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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4/10/31
    저 자식은 왜 나에게 반말을 할까?(7)
    도마뱀의 꼬리
  2. 2004/10/15
    삼국지(三國誌), 후한말의 계급투쟁 (3)
    도마뱀의 꼬리
  3. 2004/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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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마뱀의 꼬리
  4. 2004/10/05
    환상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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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4/10/02
    군대란 무엇인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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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4/10/01
    삼국지(三國誌) - 후한말의 계급투쟁 (1)(2)
    도마뱀의 꼬리

저 자식은 왜 나에게 반말을 할까?

* 이 글은 현근님의 [어랏....저 개념없는 놈....]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대학 들어가고 얼마 안된 때의 일이었다. 10년도 더 된 날적이들을 보다보니 재수생 반말 문제에 대한 논쟁에 대해 두어 페이지 정도가 빽빽하게 적혀있는 부분을 우연히 발견했다. 상호간의 동의 없이 재수한 새내기가 제 때 들어온 (우스운 표현이지만) 1년 선배에게 반말을 쓰는 것은 반인륜적인 행위라는 것이 그 논란의 시발이자 종착이었다. 내가 학교에 들어왔을 때는 인간의 도에 많은 수정이 있어서 재수생에게는 같은 나이의 선배에게 반말을 쓸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하여 당시에는 세상이 많이 좋아졌구나...라고 생각했다.

 

  여튼 선배들에게 존대를 하며, 그 존대에 '걸맞는' 행동-말과 행동은 분리될 수 없는 모양인지-들을 하면서 불편없이 학교를 다녔다. 그렇게 1년 정도 지내다보니 다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왜 나는 저 사람에게 말을 올려야 할까? 왜 저 양반은 초면에 반말일까? 뭔가 정치적으로 온당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한 것은 학회 합숙 때로 기억한다. 꽤나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던 것 같다. 사회 생활을 일찍 시작하여 경험이 많은 사람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부터 (농경문화의 잔재일까) 사회적 '관습'이기 때문에 존중하는 것이 옳다던가 (절대반지 관습) 자매형제도 없냐느냐는 둥 (...없었다) 다양한 이야기가 나왔다. 결론적으로는 자신이 인정하지도 않은 권위를 관습이라는 이유로 강요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쪽으로 논쟁이 종결지어졌고 그날부터 난 학회를 중심으로 서서히 선배들한테 말을 놓아 나갔다.

 

  그러다보니 후배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보는 후배들에게 말을 놓으라고 하다보니까 애덜이 말을 놓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당신네들이 놓을 때까지 나는 올리겠다고 하여 존대말을 서로 썼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다보니 상당히 기괴한, 선배들에게는 말을 놓으면서 후배들한테는 말을 높이는 현상이 나타나더라는 것. 지금 생각해보면 선배들에게도 서로서로 말 높이는 편이 더 좋지 않았을까도 한다.

 

  일이 술술 풀렸으면 좋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해서 언어 평등 운동(?)은 거대한 벽에 봉착하게 된다. 벽이란 바로 복학생 군단.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수긍하지 않더라도 수긍하는 척은 이끌어낼 수 있었는데, 복돌이들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이해의 문제를 떠나 심기를 건드리는 문제로 촉발되었고, 심하게는 그런 말을 꺼내는 것에 목숨을 걸어야-반쯤은 농담-하는 상황도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말이 통하는 복학생으로부터 동의를 얻어냈는데 막상 내 입에서 반말이 나오지 않는, 말을 하려고 입을 벌려도 소리가 나지않는 엽기적인 일이 벌어진 것이다.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내가 현재 남한 군대의 억압적 제도에 반대한다면 반 정도는 이때의 경험 때문일 것이다.)

 

  사상은 입에 담겨지기 위해 존재하고 말은 실현되기 위해 존재한다. 존대말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대개의 경우 특정한 권력 관계의 가장 여실한 반영이었다. 가령 내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자와 없는 자, 부탁인지 명령인지 애매한 부탁과 그렇지 않은 부탁, 반격이 즉각적으로 가능하냐 그렇지 않느냐 ... 그것은 많은 경우 분류를 용이하게 해주는 잣대가 되었다.

