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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02 -- 지리산 빨치산 유적지 답사

2005. 10. 2. 지리산 빨치산 유적답사기행 이성근(통일광장)선생님과 함께.. 행사주체 : 민족통일애국청년회 역사기행모임 해토머리 빨치산(partisan) '파르티잔(partisan)'은 프랑스어의 '파르티(parti)'에서 비롯된 말이며, 당원·동지·당파 등을 뜻하는 말이나, 현재는 유격대원·편의대원(便衣隊員)을 가리킨다. 따라서 에스파냐어에서 나온 게릴라와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발음이 어색한건 소련식 발음을 그대로 우리가 사용한 것이라 그렇고, 그리고 빨치산하면 뉴앙스가 가지는 한국인 특유의 거부감으로 감히 발음하기도 눈치를 보는 시기도 있었습니다. 소설 태백산맥과 이태원작의 영화 남부군에서 빨치산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빨치산은 그들이 가진 순수한 이상과 신념을 가지고 힘겹게 일본과 미국에 대항했고 민족통일에 이바지했습니다. 비참한 최후만큼이나 역사적 소외를 받아오며 정권의 비인간적인 온갖 회유공작을 받다 돌아가신 분도 있고 굳굳하게 이겨내어 북으로 송환되신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송환되지 못하고 운명하시고나마 유해만이라도 이북으로 송환되신분도 있습니다. (2005.9.30. 비전향장기수 정순택선생 운명. 2005.10.2. 판문점통해 유해 북측인도... -서울신문 : 통일부 당국자는 “남북 간에 상대측 지역의 유가족에게 유해를 전달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남북 관계의 화해와 인도적 문제 해결에 기여하기를 기대한다.” 고 밝혔다.) 기행을 떠나기전에 이성근 선생님과의 토론회 #1 #2 #3 이성근 선생님 약력 1931. 전북 순창 쌍치면 피노리 출생 1946. 전북 농업학교 입학, 5학년 재학중 625전쟁을 맞이함. 1950. 쌍치면에서 로동신문 선전사업 1951. 회문산에서 로령학원 수료 회문산에서 전북도당 보위병단 특공대 2소대 문화부소대장 덕유산에서 5.1병단 2소대 문화부소대장 지리산에서 남원군 유격대 정치지도원으로 복무 1952. 장안산에서 전투중 체포 광주에서 사형구형 1967. 대전에서 비전향장기수로 출소 1968. 결혼하여 남매를 둠. 1969. 전북 김제 후생의원에서 조수생활 1975. 후생의원원장(이봉기)과 전직 김제군수(채기묵)의 신원보증으로 사회안전법상 보호관찰처분 받음. 1985. 서울로 상경 구멍가게, 독서실, 공사장경비등으로 생활 1994. 김영삼정권당시 평화와 통일을 위한 연대회의 가입 2000. 통일광장에서 소식지 사업 #4 반선에서 뱀사골대피소로 오르는 길에서 심마니 능선에 있는 비트에서 일행을 앉혀놓고 설명하신다. #5 #6 #7 석실출판사.. 세~네개의 엄청나게 큰 바위가 서로 엇갈리어 포개져 공간이 만들어진 석실. 이곳에서 당시 전북판 로동신문을 발행 했다고 합니다. #8 석실앞에서 이성근선생님.. 광각렌즈(15mm)로 찍어서 뒤의 바위가 작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엄청나게 큰 바위. #9 “반선에서 8-900m의 거리, 개울가 옆이며 그곳에는 멍석 크기의 평평한 바위가 있고, 이 주변에 온돌 아지트가 있었다. 주변에 너덜강이 있으며 그곳에 <미싱과 무기와 실탄>을 비장하였다. 화개재나 반야봉, 만복대나 정령치 어느 곳도 적들이 들어 올 수 없는 곳이 뱀사골이다. 이 바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곳이 산내면 쪽이어서 아주 알맞은 장소이다. 