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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문화정치-6장] 네트의 시민운동가들: 전자프런티어재단(EFF)과 그 구성원

*제 1996년 책 <사이버 문화정치(문화과학)>의 디지털본을 유실하고, 다른 곳에서 이 문서만을 발견했습니다. 참고바람. 6장. 네트의 시민운동가들: 전자프런티어재단(EFF)과 그 구성원 1. 전자 결속의 희망 근대사회 이래로 시민사회의 영역은 공론장(public sphere)으로서 보다는, 어지 중간한 선에서 국가 권력과 대중을 화해시키거나 조율시키는 역할을 담당해왔다. 국가 권력의 입장에서 보자면, 시민운동은 혁명이란 완벽한 체제 이탈을 막는 도구로 양성화시키는 측면이 강했고, 민중적 시각 에서 보자면 의회적, 합법적 틀거리 속에 그들의 주장이 이입될 수 있다는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시민운동은 여타 실천 지형에서의 역량에서 보다 그들 국가의 성격에 크게 좌우되며, 그 합 의 과정이야 어떻든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가치가 그나마 유지되는 국가일수록 시민운동 영역과 쉽게 결합되는 측면이 강했다. 요컨대, 국가권력의 여하에 따라 시민권은 수축/팽창하거나 권력 의 경계 외곽으로 밀린다. 그들에게는 주로 정책적, 입법적, 행정적 현안에서의 여론화를 통한 법 안 수정 작업이 주목표가 되며, 운동의 전술은 대중매체 활용, 거리 시위, 팜플렛 배포, 피켓 동 원, 연구실 실험 등 다양하게 펼쳐진다. 그들은 물리적 폭력성을 응축한 도구들의 과격한 사용을 철저히 배격한다. 근대적 폭력 수단을 무장해제 시킴으로써, 시민운동은 체제 혹은 제도권에 대 한 영향력을, 그리고 보다 원활한 대중적 입지를 획득해 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 한편 그들은 특 수한 지반성에 기초한 집단적인 주장을 통해 대중성을 확보한다. 이들은 이해에 기반하여 혹은 인구통계학적 변인에 따라 정체성을 구획 짓고, 자본/노동 대당관계에서의 근본적 모순만큼이나 스스로를 동등하게 취급하려 애쓰며, 자신의 가치를 옹호하고 변호한다. 이제는 이들 집단이 가 진 태생성과 함께 사안별, 이슈별 공동화가 오히려 대중에게 적극적인 소속 의식을 심어준다. 역 사적 맥락 하에서 보자면, 뭉뚱그려 좌파라 호명되던 일단의 그룹들은 시민운동권과의 연동이 가 장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계층이다.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 이 급진적 인자들은 종종 명분상의 이유로 제도권과 자연스레 공동 전선을 형성하거나 편입되는 경향이 있었다. 일부는 정치권력과 노선상의 부조응으로 인해 독자적인 정치세력화의 길을 찾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시민운동권 내 부에서 자유주의적 좌파라고 불리길 바라는 엘리트 상층부가 개혁적 정당과 조우하는 경우는 다 반사이다. 정권의 측면에서 보아도 시민운동 진영을 합의와 동의의 기제로 끌어들이는 일은 중요 하며, 여론정치를 이끄는데 중요한 동력이 된다. 어쨌든 비합법적 수단을 통한 총체적인 전망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실천 방식의 변화를 꾀하는 시민운동권의 움직임을 읽어낼 필요는 있다. 과거와 달리 시민 계급·계층간 이동성에 의한 집단화는 더욱 극대화되는 추세이다. 네트의 디지털 정보가 패킷(packet)으로 쪼개져 꼬리에 꼬리를 물고 주소지를 찾아다니다 결국 하나의 정보로 합쳐지듯, 광통신에 떠다니는 각양각색의 정치적 주장과 논쟁의 경합('flame wars')은 살 아있는 유기체처럼 전자게시판에서, 뉴스그룹에서, 채팅공간에서 이합집산하며 꾸물꾸물 전자조 직을 구성한다. 물리적/물질적 공간이 주던 지역적 한계가, 전자공간의 네트워크적 속성으로 말 미암아 그 틈새를 메우고, 그 외연을 비트로 확장시킨다. 전자네트워크로 인해 전세계의 내노라 하는 NGO의 활동 폭이 더욱 커져가고 있다. 범지구적으로 집단과 집단, 조직과 조직의 연대와 연합의 활로가 새롭게 펼쳐지고 있다. 이제 권력과 자본이 새롭게 직면한 문제는 이같은 네트워 크형 조직들을 재흡수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나는 당연하게도 NGO 의 힘을 확장하는 비트적 공간이 바로 이 굳건한 현실에서의(on the ground) 투쟁을 대체하기 보다는, 현실의 투쟁을 가시화하고 이를 엮어낸다는데서 그 공간적 실천의 출발점을 두고자 한 다. 대항 집단들이 시도하는 아래로부터의 횡단적 연결이, 그 수위에서 '가상코뮨'(virtual commune)이나 '제 5 인터내셔널'(fifth international)의 붉은 기가 휘날리는 이상적 전망으로부터, 마을공동체의 신화에 사로잡힌 비트적 연장물, 즉 가상공동체라는 조금은 철부지한 영토관에 이 르기까지 다양하나, 이와 같은 미래적 전망은 실천 주체들이 가늠하는 구체적 현실과의 목적의식 적 결합 속에서만 가능하다. 어쨌거나 네트 문화정치의 미래 기획에 있어서 이 모든 동적인 움 직임들이 현재 정보"자본주의를 배회하는 유령"임에는 분명하다. 80년대 극소전자혁명에 의한 '비트뱅'(Bit-bang)의 파고가 좀 더 특이하게 네트행동주의 (net.activism)에 영향력을 발휘한 사례는, 자유주의적 시각의 변종들이 우글대는 미국에서 시작 되었다. 네트를 아직 개척되지 않은 미 서부에 비유하여, 이 공간에 대한 디지털적 해석과 새로 운 가치를 창출하려는 수많은 그룹들이 번창하고 있다. 여기서 가장 특징적인 면모를 지닌 집단 은 단연 '전자프런티어재단'(EFF: Electronic Frontier Foundation)이다. 최근 네트의 정치, 사회, 문화적 가치 논쟁과 관련하여 수많은 시민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으나, 보다 이들을 차별화하는 것들은 크게 정치적, 현실적 영향력과 그 구성원들의 엘리트적 명망성으로 요약될 수 있다. 국내에서도 EFF의 활동에 대해서 간헐적인 언급이 있었으나, 이 단체의 출생 배경과 현실 활동, 그리고 그 구성원들의 면모에 대한 논의를 좀 더 장황하게 풀어갈 필요가 있다. 2. 사이버엘리트들에 의한 EFF 결성 60년대말 해커들은 순수한 정보욕에서 출발하여, 70년대 정보공유 정신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80년대 이후 대다수가 디지털자본으로의 병합이 이루어졌고, 그 주변에 디지털 지하세계의 탕아 들이 잠복하고 있는 형세였다. 이 문제아들의 정치적 성향에서 비롯된 사회적 해킹, 혹은 프리킹 으로 개인의 사유재산권을 침해하는 사례들이 급증함으로써, 특히 미국방성을 비롯한 정부기관, AT&T 등의 전화 회사, 물리학이나 핵개발 관련 연구소 등이 골머리를 앓게 되었다. 이런 상황 에서 해커에 대한 대대적 진압은 필수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1990년 일명 '선데블 작 전'(Operation Sun Devil)이라 불리는 디지털 지하세계에 대한 대검거 작전이 수행되었다. 일반 적으로 네티즌에 대한 억압적 상황을 상시 검열과 불시 진압으로 가름해 본다면, 해커단속은 전 국적인 규모로써 후자의 성격을 띠고 있다. 해커들은 이 사건을 통해 철없는 문제아에서, 현대문 명에 도전하는 사회의 불순세력으로 급상한다. 시크릿 서비스의 잇따른 해커들의 검거, 수색과 압수가 이루어졌고, 개중에는 부당하게 혐의를 받고 재판에 기소되는 해커들도 존재했다. 스털링 은 선데블작전의 공세로 자국내 상황이 '해커 히스테리'적 분위기였으며, 궁극적으로 미사법부와 디지털자본이 사이버공간에 내린 1차 경고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S279) 경고는 좀 더 강한 경 고와 폭력이 장차 동원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경고는 매카시의 마녀사냥만큼이나 정치적인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바로 EFF는 이같은 해커사냥에 대응하여 만들어진 시민자유론자들의 단체이다. 예컨대 시크 릿 서비스가 검거 중 보여주었던, 컴퓨터장비와 데이터 압류, 출판 등의 표현물에 대한 제한, 부 당한 폭력 등에 맞서, 그들은 기금 모금, 법적 행동과 후원 등으로 정세를 반전시켰다. 이같은 정부의 독단적, 억압적, 비합의적 월권에 반응하여, 네티즌들을 보호하는데 사법적, 제도적 투쟁 을 거쳤던 사람들이 모여 만든 것이 EFF의 출생 배경이다. 그래서 EFF는 일명 '해커 변호재 단'(hacker defense fund)이라는 별칭도 얻게 된다. EFF의 초대 설립 멤버는 제리 버만(J. Berman), 마이크 고드윈(M. Godwin), 존 페리 바를로우(J. P. Barlow), 미첼 케이퍼(M. Kapor), 스튜워트 브랜드(S. Brand), 에스더 다이슨(E. Dyson), 존 길모어(J. Gilmore), 워즈 니악 등으로 구성되었다. 비영리, 비정파적 조직으로서 EFF는 기본적인 시민권 보호를 최우선으 로 삼고, 보다 나은 방식으로 사이버공간을 규제할 수 있는 법들을 통과시키기 위해 노력하며, 부당하게 기소되는 해커를 변호하는 법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EFF는 1992년 이전에 미국시민 자유연맹(ACLU: 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의 행동가였던 버만이 맡고 있는 워싱턴 사무 실에 추가로, 현재 법률고문인 고드윈을 고용하여 새로운 지부를 세움으로써 풀뿌리 행동주의자 들의 강력한 조직으로 진화한다. 어느 정도 EFF는 두 가지 행동주의적 접근을 수용하려고 노력 했다. 그 단체는 새로 세워진 캠브리지 지국 중심의 '풀뿌리 모델'(grassroots model)과 애초 워 싱턴 본부에서의 '로비 모델'(lobby model)이라는 두 가지 모두를 채택함으로써 정치 행동의 효 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1993년에 EFF는 대정부 로비활동, 법률작업 등으로 활 동 영역을 축소하고 캠브리지 사무실에서 철수한다. 1994년 미국내 절충적인 전화법안에 대한 지 지로 인해, EFF의 '로비 모델'은 행동주의자들에게 거센 비난을 받으면서, 재정 문제와 회원들의 사분 오열로 조직적 문제를 떠안게 되었다. 그 후 버만은 EFF를 떠나 민주주의/기술 센터(CDT: Center for Democracy and Technology)를 만들고, EFF는 미서해안의 베이 지역으로 이동하여, 다시금 풀뿌리적 기초를 고려한 효율적 행동주의 조직으로 거듭나게 되고, 현재까지 이르고 있 다. 문제는 그들이 일차적으로 프라이버시, 액세스, 자유 의사표현과 같은 실리콘 밸리의 디지 털 기업의 시각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후에서 살펴보겠지만 그들은 일종의 시장 지향 적 정치행동주의에 전향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이는 실리콘 밸리의 기업들이 생각하는 자유롭 고 개방된 조건하에서의 사이버공간 구축만이 시장 체제와 어울릴 수 있다는 확신에 EFF도 동 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미국 의회내 민주당-실리콘 밸리-EFF의 삼박자의 구성은 국가-자본-시민의 3요소를 대표하는 21세기 정보초고속도로의 주체로 정리되고, 동시에 현실 미래적 비전으로 자리잡기 위한 냄새를 풍기게 된다. 어쨌든 EFF의 영향력 하에서 수많은 사이버 시민단체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자국내 EFF-오스틴 등과 국외의 EF-오스트렐리아, EF-캐나다, EF-아일랜드, EF-일본, EF-노르웨이, EF-스페인이 만들어졌고, 또 다른 비슷한 류 의 시민단체들, 즉 CDT와 그 소속단체인 CIEC(the Citizens' Internet Empowerment Coalition), VTW(Voters Telecommunication Watch), 원래는 NTE(Not the EFF)이라는 명칭을 지녔던 뉴욕의 SEA(Society for Electronic Access) 등이 생겨났다. 3. 자유방임의 전자프런티어 정치학 EFF는 그들의 활동을 크게 세 가지 영역으로 나누고 있다. 첫째, 근본적인 시민권의 보장 을 위해 노력한다. 둘째, 네티즌의 권익을 대변한다. 셋째, 커뮤니티를 구축한다. 먼저 시민권과 관련한 그들의 활동은, 네트 범법자 재판에 대한 스폰서 역할, 법적 권리에 문제가 있는 회원에 게 자유로운 전화서비스 제공, 시민권과 관계하는 정보백서 발간 등으로 압축될 수 있다. 네티즌 의 권익은, 예컨대 '공통된 소통원칙'(common carriage principles)에 입각한 자유로운 의사 표현, 네티즌의 정보접근권 확보, 네티즌의 사생활 보장, 정보생산물의 자유로운 분배 등에 입각하여 정책적·사법적·기술적 수단을 동원하거나 이를 지지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커뮤니티의 구축 은 우선 풀뿌리 조직의 건설과 이에 대한 지원, 그들에 대한 법적·기술적 자문, 그리고 EFF의 다양한 매체전술, 기관 발행물을 통한 선전으로 구성된다. 그들의 매체 전략은 다양한 채널에 걸 쳐 있다. 그들의 가장 큰 소구 대상은 온라인 공동체들이다. 