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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대학원신문] 디지털 노마디즘의 모순적 지위

디지털 노마디즘의 모순적 지위 자유로움은 인간 신체의 해방적 느낌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러한 느낌에 급격한 변화가 이루어진 시기는 이제까지 크게 두 번이다. 우선 19세기초 자본주의는 봉건 권력의 토지에 예속되었던 인간 신체의 자유로움을 약속했다. 인간은 자유 계약을 통해 자신의 신체를 거 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형식적인 신체의 자유는 궁극적으로 통제와 구속의 거 울임이 드러났다. 자유 계약은 자본주의의 생산 관계에 들어가면서 신체 구속의 증명이 되 었다. 대표적으로 테일러 할아버지가 계시한 공장의 과학적 경영은 신체의 자유를 갈기갈기 찢어 시분할 관리하는 생산 미학의 절정이었다. 이제 20세기말 인간 신체의 자유는 디지털 혁명으로 새로운 단계를 맞이하게 되었다. 디 지털의 자유로움은 인간을 끊임없이 부유하게 만들고 있다. 디지털이 선사한 자유로움은 끊 임없는 유목과 이동의 전제가 되었다. 디지털은 공장과 사무실로부터 노동자들을 해방시키 고, 한 장소와 지역의 구심력에 구멍을 내고 있다. 이는 진정한 인간 해방의 징후인가? 아니 면, 디지털 기술이 마련한 노마디즘의 새로운 가능성이 고작해야 19세기에 자본주의가 제시 했던 자유 계약의 새로운 업데이트 버전일 뿐일까? 이 글은 신체 자유의 필요 조건인 노마디즘을 양가적 차원에서 본다. 권력의 노마디즘과 저항의 노마디즘. 전자는 후자를 필연적으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새로운 디지털을 이 용하여 노마디즘을 기획한다는 점에서 주목해야할 부분이다. 이에 반해 후자는 권력의 통제 에 대항한 힘의 생성을 포착한다. 디지털 노마디즘의 긍정적 가치는 물론 후자의 관찰을 통 해 얻을 수 있다. 권력의 노마디즘 새로운 권력의 특성은 디지털 네트워크 기술을 기반으로 한다. 디지털 노마디즘의 생성 조건은 애초에 권력의 아이디어에 가깝다. 과거에는 권력이 한 곳에 집중되기 마련이었다. 볼셰비키 들이 쨔르 체제를 뒤집기 위해 크렘린 궁전으로 진격했던 것처럼, 권력에 대항하 는 혁명 그룹들은 대상화된 권력의 실체에 대한 '장악'의 개념을 사용했다. 장악과 진격은 멈춰진 대상을 필요로 한다. 멈춰있는 상태의 권력, 이는 '정주 권력'(sedentary power)이다. 새로운 권력은 자유롭게 이동한다. 네트워크망을 타고 전세계를 누빈다. 권력이 분산되고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쉽게 옮겨 다닌다. 네트워크망을 통해 권력의 공간 확장과 이동이 이루 어진다.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란 책에서 마누엘 카스텔은 새로운 공간의 변화를 '장소'(place)에 서 '흐름'(flow)의 전환으로 파악한다. 그는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모이고 흩어지 는 동태적인 권력의 '흐름'을 읽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디지털 네 트워크다. 그래서, 새로운 권력의 호칭은 '노마드 권력'이다. 이 새로운 권력이 요구하는 디 지털 노마디즘은 우선 효율성(efficiency)에 근거한다. 자본의 순환을 빛의 속도로 만들고, 적재적소에 자본을 분배하려는 욕구는 기본적으로 효율성의 원칙이다. 디지털 시대에는 어 떤 기업이든 원활한 정보 이동의 능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자본간 경쟁에서 사멸할 수밖에 없다. 둘째는 연장(extension)이다. 다른 말로 연장은 통제력이다. 연장은 쉽게 생각하면 몸통에 달려있는 길게 연결된 보철물과 같다. [매트릭스] 영화에 나오는 신체의 구멍에 연결된 포 트 단자들을 상기하라. 연장은 관리와 통제를 행하는 중심을 갖는다. 그것이 연장인 이유다. 연장은 통제력의 확장/대 욕구에서 생긴다. 디지털 노마드 권력의 새로운 능력은 실시간 통 제력에 있다. 디지털 접속은 전세계를 단일로 묶고, 디지털 연장을 통해 권력을 확장한다. 마지막으로 공간의 소멸(disappearance of space)이다. 디지털 이데올로그들은 공간 압축 능력을 단지 디지털 기술의 가공할 능력을 설명하는데 이용한다. 하지만, 물리적 공간의 탈 출은 있을 수 없는 얘기다. 현실의 공간은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굴레다. 오히려 공간의 소 멸은 단일화된 권력의 장을 시사한다. 오늘날 공항에서 노트북을 챙기고, 셀룰러 폰을 목에 걸고, 개인 디지털 보조장치(PDA)를 손에 들고, 디지털 시계로 전자 메일을 확인하는 사람 들을 쉽게 목도할 수 있다. 현대의 이러한 일상 풍경이 주는 공통점은 접속된 인간의 모습 이다. 자유로운 신체 이동 능력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오히려 끝없이 권력에 접속되고 연결된다. 지구촌 사무실 혹은 공장에서 일하는 지구촌 노동자의 미래상은 사이버펑크들만 의 지나친 공상이 아니다. 공간의 소멸은 물리적 공간의 소멸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이 행사 되었던 가시적 거리감의 소멸이다. 공간의 소멸은 권력의 새로운 디지털 장을 전제하고 있 는 것이다. 사이비 노마디즘 이 세 가지 전제들은 권력이 디지털 노마디즘에 집착하는 직접적 이유다. 효율성은 권력 의 생산에, 연장은 권력의 확대에, 공간의 소멸은 권력의 관리에 기여한다. 디지털 노마디즘 이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드러난다면, 이 세 가지는 현실 노마디즘의 본질과 목적을 드러낸 다. 권력의 노마디즘에는 정처없이 떠도는 정보의 흐름은 없다. 권력의 노마디즘은 일정한 방향을 갖고 움직인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정형으로 보이지만 이것의 흐름에는 규칙성이 발 견된다. 그 규칙성은 권력의 위계적인 명령에 의해 부과된 것이다. 예컨대, 전세계 노드를 타고 흐르는 정보들 중 고급 정보들의 집적과 관리는 거대 기업본부(HQ)의 중앙 컴퓨터에 서 이루어진다. 평등하고 물활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던 디지털 정보들이 권력의 파장 에 걸리면 위계적이고 불균등하게 갈린다. 노마디즘의 자유로움이 권력에 의해 다시 한번 산산히 조각난다. 역설적으로 권력의 생산, 확대, 관리의 목적된 노마디즘은 진짜 노마디즘이 아니다. 이는 '사이비 노마디즘'(pseudo-nomadism)이다. 디지털의 진정한 가치와 거기서 생성되는 노마디 즘을 철저히 악용하는 구자본주의 생산의 논리다. 권력으로 지칭되는 주원천이 무엇보다 자 본력에 있다고 본다면, 권력이 이용하는 노마디즘의 정체는 쉽게 폭로된다. 부유하는 유목 자체의 자유로운 신체적 가능성보다 유목에 의해 유지되는 체계적 약탈의 역사에 디지털 시 대의 권력은 열광한다. 새로운 권력에게 유목은 자유로운 자본의 이동이다. 물론 고대의 노 마디즘과 다른 점은 디지털이란 수사어다. 비가시적이고 기동력있는 약탈의 노마디즘이 현 대의 권력이 주력하는 바다. 결국 디지털 노마디즘의 수사는 권력의 것이다. 각자의 목 뒷덜미에 포트가 뚫려 망망한 네트의 바다로 사라지는 비운의 미래 인간들처럼, [동물의 왕국]에서 꼬리표나 추적 장치가 붙어 초원으로 사라지는 야생 동물들처럼, 권력이 의도하는 노마디즘은 끊임없이 탈주하려 고 하고 탈주했다고 느끼지만 종국에는 권력의 파장에서 한발자국도 못벗어나는 사이비 노 마딕 현실을 기획하는 일이다. 저항의 노마디즘 진정한 노마드는 모든 권력화된 디지털 영토를 저항의 기폭제로 삼는다. 최근에 이탈리아 자율주의자인 안토니오 네그리와 듀크대학의 영문학 교수인 마이클 하트가 같이 쓴 {제국 Empire}(2000)이란 저술에서 얘기되었던 것처럼, 권력의 외부 혹은 바깥으로 보이는 장소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든 곳에서 저항해야 한다. 그들은 저항의 편재성을 일 컬어 복수자들의 '저항되기'(being-against)로 표현한다. '저항되기'는 일상화된 저항의 표현 이다. 저항되기는 노마디즘을 실제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다. 권력이 노마디즘을 재생산의 수 단으로 이용하는데 반해, 새로운 디지털 야만인의 무리들은 이를 저항의 방식으로 이해한다. 이른바 저항의 노마디즘은 권력이 악용하는 디지털의 노마드적 가치를 재전유한다. 유목적 약탈보다는 자유로운 신체를 전제한 유목적 가치에서 저항은 힘을 얻는다. 디지털 노마디즘은 제도, 관습, 경계, 명령 등으로부터 철저히 멀어지려 한다. 권력의 사이 비 노마디즘은 저항의 다층적 연결과 동시다발적인 진지전에 의해 발작을 일으킨다. '저항되 기'가 일상적이고 미시적 실천과 저항의 의미를 담고 있듯이, 유목민적 삶을 살아가는 현대 의 야만인들은 권력이 쳐놓은 그물 하나하나에서 그 저항과 반대의 고리들을 발견한다. '저항되기'는 체념과 희망의 변증법이다. 체념은 권력의 파장으로부터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는 현실 인식에서 생긴다. 그러나 희망은 체념을 물구나무 세울 때 얻어지는 부정의 결 과다. 체념은 현실을 버리거나 외면하기 보다 희망의 씨앗을 가꾸기 위해 필요하다. 이런 점 에서 21세기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의 사이비 노마디즘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오히 려 철저히 권력이 지향하는 디지털 노마디즘의 가치를 주목하고, 현실 체념의 극한까지 밀 고갈 필요가 있다. 체념에서 멈추면 오직 나락만이 있을 뿐이다. 연이어 부정의 과정을 수행 해야 한다. '저항되기'는 체념을 극복하는 부정의 능동적 과정이다. 디지털 노마디즘을 가치 화하는 노력은 희망을 실은 '저항되기'에 있다. 현실의 '저항되기'는 희망을 가꾸는 방법이자 사이비 노마디즘을 무력화하는 힘이다. // (연세대 대학원신문 2000.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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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디자인]사이버스페이스는 인간에게 무엇인가?

