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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cm 라이프, 수요와 필요

  얼짱, 몸짱, 별별 짱들이 난무하는 시대이다. 필자가 소싯적에는 키짱이라는 말이 없어서인지 별로 우유라던가 유제품을 그다지 열심히 먹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키는 2년전 기준으로 남한 평균신장(성별기준)에 도달하였고 그리 키에 대해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물론 노인네들이 죽고 애덜이 자라는 통에 슬슬 평균신장이 필자의 키와 거리를 벌이고 있다만)

 

  키가 사회생활에서의 영향력이 상당한 것은 분명한 일이다. 하지만 일정 이하(혹은 이상)의 키는 외모로서의 영향력을 넘어 그 이상의 생활을 제약하는 핸디캡으로 작용하게 된다. 아래 150cm 라이프(번역되었다.)의 주인공인 150cm의 키로 살고 있는 일본의 여성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이 책의 저자이기도한 타카기 나오코 씨가 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작아도 까마귀보다는 크고 아무리 커도 전봇대보다는 작다

 

  그녀가 유쾌하게 털어놓는 일상의 제약은 웃어넘기기에는 뒷맛이 쓰다. 표준신장(많은 경우 남성의)에 맞추어져 있는 세계 속에서 그녀에게 지하철은 생존해내야만 하는 공간이고 높은 선반의 물건에 손이 닿지 않는 그녀에게 아르바이트는 도전이요 혼자 살기는 모험이다. 그녀가 자조적으로 이야기하는 20살까지는 중학생 요금을 냈다는 둥, 어릴 때 입던 옷을 입을 수 있다는 둥의 작은 키로 살아가는 장점이란 키가 작다는 것이 정상적 성인으로 인식되지 않는 현실과 가장 작은 사이즈의 성인 기성복의 사이즈가 잘 맞지 않는다는 비참한 현실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제약은 키 작은 사람에게 집중되지는 않는다. 해외 토픽 등을 보면서 평생 택시를 못타봤다는 2m30cm의 아저씨의 이야기이나 뚱뚱한 사람에게 2개 좌석 분의 요금을 물리겠다는 미국 항공사에 맞서 싸우는 한 여성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키 작은 사람은 작은 사람 나름대로 살아갈 권리가 있다. 자기 신체에 대한 결정권을 가진 사람이라면 뚱뚱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 그 권리와 획일적인 높이에 분포한 지하철 손잡이는, 획일적인 크기로 재단된 비행기 좌석은 충돌하고 있다. 하지만 생산은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생산이 다양한 사람들의 필요를 위해 조직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수요, 즉 지불능력을 가지지 못한 집단을 소외시키면서까지 최대 이윤을 거둘 수 있는 방향으로 조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돈자루 씨는 필요가 있음에도 수요가 없는 자들에게 역으로 소리친다. 몸을 세계에 맞추라고. 장애인 탑승자가 적기 때문에 KTX에 단 3%의-국가기관에서 이야기하는 장애인 조우율-장애인 좌석을 배정하기 거부하는 철도청은 장애인들에게 이동할 수 없는 세상에 몸을 맞추라고 소리친다. 키 작은 사람들에게 그들을 위한 손잡이가 아닌 칼슘 우유와 호르몬 주사를 이야기하고 뚱뚱한 사람에게 그들에게 맞는 좌석이 아닌 탑승 거부와 다이어트를 이야기한다. 오늘도 수많은 왼손으로 글씨를 쓰는 어린이들이 가족과 국가 기관(학교)의 폭력 속에서 오른손으로 연필을 옮기고 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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