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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영어로 글쓰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그렇다고 말이나 리스닝이 되는 것도 아닌데, 어찌됐건 글로 밥을 먹고 사는 입장에서 이게 잘 안된다면 고민거리다. 언제부터인가 글에 자신감이 줄어, 요샌 아예 어디에 글을 낼 때 사전에 글 수정을 부탁하는데, 이도 그리 만만하지 않은 작업이다. 내 딴에는 잘 썼다고 생각해도 막상 부딪히면 그게 사방 교열이다. 그럴 때 면 좌절하기 십상이다. 가만- 우리 승준이가 글쓰기를 한단다. 어디보자. Today my dad got some yummy food. He got there by himself. Sinse I was sick I coudn't come with my dad. 으그, 녀석.. 문장 구성력이 나보다 낫다. 이 두 줄 쓴다고 얼마나 고심을 하며 쓰던지.. 그래도 오늘 영광이다. 아들의 글도 받고.. 그나저나 빨리 열이 떨어져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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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나간 하루

오늘 9시부터 저녁 8시까지 원고 마감 때문에 치달렸다. 눈이 시려 뜰 수가 없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러는지... 이번 우리 학과에 교수 지원자들 중에 낯익은 이름을 봤다. 자칭 정치경제학을 한다고 돌아다니는 양반이다. 이미 수위의 저널에 글을 내고 졸업후 왕성히 활동을 하는 그였다. 예전에 내가 만나본 그는 전혀 정치경제학과 거리가 먼 보수적 생각을 가진 학생에 불과했다. 사람의 사고가 변하는 것이 시간문제라, 그도 늦깍기의 전형으로 보인다. 하지만, 씁쓸한 생각도 앞선다. 과연 그가 무슨 생각으로 정치경제학을 하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나 스스로 정치경제학을 합네하지만, 과연 나도 그런 타인의 회의적 시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다잡고 살 일이다. 공부는 전투아닌가? 내 삶을 가지런하게 만드는 일이 첫째지만, 바깥의 세상살이와 부딪히고 그것을 바꾸려고 노력하려는 마음없이, 수년 세월 이곳에서 도닦으며 살 일이 무엔가. 남 볼 것 없이 내 구린 데부터 정리하자. 밤 늦게는 한때 친했던 고등학교 동창의 전화를 받았다. 4년여 혹독한 정신적 병마와 싸우다 정신이 깨었다고, 새 사람이 되었다고 내게 절규했다. 난 "그 동안에도 넌 정상이었어"라며 위로했다. 오히려 그 때는 전혀 들지 않았던 생각이 오늘 그의 전화를 받고, 갑자기 그가 정상이 아닐 수도 있음을 깨닫는다. 아니면 내가 온전하지 않던가. 우리 아이가 학교도 못간 채 하루종일 집에서 고열로 시달렸다. 나는 하루 온종일을 밖에서 보냈고, 경래는 집에서 애 치닥거리로 하루를 보냈다. 웨스는 "너희 한국 남자애들은 아시아권에서도 가장 가부장적인 애들이야"라며 비웃었다. 뭐 아직도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유학생 와이프의 한탄을 들었다나. 무슨 그런 말도 안되는 좆같은 소릴 하냐고 했지만, 미국에 와서도 맞고 사는 아줌마와 집에서 뺑이치는 내 아내의 차이는 한 끗 차이 아닐까? 웨스는 오늘 내 글을 봐줬지만, 오히려 난 그의 말에서 내 가려진 치부를 본다. 이래저래 마음이 갈팡지팡이다. 생각도 많았고, 몸도 피곤한 하루다. 이제 좀 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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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득 결산

