현실의 풍요에 기여한 측면도 이미 존재한다. 소위 디지털 아방가르드 행위 예술에 신체 변형은 중요한 표현 방식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올랑(Olan)은 70년대부터 수십번의 성형수술을 재현하며 자본주의판 아름다움의 물신성을 조롱했다. 호주의 스텔락(Stelarc)은 신체 확장의 실험을 끊임없이 시도하며 자신의 피부를 바늘로 뚫어 실에 의존한 공중 부양 을 시도했다. 이러한 자유로운 문화의 토양은 90년대 스텔락 자신의 팔과 다리의 신경과 근 육에 반응하는 제3의 사이보그 팔과 다리 시연으로 발전한다. 또한 사이버네틱스 연구자 영 국의 케빈 워익(Kevin Warwick)같은 이는 자신의 아내와 함께 신체 반응의 신호를 컴퓨터 에 전송하는 칩을 팔의 신경망 안으로 이식하는 실험을 해 주목을 끌기도 했다. 초창기 극 단의 신체 변형 문화가 디지털 아방가르드 예술의 지평을 넓히는 단서가 된 셈이다. 스톨먼을 보러온 게이 청중들, 그의 구린 발, 혀찢기 등의 신체변형 문화가 가진 공통 분 모는 지칠줄 모르는 자유로움에 있다. 이들은 천편일률의 잣대로 억누름이 없이 그저 생긴 대로 놔두면 기대 이상으로 잘 자라는 습성이 있다. 새로운 디지털 문화의 발전을 개척하는 힘은 이런 막생겨먹은 개성을 잘 북돋아주는 노력에 달려있다. 반면 홍석천에 드리운 사회 의 그늘, 인터넷 누드게재 교사 징계, 동성애자 사이트 폐쇄, 인터넷 실명제 거론 등은 권위 와 통제의 살벌한 칼날들이다. 자유로움은 고사하고 인터넷의 자유로운 토양조차 가차없이 목을 친다. 네티즌들의 자유로운 토론과 개입이 대선의 당락에 큰 영향을 준 것처럼, 진정한 자유의 역동성이 가득해야 인터넷이 무럭무럭 자란다. 그저 초고속 통신망 깔아놓고 시민들 앉을자 리 마련했다고 뚝딱 만사 해결될 것도 아니요, 국제행사 한다고 길거리 노점상들 때려잡듯 인터넷에 윤리를 세우고 질서확립 한다고 외친다해서 더더욱 될 일도 아니다. 윤리와 통제 의 규격에 설사 맞지않아 다소 삐져나오더라도 그대로 놔두는 여유가 필요하다. 그런 자유 로운 환경이 결국은 인터넷 발전에 큰 밑천이 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올해 공석이 된 정통부 캐치프레이즈 공모 대상을 그래서 내맘대로 '자유로운 풍경이 우 리 인터넷을 살린다'로 정한다. 많은 돈들여 정보 복지 구현하는 것도 중요하고 밖에서 비치 는 우리의 정보 경쟁력의 규모도 중요하지만 네티즌들에게 활동과 행동의 자유로움을 온전 히 부여하는 일만큼 근본이 되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혼쾌히 스톨먼 식 구린 발에 취할 그 때가 오길 기대해 본다. (아름다운 e세상, 200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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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e세상] 옛 것과 새 것의 지루박

옛 것과 새 것의 지루박 이광석 뉴미디어평론가 요즘 미국은 무선 와이파이(Wi-Fi) 인터넷 붐으로 요란하다. 공항, 공공 건물, 학교, 식당, 까페, 가정 등 할 것 없이 죄다 무선 인터넷에 몰린다. 아직은 많은 이들의 정보 접근이 차 단된 상황에서 노천까페에 앉아 은색의 노트북을 가지고 무선 인터넷을 하는 것이 신분 과 시의 문화적 표현처럼 보인다. 노트북은 물론이고 적어도 십만원은 줘야 하는 무선 카드를 구입할 정도의 여유 계층은 그리 많지 않다. 명색이 '뉴미디어'를 한다는 명분으로 뒤질세라 필자도 이에 동승해 얼마전 무선카드를 구 입했다. 까페에서 남들처럼 폼나게 인터넷을 하려는 이유보단 그저 도서관에 들어오는 무선 인터넷 인입선의 혜택을 좀 보고 싶었다. 아무래도 인터넷 포트를 찾아 헤매거나 낯선 사람 과 포트를 나눠 쓰려고 쑥스럽게 마주하기보다 어디든 자유롭게 자리해 인터넷에 접속하는 것이 편했기 때문이다. 내겐 데스크탑처럼 한 곳에 고정돼 6년 정도 버틴 시커먼 노트북이 하나 딱 있다. 이 덩 치 큰 컴퓨터는 갈수록 빨라지는 하드/스프트웨어 갱신 주기를 따라잡는 것과 무관한 터다. 그 와중에 최신의 감당못할 무선카드를 산 것이다. 그러니 이 카드가 내 노트북에 경기를 일으켰던 것은 당연했다. 컴퓨터 오작동에 자료까지 모두 날리고 급기야 전체 하드 포맷까 지 해야하는 쓴맛을 봤다. 낡은 것이 새 것의 부하를 감당못했던 결과다. 한번도 못써본 그 카드는 결국 날쌔고 최신의 컴퓨터를 지닌 후배에게 선심용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내 와이 파이의 꿈은 새 컴퓨터를 장만할 때까지 보류됐다. 그 일로 나는 잘난 카드에 못미치는 낡 은 내 컴퓨터를 탓했다. 새 것의 충격에 엉망이 된 컴퓨터에 난 다시 낡은 옛 운영 소프트웨어를 깔기 시작했다. 한번 맛이 간 컴퓨터는 처음과 같은 상태로 돌아오지 않았다. 보다못해 미친 척하고 컴퓨터 가 받아들일 수 있는 운영 프로그램의 버전을 한두 단계 정도 더 높였더니 이게 웬일인가. 오히려 내 컴퓨터에 맞는 최적의 시스템으로 거듭났다. 낡은 컴퓨터의 한계 능력에 움츠려 운영소프트웨어 갱신을 두려워했던 내 자신이 한심했다. 낡은 것이 새 것을 만나 더 큰 능 력을 얻었다. 낡은 컴퓨터가 이제 쓸만한 물건이 돼 몇 년 끄떡없어 보인다. 이렇게 컴퓨터와 씨름하던 중 한 충격적 소식에 마음이 쏠렸다. AOL 타임워너 그룹의 총 수였던 스테판 케이스가 주주들의 압력으로 사퇴한다는 발표였다. 불과 3년전 미디어재벌 타임워너는 신경제의 상징이던 아메리카온라인(AOL)의 디지털 혁신의 비전을 믿고 인수 제 의를 받아들였다. 당시 언론들은 구시대의 기업이 한창 주가를 올리던 AOL에 인수된 것을 마치 신경제의 승리인양 추켜세웠다. 아뿔사, 합병 당시 풍선마냥 잔뜩 거품과 바람으로 부 풀려진 신경제 기업들의 속내를 알았다면 그런 거래의 성사는 아예 없었을 것이다. 합병 후 잇따른 AOL의 사업부문 성장률 하락, 광고 수입 저조 등 기업 실적이 바닥을 치면서 주주 들의 분노를 자아낼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씁쓸하게도 재임 시절 몇 차례에 걸쳐 고가에 자신의 주식들을 거의 다 팔아치웠던 케이스의 놀라운 판단력만이 그의 성공 경영으로 남을 듯 하다. 18년전 미국 온라인 문화를 꽃피웠던 피자헛 점장 출신 케이스의 AOL 성공 신화가 그의 초라한 뒷모습에 여지없이 쭈그러든다. 인터넷 경제의 자양분을 받으려했던 타임워너에 이 제 AOL 사업부문은 전체 사업 성장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됐다. 사업 내용 이상으로 대우받 던 온라인 기업이 시장 변화로 무너지면서 합병기업의 다른 사업 부문들까지 뒤흔들어 놓았 다. 새 것이 옛 것에 심한 과부하를 일으키는 꼴이다. 무선카드가 내 낡은 컴퓨터를 다 헤집 어놓은 것 마냥, 거품의 신경제 기업이 구기업의 몰골을 험하게 망가뜨려 놓았다. 다행히도 타임워너 사업부문의 꾸준한 선전이 AOL의 사업 실패를 보상하고 있는 듯 보 인다. 