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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e세상] 신뢰 상실의 인터넷

신뢰 상실의 인터넷 이광석(뉴미디어평론가) 언제부터인가 남 속이는 맛에 쾌재를 부르며 사는 세상이 돼버렸다. 날마다 연예인들이 텔레비전에 나와 벌이는 쇼 프로에서는 서로들 속고 속이며 마냥 즐거워한다. 개인의 사생 활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리지만 감쪽같이 속이는 맛에 시청자도 덩달아 쾌락을 느끼는 몰래 카메라, 정말 진짜를 찾기 위해 꾸며진 수많은 가짜들의 배역과 연막들, 방청객과 함께 짜고 상대팀을 속이기위한 온갖 거짓말들. 어디 쇼프로뿐인가. 오늘 검찰에 출두하며 목에 핏대세 우며 모르쇠로 일관하던 수많은 비리 연루자들이 내일이면 들통날 사실을 손바닥으로 하늘 을 가리며 국민들을 속이는 세상이 아니던가. 가만보면 인터넷도 사람 드나드는 곳이라 자연히 남 속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물론 필 자는 인터넷에서 사기 구걸 행각으로 돈을 모으는 등 남 등치는 신종 파렴치범들에는 별 관 심없다. 그보다는 현실처럼 속고 속이는 문화에 적응해가는 네티즌 문화의 전반적 경향에 대해 우려한다. 요즘 누구든 스팸메일로 골머리를 앓는다. 어떤 이는 스팸메일을 견디다 못해 자신의 메 일계정을 폭파시키는 극단적 방법을 쓴다. 어떻게 알고들 날아오는지 처음에는 수신거부를 일일이 하려고 시도하지만, 점점 늘어나는 광고성 편지들에 나중엔 포기하고 그저 지우는데 급급해져간다. 여기에도 종종 속임수가 등장한다. 마치 아는 사람의 글처럼 스팸메일의 제목 을 일반편지로 둔갑시키거나 수신거부도 형식적으로 만들어 이도 기능이 불가능하게 만들기 일쑤다. 그도 습관이 되면 수신자들 또한 능숙해져 제목만 봐도 대번에 거짓 광고편지임을 눈치채기 마련이다. 인터넷을 서핑하다 페이지 한번 잘못 들어가 끝없이 자동으로 열리는 새 윈도우 창들로 두들겨 맞는 일도 다반사다. 호기심에 접속 속도 불량의 컴퓨터로 포르노 사이트를 열람하 려다 이런 경우가 생기면 십중팔구 시스템이 다운되고 혹 누구라도 지켜본다면 본의아니게 큰 낭패를 맛본다. 겉보기에 멀쩡하다고 의심없이 네트를 거닐다가 뒤통수를 맞거나 누군가 의 보이지않는 촉수에 걸려들기 십상이다. 요즘엔 그저 지뢰밭을 거닐 듯 의심하며 슬금슬 금 다녀야 속지 않고 시간 절약하며 공간이동할 수 있다. 초심자들은 두 번 생각하고 클릭 하는 안전 요령을 인터넷에서 터득해야하는 시대가 왔다. 인터넷의 신뢰 상실의 주범은 주로 경제 영역에서 비롯한다. 교묘한 상술과 여기저기 숨 어서 속일 태세만 취하는 능란한 장사치들의 거짓 사탕발림에 순진한 네티즌들은 대번에 걸 려든다. 이들의 속이는 강도가 높아지고 수단이 교묘해질수록 네티즌들의 마우스는 수시로 멈칫거린다. 여긴 무슨 함정이 없을까, 이 광고 배너를 누르면 창이 몇 개나 연거푸 떠 시스 템을 괴롭힐까, 이 편지 제목은 과연 친구로부터 온 것일까 광고메일일까, 이 회사의 경품잔 치에 응모하는 대신 내 개인 정보만 홀랑 빼주는 것이 아닐까, 검색엔진의 결과에 나온 주 소 결과를 클릭했는데 왜 얄궂게 관계없는 상업 사이트로 자동 연결되는 조화는 뭘까 등등. 주춤거림이 늘고있다는 것은 의심이 많아지고 자신도 모르게 점점 네트에서 약아간다는 얘 기다. 이렇게 속는 횟수가 늘고 속지 않으려 애쓰다 보면 스스로의 판단에서도 진실과 거짓 의 경계가 흐려지고, 종국에는 진실의 가치마저 등급 보류된다. 나중엔 진실도 거짓처럼, 거 짓도 진실처럼 헷갈리는 것이다. 이렇듯 최근 네트에 불순한 속임의 문화가 번성하는 반면, 우리에게 선의의 속임수가 인 터넷 문화 발전의 촉매제 구실을 하기도 했다. 인터넷은 현실보다 속임이 자유롭다. 네트는 개개인에게 자신의 외모, 신분, 성, 나이 등을 덮어 감춘 채 자유롭게 상대와 커뮤니케이션 을 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한다. 이런 속임은 사회를 건강하게 만든다. 한 사회가 약자에게 주는 불평등의 관습과 제약을 네트의 특성을 이용해 타인에게 속일 수 있고 풀 수 있다면 이는 분명 그 사회에 긍정적인 배설 효과를 주기 때문이다. 또한 인터넷은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흐리면서 동시에 진실의 자리를 대신했던 권위를 무너뜨린다. 이 둘의 경계짓기로 기득권을 누렸던 권위의 존재 가치가 점차 힘을 잃고, 하잘 것 없이 여기던 것들의 명예를 회복시킴으로써 정보간 평등의 관계를 회복시킨다. 결국 속임에 있어 선의와 불순의 경계는 현실이나 온라인 모두 타인을 속이려는 목적과 이유에서 갈라진다. 당연한 얘기지만, 어떤 목적과 근거를 갖고 속이려드냐에 따라 약이 되 거나 독이 된다. 쉴새없이 네티즌들을 놀려먹으려는 업자들의 얄팍한 상술에서 나온 온갖 속임수들은 네트에 독이 되는 경우다. 약이 되는 네트의 기술적 장점들을 독으로 용도 변경 하는 몹쓸 짓이 늘수록 네트에서 인간끼리의 신뢰지수 또한 현실만큼 자연 감소한다. 정감 어린 비격식의 전자우편이 이젠 정말 짜증스러운 통신수단으로 느껴진다면 네트의 미래가 그만큼 팍팍해질 가능성이 더 커진다. 현실적으로 스팸메일을 제거하고 네트에 활개치는 사기꾼을 단속하려는 강제력도 중요하 지만, 근원적으로 지금같은 네트의 신뢰 상실은 우리의 발디딘 현실에 기댄바 크다. 글머리 에 언급한 것처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서 창궐하는 거짓 즐기기와 속이기가 인기를 얻어 갈수록 불순한 현실이 인터넷의 초창기 순수했던 측면을 쉽게 감염시킬 확률이 높다. 이것이 정직한 인터넷의 미래란 현실의 변화없이는 막연하고 갑갑할 수밖에 없는 이 유이며, 세계 최장의 인터넷 이용시간과 초고속 인터넷 종주국이란 보기좋은 때깔에 드리운 불안한 그늘이다. (아름다운 e세상, 200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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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e세상] 주눅든 '무어의 법칙' 되살리기