뭐 별 소득없이 하루를 보낸다. 아침에 만난 펀딩건은 푼돈을 만져볼 수 있는 "가능성"을 얻었고, 월요일에 폭주하는 클래스는 화요일과 나눴고, 애들 그레이딩하는 것은 좀 줄이자고 제안하여 성과를 봤다. 이만하면 그리 나쁜 편은 아니네... 비행기 티켓도 끊고, 이제 다음달에 독일가는 일만 남았네. 오늘 오후 일을 마치고 하루종일 신모군을 찾았으나, 어딜 박혔는지 보이질 않네. 거의 "신창원" 수준이네 그려. 아니면 집에서 노력봉사하고 있는 지도 모르지.. 마감이 오늘까지라 죽을둥살둥 원고를 끝냐야 한다. 집에가서 쉬고 놀고 잡다. 당장 며칠만 있으면 개학인데, 이리 뺑이를 치고 살다니.. 놀면 뭣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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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력

운동 손 뗀지 어언 1년. 매일 담배 1갑, 불규칙한 식사, 틈만나면 먹어대는 라면 야식, 늦잠자기 일쑤, 물처럼 마시는 커피 등등... 피해야 할 것 들을 모두 하면서 살고 있다. 그러니 저녁밥만 먹으묜 졸기 시작한다. 40대에 나온 밸리는 폭탄을 안고 사는 것과 같다는데, 문제의식이 그리 크덜 않다. 요 며칠 방학동안 시름시름 조는 꼴이 다음 학기의 전조인냥 걱정만 앞서게 한다.3시간짜리 수업하나 들으면 하루가 피곤타. 이번 학기는 내 희망과 무관하게 월요일에 모든 것이 다 들어가 있다. 수업 3시간, 토론, 메인 TA수업 1시간, 내 TA 3시간.. 월요일 하루에 모든 게 다 작살날 판이다. 그러면서 다시 담배를 집는다. 오늘 담배 1갑 초과. 그나마 집을 나와야 마음놓고 담밸 필 수 있다는 생각에, 모든 시름을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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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모처럼만에 나온 학교다. 요 며칠 집에서 뒹굴다 마감이 코앞에 닥쳐 글을 쓰러 나왔다. 아침에는 지도교수를 만나고, 일처리할 것 들이 많아 이곳저곳 다니는 중이다. 지금 한적한 곳에서 자리를 틀고 점심을 까고 있다. 계란이 위에 얹혀진 김치 볶음밥. 나이 사십줄이 다가오는 이 나이에도 점심 도시락을 까먹는 재미가 솔솔하다. 맛있다. 내 옆에는 살이 너무 쪄 날기도 힘든 비둘기 한마리가 주위를 어슬렁거린다. 공생을 요구하지만, 어찌 밥알을 헛되이 낭비하랴. 그나저나 기분이 좋다. 미팅도 잘 끝나고, 이제 시험 준비만 남았다. 갈길이 태산이나 하나하나 성취감에 시작의 포만감은 있다. 잘 끌고 잘 버티면 중턱이라도 보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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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우리 가족

판화로 지난 겨울 새겨본 우리 가족입니다. 새해에도 건강들하고 화목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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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

동네 신모군과의 술 한잔 약속이 깨진 관계로, -)- 

 

조금전에 여러 한국의 후배들과 지인과 통화를 했다. 예전에 알고 지냈던 사람들의 목소리에서 낯선 세월의 두께가 느껴진다. 그 두께는 뭔가 서먹서먹함으로 이어지곤 했다. 6년 이상 떨어진 공간의 벽이 느껴져 조금은 서글퍼진다. 그렇다고 그들이 많이 변한 듯 싶지도 않다. 나도 그렇고.. 뭔가 모를 세월의 벽들이 있어 그렇다 되뇌인다. 차라리 전화를 하지말 것을...

 

한 친구는 이혼하고 한 후배는 경상도 사투리를 배웠고 한 후배는 박사를 끝냈고 한 친구는 독일서 박사학위를 하고 돌아와 놀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런 것들이 벽을 느끼는 미장센들인지도 모른다.

 

그나마 다음달 독일에 가면 만날 선배 생각에 잠시 기분은 좋다. 워크샵만 마치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그와 함께 진하게 회포를 풀고 올 생각이다. 들어가기 전 암스텔 면세점에서 보드카나 한 병 사들고 들어가야지. 