이른바 디지털 케이블사업 등 업데이트된 문화상품들로 시장 점유를 꾸준히 늘린 결 과라 한다. 환경 변화에 맞춘 자체 갱신의 노력이 돗보인다. 마치 내 낡은 컴퓨터에 궁합이 맞는 새 소프트웨어의 발견처럼 말이다. 이번 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케이스의 뒷모습이 요즘 노천카페의 분위기를 한껏 띄우 는, 아직 설익은 무선카드처럼 생경하다. 지금까지 겉보기에 세련되고 새롭다 싶던 것이 낡 은 것을 홀대하거나 이에 들어와 사방 흠집까지 내는 경우가 흔했다. 새 것에 바라는 기대 치가 클수록 이를 적용하다 당했던 고통이 컸던 듯 싶다. 자신의 수용 한계를 따져보는 지 혜도 필요하다. 신경제 몰락 이후 AOL 케이스와 무선카드로 지칭되는 새 것의 지나친 욕망이 지난 몇 년간 치이고 무너지며 많이 퇴색해왔다. 이젠 누구나 아주 세련된 새 것보다 욕심없이 존재 하는 유무형의 자산에 맞는 것들에서 선택하고 응용하려 한다. 지속적 내부 혁신과 갱신으 로 얻은 타임워너 사업 성장이나 내 낡은 컴퓨터에 새로운 소프트웨어로 새 생명을 얻은 것 이나 다들 가지고 있는 것을 잘 살핀 덕에 얻은 이익이다. 새 것에 끌려다니지 않는 옛 것 도 중요하지만, 옛 것을 키우는 새 것의 발견도 공히 중요하다. 새 것에 숨은 독과 가치를 구분하는 옛 것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굳이 비유하자면, 지루박에 맞춰 옛 것은 새 것을 잡고 끌고 땡기며 부단한 스탭을 밟을 필요가 있다. 새 것에 이끌려 스탭이 엉키거나 불륜에 패가하기 전에 옛 것은 함께 움직이는 기본 4박자 스탭에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 내 낡은 컴퓨터가 살고 신경제의 허황된 꿈도 아예 접고 지루박도 스포츠댄스가 된다. (아름다운 e세상, 200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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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e세상] 아제이젤 대 와이파이

아제이젤 대 와이파이 이광석(뉴미디어평론가) 얼마전 날도 춥고 몸도 으실해 의례 만성중독으로 복용하는 타이레놀 두 알 꿀꺽 털어 입에 넣고 이불 뒤집어쓴 채 시간을 죽일 양으로 철지난 비디오를 들춰봤다. 감기를 놀래켜 내쫓는 데야 스산한 공포 영화가 제일이라 싶어 녹화해둔 비디오 테이프들 중 하나를 무심코 집어들었 다. 그레고리 호블릿 감독, 덴젤 워싱턴 주연의 <다크엔젤 (원제: Fallen)>이라. 어지간해서는 영화를 절대 '리바이블' 하지않는 나쁜 습관에다가 돌아서면 쉽게 까먹는 짧은 기억력 수준을 고려할 때 한 서너해 흐른 지금의 내 머리 속에는 이 영화가 그 흔한 제목에서 풍기는 뉘앙스 로 짐작컨대 그저 조잡스런 줄거리의 헐리웃 흥행 실패작으로 가물거렸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두 번째 대하는 영화의 느낌이 전혀 달랐다. <다크 엔젤>은 처음 에 기억했던 것처럼 주인공이 사악한 악마와 사투하는 공포 특급 영화가 절대 아니었다. 이제 보니 '인터넷', 특히 무선 인터넷에 바치는 처절한 헌사용 영화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신이 혼 미한 상태에 진통제 약기운이 돌아 사물이 빗겨 보였던 까닭만은 아니었다. 이 영화의 악역은 눈에 보이지않고 사람의 몸을 숙주로 삼아 기생하는 '아제이젤'(Azazel)이 란 무서운 악마다. 영화의 뼈만 추리자면 존 홉스(워싱턴 역) 형사가 변사체 사건들을 조사하면 서 구약에 등장하는 아제이젤이란 악마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를 없애려 나서지만 오히려 자신 의 목숨을 잃을 뻔하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내용이다. 인간대 악마의 종교극이란 상황 설정만으로 보면 다소 고리타분해 보이지만, 아제이젤의 모습과 그 특성을 바라보면 영화 내용 은 180도 달라진다. 유대 사전을 훑어보니 원래 아제이젤은 천상에서 ㅤㅉㅗㅈ겨난 타락 천사라 한다. 예수를 유혹했던 광야의 사탄이 아제이젤이란 얘기도 있다. 이 악마는 인간세에 내려와 남자들에겐 무기를 만드 는 법과 기술과 과학을, 여자들에게는 타인을 유혹하는 화장술을 가르쳤다고 한다. 인류에게 천 상의 비밀을 가르쳐 인간들의 죄를 유도했던 골치덩이 타락천사였던 셈이다. 물론 영화에선 아 제이젤의 이런 특성이 표현되지 못하고 흉악한 사탄의 이미지로 줄곧 등장한다. 그렇지만 감독 호블릿은 재치가 있었다. 그는 인간들간의 '접촉'(wired)에 따라 한 신체에서 다른 신체로 옮겨 타고 다니는 '사악한 정령'(disinformation)으로 아제이젤을 그린다. 대개 영화 평론가들은 이런 아제이젤의 모습을 보고 감독이 신체적 접촉에 의한 에이즈 감염의 위험을 표현하려 했다는 뜬 금없는 해석을 내린다. 호블릿 감독은 홉스 형사의 추적을 조롱하며 하나의 신체가 쓰려져도 계속해서 옮겨 다니는 아제이젤의 공간 초월과 이동 능력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래서, 영화의 절정은 홉스 형사가 아 제이젤을 죽일 수 있는 법을 깨닫고 이를 실행에 옮기려했을 때다. 홉스 형사는 신체 접촉에 의해서만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아제이젤을 없애는 방법으로 깊은 산중에서 악마의 숙주를 없 애고 그 후 자신의 숨을 끊는다면 숙주를 잃은 아제이젤이 자연 소멸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나 름의 결론을 얻는다. 그러나, 홉스의 목숨을 내건 도박에도 불구하고 아제이젤은 근처를 거닐던 들고양이의 몸에 깃들어 유유히 사라진다. 어떻게? '접촉없이'(wireless). 홉스는 접촉없이도 아 제이젤이 대기를 타고 비행하는 능력을 지녔으리란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감독 호블릿은 아제 이젤의 와이어드적 속성을 와이어리스로 완성시켰던 것이다. 이것이 내 눈에 영화 <다크 엔젤>이 억압의 권력으로부터 끊임없이 벗어나는 거대한 힘, 무 선 인터넷의 형상화로 비춰지는 이유다. 아제이젤의 초월 능력은 마치 권력의 파장(홉스 형사의 공권력)을 벗어나 인터넷을 흐르며 생성 소멸하는 역정보나 반정보의 속성과 닮아있다. 본래 아 제이젤이 인간을 꾀어 천상 기술을 전도했던 사악한 악마였던 내력도 이를 정확히 거든다. 사 악한 악의 속성을 자유로운 정보의 원천으로 보는 것이 부담스런 비유이긴 하지만, 어쨌든 아 제이젤의 종국적 힘은 홉스 형사가 다 잡았다고 생각했지만 무너뜨릴 수 없었던 '와이어리스' 이동 기법에서 나온다. 그래서일까, 와이어리스에 집착한 호블릿 감독이 다음 작품으로 라디오 주파수 대역으로 과거와 현재의 시간성을 연결하는 <프리퀀시(Frequency)>란 영화를 만든 것 이 당연할 수도 있겠다는 맹랑한 발상이 든다. 