사이버스페이스는 인간에게 무엇인가? 과연 사이버공간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사이버공간은 기술을 통한 사회적•문화적 변형에 관한 우리의 열정과 불안 이 둘 모두를 상징화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에게 사이버공간은 상상력의 전망 속으로 들어가는 대모험의 첫 단계이다. 사이버공간은 일종의 물리적 현실의 한계를 초월하는 것도 약속한다. 다른 어떤 사람들은 사이버공간의 이 일반적인 이상에 관해 보다 냉소적이고 불쾌해 한다. 그들은 사이버공간이라는 용어가 모순어법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공간'(nonspace)은 불가능한 것을 약속하는 신기루가 아닌가? 등등. 이 글은 사이버공간의 존재론에 대한 물음이다. 인간이 사이버공간과 맺고있는 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차분히 성찰해보자는 의도를 갖고 있다. 포퍼의 제 3세계와 사이버공간 칼 포퍼(Karl Popper)란 과학철학자는 세계를 세 가지 연관된 층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그가 보는 '제 1세계'는 에너지, 무게, 운동을 지닌 순수한 물질의 세계다. '제 2세계'는 의식의 주관적 세계다. 느끼고, 계산하고, 생각하고, 꿈꾸고, 기억하는 개인 정신의 세계다. 마지막으로 그가 언급하는 '제 3세계'는 살아있는 유기체들이 자연스럽게 만들어낸 객관적인 현실의 세계다. 새들이 만든 나무 위의 집, 벌이 만든 벌집, 개미굴 등은 모두 이에 속한다. 물론 인간이 만들어낸 언어, 수학, 종교, 철학, 예술, 과학 등이 제 3세계의 기초를 이룬다. 성전, 시장, 법정, 도서관, 극장, 책, 영화, 신문, 디브이디 등은 제 3세계에 존재하는 물질적 표현들이다. 이들은 모두 아이디어, 이미지, 사운드, 데이터 등을 담는 그릇이다. 제 3세계는 스스로 진화하고, 제 1, 2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을 설명하는 안내자다. 포퍼의 제 3세계는 항상 성장의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다. 그의 제 3세계는 인간에게 있어서 문명과 같다. 포퍼는 3세계의 요건으로, 특히 사회 조직 형식 혹은 상호 소통의 양식을 보여주는 차원을 염두에 두고 있다. 사이버공간은 바로 이같은 제 3세계가 진화하여 구성된 가장 최신 형태다. 3세계는 추상적으로 보면 정보의 공간이다. 사이버공간은 정보로 가득찬 공간이다. 3세계에서 기획할 수 있는 것들 중 가장 이상적인 표현물이 사이버공간이다. 물론 3세계는 1세계와 2세계의 안내자이지만 역으로 그것의 규정을 받는다. 그렇지만 제 3세계는 항상 제 1, 2세계와 긴장 관계를 유지한다. 사이버공간은 현실의 물질적 공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이버공간의 자연적 느낌들 1세계의 물질적 그릇은 보통 물리적 자연으로 통칭된다. 이 1세계는 3세계와 관계를 맺으면서 2세계인 인간의 의식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특히 사이버공간의 출현으로 인간의 공간 개념에 대한 변화가 일어난다. 마이클 하임(Michael Heim)이란 디지털 철학자는 인간이 더불어 사는 1세계인 자연에 비추어 3세계에 속한 새로운 전자공간의 출현이 인간 의식에 미치는 느낌을 몇 가지로 잘 요약하고 있다. 첫째가 무한성(infinite)이다. 자연은 우리에게 광대하고 무한한 느낌을 준다. 바다, 강, 산, 숲을 거닐다보면 우리의 감각은 마치 새처럼 자유롭다는 것을 느낀다. 인터넷에 접속하면 우리는 끝없는 항해에 도취된다. 우리는 정보의 세계를 끝없이 흘러다니면서 전자 네트워크의 광활함을 만끽한다. 마모루 오시이가 감독한 공각기동대Ghost in the shell에서 새로이 태어난 사이보그가 떠나면서 남기는 마지막 문구를 기억하는가? "네트는 넓고 광활해". 인터넷 접속의 첫 느낌은 태초에 인간이 자연에 버려질 때 그 느낌이리라. 그래서, 사이버공간의 무한함은 자연의 무한함에 비견한다. 두 번째는 근접하기 어려운(inaccessible) 어떤 느낌이다. 자연은 뭔가를 숨긴다. 모든 것이 공개되어있고 발견할 것이 없다면, 인간이 자연에 대한 모험을 감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무언가의 발견에 대한 기쁨은 근접하기 어려운데서 만들어진다. 컴퓨터 네트워크도 동일한 속성을 갖고 있다. 중심이 없이 수많은 노드로 연결된 광대한 인터넷에서 항해를 한다는 것은 극히 일부분의 관찰일 것이다. 어제 간 길을 잃을 정도로 무한히 열려진 전자 공간에서 우리는 항상 발견의 기쁨을 얻는다. 세 번째는 압도하는(overwhelming) 느낌이다. 산 정상에서 광대하게 펼쳐진 자연은 나약한 인간에게 너무나 큰 존재이다. 자연의 강력하고 압도하는 힘에 대한 느낌은 네트워크에 접속할 때 네트의 바다에 맞닥뜨린 컴퓨터 초보자의 느낌과 동일하다. 적어도 처음으로 동영상, 사진, 애니메이션, 하이퍼텍스트를 경험한 사람에게는 이런 느낌은 일반적이다. 네 번째는 두려운(fearsome) 느낌이다. 자연은 위압과 미적 숭고의 면모를 동시에 지닌다. 숭고미는 자연에 두려움을 자아낸다. 인간의 감각으로는 도저히 밤하늘의 별이 가진 무한함을 해명하지 못한다. 신비한 자연에 대한 두려움은 종종 나약한 인간에게 현기증을 유발한다. 인터넷은 너무나 거대해, 이용자는 결코 그 전체 크기를 가늠할 수 없다. 살아서 움직이고 유기체처럼 끝없이 성장하는 인터넷의 광대함 자체가 두려움의 대상일 수 있다. 다섯 번째는 야생의(wild) 느낌이다. 야생적이고 거칠다는 것은 이차적인 공정을 거치지 않은 날 것 그대로를 의미한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한(自然) 야생성에 다름 아니다. 이는 콜럼버스가 최초 신대륙을 보고 느낀 감정과 비슷하다. 사이버공간을 혹자는 새로운 개척지라고 얘기한다. 다른 사람들은 신세계라고도 지칭한다. 이 모두는 때묻지않은 미지의 공간을 전제한다. 마지막으로 근원의(primal) 느낌이다. 하이테크놀로지는 자연처럼 인간에게 낮은 투명성을 갖고 있다. 자연의 원리를 이해하기에 인간의 시야와 보폭은 협소하다. 인간들은 구체적 기술의 원리를 모른 채 기술을 이용한다. 비록 인간이 만들었지만, 자율적으로 진화하는 거대한 전자공간은 인간에게 파악하기 어려운 대상으로 남아있다. 네트워크의 미시 세계에서 작용하는 비트 스위칭, 전자, 마이크로칩 등에 대한 이해를 얻기는 힘들다. 자연처럼 사이버공간은 인간의 완전한 접근과 이해를 막는다. 이 여섯 가지 느낌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전자 공간에 대한 경외다. 이는 현대 기술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모델로 다가온다. 그러나, 인간의 기술에 대한 경외감은 단지 그 겉을 흐르는 기술적 이미지일 뿐이다. 이 새로운 전자 공간에 대한 경외감은 더 깊은 인간의 욕구에서 비롯된다. 사이버공간은 어머니이자 자궁이다. 사이버펑크 작가로 유명한 윌리엄 깁슨은 1984년 뉴로맨서Neuromancer란 그의 소설에서 컴퓨터 네트워크들의 광범위한 상호접속망으로 매개되는 인간과 기계간의 근본적인 변형을 묘사하기 위해 '사이버공간'이란 개념을 처음 사용하고 있다. 뉴로맨서에 등장하는 '매트릭스'라는 전자공간은 에로스 발생의 근거, 즉 '어머니'란 뜻의 라틴어에서 생겼다. 영화 매트릭스에 등장하는 매트릭스 공간은 왜 매트릭스가 어머니에서 기원하는지에 대한 그 의미 생성의 맥락을 보여준다. 영화에서 매트릭스는 인간을 양육하는 기계 자궁이다. 인간들은 자궁안에 기계탯줄이 연결된 채 성장하고 살아간다. 죽은 인간은 따로 분리되어 으깨져 새로운 생명을 위한 양수로 쓰여진다. 매트릭스는 마치 어머니처럼 인간들을 수많은 탯줄로 연결하여 부양하는 인공지능 기계다. 대체로 네트워크나, 깁슨이 명명한 '매트릭스'로 빨려들어가는 사용자는 남성적이다. 매트릭스 그 자체는 여성적 대상이다. 동시에 매트릭스는 어머니이며 자궁이다. 접속 혹은 자궁에 들어가는 행위는 인간이 탯줄을 힘차게 끊고 세계를 향해 나온 정반대의 상황을 지칭한다. 자궁은 모든 인간에게 안전한 보호막이다. 아기들처럼 일단 자궁에 들어가면 자양분도 탯줄을 통해 공급받는 나약한 존재로 떨어진다. 인간이 근원적으로 동경하고 그리워하는 곳은 자궁이다. 무섭고 지저분한 현실의 모든 상념을 잊고 가장 편안한 인간의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인생의 모든 고(苦)를 잊는다는 점에서 그 곳은 낙원이다. 그래서, 자궁은 인간을 너무 약하게 만든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매트릭스를 벗어난 인간들은 매트릭스를 그리워한다. 꿀꿀이 죽을 먹느니 차라리 매트릭스 안의 가상식당 안에서 가짜 음식을 즐기겠다는 한 인간의 독백은 기계자궁에 종속된 약해진 인간의 모습을 상징한다. 매트릭스에 접속함으로써 잃는 것은 인간 신체와 현실 감각이다. 현실의 신체는 가면 갈수록 약해질 수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인터넷 이용자들이 새로운 가상 정체성과 결합되어 느끼는 쾌감과 열망은 이와 비슷하다. 인터넷에서 부여받은 정체성이 현실을 대체하지 못하면서도, 이용자들은 끊임없이 네트를 배회한다. 동시에 잃는 것은 현실 감각이다. 아이디로 부여받은 정체성이 현실에서 동일하게 인정받지 못함으로써, 이용자들은 가끔 자괴감이나 우울증에 빠진다. 어머니/자궁으로서 매트릭스는 인간이 그리워하는 근원이기도 하지만, 깁슨이 그리는 미래 사회는 그리 밝지 않다. 현실의 모순이 고스란히 옮겨진 공간이다. 깁슨의 매트릭스는 바로 이런 암울한 사회에서 인간을 관리하는 통합적 기계다. 인간이 끊임없이 동경하고 그려왔던 공간이 실은 인간 삶을 관리하는 기계란 사실은 영화 매트릭스에서도 동일하다. 매트릭스의 기계 탯줄을 끊은 인간만이 제대로 현실 삶을 살아가는 인간으로 비춰진다. 그 탯줄을 끊기까지의 과정은 엄청난 고통을 수반한다. 비록 현실이 위험으로 가득차고 불안하지만, 자궁의 탯줄을 끊은 자들만이 1세계의 물리적 공간을 몸으로 느낀다. 동시에 얻는 것은 현실 감각이다. 이것이 인간이 동경하는 사이버공간의 모순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전자적 3세계에 몸담기를 동경하지만, 1세계를 버리면 영원히 기계자궁 밖을 보지 못하고 살 수도 있다. 사이버공간은 초월의 욕망이다. 물리적 세계의 한계로부터 탈피하고자 하는 것, 즉 물질을 초월(physical transcendence)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지닌 태고적부터의 소망이다. 물질 초월은 바로 육체의 감옥으로부터 정신을 자유롭게 하려는 욕망이다. 자궁에 귀의하려는 욕망의 밑바닥에는 초월의 욕망이 자리한다. 현실의 무질서와 부족함은 인간에게 새로운 대안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사이버공간은 현실 공간이 주는 한계들과 부족함들에 대한 기술적 반응물이다. 현실은 인간을 짓누르는 짐이었다. 인간이 딛고있는 현실의 실존을 부정하고픈 욕망은 인간들 스스로에게 항상 새로운 유토피아의 전망을 구상하게끔 만들었다. 우선 인간은 어떤 현실적 위협없이 새로운 환경을 경험하길 원한다. 그리고 육체에 갇힌 인간의 행동 반경이 삶의 근거지가 되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것 또한 현실의 짐이었다. 무거운 살덩이를 훨훨 털어버리고 자유롭게 이동하고자 하는데는 인간 육체 초월에 대한 열망이 자리한다. 육체 초월의 시도는 동력 기술을 통한 기동성에서 일차적으로 구현되었다. 인간은 동력 장치가 달린 기차, 배, 자동차, 비행기 등을 개발하여 지리적 경계를 넘고자 하였다. 이러한 운송장치를 이용한 기동성은 아직까지도 신체의 속박을 전제한다. 이같은 동적 운동성은 인간에게 어느 선을 넘으면 신체에 무리가 오는 신호로써 멀미와 구토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정보 네트워크의 접속은 인간 이동의 또 다른 차원을 제시했다. 사이버공간은 마치 인간이 신체를 벗어나 다른 대상세계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물리적 운송장치에 비해 그 기동성 또한 빛의 속도를 선사했다. 정보가 거대한 도관을 통해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것처럼, 가만히 앉은 자리에서 지구촌을 구석구석을 넘나드는 것이 가능해졌다. 일종의 '정적인 운동'이 이제 새로운 신체적 조건이 되었다. 이는 마치 신체를 버리고 네트에 이끌려 들어가는 인간의 모습과 유사하다. 만약 공간적 느낌을 주는 가상현실 시스템이 적절히 결합한다면, 보다 더 현실적인 신체이탈의 감각을 느낄 것이다. 한편 인간 주위에 널려있는 대상의 위험함, 더러움, 슬픔, 불평등, 악취 등등에서 벗어나는 것은 인간에게 본질적인 문제였다. 사회와 역사 등이 개인에게 짊어지도록 강요하는 현실의 쇳덩이를 벗어나고픈 욕구는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신체는 바로 현실과의 연결 고리이다. 육체 초월과 물질초월의 욕망은 바로 현실과 등을 지는 행위다. 플라톤이 구상한 이데아의 세계처럼 가장 이상적인 정보세계에 안주하려는 욕망은 기계 자궁에 대한 귀의만큼이나 본질적이다. 자신의 신체가 주는 속박, 그리고 현실 세계가 주는 한계들 모두가 물질 세계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배태했다. 인간에게 사이버공간은 이러한 속박과 한계를 벗어난 새로운 신세계와 같다. 사이버공간의 패러독스 이제까지 본대로 사이버공간은 인간이 푸근하게 안기고픈 어머니이자 자궁이지만, 그 곳에 귀의하는데는 현실의 물질적 조건을 버리는 길을 택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물질과 육체 초월의 공간이지만 신체뿐만 아니라 현실의 부정과 모순 등을 모두 외면해야 한다. 그러나, 사이버공간의 존재적 지위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현실의 연장인 것이다. 포퍼가 지적했듯이 3세계는 1세계를 전제한다. 1세계 없이는 3세계는 존재할 수 없다. 사이버공간은 물리적 현실을 전제한다. 사이버공간은 재생산의 장소다. 무엇을 재생산하는가? 우리 현실의 재생산이다. 현실에서 생활하고 꾸려지는 모든 것들은 사이버공간 안에 그대로 거울처럼 반사된다. 그 곳에도 현실처럼 슬픔과 분노가 존재한다. 앞서 보았던 것처럼, 인간에게 사이버공간의 자연적 느낌들이 생기는 이유는 현실 감각 때문이다. 바로 현실을 빼닮은 곳이 인간이 만들어낸 가상공간이다. 결국 사이버공간은 생각처럼 인간 태초의 자궁이 될 수도 육체를 벗어나 접속할 수도 없는 은유의 곳이다. 인간의 욕망은 이같은 사이버공간의 현실성을 직시해야 한다. 사이버공간 안에서는 무엇이든 가능하고, 새로운 평등한 인간관계가 만들어지고, 상업적 논리가 지배할 수 없다는 근거는 무모하다. 사이버공간을 보기 위해서는 항상 현실의 거울을 통해 들여다봐야 한다. 그럴 때 진정 인간이 욕망하는 사이버공간의 미래상이 분명해질 것이다. (월간 웹디자인 200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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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디자인] 배니버 부시의 하이퍼텍스트 이후