 

그 날이여~ 싸게 오거라. 오늘 찜찜함 모두 털어버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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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차

좀 전에 뺑이치면서 타이어를 갈았다. 어제 냉각수가 터지더니 이젠 타이어에 대못이 박혀있더라. 어제 정비소에 나온 차가 대못을 박고 나오지는 않았겠지만, 이건 해도 너무한다.햇수로 6년을 탔으니 많이도 타긴했나부다. 여기저기 삐걱거린다. 가끔씩 차를 수리하고 나오다보면 사람도 저리 부품만 싹 빼서 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황우석이 인간 '1급 정비사' "가라' 자격증을 소지한 영웅으로 쳐받들여지는 지도 모르지. 담배 한참 피다 폐가 썩어가면 다시 싹 새 모델로 바꾸고 다시 흡연을 시작하는 시대가 오려나? 어찌됐건 졸업 할 때까지 잘 굴러가야 할텐데 걱정이 태산이다. 정 폐차를 시켜야 한다면 가족용 자전거를 한 대씩 구입해 타고 다닐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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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학술동향] 좌파내 정보통신 기술분석 새로운 관계 돌입

[해외학술동향] 좌파내 정보통신 기술분석 새로운 관계 돌입 이광석 / 미국 텍사스-오스틴 주립대학 신방과 박사과정 실지 좌파 정치경제학의 논의는 2천년대에 이르러서도 거의 80년대 논의 구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정체 상황은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이 발간되면서 크게 벗어난다. 특히 이들의 ‘제국’이란 의제 설정이 이미 전자 네트워크와 비물질적 노동에 기반한 자본주의 재생산 구도를 직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 제국 분석에 의한 좌파 논의의 활성화와 더불어, 비물질 영역에 대한 사유화를 경고하는 미국내 자유주의자들의 지적 재산권 논의는 학계의 또 다른 큰 축을 형성한다. 상식이 통하는 시장을 원하는 미국내 ‘현실주의’적 법학자들은 자본가들의 새로운 이윤원, 즉 저작권이 인류의 창작을 저해하는 핵심이라 보고 다양한 학회 모임과 포럼, 저술, 단체 설립 등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적극 표출하고 있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스텐포드 대학의 레식은 이의 주도적 인물이다. 저작권 비판은 현재 단순히 정보 이용자들의 보다 확대된 정보 자율권뿐만 아니라, UN산하 세계저작권기구(WIPO)의 다국적자본 친화적인 조직 성격을 바꾸려는 비판적 논의로 확대되고 있다. 하지만 법학자들의 논의는 자본주의 생산구조 변화에 대한 문제 제기보다는 부르주아 법 환경의 제도적 개선에 집중되고 있어 그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 현재 좌파내 정보통신기술의 논의는 자본주의 경제의 질적 전환에 대한 분석에서, 그 초점을 새로운 대안 현실의 재구성에 무게 중심을 이동하고 있다. 들뢰즈가 한 때 얘기했던, 네트워크에 상주하는 권력의 시대인 ‘통제사회’의 유연성에 대해 능동적으로 저항하는 주체들(네그리와 하트의 ‘다중’)에 그 힘을 싣고 있다. 언론학에서는 인터넷을 이용한 저항과 불복종의 사례 발굴이 이와 같은 연구의 주종을 이룬다. 최근까지 정치학과 사회학 분야에서는 이라크전과 관련해 대안적 저널리즘과 블로그 문화에 대한 분석들이 대량 생산됐고, 인류학 분야에서는 전자 소통에 의해 어떻게 권력 담론의 파괴 현상이 일어나는지를 주목하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 프라이버시 연구도 한 단계 진전하고 있다. 프라이버시 침해는, 기존에 개별 사적 정보의 원치 않은 노출이란 개념에서 권력이 신체에 가하는 통제욕으로 해석되고 있다. 특히 각국 정부가 ‘유비쿼터스’의 장미빛 담론을 유포하는 상황에서, 최근 프라이버시 연구는 ‘모바일’에 기반한 권력 확장의 유연성과 편재성을 경고한다. 현재 문제는 자본주의의 재생산을 반영구적으로 보장하는 정보와 지식의 사법적 질서에 대한 문제제기를 오로지 자유주의 법학자들에게 맡겨서는 곤란하다는 점이다. 미국 내에선 마이클 페럴만과 같은 아주 소수의 정치경제학자들만이 현실 자본주의내 저작권의 핵심적 기능을 지적했던 정도다. 희망컨대, 관련분야 국내 신진 학자들이 저작권과 권력 재생산의 관계, 디지털 권력의 유형 분석, 그리고 이의 저항과 대안적 사회 모델에 대한 고민을 왕성하게 내어주길 기대해본다. 중앙대 대학원 신문 (2005년 10월, 이동미 편집위원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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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7. 디지털 행동당, 전자교란극장(EDT)

