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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三國誌) - 후한말의 계급투쟁 (1)

1. 시작하며

 

  봉건 무협지 삼국지 연의에 대한 재평가가 근래에 들어 꽤나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근래에 들어서야 이 반동적 문학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그동안 얼마나 우리 사회가 이 악랄한 반동에 타협해 왔는가를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한 생각이 든다.

 

  물론 성군 유비와 폭군 조조를 이야기하는 봉건적 관점보다 CEO 조조와 유비를 이야기하는 자유주의자들의 판타지가 썩은 내는 덜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승상과 황제의 패거리가 되지 못한 대다수 농민의 후손들이 즐겨 먹을 수 있는 신선한 음식물인지는 장담하지는 못하겠다. 그렇다고 필자가 삼국지를 재구성하겠다거나 하는 의도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농사를 지어 세금을 내고 나면 짚신이라도 엮지 않으면 다음 가을을 맞을 수 없는 자들의 입장에서 삼국지의 시작을 장식했던 황건 민중봉기라는 계급투쟁과 이 계급투쟁에 의해 전개된 이후 계급 간의 역관계에 대한 사소한 생각을 풀고자 한다.

 

2. 후한 말의 사회

 

  태양 아래 천자가 있고 그 주위에는 승상 이하 문무 백관이 그를 보필하며 천하를 13주로 나누어 천자가 보낸 자사가 다스리며 고을 고을 마다 현령이 내려와 백성들을 보살피니 ... 운운하는 이야기는 적당히 하도록 하자. 이런 이야기의 흐름대로라면 천자가 백성들을 먹이고 살리는 셈이지만 실상은 보통 반대라서 하늘 같은 천자가 쓰고 다니는 양산과 승상부 창고에 쌓여있는 금은 보화부터 이들의 실질적 힘인 창칼에 이르기까지 직접생산자의 땀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당시 열악한 생산력은 이 직접 생산자의 절대 다수를 식량 생산을 위한 농업에 종사하게 하였고 이 사회의 분석을 위해서는 이 농민들을 중심으로 이 사회의 생산이 어떤식으로 조직되고 잉여가 어떤 식으로 흘러다니는 지를 명확히 분석할 필요가 있겠다.

 

  농민은 농사를 짓는다. 2세기 중반 이들은 이른바 자경농민이다. 자경농민이라고 해서 오늘날 남한의 중농이나 16-17세기 영국의 농민 등을 생각한다면 곤란한 노릇이다. 5인 가족 기준으로 농민 1호가 100무(전근대적인 면적 단위는 생산량이 기준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 역시 그런 맥락으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를 경작하면 매년 150석을 수확한다. 기본적인 토지세로 100석이 우리의 현령 나으리를 통해 수탈되고, 그것은 자사의 손을 거쳐 천자의 지갑에까지 올라간다. 아, 50석이나 남았군! 이라고 긍정적인 사고를 하기엔 아직 이르다. 성인의 경우 120전, 아동의 경우 20전의 인두세를 더 납부해야 하고 성인 남성에게 부과되는 노역을 구실로 300전의 세금이 추가로 부담된다. 곡식을 팔아 그것들을 내고 나면 거의 손에 남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 종자, 가축, 농구, 의복, 잡비 등을 생각하고 다음 가을까지 먹고 살 궁리를 하면 역시 부업을 좀 더 뛰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인생이 괴로운 농민들은 흉년이라도 들면 더욱 더 삶이 빡빡해진다. 그러다 농가부채도 쌓이게 되고 빚에 떠밀려 혹은 총칼..아니 창칼에 떠밀려 토지를 인근의 대지주에게 넘기고 전객(佃客) 즉 소작농이 된다. 이들 소작농은 국가에서 조사하는 인구조사에서 제외되는 모양이니 각종 세금은 납부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면 인구조사 따위 할 이유가 뭐겠는가?) 그 대신 비슷한 비율의 곡식을 지주에게 소작료로 납부한다. 뭐 그다지 인생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이들 농민은 노예가 아니다. 이들은 제한된 형태나마 신체의 자유와 재산권을 가졌다. 특히 자신의 생산 도구를 소유하고 있었고, 특히 토지에 대한 소극적인 권리 역시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생산을 자신이 통제하였다. 생산에 대한 통제권이 생산자에 있었기에 약탈자들은 생산(경제)외부에서 강제적인 수단으로 이들의 생산을 약탈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바로 세금이나 소작료의 형태이며 이는 소작 계약, 신분제, 그리고 창칼에 의해 관철된다. 바로 그것이 경제외적강제의 본질이며 이러한 경제 관계, 직접 생산자에 의한 경제 외적 강제를 통해 잉여가 추출되는 사회를 바로 바로 봉건제라고 이르는 것이다. 후한말 농민은 자경 농민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 본질은 국가가 지주로 존재하는 국가봉건제 하의 소작농과 비정부지주(NGL?)에 소속된 소작농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면 타당하며 이들은 중세 유럽의 농노, 조선시대의 전호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빼앗기는 자의 반대 축에 서 있는 빼앗는 자들에 대해서 알아보자. 기본적으로 이들 중 눈여겨 볼만한 두 세력은 천자와 그를 보필하는 관료 집단을 위시한 중앙의 국가 봉건 지주 세력과 호족이나 군벌 등으로 알려진 지방의 대지주 세력이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경제적으로 동일한 계급적 이해 위에 서 있고 의식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비교적 동질적인 집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나눠놓은 것은 후한말 중앙집권체제가 붕괴하고 지방 군벌이 발호하면서 삼국 시대가 개막되었다는 점에서이다. 이들의 차이는 크지 않았고 실제로 대표적인 군벌 조조의 경우 중원을 장악하자마자 구품중정법 등을 통해 대족지주를 견제하고 국가봉건제를 재건하기 위해 매진하게 된다.

