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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4/09/30
    프리크리(flcl), 상상력.
    도마뱀의 꼬리
  2. 2004/09/30
    군계(軍鷄) (1), 21세기 격투기의 위상은?(3)
    도마뱀의 꼬리

프리크리(flcl), 상상력.

* 구구절절 쏟아지는 스토리 요약과 인물 해설을 위해 아까운 시간과 지면을 낭비하는 것은 과학 만능 시대에 올바른 삶의 양식은 아닐 것 같다. 검색 엔진과 블로그, 그보다는 만화를 직접 보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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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분위기를 가장 잘 나타내주고 있다고 생각되는 그림

 

  애니메이션은 상대적으로 애들이 많이 본다. 반면 영화의 경우 상대적으로 어른들이 많이 보는 편이다. 특별히 애니메이션이 유치하고 영화가 고상하기 때문은 아닌 듯하다. 일본 애니메이션보다 헐리우드 영화가 더 고상하다고 주장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어차피 진지한 사회인이 가질법한 문제의식을 다룬 작품-쓸데없이 난해하다는 뜻은 아니다-이란 애니건 영화건 극히 드물다. 당연하게도 문제의식을 가져봤자 그것을 사회에 반영할 통로를 가지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상품화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애니메이션은 왜 아이들에게 타겟이 맞춰져 있을까? 나름대로의 가설을 내놓자면 나이가들수록 상상력이 감소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감소라는 표현은 적당치 않다. 여자친구가 알고보니 입양된 할아버지의 숨겨둔 딸이었다는 상상력과 여자친구가 알고보니 가변형 전략병기였다는 상상력에 우열을 두기는 힘든 노릇 아닌가? 그래도 아이들이 선호하는 상상력과 어른들이 선호하는 상상력 사이에는 차이가 있어 보인다.

 

  여튼 아이들의 상상력을 찍어내기엔 애니메이션이 탁월하게 저렴하다. 그런저런 이유로 만화의 주된 고객은 아이들이 된다. 이야기가 길었는데 그 결과 애니메이션, 특히 필자가 주로 보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경우 주된 시청자는 유소년층과 청소년층에 많은 편이다. 청소년이 주된 타겟이다보니 일본 애니의 경우 인기있는 소재가 바로 성장물이다.

 

  야구를 하고, 축구를 하다가, 연애를 하거나, 싸움질을 하면서, 때로는 거대 로봇을 조종하고, 전쟁에 휩쓸리면서, 고갯길에서 드리프트를 하기도 하며, 대마왕을 잡으러 떠나거나, 거대 마피아와 맞서면서, 발레를 하면서, 심지어 폭주족에 가담하면서, '무엇을 하건' 주인공은 성공하며 혹은 실패하며, 그것을 극복하며 혹은 끝내 극복하지 못하며, 성장하게되며 어른으로 나아가게 된다.

 

  성장이라는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서 '무엇을 하건' 상관없다는 태도의 극단에 바로 개인적으로 가이낙스 최고의 애니메이션으로 꼽는 프리크리가 서 있다. (가이낙스, 이들의 만행은 원작자도 이해못하는 기묘한 설정으로 점철된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도 유명하다) '무엇을 하냐'고? 어디선가 이태리제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난 외계인이 배트를 휘둘러 소년의 머리에서 N.O.(좌뇌와 우뇌의 사고통로를 이용, 장거리의 물질 전송을 일으키는 현상-뭐야 이게?)를 일으켜 뇌와 해적왕의 해방을 위한 파츠를 꺼내고, 소년과 외계인은 해적왕의 해방을 막기 위해 거대 무인 공장에서 파견하며 소년(혹은 소녀)의 머리에서 튀어나오는 거대 로봇에 맞서 학교와 마을을 구하다가 어쩌다가 한다는 이야기이다. ... 이해가 안된다고? 필자도 그다지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할 필요도 그다지 느끼지 못했다.