주눅든 '무어의 법칙' 되살리기 이광석 (뉴미디어 평론가) 요즘 내게 새로운 병이 또 슬슬 도진다. 5, 60년대 클래식 엘피(LP) 수집에 김이 빠지자마자, 다큐멘터리 비디오를 구하는데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반 시중에서 살 수 있는 비디오 가격대와 얼추 비슷한 것들을 인터넷에서 하나둘 구입했지만, 주머니 사정이 한계에 봉 착했다. 먼지쓰고 발품 팔며 잘만 사면 거의 공짜인 엘피 가격에 비한다면 다큐 비디오는 내겐 가히 금값이나 다름없었다. 다큐라고 하면 개별 구입보다는 도서관 등 그 구매처가 제한되어있 고, 시장성과 무관하여 가격대 또한 제작물의 재투자를 따져 공부하는 학생 주머니 사정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던 터였다. 결국 실속있게 내가 찾아야했던 곳은 대학 도서관 영상 자료실이었다. 자료실의 다큐 비디오들의 복사본을 만들면서 일상 속에 스며든 저작권의 위세를 톡톡히 배 우게 됐다. 개인의 '정당한 사용'(fair use)이 자주 저작권이 쳐놓은 기술적 현실에 부딪혀 튕겨 나오는 느낌 말이다. 처음에 봉착한 경험은 도서관에서 대출 가능한 다큐를 들고 집에 가져와 녹화했을 때의 당황감이었다. 돈 들여 구입한 새 것과 집에 묵은 비디오 리코더를 서로 연결해 놓고 암만 녹화를 해도 화면이 영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가전업체의 기술자에게 까닭을 물었더 니, 불과 몇 해전에만 해도 없었던 복제 방지 장치들이 요즘 리코더들에는 죄다 설치되어 있다 고 설명한다. 비디오 리코더 기계 자체에도 리코딩 기능을 약화시키는 제품들이 요즘 추세이므 로, 기왕에 구입하려면 좀 오래된 중고를 찾아보라는 친절한 충고도 덧붙인다. 비디오 리코더만 이 아니었다. 최신의 다큐 가운데는 아예 복제방지를 해놓은 특수 테이프가 간혹 눈에 띄었다. 헐리웃에 반대하여 비디오 리코더의 녹화 기능이 인정된 지 이미 25년이 지난 지금, 눈에 보이 지않는 신종의 기술적 제약들이 다시 고개를 쳐들고 있는 것이다. 장차 비디오 리코더는 허울 뿐이고 그저 플레이어로만 기능하는 시대가 올 수도 있겠다 싶다. 아날로그 기술에 미치는 이같은 저작권의 공세만으로도, 디지털 매체나 기계에 미치는 그 힘 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을 만하다. 이제 저작권은 법조문과 함께, 이를 보장하는 기술적 수단 자 체의 코드 속으로 기어든다. 알려진대로 '기술적 코드'의 조작이 한결 법보다 효과적인 저작권 의 응원군이 되가고 있다. 그래서, 컴퓨터에서 전혀 재생 불가능한 반면 오디오 전용 씨디(CD) 플레이어에서만 들을 수 있는 음악들이 등장한다. 냅스터나 소리바다의 일대일(P2P) 기술을 이 용한 파일공유에 대적해 불구화된 엠피3도 나타난다. 이들은 일정 시간이 지나거나 이용 횟수 가 만료되면 불능이 되는 유사품들이다. 올들어 미국내 전체 4할에 육박하는 디브이디(DVD) 대여 시장이 가히 비디오 시장을 집어삼키려는 형국이지만, 이용자들이 비디오만큼이나 디브이 디를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은 아직까지 전혀 없다. 지난 60여년간 11배나 강력해졌다는 저작법 과 동행하는 기술적 코드가 정보 내용의 자유로운 흐름과 이용을 막는 방벽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사태가 꼭 절망으로 치닫는 것만도 아니다. 이 말은 저작권에 대항한 인터넷 이용자 들의 자유로운 정보 공유 정신이 곧 희망임을 의도하는 역설이 아니다. 저작권 옹호론자와 능 동적 이용자의 전선으로 저작권 지형을 축소하기에는 현실이 그리 밋밋하지 않다. 새롭게 부각 되는 대칭점은 최근 동반에서 적대로 돌아서고 있는 헐리웃과 실리콘밸리의 관계에서 발견된 다. 저작권 옹호 진영 내부에 균열이 생기고 있는 것이다. 컨텐츠 보호를 극대화하려는 헐리웃 의 요구에 지친 컴퓨터, 전자업계는 이제부터라도 기술 혁신의 원칙을 충실히 따르려 한다. 과 도한 저작권의 요구에 밀리다간 기술 발전과 시장 확보의 폭넓은 기회가 막힐 수 있다는 실리 콘밸리 내부의 상황 판단이 작용했다. 이제까지 음성이든 영상이든 레코딩이 가능한 새로운 실리콘밸리 기술들은 헐리웃의 검열 대 상이었다. 헐리웃의 입장에서 보면 다음과 같은 한 엠피3 플레이어의 광고 문구, "내려받아 편 집해 구워봐"(Rip. Mix. Burn.)란 말은 저작물의 '해적질'을 부추기는 혁명적 수사와 같다. 18개 월마다 벌어지는 기술 혁신의 '무어의 법칙'은 속내를 들여다보면 헐리웃의 저작권에 사사건건 제약당했던 실리콘밸리의 기술발전의 한계 법칙이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실리콘밸리가 헐리웃 과 틀어지며 이용자편에 섰던 것은 시장 예측에 근거한 합리적 행동에 불과하다. 각종 기술에 과도한 저작권 장치들을 도입할수록 이용자들의 소비 심리가 크게 위축되며, 이들의 정당한 이 용이 저작권을 해치기보다 소비의 기폭제로 기능한다는 점을 실리콘밸리의 정서로 충분히 간파 했던 것이다. 물론 이들간의 갈등이 파경을 예고하지도 본질적이지도 않다. 서로들 그 의존적 관계가 확인 되면 저작권의 기술적 코드들이 헐리웃의 입맛에 맞게 슬며시 들어앉은 채 신상품 진열대에 놓 일 확률도 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리콘밸리마저 헐리웃에 대해 쓴소리를 내뱉거 나 자주 충돌을 일으키는 것은 확실히 심각한 수위에 이른 저작권의 남용에 제동이 걸리고 있 음을 반증한다. 이는 저작권에 의해 규정된 왜곡된 기술 발전보다는 오히려 능동적 이용을 보 장하는 기술적 대안들이 상품 시장에 강한 동기부여를 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대목이다. 사실이 진정 그렇다면, 개인적으로는 다큐 복사본을 만들기 위해 부딪혔던 여러 기술적 제약들 은 단지 헐리웃의 입김이 너무 커 실리콘밸리가 잠시 주눅든 때 개발된 기술 발전의 부정적 효 과에 불과했었다고 믿고 싶다. (아름다운 e세상, 200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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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e세상] 지식정보사회의 기본값