디지털 행동당, 전자교란극장(EDT) 이광석 / 네트워커 편집위원 2000 년 1월 3일 디지털 사빠띠스따 폭격기들은 멕시코 치아빠스의 아마도르 헤르난데즈에 주둔한 멕시코 정부군을 향해 동시다발 폭격을 감행했다. 신자유주의의 기치로 국민경제의 개방과 수출 의존적 성장 정책을 앞세워 노동자, 농민의 목을 조르던 친미 멕시코 정부의 폭압에 저항하는 대규모 전자 네트워크 공세였다. 라깡도나 정글의 민족해방군들이 폭격기를 이끌고 폭탄을 뿌리며 멕시코 정부군을 초토화한다. 가상에나 있을법한 이 신나는 폭격 시나리오는 디지털 네트워크를 이용한 디지털 사빠띠스따 총책인 리까르도 도밍구에즈에 의해 고안됐다. 사빠띠스따 농민해방군(EZLN) 부사령관 마르꼬스가 현실의 게릴라전을 이끌었다면, ‘전자교란극장(Electronic Disturbance Theater)’의 도밍구에즈는 전지구적 네트워크 봉기를 주도한 수장이다. 물론 도밍구에즈는 마르꼬스의 예하 편대가 아니다. 미국에서 행위 예술을 하는 그는, 교란극장의 나머지 단원들, 칼민 카라식, 브렛 스톨바움, 스테판 뤠이와 함께 디지털 폭격기의 핵심 장치 ‘플러드넷’이라 불리는 소프트웨어 툴을 개발한 장본인이다. 플러드넷은 멕시코와 미국 정부 기관의 홈페이지들을 무력화하기 위해 프로그래밍된 것으로, 교란극장이 지닌 급진 정치의 지향과 이를 반영해 제작된 소프트웨어를 통해 인터넷 이용자들이 참여하는 집단행위 예술이다. 플러드넷 제작은 97년 치아빠스 한 마을에서 45명의 아녀자와 어린이를 학살한 멕시코 정부에 항거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실지로 신자유주의와 멕시코 정부의 주둔지인 홈페이지 서버들에 장애를 일으키게 만들고, 이들의 폭거를 반대하는 전 세계 활동가들의 저항을 플러드넷에 담아 디지털 폭탄 세례를 안겼다. 도밍구에즈는 지난 <네트워커> 1월호에도 소개된 바 있는 ‘크리티칼 아트 앙상블(CAE)’ 출신의 예술가다. 현실에서 사빠띠스따 게릴라전을 목도하고, 그는 95?과감히 앙상블과 결별한다. ‘전자불복종’ 개념을 현실화하는데 앙상블에서 한계를 느낀 그는, 사빠띠스따의 저항과 같은 인터넷의 전자불복종의 구체적 실현 방식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이는 전자교란극장의 ‘디지털_아트_행동주의’로 표명되면서, 한군데 머무르지 않는 권력의 유목적 속성에 대응한 앙상블의 전자불복종 개념과 신자유주의에 대항한 사빠띠스따의 정치적 행동주의를 결합한 행위예술 실험으로 그를 옮겨가게 했다. 멕시코 이민 2세대로 젊은 시절 연극을 했던 도밍구에즈는 브라질의 극연출가였던 아우구스또 보알(Augusto Boal)과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실험극들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수동적 관찰자의 역할에서 벗어나 관객 스스로 무대의 주체로서 갈등을 파악하고 대안을 구성하도록 이끌었던 보알과 브레히트의 철학은 그의 교란극장에서 선보였던 디지털 사빠띠스따의 실험에 바로 이어져 내려온다. 전자 네트워크를 통한 비폭력의 집합 행동양식에 의해, 이용자들은 목소리를 함께 내면서 스스로의 정치적 행동주의를 점차 깨닫기 시작한다. 