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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0 -- 제주 4.3 유적답사

제주 4.3 기행

주체 : 노동자 교육센터

 

 

 

제주도는 참으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1

 

정방폭포 입구에서

 

#2 성산 일출봉과 해돋이

 

#3 제주 들녘의 해넘이

 

 #4 산방산과 푸른하늘

 

#5 얼마전 어느 분에게 선물받은 김영갑의 유고 사진집입니다.

1982년부터 제주를 오르내리며 사진 작업을 하다가 제주에 매혹되어 1985년부터 아예 눌러앉아서

작업을 하신분입니다.

밥먹을 돈을 아껴 필름을 사고 배가 고프면 들판의 당근이나 고구마로 허기를 때우곤 하셨다합니다.

그리고는 루게릭병으로 2005년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진으로 볼때는 느끼지 못했지만...

제주도의 다랑쉬오름에 오르니 김영갑사진가가

제주에 머물수 밖에 없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6 *김영갑의 유고 사진집에서.

*인터넷에서의 해상도 때문에 밑으로 길게 찍었습니다.

 

 #7 하지만 아름다움에는 그만한 댓가가 있나 봅니다. .....

 

피로 물든 학살의 땅 제주도.

그 섬의 유명하다는 곳 어디를 가도 바로 그 곳이 학살의 현장이라는 것.

아직도 한라산 자락의 어느 동굴속에서 원혼을 달래고 있을지도 모를 그때를 살다간

민중들의 명예회복과 유족의 아픔을 진정으로 보듬을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바래봅니다.

 

#8 관덕정.

1947.3.1. 4.3의 도화선이 된 3.1절 발포사건이 일어난 곳이고

1949. 4월 이승만은 이곳에서 지속적인 토벌정책을 천명했다.

 

#9

 

#10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 주시는 최규진 선생님

 

 #11 1948. 10월부터 총살이 집행되었던 현장.

그리고 나서 시체는 대충 모래사장에 매장되었다고 합니다.

 

#12

 

#13 모래사장을 밟고 있는 자체도 죄스러워 집니다.

 

#14 북촌초등학교

북촌양민학살사건의 현장

이 마을에서 4-500명의 양민이 학살되었습니다.

 

#15

 

현장에 대한 설명을 해 주시는 박준성선생님

 

#16 숙소에서 4.3연구소 분들과 간담회를 했습니다.

 

 #17

 

오승국 4.3연구소장.

 

#18

 

김은희 4.3연구소 연구원.

 

#19 이덕구 산전(山田)을 찾아가는 일행들

큰길에서 산길을 1시간 걸어가야 유적지에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적지에는 흔한 표말하나 없이 방치되고 있습니다.

 

*이덕구 : 1948년경 김달삼에 이은 2대 유격대장으로 군사부 총책임자이며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주둔하면서 게릴라 전술로 토벌대에 맞서 싸운 무장대의 지도자

 

#20 유격대의 흔적들.

 

 #21

 

 

#22 정방폭포

여행좋아하는 사람이면 한번쯤은 배경으로 사진찍는 곳. 하지만 폭포 상부의 넓은 공간은 서귀포에서

가장 큰 학살터.

1948.11.24 이후 여섯차례이상 대학살이 자행되었습니다.

 

 #23 4.3연구소 연구위원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24

 

 

 

#25

 

토벌대는 양민들을 총살한 후에 폭포 밑으로 떨어뜨렸다고 합니다.

 

#26 송악산의 해안동굴 제주도는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라서 한때는 일본군이 6만명이나

주둔했다고 합니다. (4.3당시 섬주민은 27만명정도 였습니다.)

 

이 동굴들은 강제로 동원된 노무자들에 의해 삽과 곡갱이 만으로 판 일제의 군사시설입니다.

제주도에는 80여곳에 700여개의 인공동굴이 있고 송악산에는 15개의 인공동굴이 있습니다.

 

#27

 

#28

 

#29

 

#30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

백명도 넘는 많은 사람들이 한날에 죽어 누구의 시신인지도 모르는 채 무덤도 같고 제사도 같이

치르니 한 자손이 모시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백조일손지묘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1948년에 일어났던 4.3항쟁이 다음해에는 군경의 대토벌로 어느 정도 와해되자 정부당국에서는

선무공작을 통해 귀순을 유도하고 계엄령을 해제한다.

정부에서는 귀순자들을 엄격히 심사한 후 어느 정도는 귀가해서 가족들과 생활하도록 배려를 했던 것 같다.

1950년 6.25가 발발하면서 제주도에는 소위 예비검속이라는 피바람이 전도에 휘몰아쳤다.

그 예비검속의 대상자들을 증언을 통해 추론해보면 전에 검속되었다가 일차 석방되었던 사람, 경찰이나

서청 등의 우익단체에 한번 잡혀가서 그 기록이 남아 있던 사람들이 주로 검속 대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6.25가 발발하고 정부가 부산으로 옮기는 등 상황이 악화되면서 귀순자, 경찰에서 조사를

받았던 기록이 남아있던 사람, 혹은 무고한 양민들이 예비검속이라는 명분으로 다시 체포되고 많은

애매한 양민들이 대량학살을 당하게 된 것이다.(1950.8월)

 

대량학살후에 군경은 시신수습을 못하게해서 방치되어 있다가 1956. 5월에야 수습하면서 신원파악이

안된 시신을 이렇게 합장한 것이다.

 

#31

 

#32 5.16 군사쿠데타세력은 비석을 부수고 공동묘역의 해체명령까지 내렸다.

 

#33

 

동광 큰 넓궤

1948. 11월경 집요한 토벌과 학살을 피해 마을 주민 120여명이 50-60일 동안 숨어 살았던 천연동굴

 

#34 동굴로 들어가는 입구는 낮은 포복을 해야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빛 한줄기 없는 곳에 120명이 2달 가까이 있었다는것에 그 고통과 불안해 했을 심정에

가슴깊이 져려옵니다.

 

 #35

 

#36

 

#37

 

이제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어린이도 이 험난한 길을 같이 걸어왔습니다.

또 앞으로도 계속 가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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