신생 혹은 기존 정보시민단체들과 경험을 공유하고 확대하기 위한 작업으로, 그들은 기관지인 계간 <이펙터 EFFector>와 전자 뉴 스레터인 <이펙터 온라인 EFFector Online>을 발행하고 있다. EFF는 자신의 FTP, 고퍼, 웹 서 버를 운영하면서 전자도서관을 방불케 할 정도로 엄청난 관련 문서들을 저장하여, 서치엔진 등을 통해 열람할 수 있게 해놓았다. 또한 유즈넷의 뉴스그룹(comp.org.eff.talk)과 함께 인터넷 포럼을 구성할 수 있게 하여, 웰(WELL), 컴퓨서브(CompuServe), 제니(GEnie), 워먼스 와이어(Women's Wire) 등의 네트워크에서 풀뿌리 활동가들의 논쟁장인 게시판을 운영하고 있다. 전자적 홍보와 구분하여 그들의 온라인 행동주의의 가능성은 전자메일 캠페인과 온라인 정치 조직화의 사업에 서 이루어진다. 한때 국내에서도 크게 알려지게 되어 큰 호응을 받았던 블루리본 캠페인, 그리고 FBI의 반테러법안에 반격하여 '사회적 책임을 생각하는 컴퓨터 전문가모임'(CPSR: Computer Professionals for Social Responsibility) 등의 시민단체들과 함께 개인의 프라이버시 보호를 외 쳤던 '골든키 캠페인'(Golden-Key Campaign)은 바로 이러한 네트 시민정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로써 평가할 수 있다. EFF는 사이버공간을 비적대적 방식으로, 그리고 약간은 질서 잡힌 개척지로 여기면서, 그들 자신이 컴퓨터 사용자와 법 집행자들간에 논리적 가교 역할을 한다고 자임한다. 그리고 이들은 상대적으로 제도권의 정당 정치에 입각하여 네트를 주목하지는 않는다. 정당 정치가 정부의 위계 구조를 반영한다면, 컴퓨터를 매개로 한 사이버행동주의는 어떠한 제도 정당이나, 위계구조, 기성 원칙을 위배한다. 사이버행동주의자들은 정교한 철학이나 강령을 구성하려 애쓰기보다는, 관성화 된 신념체계를 정보와 주장의 사이클로 대체하여 그에 걸맞는 네트망을 구축한다. 일반적으로 테 크노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경향성을 공유하고 있다. 60년대 히피의 변종들은 비합법적 해커들만 이 아니다. 산업시대의 잉여가치를 탈산업시대의 가치체계로 포섭하려고 실리콘 밸리에 들어가거 나, 혹은 합법적 시민운동 지형을 통해 구체적인 자유주의 정신을 선전하려는 일군도 있었다. EFF의 구성원들은 후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같은 역사적 맥락은 EFF의 구성원들 의 면모에서도 잘 드러난다. 특히 EFF의 마담격인 바를로우는 대단히 특이한 인물 중 하나이다. 그는 1980년대 후반에 공화당원으로 활동했으며, 한때 히피 록그룹 그레이트풀 데드(Grateful Dead)의 작사가이자 와이오밍주의 목축업자이기도 했다. 스털링에 따르면, "그는 시인과 같은 간 결하고 다채로운 문체를 소유했다. 그는 또한 저널리스트의 날카로움, 즉석에서의 기지, 그리고 개인적 매력으로 볼 수 있는 엄청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다"(S235). 바를로우는 사이버공간을 디지털 추상공간의 은유에서 미서부 시대의 전자적 개척지로 표현함으로써, 네티즌들에게 그 공 간을 현실로 사고할 수 있게 하는 문필가적 역량을 발휘했다. 그는 사이버공간을 정착될 과정으 로서의 개척지며, 산업시대의 무분별하고 힘센 이주민들에게 네트의 원주민들이 위협받는 공간으 로 바라본다. 그가 보기에 수세기전부터 '산업시대의 정권'이 자행한 물질세계의 통치권은 사이버 공간에 통용되서는 안되는 '프런티어'이어야 한다. 그 곳은 질서, 권위, 통제 등의 물질공간의 속 성이 온존하고 확대되는 곳이 아니라, 사이버공간 자체의 불문법, 즉 계약, 관계, 사유 등으로 이 루어진 질서 잡힌 '마음의 문명'이 세워질 곳이다. 그리고 그에게 사이버공간의 정보는, 끊임없이 이동하고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체험되는 '활동'(an activity)이며, 자유롭게 복제되고 변화하는 '생 명체'(a life form)이며, 소유라기 보다는 '관계'(a relationship)이다. 이같은 정보의 영상화된 조 합으로써 사이버공간은 과거의 권력/자본이 아직까지는 배제된, 희망의 설원으로 남아 있다. 한 편 그의 절친한 동료이자 네트시민운동의 거물로 알려진 케이퍼도 현실에서의 사업가다운 기질 과 자유주의적 성향이 그의 바탕을 이룬다. 바를로우보다 케이퍼는 더욱 대단한 재력가다. 그는 EFF 설립 후에 미국내 상위 1-2%에 들 정도의 거부였고, 첫 해 약 25만 달러의 EFF 예산을 순 수한 사비로만 충당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S286) 앞서 EFF의 두 가지 모델 중 '로비모델'을 들었던 것처럼, 미국의 특수한 전통 하에서 EFF의 의회로비는 주요 법안처리와 관 련하여 중요한 실천 영역을 차지한다. EFF 노선 안에서 이 두 모델 중 어떤 쪽을 택해야할지 조 직내 진통을 겪기도 했지만, 만약 현실적으로 그들이 자금력과 지명도가 없었다면 EFF의 성장이 그렇게 순탄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 구성원들의 경제적 능력은 대외적 효과 면에서 정적인 상관 관계를 지녔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케이퍼는 비관료적 면모와 함께, 미국의 자유주의적 전통을 '제퍼슨 자유주의'(Jeffersonian Liberalism)로 표현하는데 앞장선다. 제퍼슨주 의의 핵심은 엘리트주의에서 평등주의로, 위계적 질서에서 탈중심화된 구조로 변화하는 개인주의 적 자유주의의 이상 실현이다. 그에게 사이버공간이 바로 이 제퍼슨주의를 발현할 토양이 된 다. 문제라면 전자공간에는 권력의 과도한 개입과 자본의 상업화가 자유주의를 억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볼 때 궁극적 장애물은 거대기업이며, 사적 기업들의 시민권 부식에 대한 정부의 감독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본다. 더불어 정부는 네티즌의 자유를 가로막아서도 안되며, 공익을 고려하는 선에서 최소로 개입하고, 조정하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본다. 바를로우는 기술적 관점에서, 암호화 기술과 패킷전환 아키텍쳐가 결합되어 수많은 네티즌에게 퍼져나간다 면, 이같은 권력의 통제권은 상실될 것으로 예견한다. 즉 사생활을 보장해줄 수 있는 기술적 프로그램의 확보를 통해서 보편적 자유가 실현될 것이라 보고 있다. 요컨대, 네트 공간안에서 표 현의 자유, 암호화를 통한 사생활 보장, 비차별적 액세스권, 정당한 지적 재산권 설정, 거대자본/ 권력으로부터의 네티즌 보호 등등은 이들이 관심을 갖는 사회적 자유주의의 실천 대상들이다. 아직까지는 더 지켜보아야 할 상황이지만, EFF가 시민운동단체로서 성공한 요인은 크게 보 면, 보수화된 미국내 정서에서 그들의 자유론적 논지가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 일정 정 도 미행정부와 밀접한 공조 관계를 지닌다는 점, 미래적 전망에 있어서 EFF내 구성원들이 정보 사회론의 제도적 지형을 형성하는데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엘리트들이라는 점, 재정상의 능력을 통해 시민운동의 난점을 뛰어넘었다는 점 등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4. 사이버공간의 독립선언? 하이퍼 미디어연구소의 바브룩은, 바를로우의 [사이버공간의 독립선언]을 '캘리포니아 이데올 로기'의 파산 선고라고 단정한다. 여기서 '이데올로기'의 발원지는 미서안의 실리콘 밸리이며, 그 연합전선은 신우익(클린턴/고어 행정부, 민주당, 기술관료 등)과 미서안의 하이테크기업들, 그리 고 시민운동 진영으로 짜여진다. 이들 가상계급 전선에게는 새로운 제퍼슨 민주주의의 부활에 대 한 약속이 내부의 결속을 유지했다. 그러나, 바브룩은 그들 사이에서 '이데올로기'적 모순, 즉 신 좌파인 EFF를 비롯한 사이버 시민운동단체들의 급진성, 그리고 신우익과 자본가들의 보수성 사 이에서 빚어진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전자의 자유 정신에 입각한 '사회적 자유주의'와 후자의 자유시장 원리에 입각한 '경제적 자유주의'가 '하이테크 제퍼슨 민주주의'라는 지주로 버티다, 결 국 후자의 승리로 끝나버렸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연합을 끝장낸 정책적 현실물은 1995년의 전 기통신 개혁법안의 통과이다. 탈규제의 수사와 시장지상주의로 가득찬 이 법안은, "큰 것은 더욱 크게, 그리고 더욱 수직적으로 통합되도록 의도된" 기업논리의 대변자(by and for business) 구실 을 했다. 즉 급진/진보의 내용은 대중성으로 귀결되고, 급진적 히피 출신의 신좌파의 자유주의 전통이 우파적 시장경제의 이상에 압도당한다. 그래서 바브룩은 바를로우의 [선언]이 신좌파적 입지의 상실에 기초한 선언이라고 주장한다. 즉 우파와 좌파간의 동침을 가능하게 했던 신좌파적 자유정신이란 단서조항도, 시간이 진행함에 따라 우파적 상업화 논리의 헤게모니에 밀려, 결국 초현실의 지점, 즉 전자개척지의 목가적인 카우보이가 되기를 부르짖는 도피성 [선언]을 작성하 게 만들었다고 본다. 이제 그는 사이버공간의 '코요테'라 불린다. 바를로우는 "디지털 도시 안에 서 삶의 사회적 모순에 직면할 수 없게 된 가운데, 이제 전자 개척지에 사는 가상 카우보이들과 합류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고독하게 테크노 벌판을 어슬렁거리는 테크노히피가 된 것이다. 이러한 정황 하에서 그나마 현실에 개입하려 했던 좌파적 사이버히피들은 사이버공간의 변방에 내몰리고, 이미 그리고 점차 네트 홍보자들의 신화가 현실을 독점하게 된다. 미국의 히피적 전통 도 현실적으로는 사회성을 결여한 자유지상주의로, 신우익의 경제적 자유주의의 우세 논리로 귀 착된 것이다. 바브룩의 평가와 함께, BS 편집자인 조셉 로커드(J. Lockard)의 견해도 눈여겨볼 만하다. 로 커드는 바를로우가 '반사회적 단자론(monadism)'에 기반하고 있다고 본다. 즉 사회적 욕구와 인 간의 상호의존 보다는 사적인 전자 정보에 대한 보안망을 치는데 치중하는 행위는 고립과 특권 에 기반한 정서라고 말하면서, 이는 결국 반공동체적이고 자유방임적인 전자프런티어 정치의 고 립적 효과로 드러난다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그의 [선언]에서 얘기하는 '테크노 개척정 신'(techno-frontierism)은 이른바 '추한' 역사로부터 도망가기 위한 행동으로 보여질 수밖에 없다. 본인이 볼 때, 보통 디지털공간의 '개척지 은유'는 건설, 완성되어야 할 것으로 디지털공간을 바 라봄으로써, 현실적으로 곧장 자본주의적 식민화와 결합하는 경향이 강하다. 바를로우는 추상적 으로 테크노 개척지를 자유와 정신의 공간으로 논함으로써, 식민론자들에게 무력화되고 만다. 다 시 말해, 그는 공간을 현실/가상으로 이중화하여, 은유적 가상공간을 실제의 탈공간 영역으로 간 주함으로써, 가상공간을 현실 공간의 역학과 동떨어진 환상의 어떤 곳으로 놓고 있다. 이 부분이 그의 신좌파/히피적 자유주의의 속성에서 연유한 논리적 귀결인지도 모른다. EFF의 구성원들을 살펴보면, 앞서 보았듯이 정치적 근원에서 그들은 히피의 급진성을 거세하여 사회성이 결여된 자 유지상주의의 신좌파적 사고와, 정부와 하이테크 기업의 신우익적 행동 방식이 뒤섞인 불안정한 모습을 보인다. 결국은 그의 이상과 무관하게, 사이버공간의 미래 전망은 현실적으로 최소한의 정부권력/기업논리 개입론, 더 나아가 클린턴/고어 행정부의 구상에 입각한 '정보초고속도로'로 귀착되고 말았다. 어떻게 보면 미국내 네트 시민단체들은 복지, 환경, 국방, 과세 등의 정치적 문제를 등한시하 고, 일종의 기본권 운동으로 그 급이 격하된 측면이 강하다. 그리고 EFF의 사례를 통해 보았지 만, 시민단체의 이상이 정부와 자본의 논리에 말려드는 형세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이 보 여준 장점은, 미래 비전과 관련하여 시민단체가 적극적인 제도 개입을 할 수 있다는 것, 가상공 간의 시민 조직이 현실적으로도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 사안별로 대중의 실천력을 몰아갈 수 있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오히려 시민단체들의 목적 의식적인 네트적 결합을 도모함에 있 어서 봉착하는 문제는, 특히 기술과 관련된 자금, 그리고 지속적 정보 흐름의 유지에 필요한 '학 습곡선'(learning curve)과 시간 등이다. 이러한 구체적인 문제점들은 단기적으로 현 시민단체들 을 괴롭힐 수 있는 난제이며, 일정 정도 인터넷이 범용화되면 풀릴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요 컨대, 변화되는 현실 지형에서 이제는 한 집단이 지닌 급진성의 추상화 정도가 문제가 아니라, 그 집단 속에서 모색하며 이루어내는 사안들의 관철이 전술적으로 더욱 중요해진다고 볼 때, 후 자에 가까운 EFF는 새로운 사이버 시민운동의 성공적 사례로써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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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작업..