배니버 부시의 하이퍼텍스트 이후 하이퍼텍스트의 역사적 가치 하이퍼텍스트의 기획은 어떻게 나왔을까? 좀 지루한 연보를 끄집어내보자. 1945년에 미국 과학연구개발국 국장인 배니버 부시(Vannaevar Bush)는 미멕스(memex)란 기계 장치에 대 한 유명한 논문을 썼다. 그의 문제 의식은 엄청나게 증가하는 정보에 대한 통제력의 부재로 부터 비롯되었다. 부시가 보기에 인간의 경험은 놀랄만치 확장되고 있는 반면에, 현실에서 중요한 정보들은 쉽게 유실될 수 있는 상황에 처해 있다. 그는 미멕스를 통해 정보를 서핑 하고 이를 관리하기 위한 정보 압축, 새로운 감각 인터페이스, 하이퍼미디어 시스템 등의 다 양한 해결책을 제안했다. 물론 실현되지 못한 이 장치의 핵심은 인간 정신을 확장하는 도서 관 혹은 링크의 기능이었다. 부시의 청사진은 68년에 이르러 더글러스 잉겔바트(Douglas Engelbart)에 의해 만들어진 확장(AUGMENT)이란 시스템으로 현실화한다. 동시에 그의 '확장' 개념은 인간의 모션을 컴퓨터에 연결시키는 가상현실(VR)의 기초를 이룬다. 특히, 60 년대 '하이퍼텍스트'란 용어를 최초로 고안한 테오도르 H. 넬슨(Theodor H. Nelson)은 자신 의 재너두(Xanadu)란 시스템의 기획을 통해서 앞서 두 사람의 생각을 좀 더 구체적으로 발 전시켰다. 어쨌거나 부시의 미멕스는 이른바 개인의 정신적 도서관이지만, 이는 현대의 다양한 정보 형태, 즉 텍스트, 이미지, 오디오 클립 등의 사이버공간이 가지고 있는 멀티미디어 요소와 결합하여 확장된 디지털 문서고를 지칭한다. 이미 하이퍼텍스트는 단지 문서들간의 상호 링 크뿐만 아니라 보다 폭넓은 하이퍼미디어적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터넷이란 거대한 사고의 도관(conduit)을 통해 이미 이러한 의식 확장에 대한 과학자들의 염원을 일상적으로 쉽게 체험하며 살고 있다. 프로그래머들에 의해 혹은 개별 네티즌에 의해 구성된 웹상의 하이퍼텍스트 구조는 이용자들의 새로운 의식적 체험을 불러 왔다. 하이퍼텍스트는 이전과 다른 분명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의 설계물이다. 이는 타인의 의 식과 의사소통할 수 있는, 그리고 무한히 열려있는 텍스트들의 연결 구조를 지칭한다. 하이 퍼텍스트의 특성은 고도로 상호작용적이며, 컴퓨터가 만들어내는 복잡한 공간적 이동의 자 유로운 능력을 토대로 한다. 이 글은 45년 배니버 부시가 인간의식의 확장으로서 바라보았 던 하이퍼텍스트의 가치를 현재의 인터넷 구조 속에서 어떻게 평가할 수 있으며, 그 의미들 이 현재에 이르러 어떤 식으로 위협받을 수 있는지를 간단히 살펴볼 것이다. 종합적 사고, 그러나 공허한 링크, 링크.... 우리는 이미 컴퓨터를 사용하여 문서를 작성하면서 사고와 글쓰기의 변화를 겪고 있다. 스크린상의 따붙이기와 즉각적인 수정 등을 통해 반사적인 글쓰기에 쉽게 길들여진다는 지 적도 나온다. 마찬가지로 하이퍼텍스트를 사용하면서 우리는 먼저 사고의 변화를 겪는다. 특 히 사물을 모아서 보는, 종합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이 길러진다. 프로그래머는 전체의 얼개를 고려하고 프레임을 따진다. 각각의 프레임은 연결 문서들을 고려하고, 그것이 아이콘이든 텍 스트 형식이든 전체 화면으로 돌아갈 수 있는 연결 고리를 항상 만들어 놓는다. 인터페이스는 하이퍼텍스트와 하나가 된다.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불분명하면, 하이퍼텍스 트의 기능은 무한한 정보의 바다에서 쉽게 웹서퍼(web-surfers)를 미아로 만든다. 인터페이 스가 분명해질수록 하이퍼텍스트는 그 기능을 적절히 수행한다. 다시 말해 인덱스 얼개와 하위 페이지의 구조 전체가 하이퍼텍스트의 기능 안에서 하나의 종합적인 순환 구조가 된 다. 웹서퍼가 미아가 되지 않도록 고려하면서, 프로그래머나 웹마스터는 사이트의 얼개를 짠 다. 그들이 원하는 사고나 의식의 완결된 구조가 하이퍼텍스트의 기능을 통해 총괄된다. 하 이퍼텍스트는 이처럼 사물을 보는 종합적이고 전체적인 사고를 기른다. 분석적 사고가 사물 을 떼어놓고 보는 반면, 종합적 사고는 사물을 모아 관찰한다. 이제 우리는 멀티미디어, 하 이퍼텍스트를 통해 상호 링크와 결합의 총체적이고 종합적인 의식을 표현하고 강화한다. 한편 하나의 사이트 안에 존재하는 하이퍼링크들과 문서들은 항상 자신 내부의 연결 페이 지들만을 지칭하거나 연결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하이퍼링크는 웹마스 터에게 상세한 참조와 설명을 위해 혹은 이용자의 또 다른 서핑을 위해 외부의 링크 페이지 를 요구한다. 물론 부시가 바라보았던 하이퍼텍스트의 진정 열려진 구조는 궁극적으로 이에 기반한다. 자신의 사이트를 벗어나 새로운 외부의 링크 페이지를 연결하는 것은 인간 의식 의 새로운 확장으로 볼 수 있다. 인터넷 이용자의 폭발적 증가와 연결된 노드수의 증가는 인간 의식의 확장을 극도로 향상시켰다. 링크에 의한 정보 탐색과 끊임없는 링크의 연쇄는 하이퍼텍스트의 궁극적 모델로 평가받을만하다. 그런데, 웹마스터와 달리 웹서퍼는 종합적인 사고보다는 분열적인 사고 과정을 겪는다. 끊 임없는 참조와 상호 링크는 자신이 찾아 헤매는 정보들의 질(qualities)에 의문을 제기하게 끔 만든다. 하나의 단어나 문장은 다른 하나의 단어나 문장으로 표현되고, 이 단어나 문장은 또 다른 의미를 찾아 떠돈다. 어떤 때는 중간에 지나쳤던 정박지에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열려진 하이퍼텍스트의 끝없는 상호 참조의 구조로 말미암아, 사용자가 찾고자하는 의미는 지속해서 다른 페이지나 링크로 미끄러진다(incessant sliding of meaning). 무엇이 진정 참 다운 정보인지 혹은 진정 확신할 수 있는 정보인지에 대한 분별력이 흐트러진다. 수많은 링 크와 참조는 결국 네트의 항해자들에게 현기증과 멀미를 선사한다. 일면 인터넷이 마련한 하이퍼텍스트적 구조가 사고의 확장을 위한 틀로 기능할 것이란 예측과 달리, 그 안에는 궁 극적 지식없는 단지 끊임없는 정보의 연결된 흐름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인터넷 정보의 풍 요와 더불어 하이퍼텍스트의 현기증과 궁극적 의미의 부재가 더욱 강화될 수 있는 소지를 안고 있다. 정보의 풍요가 찾고자하는 지식을 거저 주는 것은 절대 아니며, 이런 상황에서 사이버링크들의 확대/장은 웹서퍼에게 멀미만을 안겨줄 수 있다. 열린 하이퍼텍스트와 그 적들 칼 포퍼란 사회학자가 열려있고 개방되어 있는 사회를 가로막는 적들에 대해 침튀기며 비 판했던 것처럼, 비슷하게도 개방적 하이퍼텍스트 구조를 가로막는 의도적이거나 비의도적인 기법들이 존재한다. 이는 앞서 본 것처럼 하이퍼텍스트가 성장하면서 본질적으로 가질 수밖 에 없는 상호 링크의 의미 상실의 증상과 함께, 새롭게 하이퍼텍스트의 열린 가능성을 막는 징후들이다. 1. 자동 이동과 팝업 자동 이동과 팝업(popup) 메뉴는 웹서퍼의 의지와 무관하게 다음의 페이지로 연결시켜주 거나 새로운 창을 띄우는 간단한 기법이다. 하이퍼텍스트는 웹서퍼 자신의 의도된 검색의 경로를 가정하지만, 자동 이동과 팝업은 말 그대로 페이지 관리자의 강제적 권한에 속한다. 원하지 않던 원하든간에 새로운 페이지를 보거나 다른 창들과 대면해야 한다. 특히 연속적 인 팝업은 하이퍼링크를 향한 이용자의 열망을 무력화시킨다. 