 

  개인적으로 학원에서의 이러한 문제들은 '짬'이 쌓여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해결되어 갔다. 자연스럽게 자치 공간 내에서 금연 시간에 담배를 피는 복학생에게 학생회 규정이 어쩌니 저쩌니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것. 그러나 내 뒷줄들의 문제는 내가 새내기 때 봉착했던 상황에서 거의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더 무서운 것은 내 주먹에 힘이 실리기 시작하면서 존대말을 하는 것이나 존대말을 듣는 것에 대한 기괴하다는 느낌이 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당연하지만) 아직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해마다 수십만의 새내기들이 대학에 들어와 같은 상황에 놓여있다가 고학번으로 혹은 복학생으로 나아간다. 초중고에서 군대에서 사회에서 같은 현상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그리고 좋건싫건 그 피라미드에서 나는 위로 올라가고 있다. 과연 내 주먹이 내 말을 배신하는 날이 빠를까, 마침내 내 말이 쥐었던 주먹들을 펴게 하는 날이 빠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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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三國誌), 후한말의 계급투쟁 (3)

쓰다가 사고로 두 번이나 날려먹었다. 그냥 다 포기하고 컴퓨터랑 동반자살해 버릴까 생각하다가 그만뒀다. 이 두 번의 경험을 통해서 '어떻게 하면 날려먹는가'라는 중요한 경험을 얻지 않았냐고 생각하면 억울하지않 ... 을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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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투쟁의 계보

 

  황건 농민 전쟁의 분석을 위해 진수의 삼국지나 사마광의 자치통감 등 당시의 역사서를 살펴보면 상당한 당혹감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그 비중이 엄청나게 작을 뿐더러 그 작은 분량의 상당 부분은 그 농민 봉기를 진압하기 위한 중앙 정부와 군벌들의 활약으로 점철되어 있다. 물론 계급 투쟁의 패배 또한 소중한 경험이고 철저히 분석해 두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황건 농민군을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역시 자신의 역사를 갖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때건 지금이건.

  뭐 자치통감 류의 이야기를 그대로 엮어봤자 신선에게 경전을 사사받은 사이비 교주의 종교 반란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이러한 불가피한 사정으로 황건 농민 전쟁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다른 투쟁들의 사례를 분석하고 그 연장 선상 위에서 그 모습은 어떠했을까 상상하는 것이 불가피하게 요구된다. 여기에서는 황건 농민 전쟁의 연장선에 서 있는 투쟁들을 분석하고 다음 편에서 이 분석과 실제 농민 전쟁의 양상을 바탕으로 그것의 성격을 분석하도록 하겠다.

 

자치통감. 피지배 계급을 위한 몇 줄은 그 먹물의 수만배의 피로 쓰여졌다. 

 

1) 봉건 잉여 공출에 맞선 투쟁

 

  생산력 한계에 의한 농민의 몰락과 유망은 농민 봉기를 촉발하게 한다. 109년 연주와 해주에서 활약한 장백로가 이끄는 농민군, 132년 양주에서의 장화, 142년 서주와 양주를 10년 간 휩쓴 장영 등 안제부터 영제까지의 80년간 100여 차례의 농민 봉기가 발생한다. 이들의 요구에 대해서는 역시 사서에서 한 글자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당시 유행하던 가사에서 이들의 성격에 대한 힌트를 찾을 수 있다.