내 홈페이지를 잃고, 내가 썼던 글들이 절반 가량이 소실되어, 아무래도 뭔가 흔적을 남겨두는 아카이브 작업이 절실했다. 요 몇일 새로 진보넷에 둥지를 틀고, 네트에 몇몇 흩어져 있는 내 글들 찾아내 겨우 2/3 정도는 건진 듯 하다. 한 40개 정도 가량의 확보된 에세이들만 찾으면 대강 글들을 주섬주섬 모아들인 셈이다. 뭔지모를 기억의 조각들이 석사 졸업이후에 열나게 썼던 내 글에 투영되어 있는 듯 해 그저 버리기가 너무 힘들다. 사라져 버릴 내 글의 흔적들을 모으는 작업을 하는걸 보니 나도 나이가 좀 먹었나부다. 게다 요즘 통 한글쓰는 일이 없어져 버려, 도대체가 한글을 구사하는 기술이 거의 중학생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런 것이 옛글에 대한 연민을 더욱 부채질하는 지도 모르고... 이제 한 1년 반이면 유학생활도 마무린데, 이 곳에 둥지를 틀면서 옛글도 모으고 새글도 올리고, 내 정서관리도 하고, 한글도 좀 써보는 연습장으로 활용해볼란다. 올 한해 여러 블로거들과 누리꾼들이 왕림해 풍성한 블로그가 되길 기원해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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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대학원신문: 인터뷰] 미디어운동으로의 정진

205호 [선배를 만나다] 신문방송학과 대학원 94학번 이광석 미디어운동으로의 정진 미국 유학중인 이광석 선배와 인터뷰하기란 쉽지 않았다. 몇 번 메일을 주고받은 끝에 전화인터뷰를 하기로 하고 지난 금요일 오후 전화를 걸었다. 한시간정도 통화하면서 선배의 유학생활과 현재 관심사 및 여러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광석 선배는 신방과 대학원을 졸업, 99년 미국 텍사스 오스틴 주립대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치고 현재 정보정책 전공으로 박사과정중이다. 우리학교 대학원 졸업이후 <사이버문화정치>와 <디지털 패러독스>라는 책을 내는 등 다양한 저술활동과 강의를 하며 지내다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됐다. 처음에는 유학에 대한 생각이 별로 없었는데 어쩌다 오게 됐다며, 유학생활에 대해 너무 쉽게 생각해 초기에는 어려움도 많았다고 한다. 유학중에도 뉴미디어 평론가로 활동하면서 <한겨레신문>에 매주 ‘디지털 사회’ 비평칼럼을 쓰기도 했고, 진보네트워크에서 매달 발간하는 정보운동잡지 <네트워커>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한창 글을 쓸 때는 일주일에 서너편을 쓸 때도 있었다며 요즘은 글쓰기보다는 공부에 전념하고 있다고 했다. <네트워커> 편집위원 활동은 어떻게 하냐는 질문에 <네트워커> 창간멤버이기는 하지만 편집위원 회의에는 한번도 못나갔다며 이름만 편집위원이라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꾸준히 네트워커에 글은 쓰고 있는데, 현재 선배가 맡고 있는 꼭지는 <사이방가르드 문화체험>이다. 사이방가르드는 선배가 붙인 개념으로 디지털 시대의 자유로운 실험 정신과 보다 넓은 사회적 차원의 시각으로 권력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정신을 가진 예술가를 발굴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작년 7월 창간부터 매월 꾸준히 발간되는 <네트워커>에 대해 선배는 미국에서도 정보운동만을 위해 발간되는 잡지는 없다며 자랑스럽게 여기는 듯 했다. 요즘 관심가지고 있는 연구 분야는 세 가지인데, 첫번째는 저작권문제에 대한 것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지적소유권에 대한 부분이라고 했다. 두번째는 공동체 대안운동으로 라디오, 인터넷 등을 활용한 지역공동체 운동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셋째는 비판지리학인데, 이를 사이버 공간에 활용하여 정보에 대한 불평등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볼 수 있다고 했다. 다양한 학문영역과 미디어를 접목하여 연구하는 선배가 참 대단하다고 느꼈다. 유학을 준비하는 후배들에게 선배는 미국은 실용학문 중심이고 비판학문이 약하다며 유학이 그다지 좋은 선택은 아니라고 했다. 학제간 연구를 통해 인식의 지평을 넓힌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학문의 깊이는 없어서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연구자들은 한국에서 공부하는 것이 더 좋을 거라고 충고했다. 미국에서도 유학생들에게 국내연구자들의 시각이 더 낫다고 말한다며 국내연구자들의 육성을 강조했다. 선배 역시 박사과정 후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사회와 직접 접촉하면서 연구활동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한국에 와서 미디어 연구집단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과 미디어 관련 지역공동체 운동을 하고 싶다는 선배의 이후 활약을 기대해 본다. (이현옥 편집위원 정리) [중앙대대학원신문 200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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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대학원신문] 현단계 한국사회의 대안문화

115호 [문화기획] IMF 시대의 문화 - ③`현단계 한국사회의 대안문화 주류를 치받는 대안문화, ‘다르게 행함’에서 비롯될 것 이광석/ 네트분석가 작년 말부터 시작된 금융 위기의 한파로 크게 타격받는 부분은 대중문화 영역이다. 한 연구기관의 조사에 의하면 IMF이후 소비지출 가운데 가장 먼저 문화비에 대한 지출을 줄이겠다는 응답자가 전체의 65% 이상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말은 곧 일반 서민들의 생활비 항목에서 문화는 늘 사치비용으로 남아있다는 말일 게다. 마찬가지로 LG, 대우, 삼성을 비롯한 대기업들이 영상사업에서 손을 떼거나 투자 규모를 축소하고 있다. 경제기반이 흔들리는 차에 기업의 구조조정과 맞물려, 문화 영역을 군살로 취급하겠다는 것이 기업들의 반응이다. 그러고 보면 호·불황 여파에 따라 춤추는 대중문화의 숙명은 아직까지 문화가 대중의 것으로 전유되고 있지 못함을 반영한다. 더 근원적으로 따지자면, 이같은 대중문화의 휘청거리는 몸짓이란 철저히 시장 경제학의 원칙에 문화를 포섭시킨 결과이기도 하다. 90년대 이후에 들어서야 대중들이 맘 편히 향유하던 문화 영역이, 애초부터 자본에 의한 ‘경제적 문화활동’ 혹은 ‘문화적 경제활동’으로 굳어졌던 것은 아니었던가를 되짚어보아야 한다. 문제는 여기서 한술 더 떠 한국 경제와 동반 하락하는 최근의 대중문화산업의 침체 국면에 반발하여, 문화계 행정관료나 유관 유학파 출신들이 내놓은 ‘문화경제학’이란 아이디어다. 한마디로 문화를 확실하게 돈벌이로 만들어, 기업에겐 돈이 되고 대중에겐 양질의 문화적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논리이다. 그 동기는 시장경제 내에서 문화를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의 상술적 테크닉에서 출발한다. 최초 이 용어를 사용하였던 존 러스킨(J.Ruskin)의 고민은 산업혁명기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 때문이었다. 그는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의 보장을 위해 자본주의의 피비린내 나는 이윤 논리에 반하여 생산자들에게 문화적 가치를 향유할 권리를 외쳤던 것이다. 러스킨의 사고가 사회적 문화권을 주장한 것이었다면, 현재 국내에서 압도하는 이같은 아이디어는 경제적 문화권의 논리이다. 돈벌이로 전락한 문화 최근 문화경제학의 논리가 더욱 활개치는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IMF라는 심각한 외환 위기를 맞이하여 대중문화의 싹들이 잘려나가는 상황에서, 관료와 자본 공히 국가 경쟁력을 확대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로 아예 문화를 사업의 주요목표로 삼겠다는 의도이다. 1998년 문화관광부가 발행한 ‘통계로 보는 문화산업’이란 보고서를 보면, 문화산업 시장규모가 97년에 대략 16조 6천억원(추정치)에 이르고 있는데, 돈이 되어도 한참 되는 영역이란 것을 보여준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90년대초 이후로 성장한 대중문화가 자생적이고 자율적 토양이 미처 정착되기도 전에 IMF의 한파에 넉다운되었다가, 이제는 완전한 경제 마인드의 수용을 강요받는 사정에 이르러 사망선고를 받을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올 만하다. 물론 돈도 벌고, 문화도 향유하는 것이 무엇이 나쁘냐는 반론이 일 수 있으나, 문화는 시장의 성격과 자주 충돌한다. 수많은 소수들이 집합화된 형태가 대중이라면, 대중들의 취향이나 목소리가 다를 것이고 문화의 향유 근거들도 다양할 것이다. 문화 생산과 유통을 틀어쥐고 문화의 방향을 잡아나가는 일부 입심좋은 기호제작소들의 논리란 독점의 논리이다. 그들에 의해 독점된 문화가 현실의 대중을 현혹하다보면 방향은 산업적 통계치와 단일의 문화적 포맷으로 잡혀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문화적 대중은 스펙타클에 끌려다니는 불특정 다수의 집합적 군상이 아니다. 이제 한국사회에도 자생적으로 그리고 주체적으로 문화를 생산하고 즐기는 마니아들과 소수문화집단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들에게 문화경제학은 억압의 조건들이다. 그래서 문화에 대한 계몽주의적 대중관, 일의적 문화정책, 대중산업적 지향은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상정되어야 한다. 주변화되지 않는 대안 이른바 ‘대안’(alternative)은 주류를 흠모하거나 대체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주류에 대당 관계로써 위치할 수 있는 힘도 없다. 대안은 현실의 주류와 맞먹는 ‘주류적 대안’이 목표도 아니며, 이미 ‘주류적 대안’이 되었을 때는 주류에 합류해 버리는 경향이 강하다. 대안이 대안 능력을 상실해버리면 ‘주변’이 된다. ‘주변’은 주류에 저항하기 보다 주류에 빌붙어 기생한다. 주변화되지 않는 대안은 주류의 장점을 익히나, 동일한 패턴과 규범에 따라 행동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대안은 주류화와 주변화라는 양 극단의 불안정한 위치에 놓인다. 물론 추상적 대안과 달리 현실적 대안의 조건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다. 보통 주류를 그리워하는 대안문화는 소수적 목소리를 주류에 편입시켜 버린다. 이로써 대안의 위치는 주류의 파장만을 유연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주류에 대항하여 대안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위로부터의 독점/시장 권력(potestas)을 소수 문화집단들의 힘(potentia)의 집합된 발현으로 극복하는 것. 이것은 일반화되고 보편화된 문화라고 알려진 권력의 담론에 대해, 다양한 공간에서 소수적 주체들의 목소리를 담아 권력의 정보에 충돌시키는 커뮤니케이션 행위에 가깝다. 신좌파 미디어운동가이자 철학자였던 펠릭스 가따리(F.Guattari)는 이같은 대안실험의 가능성을 ‘분자혁명’으로 표현한 적이 있다. 가따리는 권력에 맞서면서도 다양한 주변자들, 소수자를 중심으로 전자적 아고라(agora)를 구축함으로써, 개인들을 주류문화가 강압하는 ‘욕망 모델들’에서 해방시키고자 했다. 그가 보기에 자본주의는 단순히 과거 산업시대의 대규모 강제적 억압만으로는 이제 통제가 불충분하다. 단지 커다란 사회적 총체뿐만 아니라, 출생부터 자본주의적 욕망의 모델에 대중을 편입시키는 체제로 보았다. 이미 코드화 되어있는 의미작용(signification)에, 그어진 선(line) 안에 대중을 가두어두는 것을 문제시하였다. 그래서 그는 권력의 담론이 강요하는 그어진 선 밖에서, 성립된 주체를 벗어나, 그리고 초코드적 의미작용에 반발하여 ‘무수히 다양한 분자적 욕망’ 에너지를 해방시키길 바란다. 그는 단수적이고 소수적인 욕망들을 다양성으로, 유동성으로, 시공간적 가변성과 창조성으로 드러내는 대안문화가 가능함을 주시했던 것이다. 한편 소수자들의 대안문화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기는 하지만, 지배문화에 대한 사회·문화적 정의는 여전히 유보된 채 남게 된다. 저항의 과정과 자생성의 분출로는 지배/주류 문화에 대한 타격은 어림없다. 지배/주류에 대한 교란과 소음만 있을 뿐이다. 저항과 대안의 지배적 주류화가 빗나간 전략이라면, 지배/주류에 대한 전국적 수준의 저항과 대안은 각 단위들의 연대와 네트워크화로 가능하다. 단위적 저항과 전국적 저항의 투쟁과 쟁점 모두는 중요하다. 