또 다른 연결된 링크를 찾아 헤매는 과정을 아예 한 곳에 매어놓는 부비트랩과 같은 팝업된 창들도 존재한다. 시스템의 속도를 저하시키고, 결국엔 창을 닫아버릴 수밖에 없는 과정을 통해, 하이퍼텍스트의 열려진 구조를 향한 서핑 자체가 중도에서 쉽사리 포기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자동이동과 팝업들 이 동시에 진행될 경우, 그 심각함은 배가된다. 의도하지 않은 곳으로의 링크와 그 곳에서 맞닥뜨리는 끊임없는 창들의 쇄도는 디지털 텍스트가 지닌 개방성에 역행한다. 2. 위장된 링크들 웹에서 하이퍼텍스트를 볼 수 있다는 것은 화면에서 마우스 커서의 표시가 화살표에서 손 가락으로 바뀜을 뜻한다. 웹서퍼가 원하는 정보에 대한 링크 페이지는 보통 텍스트, 아이콘, 그림 등의 기호적 인터페이스로 등장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를 클릭하여 원하는 정보를 캐어 들어간다. 그러나, 이러한 하이퍼 기능의 상식을 교묘히 위장한 지뢰들이 산재하고 있 다. 하이퍼링크를 교묘히 위장하여 다른 계열의 링크와 헷갈리게 한 후에, 서퍼가 원하는 정 보로 갈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쓰이는 방법이다. 주로 상업적 동기 에 의해 출발하는 위장된 링크들은 서퍼가 원하는 링크의 방향을 철저히 막고 엉뚱한 곳으 로 유도한다. 최근 웹서퍼들은 링크를 세심히 두드려보고 누르는 경향이 생겨나고 있다. 위 장된 지뢰를 밟지않기 위해 마우스 오른쪽 버튼으로 주소를 탐색하는 노력도 벌어진다. 이 들 위장 링크는 하이퍼텍스트의 개방성을 심각히 훼손한다. 곳곳마다 쳐진 함정들이 열려진 하이퍼텍스트의 자유로운 서핑을 지속적으로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한번 이러한 함정들에 걸리면, 자동이동과 팝업이 동시에 합세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는 하이퍼텍스트의 개방성 에 도전하는 위험한 적이다. 3. 모핑의 해체 문화 모핑(morphing)은 새로운 디지털 문화 현상이다. 모핑 안에서 변화하는 이미지들의 연쇄 는 하나의 일관된 흐름 속에 이어진다. 주로 모핑의 기법은 광고나 뮤직비디오에서 흔히 관 찰할 수 있다. 일례로, 얼굴형이란 공통의 일관된 흐름 속에서 우리는 백인의 얼굴이 흑인이 되고, 남자가 여자로 변하고, 동물 면상이 인간 얼굴이 되는 등의 모핑의 과정을 바라본다. 서로 전혀 닮을 것 같지 않은 낯선 얼굴들의 이미지 흐름이 이상하게도 하나의 틀 안에서 동일하고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반면 하이퍼텍스트는 사고의 연관성과 아이콘의 연상 작용 을 중시한다. 하나의 개념에 다른 참조된 개념이 링크되거나 추상적 아이콘에 그에 연상되 는 내용이 링크되는 경우가 그렇다. 모핑은 이런 하이퍼텍스트의 원리를 이용한다. 그러나, 연결된 이미지의 흐름인 모핑 과정은 서로 상관없는 것들도 연결시켜 닮은 것처럼 보이게 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디지털의 이미지 조작 능력은 무관한 화면들을 링크하는 모핑 과정 에서 극대화된다. 다시 말해 모핑의 과정 안에 놓여있는 각 이미지들간의 하이퍼링크 기능 은 상호 연관이 없는 개념이나 텍스트, 이미지를 관련이 있는 것처럼 묶는다. 이는 하이퍼텍 스트가 마련한 끊임없는 링크들의 공허함만큼이나, 자의적인 링크 과정들에 의한 놀이이다. 대개 모핑하는 이미지들간의 하이퍼링크는 궁극적인 인과관계나 설명관계에 의해 구성되지 않는다. 디렉터가 원하면 무엇이든 모핑의 연관된 이미지의 관계로 편입된다. 예컨대, 인간 의 얼굴과 돼지 머리가 연결될 수 있다. 모핑은 이를 용납한다. 마치 이는 사람 얼굴의 아이 콘을 클릭했는데, 돼지 엉덩이가 화면에 뜨는 것과 유사한 관계이다. 그만큼 자의적인 관계 를 상정한다. 물론 모핑은 하이퍼텍스트 구조를 발전시키는 새로운 시각적 상상력의 기법이 다. 그러나, 인간 얼굴과 돼지 면상간의 링크를 무리없이 성립시키는 모핑의 착시 원리는 상 식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지식의 탐구 과정과 무관하다. 무엇이나 모핑 과정에 연결될 수 있고 무엇이나 상호 연관의 지위를 갖는다면 객관적 진실은 어디에 있을까? 모핑의 하이퍼 링크적 상상력이 문제시되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4. 플래쉬가 막는 것 하이퍼텍스트의 종합적 사고는 플래쉬(Flash) 프로그램에 와서 극대화한다. 무엇보다도 플 래쉬는 한 사이트 전체를 완결된 구조로 본다. 다른 배열에 비해 사이트 내용 중 일부를 첨 가하거나 빼려할 때 구조 전체를 들쑤셔야 하는 경우가 많다. 데이터베이스의 지속적 업데 이트를 필요로 하는 페이지의 경우는 플래쉬가 적합하지 않다. 물론 방문자에게 플래쉬가 주는 세련된 페이지의 구성력은 로딩 시간의 괴로움도 감내하게끔 한다. 그러나, 페이지 내 에서 완결된 구조는 외부와 연결된 개방성을 떨어뜨린다. 플래쉬는 사이트 내부 페이지들간 의 독립적인 구조를 완벽하게 재현하거나 사용자 인터페이스의 새로운 디자인 설계를 풍부 하게 만드는 반면에, 외부와의 하이퍼 연결 고리는 상대적이고 부차적인 지위에 머무르게 했다. 웹서퍼들이 대개 플래쉬로 만든 사이트에 들어가면 그 자체의 내부 프레임의 서핑에 만 몰두하는 경향은 이를 적절히 설명한다. 이는 하이퍼텍스트가 지향했던 의식의 확장이라 는 개방 지향성과 거리가 먼 사이트 구성의 논리다. 열려있는 하이퍼텍스트를 위하여 이 글의 기본 시각은 부시가 본 인간 의식의 확장으로서의 하이퍼텍스트 개념에 기대어 이 루어졌다. 크게 그 방향은 첫째, 하이퍼텍스트가 가진 필연적 부산물이기도 하지만, 인터넷 시대에 그 자신의 개방성에 불구하고 링크된 텍스트들 상호간 의미의 빈곤이 점차 강화되고 있다는 점, 둘째, 무엇보다도 최근의 하이퍼텍스트 테크닉의 일부로서, 그 자체의 개방성을 가로막는 요인들이 등장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에 하이퍼텍스트의 기능은 인간 의식의 확장보다는 의식을 쓰레기더 미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이 속에서 기업은 상업적 가치를 앞세워 하이퍼텍스트의 개방적 가치를 악용하여 웹서퍼들을 덫에 걸려들게 만들기도 한다. 게다가 디지털 디자인이나 사이 버 문화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표현되는 모핑의 과정과 플래쉬조차 논리적으로 무관한 것들 의 하이퍼링크를 강화하고, 무의식적으로 하이퍼텍스트의 개방적 넘나듦을 가로막는데 일조 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링크와 하이퍼 기능을 통해 막힘없이 네트를 흘러다니면 서도, 거대한 인간 의식의 확장으로서 네트라는 도관을 통해 궁극적인 지식이나 정보를 발 견하고 참조할 수 있는 부시의 미멕스 프로젝트는 제고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웹디자인, 200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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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디자인] 신체-기계간 잡종의 밑그림, 사이보골로지