지식정보사회의 기본값 이광석(뉴미디어 평론가) 지난해말 세간의 반향을 일으켰던 한 방송사의 '범국민 독서캠페인' 프로그램 내용이 아직 도 내 뇌리에 또렷이 남아있다. 일본이나 다른 나라에 비해 한국인의 독서량이 턱없이 부족 하다는 당시 진행자의 숫자 비교가 그리 큰 파격적 사실은 못됐다. 이미 여러차례 언론을 통해 국내 독서 수준과 관련 각종 문화지표들의 부끄러운 수치를 마주하면서 이미 단련된 터였기 때문이다. 문득 그 때 방송을 보면서 들었던 상념은 한국 사회의 문화 인프라가 얼 마나 부실했으면 방송사가 발벗고 나서 책을 읽자고 계몽 운동을 펼칠까하는 것이었다. 방 송 중 흥미로웠던 대목은 독서 장원을 뽑아 사은품으로 책꽂이에 진열된 책을 제한된 시간 에 가슴 한아름 들어 나르는 장면이었다. 한 대형 출판사가 기증한 광고용 책자들을 땀흘리 며 이고 가는 한 '책벌레' 중학생의 모습에서 우리의 미래가 밝다고 누군가 흐뭇해했다면 그건 완전한 착각이다. 왜냐면 그 장면은 학생과 시청자들 모두에게 한 개인이 죽을 때까지 다섯 수레의 책을 읽는 가치에 비해 그만한 양의 책을 여럿이 두루 공유할 수 있는 사회 조 건이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우쳐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날 방송에는 왜 우리의 독서량이 이웃나라 일본 등에 뒤쳐지는지에 대한 분석이 없었 다. 독서를 할 수 있는 기반을 못갖춘 현실에서 국민에게 한 권의 책을 사서 읽으라고 강요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우리나라 서민들의 빠듯한 생활고에 책을 사다 보는 사람은 그나 마 여유가 있는 축이다. '독서 후진국'이란 멍에의 원인을 따지려면 당연 제일 먼저 국민을 위한 공공 교육 서비스 기관인 도서관 실태를 따져봐야 했다. 입사와 고시 준비로 메워진 대학 도서관과 지역 국공립 도서관들의 현실에서 독서의 장래란 없다. 책을 구입할 여건이 안되는 현실이 지배적이라면 이에 대한 보다 폭넓은 접근권이라도 보장을 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한국의 도서관들은 사설 독서실과 진배없다. 지역 주민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는 대 학 도서관은 어디도 없다. 그나마 구비된 책들을 이용하려해도 학생이 아니라면 각종 제한 에 걸린다. 이것이 21세기 인터넷 강국이 강조하는 지식 기반 사회의 그늘진 면모다. 한 나라의 도서관 실태를 보면 지식 활용 능력의 답이 나온다. 필자가 인구 칠십만명 정 도의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몇 년 살면서 가장 부러웠던 사실은 지역 공공 도서관의 놀랄만 한 개방성이다. 지역 주민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대학 도서관과, 스물두어곳의 지역 공공 도서관들이 특히 빈곤 지역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정보와 지식의 자유로운 접근을 보장 하고 있다. 외부에서 인터넷을 통한 공공 도서관 접속, 독서 프로그램, 도서관내 컴퓨터 이 용 등이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자유롭다. 신분 증명서만 있으면 국제 여행객도 도서 나 각종 시청각 자료 대출이 가능하다. 설령 길거리 노숙자들이 도서관에 드나들며 책을 읽 고 웹 서핑을 해도 어느 누구도 이들을 제한하지 않는다. 그만큼 도서관은 이용자들의 출입 문턱을 낮춘다. 곳곳에 산재한 공공 도서관들은 지역민들이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인터넷상의 서버 (server)처럼 기능한다. 지역민들간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다. 서버는 항시 열려 있다. 평등한 조건하에서 원하는 자료를 요청할 때 항시 서버는 응답한다. 물론 도서관들간 네트워킹은 이용자들이 찾으려는 자료를 구하는데 최적의 수단이다. 도서관 규모는 작지만 산재한 공공 도서관들이 인터넷을 통해 책, 오디오, 비디오 등의 대출과 기간 연장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데는 바로 도서관내의 데이터베이스 구축과 외부와의 네트워크 연결에 따른 성과에 있 다. 누구나 최대한 '공개되고 열린 자원'(open resource)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데 그 운영의 묘가 있는 것이다. 우리랑 생활 형편이 다른 선진국의 사례를 들이대며 그에 규격을 맞추자며 얼빠진 주장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저 신간서적 하나 여유있게 읽어볼 자리도 마련않는 대형서점들의 장삿속에 녹아나는 우리의 독서 현실이 서글퍼 그렇다. 게다가 있는 도서관도 제 기능을 못 하고 절뚝거리는데, 오히려 책 안읽는 시민들의 '무식함'을 질책하는 언론의 방자함에 실소 가 나와 그렇다. 학생들과 지역 주민들의 지식의 자원이자 정보화의 동맥으로 기능해야할 도서관들이 높은 담벼락을 둘러쳐 외부인을 막고 캠퍼스내 고시촌으로 전락하는 한심한 풍 경이 한국의 특색있는 명소처럼 보여선 곤란하다. 현실처럼 인터넷의 거대한 사고의 도관(conduit)이자 고급 자원의 핵심으로 의당 도서관 의 집적된 데이터베이스를 꼽을 수 있다. 현실과 네트 모두에서 도서관에 축적된 지식은 외 부에 공개될수록 한 국가의 사회 복지 수준은 증가한다. 반면 관리의 효율성과 이윤 논리를 내세워 경계를 세울수록 도서관은 다수의 발걸음을 막고 비경쟁적 공공 자원의 활용을 크게 떨어뜨린다. 일반 소비재와 달리 나눌수록 커져가는 것이 지식이고, 이를 제대로 분배해야 할 곳이 공공 도서관이다. 지식에 대한 불평등 해소와 사회적 공유의 첫걸음은 가난한 이들 도 편히 책을 대여하고, 인터넷을 통해 여러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사회, 문화 기반을 조성 하는 것이다. 독서 진흥은 도서관의 이런 공개된 환경에서만 이뤄진다. 있는 것들의 링크와 확장이란 개방성이 인터넷의 거대한 힘이자 정보공유의 촉매가 된 것처럼 존재하는 도서관 자산들의 활용과 평등한 접근과 이용이 소위 지식정보사회를 일구는 기본 토양으로 자리해 야 마땅하다. (아름다운 e세상, 200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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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e세상] 퓨전의 가치