이를테면 소수문화집단들의 전국적 저항의 예로는 그 투쟁의 결과들을 국가 문화정책에 투과하는 방식이 있을 수 있다. 가따리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인습적인 형식과 장르 바깥에서 대안적 문화와 담론 양식을 지속적으로 제공함과 동시에, 이들의 연대를 통해 주류문화에 대한 도전과 이에 따른 정책적 입법화를 함께 도모해야 한다. 가따리가 문제시했던 단일화된 지배적 문화양식과 정책의 조건들은 아직도 살아 있다. 핵심적으로 변한 것은 대중의 환경이다. 인터넷의 보편화, 마니아들의 성장 등을 포함한 근본적인 사회·문화적 양식의 격변을 보여주는 징표들이 등장했다. 이러한 조건들은 시장/독점망에서 비어져 나오는 대안문화의 집합적 연대의 불꽃을 피우게 한다. 특히 네트는 기술적인 가능성과 함께 발·수신자 없는 발언의 가능성을 모두를 포괄한다는 점에서 ‘발언에 대한 독점’뿐만 아니라 ‘기술수단에 대한 독점’의 탈주에 공히 가능성을 높게 두고 있다. 예컨대 주류문화에 대한 기술적 저항으로 시민운동진영에서의 캠코더를 이용한 다큐멘터리 제작, 소수문화 운동가들의 커뮤니티 라디오, 웹진 등의 전자출판, 언더그라운드 밴드의 독립 CD 제작, 컴퓨터 해커들의 사회적 해킹, 가상공동체들의 사이버 결사와 집회, 멕시코 사빠띠스따의 정보게릴라전, 노동자들의 정보교육운동 등이 다각도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정치실험들은 지배적 약호에 대한 저항 뿐만 아니라 기술적 수단을 소수문화집단들이 적극적으로 자기가치화하는 사례로 평가되어야만 한다. 처음부터 기술적 독점에 대한 저항을 통해 지배적 수사에 대한 독점 자체를 차단하여 주류에 거역하는 자발적인 대안문화를 발현시키는 운동은 수사적, 기술적 저항 모두를 토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 저항의 형식 변화가 이루어진 데는 대안문화 형성에 있어서의 주체 변화가 이미 자리한다. 과거 한국사회에서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분출했던 문화투쟁은 노동자 문예운동을 필두로 하여, 비디오, 영화, 사진, 팩스, 판화, 벽화, 깃발 등의 다매체를 동원한 민예총과 대학서클, 예술가 집단 중심의 예술운동과 진보적 문화운동 등으로 표출되었다. 하지만 그 당시 대안문화 구성체들은 재정의 열악함, 대중 기반의 취약성, 그리고 일괴암적인 체제 이행의 지향성만을 내다보고 진보적 가치와 대중적 가치를 분리하여 사고함으로써, 대중적 가치에 편입되거나 급진적 가치만을 부르짖으면서 근근히 유지하거나 사라지는 수모를 겪었다. 거시적, 일방향적, 계몽적, 단선적인 위로부터의 문화운동관이 문제였던 것이다. 노동자를 포함한 대중들은 계몽의 대상이었지 문화생산의 주체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리고 조직적 대의에 소수의 목소리를 스스로 감춰야 했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혁명과 변혁을 얘기하지도 않으며, 그같은 감성과 대의에 호소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정세는 과거에 비해 한결 나아졌다. 사회화된 권력의 파장이 엄청날수록 물러날 곳 없는 문화 주체들의 갈등과 꿈틀거림이 격해지고 도도해지기 때문이다. 주류문화에 억압된 ‘욕망’을 탈주하려는 수많은 소수문화들이 자생하며 버팅긴다. 노동자를 포함한 학생, 여성, 동성애자, 빈민, 양아치, 삐끼, 청소년, 게임돌이, 소수 마니아 등등. 이들은 자신만의 문화적 포물선을 그리면서 주류의 지형에 흠집을 내고, 그 그어진 경계를 지워버린다. 주류에 대한 저항함수로서 소수문화 앞으로 지배적 문화는 소수집단들의 문화를 수용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 반대로 이들 소수문화들은 주류문화의 물신들을 골고루 먹어치운다. 일본의 닌텐도세대인 ‘오타쿠’처럼, 이들은 문화소비자이자 생산자이다. 주류를 먹고 사는 대안적 문화 형성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주류문화를 즐기다 주류에 포섭되는 경우를 쉬 볼 수 있다. 그러나 쉼없이 팽창하는 단수적 문화 행위자들은 기업문화의 폭격에 맞서 여기저기 참호를 구축하며, 문화 생산/소비자 관계 구조의 대안적이고 모범적 모델을 제공하고 있다. 이젠 다르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다르게 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경제적 논리에 문화적 가치가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도, 주류에 억압받는 소수 집단들의 욕망분출의 통로를 마련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작업이다. 결국 주변화하지 않는 대안문화의 구성여부는 소수집단들의 주류에 대한 저항함수로 보아야 하며, 수많은 욕망들을 생산하고 결집하는 데 달려 있다. [중앙대대학원 신문, 200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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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대학원신문] 뉴미디어, 문화와 하이테크의 결합

[문화기획] 미디어로 사회읽기- ④뉴미디어, 문화와 하이테크의 결합 아날로그 권력체계에 흠집내는 디지털세대의 테크노문화 실험 이광석 지난 몇 년 전에 우리에겐 ‘X세대’, ‘신세대’라는 미확인세대의 유행어가 풍미한 적이 있다. 아직까지도 상품광고에서 줄곧 써먹는 이 정체불명 세대 지칭의 정확한 경계선은 없다. 이와 같은 용어의 발원지에는 저 바다 건너 미국적 전통이 놓여 있다. 미국에서 비롯된 새로운 세대의 명칭은 다양하다. ‘X세대’를 포함하여, ‘영상세대’, ‘닌텐도세대’, ‘비디오세대’ 등등의 새로운 조합어들이 창궐한다. 그에 대칭하는 기성세대는 베트남전 이후의 ‘베이비붐 세대’로 뭉뚱그려진다. 말하자면 영상문화와 더불어 사고하고, 길들여지고, 생활하는 세대가 바로 새로운 하이테크의 세대이다. ‘베이비붐 세대’는 반전운동 등을 통해 알려진 히피적 전통을 지닌 세대다. 전후 히피세대는 노자의 도가에 심취하고, 점성술에 의지하고, 피부문신과 LSD를 즐기며, 권위와 자본주의 기계를 경멸한다. 물론 아버지와 아들간에 유전자 요인이 승계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영상세대 또한 아버지세대의 모습을 닮고 있다. 일종의 문화적 유전자(밈, meme)를 담지하는 것이다. 하이테크 문화평론가인 마크 더리(M. Dery)에 따르면, 6~70년대 사이키델릭(psychedelic) 문화와 90년대 사이버델릭(cyberdelic) 문화를 구분하는 가장 큰 준거틀로 테크놀로지의 수용 여부를 들고 있다. 요컨대, 현대의 새로운 세대는 테크놀로지와 80년대 대항문화의 새로운 통합을 의미하는 반면, 60년대 대항문화는 촌스럽고 낭만적이며, 반과학적이고 반기술적이다. 이들 영상세대는 정보화사회의 그늘에서 태어나, 세기말의 정신적 혼돈이라는 토양에서 자라나는 문화라는 의미에서, 보다 미디어 친화적이다. 그들은 60년대 이후의 히피적유산을 계승하고 있지만, 히피들보다는 훨씬 복합적이고 심화된 기술의 대항문화적 통찰력을 지닌 집단이다. 90년대 사이버델릭 문화와 닌텐도세대 이 새로운 닌텐도세대는 기성의 제도와 권위를 부정한다. 그들의 차별성은 기술과 영상을 즐긴다는 데 있다. 국내에도 한 때 일본에서 유행한 ‘다마고치’게임이 히트한 적이 있었다. 스크린 안에 새, 물고기 등을 키우고, 번식시키고, 어떻게 하면 빨리 죽일 수 있는가를 즐기는 초등학생들, 우주전쟁과 국지전을 순수한 디지털전쟁의 유희 속에서 즐기는 세대가 바로 닌텐도세대인 것이다. 위험스러운 사실은 문화란 현상이 ‘삶의 방식’이라면, 삶이란 구체적 현실에 도사린 구조적 변인들이 너무 크게 작용한다는 점이다. 이전에 볼 수 없었을 정도로 전세계 자본의 ‘창조적 파괴’가 진행되고 있다. 특히 초국적 미디어기업들은 이미 상업 전략과 테크노문화를 결합시키고 있다. 소비문화가 80년대의 가장 특징적 현상이자 자본시장의 텃밭이었다면, 이제 90년대 이래로 21세기의 자본문화전략은 테크노상품에 근거한 문화전략이 된다. 뉴욕대 교수인 앤드류 로스(Andrew Ross)에 따르면, 이러한 변화는 “강건한 신세계의 지속적인 기초를 제공하는 테크노문화와 자본의 불경스런 결혼”에 이른다. 소위 ‘디지털계급’ 혹은 ‘가상계급’에 의해 구상되고, 짜여진 새로운 판(version)이 테크노문화의 상스러운 얼굴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과거 소비시장의 아날로그 상품들을 그야말로 부드럽게 하고(softening), 디지털화한(digitizing) 상품으로 재생산하여, 새로운 시장에 그럴듯하게 패키지로 포장하여 전시하는 일이다. 예컨대, 상품문화의 테크노적인 혼합은 통칭하여 ‘사이버펑크 토탈패션’이란 미명하에 등장한다. 사이버펑크와 테크노아나키즘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우리는, 관객이 컨베이어벨트를 통과하는 쇼를 관람하듯, 테크노문화를 소비하는 디지털 관음증에 시달릴 수도 있다. 샌디에고의 노교수 허버트 실러(Herbert Schiller)는 이러한 미디어 전략을 ‘토탈 혹은 원스톱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명명했다. 즉 개념화 단계에서 최종 생산, 배달 단계에 이르기까지 그저 미디어자본이 만든 메시지와 이미지를 소비하고, 디지털계급들이 만들어내는 스펙터클을 그저 숨어서 지켜보는 주체들만을 양산한다고 말한다. 물론 기성세대의 아날로그적 관성과 중독증은 디지털 소비문화에 이르면, 한차원 더하여 순응적이고 나약한 모습으로 허우적 거린다. 하지만 디지털문화를 소비하는 다양한 하위집단들 중에는 디지털 자본 환경에 도저히 훈련시키기 어려운 ‘지하의’천덕꾸러기들도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가장 도전적인 그룹은 아나키의 자유분망함과 디지털 정보의 공유를 꿈꾸는 새로운 세대들, 이른바 ‘해커’(hacker) 혹은 문화적 의미로는 ‘사이버펑크’(cyberpunk)라고 불리는 유대인의 하이테크 자손들이 존재한다. 사이버펑크는 사이버(cyber)에서 발생하는 하이테크 하위문화와, 펑크(punk)에서 유발되는 밑바닥 거리문화의 결합물이다. 다시 말해 사이버펑크는 도시 거리문화에 뿌리를 둔 공격적이고 반권위주의적인 펑크적 감수성에, 기술과 인간 사이가 해체될 고도의 테크놀로지 미래를 결합하고 있다. 한편 기술적인 인물보통명사로서 사이버펑크는 ‘해커’의 문화적 대체어이다. 즉 히피의 테크노변종이 해커이자 사이버펑크이다. 사이버펑크는 테크놀로지의 세례를 받았으나, 기술적 미래의 부정적 잠재력과 긍정적 잠재력 모두를 강조한다. 사이버펑크는 컴퓨터를 해방적 추동력과 억압적 장치의 성격 모두를 지닌 야누스적 기계로 간주한다. 작년에 FBI의 끈질긴 수사망에도 18년 동안 굳건히 우편폭탄을 실어나르다 붙잡힘으로써 유나바머(Unabomber)의 반문명주의는 막을 내렸다. 테크노문화에 대한 비적응의 극단적 전형이자, 자본주의의 물질문명에 대한 기성세대의 분노를 표출했던 인물로써 보자면, 조금은 측은한 희생자였다. 어쨌거나 현실에는 이런 구식 러다이트의 빗나간 발악보다는, 해커 혹은 사이버펑크의 문화정치가 그 대중적인 세련됨을 돗보인다. 해커 사회에서 정보와 컴퓨터는 곧 권위의 기반이다. 해커들은 컴퓨터를 사용하여, 예컨대 패스워드 파괴, 트랩도어(trap doors), 트로이목마(Trojan Horse) 등의 기술을 개발하고 전수한다. 그들이 보여주는 것은 권위에 대한 기술적 도전이자, 테크노아나키즘의 실현이다. 해커들 대부분은 해킹을 게임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열광적인 SF 소설의 독자들이다. 그들에게는 해킹의 게임과 사이버펑크 소설이 사회적 실천의 의미와 뒤섞여 있다. 디지털자본가들에게 이들은 골치아픈 존재이다. 디지털 저작권, 보안 등 상품화될 가치들이 있는 것들의 웬만한 것들은 하드웨어, 소프트웨어를 막론하고, 모두 다 변형시키고 풀어헤친다. 닌텐도세대의 자유로움이 현실적인 이윤논리를 부담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그들은 네트를 방랑하고, 얘기를 나누고, 미지의 것을 탐험하고, 놀길 원한다. 자기만의 영상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고, 공유하는 행위가 그들이 지닌 원칙이다. 독식, 독점, 권위, 논리, 이성보다는 공유, 자유, 개방, 감성이 그 우위에 선다. 분명한 사실은 이들 네트세대가 인터넷이나 영상을 통해 접하는 가공된 현실이란, 그들 자신의 삶이자 현실이란 점이다. 이들에게 영상은 삶의 경험과 기준이다. 텍스트에 친숙한 부모세대는 네트를 두려워한다. 부모세대는 네트를 수렁으로 보며, 자신의 자식들이 그 수렁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지 못한 과거의 세대는 자신의 두려움을 자식에게 전가한다. 통신모뎀을 빼앗고, 심한 경우엔 컴퓨터 자체를 못쓰게 만든다.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디지털상품의 광고주들도 기성 세대에 대한 급진적인 설득 작업을 펼 수밖에 없다. 그 유명한 최불암이 컴퓨터 광고에 나섰다. 최불암은 컴퓨터에 빠져 정신을 못차리고, 자식은 졸린 눈으로 아버지인 최불암에게 안자느냐고 짜증스럽게 묻는다. 이에 대한 최불암의 응답, “너나 먼저 자, 임마”. 