신체-기계간 잡종의 밑그림, 사이보골로지 이광석(뉴미디어평론가) 사이버공간, 사이보그, 사이버펑크 등의 용어는 90년대 한국 사회에서 디지털 문화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중요한 화두였다. 신문, 방송, 잡지 등에 등장했던 광고들은 곧잘 이 새로 운 '사이버'란 접사의 수식어를 애용하곤 한다. 사이버공간이 시/공간의 변화와, 사이버펑크 가 디지털문화와 인연이 있다면, 인간의 신체 변화를 염두에 둔 수사는 '사이보그'다. 사이버 네틱 유기체이자 자율적 인간-기계 잡종인 사이보그는 시대에 따라 그 성격이 크게 달라졌 다. 한 시대의 사이보그는 그 시대가 지닌 사회적이고 기술적인 모습을 상당 부분 반영한다. 의족이나 의수, 보청기, 안경, 인공 심장 등에서 보다 많은 기계의 부품들을 가지고 인간 신 체의 일부를 보완, 확대하거나 대체하는 보철물에 이르기까지, 신체에 감기는 부속 기계에의 의존은 지극히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다. 신체-기계의 관계는 어떻게 진화했을까? 지금의 사이보그에 대한 시각에는 혹시 어떤 잘 못된 의도나 설계가 개입되어 있지는 않는가? 이 글은 신체-기계의 잡종화(hybridization)에 대해 인간이 만들어낸 상상과 이를 통해 그 현재적인 함의를 찾아보려는데 있다. 신체-기계 사이보그란 용어는 1960년 맨프레드 클라인(Manfred E. Clynes)이 쓴 '사이보그와 공간' 이란 논문에서 최초로 등장했다. 사이보그라 얘기할 수 있는 최초의 존재는 이보다 더 거슬 러 올라가는데, 1950년대 뉴욕의 로크랜드(Rockland) 주립병원 실험실의 흰쥐 한 마리가 그 공식적 출발이었다. 쥐의 심리적 반응을 보기위해 몸에 부착된 작은 펌프를 통해 화학물질 을 주입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장치가 최초의 신체-기계간의 결합이었다. 사이보그에 대한 인간의 상상력은 어땠을까? 사이보그하면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복잡 한 기계장치를 지닌 '로봇'(robot)이다. 일반적으로 로봇은 인간보다 기계에 가깝다. 간단한 메모리 칩에서부터 다양한 프로그래밍을 입력하여 반응하는 로봇에까지 종류와 기술 수준이 다양하나, 로봇은 어디까지나 기계에 불과하다. 로봇의 좀 더 발전된 형태로 '안드로이 드'(android)를 꼽을 수 있다. 안드로이드는 기계공학의 정수다. 가장 인간에 가까운 로봇 인 형이라고 할 수 있다. 사무실이나 전투용으로 개발되는 각종 인공지능 로봇 등이 이에 속한 다. 안드로이드를 로봇과 분리시키는 가장 큰 근거는 인간의 모습을 취한다는 점에 있다. 마 치 한 줌의 진흙으로 신이 인간을 빚어 생명력을 불어넣듯, 인간들은 자신의 외양을 흉내내 어 로봇 인간을 만들어냈다. 물론 안드로이드의 한계는 감정과 추억의 부재다. 감정이 없음 은 인간이 지닌 미묘한 오감의 느낌을 담아낼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함을 나타내며, 추억이 없음은 인간이 지닌 노쇠와 생식의 불가능성을 상징한다. 예컨대, '터미네이터' 시리즈는 안 드로이드의 대표적 유형으로 들 수 있다. 리들리 스콧(Ridley Scott)이 만든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에 등장하는 '레플리컨 트'(replicant)는 이런 점에서 한 단계 발전한 신체-기계의 유형이다. 레플리컨트에는 생명공 학의 기술적 결과물들이 함유되어 있다. 레플리컨트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되묻 는다는 점에서 보다 인간에 근접해 있다. 겉으로 보기에 너무나도 인간과 구분하기 힘들지 만, 복제된 각각의 추억이 진실이 아님을 인지한 후에 떨리는 망막은 레플리컨트의 존재론 적인 실체를 인간과 분리하는 단서가 된다. 그래서 이들의 사냥꾼인 블레이드 러너가 묻는 질문은 한 인간이 지닐 수 있는 과거의 향수와 기억에 관련된 것들이다. 사이보그의 궁극적 원형은 인간의 기억으로 끊임없이 회귀하는 '로보캅'에서 발견할 수 있다. 물론 70년대 텔레 비전 시리즈물 [6백만불의 사나이The Six-Million-Dollar Man] 또한 로보캅과 비슷한 사 이보그의 유형으로 들 수 있다. 어쨌든 로보캅은 불의의 사고로 사이보그로 새롭게 태어났 지만, 한 가장으로서의 인간, 사적이고 감정적인 기억들을 지닌 인간으로 되돌아가려는 로보 캅의 모습에서 진정한 사이보그의 전형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과 기계가 합치되었어도 로보캅은 인간이 지닌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신야 추카모토(Shinya Tsukamoto)의 [테추오2: 신체병기Tetsuo II: The Body Hammer]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모 습은 로보캅의 탄생과 비슷한 스토리를 지닌다. 가족의 사고와 분노, 뒤이은 주인공의 사이 보그화, 그리고 존재론적 방황 등등. 어쨌거나 로보캅과 테추오에 등장하는 현실은 참혹하 다. 기억의 성소는 가족에만 한정된다. 그 성소를 짓밟는 현실의 적을 제거하기 위해 기계의 몸이 필요하고, 신체는 자신의 기억을 더듬는데 이용된다. 현실의 적에 대한 분노와 제거까 지를 합리화하는데 사이보그의 신체 기억을 전제한다는 점은 결국 이 영화들을 뻔한 권선징 악의 논리를 따르게 하지만, 사이보그를 보다 인간에 가깝게 다가서게 만들었다. 신체-기계-네트 이제까지의 사이보그들이 주로 객관화된 실체로서의 신체-기계의 발전이었다면, 새로운 사이보그의 현실은 네트에 의해 마련된다. 이제 사이보그는 네트에 접속된다. 사이보그 자체 가 네트라는 정보의 바다에 데이터 혹은 콘솔처럼 기능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컴퓨터 역 사를 보면 개인 피시 시대에서 이들을 연결한 인터넷 시대로 가는 것과 비슷하다. 이제까지 인간과 기계와의 잡종이 독립된 신체-기계만을 염두에 두었다면, 네트로 인해 사이보그는 서로 접속 가능한 신체-기계로 기능할 수 있게 된다. 마모루 오시이(Mamoru Oshii)의 [공각기동대Ghost in the schell]에서는 사이보그가 네트 에 접속하기 위해 목 뒤 포트 깊숙히 연결 단자를 삽입한다. 일반적으로 신체-기계가 네트 에 접속되는데는 신체 신경이 흐르는 맥(脈)을 포트로 활용했다. 워쇼스키(Wachowski) 형 제의 영화 [매트릭스The Matrix]에서도 해커 혁명가들이 매트릭스에 들어가기 위해 목 뒤 의 포트를 이용한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David Cronnenberg) 감독의 [엑시스텐츠 eXistenZ]에서는 가상의 세계에 접속하기 위해 인간의 등 한가운데 뚫어놓은 바이오포트 (bioport)에 마치 유기체같은 포드(pod)란 콘솔을 연결시킨 인간을 지켜볼 수 있다. 목 뒤나 귀밑, 척수, 머리 정수 등은 특히 SF 픽션의 세계에서 주체의 '중력이탈'(escape velocity)로 이끄는 중요한 모뎀 포트로 활용된다. 픽션의 세계에서뿐만 아니라, 실제로 사이버네틱스 연 구자인 케빈 워익(Kevin Warwick)은 신체 반응의 신호를 컴퓨터에 전송하는 칩을 자신의 팔의 신경망 안으로 이식함으로써, 사이보그의 미래를 보여주기도 했다. 전위예술가인 스텔 락(Stelarc) 또한 신체 확장 실험의 일환으로 로봇을 이용하거나, 더 나아가 자신의 팔 안에 이식된 칩을 이용하여 무선 인터넷을 통해 자신의 팔을 원격으로 조정하는 실험을 장기적으 로 벌이고 있다. 특히 공각기동대의 가장 진일보한 측면은 네트를 통해 사이보그의 재생산과 생식의 가능 성을 타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인공 여전사는 끊임없이 자신의 근원이 어딘지에 대한 존 재론적 질문을 던진다. 이 점에서 사이보그는 매우 인간적으로 비춰진다. 또한 그녀는 몸체 없이 네트에서 자유롭게 이동하는 디지털 덩어리와 합쳐지면서 새로운 사이보그로 다시 태 어난다. 이는 인간 자궁에 의한 생명의 탄생만큼이나 혁명적 인간-기계관이다. 비록 인간과 똑같은 기억과 추억을 지니고 있진 않았지만, 공각기동대의 여전사는 네트를 통해 다른 기 계와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자아를 가진 사이보그로 거듭난다. 이는 정보와 정보가 합쳐져 새로운 정보로 태어나는 네트의 속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사이보그 또한 정보의 원리 에 따라 새로운 주체의 형성이 가능하다는 진일보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결국 신체-기계의 독립된 사이보그 모형이 현실을 적으로 보고 이를 부정할 수 있는 힘을 축적하기 위해 만들 어졌다면, 새로운 사이보그 주체는 힘의 근원을 신체적 연장에서 찾기보다 네트에 접속함으 로써 여기에서 흘러드는 무한한 능력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강해진다. 마치 어머니의 품안에 서처럼 네트를 통해 사이보그는 배양되고, 기계 확장을 통한 독립된 힘의 극대화보다는 네 트에 연결되어 성장하는 신체-기계로 초점이 옮겨간다. 사이보기즘에서 사이보골로지로 현실적으로 사이보그 이미지는 힘의 상징으로 부각되었다. 현실이 제시하는 압도적인 힘 의 우위에 대해 가녀린 인간이 이를 벗어나려하는 상대적 힘에 대한 열망과도 같았다. 도구 를 사용하는 인간으로서의 호모 파베르라는 인간의 위상은 수천 수만년을 거쳐 진화하면서 신체내에 기계를 두고자하는 바람으로 발전했다. 신체 연장인 기계력에 의해 현실을 제압하 고자 하는 인간 욕망은 필연적이었다. 문제는 이같은 욕망의 언저리에 항상 '사이보기 즘'(cyborgism)이 꿈틀거리고 있다는 점이다. 욕망과 물신(fetishism)이 배다른 한 쌍으로 기 능하는 것처럼, 사이보그가 되고자하는 욕망에는 물신의 논리가 교묘히 기어든다. 힘에 대한 동경은 인간 신체에 대한 상대적 결핍을 미워하게 만들고, 끊임없이 사이보그가 되기위한 상품 소비의 길로 내어몬다. 오감을 확장하기 위한 각종 가전제품의 소비는 사이보그 인간 의 필수품이다. 시각을 확장하기 위한 디지털 캠코더, 청각을 위한 디지털 오디오, 네트에 접속될 수 있는 최상급 버전의 노트북이나 몸에 차는 컴퓨터,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휴대 폰 등등 어디에서든 사이보기즘의 욕망을 관찰할 수 있다. 물론 이제는 신체-기계가 아닌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몸 곳곳은 이미 신체-기계 화되는 과정을 겪고 있다. 네트는 그 과정을 더욱 가속화시킨다. 24시간 내내 인간은 네트에 접속하여 살고 싶어한다. 신체-기계-네트의 새로운 사이보그 인간형이 도처에서 등장한다. 새로운 인간형이 지닌 긍정적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사이보기즘의 유혹이 도사린다. 사이보 그가 되는데 경제적 능력이 요구되거나, 좀 더 나은 브랜드 네임을 가진 부품을 구입해야 한다면 미래는 암울할 수 있다. 이러저러한 사이보그가 되라고 광고 등을 통해 누군가가 억 지로 강요한다면 그것도 큰 문제다. 항상 최상의 모델을 위해 끊임없이 소비하는 사이보그 주체,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 된다면 곤란하다는 얘기다. '사이보골로지'(cyborgology)는 사이보기즘을 극복하기 위한 중요한 대안이다. 애초 이 용 어는 사이보그를 연구하는 크리스 헤이블스 그레이(Chris Hables Gray)란 교수가 사용했다. 그는 이 용어를 사이보그를 다루는 모든 학문간의 경계를 넘자는 취지에서 제기했다. 그것 이 사이보골로지이던 사이보그학이던 용어의 태생적 의미에 개의치 않는다면, 인간이 도구 를 통해 진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기계-네트의 결합을 통해 또 다른 신체의 진화를 도모 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는 인간 신체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 의의를 지닌다. 단 인간의 사이보그 욕망과 상업적 논리가 교묘히 결합된 사이보기즘의 물신론을 넘어서서 인 간-기계-네트의 존재인 인간에 대한 현실론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이제까지 사이보그의 논의는 추상적이었고, 그나마 현실적 논의는 상업적 물신론이 개입된 사이보기즘이 지배적 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필자가 보는 사이보골로지의 궁극적 비전이다. (웹디자인 200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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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오픈소스운동, 인터넷지식은 '만인의것'