  "소민의 폭동은 풀과 같아 밟아도 다시 살아나고 머리는 닭과 같아 잡아도 다시 운다. 관리를 경외할 필요도 없고 백성을 가벼이 여길 필요도 없다." 이들은 자신들을 억압하는 봉건적 지배와 그 핵심 고리인 신분제와 봉건 관료의 지배에 분개하고 있었고 그것에 대한 타격을 바라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들의 경제 요구 역시 봉건적 잉여 공출에 대한 타격에 있었다. 많은 농민 반란이 세금과 부역 등의 경감, 소작료 인하 등을 요구로 삼았다. 중국의 농민 투쟁에서 그 경제적 요구가 사서에 남은 것은 명 말기의 이자성군의 요구가 대표적인데 이들의 경제 슬로건에는 균전(均田), 부당차(不當差), 평매평매(平買平賣) 등이 있었다. 균전과 부당차는 농민들의 요구로 부당차는 요역의 철폐를 요구하는 것이었고, 균전은 논란이 있는데 말 그대로 대지주 소유를 철폐하고 직접 경작자에게 토지를 분배하자는 혁명적 요구인지 아니면 당시 지주 소유 토지와 소농 토지 간의 불평등한 토지세를 균등하게 부담하자는 개량적 요구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리고 평매평매는 도시 상인들의 요구로 무거운 거래세 등의 봉건 지배자의 억상 정책의 철폐를 요구하는 것이다.

 

  농민들은 봉건 지배에 분노하고 있었지만 그 지배를 대체할 대안적인 정치 체제를 제시할 수 없었다. 그들의 봉기는 많은 경우 지배 계급 일부 분파-중앙이건 지방이건-의 지도에 종속되었으며 혹은 그들 지도부 자신이 황제, 진인 등 (세속적이건 종교적이건) 봉건국가의 수장을 자처하고 나섰다. 이들은 '인간의 얼굴을 한 봉건제' 이상을 제시할 수 없었다.

  프랑스 대혁명의 주역 중 하나이자 <제 3신분은 무엇인가>를 쓴 시에예스는 '정치적으로 제 3 신분은 무엇인가'의 질문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모든 것'이라고 선언했다. 신분제의 철폐, 공화제, 민족국가는 그의 선언을 실현시켰다. 후한의 농민들은 자신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분개하였으나 '모든 것'이 될 전망을 제시할 수 없었다.

 

2) 농민공동체로의 복고 운동

 

  봉건제 초기에는 많은 경우 작은 농민 공동체를 단위로 생산 단위가 조직되었다. 후한의 경우 '향'이나 '취'가 바로 그것이고 카톨링 왕조 시대의 프랑스의 경우 '망스(manse)'가 그것이다. 이러한 생산 단위가 존재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당시 생산 수준의 저열함에 기인한 것이었다. 철제 농기구의 사용, 우경의 시작 등 농업 생산력의 발전은 최소 생산 단위를 축소시키고 농민 공동체를 해체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후한말의 농민 공동체 붕괴는 부농의 성장과 빈농의 몰락이라는 농민 사이의 계급 분화를 촉진하였다.

  이러한 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계급 분화에 의해 유망한 농민과 빈농들은 이러한 변화에 절망하였고 과거의 농촌공동체로 다시 돌아갈 것을 염원하였다. 이러한 농민 일부 분파의 염원은 적미(赤眉) 농민 봉기 등을 통해 나타났다.

 

  이는 국가 봉건 지배층의 일부 분파에서도 지지되었다. 왜냐하면 기존의 국가 봉건제는 농민공동체를 기초로 하여 조직되어 있었고 국가봉건제의 약화와 함께 지방 영주들이 이러한 농촌공동체를 소생산자들로 분화시킴으로서 봉건제를 재조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국가 봉건제의 약화를 가져왔고 관료와 관료의 전망을 가지고 있던 인텔리들을 자극하였다.

  낙양의 태학 등을 중심으로한 이 엘리트(당인이라고 불렸다)들은 농촌공동체의 재건, 국가봉건제의 강화, 호족의 견제, 이러한 개혁을 행할 의지가 없는 외척-환관 분파의 척결을 내걸고 청원에서 쿠데타 모의에 이르는 투쟁을 감행하였으나 환관-외척 분파의 반격에 의해 이 지배 계급의 급진적 분파는 2차에 걸쳐 파괴, 소멸되었다. 이를 당고의 화(黨錮之禍)라고 한다. (삼국지에 나오는 장비 역시 이 당고의 화에 의해 몰락한 명문의 후예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연의와는 달리 정사에서 묘사되는 장비는 꽤 인텔리이다.)