퓨전의 가치 이광석(뉴미디어 평론가) 요즘 집안 꼴이 말이 아니다. 한국의 모대학에서 디지털 관련 글들로 이름이 잘 알려진 한 선배의 짐 때문이다. 그 이는 이역만리 있는 내게 6,70년대 잡동사니 음악장치들의 보관 을 부탁했다. 첨단을 달리는 그 선배가 요즘은 음악에 심취한 까닭이다. 릴덱(Reel Deck)이 란 무식한 아날로그 녹음장치가 벌써 여러 대 내 서재방에 쌓여있다. 그만이 아니다. 다 썩 은 고전 음반이 수백장이요, 스피커들, 오디오장치 등이 집 구석구석에 자리잡고 있다. 그가 옥션 사이트인 이베이(ebay)에서 경매로 사들인 것들인데, 국제 우송이 불가능해 내가 중매 처가 됐다. 이 처치곤란한 유물들은 고이 보관하다 귀국 때 그 선배에게 싸짊어지고 갈 요 량이다. 한동안은 이것들을 쳐다보기만해도 짜증이 났다. 그런데, 이 고물들이 슬슬 나를 꼬득이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인가 발 끊었던 이베이에 들어가 이 고물들을 운동시킬 것을 찾다 70년 대 독일에서 제작된 듀얼(Dual)사의 턴테이블을 경매로 구입하고, 바늘(stylus)을 사러 온 동네를 헤매고, 다 썩어가는 엘피들(LPs)을 먼지 뒤집어써가며 혹은 점잖게 경매를 통해 사 모으기 시작했다. 선배의 고물들이 알게모르게 자극제가 된 모양이다. 사실 나는 최신의 새 것이라면 사죽을 못쓰는 축에 낀다. 타지에서 공부하는 형편에도 불 구하고, 일찌감치 큰맘먹고 누구보다 먼저 음향 조절용 리시버가 장착되고 스피커가 다섯인 소위 홈띠어터(안방극장용) 디브이(DVD) 플레이어를 구입했던 경우도 그렇다. 새로운 기술 에 대한 부질없는 구매 욕망이 한몫했다. 그런 내가 시덥잖은 고물들을 껴안을 복고를 생각 이나 했겠는가. 하나둘 고물들을 이용하면서 재미난 일이 벌어졌다. 경매로 구입한 턴테이블이 디브이디 오디오를 거부했다. 아니다. 디브이디가 그 고물을 거부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세월의 간극이 워낙 커 신기술이 고물을 알아보지 못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턴테이블의 잭 을 암만 꽂아놓고 엘피를 걸어도 소리가 불통이었다. 고민 끝에 80년대초쯤 만들어진 구식 오디오장치를 중간 매개장치로 놓고 턴테이블과 디브이디 리시버를 서로 연결해봤더니 이게 웬일인가. 깜쪽같이 원음을 재생했다. 신구간 갈등을 중간 세대의 기술이 막는다? 어찌되었 거나 결과는 좋았다. 이런 식으로 안방극장용 디브이 플레이어의 좌우 스피커는 음량좋은 70년대 소리통으로 대체되고, 오디오장치와 연결된 턴테이블과 함께 작동하고 있다. 내친 김 에 구닥다리의 턴테이블 바늘도 디제이 믹스용 최신 사양의 것으로 바꿨다. 인터넷에서 엠피3 음악을 교환해 내려받아 취향대로 듣는 첨단 현실에도 불구하고, 인터 넷 이베이를 통해 흘러간 엘피를 경매로 사들여 애써 디지털로 전환해 듣는 우리네 일상을 어떻게 봐야 하나. 과거와 미래의 혼재와 공존, 한마디로 '퓨전'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닐 까. 개인적으로 퓨전의 재미는 여러 가지로 체험되었다. 전자결제로 엘피를 구입하면서, 옥 션 사이트에서는 거래자가 평해 놓은 내 신용 평가에 힘쓴다. 우편으로 배달된 중고 엘피의 튀기는 잡음은 아연 먼 옛날의 향수를 느끼게 만든다. 비용 지불에 대한 만족을 느낄만하다. 턴테이블에서 돌아가는 엘피와 바늘의 앙상블은 씨디의 픽셀을 읽는 헤드의 맛과 다른 체험 을 준다. 이제보니 이런 퓨전은 내 일상에서 아주 흔하게 발견된다. 맞춤형 '데일리미(daily-me)'로 매일 아침 전자우편으로 날아드는 몇몇 일간신문의 전자판에도 불구, 집에 배달되는 신문의 가짓수가 어느덧 셋으로 늘었다. 랩탑 컴퓨터에 모든 문서작성을 의존하면서도 여전히 하루 일기는 어렵사리 구한 '로얄'(Royal)제 타자기로 투닥거린다. 학술 논문들의 대부분은 학교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해 집에서 출력하기도 하지만, 아예 정기 구독이나 복사를 택하기도 한 다. 내 일상에서 과거의 매체들은 생명을 다함이 없이 현대의 기술과 조화를 이루면서 자신 의 값을 적절히 수행한다. 그러고보면 현대 인간의 신체도 벌써부터 '퓨전'인 셈이다. '사이보그 선언문'을 작성한 페 미니스트 도너 해러웨이(Donna Haraway)에 따르면, 우리 인간 모두는 '사이보그'다. 사이보 그는 구시대의 신체와 새로운 기계로 구성돼 있다. 신체의 연장물들, 의족, 의수, 의치, 안경, 보청기, 인공심장 등은 인간을 퓨전화하는 것들이다. 이미 기계가 인간의 몸에 들어오고, 그 것이 우리의 현실을 구성한다면, '퓨전'이란 하등 새로울 것 없는 얘깃거리다. 그럼에도 이제 까지 '새로움'이 오래된 것들을 너무 업신여기고 대체될 것을 강요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각종 '새로움'과 '혁명'의 수사와 업데이트, 버전업의 논리가 지나치게 현실을 지배해왔다. 미 래의 열광에 과거의 가치는 주눅든 현실이었다. 과거의 것들이 새로움과 어떻게 공생하는지, 어떻게 이 둘이 또 다른 새로움의 유전학적 전이로 향하는지 등에 대해 너무 인색해온 것이 사실이다. 사이보그의 예에서도, 인간의 몸을 빌리지않은 새로움의 기계란 그저 한계로 가득 찬 로봇에 불과하다는 예상을 해본다면, 낡고 빛바랜 것들의 가치는 전혀 사라질 것들이 아 니다. 요즘 나는 수동식 타자기의 자판을 컴퓨터가 인식할 수 있는 모델에 대해 생각해 본다. 타자기의 활판이 부딪혀 생긴 아날로그의 파열음을 키보드마냥 컴퓨터의 메인보드가 인식하 는 인터페이스를 꿈꾼다. 이런 미래야말로 우리 모두에게 친근하게 다가올 'e세상'이 아닐 까. 요사이 타지 떨어진 손자 그리운 마음에 주름진 손으로 전자우편을 보내는 법을 배우신 다고 애쓰는 노친네 생각에 이르면, 퓨전의 가치가 더욱 아쉬운 오늘이다. (아름다운 e세상, 200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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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e세상] 소수 해커에서 일반 유저의 시대로