[매트릭스 라이프-인터넷 10년,이렇게 바뀌었다] <5>오픈소스운동, 인터넷지식은 '만인의것' [동아일보]2004-01-26 41판 18면 2533자 문화 기획,연재 최근 인터넷에는 ‘오픈콜라(Open Cola)’란 말이 떠돌았다. 콜라 음료의 제조법에 대해 서로 정보를 나누고 틀린 부분을 수정하고 새 지식을 더해나가다 보면 최상의 맛을 가진 콜라 제조법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라는 네티즌들의 지식공유 움직임이 ‘오픈콜라’였다.지난해 말 문화개혁시민연대, 사이버문화연구소 등 6개 시민 사회단체는 ‘정보트러스트 운동’(http://www.infotrust.or.kr/)을 출범시켰다. 인터넷에서 사라져가는 우리의 디지털 역사와 정보를 복원하고 시민의 자산으로 공공화하자는 것이다. 소멸 위기에 처한 자연이나 명승지를 시민들이 사들여 국가에 위탁하는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의 사이버 버전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이 운동의 취지. 네티즌들의 자유로운 참여에 의해 인터넷연표를 정리하는가 하면, 우리나라에 웹이 처음 소개된 것은 1993년 ‘KRNET93’ 대회에서의 포항공대 이재용 교수의 강의라는 등 가치 있는 디지털 정보와 기록을 정리하는 것이 주요 활동이다. 이처럼 ‘공유의 철학’을 언론, 법, 디자인, 교육 등으로 확산해 사회적 자원의 기초로 삼으려는 네티즌들의 노력이 늘고 있다. ● ‘지식독점’ 버리고 ‘지식공유’ 촉구 과거에 지식 또는 정보는 개인 또는 소수의 배타적 작업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었다. 그들이 생산하는 ‘지식의 부가가치’는 돈을 받고 판매됐다. 그러나 이제 네티즌들은 소수가 ‘저작권’을 기초로 지식을 독점하고 그 지식이 창출하는 부를 독점하는 현실을 거부한다. 저작권 체제에 맞서 각자 지닌 것에 발을 달아 평등하게 서로(P2P) 나누고, 닫힌 소스 코드를 공개(오픈소스)해 이용자 공동의 자산으로 삼자는 것. ‘오픈소스’ 운동의 출발점이자 최대 성과인 오퍼레이팅 시스템(OS) 리눅스는 1991년 소스 코드를 무료로 공개한 이래 전 세계 500만명이 넘는 자발적인 프로그램 개발자 그룹을 확보하고 있다. 이제 우리가 흔히 쓰는 OS인 MS사의 윈도 외에 리눅스와 매킨토시까지 지원하지 못하는 컴퓨터 환경은 사용자들의 외면을 받고 도태될지도 모른다. 지난해 한국의 곽동수 교수(한국사이버대 컴퓨터정보통신학부)는 ‘프리뱅크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윈도뿐 아니라 리눅스와 매킨토시를 OS로 사용하는 모든 개인용 컴퓨터가 인터넷 뱅킹을 할 수 있도록 은행들이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는 요구다. 이 프로젝트는 인터넷뱅킹을 이용하는 20만명에 가까운 리눅스와 매킨토시 유저들을 주류 세계로 편입시켰다. ● 시장의 반격 이처럼 지적 자원을 공유하고 무수히 번성시키려는 사이버 ‘코뮌’의 철학이 크게 기를 펴는 듯 보이지만 시장의 역공 또한 만만치 않다. 저작권자의 인센티브를 고무하는 것이 목적인 각종 지적재산권은 역으로 정보 이용자들의 숨통을 막기 십상이다. 일례로 앞으로는 축구경기장에서 저작권료를 내지 않고 애국가를 틀기도 어려워질지 모른다. ‘애국가’도 저작권료 징수 대상이기 때문이다. 저작권 위반의 시비 대상에서 이젠 서비스업자뿐만 아니라 그 이용자들도 안전하지 않다. 지난해 12월 P2P 음악서비스인 ‘소리바다’의 이용자 50명이 한국음반산업협회에 의해 저작권 위반혐의로 고소당했다. 지난해 9월 미국에서 P2P 이용자 261명이 무작위로 고소당한 선례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고소 고발로 저작권을 배타적으로 수호하는 것보다는, 오픈소스 운동이 지닌 공유의 가치를 거세한 채 기존의 운동을 상업화하는 독점업체들의 논리가 아무래도 한 수 위다. 미국의 P2P 음악서비스 ‘냅스터’는 지난해 파산 후 11월 600만달러의 자본을 수혈받아 온라인 유료 음악서비스인 ‘냅스터 2.0’으로 탈바꿈했다. ‘소리바다’도 3월부터 유료로 전환한다고 한다. 영리한 자본의 생리야 그렇다 쳐도, 그로 인해 인터넷의 자유정신까지 화폐의 굴레를 온전히 뒤집어쓰는 현실은 문제다. 오픈소스 운동에 대해 각국 정부들이 ‘시민의 공공영역 확대’보다는 ‘경제적 비용 절감과 시장부양 효과’에만 열광하고, 지식정보 이용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새로운 공유문화를 오로지 상술로 가둔다면, 인터넷이 만들어온 ‘공유 철학’의 사회적 비전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광석 뉴미디어평론가·웹진 ‘네트워커’ 편집위원 ▼용어설명 ▼ ●자원공유의 사회 모델 핀란드의 철학자 페카 하이마넨 박사(31)가 저서 ‘해커 윤리’(The Hacker Ethic·2001년)에서 제시한 개념. 그는 스페인의 사이버 이론가 마뉴엘 카스텔(저서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과 더불어 인터넷 공간에서 벌어지는 공유와 나눔의 철학을 전 사회적인 복지모델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하이마넨 박사는 이를 위해 필요한 인터넷 시대의 생활자세는 마치 어린 아이처럼 편견을 갖지 않고 사물을 대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P2P 일대일 파일공유(Peer-to-Peer file sharing)를 뜻한다. 기존 컴퓨터 정보교환이 ‘서버에서 클라이언트’로 중앙 집중적인 형태를 띠었다면 P2P는 개인 컴퓨터끼리 직접 연결하고 모든 참여자가 공급자인 동시에 수요자가 되는 평등형 정보교환 형태. 1999년 당시 고교생이었던 숀 패닝이 개발한 미국의 P2P 음악서비스 ‘냅스터’, 그의 한국형 모델이라 할 수 있는 ‘소리바다’ 등이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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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재권’ 자본 횡포와 유쾌한 반란