지난 30여년을 거치면서 멀티미디어를 가능케한 디지털, 항시 접속을 도운 패킷 스위칭, 그리 고 이제 공간이동의 기동성을 가져올 와이어리스가 텔레컴 혁명을 주도할 것이란 미래학자 네 그로폰테의 전망이 전혀 낯설지 않다. 아제이젤이 천상에서 훔쳐 인간세에 퍼뜨린 비술이 다름 아닌 '와이파이'(Wi-Fi)란 무선 랜(근거리통신망) 기술로 밝혀진 것이 근 3여년전의 일이다. 와 이파이는 하이파이 오디오처럼 편하고 쉽게 쓸 수 있는 무선 기술의 대중성을 겨냥하여 개발됐 다. 그 말뜻만큼이나 와이파이는 대역폭이 미치는 지역에 컴퓨터와 랜카드만 있으면 어디서든 빠르게 인터넷에 접속하고 개인들간의 일대일 상호 연결을 가능하게 해준다. 기동성의 장점말 고도 와이파이는 인터넷 접속을 일정한 공간내에서 서로 공유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다. 기술의 민주적 성격이 성장의 촉진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아제이젤이 사멸하는 듯 싶었지만 죽은 인간의 신체로부터 고양이의 몸까지 날아 이동하며 보여줬던 무선 능력은, 무선 라우터와 랜카드 하나로 주위에 큰 장애물만 없다면 일정 거리내 컴퓨터 장치들의 정보 접속을 보장하는 와이파이의 민주적 기술로 등장한다. 라우터 송출장치 로 근처의 이웃들이 함께 인터넷 정보에 접속할 수 있는 이 게릴라식 공유 시스템은 오히려 아 제이젤의 힘을 기술적으로 능가하는 지도 모른다. 이 무선 와이파이 네트워크는 주거지가 밀집 한 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자발적으로 상업서비스가 제공하는 서비스 대 역을 확장해 이웃과 함께 공유하거나, 보다 의식적으로는 이를 마을이나 지역 사회로 확대하는 경향도 늘고 있다. 경제적 차이로 발생하는 정보 접근의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한 방식으로 와 이파이 네트워크의 공유가 적극 모색되기도 한다. 결국 홑이불 속에서 감기몸살로 발발 떨던 내게 호블릿이 그린 아제이젤의 승리는 마치 와이 파이에 불어오는 희망의 메시지처럼 머리를 개운하게 만든다. 주파수 권력의 공백 지대인 2.4/5 기가 헤르쯔의 새로운 대역에 자리 튼 와이파이가 아제이젤의 사악한 천성은 전적으로 접고 가 공할 정보 이동 능력만 섭렵해 장차 인터넷의 개방성을 한층 넓히는 기술로 자리잡길 새해 소 망으로 빌어 본다. (아름다운 e세상, 200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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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e세상] 약장수 이동서점 절찬리에 네트 순회 중

약장수 이동서점 절찬리에 네트 순회 중 이광석·뉴미디어평론가 벌써 올 한해를 접는 때다. 모두들 다가올 내일에 마음이 바쁘지만 아련한 과거의 '추억'에 절로 취하는 계절이다. 내 어린시절 시골 동네에 불현듯 찾아들었던 가장 반가운 손님은 서커 스단과 약장수였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이 아니"던 귀한 그들이라 여장을 푼 천막 근처를 호기심반 두려움반 배회하던 코흘리개 아이들 틈에 영락없이 나도 가세했었다. 이들이 여장을 풀기도 전에 마을의 남녀노소 모두 할 것 없이 일상과 다른 이방인들의 신기한 축제에 대한 기 대감으로 작은 흥분에 휩싸이곤 했다. 서커스단과 약장수는 "OOO 공연을 절찬리에 마치고 지금 막 전국 순회에 돌입"해 피곤도 할 터인데 지칠줄 모르고 '타이탄' 트럭이나 '봉고' 승합차에 단원들 모두를 싣고 벽지와 오지 구석 구석을 누볐다. 이제나 그제나 이들의 공연 중 내 흥미를 끄는 대목은 '차력'이었다. 차력은 서 커스나 약장수의 공통 분모이기도 했다. 목으로 쇠막대 구부리기, 묶인 쇠사슬 끊기, 불 삼키기 와 뿜기, 칼 삼키기, '이빨'로 끌기, 바늘방석 위에 눕기, 유리나 불 위 걷기, 칼 꽂힌 불타는 링 통과하기, 망치로 배 내려치기 등등 살벌하기 그지없는 차력 시연이 내겐 두려움보다는 힘센 이방인들의 종교 의식처럼 보였었다. 물론 식품의약청의 안전기준과 거리가 멀었던 그들의 회 충약, 정력제, 강장제 등 정체불명의 물약들이 연금술사의 신비스런 조제술의 기적처럼 보였음 은 말할 나위없다. 얼마전 낯선 미국땅에서 이 잠자던 추억이 다시 되살아났다. 나의 설레임은 대규모 서커스단 의 행차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용달차만한 조그만 박스트럭 뒷칸에 구하기도 힘든 요상한 책 들을 한가득 싣고 미국의 여러 동네들을 전전하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물론 책을 팔기 위해 이 들은 길거리나 동네의 작은 바에서 눈요기 차력쇼를 펼친다. 우리말로 굳이 옮기자면 '자율유목 의 차행상'(autonomadic bookmobile)이란 요상한 이름을 가진 이들은, '빈들러스티프' (Bindlestiff) 가족 서커스단과 아우토노미디아 (Autonomedia)란 뉴욕의 작은 독립 출판업자의 합작품이다. 사업 내용으로 따지면, 차력과 함께 약 대신 책을 파는 '약장수 이동서점'이라 부르 는 편이 낫겠다. 거대 서점 체인이 지역마다 복제돼 영세한 소규모 서점을 문닫게 하고, 텔레비전 화면과 헐 리웃 스크린이 서커스를 감상의 추억거리로 내몬 비극적 현실에 이들은 서로 뜻이 맞아 대안의 길을 찾은 셈이다. 95년에 시작한 이들의 이동서점 계획은 서커스장에 펼쳐놓은 길거리 가판 도서로 시작하여, 2인 전담 전국 순회팀이 모는 바퀴달린 이동서점으로 독립하는 눈물겨운 역 정을 거쳤다. 이들의 생명력은 서커스를 통해 '살아있는 것'의 접촉과 감정적 체험을 돕고, 판매 망이 없는 소수 출판사들의 목소리를 모아 직접 전하는 역할을 하겠다는 갸륵한 발상에서 나온 다. 내가 만나본 이동서점의 주인공 2인, 딩글(Okra P. Dingle)씨와 닥터 플러목스(Dr. Henceforth Flummox)양은 겉보기엔 지극히 평범하다. 그러나, 이들이 등장하면 지역 경찰이 긴 장한다. 파는 책들이 선정성과 과격성이란 죄목으로 가끔은 몰수되기도 하고, 둘이 보여주는 차 력쇼가 위험천만해 보이기도 해서다. 두 사람의 가장 힘든 일은 쇼보다 책을 보러 오는 이들과 나누는 대화라고 한다. 배경이 다른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서로의 생각을 나누기 위해서는 어지 간한 내공으로 감당하기 힘들다는 얘기다. 이들의 약장수 이동서점은 이제 전국적으로 돌면서 여러 동네의 지역 서점들, 정보 집산지, 모임, 시위 등을 연결하고 정보를 공유하게끔 돕는 촉매자가 됐다. 그들이 싣고 다니는 영세 출 판업자들의 책과 잡지뿐만 아니라 길에서 만난 지역 활동가, 대학가의 운동가, 매매춘 여성, 음 모론 이론가 등이 쓴 아마츄어식 글들도 이들의 차 뒷칸 도서목록에 추가된다. 