소수 해커에서 일반 유저의 시대로 이광석(뉴미디어평론가) 시간을 거슬러 컴퓨터 역사의 험난했던 시절로 기록된 1990년을 회상해보련다. 그 해는 미국 해커들에게 거의 공포의 시대로 알려져 있다. 60년대말 대학가를 중심으로 피어오른 자유로운 정보 공유의 해커 정신은 80년대 이후 거의 사그러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디지털 지하세계로 잠복했던 해커들이 심심찮게 미 국방성을 비롯한 정부기관, 전화회사, 핵 발전 연구소 등을 무 단으로 드나들어 사회적으로 큰 위협이자 골칫거리로 언론 지면의 주목을 받던 때다. 일명 '선 데블작전'(Operation SunDevil)이라 불리는 해커 대검거 작전은 바로 당시 해커들의 싹을 자르 기 위한 1차 경고였다. 연방 사법당국에 의해 주도된 전국적 규모의 해커 사냥은 일부 선의의 피해자들의 속출과 부당한 인권 침해를 낳아 인터넷에 기반한 시민단체들이 출현하는 계기가 될 정도였다. 거의 10년이 넘게 지난 지금 그 때 사건이 떠오른 이유는, 얼마전 사법부 주도의 또 다른 마 녀사냥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미국에서는 대대적인 불법 복제물 검거 선풍이 있었 다. 미국의 아프칸 '애국전쟁'에 가려진 이 사건은 거의 매체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연방 사 법부 직원들은 미국 27개 도시의 주요 대학 사무실을 급습하여 130여개의 컴퓨터와 불법 복제 물를 압수·수거하고, 그 중 일부 혐의자들은 그 자리에서 검거했다. 이번 급습은 장기적으로 저작권의 강화 움직임을 보여주는 증거다. 확실히 유저들의 방만한 정보 이용에 쐐기를 박아보 자는 의도를 갖고 있다. 동시에 미국내 이용자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참여했던 유저들에 대한 경고 차원의 메시지도 함축한다. 최근 국내 저작권 관련 재판들이 특히 미국의 판례에 크게 의 존하는 경향을 고려하면, 우리에게 어떻게든 직·간접적으로 그 파장이 미칠 것으로 보인다. 1990년과 2001년이란 세월의 간극은 사법당국의 검거 대상을 바꿔놓았다. 해커에서 일반 유 저로. 그제가 해커라는 이름으로 닫혀진 문을 열고 드나들길 좋아하는 소수 전문가 집단의 시 대라면, 이젠 닫혀진 정보의 장벽을 제거하여 무한 복제하길 즐겨하는 다수 유저 집단의 시대 로 가고 있다. 인터넷의 보급이 특정 컴퓨터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확대된 시절에 비해, 지금은 네트워크 이용의 폭이 넓어져 일반 유저들이 정보를 이용하고 널리 공유하기 시작했다. 그제는 전자 공간에서 돈벌이를 위한 노하우가 부족했다면 이제는 상업화의 과도한 진척으로 가공된 디지털 상품의 무한복제를 걱정해야할 판이다. 정말 달라진 현실이다. 사법당국의 걱정거리도 사뭇 달라졌다. 예전엔 주로 중요 사회 기반시설에 대한 해킹 대비에 그쳤다면, 이젠 본격적으 로 정보를 사고파는 기업을 '악성' 유저들로부터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바뀌었 다. 해커들은 주로 네트워크 보안 방벽을 뚫고 들어가 전리품으로 일부 파일을 들고나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지만, 유저들은 정보 자체의 암호를 깨고 네트를 통해 이를 최대한 번식시키는데 기쁨을 느낀다. 그래서, 해커는 동류들로부터 중세 '기사'의 명예와 작위를 원하지만, 신종 유저 들은 자신이 '로빈훗'과 같은 '베풂'의 전리사이길 바란다. 그래서, 해커는 자신을 최대한 숨김으 로써 명예를 얻지만, 유저는 자신을 알림으로써 대중으로부터 명성을 얻는다고 믿는다. 해커와 유저간에도 공통점은 있다. 그들의 비의도적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점이다. 그들의 행위 에 전혀 잘못된 동기란 없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컴퓨터 속어 중 '와레즈'(Warez)란 말이 있다. 암호가 제거된 소프트웨어를 통칭하는 말이다. 이번 검거는 와레즈가 범람하는 한 전세계적인 유저망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비록 검거와 단속 이 미국내에서 벌어졌지만, 그 수위가 한 국가의 범위을 넘어선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각국의 유저들이 자신들의 '와레즈'를 서로 주고받으며 네트워크망을 키우다 이번 검거 열풍의 표적이 된 것이다. 어디 '와레즈' 뿐인가. 유저들의 냅스터나 소리바다와 같은 새로운 일대일(P2P) 기술 체계의 응용은 이제까지 상업화된 정보 생산과 보급의 방식을 혁명적으로 뒤바꾸고 있다. 이런 상황에 서 자연 거대한 유저들의 공유 물결을 막으려는 단속과 검거는 실적보다는 자유로운 네트에 깊 은 상처를 남길 뿐이다. 유저들에 대한 사법적 강경 대응만을 능사로 삼아서는 곤란하다. 인터 넷이 유저들에게 주는 긍동적 가치들을 기업이나 사법당국이 적극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변화된 지형에 맞는 유동성있는 정책과 법 체계의 입안도 필요하다. 구시대의 잣대로 유저들의 변화를 가로막기엔 시대의 변화가 너무나 빠르고 거대하다. 물론 상업적 목적으로 개발된 프로그램들을 그대로 방치하자는 맥락은 아니다. 과거처럼 소 수 해커들에 대한 제재가 가능할 순 있어도, 대다수 유저들의 이용 행위를 막기는 역부족이다. 그런 점에서 음반, 영화 등 각 이익 단체들이 기업 편을 최대한 대변하는 저작권 지상주의로 문제를 풀려한다면 사태의 해결과 거리가 멀다. 