이 배꼽잡는 말은 자식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오히려 기성권위에 대한 도전장이다. 부모들이여, 아이들에게서 컴퓨터를 빼앗지 말라! 당신도 최불암 정도로 컴퓨터에 빠질 수 있다. 두려움은 버려라. 아이들은 수렁에 빠진 것이 아니라, 영상과 네트가 그들의 삶일 뿐이라고 부르짓는 것이다. 새로운 네트세대의 무질서 속에서도, 그들에게 내려오는 하위문화적 원칙은 있다. 컴퓨터 접근권을 완전하게 보장하라, 정보를 무조건적으로 공개하라, 모든 권력을 분권화하라, 디지털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라, 권력과 투쟁하라, 권력 체계에 소음(noise)을 되먹임(feedback)하라,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라(DiY), 극단의 스릴을 즐겨라(surf the edge). 이들의 강령은 크게 보면 두 부분이다. 정보의 자유와 권력의 해체. 그들을 하위문화로 보는 근거는 결국 디지털 정보 독점에 대한 저항과 자유로운 유통의 정신이다. 물리적으로 굳게 잠겨있는 모든 통제권과 이로부터 나오는 약호의 일방성과 규제를 거부하고 공개하려는 것은 신선한 정치 프로젝트가 될 수 있다. 문제라면 이들이 경제적 지위나 신분에 구속받지 않으면서, 단지 정보의 활용 능력에 의해 이합집산한다는 점에서, 과연 대항문화적 주체가 될 수 있는지는 미지수다. 대항문화 주체를 향하여 사실 21세기는 기성 권위의 힘으로 미래를 헤쳐나가기에는 밑천이 부족하다. 개인의 창조성과 실험성이 미래 준비의 자산이 된다. 여기서 테크노문화 세대의 자기 스스로의 개성과 자유를 발산하는 방식은 매우 중요해진다. 빠르게 적응하고, 혼란스러우나 스스로의 동일성을 찾아내며,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그들의 행동 양식이 장점이 된다. 특히나 대안적 미디어 전략과 관련하여 거대 자본에 의한 첨단장비에 밀리고 있는 실정을 고려한다면, 그들의 테크노문화 실험은 하위문화에 힘을 실어줄 수 있다. 그들은 최선의 문화정치적 비전을 산출해내는데, 충분조건은 아니더라도 필요조건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들의 자유스러움이 앞서 우려한대로 개인 중심의 말초적 디지털 ‘몽환’(hallucination)으로 빠질 수도 있다. 또한 그들의 개성과 자유가 디지털기업이 이끄는 스타일 정치문화의 미끼로 이용될 수도 있다. 신세대 욕망을 자극한 상품의 미끼라는 유혹이 도사릴 수 있는 것이다. 자본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별짓는 그들의 영역화의 작업은 그래서 중요하다. 한편에서는 문화정치학의 새로운 정초와,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문화 실험의 사례들의 발굴 작업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요컨대, 문화의 집단적 표현 형식의 새로운 징후를 읽어내어 이론화하는 것과 테크노문화적 실천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 테크노 시대의 문화집단에 대한 지형짜기와 그 집합적 실천의 모색, 이것이 21세기 문화정치의 화두이자 출발이다. [중앙대 대학원 신문 111호] (200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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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해운사보] N세대의 문화 양식과 서바이벌 게임

N세대의 문화 양식과 서바이벌 게임 X, Y, Z 그리고 N 세대 X, Y, Z, N이 뭐냐고? 9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신세대 명명법이다. 대문자 알파벳도 모자라 1318과 386세대처럼 숫자로 그 세대를 가리키는 방식도 등장한다. 여기에선 386을 제외하곤 나머지 모두는 서로 친화력을 지닌 세대들이다. 우 리에게 'X세대'는 '서태지 신드롬'의 촉매로 93,4년에 풍미했던 10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연령층이다. 기성세대 입장에서 보면 X파일처럼 명확히 정의되지도 않고 이해할 수도 없는 세대가 X세대였다. 서열상 X의 동생은 Y다. 작년부터 종종 지상에서 접하곤 하는 'Y세대'는 13∼20살까지 분포해 있다. 평균 나이로 봐선 X보다 Y가 더 어리다. X와 Y의 정서적 공통점은 '새로움', '기성권위에 대한 도전', '반항', '자유', '개성', '감각주의' 등이다. 이들은 컴퓨터와 정보화에 강하고, 패션과 소비에 적극적이며, 개인적 가치를 최고의 자리에 놓는다. 이들 형제간의 차이라면, X가 소수의 아웃사이더 특징을 부각한 반면 Y는 다수의 세대 흐름을 강조하고 있다. 2천년(Y2K)에 주역이 된다는 의미에서 강조된 Y세대는 시기상으로 X세대 논의 이후에 등장한 다수의 신세대이다. 'Z세대'는 1318세대이다. 연령대로는 X와 Y세대에 비해 가장 어리다. 알파벳의 가장 끝자리를 택한 것도 그 이유에서 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N인가? 'N세대'는 네트워크 세대이다. X, Y, Z 삼형제의 가장 특징적인 속성이 N에서 수렴되기 때문이다. 미국식으로 따지면, N세대는 70년대말 이후 태어난 2∼22세까지의 전후 '베이비붐 세대'의 2세들이다. 이 들은 X, Y, Z 삼형제의 공통된 감성과 문화를 그대로 간직하며, 특히 이들에게 컴퓨터와 인터넷은 삶의 필수 조건이다. 이것과 더불어 사고하고, 길들여지고, 생활하는 세대가 N세대이다. N이 3형제와 다른 차별성은 디지털 기술과 영상을 즐기는 세대임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이들에겐 이미 요람에서부터 즐겨온 영상, 인터넷, 게임 등이 삶의 필수 요소들이다. N세대는 네트를 통해 독식, 독점, 권위, 논리, 이성보다는 공유, 자유, 개방, 감성을 터득해 나간다. N세대의 '진짜' 무서운 아이들 얼 마전만 해도 이루어질 수 없는 새로운 현상이 이 새로운 세대들에게서 목격된다. 송파 여중생들이 8미리 캠코더로 찍은 '너희가 중딩을 아느냐'란 다큐 영화가 연일 화제에 오르고, <밥>이란 순수하게 청소년들이 만든 무가지와 웹진 <채널 10>이 또래들 사이에서 선풍적 인기를 누리는 등 과거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할 특징적 N세대 문화들이 만개하고 있다. 영상과 인터넷에 친숙한 새로운 세대들은 이같은 소수 문화 형성의 가장 전위에 서있다. 문화 향유와 메시지 생산의 주인으로 이제 나이 어린 청소년이나 신세대가 적극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앞에서 끝으로 이어지는 맥락은 별로다. 그래서 장황하고 지리한 전후 맥락은 좀을 쑤시게 한다. 그림 하나 없는 두툼한 이론서는 그들에게 지옥이나 다름없다. 만화책을 보라. 그들이 만화를 볼 때면 수십권의 책을 쌓아놓고 순식간에 눈을 굴린다. 연배가 적을수록 책읽는 속도는 빨라진다. 이미 그들에겐 영상과 도상(Icons)이 습관화되고, 훨씬 편하다. 고정되어 있는 그림보다는 움직이는 동영상, 평면보다는 3D가, 넓은 길보다는 미로같은 길을 따른다. 아이들은 어른보다 적응력이 강하며, 빠르게 배워나간다. 특히 컴퓨터에서는 더욱 그렇다. 네트는 전후 맥락을 무시한다. 예컨대 하이퍼-링크 기능이 그것이다. 이리저리 네트를 통해 넘나들며, 네트의 속성상 그들은 잠시도 어디에 가만히 있을 수 없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새로운 세계를 접한다. 인터넷의 홈페이지도 그 무한한 개성의 표현 방식이다. 영상과 이미지로 자신의 개성을 한껏 홈페이지에 각인한다. 채팅과 게시판에는 새로운 언어형식이 등장한다. '한글맞춤법표준'은 그들에게 권위일 뿐이다. 바로 그들이 새로운 언어의 조합과 통신예절을 스스로 창조하는 것이다. 기성세대는 청소년 또래집단의 대화내용을 이해하지 못한다. 인터넷의 기술적 특성은 새로운 세대들에게 가장 적합하다. 스스로의 차이를 드러낼 수 있는 최적의 기회를 디지털이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에서도 이들 새로운 세대는 개성을 표현하기 위해 헐렁한 바지를 찢어 질질 끌고 다니거나, 머리를 컬러로 물들이고, 부두교를 연상케하는 장식물과 피어싱(피부뚫기)으로 신체를 치장한다. 일본의 신주꾸 거리를 연상할 정도로 그들의 패션은 원색적이다. 기성세대가 보기에 N세대는 진짜 무서운 아이들이다. 신세대 스스로가 '어른들은 몰라요'를 항변하던 수세기가 가고, 이제는 그들이 미래이자 주인공의 자리로 발탁된다. 21세기는 기성 권위의 힘으로 미래를 헤쳐나가기에는 밑천이 부족하다. 기성세대는 걸림돌이다. 개인의 창조성과 실험성이 N세대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미래에는 N세대가 지닌 개성과 자유를 발산하는 방식이 중요해진다. 빠르게 적응하고, 혼란스러우나 스스로의 동일성을 찾아내며,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그들만의 문화가 부각되는 것이다. N세대의 아슬아슬한 생존 조건 최 근 주요 신문사마다 인터넷 생존 게임을 경쟁적으로 벌이고 있다. 사실 이 서바이벌 게임은 알고보면 물리적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한 채, 정해진 시간과 한도액을 가지고서 오로지 인터넷이란 수단을 통해 버티는 미련스런 게임이다. 이 게임의 참여자들은 가상의 네트워크를 통해 떠돌아다닐 순 있어도, 실지 옷가지와 음식, 그리고 여타의 필수품들을 외부에서 일차로 조달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게임 주최측은 참여자들이 외부 접촉없이 정해진 공간 안에서 게임 시간을 초과하여 장기간 머무를 때 생기는 정신적인 스트레스 상황은 고려에 넣고 있지 않다. 어쨌거나 주최측의 의도가 인간에 대한 네트의 무한하고 풍부한 가능성을 계산하고 이벤트를 만들었다 하더라도, 역으로 이 게임은 결국 인간의 생존 조건이 물질 공간에서 주어질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 워쇼스키 형제가 만든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진정 인간 정신의 세계가 하나의 가상 영역을 만들어낸다. 무중력의 집합적 공동심리가 펼쳐지는 전자장이 펼쳐진다. 가상에서의 식사, 의복, 사랑 등 모든 영역이 진짜인 것처럼 느껴지는 세계를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상의 정신 세계 밖에는 기계가 만든 자궁 안에서 인간 자신을 갈아서 만든 양수로 연명하는 자신의 육체가 전제된다. 이처럼 네트의 가상성이 부각될수록 점점 더 현실의 조건과 밀접히 연결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본다면 N세대의 자유분방함이 제대로 된 생존 조건을 찾는 방법은 일차적으로 현실 삶의 결에 달려 있다. 단지 기계의 인터페이스를 통해 소통하는 삶의 조건만이 N세대의 생활 근거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기성세대의 역할은 중요하다. N세대를 둘러싼 물리적 현실의 질과 결을 규정하는 것이 부모세대인 것이다. 가상과 네트로의 도피가 자라나는 세대를 지극히 무익한 욕망 배설의 말초적 관심사로 빠뜨릴 수도 있다. 이 상황은 기성세대로 하여금 자라나는 신세대의 개성과 자유를 우선 현실 안에서 뿌리내리게 할 의무를 갖도록 한다. 또한 그들의 개성과 자유가 기업의 현금화 관심과 맞물릴 수 있는 소지가 다분히 있다. N세대의 욕망을 자극한 디지털 상품의 미끼라는 유혹이 도사릴 수 있는 것이다. 이미 그들은 거대하고 매혹적인 떠오르는 구매층이 되어버렸다. 예로부터 인구통계학적으로 보면, 젊은 구매자층은 여타 세대에 영향을 미치는 주된 견본 시장 역할을 떠맡았다. 이른바 '청년 숭배 혹은 물신'(Jugendfetisch)은 여타 세대에게 영향을 미치는 신세대 중심의 상업화 논리를 극대화한 지칭용어이다. 이처럼 N세대에 대한 끊임없는 표적 작업과 유혹은 자유롭게 욕구를 해소할 수 있는 가능성의 영역을 차단하고, 기업의 끝없는 이윤욕의 사슬로 그들을 얽어맬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 또한 N세대에 드리워진 미래의 우울한 '그림자'이다. N세대의 생존 조건은 결국 현실에서의 삶의 조건에 위태로이 매달려 있다. 하지만 여러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럴수록 N세대의 가능성은 더욱 풍부하게 공존한다. 최근 국내에도 번역되어 발간된 {N세대의 무서운 아이들}이란 책에서, 돈 탭스콧(D. Tapscott)은 N세대의 긍정적 가치를 설득력있게 서술하고 있다. 그는 기성세대가 지닌 N세대에 대한 우려, 예를 들어 컴퓨터 중독증과 개인주의 성향 등을 기우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N세대는 기성세대와 달리 네트에 상주하는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들은 자연스레 네트를 통해 또래 집단과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사회성과 공동체 의식을 키운다. 받아들여야할 사실은 이들 네트세대가 인터넷이나 영상을 통해 접하는 가공된 현실이란 그들 자신의 삶이자 현실이란 점이다. 그들의 문화 양식 자체가 과거 세대와 달라진 것이다. N세대에게 가상 안에서의 유랑은 현실과 마찬가지로 농축된 삶의 경험이자 바탕이 된다. 그러나 물질 세계의 텍스트에 친숙한 부모세대는 네트를 두려워한다. 부모세대는 네트를 수렁으로 보며, 자신의 자식들이 그 수렁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지 못한 과거의 세대들은 자신의 두려움을 자식에게 전가한다. 통신모뎀을 빼앗고, 심한 경우엔 컴퓨터 자체를 못쓰게 만든다. 탭스콧의 말대로 앞으로 세상의 모든 변화를 N세대가 주도한다면, 기성세대는 새로운 세대에 대한 이해의 폭을 늘릴 필요가 있다. 물론 어느 한 세대의 월권은 자칫 파국에 이를 수도 있다. 정보화 신세대에 대한 기성세대의 억압은 가능성의 영역을 차단하고, 기성세대에 대한 N세대의 완전 부정은 대안없는 일탈로 내달을 수 있다. 기성세대의 이성 능력과 신세대의 자유적 발상이 적절히 어우러질 때만이 N세대의 미래적 가치가 밝을 수 있는 것이다. 이광석<뉴미디어 평론가> <한진해운사보> 9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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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 교지 <고황>] 인터넷 경제학' 비판 시론