동네 공터에서 펼쳐지는 생생한 차력쇼는 전자 미디어에 치여 희미해진 인간의 직접적 체험의 감각을 되살리 는 방법이다. 물론 팔리는 책들은 주변과 변두리의 소외된 소수의 목소리들을 찾아 발굴하고 전달하고 공유하는 주요 통로다. 순회 이동서점을 통해 약장수와 책행상의 각각 뜻한 바 목적 이 서로 조화롭게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정말 약장수 이동서점이 내 마음을 끈 것은 이들이 꼭 인터넷의 민주주의적 속성과 닮아있 기 때문이었다. '자유롭게 유목하는'(auto/-nomadic) '발달린 책'(book/-mobile)은 대중매체의 고 압적이고 일방적인 주입의 공중파가 아닌 인터넷에 떠다니는 소수 전자파들에 다름아니다. 똑 같은 거대한 공간에 잘 꾸며진 거대 서점에서 배제된 소수의 책들을 모아서 이에 갈증을 느끼 는 독자들에게 직접 찾아다니며 전달하는 행위는 인터넷 기술이 지향하는 수평적이고 소수 지 향의 대화 소통 방식과 유사하다. 인터넷에선 어느 누구나 자신의 목소리를 담아, 그리고 서로 비슷한 목소리를 모아 방송국을 만들고 잡지를 꾸미고 모임을 갖는 일이 가능하다. 찬바람 쌩쌩도는 전자 공간에 훈훈한 인간 애를 느끼도록 돕는데 소수의 목소리들이 핵심으로 나선다. 4평 남짓한 이동식 공간에 각종 작 은 목소리를 담고 중간에 모자라는 것은 다시 싣고 원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내려주고 하면서 정처없이 부유하는 책들의 이동보따리가 네트를 유목하는 정보와 닮아가는 것이다. 인터넷의 민주적 풍경과 유사하게 약장수 이동서점은 현실 속에서 다양성과 소수적 목소리를 전하는 미 시적 정보로로 기능한다. 우리의 차디찬 현실 속에 약장수 이동서점이 그저 추억거리에 불과하 다면 네트에서만이라도 그와 유사한 목소리가 넘쳐나기를 기대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평생을 씻지않고 살 것 같은 60년대 폭주족 분위기의 범상치않은 외모와 달리 딩글씨와 잠 시나마 나누었던 대화와 악수의 느낌이 유난히 따뜻했던 기억을 정말 잊을 수 없다.) <아름다운 e세상, 200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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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e세상] 열린 정보정책을 위하여

열린 정보정책을 위하여 이광석·뉴미디어평론가 한때 우리 사회 현실을 논하면서 사회과학계에 '종속이론'이란 말이 풍미한 적이 있다. 미국 등 선진국의 거대 자본이 자금 원조, 기술 전수, 자본 시장 개입 등 경제적 유인을 통해 제 3세 계 국가들을 종속형 저발전 경제의 나락에 영원히 가둔다는 중심-주변부의 이중 논리였다. 반 대로 선진국들은 제 3세계가 자신의 떡고물을 먹다보면 개혁이 일고 그것이 확산되면 발전이 온다는 '개혁-확산론'이나 '발전이론'에 대한 신화를 퍼뜨렸다. 하지만, 이 둘 다 우리 사회 현실 을 보는 눈에서 일면만을 과장해 우리에겐 잘 맞지 않은 이론으로 넘어간 적이 있다. 산업 경제에서 바야흐로 정보 입국에 접어들었다고 아우성치는 오늘 전설 속에 내려오는 '종 속'의 화두를 다시 따져봐야할 사정이 생겼다. 딱딱한(hard) 기술에서 연성의 말랑말랑한(soft) 기술의 시대로 넘어가면서 선진국에 의한 정보 독식과 북-남간 정보 불균형이 큰 문제로 떠오 르고 있다. 특히 '심리적 독점'(psychological monopolies)으로 먹고 사는 정보 독점은 상대국의 종속을 영구화하는 경향 때문에 그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한번 인이 배기면 중독이 번져 빠져 나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 현대의 기술 종속이다. 마땅히 다른 기술적 선택의 대안이 없는 경우엔 그 정도가 더 심할 수밖에 없다. 현대 독점이 치명적인 연유는 이른바 상대의 중 독증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원도우, 워드, 익스플로러 등 하나의 소프트 '제국'에 거의 모든 정부, 공공기 관, 학교 등의 소프트웨어들이 구속되는 현실은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새로운 종속 현상이다. 신 경제 침체에도 불구하고 정보 중독의 니코틴을 제공하는 기업들은 여전히 호황을 누린다. 중독 에 의한 독점 효과는 좀처럼 기우는 법이 없다. 소프트웨어 비용 지불을 임의로 전기료 징수처 럼 정기적 가입 모델로 바꾸고나서 엠에스 제국은 앉아서 수십억 달러를 정기적으로 챙기는 잇 속을 얻었다. 반면 정보 종속의 굴레에 개발국들 대부분이 더욱 참담한 정보빈국의 지위로 낙 하하고 있다. 산업 시대보다 더 무서운 지적 재산권의 방벽은 선진국에서 떨어지는 '떡고물'이나마 받아먹 으며 나름대로 성장의 기회를 찾는 시도마저 사그리 말려버린다. 그래도 서유럽의 일부 국가들 에서는 정보 후발국에 숨쉴 공간을 틔여주려면 좀 더 느슨한 예외적인 국제 저작권 적용이 필 요하다는 양심의 목소리도 흘러나온다. 국가 정보정책의 백년대계란 면에서 더 이상 소수 독점 기업에 의한 일국의 정보 독점을 방치해서는 곤란하다는 위기론도 등장한다. 이제 정부가 나서 소프트웨어 시장 경쟁의 기초를 회복해야한다는 각국 정부의 우려섞인 목소리가 드세다. 경쟁 시장의 회복을 위해서는 지금의 '닫힌' 소프트웨어 독점에 가장 큰 대항력인 리눅스(Linux) 운 영체제 등 '열린소스'(open-source) 스프트웨어의 정책적 도입이 시급하다고 본다. 이제까지 정보정책 설계에 열린소스 소프트웨어를 적극 도입하려는 국가로 중국, 영국, 프랑 스, 독일,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25개국이 나서고 있다. 보안 능력, 안전성, 경제적 비용 등에서 우수성을 인정받은 열린소스 계열의 프로그램들이 이들 국가의 강력한 지원을 받아 개발, 지원 되고 있다. 영국 정부는 정보 독점에 반대하여 중앙 부처뿐만 아니라 하급 단위의 공공 기관들 까지 열린소스 프로그램 사용을 독려하고 있다고 한다. 한편 페루에서는 한 국회의원이 열린 소스의 정책적 입안을 주도해 영웅으로 떠올랐다. '에드가 빌라누에바'(Edgar Villanueva)라는 이 정치인은 자신의 지역구내 컴퓨터 소프트웨어 구입의 재정난으로 고민하다 열린소스 프로그 램을 대안으로 보고 정책 입안에까지 이른 경우다. 그는 페루 보수 정치권의 반대와 마이크로 소프트의 페루 지국의 압력을 물리치고 공정한 시장 경쟁을 위해 정책적 차원에서 열린소스의 도입이 불가피하다는 자유시장론을 폈다. 오직 한마리의 사자(lion)가 모든 것을 독식하며 나머 지를 쥐처럼 부리는 불공정 경쟁의 독점체, 즉 '레오폴리'(Leo-polies)가 페루의 건전한 시장에 독약이라는 그의 평가가 먼나라 얘기같지 않다. 