해법은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룰에 있다. 상업 적 혹은 권력의 통제욕에 좌우되는 인터넷이 아니라, 디지털의 특성을 고려해 유저들이 보다 유연하고 자유롭게 정보에 접근하고 이용할 수 있는 가능성에 충분히 열려있는 인터넷 구상이 필요하다. 설사 상품 시장을 원한다 하더라도 스스로가 범법자가 아니라고 믿는 유저들을 설득 시킬 수 있는 합리적 모델이 필요하다. 유저들은 그런 가치를 보장하는 사이트라면 벌떼같이 모여들어 밀어주고 알린다. 국내에 소위 벤처를 세워 성공 신화의 주역을 차지했던 몇몇 사례 들은 이들이 바로 유저들의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정보 공유의 가치를 앞서 보고 응용했기 때문 에 이뤄졌다. 다시 강조하건대 단속과 검거, 규제 입법 등의 장치로 일반 유저들의 손끝을 다스 리긴 절대 어렵다. 소수 해커들이 득세했던 언더그라운드 시대에나 먹혀들 구닥다리 시각이다. 이제는 네트에서 유저의 감수성을 바로 읽지못한 채 그들을 상대로 장사에만 급급한다면 자리 접고 떠야할 시대임이 분명하다. (아름다운 e세상,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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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커 칼럼] 터미네이터 IV: 매트릭스, 종합정보인지 리로디드

터미네이터 IV: 매트릭스, 종합정보인지 리로디드 이광석 / 네트워크 편집위원 요 새 미국에서 돌아가는 판이 허구천지다. 미 국방부가 9-11 동시 다발테러 이후 구상했던 전국민 감시체제 ‘종합정보인지’(TIA)는, 워낙 시민들의 반발이 심하자 ‘테러분자 정보인지’로 옷을 갈아입고 활보한다. 지가 무슨 변신맨이라고 이름을 살짝 바꿔 행세하고, 의회 통과에 부딪히면 지 한몸 동강내서라도 끝까지 살겠다고 몸부림에, 후미진 데선 지처럼 흉악스러운 것들을 마구 복제해 퍼뜨리고 다닌다. 이만하면 터미네이터 투, 쓰리가 아니라, ‘포’쯤에 나오는 공포의 사이보그 수준이다. 미시민자유연맹(ACLU)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국방부 정보인지가 예상외의 큰 반발을 받자, 국방부와 국토안보부가 자금줄을 대고 한 민간 회사를 끌어들여 일명 ‘매트릭스’(MATRIX)라는 시스템을 추진하고 있다. ‘주정부들 상호간 반테러리즘 정보교환’ 체제란 풀이말만 봐도 그 쓰임새가 눈에 확 들어온다. 맏형 종합정보인지의 축소판이다. 전국민 감시 시스템 종합정보인지의 후속탄, 매트릭스는 개인의 각종 신상 정보부터 가족, 이웃의 신상 정보까지 두루 포함한다. 주 단위로 분산됐던 신원정보를 통합하고 실시간 검색할 수 있는 지방 정부간 네트워크인 셈이다. 지방 정부와 사기업이 합동으로 자료를 축적하고, 이에 연방 정보기관들의 정보 접근권까지 주어졌다. 매트릭스가 테러 혐의자를 추려내는 방식은 말많은 ‘데이터 마이닝’이다. 요 방법에 걸리면, 일상의 궤만 벗어나도 가차없이 조사 대상이다. 데이터에서 금맥을 발견하듯 마구 수집된 개인 정보를 통계값으로 환산해 이례적 수치가 발생하면 테러 혐의자로 분류된다. 수치 오류가 생겨봐야 흔한 통계 오차에 불과하고 인권이 다치는데는 전혀 무관심하다. 매트릭스의 또 다른 위험성은 연방 수준의 입안보다는 개별 주들을 설득시키며 여론의 주위를 무마하는 방식에 있다. 국방부 종합정보인지의 경우 우리의 NEIS(교육행정정보시스템)처럼 전국민 비난 여론을 면치 못했던 반면, 매트릭스는 여론의 포화를 거의 피하고 있다. 지금까지 일곱개 주들이 이 시스템을 승인했고, 인구수로 따지면 전체 미국인의 25%를 넘는다 한다. 큰 잡음 없이 영향력을 슬슬 키우고 있다. 말할 권리를 잃고 ‘입 닥치고 사는’ 미국인들은 ‘미국인이 아니다’. 요즘 시민자유연맹의 연예인 출연 광고는 빅 브라더와 리틀 브라더들이 설쳐대는 미국 내 현실의 살벌함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더욱이 공화당 영웅 슈왈츠네거까지 주지사 당선으로 이 리로디드한 미친 매트릭스 사이보그를 막으러 영영 “아윌 비 백”(나, 다시 돌아올께!) 하지 않을 것 같다. 당장은 크게 믿을 구석도 끝간 곳도 없다. <네트워커, 2003. 12. 제 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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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커 칼럼] 동시상영: 수렁에 빠진 탕아, 카피랩터의 품에 안기다

동시상영: 수렁에 빠진 탕아, 카피랩터의 품에 안기다 이광석 / 네트워크 편집위원 저 작권에 죽고 사는 카피랩터들의 잔혹무대 1, 2탄이 부족해, 동시 상영까지 덤으로 가세한다. 일대일 엠피3 파일교환의 이단아, 냅스터가 동시상영 무대의 주인공이다. 갔다고 생각했던 풍운아가 살아 돌아왔다고 야단이다. 예수의 재림 마냥 10월 29일 냅스터는 부활했다. 부활을 알리는 각종 메시지는 냅스터의 전성기를 연상케 한다. 29일 ‘와이어드’(wired.com) 뉴스 서비스에 접속하자마자 냅스터의 마스코트가 브레이크댄스를 추며 사람들의 시선을 이끈다. 같은 날 방송에서도 머리 큰 냅스터가 음악에 맞춰 바람을 잡으며 새로운 온라인 파격 서비스를 받아보라고 부추긴다. 개장에 맞춰 부활 기념 특별 음악 공연도 준비했단다. 또 한번 냅스터의 새 시대인가?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왕년의 인기는 추억일 뿐, 오늘엔 부질없다. 냅스터가 ‘냅스터 2.0’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하지만, 과거의 냅스터는 흔적이 없다. 이미 2001년 7월 법원의 판결로 문을 닫았을 때, 그리고 지난 해 9월 파산 신청을 했을 때 완전히 냅스터는 사라졌다. 지금의 냅스터 2.0은 이름만 빌린 빈 껍질이다. 지난 해 11월 ‘6백만불의 사나이’만큼의 돈을 들여 소프트웨어 제작사 록시오가 냅스터를 살려냈다. 과거의 자유로운 파일교환의 정서와 혼은 개봉 후 제거됐다. 