인터넷 경제학' 비판 시론 경희대 교지<고황> 99년 여름호) 1. 네트의 '그늘' 밟기 우리나라 벤처기업이 피부로 겪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 겪어야만 하는 현실을, 한 벤처기업가 사장의 말을 빌려 들어보자. "좋은 기술 만들어 인수/합병당하고, 다른 기술 개발해 또 합병당하고 하는 것이 돈과 명예를 한꺼번에 얻는 최상의 성공입니다. 한가지 기술로 자자손손 경영할 회사 만들 생각 말아요."(한겨레신문 5월 24일자) 신지식인 경제 혹은 디지털 경제를 주창하며, '제 2의 건국'을 외치는 현재의 분위기와는 아주 딴판의 주장이다. '포지티브 썸'(positive sum)의 새로운 경제 논리를 달달 외는 디지털 전도사(guru)들이 들으면 찔려하는 구석일 수도 있다. 현재 이같은 현실 경제의 '그늘'은 압도적인 '빛'의 논리에 의해 거의 들춰지지 못하고 있다. 이미 새로운 사회에 대한 낙관론이 지배적이며, 무형의 디지털과 이를 빛으로 속도로 연결하는 네트의 우파 경제학이 우리의 사고를 잠식해가고 있다. 물론 나는 변화하는 사회에 대한 단순 낙관론이나 부정론을 경계하면서, 현재 도래하는 '빛'의 논리를 일부 긍정한다. 같은 맥락에서 현재 침체일로에 놓인 정치경제학이 재생하고 부활하는 길은, 사회 이행의 지표들을 적극적으로 사고하면서도 그 근본적 모순의 연속적 고리들을 밝혀내고 단절하려는 노력들이 부단히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까스텔(M. Castells)이 내논 자본주의 '발전양식'으로서의 '정보양식' 개념 등은 그 의의가 크다. 그의 논의는 다름아닌 좌파 내부에 정보혁명과 맞물린 자본주의 경제 이행과 파장에 대한 적극적 사고의 요청이다. 그가 보기에 구체적 현실에 대한 무기력의 심연은 보드리야르가 80년대 이후에 실천 전략으로 삼았던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inertia)의 나락일 뿐이다. 새 것에 이끌려 모든 것을 청산한 채 새로운 밀레니움의 선각자입네 하는 천박한 자들이 꼴불견이라 치더라도, 현실 변화에 너무나도 둔감한 채 전통의 잣대만을 들이대는 골통들의 의식이 더욱 전망을 어둡게 한다는 사실이다. 이제 새로운 현실과 관련한 진단과 처방에 긴요한 것은 낙관이냐 비관이냐라는 주관적 전망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 현실에 대한 모순과 발전의 변증법적 긴장을 긴 호흡으로 잡아내는 작업일 것이다. 이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 글은 최근 신(新)경제, 네트워크경제, 정보경제 등으로 회자되는 새로운 경제관의 주체들과 그들의 핵심 주장, 그리고 그들의 전자공간에 대한 우파적 전망을 살펴보고, 이를 거슬러 네트의 사회적 성격을 담을 수 있는 새로운 전망을 찾아보려 한다. 2. 빈곤과 수확 체감의 불안증 네트 시대의 시장 원리와 관련하여 신경제 이론가들과 디지털 계급의 경전인 [와이어드Wired]는 새로운 경제 신화의 근원지를 제공하고 있다. 이 잡지는 시장의 비예측적이고 결점으로 가득한 메커니즘을 생물학, 전염병학, 유기체론, 생태학, 비선형 물리학, 진화 경제학, 카오스 이론 등의 외피들로 단단히 감싼다. 그럼으로써 이들은 자본주의적 시장의 비예측적이고 모순적인 속성 그 자체가 장점이자 네트워크 경제의 법칙인양 추켜세운다. 또 다른 우파 경제학의 산실, 산타페 연구소의 신경제 이론가인 브라이언 아써(W. Brian Arthur)의 그 유명한 논문, [수확 체증과 비즈니스의 신세계](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1996.)에 의거하면, 네트 효과는 산업시대의 '수확 체감'(decreasing returns)의 경제 원리를 물리치고, '수확 체증'(increasing returns)의 새로운 세계로 접어들게 만든 주요인이다. 달리 말해 산업시대의 희소성의 원칙이 네트워크 경제에 이르면 '마찰없는'(friction-free) 풍요의 법칙으로 대체된다. 자유주의 경제학자, 알프레드 마샬(Alfred Marshall)이 보는 수확 체감이란 시장내 우위의 상품 혹은 기업이 종국에는 한계에 봉착하는 세계이다. 그 이유는 상품의 가격과 시장 점유에 있어서 예측 가능한 균형상태(equilibrium)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이 때의 시장 특성은 완전경쟁 시장, 시장의 예측 가능성, 균형/질서, 과학적 분석, 안정성 등이다. 한편 시장은 변화에 더디고 지속적이며 그 수확이 적다. 그래서 소비자의 수, 지역적 수요, 원재료 접근, 시장 등의 매점이 더 이상 불가능한 시장 한계를 지닌다. 그러나 네트 경제에서는 구시절의 경제 논리는 종결된다. 풍요와 수확 체증의 신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와이어드]지의 편집장, 케빈 켈리(Kevin Kelly)는 {신경제의 새로운 법칙들}(1998)이란 책을 통해서, 이를 뒷받침하는 두 가지 근거를 들고 있다. 우선 비트 혹은 디지털의 무한한 복제 능력으로 말미암아, 한계비용이 점차적으로 위축되고 상품의 희소성이 복제 능력에 압도당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네트워크의 노드(nodes) 숫자가 산술적으로 증가하나, 네트워크의 가치는 지수적(exponential)으로 폭발한다는 주장이다. 수확 체증의 세계에서는 네가티브(-)가 아닌 포지티브(+) 피드백의 메커니즘이 지배하며, 그 특성으로 시장 불안정성, 비예측성을 장기로 삼는다. 신경제의 이러한 특성들은 실지 자본주의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서 출발한다. 이같은 모든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과거 좌파들에게 맹렬히 비판받던 시장 기제 등의 모순을 자신의 장점으로 흡수하려는 신경제학의 논리란 마치 스스로의 미천한 부르주아 경제학에 여타 이론들을 혼종교배하려 애쓰는 모습에 다름아니라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애초에 산업 시대의 풍요가 경제이론가들에게 강심장을 낳았다면, 신경제적 특성에 대한 강조는 점점 더 압박해 들어오는 자본주의 경제에 대해서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두려움의 표출이자 편집증적 해결이다. 하지만 신경제론자들이 파괴와 생성의 힘인 인도의 신, 시바(Siva)를 추종하여 자본주의의 불안정성과 비예측성을 논한다면 더 이상 논구할 대상이 못된다. 한편 수확 체증의 혜택은 지속적으로 포지티브한 승자들의 세계에서만 이루어진다. 이끄는 글에서도 한 벤처기업 사장의 말을 빌렸듯이, 시장은 수많은 다수의 약자들에게 어떠한 혜택도 돌아가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수확체증은 강자들만이 점유하는 독식의 패권 논리다. 네트워크 경제의 기본 원리로 규모와 범위의 경제가 아직도 지배적인 한 새로움은 어디에도 없다. 결국 신경제론자들에게 네트의 경제적 가치는 실물 경제와 무관하게 주로 추상적 수준에서의 여타 잡종이론 포획의 지수 논리로 낙후한다. 3. 관용과 그 가상의 앙상블 미래 낙관론자들이 보기에 신경제는 공짜와 헐값의 관용으로 찬란한 '풍요의 시대'로 기록된다고 믿는다. 그들이 보는 풍요의 기제는 무엇일까? 그들은 새로운 시대의 두 가지 법칙을 꼽는다. 하나는 마이크로코즘의 혁명인 '무어(G. Moore)의 법칙'이고, 다른 하나는 매크로코즘의 혁명인 '길더(G. Gilder)의 법칙'이다. 전자가 마이크로 칩을 염두에 뒀다면, 후자는 네트의 폭발적 힘을 과대평가 한다. 하이테크 이론가들은 이 두 법칙이 가격 형성에 있어 '逆가격'(Inverse Prices)을 발생시킨다고 본다. 그러나 단지 기술적 혜택만으로 이러한 상황이 도래할 수 있는가? 냉혈한 자본에 어떻게 이같은 아름다운 '공짜'의 미덕이 순간적으로 발기할 수 있을까? 초국적기업들의 소프트웨어 개발비만 해도 천문학적 단위가 투여되는 현실에서, 앞서 두 법칙만으로는 '공짜'란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자본의 입장에서 볼 때, 옛 공장 형님이나 지금이나 그 '이윤'에 대한 헌신이 끈끈하게 맺어져 있는 상황에서. [와이어드]지 98년 3∼5월에 연재된 {신경제 용어사전}을 보면, A항목에 신경제의 핵심 용어로 'Attention Economy'란 개념이 등장한다. 그 번역은 '시선집중 경제'쯤 될까 싶은데, 이는 새로운 상황에서의 미디어 조건, 즉 소비자와의 상호작용성에 따른 시각적 잔상의 논리에 주목한다. 또 다른 연관 단어, 구시대 마케팅의 사활이었던 '시장 지분'(Market Share)에 대비되는 '정신 지분'(Mind Share). 시선을 집중하는 경제는 당연히 가시적인 점유율 뿐만 아니라 마인드의 지분이 중요해진다는 것이다. 아써의 또 다른 제언. 기업은 초기 점유율 확보(installed base)를 위해 엄청나게 할인하고, 능력만 된다면 공짜로라도 뿌려라. 그가 보기에 이같은 자본주의적 관용은 부수/2차 이익의 확보를 가능케 한다. 예컨대, 마이크로소프트(MS)사와 넷스케이프사의 웹 브라우저, 퀄컴의 메일 프로그램 유도라, 맥아피의 바이러스 퇴치용 소프트웨어, 썬의 자바 언어 등은 푸근한 관용과 공짜의 선례들이다. 풍요의 상품 세계에서 자사 상품의 덕목을 부각시키는 법은 '공짜'를 통해 사람의 주의를 끄는 것이다. 한 생산물이 공짜라면, 대개 이를 제공한 회사와 연계된 서비스 상품들은 마인드 확보에 성공한다. 네트 경제하에서 가치 창출이 이루어지기 위한 전제로 도입되는 이러한 '선물 경제'(gift economy)의 부활은 허구일 뿐이다. 하우크(Wolfgang F. Haug)식으로 얘기하자면, 신흥 자본가들의 이같은 행위는 대중에게 '무관심성의 가상'을 연출한다. 즉 자본의 이윤 논리의 '현금화 관심'을 무관심성인 양 유혹하고 선전하는 행위로 위장한다. 그 궁극적 지향은 '선물 광고' 형식의 맛보기를 통해 구매 충동을 끌어올리거나, 소비자 욕망의 미세한 마인드를 중독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과거의 물리적이고 인구통계학적인 시장 분할식 마케팅 전략이 확장되어 마인드 점유에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은 신경제의 소비자 포지셔닝 강도가 더 세졌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한번 하우크의 용어로 돌아가면, 항상 공짜와 헐값의 배후에는 한 기업이 보유하는 시장력 증대의 종합적/총체적/복합적 연출로서의 '현상형상'(Erscheinungsbild)이 자리잡고 있음을 간파해야만 한다. 4. 독점이여, 영원하라! 브라이언 아써는 자본이 시대적 불확실성을 타개하는 방식은 카지노 도박의 스타일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미래 예측력이 화투장을 교묘하게 놀리는 숙련된 자본꾼들의 손끝에 있다는 소리다. 모두 다 '주윤발'이 되라는 소리인데, 그는 이것이 자본 경쟁의 스타일이고 일종의 '방향 감각'이라 칭한다. 심리적 도박판에서 게임의 분별력을 소유한 빌 게이츠는 그래서 선각자다. 아이러니하게도 대체로 이러한 논리가 첨단을 달리는 하이테크 산업내 경쟁에서 승리하는 비법으로 격상된다. 지식 경제에서는 승자가 모두 것을 차지하는 사활의 경쟁이며, 차기 기술의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선각의 마술이 필요하다. 이 얼마나 과거보다 혹독하고 애매한 논리인가. 구시대에는 힘쓰는 자본끼리 나눠먹는 공생의 논리라도 있었다. 이젠 독식과 비상식의 논리가 나머지를 삼킨다. 신경제하에서 독점을 다루는 방식은 어떠한가? 그것은 기술적 용어로 '표준'(standard)과 '록-인'(lock-in)으로 표현된다. '표준'은 디지털 경제의 기본 원칙인 '편리성'에 기초해 보면 모두에게 이로운 것으로 상정된다. 표준의 배후에는 항상 표준을 이끄는 독점적 지배력이 숨어있기 마련인데, 이를 왜곡하는 것으로 사용자들의 '편리성'이 표준의 버팀목이 된다. 그들에게 독점의 폐해에 대한 보완책은 있다. 