 

  프리크리의 설정은 골치아프며 정돈되어 있지 않고 스토리 진행과 주제의 이해에 많은 경우 불필요하다. 다만 놀라울 정도의 상상력으로 시청자를 즐겁게 해주고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적실하게 상징하고 비유한다. 세상 알만큼 알았다는 둥 세상 별 거 있냐는 둥 어릴 때 가질 법한(어른이 되어서도 가질 법한) 유치한 생각들과 그것을 깨버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기묘한 사건과 상황들. 실연과 질투, 동경과 좌절, 부모에 대한 불만과 실망, 타인에 대한 배려의 부재, 무력감과 자만 등의 정신적인 고통을 상징하는 두통과 머리에서 튀어나오는 거대 로봇. 그리고 그것을 극복해 나가면서 자신의 배트와 그것을 휘두를 용기를 가지게 된 소년. 다분히 내면적인 문제와 갈등을 창의적인 설정으로 유쾌하게 시각화해 낸다.

 

  프리크리는 상상력이 메말라버린 두뇌와 반드시 정돈되고 꽉 짜여진 구성만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에 꽤나 괜찮은 충격을 줄 것이다. (반대의 극단도 존재한다. 질식할 정도의 자기 완결도를 지닌 세계관에 비해 너무도 약한 메시지의 작품) 물론 이 작품이 던져주는 메시지는 별 거 없다. 성장이란 진부한 소재의 진부한 해석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것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실험적이고 파격적이다. 고골의 단편이 떠올랐을 정도로. 그렇기에 프리크리는 만화를 통해서만이 표현할 수 있는 상상력이 (적어도 영화화하기에 돈이 많이 들법한 상상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새삼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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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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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계(軍鷄) (1), 21세기 격투기의 위상은?

* 구구절절 쏟아지는 스토리 요약과 인물 해설을 위해 아까운 시간과 지면을 낭비하는 것은 과학 만능 시대에 올바른 삶의 양식은 아닐 것 같다. 검색 엔진과 블로그, 그보다는 만화를 직접 보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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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놈이 주인공이다.

 

  인류는 왜 격투기라는 것을 발명해내게 되었을까? 무슨 연고로 서로 치고 받고 싸우는 것을 기예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리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쉽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상대를 파괴하기 위해서. 적어도 상대와 정정당당한 승부를 겨루기 위해, 인체의 기능을 극한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등의 교과서적인 올림픽 정신 등에서 출발한 것은 아닐 것이다.

 

  격투기가 상대를 제압하는 것에 목적을 둔 것이라면 그것은 다른 상대를 제압하는 기술, 가령 무기술이나 전술 등과 분리될 이유도 필요도 없을 것이다. 격투기에 실전성이 요구되는 기간동안 그것은 언제나 그러했다. 우리가 킥복싱 쯤으로 알고 있는 무에타이는 148가지 무기를 다루는 크와비크와봉과 격투술인 람무에를 포함하는 개념이고, 중세 일본의 병법가란 궁술, 기마술, 창출, 검술, 유술, 전술 등을 두루 갖춘 자를 말하는 것이며 하나의 유파는 당연하게도 도장에서 검술은 물론이고 다른 모든 것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개인화기의 발달, 법체계와 공권력 체계의 발달은 격투기의 개념을 바꿔놓게 된다. 근대 사회가 발전하면서 대부분의 유의미한 실전의 승패는 제3세대 탱크와 전폭기 그리고 대륙간 탄도 미사일에 의해 결정되고 있고 주변부에서 일어나는 실전의 승패는 개인화기(대부분 칼리시니코프)와 박격포, 대인지뢰에 의해 결정되게 되었다. 일상적인 생활에서 폭력은 거의 배제되어 있고 조폭들 싸움조차도 적당한 맷집과 연장, 허술한 법, 인간관계(혹은 빽)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즉 실전에 격투가 필요없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물론 일부 영역에서 제한적인 실전에서 격투기가 유의미성을 지니는 경우가 있긴 하다. (경찰, 양아치, 중고딩 등의)

 

실전 격투가 유의미한 몇 안되는 예랄까.