프로그램의 소스 코드의 개방은 누구나 쉽게 접근하여 자유롭게 이용하고 수정이 가능한 경 쟁과 비배제성의 논리를 전제로 한다. 이에 반해 상업적 소프트웨어는 일반인의 코드 접근의 기회를 박탈한다. 프로그램 갱신은 업자의 몫이고 이를 쓰는 사람은 구입과 갱신 비용을 지불 하며 그저 쓰기만 하면 된다. 경쟁이 없으니 가격 인상이나 불공정 행위나 요구에 이용자는 수 동적 지위로 남는다. 열린소스를 수용한 국가들은 이같은 레오폴리의 독식을 미리 내다봤다. 그 저 수수 방관하다간 소프트웨어 종속에 이를 수 있다는 감이 섰던 것이다. 열린 소스를 위한 70여개에 달하는 입법안, 정부 보고서, 정책 연구는 정보 종속을 막으려는 이들 정부들이 시도 한 대안찾기의 증거다. 또한 리눅스로 대표되는 열린소스 운동이 소수 마니아들의 전리품처럼 여겨지던 컬트의 시대도 이제 갔다는 증거다. 달리 보면 열린소스 외에 레오폴리에 필적할 대 안이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정보 독점을 냉혹한 거대 기업들의 신자유주의 모델로 본다면, 열린소스는 이를 제어하는 최 소한의 사회복지 모델과 같다. 경제적으로 가난한 국민과 지역 주민들을 위해 마련된 최소한의 사회복지 정책처럼 열린소스는 정부가 당연히 고려해야할 정보정책의 필수 사안이다. 자유로운 시장 경쟁의 룰을 회복하고 한 국가내 정보기술의 자립적 발전을 위해서도 정부가 나서서 열린 소스 운동을 안착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자면 이를 정책적으로 수용한 서유럽이나 남미 국 가들의 앞선 경험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몇 년전부터 우리에게도 열린소스 운동의 정책적 도입을 위해 공청회나 입법화 등의 움직임 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 흐름이 꾸물거리거나 그저 형식적 의제로 그치지 않으려면 적극적으로 정부가 나서 열린소스에 대한 민간의 흐름을 국가 정보 정책의 필수 의제로 껴안을 필요가 있 다. 정부 부처와 각급 기관들부터 독점 정보기업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리눅스 운영체제 등 소 프트웨어를 자유롭게 선택하여 쓸 수 있는 경쟁적 시장 환경을 마련하고, 최대한 소프트웨어 코드간 소통이 가능하도록 호환성있는 시스템을 장려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개방성을 지향 하는 대안적 소프트웨어의 개발도 적극 지원해야 할 것이다. 다가올 우리 사회에서 '종속'과 같 은 빗바랜 용어를 또 한번 유행시킬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아름다운 e세상, 200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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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e세상] 속도와 지체의 미학

속도와 지체의 미학 이광석·뉴미디어평론가 속도의 쾌감을 제대로 느끼려면 단연 롤러코스터가 압권이다. 바람을 가르며 미친 듯이 돌고 질주하는 롤러코스터에 몸을 한번 맡겨본 사람이라면 속도의 오르가즘이 뭔지 한번쯤은 짜릿하 게 느꼈을 것이다. 인간사에는 꽤 오래전부터 이런 속도-기계들이 상상에서 혹은 현실로 고안 됐다. 속도에 대한 집착은 시간과 공간과 살덩어리를 훌훌 털어버리고 지긋지긋한 현실을 벗어 나고 싶은 욕구에 기인한바 크다. 현실의 제약에 대한 초월의 욕망과 상상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탐관오리들의 관 할권을 넘어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홍길동의 축지법, 산을 타넘는 신령님의 공간 이동 지팡 이, 마녀의 빗자루, 산타 할아버지의 썰매, 빛의 속도로 시간의 벽을 타넘는 타임머신, 부처님 손바닥에서 끊임없이 벗어나려했던 손오공의 구름, 중력장의 공포를 쾌감으로 반전시키는 번지 점프, 제한 속도를 벗어나 죽을둥 살둥 모르고 달리도록 만든 경주용 자동차들, 영화 '론머맨'이 나 '공각기동대'에서 신체를 버리고 네트에 거하는 데이터 정령들과 목 뒤꼭지나 척추를 인터넷 포트로 연결한 미래형 인간 모습 등등. 이를 가만 보면 속도-기계의 상상력에 큰 변화가 있었음을 느낄 수 있다. 우선 지팡이, 융단, 빗자루 등 도구를 이용해 가속을 얻던 시절에서 이제는 아예 살덩이를 벗어나 광통신망에 연결 되는 신체 이탈이 크게 늘고 있다. 실제 기계의 유형에서도 인간의 몸과 함께 움직이는 공간 이동의 수송 장치들에서 가만히 앉은 자리에서 고속의 신체 이동을 느끼는 가상현실 게임이나 초고속 인터넷 이용으로 바뀌고 있다. 속도의 체감 능력을 점점 극대화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한편 장비를 이용하건 신체의 이탈을 유도하건 인간의 속도 욕망을 가로막거나 느림을 유발 하는 현실의 조건 혹은 제약이 늘 있어 왔다. 앞서 본 것처럼 중력, 시간, 공간, 살덩이, 산, 속 도 제한, 부처님 손바닥, 기류 등은 인간의 가속 기계에 끊임없이 저항하는 현실과 상상의 속도 제약의 조건으로 기능한다. 모뎀에 전화선을 연결하던 시대가 엊그제요 모바일과 초고속 인터 넷 유선통신은 기본이고 이제 무선 랜(근거리통신망) 기술 '와이파이'(Wi-Fi)가 얘기되는 오늘 에도 이들과 비슷한 속도의 지연 혹은 간섭이 존재한다. 신체 이탈까지는 아니더라도 비슷한 공간 이동의 착시를 느끼며 사는 때에 디지털 지연/간섭 현상은 주로 물리적 장벽에 의한 속도 지체에 의해 유발된다. 요즘에야 그렇지 않지만, 애꿎은 텔레비전을 손으로 내려치며 화면을 조정하던 공중파 아날로그 시대에는 전파를 가로막는 각종 악천후가 속도의 적이었다. 디지털 영상 시대에는, 메아리치거나 반복되는 음향들, 마치 영화 '터미네이터 3편'에서의 질 나쁜 유체형 사이보그가 흐물흐물 벽을 뚫고나오듯 바로 전화면이 이후 화면에 양각으로 포개지는 현상들, 화면 픽셀 일부의 모자이크식 흐트러짐과 교정, 음성과 따로 놀거나 하릴없이 멈춰진 영상 등이 속도의 질주에 구멍을 내는 새로운 지체 현상들로 등 장한다. 분명 속도 지체는 완벽한 재현감을 위해서는 해롭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나쁜 것일까? 속 도 지체는 일종의 느림 현상이다. 느림이 없으면 속도의 무한 스릴은 다음의 극한적 상황을 낳 는다. 축지를 잘못 써 홍길동이 그만 형장 입구로 발을 헛딛거나, 산신령이 지팡이를 자주 두드 려 이를 부러뜨리거나, 더 많은 스릴감을 위해 번지점프용 줄을 너무 늘이거나, 과열로 통신이 두절되거나, 경주용 차의 브레이크가 풀리거나 한다면 상황은 치명적이고 위험하다. 이는 우리 식 속도를 표현하는 "빨리빨리"에 반대한 '느림의 미학'이 몇년전부터 등장하는 까닭이기도 하 다. 반대로 "천천히"는 무섭게 질주하는 자본주의 속도-기계들의 비인간성을 제어하는 힘이 된 다. 