최전방에 보초를 세웠고 그 후방에 보위대가 심마니 능선을 장악하고 있었다. - 이성근선생님 블로그 달궁의 (팔 하나 눈 하나 그리고 총 아홉 발) 에서...- 사진으로 보기에는 좁은 바위같지만 어른 20-30명은 올라서도 될 만큼 넓고 평평한 바위다. 물이 흐르는 계곡 #10 #11 #12 #13 #14 #15 #16 #17 #18 습한 날씨때문인지 나무 이끼에 무엇인지 모를 풀이 있다. #19 단심폭포 단심은 충성의 마음을 의미한다. 625때 빨치산들이 붙인 이름인데 김일성장군께 충성을 맹세한 폭포라 한다. 지금은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다. #20 #21 수명이 길기로는 은행나무도 있지만 우리 겨레는 느티나무에 정을 더한 것 같다. 느티나무는 산에서 마을로 들어 와서 우리 겨레의 정서적 특성을 뚜렷이 하고 있다. 마을마다 그 중심에는 어김없이 느티나무가 있었으며 때로는 동구 밖이나 자주 넘나드는 영마루에도, 성황당 돌무지에도 심지여는 논밭에 서 있는 한 채의 정자 곁에도 느티나무가 포근한 가지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느티나무라 하지 않고 정자나무라고 하기도 한다. 또한 그 정자나무는 마을의 수호신이 깃든 당산나무라고도 하여 그 마을의 액운을 쫓고 평안을 기원하는 신앙의 나무이기도 하다. 느티나무는 오랜 세월 우리 겨레와 함께 수수천년 함께 해왔다. 나는 이 조국강산을 사랑한다. 노고단과 성삼제에서, 그리고 반야봉과 정령치 자락에서 흘러드는 물이 달궁에서 완만하게 경사를 이루며 우렁우렁 바위가 굴러가는 듯 물보라로 골짜기를 채우기도 한다. 반세기 전만 하여도 심원계곡을 이룬 정령치나 노고단 쪽에는 다락 논밭이 등고선을 따라서 일구어져 있었다. 물론 두 세평 정도의 귀틀집도 있었으며 여기도 당산나무가 심어져 있었고 지금 말하려는 <달궁 느티나무>도 심원계곡과 정령치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만나는 한 모서리에서 수령은 알 수 없으나 두 아름드리가 될 정도의 거대한 자태로 반세기 전이나 다름없이 서 있다. 나는 이곳을 <달궁 느티나무 터>라고 부르며 유격근거지로서 그 성격을 갖추는 유적과 사실들을 찾아내야 한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갖고 있었다. 지금 이곳은 아스팔트로 포장되었고, 음식점이 들어섰고, 등산객들이 분비는 곳으로, 천양지판으로 변해버렸다. 그러나 <달궁 느티나무 터>는 정령치에 오르는 서쪽도, 반야봉에 오르는 동쪽도, 노고단에 오르는 남쪽도 그리고 동북으로 나가는 산내면 마을 모두가 여기 달궁을 거치지 않고는 통할 수 없다. 유격전사들이 밤낮으로 오고 가는 행군의 요충지였다. 또한 여기는 유격대사령부를 보위하는 천에의 요지이다. 반야봉 한 자락에 50년대 남원군당부와 남원군 유격대지휘부가 있었으며, “뱀사골”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서 군사적 의의를 얻게 된 곳이다. 끝으로 여기는 바로 유격활동이 벌어진 곳이다. 지휘부와의 인적 물적 연계가 여러 형태로 이루어진 곳이며 대기시간, 휴식시간, 교양오락신간 등이 이 느티나무 아래에서 이루어 졌던 사연 얽힌 유격의 현장이다. - 이성근선생님 블로그 달궁의 (달궁 느티나무) 에서... #22 느티나무 옆 공터. 지금은 넓은 주차장으로 변했지만 그때는 2-300명의 빨치산이 모여서 대기, 휴식, 교양오락의 장소 이기도 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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