폭력이 배제된 일상은 누군가의 폭력을 통해서만이 유지될 수 있다


 

  전근대적인 격투가들은 자신들의 격투기가 사멸하거나 일부 제한된 영역에서의 기예로 전락하기 원하지는 않은 듯하다. 이들은 자신들의 살인 기예를 스포츠화시킴으로서 혹은 정신적 수양의 수단으로 삼음으로서 변화를 추구하게 된다. 고류검술은 현대검도와 강도관의 유도, 대동류의 합기유술 등으로 스포츠화되었고, 쇠징박은 장갑을 끼고 상대를 살점을 날려버리던 고대 복싱은 글러브와 헤드기어를 착용하고 점수를 따는 근대 복싱으로, 목을 조르고 관절을 꺾어버리던 고대 레슬링은 매트 위를 데굴데굴 구르는 근대 레슬링으로 변화하게 된다. 실전과 살인을 유일한 목적으로하던 선대의 가르침은 무도(道)와 스포츠맨쉽으로 대체되었고 이상적인 격투가는 실전 무적의 병법가에서 올림픽 메달리스트나 링 위의 챔피언으로 바뀌게 된다.

 

  최상단 그림에 있는 우리의 주인공 나루시마 료(이제야 나왔다)의 격투기는 전근대적이다. 죽임당하지 않기 위해 (...법적으론 근거없다) 부모를 살해하여 소년원에 들어가게된 료는 살아남기 위한 유의미한 저항의 수단으로서 공수도를 연마한다. 그리고 소년원에서 나오게 되면서도 그의 전근대적인 공수도가 통용될 수 있는 좁은 공간-뒷골목 등의-에서 바둥거리며 그는 생존한다. 머리로 받고 급소를 차고 눈을 찌르고 물고 목을 조르는 가장 야만적인 쌈박질, 그러나 그가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생존의 조건에 불과하였고 그나마의 생존의 조건조차도 양지의 힘 앞에서 언제든지 짓밟힐 수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는 전진하기 위해 혹은 후퇴하지 않기 위해 스가와라 나오토를 정점으로 하는 양지의 공수도와의 싸움에 나서게 된다. 스포츠맨쉽도 무도도 아닌 가장 야만적으로 전근대적인 방식으로 바득바득 근대 격투기의 정점으로 그는 전진한다. 그렇다면 그가 맞서고자 하는 스가와라 나오토의 공수도는 무엇인가?

     이 자가 스가와라 나오토이다. 좌측이 3권 우측이 7권.

 

  흥미있는 것은 스가와라 나오토의 캐릭터가 연재를 거듭하면서 대단히 크게 변경되었다는 점이다. (뭣보다도 수염이 없어졌다.) 금욕적인 격투가에서 벗어난 현대적인 스포츠맨 정도였던 설정이 정신적인 수행과 육체적 단련에서 나오는 무도가의 완성형 정도로랄까. 여튼 근대 이후 세련된 형태로 정립된 무도로서의 격투기가 나루시마가 맞서려는 격투기인 것이다.

 

  근대 무도가와 전근대 짐승 간의 싸움은 화려한 스폿라이트의 도쿄돔에서 어두운 절간으로, 6온스 글러브에서 장봉과 톤파 등의 무기로, 5라운드KO제의 경기에서 목숨을 건 결투로 이어져 간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승패와 함께 이야기는 한 매듭을 짓고 다른 이야기로 이야기는 나아가고 있다.

  격투기의 존재 조건의 변화에 따라 격투기계는 신체의 단련과 작전으로 (그리고 프로스포츠의 경우 적절한 쇼맨쉽을 포함해) 성공이 결정되는 스포츠적 경향과 정신적 수양을 중시하는 무도적 경향이 지배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더 이상 실전성은 격투기의 존재 조건이 될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근대 격투기에 대한 환상을 가진 시대착오적 인간들의 존재는 군계와 그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작품을 재생산하고 있다. 격투기는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가? (전근대) 격투가들은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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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을 접하지 않은 사람에게 주의의 말을 적어둔다면 이 작품은 지극히 반여성적-반여성적 의식이 지배적인 이 사회에서도 두드러지게-이며 반인권적이다. 혹시 접하고자 하는 사람은 유념하면서 읽도록 하자.

 

* 이 작품에서 특히 주인공에서 나타나는 악(惡)이 단순히 스타일을 위한 것이나 악마나 마왕처럼 정체성적인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작품 전체의 주제이기도 한듯한 이 문제는 군계에 대한 다른 글을 통해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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