우리는 느림과 지체를 무시해 속도의 과열 욕망이 빚어낸 깊은 상처들을 수없이 보아왔다. 선진국의 형식 논리에 희생당하는 개발국의 국민들, 생산제일주의와 성장 논리에 묵과된 장시 간 노동의 혹사, 마구잡이 개발 논리에 파괴되는 생태계, 벤처 육성이란 단기 명목에 급조된 뻥 튀기 주식과 거품, 앞서 나가는 시장 논리에 홀대당하는 문화 자산 등은 형식, 성장, 개발, 육성, 시장 확대의 수많은 속도전 때문에 생긴 생채기들이었다. 자본주의 속도-기계들에 딴지를 거는 느림은 그래서 인간적이다. 앞만 보지말고 옆과 뒤도 보면서 질주하라는 안전과 다양성에 대한 인간적 주문이 들어 있다. 언제나 당시에는 불완전해 보이고 현실의 한계로만 보이는 것이 쾌속 질주의 쉬어가는 굽이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 다. 간섭과 지체로 접속한 영상이 일그러지는 현상은 한 굽이만 지나면 질주의 뒤안길이 될 것 들이다. 미리부터 조바심 치면서 온전하고 완전한 것만을 원한다면 쉬 체하기 마련이다. 속도의 미래 가능성을 따라 움직이면서도 그 가운데 현실이 제한하는 느림의 미학을 즐길 줄 알아야 제어불가능한 속도의 극한을 예방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정보화 정책도 조금은 혹 더 디 가더라도 뒤쳐지거나 뒤따라오지 못해 소외되는 사람들이 없나 찬찬히 두루 살펴보며 속도 를 내야 충돌없이 잘 진행되는 법이다. 축지쓰다 돌부리에 몇 번 채여 봐야 형장으로 발을 헛 딛는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막지 않겠는가. (아름다운 e세상, 200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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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e세상] '길거리 인터넷' 시대

'길거리 인터넷' 시대 이광석·뉴미디어평론가 불어나는 살을 감당못해 요즘 운동을 시작했다. 서른 중반의 내 나이에 다른 점잖은 종목들 을 제껴놓고 '과격한' 농구를 무리해 붙잡았다. 농구에 치명적인 '짧은' 키까지 겸비하고서 말이 다. 그러면 어떠랴. 공던지며 살을 털어내는데 내 목적이 있으니 뭐 이런 신체적 난관쯤이야 대 수가 못됐다. 무더운 더위에 석달 남짓 용쓰며 이곳저곳 농구장을 전전해 다행히 조금 살빼는 성과를 거둔 것 외에도 공놀이하면서 하나 건진 깨달음이 있었다. 동네 농구가 대안적 인터넷 환경과 쫙 겹 쳐지는 착시가 왔던 것이다. 갖다 붙이자면 '길거리 인터넷'(Street Internet)이라 말할 수 있는 인터넷의 민주적 밑그림을 길거리 농구를 하며 감잡았다. 보통 '길거리'는 집을 벗어나 차들과 사람들이 오가며 서로 마주치는 공적 장소를 지칭하지 만, 형식과 틀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이차적 의미의 쓰임새도 있다. 홀로 동네 농구장에 나가 공 을 던지다보면 난생 처음보는 사람들과 격없이 만나 같이 경기를 하다가 헤어진다. 길거리에선 프로농구처럼 골득점이나 반칙, 도움주기 등의 선수 전적이 죽 흘러 한눈에 타인의 정보를 파 악할 길이 없다. 그저 같이 서로 모여 몸풀다 직감적으로 수준맞는 사람끼리 조를 갈라 짜고 놀이를 한다. 편을 먹는데 공넣는 실력도 짧은 키도 성별도 인종적 차이도 문제가 못된다. 평등 하게 놀이에 임하고 진행하면서 스스로 알아서 제 역할을 찾아간다. 반면 프로농구는 꼭 짜여진 대진표, 프로 선수들의 이적에 오가는 거액의 몸값, 초대형 돔의 실내 구장과 넘쳐나는 관객, 상업 광고와 돈의 흔적들 등을 주요 특징으로 한다. 바깥 대기의 열기나 흙 냄새와는 무관하게 인공적으로 조절된 실내에서 치러지는 프로 경기는 공놀이를 박 제화한다. 간혹가다 키작은 선수의 멋진 기량도 맛볼 수 있지만 역시나 경기의 주도는 전체 평 균키 이상의 선수에 의존한다. 남녀 성별에 따라 가르고, 고액의 연봉을 받는 대접받는 선수들 만 추려 경기를 하는 것도 그 자유로운 평등성에 위배된다. 그 때 그 때 동네마다 수백수천의 길거리 농구단들이 짜여지면서 수많은 선수들이 서로의 기량을 펼치는 것과 달리, 프로농구는 매년 반복되는 경기에 스타의 이미지만을 재생산한다. '단지 재미로'(Just for fun) 오픈 운영체 제 리눅스(Linux)를 개발했다는 리누스 토발즈(Linus Torvalds)처럼, 길거리 농구는 전업 선수 가 주종을 이루는 프로와 달리 그저 재미삼아 즐기는 놀이가 중심이다. 또한 프로가 중앙화된 거대 경기장들을 중심으로 펼쳐진다면, 길거리 농구는 동네를 중심으로 지역화되고 분산된 형 태의 자유로운 놀이를 택한다. 물론 구경을 위한 접근에 있어서도 프로는 화폐 지불 능력에 따 라 강제로 간섭권을 발동하나, 길거리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길거리 농구는 또한 그들만의 영웅을 자생적으로 키워낸다. 상업화된 미 프로농구의 대안으 로 매년 뉴욕 할렘 동네에서 개최되는 길거리 농구대회의 아마추어 선수들처럼, 입소문으로 전 해져 유명해진 길거리 영웅들이 존재한다. 상업적으로 만들어진 프로 선수들과 달리 이들은 매 사에 대기업의 냉혈한 상업성에 비판적이다. 기업들의 장단에 길들여지는 것을 거부하고 길거 리를 주무대로 활동하는 출중한 기량의 선수들이다. 이들은 이웃의 수많은 친구들과 경기를 치 르면서 열린 무대를 통해 실력을 갈고닦으며 성장한 길거리의 우상이다. 그 전에도 인터넷에는 영웅들이 있었다. 새로운 시대의 가치를 만들어가는 디지털 엘리트, '디제라티'(Digerati)라는 과분한 명성까지 얻었던 스타들이 존재했다. 마치 프로농구의 전업 선 수들처럼 그들은 고액의 몸값을 받으며 잘 준비한 미래 청사진을 들고 주식 시장을 현혹시켰 다. 이들이 이른바 '신경제'라 지칭했던 구단의 선수들이었다. 한 때 이들은 여론의 우상이었다. 이제까지 이들의 시장 행동과 말한마디는 미래 사회의 생존을 위해 배워야할 덕목과 가치로 받 들여졌다. 마침내 시장에 거품이 빠지자 급조된 상업적 영웅들도 시들해졌다. 정부가 밀고 주식 을 띄우고 여론을 움직여 급조해 만들어낸 이들의 그럴듯한 이미지는 이제 더 이상 모범도 우 상도 아닌 것으로 입증됐다. 디제라티는 신경제마냥 주조된 헛된 상업적 영웅상이었던 것이다. 어디든 수시로 벌어지는 길거리 농구처럼 인터넷에도 자유 소통의 장소들이 눈에 점점 많이 띈다. 이제 그런 길거리 인터넷에 상업적 스타 선수들을 밀치고 자유롭고 감성 풍부한 신진 선 수들이 실세로 자리잡고 있다. 