'지재권’ 자본 횡포와 유쾌한 반란 [한겨레]2003-07-18 01판 21면 1430자 정보통신·과학 컬럼,논단

 

“내 나라는 자본에 영혼을 팔아넘겼고/ 소비주의는 종교로 등극했고/ 진정한 자유의 의미 또한 잊혀졌다.”

 

얼마전 〈뉴욕타임스〉에 실렸던 전면광고의 일부 문구다. 광고에는 주식시세표 위로 엄청나게 크고 시커먼 먹점이 반을 뒤덮고, 자본의 제국에서 나라를 구하자는 선언 문구가 나머지를 채우고 있다. 이 광고는 ‘애드버스터’란 좌파 디자인 집단이 최근 벌이고 있는 예술 운동의 일환이다. 이들 단체는 길거리에 넘쳐나는 거대 기업들의 상표나 관련 상징물에 시커먼 먹점을 매겨 자본에 대한 불신을 표현하고자 한다. 좌파 디자인집단 예술운동 최근 들어 예술가들의 이런 현실 개입은 지적 재산권에 대한 문제 제기로 확장되는 추세다. 특히 창작이 모방·인용·패러디 등을 통해 성장하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 더 창작물 표현의 자유를 위해 지적 재산권의 횡포에 대한 맞대응이 필요하다고 본다.

 

뉴욕·시카고를 거쳐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불법예술: 기업 지배하의 표현의 자유’ 전시회는 그 대표적 시도다. 그림 전시, 음악 시디와 디브이디 영화 편집 제작, 사이트(illegal-art.org) 개설 등 다방면에 걸쳐 저작물의 불법 사용이란 죄목으로 각종 소송 위협에 시달렸던 문제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밧줄에 목맨 미키마우스, 허벅지를 드러내고 난쟁이를 유혹하는 백설공주, 매춘녀로 둔갑한 스타벅스 커피의 여신 이미지들, 포케몬 인형에 수음하는 강아지, 바비 인형에 빠져드는 한 남성의 행동, 텔레토비의 아기 해를 대신한 부시대통령이 눈에 광선을 뿜으며 텔레토비 동산을 초토화시키는 영화들, 그리고 다른 음원들을 무단 샘플링해 문제가 된 네거티브랜드, 비스티보이스, 퍼블릭에너미, 더 버브(The Verve) 등 유명 가수들의 관련 곡들을 개설된 사이트를 통해 접할 수 있다.

 

창작물 모방이 창조로 이들 작품의 공통점은 한가지다. 순도 100%의 오리지널이라고 주장하는 창작물의 권리를 무단 도용한 혐의다. 하지만 표절, 모방, 복제의 낙인은 섣부르다. 사용된 다른 작가의 작품이나 기업 이미지 등은 패러디돼 주로 정치적 표현의 소구 장치로 쓰인다. 오만방자한 권력의 상징물들을 가져다 재해석한 죄밖엔 없는 것이다. 이는 국내 옴니버스 영화 〈묻지마 패밀리〉의 ‘내 나이키’ 마지막 대목과 비슷한 정서다. 나이키를 동경했지만 살 능력이 없던 한 아이가 결국은 나이키 상표를 복제하는 법을 깨쳐 집안 식구들 모두에게 나이키 상표를 붙여주던 영화의 마지막은 나이키 권력을 ‘엿먹이는’ 유쾌한 조롱이자 반란이었다. 갈수록 문화계의 패러디와 비판의 영역이 불법과 표절의 딱지로 취급되고 그 건강성이 위협받고 있다. 또 다른 창작을 위한 표현의 자유에 대한 보장 없이 어찌 문화와 예술의 질적 발전을 기대하겠는가. 사리분별 없이 사방에 흉기를 휘두르는 거대 자본들 아래에선 예술은 주눅들고 멍들 뿐이다.

 

이광석/〈네트워커〉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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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식적인 ‘아동인터넷보호법’

비상식적인 ‘아동인터넷보호법’ [한겨레]2003-07-04 01판 20면 1334자 정보통신·과학 컬럼,논단 지난달 23일 미국 연방 고등법원에서 불미스런 판결이 나왔다. 인터넷에서 어린이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표현과 정보 접근의 자유를 근원적으로 갉아먹을 수 있는 악법이 재차 옹호됐기 때문이다. 이 법은 각급 학교와 공공 도서관 컴퓨터들에 음란 차단 프로그램을 설치하도록 하고, 만약 이를 따르지 않으면 연방 보조의 기금이나 할인 등 지원과 혜택에서 배제되는 불이익을 감수하도록 해놓았다. 이것이 2000년 12월 의회를 통과해 제정된 일명 ‘아동인터넷보호법’의 내용이다.자나깨나 질서 확립에 목숨 거는 정치인들과 일부 걱정 많은 학부모들의 궁합에 의해 태어난 이 법의 표적은, 인터넷에 떠도는 ‘음란’ ‘아동 포르노’ 혹은 인종 편견 등과 같은 ‘소수자들에게 해로운 정보’다. 자라나는 아이들을 음란 쓰레기 정보로부터 막아야 하는데 무슨 이견이 있겠는가? 하지만 방법이 어설프다. 그렇게 말 많고 온갖 결점들이 두루 거론된 필터링 기술이 고작 이 법이 내세우는 어린이보호의 핵심이다. 어처구니없는 판결이 있던 날 재미있는 보고서가 함께 나왔다. 온라인 인권단체 ‘전자프런티어재단’과 ‘온라인정책그룹’이 공동으로 바로 이 필터링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공립 학교들의 인터넷 정보 접근도를 상세히 살펴 주목을 받았다. 조사에는 캘리포니아, 매사추세츠, 노스캐롤라이나 3개 주의 의무 학습교재 내용을 검색의 기초자료로 활용했고, 대중화된 음란물 차단 프로그램 ‘서프컨트롤’과 ‘베스’가 깔린 컴퓨터들에서 검색엔진 구글로 100만개의 검색 결과들을 분석했다. 결과는 이제까지 산발적으로 필터링 프로그램의 오류를 거론하던 수준을 넘어선다. 교육적으로 볼 만하거나 봐도 되는 정보를 막는 과잉 차단은 물론이요, 정말 막아야 할 것은 아예 방관하는 과소 차단도 매우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소프트웨어 차단 수위를 가장 엄격히 적용해도 음란정보 차단율이 최대 70%를 넘지 못하고, 그도 명확한 차단 범주들에 의거해 필터링이 진행된 결과는 고작 1%대다. 대개가 부정확한 근거에 의해 잘못 분류되고 봐야할 정보들을 마구잡이식으로 잘라냈다. 올바르게 쓰여야 할 필터링이 학생들의 정보 접근권과 교육 기회를 이렇듯 심각히 억압하고 사전검열의 잣대로 쓰인다면 정보보호법의 존립 근거는 없다. 이미 지난해 지방 법원에서의 승소로 인터넷보호법이 표현의 자유를 심각히 침해하는 위법임을 밝혔던 미 도서관협회나 관련 시민단체들 입장에서 보더라도, 이번 상급 법원의 결정은 한참 비상식이다. 그럼에도 재정난으로 허덕이는 대다수 지역 공공 도서관들이 연방 지원금을 버리느니 무식한 소프트웨어를 눈 딱 감고 선택할 수밖에 없는 불우한 현실이니 어쩌겠는가. 이광석/ 〈네트워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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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 리눅스 펭귄 ‘목죄기’