일개 기업이 기술적 한계를 지님에도 불구하고, 독점적 표준을 누리는 것은 부정이라고 보는 것이다. 한편 '록-인'은 한마디로 기술적 지배력에 도전하는 힘들이 침입하지 못하게 안쪽에서 걸어 잠그는 행위이다. 신경제하에서 기술적 우월에 입각한 록-인은 공정하며, 독점은 필요악이라 본다. 그들이 보기에 록-인은 소비자들에게 중대한 혜택을 주는데, 자본이 록-인을 위해 생산물 가격을 하락시켜, '역가격'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에게 돌아가는 관용의 시발은 록-인에서 온다는 발상이다. 그런 점에서 산업경제와 달리 신경제하의 독점 가격 형성은 별 걱정거리가 아니라고 판단한다. 또한 국가는 자본의 집중과 집적에 따른 독점적 향유를 인정해야 하며, 그 이유는 그들이 보기에 이 일시적 독점은 기업의 혁신과 위험에 대한 도전의 금전적 보상이기 때문이다. 즉 특정 자본이 개발하는 상품 유통의 초기 국면에서 혁신의 인센티브를 보장하는 아량을 보이는 것이 페어 플레이며, 궁극적으로도 그 자본이 시장에 대한 장기적 지배력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논리다. 디지털 경제이론가들은 네트 경제에서 자연 독점의 불가능성에 대한 또 다른 이유로 '퇴화'(devolution)의 법칙을 든다. 네트 경제의 생태학적 특성에서 살펴보면, 네트워크나 유기체 환경은 지속적 유동과 비평형성을 강조한다. 퇴화의 원리는 창조와 파괴의 급변하는 커브 속에서 시장 정상에 오를 수 있는 가능성들을 가정한다. 그러나, 그들이 인정하듯 정상의 유동성과 수확체증의 국면은 초기 혹은 표준이 이루어지기 전까지의 시점이다. 그 이후에는 시장력의 고착과 독점이 지배한다. 대체로 정보·통신산업 영역은 영세한 벤처자본에게 상대적으로 많은 새로운 시장진입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나 새로운 시장이 형성되어 안정권에 들어서면, 구산업의 행태와 비슷하게 자본의 독점적 확장이 이루어진다. 신산업에 있어 표준과 록-인은 독점을 향한 새로운 히든 카드이다. 다시 한 번 하우크의 '현상형상'은, 네트 경제에 이르면 '고리 형성'(linking)과 '지렛대 작용'(leveraging)이란 독점화 과정으로 발현된다. 이 두 가지 과정은 한 제품의 이용층을 이웃하는 제품으로 자연스럽게 이동시키는 것으로, 이미 MS사가 O/S프로그램으로 DOS→Windows→Win95→Win98→MS Network로 패권화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이렇게 볼 때, 표준과 록-인은 혁신의 인센티브가 아니라, 장기적 독점의 과정을 돈독히 쌓는 작업인 것이다. 또 다른 독점화 과정은 심리적 전술에서도 이루어진다. 예컨대, 경쟁자에게 록-인되었다고 믿게 만드는 기법으로, 사전발표, 페인트(faint), 위협적 동맹, 기술적 치장, 미래적 제휴 관계의 매체 선전, 그리고 발표는 되었으나 상품화가 안된 베이퍼웨어(Vaporware)의 퍼레이드 등이 동원된다. 이로써 완벽한 심리적/물리적 시장 독점의 완벽한 구상이 꾸며지는 것이다. 5. 현실 정치의 비정치화, 그리고 경제화 이제까지 단상적으로 훑고 지나간 몇 가지 논의를 통해서 보자면, 신경제론자들의 네트 시대의 새로운 경제란 산업자본주의의 변형된 적자일 뿐이다. 이제 디지털 경제의 문제는 정치 영역에도 그 무한한 힘을 가동시킨다. 디지털 이론가들이 주장하는 네트 시대의 정치는 크게 보아 디지털상품을 소비하며 네트에 접속하는 개인들에게 이루어지는 무한한 '권능'(empowerment)의 유혹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는 새로운 민주적 커뮤니케이션의 건설과 해방의 테크놀로지에 대한 언약으로 이루어진다. 일례로 글로벌 컴퓨터사인 썬(Sun Microsystems)사는 한 광고 지면을 통해, 현실의 종교, 정치, 잘못된 처방의 기술 등 역사적인 모든 것들이 네트워크 컴퓨터 기술과 대당에 서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바로 그들이 개발한 네트워크 기술만이 제현실의 '평화'적 해결을 보장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군림한다. 또 다른 하이테크 기업의 약속. 미국의 거대 텔레콤 회사인 MCI사는 인터넷 서비스 가입을 가상 공동체 편입의 전제로 약속한다. "매달 9.95달러에 인터넷을 무제한으로: 당신은 이제 시간 제한없이,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빠른 네트워크에 지역적 제한없이 액세스를 할 수 있다. 지금 빨리 전화하여 이 파격적인 3달간 할인 요금으로 가입하여, 글로벌 온라인 공동체의 일부가 되십시오."(Wired, 1997. 10.) 인터넷 접속 비용과 전화비를 낼 수 있는 능력만 된다면, MCI사의 인터넷 가입이 곧장 '글로벌 온라인 공동체의 일부'가 되는 것으로 등치된다. 온라인 서비스의 가입이라는 사적인 소비와 온라인 공동체라는 공적 모임이 뒤섞임으로써, 사적 소비 자체가 공동체의 본질인양 호도되는 것이다. 이같이 논의의 과도한 비약을 정보통신기업들이 차용하는데는 대중의 공동체에 대한 욕망을 적절히 간파하는 그들의 능력에 있다. 대중의 욕망은 현대의 지시물 없는 상실감에서 비롯된 치료제 역할로 전통적 공동체의 대체물인 가상공동체를 희구하는데 있다. 글로벌 사기업들은 명민하게도 온라인 공동체를 인터넷의 물적 배경을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의 역할, 그리고 기술의 수용, 대중의 의식적 통합과 친근성, 상품 소비 등을 원활하게 이루기 위한 촉진제로써 보고 있는 것이다. 자본의 비정치화 주도는 결국 경제화를 위한 고리의 핵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가상공간의 민주주의적 전망이 사적 자본에 의해 자연스레 편입되는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이다. '세계를 터는 강도'들은 물리적/정신적 영역에 걸쳐 우파의 비전을 세우고 있다. 그 파장을 비껴가는 길은 내가 보기에 먼지에 쌓인 '경제의 사회화'를 털어 일으켜 세우는 작업일 것이다. 예컨대, 시민단체와 정부 그리고 기업이 모여 신기술 개발의 공적 전망을 세우고, 정부가 나서서 과도한 집중과 독점을 방지하며, 이윤의 결과에 대한 수혜의 공정성을 보장하는 것 등이 필요하다. 네트의 '빛'이 그 기술적 가능성에 있다고 본다면, 이용 주체들의 좌파적 전망과 사회적 적용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비정치화의 타락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네트적 실천과 연대가 요구되어진다. 이같이 새로운 가상의 '그늘'들을 걷어내기 위해서는, 그 속에서의 역공이 가장 큰 무기일 수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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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커] 우울한 특명: 파워레인저, 위험에 처한 인터넷 게시판을 구하라!

우울한 특명: 파워레인저, 위험에 처한 인터넷 게시판을 구하라! 이광석 (suk_lee@jinbo.net) 여섯 살 먹은 아들녀석이 요새 '파워레인저'에 흠뻑 빠져 있다. 도통 다른 건전 명랑 비디오들이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다. 서부 총잡이와 사무라이식 폭력이 난무하는 이 비디오만 보면 여린 감성을 자제 못해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다. "파워 레인저! 기다려, 내가 구출하마! 괴물아, 덤벼라, 슉슉, 퍽, 으악". 시청하거나 그 이후에 보여지는 진기한 태도 변화다. 사태가 이쯤되면 난 늘 몸을 불사르며 아들을 상대하는 사악한 괴물이 돼야 한다. 아이가 그토록 좋아하는 파워레인저 시리즈물을 두루 섭렵하다보니 내 눈에 정말 온갖 나쁜 것은 다 들어온다. 폭력은 기본이고, 인종적 편견으로 똘똘 뭉쳤다. 우리 애가 유독 다섯의 레인저 가운데 붉은 옷을 입은 백인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항상 중앙에 서 있고 제일 힘센 백인 레인저는 다른 변두리 넷과 함께 정의의 이름으로 악을 처단키 위해 무력과 폭력도 불사한다. 게다가 파워레인저의 선악 이분법은 상상을 초월한다. 현실은 단순하다. 선과 악, 적과 나 단순 대칭뿐이다. 적같기도 하고 아같기도 한 중간의 인물 설정은 애초에 없다. 또한 극 전개상 악과 적은 뻗거나 반쯤 죽는 정도론 부족하고 완전히 죽어 터지거나 사라져야 직성이 풀린다. 단순무식성은 목적하는 바에 빠르고 쉽게 이르는 방도지만, 그 가는 길에 다양한 경우들이 무시받고 다칠 수 있다. 이분 구도에 사로잡혀 악과 적을 치려다 잘못해 동료를 다치게 하거나 상관없는 제 삼자를 잡는 경우도 생긴다. 마치 미 우익 매파들이 이라크 땅에 뿌렸던 '눈먼' 폭탄들처럼 악의 씨를 말리겠다고 초가삼간은 물론이야 무고한 어린아이들까지 저 세상에 보내는 험한 꼴이 나올 수 있다. 파워레인저식 단순성의 폭력은 사회 곳곳에 배어 있다. 그저 그렇게 나두면 큰 별탈없이 갈 것을 뭔가 가두고 단속해야 직성이 풀리는 심사들이 그렇다. 잡음과 탈이 영원히 사라져야 할 것으로 보이면 이에 대한 무식한 발길질이 저도 모르게 시작된다. 특별히 새롭게 부상하는 문화 현상에 대해 구태의 버릇에 빠진 이들은 스스로 파워레인저가 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젊은이들의 총천연색 머리에 가위를 대거나, 코나 입에 뚫은 링을 잡아당기거나, 인터넷방에 통금 시간을 매기는 둥 비상식의 폭력을 휘두를 수 있다. 얼마전 뉴욕의 한 허름하고 작은 호스텔에 묶은 적이 있다. 뉴욕 맨하턴 시내에서 여러 날을 보내야 했기에 비싼 여관비를 감내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한창 바람의 대학 초년생들이 배낭 여행길 추억을 담기 위해 잠시 머문다는 호스텔이 내 잠자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더욱 당황했던 것은 8개 간이 이층 침대가 놓여 있는 방에서 얼굴도 모르는 16명의 지구촌 젊은이들이 뒤섞여 함께 잤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각자 잠자리를 유지한 채로 말이다. 알고 보니 이 작은 공간에 느꼈던 내 당혹감이 얼마나 어줍잖던지. 남녀유별의 설익은 윤리에 감염되어 살아왔던 나로선 이 호스텔의 자율 논리를 금방 깨우치질 못했다. 여럿이 방을 공유하면 슬슬 눈에 보이지않는 에티켓과 질서가 자리잡게 돼 뜬금없이 욕정이 일어설 일이 없었다. 이것이 성인 남녀가 머리 맞대고 자도 별 일이 없던 이유다. 또한 자신이 덮었던 이불을 항상 개고 퇴실시 빨래 수거함에 넣고, 사용한 식기를 각자 닦고, 뒷사람을 위해 화장실의 젖은 수건과 휴지를 갈고, 타인의 수면을 위해 실내 조명을 조절하는 등 투숙객들은 해야할 몫을 한순간에 터득한다. 매일같이 방에서 보는 얼굴들이 여럿 바뀌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규칙은 누가 크게 일러주지 않아도 유지된다. 분명 파워레인저였다면 남녀 혼숙에 의한 음탕 조장 방조죄로 호스텔을 무자비하게 때려잡았을 것이다. 공명심에 부르르 떠는 파워레인저라면 호스텔을 러브호텔로 착각할만하다. 호스텔에 드는 이들이 많다보면 간혹 문제가 있기도 하다. 밖에서 방값을 치르지않은 동료를 몰래 불러들이거나 술먹고 취중 객기를 부려 타인의 수면을 방해하거나 귀중품을 훔치거나 먹고 씻고 뒷처리를 나몰라하는 등 여러 잡음과 탈들이 많다. 하지만, 이는 호스텔의 근본적 운영 규칙을 뒤흔들지 못한다. 수십년간 호스텔 주인이 무리없이 경영해온 노하우는 그저 성별로 갈라놓는 목욕탕같은 단순한 경계와 통제의 규칙이 아니었다. 주인은 자율의 논리가 통제와 감시보다 낫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안다. 요즘 인터넷 게시판을 관리하던 호스텔의 맘좋던 주인을 파워레인저로 전격 교체한다는 소리가 들린다. 그 과정에 정보통신부가 나섰다는 얘기가 있다. 파워레인저에게 '실명제'라는 초강력 무기를 쥐어줬다는 소문이다. 이걸로 불순한 게시판문화를 때려잡겠다는 얘기다. 인터넷 문화 현상의 소소한 탈을 다스리겠다고 할 일 많은 한 나라의 정보정책 집행기관이 주책없이 흥분해서야 되겠는가. 그간 게시판의 자율과 건전성이 익명을 이용한 소수 악덕 네티즌들에 의해 위협받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탈을 막겠다고 벌인 실명제가 공공기관 등이 개설한 게시판 참여를 떨어뜨리고 그나마 찾던 발길마저 끊게 만들면서 아예 게시판 문화 존립의 목까지 조르고 있다. 금융 '실명제'로 검은 돈을 양성화해 건전명랑한 시장 경제를 회복하듯 인터넷 게시판문화를 이에 똑같이 견주려하면 곤란하다. 익명이 게시판을 살리고 건강을 키우는 전제라면 전세계 유례없는 실명 도입은 극약 처방과 같다. 파워레인저의 단순 무식한 칼바람만 게시판에 그득해서야 곤란하다. 서로 얼굴도 모르는 전세계의 남녀가 만나도 신기하게 문제없이 잘 유지되는 호스텔의 자율적 논리는 온라인 게시판 또한 가지고 누려야할 문화다. 마땅히 지금 파워레인저에게 내린 정통부의 '위험에 처한 인터넷 게시판을 구하라'는 특명은 거둬져야 한다. 그래야 한국의 게시판 문화가 고사하지 않는다. <끝> 2003. 4. <네트워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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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지대 교지] 네트의 '파워 엘리트'