얼마전 꽃다운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주위를 안타깝게 했 던 파일공유 프로그램 그누텔라(Gnutella)의 공동 개발자 지니 칸(Gene Kan), 아이디어의 자유 를 외쳐온 리처드 스톨만(Richard Stallman), 열린소스 운동의 에릭 레이몬드(Eric Raymond), 리누스 토발즈, 엠피3 파일의 대안으로 오그 보비스(Ogg Vorbis)를 개발한 크리스토퍼 몽고메 리(Christopher Montgomery), 다양한 사회적 공유 프로그램의 국내외 개발자들이 바로 길거리 인터넷의 아마추어 영웅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대기업들과 비친화적인데다 언론의 큰 주목을 끌진 못해도 길거리에서 다져 진 실력의 검증으로 성장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여러 사람들과 부딪히며 갈고닦은 실력과 정보 교류로 얻은 능력을 발휘하며 인터넷을 좀더 살맛나고 정이 느껴지는 동네로 바꾸려 한다. 길 거리 농구에서처럼 이 신진의 2세대 영웅들은 인터넷 저잣거리에서 자유로운 룰과 평등한 '열 린' 관계들을 실천하는 법을 배우고 가르쳐왔다. 이들은 돈으로 주조된 프로 신경제의 주식시장 보다는 땀과 열기로 가득한 길거리에서 민주적인 법칙을 만드는 일에 골몰한다. 프로 신경제의 텃세에도 불구 길거리 인터넷이 점점 번성하는 까닭은 이런 능력있는 아마추어 영웅들의 증가 때문이다. 이런 추세대로라면 장차 길거리 인터넷의 논리가 역으로 프로를 접수하는 사태가 터 무니없는 공상만은 아니리라. 이것이 내가 농구로 뱃살을 털어내면서 인터넷 권력 교체의 미래 까지 꿈꾸었던 정황이다. (아름다운 e세상, 200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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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e세상] 어울림의 문화와 소리바다

어울림의 문화와 소리바다 이광석·뉴미디어평론가 햇수로 벌써 십년이 다 되가는 미국의 유명한 사이버문화 잡지가 하나 있다. <와이어드 Wired>란 이름의 월간지인데, 비록 우파적 기술맹신론의 냄새가 그득하지만 그래도 한 세대를 넘도록 초지일관 정보기술 실험 사례들의 발굴과 그 속에서의 문화 형성을 관찰하는 노력에 절 로 존경이 들만한 잡지이기도 하다. 그런데, 십여년의 공력이 <와이어드>의 바깥세상 보는 시 야를 키웠던 모양인지 얼마전 이 잡지의 8월호 특집에 "세계의 게임수도, 서울"이란 제목으로 우리의 정보 현실이 크게 소개된 적이 있다. 속된 말로 요새 한창 '잘나가는' 우리의 대외적 이미지를 감안하면, 서울이 "지구상에서 가장 잘 연결된(wired) 곳"이란 극찬을 받고, <와이어드>발행 처음으로 한국의 정보 문화를 다룬 일 이 그리 새삼스러운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 세계적인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줄곧 우상향의 쾌속 곡선을 그리는 국내 경제, 한국의 정보 인프라에 대한 국제 통계 지표들의 후한 점수, 월 드컵 축구에서 보여진 우리의 강렬했던 집단 응원문화 등 최근의 매력적인 인상들이 국제적인 시선 집중의 촉매제로 기능했던 까닭이 크다. 그럼에도 기술론자들의 경전처럼 떠받들여지는 한 유명 잡지가 우리의 온라인 문화를 처음 대서특필한 점은 어쨌거나 예외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와이어드>는 우리의 정보문화 성장의 동력을 인구 밀집의 장점에 의한 기간망 설치의 비용 절감 효과, 사회 정보 능력을 보강하는 게임방들의 대중화, 값싼 정보 이용료 등 지리·경제적 장점들에서도 찾지만, 다른 무엇보다 한국인의 독특한 국민성과 연관짓고 있다. 한마디로 한데 뭉치고 어울리고 사교적인 국민성이 '상호작용'(interaction)의 인터넷 문화와 궁합이 잘 맞았다 는 평가다. <와이어드>는 그 구체적인 국내 사례로 온라인 게임문화의 발전을 지적한다. 미국 과 일본 등 게임기 콘솔이 지배하는 문화와 달리 한국에서 유독 피씨(PC)가 게임의 직접적 플 랫폼이 된 이유에는, 개별적인 게임 즐기기보다는 온라인을 통해 한데 어울리고 상호 접속하고 픈 개방된 국민성이 깔려있다는 그럴듯한 설명을 덧붙인다. 상호 역할 분담을 통한 서열이 존 재하지만 그 속에서 스스로의 자율적 통제가 이뤄지는 온라인 역할 게임을 통해 상호 소통하면 서 만들어나가는 문화 형식들이 우리 네티즌들간의 새로운 집단 경험을 키운다고 본다. <와이어드>는 이렇듯 우리의 독특한 온라인 문화를 부러워한다. 이른바 '정보 강국'의 설익은 외관에 비해 우리의 '친사회적'(hypersocial) 문화의 본성에 주목한다. 이 잡지의 연륜과 경험상 끊임없이 개인간 상호 소통을 통해 정보를 교환하고 자율성을 키워 스스로의 규칙을 만드는 문 화적 본성이야말로 인터넷의 자유로움과 일치하는 덕목임을 익히 알고 있다. 하지만, 잡지의 특 집기사는 우리의 문화적 특수성을 쫓다보니 정보 현실의 전체적 조망과 평가에서는 실패했다. 우리가 지닌 정보화 수준이 오직 온라인게임을 통해서만 보여지기 때문이다. 한국의 온라인 게 임 인구 팽창, 게임의 전국민 스포츠화, 세계 초유의 온라인 게임 방송중계, 젊은이들의 자유분 방한 게임방 이용 모습 등 파편화된 이미지들로 수도 서울을 게임천국으로 만든다. 냉정하게 우리의 정보 현실을 찬찬히 살펴보기보단 이국의 특수성만을 강조하려 든다. 마치 상호성이나 자유로운 어울림의 온라인 문화가 우리 인터넷 정책과 현실 어디서든 투명하게 관찰될 수 있다 는 오해를 불러오는 것이다. 얼마전 불행하게도 음악파일공유 사이트인 '소리바다'가 법원의 음악복제금지 가처분 결정을 받았다. 기술적으로 소리바다와 같이 인터넷상에서 중앙의 상급 서버나 관리자 없이도 많은 정 보들을 서로 함께 어울려 공유하는 체계를 일대일(P2P) 교환 시스템 구조라 부른다. '소리바다' 도 우리의 온라인 게임문화마냥 친사회적이고 상호 접속을 바라는 문화적 특성아래 성장했다. <와이어드>가 높이 샀던 부분은 바로 소리바다처럼 자유로운 상호성을 강조하는 우리의 온라 인 문화에 맥락이 맞닿아 있다. 그런데, 자유로운 공유와 상호소통의 문화가 한국의 온라인 문 화의 기초라고 추켜세운 이 해외 잡지의 평가에서 그 숨통을 막는 사례들은 전혀 주의를 끌지 못했다. <와이어드>가 적어도 소리바다의 폐쇄와 같은 국내 정보 현실의 후진성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면 우리의 온라인 문화에 그저 찬사만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가슴을 쓸어내릴 일이지만 잡지가 국내 네티즌들의 친사회적 문화를 막는 빈곤한 우리의 정보 현실 조건을 감잡 았다면, '게임천국'이란 말보단 검열/단속 천국이란 제목으로 바꿔 달 법도 했다는 얘기다. 바다건너 남들의 좋은 평가에 젯밥을 뿌리자는 의도는 절대 없다. 외부인들의 평가를 내 식 으로 고쳐보자는 의도도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긍정적 평가가 뭔지 근거를 따져 이에 부응하 려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다른 이가 갖지 못한 문화적 장점을 우리가 가졌다면 이를 북 돋지는 못할망정 의도적으로 막는 일은 없어야겠다는 말이다. 한국 사회의 인터넷 발전이 친사 회적 어울림의 문화에서 왔다고 보는 한 외국 잡지의 평가에 한발 앞서 우리 현실이 조금이라 도 이런 견해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소리바다의 폐점 휴업은 면했을 일이어서 그렇다. (200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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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e세상] 혁신과 창의력의 코드, 0+1