MS 리눅스 펭귄 ‘목죄기’ [한겨레]2003-06-13 02판 20면 1368자 정보통신·과학 컬럼,논단 요새 미국 경제를 두고 ‘퍼드’(FUD)란 약어가 심심찮게 쓰인다. ‘두려움’(Fear), ‘불확실’(Uncertainty), ‘의심’(Doubt)이 신경제의 특징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퍼드 심리의 확산은 경기를 더욱 얼어붙게 하는 부작용도 있지만, 반대로 시장 위기는 기업마다 저비용, 고효율의 경제 수요를 늘리도록 독려한다.열린소스 프로그램의 대표격인 리눅스는 이런 경기 침체와 불안을 타고 오히려 수요가 급증한 경우다. 거의 공짜나 저가의 배포판으로 공급되는데다 보안까지 탁월하니 굳이 비싼 돈 들여 마이크로소프트(엠에스)의 프로그램만을 고집할 이유가 없어졌다. 그러자 얼마 전 엠에스의 스티브 발머 최고경영자는 자사 전직원들을 상대로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전했다. 그는 리눅스가 엠에스의 미래를 가로막는 가장 큰 적이며, 특별히 아이비엠을 리눅스의 가장 큰 배후자로 꼽았다. 리눅스는 서버컴퓨터 시장의 13.7%를 차지하며 업계 2위로 오를 정도로 급상승했다. 게다가 몇 년 전부터 여러 정부들과 각급 비영리 기관들이 리눅스를 엠에스의 대안 모델로 찾을 정도로 인기가 좋다. 엠에스는 이대론 안되겠다 싶었던지 최근엔 리눅스 펭귄의 목을 아예 비틀며 압박해 들어온다. 일차로 남미, 아프리카, 중동, 인도, 중국 등 새로운 시장 잠재력을 지닌 정부와 교육기관을 겨냥한 프로그램 가격 할인을 공격적으로 펼치고 있다. 미국내 비영리단체들에 대한 프로그램 기부도 급증했다. 지난해만 2억7천만달러에 향후 3, 4년간 매년 10억달러어치 정도의 프로그램을 이들 단체에 공급할 예정이다. 할인과 기부의 합법적 시장 기제를 동원한다고 하나, 대규모 물량 공세는 상대를 아예 몰살시켜 독점을 영구화하는 법이다. 이미 리눅스를 쓰려던 비영리단체들이 엠에스 공짜 프로그램 공세에 녹아나는 현실은 이를 방증한다. 반열린소스 계열의 보스 구실도 앞장선다. 지난 3월 초 에스시오(SCO)란 기업은 자사 소유인 유닉스의 코드를 리눅스에 도둑맞았다며 아이비엠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95년에 소프트웨어 업체인 노벨로부터 저작권과 특허권의 이전 없이 오직 라이선스 권리만을 사들인 이 회사는 아이비엠을 비롯해 1500여개 기업들에 경고 편지까지 발송했다. 이 와중에 엠에스는 이 회사와 라이선스 계약을 보란듯 체결하며 이 회사의 공갈에 힘을 실어줬다. 지난주 정통부 산하 한 단체 원장에 한국 엠에스 사장이 내정됐다고 한다. 유럽과 남미 등 여러 정부들이 리눅스 등 열린소스 프로그램들을 적극 고려하며 좀더 독립적인 소프트웨어 진흥의 백년대계를 세우려는 판이다. 이를 배우는 데 인색한 것도 모자라 그 미래를 이끌 수장의 자리마저 지나친 엠에스 편향을 보여서 되겠는가. 정부의 분별력이 아쉽다. 이광석/<네트워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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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산업 부추기는 사회

공포 산업 부추기는 사회 [한겨레]2003-05-28 01판 20면 1302자 정보통신·과학 컬럼,논단 미국 〈엔비시방송〉은 얼마 전부터 〈피어 팩터(fear factor)〉란 충격적인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다. 제목에서 풍기는 바대로 외부의 공포에 대한 인간의 극한을 시험해 이를 통과한 자가 이기는 리얼리티 쇼다. 수천마리의 바퀴벌레 속에 머리를 들이밀거나, 정체불명의 동물 내장을 입안 가득 삼키거나, 악어가 헤엄치는 물 속을 지나치거나, 수백마리 들쥐와 유리상자 안에서 동거하는 등 기괴한 공포 기법들이 고안되어 스턴트 지원자들을 강도 높게 실험한다. 대개 승리는 공포와 무관할 정도로 반쯤 미쳐야 가능하다.이 프로그램은 마치 9·11 동시다발테러 이후 외부의 가상 적으로부터 받는 심리적 공포에 대비해 전국민을 유격훈련시키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만큼 미국민들의 의식에는 소위 ‘두려움의 문화’가 체질화하고 있다. 게다가 국가는 날마다 테러 경고 지수로 전국민들을 일상적 공포 체제로 몰아넣는다. 이를 두고 한 논자는 “공산주의를 무서워하던 1950년대 정서는 지금의 공포 심리에 비할 바가 못 된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일부 업자들은 그 흐름을 타고 침체된 디지털 경제의 주류로 득세한다. 최근 디지털 전문잡지 〈비즈니스 2.0〉은 두려움의 문화로 먹고사는 부류를 주목해 아예 ‘공포 사업’이라 칭한다. 잡지는 침체된 경제 상황에도 50여 굵직한 벤처자금이 유입될 정도로 외부 적에 대비한 보안·감시 관련 사업이 호황이라고 전한다. 중요한 점은 이들이 단기성 수요에 응할 뿐만 아니라 실리콘밸리 기술 발전의 중장기적 흐름을 새로이 주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포 산업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대대적인 자금 지원 등을 고려하면, 이것이 그저 반짝 특수나 열풍만은 아니란 추측이다. 실리콘밸리 새흐름 주도 공포 사업의 종목은 테러대비 공항 보안 장치, 각종 모니터·위성 감시 장비, 독가스 등 맹독성 화학물질 식별기, 벌과 식물 등을 이용한 폭발물 감별, 컴퓨터 보안 체계 및 네트워크 구축 등 수없이 많다. 가상의 적을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인권 침해와 일상 감시의 첨단 방식들이 대거 고안된다. 9·11 이전에 민간용 기술 개발을 하던 업체들이 경기 침체를 맞아 필사적으로 벤처 자금 마련을 위해 공포 기술 분야로 업종을 바꾸는 일도 흔하다. 그러나, 두려움과 공포의 문화는 끊임없이 적을 주조해 근거 없는 불신과 적대를 조장하고 끝내는 책임 못 질 파국을 스스로 재촉한다. 집밖의 불안과 공포를 막겠다며 총기를 소유한 미국인들이 오히려 더 큰 대가를 치르고 있듯, 또 한번 공포 기술은 외부 세계의 적보다 그들 스스로를 옥죄는 무서운 흉기들로 돌변할 공산이 크다. 이광석/ 뉴미디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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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 ‘신뢰’ 불신의 덫으로

MS ‘신뢰’ 불신의 덫으로 [한겨레]2003-05-14 01판 20면 1317자 정보통신·과학 컬럼,논단 지난해 초 마이크로소프트(엠에스)의 빌 게이츠 회장은 새로운 기술 개발보다 보안 강화 쪽으로 기업 전략을 수정하겠다며 ‘신뢰의 컴퓨팅’이란 말을 지어냈다. ‘코드 레드’ 바이러스에 초토화된 엠에스 프로그램들을 보며 그의 억장이 무너졌던 사연이 있던 터였다. 하지만 그의 큰 다짐이 무안하게도 올해 초 엠에스의 취약한 서버들이 국내 ‘컴퓨터대란’의 주역을 떠맡고, 최근엔 ‘패스포드’ 인터넷 서비스 이용자 2억명의 비밀번호가 외부에 노출돼 ‘신뢰’가 땅에 떨어졌다.윈도 보안에 ‘구멍’ 비상 엠에스는 윈도 보안 관련 투자만 지금까지 2억달러에다, 약 8500여명의 프로그래머들에게 별도의 보안 코딩 훈련을 시켜왔다. 그럼에도 지난해 2500건의 각종 ‘치명적’ 결함들이 프로그램에서 발견됐고, 그것도 2001년에 비해 82%나 증가한 수치라 한다. 보안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우를 부른다. 지난해 6월 ‘펄레이디엄’에서 시작해 올 2월 ‘차세대 보안 컴퓨팅 기반’으로 이름을 바꾸고, 이달 초 업계 모임에서 최초 시연을 한 바 있는 엠에스 보안 기술의 개발 과정은 겉과 달리 그 안에 괴물을 키우고 있는 듯하다. 인터넷 이용자들의 정당한 파일 교환을 막고 이들의 컴퓨터를 통제하는 저작물 관리용 기술 개발이라는 의혹을 사고 있다. 정보 자유의 전도사라 불리는 리처드 스톨먼은 빌 게이츠의 이 괴물 기획을 조롱하며 ‘불신의 컴퓨팅’이라 되받았다. 컴퓨터는 항상 ‘신뢰’의 절차를 받아야 하고, 한번 ‘신뢰’받은 컴퓨터에서 내려받거나 작업한 파일들은 외부 컴퓨터와 애플리케이션에선 무용지물이 된다. 게다가 펄레이디엄 기획의 하드웨어 약점을 보완한 차세대 보안 컴퓨팅 기반이란 것도 컴퓨터를 식별하는 보안 칩을 이용해야 완전해지는 까닭에 심각한 인권 침해를 일으킬 소지가 있다. 결국, 엠에스가 꾸미는 ‘신뢰’의 차세대 보안이 실은 이용자들을 움치지 못하게 하는 불신의 덫으로 둔갑한다. 더구나 2005년 출시 예정인 윈도 다음판 ‘롱혼’에 이 믿을 수 없는 기술이 완전히 합체될 예정이라 한다. 뭐든 한번 삼키면 토하는 법이 없는 엠에스가, 외부의 적으로부터 트로이를 지켜주었다는 ‘팔라스 아테나’ 여신상 이름을 딴 펄레이디엄에 대한 상표권을 과감히 내버리고 새 이름으로 고쳐 쓴 정황이 이제 감잡힌다. 기술개발 이상한 방향 보안기술 개발의 진로 수정에 따른 명칭 변경은 그저 보이는 면이다. 실은 가뜩이나 보안 무능력을 의심받는 마당에 비현실의 신화를 끌어들여 두고두고 불신의 빌미를 줄 바에야, 무미건조하고 기억하기 어려운 기술 용어를 선택하는 것이 천번만번 속 편할 것이란 판단이 섰을 게다. 이광석/뉴미디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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