살려낸 냅스터는 그저 얼마 전 시작한 애플의 아이튠스(iTunes)를 흉내내 한 곡당 1,100원 정도에 다운받고, 1만여원에 회원서비스를 받는 이른바 온라인 유료 음악 서비스 그대로다. 냅스터 2.0만의 새로움이란 아이튠스보다 1만 곡 정도 더 많은 음악 목록을 지닌다는 판촉뿐이다. 여기에 더욱 꼴사납게, 최근 <오마이뉴스>와 시민단체 웹사이트들의 사내 접속을 차단해 온 삼성전자가 냅스터 명의를 빌려 엠피3 재생기를 만든다고 기웃거린다. 음반업자들의 저작권 공세 속에 무너져 내린 냅스터가 6백만불에 개조되고 삼성전자의 우스꽝스런 판촉 메달까지 단다. 그냥 그저 보냈더라면 인터넷의 자유 정신으로나마 기억될 냅스터가 본전도 못찾고 추한 꼴로 연명한다. 카피랩터들이 냅스터를 고사시키려 할 때 당시 6천만명의 이용자들이 드나들었다 한다. 그후 이용자들은 그누텔라, 모르페우스, 그록스터 등의 파일 교환 장소들로 이합집산 했다. 그리고보면 진정 냅스터 2.0이라 불릴 것들은 당시 피난처지, 지금의 정신나간 홑껍데기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이제 어쨌거나 원하던대로 카피랩터들은 눈에 가시였던 냅스터를 잡아 그 혼을 빼 재기불능의 온순한 양으로 만들었다. 남은 것은 제 이, 제 삼의 신종 냅스터들을 길들이는 방법이다. 강수를 내밀며, 9월에 261명, 이번 냅스터 2.0 개장 다음날 80명을 더 저작권 위반혐의로 기소했다니 당분간 카피랩터들의 유혈 세상이다. <네트워커, 2003. 11. 제 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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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커 칼럼] ‘카피랩터’의 잔혹마당 2탄

‘카피랩터’의 잔혹마당 2탄 식탐하다 돌씹다 이광석 / 네트워크 편집위원 전 미음반산업협회는 도를 지나쳐 9월 8일 저작권 위반 혐의로 261명의 이용자를 무더기로 기소했다. 희생양들의 선발 기준은 의외로 간단했다. 카자아, 아이메쉬, 그록스터 등 대여섯의 일대일(P2P) 파일교환 서비스의 이용자들 중 1천 곡 이상의 엠피 파일을 컴퓨터에 저장한 ‘강성’ 이용자에 한해, 무작위 샘플링을 벌여 집단 기소했다. 물론 ‘사면’의 축복도 내린다. 시장의 법칙을 거스르는 파일교환 행위를 두 번 다시 않겠다고 반성하고 ‘준법서약’하면 과거의 죄과는 덮어준다. 랩터의 알을 훔쳐 호되게 당하고 살아남은 쥬라기공원의 인간들 마냥, 속죄하고 빌면 인정머리 없는 ‘카피랩터’(지난 호 1탄 참조)도 참을 줄 안다고 감언한다. 처음에는 시장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대일 파일 교환 서비스 회사들이 카피랩더의 표적이었다. 그도 여의치 않자, 다음엔 인터넷서비스 제공업자들에게 이용자 신상정보를 내놓으라 엄포를 놨다. 약발이 재차 부족해지자, 아예 직접 나서서 정보 이용자들을 잡겠다 사냥을 벌인다. 음반협회가 이용자들의 사냥을 모의한 지가 지난해 여름부터라니, 그 동안 효과 분석서부터 나름대로 다 재고 꾸민 일이다. 랩터는 교활하다. 비록 식탐에 눈이 어두워 결정적일 때 실수를 범하지만, 그 사냥 과정만은 잔인하리만치 치밀하다. 덩치 큰 먹이감보다 이용자들을 각개로 잡겠다고 나서면 뭔가 얻을 잇속이 분명해서다. 어차피 음반시장의 침체는 파일 교환 변수보다 시장 내재적인 문제라는 점을 그들 스스로도 잘 안다. 전반적인 자본주의 경기 하락에 의한 문화상품 소비 위축, 디브이디(DVD)와 같은 다른 동급 대체 매체들의 소구력 상승, 가격 하락 단행에도 여전히 비싼 음악 씨디 가격 등 악재들이 제거되지 않으면 음반 시장 침체는 반영구적이다. 자연히 그들이 살길은 파일 교환을 막고 불법화하려 바둥대기 보다는, 이용자들을 놀래켜 파일교환을 시장 틀 안에 끌어들이는 방법뿐이다. 이것이 지난 1년간 카피랩터들이 모의해 얻은 결론이다. 누구는 지금을 ‘종획(Enclosure)운동 2기’라 부른다. 물론 1기는 양을 치던 공유지를 대지주들이 제멋대로 사유화해 농민으로부터, 토지로부터 박탈했던 18세기 영국 암흑기를 지칭한다. 반면 2기는 미국 내에서만 1천만이 넘는 파일교환자들을 전자 공유지로부터 겁을 줘 내쫓고, 새롭게 상업화된 전자 텐트 안으로 이들을 우격다짐으로 밀어 넣는 요즘이다. 그럼에도 늘 잔혹은 코미디와 통한다. 잔인한 현대판 엔클로저가 펼쳐지는가 했더니, 벌써 코미디 한편이 이어 나온다. 261명 가운데 한 여성이 카자아에서 2천 곡 이상을 저장했다는 혐의로 카피랩터들의 불법 파일교환 기소 대상자로 지목됐다. 곡 당 벌금이 1억 5천 만원이란다. 그런데, 그 여성은 칠순이 다 되가는 할머니에 컴맹에다 카자아란 프로그램을 깔 줄도 모르고 이도 전혀 작동 않는 애플 컴퓨터를 소유한다. 사냥감으로 완벽한 부적격자다. 랩터들의 과잉 식탐으로 돌까지 와드득 씹은 격이다. 이후 노인에 대한 기소를 슬그머니 취하했다고 한다. 이제 숫자상 한 명 줄어든 260명이 카피랩터들의 공식 먹이감이다. 앞으로도 종종 돌을 씹으며 전혀 무관한 생사람을 잡겠지만, 식욕이 완전 사라지면 모를까 이들의 피의 향연이 순순히 끝날 듯 싶진 않다. <네트워커, 2003. 10. 제 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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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커 칼럼] 카피라이트의 잔혹 랩터들 (Copyraptors)