  일부 자유주의자들은 한의 붕괴와 위의 건국을 혁명적인 변화, 조조와 그의 패거리를 혁명적인 세력 등으로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이는 황당한 이야기이다. 그가 행한 것은 국가 봉건제 재건을 위한 가장 단호하고 개혁적인 조치였을 뿐, 그것을 뛰어넘는 어떠한 대안도 실천도 창출할 의도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물론 그러한 대안조차 제시할 수 없었던 황실의 꼴통들에게는 조조가 볼셰비키보다도 더 무섭게 보였겠지만. 한나라 당이 노무현을 두려워하듯이 말이다.

 

  진과 전한 시대의 상업 억압 정책에도 불구하고 상인 세력은 꾸준히 성장하였다. 소금과 철 등을 매매하여 거부가 된 자의 이야기가 사서에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이러한 거부들은 오늘날 이건희와 정주영의 무리와 같은 산업 자본가들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이들은 수공업 등을 조직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미약한 수준이었고 이들의 부의 원천은 지주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서민들에게 소금 등 생필품을 비싸게 판매함으로써 생기는 기생적이고 약탈적인 것이었고 취약한 기반 위에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에 '상업으로 재산을 모으는 대상인은 비록 자산이 수천만에서 억에 이르나 여전히 농업을 통해 그것을 지켰다'라고 이르기도 했다. 상인자본의 기반은 항상 취약하였고 그것은 봉건 지주의 기반을 가졌을 때에만 생존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상인은 아직 유의미한 독자적 세력으로 부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봉건 세력은 일견 자신들의 필요 충족을 위해 상업을 이용하면서도 봉건적 경제 질서를 흔들 우려가 있는 상업 발달과 그를 통한 자본주의적 맹아의 성장을 항상 견제하였다. 한무제는 소금과 철의 전매제를 실시하고 평준제와 균수제를 실시하는 등 대상인을 견제하는 정책을 폈고, 조조-전한시대 사람입니다-는 문제에게 억상(抑商)법령의 형식화를 탄식하며 "지금의 법률은 상인을 천하게 여기나 상인은 이미 부귀하다"며 상주하였다. 이러한 억압 속에서 상업 발달은 정체되었고 이들은 대안 세력으로 나설 역량이 부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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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대강적인 시대에 대한 묘사가 끝난 듯하다.

다음 편들에서는 봉건제의 파국적 위기의 도래와 그 분석, 황건 농민군의 등장과 본질, 계급 투쟁의 양상, 계급 투쟁의 결과 1) 후한제국 붕괴 2) 국가 봉건제 재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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