혁신과 창의력의 코드, 0+1 이광석(뉴미디어평론가) 구체적인 작동 원리는 몰라도 디지털이 0과 1의 이진 코드의 조합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 쯤은 이제 누구나 알고 산다. 따져보면 1이 받쳐주기 전에 홀로 선 0은 '무'(nothing)의 숫자 다. 무는 부정과 없음을 지칭하기보다는 '존재'(being)의 근원을 설명하는 열린 수치다. 그래 서 혹자는 "무가 존재를 배회한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즉 겉으로봐선 말 끔한 듯 보이지만 0에는 꿈틀거리는 생명의 배아들이 언제든 뻗쳐나올 준비를 하고 있다는 얘기다. 없는 듯 해도 항상 뭔가 생성을 위해 응축되어 있는 상태가 0이다. 그래서, 0은 인 간에 의해 비실재하는 것을 현실화할 수 있는 가능태에 해당한다. 디지털의 논리는 바로 0이란 무의 가능성에 1의 현실화 조건을 덧붙여 생명을 불어넣는 일과 같다. 그렇게 보면 0은 1을 만나 구체적 화학작용을 수행하고 가능성을 실제화한다. 1 이 없이는 드러날 수 없는 가능태로서의 0은 항상 상대인 1에 의해 조건화하는 위치에 놓인 다. 이것이 1이 0을 살리는 촉매제인 연유다. 그런데, 0과 1이 그저 만난다고 만사가 형통할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보 여줬다. 바람직한 상황은 이 둘이 어느 하나의 힘에 무게를 두지 않으면서도 힘의 형평을 고려하여 자연스럽고 조화롭게 결합할 때다. 그렇지않고 0만 감싸돌고 1을 홀대하면 디지털 현실은 현실과 동떨어진 공상에 불과해진다. 반대로 1의 현실 논리로 0의 상상력을 억압하 면 디지털의 가능성은 출구를 잃는다. 보통 전자는 디지털과 기술 지상론을 유포하는데 반 해, 후자는 현실의 권력을 극대화하는 논리에 기여한다. 1이 분명 0의 현실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0이 자신만의 잘난 논리로 1을 업신여긴다면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0이 우위에 선 디지털 조합은 적어도 극단의 현실 무시론으로 빠진 다. '가상'에 집착하는 디지털 예찬론자들이나 중증의 기술결정론자들이 대체로 이런 조합을 즐긴다. 이들은 디지털 기술은 그만의 고유한 논리가 있기에 현실에 의한 개입과 간섭은 부 질없다거나 구질구질한 현실과 다른 가상의 디지털 낙원이 존재한다고 굳게 믿는 부류들이 다. 이러한 0과 1의 쌍에는 디지털이 초래할 정보 불평등, 소외, 감시 등 구체적 현실의 조 건들을 전혀 볼 수 없다. 이 경우엔 끊임없이 0을 뒤흔들어 1이 그 필수이자 전제 조건임을 상기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반면에 지금까지 디지털 현실의 삐걱거리는 문제들은 대개 0의 가능성을 심하게 억압하는 1의 월권에서 비롯했다. 현실의 권력은 0을 항상 현실의 반영처럼 만들기를 원했다. 거대한 복제기계인 네트에서 성장하는 자율적인 정보공유의 흐름을 구태의연한 저작법을 가지고 통 제하려는 욕구는 대표적인 1의 권력적 속성을 보여준다. 이렇듯 애초부터 1의 짝인 0의 무 한한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며 만들어진 디지털 인공물은 당연 김빠진 맥주처럼 생동 감을 잃는다. 여러 등급으로 나눠 '음란'으로 가두고 '외설'로 쪼아버리는 강제력도 1의 욕심 이 지나쳐서다. 1의 욕심이 지나치면 0이 가질 수 있는 디지털의 무한한 경우의 수들은 차 츰 소멸한다. 신경제의 핵심이라고 얘기하는 '혁신'의 과정은 0의 가능성을 북돋아주는 1에서만 나올 수 있다. 실리콘밸리는 1이 어떻게 0에 긍정적으로 개입하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였다. 닷 컴기업들이 기발한 아이디어와 기술로 혁신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도 1의 탄력성이 바탕이 됐기 때문이다. 1이 구태의연하면 0의 가능성은 쪼그라드는 것이다. 0이 무한한 창의력을 구 체화하려면 1이 앞장서 길을 터줘야 한다. 한편, 0과 1의 조합은 힘의 우위에서 주기를 타기도 한다. 도입기에는 보통 0이 우세하지 만 정착기에는 1에 의한 현실 강제력이 0의 가능성을 좌우하는 경향이 크다. 지금처럼 디지 털 지형의 밑그림이 그려지는 시기에는 1에 의한 0의 억압이 강해지기 마련이고, 이는 0의 가능태를 일그러뜨리는 중요한 동기가 된다. 결국 0이건 1이건 둘 중 어느 하나라도 억눌리 면 문제가 생긴다. 0의 새로움과 1의 현실 조건이 제대로 적절하게 형평성있게 결합돼야 한 다는 얘기다. 어떤 한 유명한 수학자는 인류의 세 가지 혁혁한 '무'의 지표로, 수학에서 0의 사용, 경제 적 등가교환을 위해 고안된 지폐의 출현, 소멸점을 이용한 원근 재현을 꼽은 적이 있다. 인 간에 의해 구성된 상대적이고 인공적인 세계관의 출현을 예고했던 '없음'의 추상 지표들이 다. 지금과 같은 분위기라면 충분히 디지털 0과 1의 쌍이 네번째 추상적 무의 지표로 추가 될 수 있을 듯하다. 무한의 자유로운 디지털 조합에 의해 비실재하는 것을 현실화하는 힘이 바로 0과 1의 새로운 무의 지표를 통해 이뤄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추상의 세가지 지표들이 홀로 그 추상적 표현의 기준이 되는데 반해, 디지털 값은 꼭 쌍으로 존재를 증명하려 한다는 사실이다. 0과 함께 존재하는 1의 조합값에 따라 현실에 나타나는 모습이 달라지는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앞서 언급한대로 그 배 열이나 경중에 따라 현실에 나타나는 모습이 틀려지는 이치는 0이나 1 가운데 어느 하나의 과다주입에 의해 발생한다. 정확한 값은 딱 떨어지지 않더라도, 0의 자유로운 가능성을 크게 억압하지 않으면서 1의 현실 조건을 습득한 둘의 배합 비율이 적정 수준이라는 것이 핵심이 다. 이것이 디지털 혁신과 창의력의 코드를 제대로 구성하는 법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e세상, 200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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