당연히 전자교란극장의 신체-기계관은 앞서 연재된 프랑스 행위 예술가인 올랑(<네트워커> 3월호)이나 호주의 스텔락(<네트워커> 2월호) 보다 진일보해 있다. 올랑/스텔락이 기계를 이용한 개별화된 신체의 확장 능력을 고민한 반면, 교란극장은 사회화되고 정치화된 집합적 신체들과 기계의 관계를 고민한다. 억압적 권력에 대항한 사회변혁과 신체 자유의 욕망을 네트워크에 의해 엮어진 집합적 신체들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교란극장은 보다 건강한 신체-기계관을 지닌다. 한편 교란극장이 구사하는 네트의 비폭력 저항 전술은 현실의 시위 방식과 닮아있다. 빗대어 말하자면, 화염병과 돌로 권력의 바리케이트를 돌파하는 폭력의 미학보단 연좌 농성과 같은 비폭력 전술을 선호한다. 서버의 데이터 파괴와 웹사이트를 훼손하는 전자 폭력을 쓰기보다는 자동 ‘리로딩’ 명령을 반복하며 상대 서버 기능을 떨어뜨리고 접속 속도를 늦추는 합법적 전술을 동원한다. 권력자들이 골려먹는 실정법 위반의 빌미를 차단하고, 저항의 투명성과 합법성을 보여주는 전술로 채택된 까닭이다. 아울러 플러드넷은, 반복적으로 멕시코 정부 홈페이지에서 ‘정의’, ‘인권’ 등의 존재하지 않는 페이지를 요청하게 만들거나, 정부 페이지에 “이 사이트엔 정의/인권이 존재하지 않는다”란 ‘404 에러’ 문구를 연속해 뜨게 만든다. 이는 흔히 거론되는 가상연좌의 발생적 맥락을 넘어선다. 아스팔트 위의 연좌농성을 떠올려보자. 가두 행진을 하거나, 바리케이트에 두루마리 화장지를 감거나, 경찰에 대놓고 프랑스 지식인 푸코의 글을 읽거나, 수천의 종이 비행기를 날리거나, 화형식과 시 낭송을 행하는 등의 행태들은 얼핏보면 무질서하지만, 이것들은 시위의 목적을 다양화하는 행위 예술들로 기록된다. 요는 플러드넷이 단순 가상 연좌농성을 넘어서 ‘개념예술’로 비춰지는 대목이다. 수년 전 뉴욕 동시다발 테러 이후 ‘무질서’와 튀는 행위를 극도로 금기시하는 공권력의 완벽한 무장으로 인해 시애틀, 다보스, 퀘벡, 뉴욕 등 다국적 자본들의 회의장들에 대한 최근 반자본주의 시위 자체가 철저히 무산되고 순화되고 있다. 그러나 2002년 초엽 당시 보여주었던 전자교란극장 등 사이방가르드 집단들의 주도로 이뤄졌던 전 세계 포럼장 웹페이지 시스템 공격은 또 한번 반자본주의 운동의 저항 방식에 새로운 희망을 주고 있다. 청년, 여성, 동성애자, 유색인종, 노동자, 농민, 환경운동가, 원주민 등 수천의 목소리들을 담은 디지털 폭탄들이 서로 갈래치고 합쳐져 하나의 공동 적을 향해 타격을 가하는 디지털 저항의 게릴라전에서, 단순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을 넘어선 인터넷의 새로운 전자 행동주의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 참고: 사빠띠스따(Zapatista)의 네트전 2004/07/03 [네트워커] 제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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