카피라이트의 잔혹 랩터들 (Copyraptors) 이광석 / 네트워크 편집위원 살 벌한 세상이다. 멋모르고 음악 파일을 주고받는 청소년들은 5년의 감옥형에 25만 달러의 벌금을 내야 한다. 미 하원에 계류중인 소위 ‘저자ㅤㅉㅗㄲ소비자ㅤㅉㅗㄲ컴퓨터소유자 보호 및 보안법’(ACCOPS)의 흉악스런 정체다. 이 법이 발효되면, 인터넷을 통해 파일을 주고받던 미국인들 중 약 6천만 명 정도가 범죄자가 된다. 파일 교환에 대한 본보기식 각개격파는 간담이 서늘할 정도다. 지난 6월말 경 전미음반산업협회(RIAA)는 ‘강성’ 사용자들의 마녀사냥을 공식 선포했다. 사냥 방식은 주로 손해배상 청구와 이용자 신원 공개요구에 집중한다. 발부된 소환장만 수천 여 건에, 대학 캠퍼스의 불시 수색에, 컴퓨터 압수와 영장 발부는 기본이다. 파일 교환이 수시로 이뤄지는 ‘불온의 범죄현장’격인 대학 캠퍼스는 60년대식 곤봉과 군홧발이 난무하는 대신, IP 추적으로 수갑차고 벌금 채무자가 된 대학생들로 그득하다. 대학가의 영원히 시들지 않는 공권력의 추태가 재현된다. 사태가 이쯤되니 신원공개를 요구하는 음반협회의 발칙한 요구에 1백여 인터넷 서비스 제공업체들이 분노, 반기를 든다. 인터넷 업체들뿐만 아니라, 메사추세츠공대(MIT)나 보스톤 칼리지 등 대학들도 협회의 소환장에 불복하거나 맞고소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미 음반업계는 사이좋던 컴퓨터ㅤㅉㅗㄲ가전업체들과 싸워 결별에 들어간 전력이 있다. 언제나 음반협회는 레코딩이 가능한 기술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고 봉합하는데 골몰해 왔다. 사사건건 가전업체들의 기술 개발에 개입해 사방 쪼아대니, 누군들 버틸 재간이 있겠는가. 결국, 가전업체들은 음반협회에 끌려다니며 각종 기술에 저작권 코드를 심어봐야 소비 심리만 위축시키고 전혀 사업에 득 될 것이 없다는 점을 간파하고, 바로 질 나쁜 폭군으로부터 멀어졌다. 철석같이 제 편이라 믿었던 인터넷 서비스와 가전업체 등이 차례로 등을 돌린다. 무엇보다 협회가 날리는 협박장에 이용자와 관련 시민단체들의 분노도 극에 달했다. 이토록 사방에 원성이 자자하지만, 협회의 해법은 늘 폭력적이다. 엄청난 돈을 들여 파일 교환 불법 캠페인을 벌이고, 속임수의 가짜 엠피 파일을 온라인에 다량 유포하고 파일 교환에 감시 프로그램을 심어 신원을 조회하며 미친 듯 용을 써보지만, 정작 주위를 찬찬히 살피는 아량은 없다. 음반업체 등 저작권 수호자들은 사용자와 현실 변화에 모질 정도로 둔감하다. 엠피 플레이어, 각종 디지털 녹음장치, 파일 교환 서비스 등 생경한 것들이 일상이 됐음에도, 독오른 눈으로 칼자루만 잔뜩 긴장해 움켜쥐고 있다. 이들은, 애초 저작권이라는 것이 전적으로 창작물에 대한 보상을 분할해 나눠먹는 이들을 위한 독점 사유권이 아니며, 이를 정당하게 쓰는 모든 이들의 공적 권리란 점을 쉽게 까먹는다. 마치 ‘쥬라기공원’에서 잔인하고 영리하게 하나씩 이용자들을 괴롭히고 잡아 먹어치우지만, 결국 티라노에 까불다 내동댕이쳐지는 랩터들마냥 처신한다. 시장의 법칙과 재산권을 들이밀더라도 상식을 따르고 상황 변화를 인정하는 장사꾼들이 되지 못하면, 그 족속은 ‘카피랩터’에 불과하다. <네트워커, 2003. 9. 제 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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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커 칼럼] 사팔뜨기 응시 권력

사팔뜨기 응시 권력 이광석 / 네트워크 편집위원 현 대 권력의 통제욕은 크게 두 가지다. '코드'와 '응시'. 코드가 독점/배제의 논리라면, 응시는 관찰/감시의 논리다. 소수의 권력자는 독점과 관찰 수단을 통해 다수를 겹겹이 배제하고 감시한다. 유무형의 재산과 정보에 대한 독점적 접근은 코드의 논리로 구성되고, 이 코드의 논리를 깨는 불순 행위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선 끊임없는 응시가 필요하다. 돈을 찾으려면 암호를 쳐야하고 접속을 위해선 신원이 확실해야 하고 답글 한마디 달려 하면 주민번호가 필요하다. 뭘 하나 쓰려는데 방벽이 쳐져 있고 이를 열심히 뚫어 여럿이 같이 쓰다 엉겁결에 잡혀간다. 코드 권력이 잘 작동하는 예다. 근무 중에 들락거린 웹 페이지를 다 알고 있다며 사장이 내게 경고 편지를 날린다. 알지도 못하는 보험회사가 우리 가족 신상을 들먹인다. 술이 과해 인사동 골목에서 한참 토하는데 어찌 알았는지 종로구청 직원이 튀어나와 인터넷에 생중계 된단다. 도대체 방범 CCTV를 270여대나 어디에 감쪽같이 숨겨놨을까 찾으려 두리번거리다 강남 경찰서에 잡혀갔다. 응시 권력이 잘 작동하는 예다. 응시 방식의 변화는 문제의 심각성을 더한다. NEIS에서 보듯, 기술적으로 개별과 분산에서 통합과 재분류가 가능해지면서 통제 능력이 훨씬 신장됐고, 밖으로 드러났던 것들이 은밀해지고 시야에서 사라짐으로써 자신이 권력의 관찰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잊는다. 응시의 이같은 교묘한 변화는 체제 코드의 좀 더 안정적인 재생산에 기여한다. 코드 유지를 위해 권력은 한 노동자의 일터에서, 퇴근 후 공원을 지나다, 백화점에서 카드 결제하면서까지 어디서든 뜨거운 응시의 눈길을 보낸다. 특히 요즘 문제되는 응시는 노동자와 소비자를 관찰하고 감시하려는 자본욕보다 시민에 대한 국가의 통제 욕망이 설쳐대는 특이한 경우다. 무엇보다 광장이라 불리는 공적 공간에서의 '원치 않는' 응시의 범람은 시민에 대한 전근대적 국가 폭력의 새로운 변종으로 자리잡는다. 부르조아 민주주의가 성숙할수록 이들 시민 영역보다는 노동자와 소비자로 등장하는 개인의 관찰과 감시에 집중하는 법이다. 성숙한 국가들은 시민권의 신장이 폭력적 응시를 참지 못하니 자연히 응시는 주로 자본의 입장에 충실하다. 이에 반해 우리 문민 권력자들은 아직도 군사 폭력의 공백에 허전해 한다. 폭력과 정치사찰 대신 응시를 선택했어도 과하고 서툴고 거칠다. 못된 옛날 버릇이 남아 더욱 그렇다. 이것저것 먼저 저질러보고 시민권의 반발력을 슬그머니 따져본다. 예서 다치는 것은 시민 인권이다. 일례로, 얼마전 미 회계 감사원이 하원에 제출한 워싱턴시 CCTV 운용 보고서 내용만 봐도, 테러범들을 잡겠다며 설치한 CCTV가 테러와 범죄 예방은 고사하고 도시 시민들의 공공 생활을 크게 위축시켰다고 혹평하고 있다. 그런데도 강남의 CCTV는 용감하게 전국을 꿈꾼다. 이래저래 느끼한 권력자들의 닭살스런 응시의 동기나 효과를 따져보면, 지긋이 시민을 향해 쳐다보기는 하는데 영 사팔뜨기인 듯 싶다. 밖에서 그만둔 것 하느라 욕먹고, 실속도 없이 끈질기게 시민의 스토커가 되겠다고 우겨대니 말이다. <네트워커> (2003. 8. 제 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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