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20051120 --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고즈넉하고 포근한 곳입니다. 숙소였던 마을 노인회관에는 메주냄새가 은은하게 나고 둘러보면 토담집도 있고 낯선이를 경계하는 요란스런 개 짖음도 있지만 그래도 좋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4백여 원혼들이 아직도 잠들지 못하는 곳입니다. 충북 단양군 영춘면 상2리 #1 #2 #3 #4 1951년 1월 단양면 영춘면 주민 가운데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노인, 어린아이들과 영월등지에서 남쪽으로 피난을 가다 길이 막혀 더 내려가지 못한 강원도 사람들등 줄잡아 400여명이 곡계굴에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1951년 1월 20일 오전 10시쯤 미군 비행기 4대가 갑자기 곡계굴을 행해 4시간동안 집중 폭격을 가했고 피난민들은 흰 옷을 흔들어 피난민임을 알렸으나 폭격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많은 이들이 폭탄 파편이나 기관총에 맞아 쓰러졌으며 좁은 굴을 빠져나오 못한 사람들 대부분이 질식사 또는 소사했습니다. 그 곡계굴을 답사하고 왔습니다. #5 #6 곡계굴 대책위원회 엄한원 회장님. #7 대책위원회 조병우 조사부장님 #8 #9 노인회관옆에 임시로 유골과 유물을 보관해 두었습니다. #10 #11 #12 오리걸음으로 걸어가야만하는 이곳에 3-400명이 피난와 있었습니다. #13 #14 #15 #16 #17 #18 굴속에 물이 차서 더 이상 답사를 할 수 없었습니다. #19 #20 #21 곡계굴의 4백여 원혼들은 노근리의 4백여 원혼들과 왜 다른 대접을 받고 있는가? 주요언론과 정부의 무관심속에 곡계굴은 울고 있습니다. #22 자주민보의 이창기 기자님. 민간인 학살에 관하여 취재하고 인터넷 방송 [청춘]과 함께 다큐멘터리도 제작하였습니다. #23 경산시 민간인 학살 피학살자 유족회 최승호 조사부장님. 1950년 7-8월에 경북 경산의 코발트 폐광 수직갱도와 인근 골짜기에서 대구 형무소 재소자와 경산 청도지역의 보도연명원 약 3500명이 군경에 의해 학살당했습니다.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하루 10대 정도의 군용 트럭에 사람들이 실려 왔는데 내려올 때는 빈 트럭이였다고 합니다. 학살은 약 열흘 동안 진행되었는데, 포승줄에 묶여 산채로 수장되기도 했고 흉기로 가격당하거나 기름에 태워지기도 했습니다. 경산 코발트 광산에는 지금까지도 수습되지 않은 유골들이 반세기 전의 한을 그대로 품은 채 기름덩어리에 파묻혀 있습니다. #24 #25 이 곳에서 학살당한 원혼들을 위한 위령제입니다. #26 #27 #28 #29 유족회 임시 거처인 컨테이너안에 유골들은 방치되고 있습니다. #30 #31 #32 유골과 같이 묻혀있던 탄피와 탄두. 어떤이는 말합니다. 거기 유골들이 조선시대나 그 이전 시기의 유골 일 수도 있지 않냐고... 그럼 여기 있는 당시 군경이 사용하던 M1의 탄피와 탄두는 무엇인가요... #33 A지역 수직갱도의 입구. 깊이 100m정도의 이 수직갱도에 물이 차 있었는데 민간인을 수장하거나 총살하여 갱도에 밀어넣었다고 합니다. 시체가 쌓여 더 이상 학살할 수 없어 이 산 골짜기 골짜기 마다 학살을 자행해 시체가 즐비했다고 합니다. 산 전체가 거대한 공동묘지입니다. #34 #35 B지역 수직갱도. 이곳에서도 학살을 하고 시체를 밀어넣었다고 합니다. #36 #37 #38 수평갱도 입구. #39 #40 수평갱도 안에 방치되고 있는 유골들. #41 왼쪽의 두개골에는 도끼로 찍은 듯한 함몰한 흔적이 있습니다. #42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는 유골. #43 사랑니가 그대로 있는 두개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망자가 10대혹은 20대로 추정) #44 #45 정부와 지자체의 무관심속에 유골이 묻혀있는 이 곳에 버젓이 골프장 건설을 하고 있습니다. #46 답사일시 : 2005. 11. 20. 답사주체 : 나라사랑 청년회 길사랑__사진1__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