네트의 '파워 엘리트' 명지대 교지 수록(99년 6월) 1. 21세기 '파워 엘리트' 분석을 위하여 자본주의 사회의 변화와 관련된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보다 주목해야할 부분은 과연 글로벌 시대의 '파워 엘리트'의 속성과 계급적 본질이 무엇인가이다. 과거 80년대 한국사회의 성격과 관련하여 소장학자들을 중심으로 붐을 이루었던 연구 내용 중 하나를 꼽으라면, 우리는 계급 분석을 들 수 있다. 그 당시 한국 사회의 계급분석은 대체로 한 사회구성체의 주/부 모순 관계를 밝혀, 적대 관계와 전선 형성 등을 통해 체제 이행의 가능성을 마련하는데 있었다. 주로 경제학이나 사회학계에서 이같은 작업을 수행하였는데, 변혁과 이행의 활로가 막혀버린 90년대에는 실지 계급 분석과 관련된 연구 영역은 비인기 종목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고 내가 그 비인기 영역을 반복하여 탐구하려고 이런 말들을 내어뱉는 것도 아니며, 본인이 그렇게 정치한 분석을 수행할 능력 또한 없다고 자인한다. 하지만 도대체가 현대 자본주의의 지배적 권력 유형과 특성이라도 알아야 이에 저항할 수 있는 고리들이 생길텐데, 그 현실적 역학구도에 대한 감이 전혀 잡히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과연 현대 권력의 정점은 무엇일까? 추상적으로나마 우리는 초국적 자본가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들간에는 격한 지각변동이 벌어지고 있다. 예컨대, 미래학자인 토플러((A. Toffler)의 '권력이동'이란 사실 글로벌 자본내/간 지각 변동에 대한 자본 내부적 고찰에 해당한다. 글로벌 자본가들의 지속적인 판세 유지와 그들의 새로운 영역 진출, 그리고 새로운 분야에 진출한 디지털자본가들의 전자 프런티어 자리잡기가 한창 진행 중에 있는 것이다. 그 와중에서 일반 대중을 호도하는 토플러식의 하이테크 이데올로그들도 소리 높여 새로운 시대를 맞을 예언자적 역할을 자처하기 마련이다. 자유주의에 사로잡힌 정책 관료들은 탈규제 법안과 각종 혜택 조항으로 돈많은 신진 엘리트 회원들의 충실한 조정, 관리자로서의 역할을 자임한다. 이 파워 계급/계층들은 거대한 물결을 만들어내면서, 새로운 밀레니엄을 위한 권능을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2. '권력이동'의 내용 과거 물질 생산에 기반했던 다양한 핵심 인자들은 국제적 네트워크의 등장으로 인해 다종다양한 격변을 치른다. 역사적 조건하에서 진행된 생산과정에서 발생하는 모순이 잠재해있건 아니건간에, 라이히(R. Reich)의 '상징분석가', 토플러의 '코그니테리아'(cogniteria), 그리고 벨(D. Bell) 식의 '지식노동자' 개념 등은 테크노 기술에 의한 계급지형의 본질적 변화를 표현하고 있다. 물론 이들의 개념화는 특히 노동자 위상과 관련하여 노동 버전의 새로운 업그레이드를 상정한 용어이다. 즉 이 개념들은 한마디로 자본주의적 생산과정 중 노동자들의 노동 통제권과 관련하여 구상/실행이 통합됨으로써, 그들에게 생산 과정에서의 통제적 자율권이 신장된다는 '마찰없는 자본주의'(friction-free capitalism)의 신버전이다. 어쨌거나 현재 테크노 기술의 위상은 경제적·사회적인 유토피아적 가능성, 자유주의적 전망 등을 포함하며, 더 나아가 물질 세계의 해체까지도 주장하는 다양한 계급과 계층을 생산해내고 있다. 그 중 우리의 관심사는 새로운 지배계급의 정체성에 대한 것이다. 아마도 90년대 현실의 정치적·경제적 지배계급을 가장 잘 묘사한 용어 중 하나는, 하이테크 이론가인 아서 크로커(A. Kroker)의 글로벌 '가상계급'(virtual class) 개념일 것이다. "인간의 일반 이익을 테크노토피아라는 특수 이익으로 제시하는", 이들 계급의 전선에는 미 행정관료와 디지털 신생자본가들이 포진한다. 크로커가 보는 가상계급의 주체들은, 우선 미래적 비전을 주도하는 실리콘 밸리의 하이테크 자본가들과, 위계상 한 단계 아래의 하이테크 벤처 자본가들, 인공지능 과학자, 엔지니어, 비디오게임 개발자, 컴퓨터 과학자들과 여타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 등등으로 구성된다. 이들 가상계급은 20세기의 변종인 약탈적 자본가들과 신종 테크노 엘리트들이 결합된 형태를 띠고 있다. 곧 20세기 말의 하드웨어 지배자가 21세기 소프트웨어 문화를 통제할 것이란 전망이 가능하다. 이들 주체간 계급 전선의 형성은 주로 정책적 '테크노프로젝트'를 통해 이루어지며, 관심사의 조율까지도 이뤄낸다. 물론 가상계급의 전체 조정·관리권은 정부의 손에 달려 있다. 국가는 객관적인 대상이 아니라 편견을 가진 개입자로 등장한다. 즉 시장지상주의는 정부의 행위를 줄이지 않으며, 실제적인 면에서 증가시킨다. 정부 행위의 본질적 측면에서, 의도된 산출물을 명령하는 것으로부터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고 독점적 시장을 유지하는 것으로 그 임무를 이동시킨다. 이런 정황에 미루어 짐작해보면, 디지털이란 외피에 가려진 가상계급과 국가 권력장치간의 동침 관계가 새로운 지배계급의 내용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크로커는 90년대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하드 이데올로기'가 급격히 쇠퇴하고, 가상계급의 '소프트 이데올로기'가 주도한다고 바라본다. 포스트자본주의 사회의 통치 엘리트들이 사용하는 보편 언어가 그 중심에 선다는 입장이다. 그가 말하는 소프트 이데올로기는 디제라티와 미국 행정부관료, 디지털 자본계급의 테크노신화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웨스트민스터대학의 하이퍼미디어 연구소 소장인 바브룩(R. Barbrook) 식으로 얘기하자면, 미국 서안의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한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Californian Ideology)가 그 소프트 이데올로기에 해당한다. 3. 테크노 '파워 엘리트'의 속성: 정주권력에서 유목권력으로 도시사회학자인 까스텔(M. Castells)의 표현을 빌리자면, 현대의 공간은 '장소공간'(the space of space) 보다 '흐름공간'(the space of flow)이 우위에 선다. 이 말은 자본의 국제적 이동 능력과 추상화가 그 어느 때보다 급진전되었다는 얘기이도 하며, 권력 소재지가 변화하고 있다는 증거로도 볼 수 있다. 최근 주목받는 네트의 저항적 실천집단인 '크리티칼 아트 앙상블'(Critical Art Ensemble)에 따르면, 현대적 권력은 이미 각각의 정주화된 지역, 장소에 머물기보다는 네트워크를 흘러다닌다. 그래서 이들은 현대적 권력 재현의 방식이 정주적(定住的, sedentary) 형태에서 유목적(遊牧的, nomadic) 형태로 이동한다고 본다. 우선 그들이 저항 지점으로 보는 권력은 실체가 없다. 오직 권력은 그 표상으로 드러난다. 기껏해야 '통치계급', '파워 엘리트' 등과 같은 추상화된 명명뿐이다. 우리는 거대 권력을 소재가 상실된 '효과'에 의해서만 체험할 수 있다. 현재 국내를 포함한 아시아 금융 위기라는 사태가 글로벌 핵심자본의 취산(聚散) 과정 속에서 배태된다고 본다면, 그들의 논리는 설득력이 높다. 다른 한편 권력의 유목성은 '속도'를 필요로 한다. 한 곳에 정주하지 않고 흘러 다닐 때, 권력간 우위는 '시/공간 압축' 능력과 '중력장 극복의 속도전'(escape velocity)에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도시연구가인 비릴리오(P. Virilio)는 이러한 속도성의 원천을 '행동적이나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behavioral inertia)에서 찾으며, 이를 과거 '동적인'(dynamic) 물리적 운송 장치들(기차, 오토바이, 자동차, 비행기 등)과 구분하고 있다. 그의 개념에 입각해 보면, 이같은 '속도기계'를 자신의 힘으로 체득한 특권 집단이 새로운 테크노 '파워 엘리트'인 것이다. 4. '역사의 종말'은 어디에도 없다 이제까지의 지배계급의 권력이동을 통해 보자면, 우파 이데올로그인 후쿠야마(F. Hukuyama)가 지리하게 언급한 '역사의 종말'과 같은 새로운 자본주의 역사의 시작은 어디에도 없다. 오직 있다면 자본주의의 계급적 모순과 불평등의 재생산 지형의 연장과 그 변형만 있을 뿐이다. 물론 네트가 마련한 풍부한 기술적 가능성이 우리 앞에 놓여 있긴 하다. 혹자는 네트가 미래의 새로운 천년왕국을 다시 세울 수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실지 "대중에게 모든 권력을!"이란 슬로건의 밑바닥에는 상품화 논리가 각인되어 있다. 최저 균등 이용 요금에서 이용당 요금지불 체계로, 정보의 생산에서 소비로, 정보 추구보다는 오락과 쇼핑으로의 전환은 한마디로 인터넷의 상업화를 지칭한다. 인터넷이 더 나은 것, 즉 정보초고속도로로 바뀔 수 있다는 가상계급들의 비전은 구계획 경제의 국가 프로젝트에 비견할만한 바다. 아니 규모면에서 보면 그 이상이다. 세계경제의 종주국인 미국 행정부에서부터 밀어붙이는 사업 내용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들의 비전은 물활적으로 움직여나가는 네트의 본성을 글로벌 기업의 이윤 동기하에 구획화하려는 음모에 가깝다. 네트의 자생을 가로막는 가상계급의 음습한 기도는 인터넷 모델을 역회전하여 새로운 자본 모델로 바꾸려는데서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먼저 정치적 근원에서 새로운 계급은 사회적 원칙이 결여된 자유지상주의의 가치관, 정부와 하이테크 기업의 신우익적 행동 방식이 뒤섞여 있다. 새로운 엘리트들이 간간히 드러내는 자유주의적 속성조차 대체로 우파적 경제 논리에 의하여 압도당하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기존 보수 우익체제의 정치적 사고에 그 끈을 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민주적 담화에 역행하여 한층 새로워진 권위주의를 구상하고, 테크노토피아에 반하는 모든 반대를 억압하며, 의회정치를 지적 재산권의 전쟁터로 이끈다. 경제적 정의에 역행하여 약탈적 자본주의의 재부활과, 고용조정에 의한 만성적 실업상태, 사회복지예산 축소 등 신자유주의적이고 기술 합리적인 결합을 시도한다. 이들은 경제적 지형에서 보자면, 철저하게 글로벌 사업의 지배적 세력이자 독점적 세력이다. 이는 자본의 내적 (재)구조화 과정에 따른 구조개편의 경향성과, 신계급 중심으로의 형식적 계급이동에 다름 아니다. 즉 "20세기 하드웨어를 통제하는 자가 21세기 문화의 소프트웨어를 지배"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고전경제학의 역사와 정치를 초월하고 '종말'시키는 자들이 아니라 온존하게 계승하는 부르주아 형님들의 후계자들이다. 5. 신계급의 '위상학적 지형 그리기'를 제안하며 이제 권력에 대한 저항의 조건이 현실의 지배적 지형도를 확보하는 것이라 볼 때, 새로운 권력의 출처와 구성, 성격, 방향 등을 분석하는 일이 시급하다. 다시 말해 새로운 파워 엘리트들의 성격 변화와 그 변화의 진원지, 파워 엘리트를 구성하는 실세들과 그들간, 그들과 구계급간의 관계를 계보적으로 추적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하이테크 정보기술이 주는 무한한 가치만큼이나 이들 계급 내부의 지형도 정확히 결정내리기 어렵긴 하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권력의 확장과 지배에 직면하여 새로운 저항의 방식을 고민하기 위해서는, 실질적으로 권력지형에 대한 밑그림이라도 그려야하는 것이 상책이다. 분명히 새로운 지배계급이 등장하는데는 그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었을 것이고, 또한 그들의 연합세력 내지 이데올로그들과 잡다한 지적 돌팔이들이 기생 혹은 연합할 것이란 사실이다. 이 모든 전선을 구체적 일상에다 끌어오는 작업은, 현실 권력지형을 추상적으로 그려봄으로써 저항의 지점들을 확보하기에 중요하다. 일종의 가상계급의 '위상학적 지형 그리기'(topological mapping)가 필요한 것이다. 이 작업의 전략/전술적 의의는, 우선 우파적 정보 담론을 상시적으로 구체적 현실의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게 한다. 이는 네트를 추상성의 나락으로 빠뜨리지 않으면서, 물리적 현실 속에서 좌표점을 찾을 수 있는 작업이다. 둘째, 새로운 지배계급의 계보 그 자체를 추척함으로써 계급간 모순의 지점들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를 통해 새로운 저항과 연대의 전선 형성과 새로운 저항 방식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각각의 저항 단위들이 "이젠 그만!"의 즉자적 울림들을 합일된 전자적 파장으로 전환함으로써, 여기저기 권력의 '속도기계'에 속도 지체의 힘을 가할 수 있는 상황이 마련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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