  물론 농촌 공동체의 붕괴와 국가 봉건 세력의 이해가 충돌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국가 봉건 세력의 궁극적인 이해는 지역에 대한 통제권 강화를 통해 향촌의 통제권을 농민공동체가 아닌 관료 기구로 흡수하는 것이었고 이후의 국가 봉건제는 이러한 양상으로 조직된다. 다만 이들은 시급한 과제로 호족에 의한 국가봉건 체제의 침식을 막을 필요가 있었고 자신들의 부족한 역량을 농민들에 대한 양보-그것을 통한 지지의 획득-을 통해 보충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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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편에서는 이러한 두 경향과 실제 투쟁 전개 양상을 기초로 하여 황건 농민 투쟁의 성격을 분석하겠다. 아, 그리고 다음편에는 연의나 정사에 등장하는 애덜도 좀 나올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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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三國誌), 후한말의 계급투쟁 (2)

3. 봉건 사회의 위기

 

  주나라 이후 중국에 얼마나 많은 봉건 국가들이 들어섰는지 열거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많은 국가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이들의 흥망성쇠, 봉건 사회의 위기는 어떻게 도래하였는가? 봉건제의 역사가 긴 동아시아이니만큼 이 봉건 사회의 위기에 대한 다양한 분석이 존재한다. 일단 대표적인 오해의 사례로 환관원인론과 중앙 정부 지도력 부재론을 알아보고 진정한 위기의 근원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1) 환관(宦官)원인론

 

  삼국지 연의에서 공식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주장이자 다른 수많은 왕조의 멸망사에서도 거의 빠지지 않는 원인론이다. 정상적인 남성이 아닌 자가 정치를 하면 국가가 망한다는 가부장주의자들의 굳은 신념에 기인한 것으로 보이며 비슷한 종류로 여성이 정치에 관여하여 국가가 망한다는 주장도 있다. 유치하기 짝이없는 주장이지만 의외로 파급력이 만만찮은 주장이기도 하다.

 

  환관원인론은 마치 환관은 봉건 국가 운영을 위한 정치행정적 능력이 부재하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국익을 파괴한다는 근시안적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듯한 늬앙스를 강하게 풍기고 있다. 과연 그러할까?
  환관이 무식하다는 환상은 당시 유학자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사실이 아니다. 이들은 단순한 시종이 아닌 지성과 교양, 행정 능력 등을 두루갖춘 봉건 국가의 인텔리이자 행정 실무자들이었다. 진나라의 유명한 조고가 법률 전문가이었다는 점은 꽤나 유명한 이야기이고 제나라의 수조나 명나라의 정화, 사기를 쓴 사마천, 종이를 발명한 채륜, 심지어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당시 원정사업의 2톱 중 하나였던 나르세스 역시 환관이었다.
  환관이 국익을 해친다?! 국익이란 무엇일까? 대략 국가의 농민으로부터 최대한의 잉여를 수탈하여 지배 계급의 재정을 윤택(富國)하게 하고 안으로는 농민 등을 억누르고 밖으로는 타민족을 침략할 강한 군대를 만드는 것(强兵)을 뜻하는 것이라면 환관들의 이해 역시 지배 계급의 이해와 다르지 않았다. 왜냐면 환관들이 누리는 부의 근원은 국가 토지에서 나오는 잉여공출물이건 (월급 등의) 사유지에서 나오는 잉여공출물이건 봉건적 잉여 공출에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들에게는 안정적인 착취를 조직할 장기적인 안목이 없었다고 주장하고 싶은 자들도 있겠지만 앞서 이야기했듯이 안타깝게도 이들은 바보가 아니었단 말이다.

 

"어르신, 저희가 원인이라는데요." "이건 마초주의적 음모야!"

 

  환관원인론은 결국 가부장적이고 성리학적인 관점에서 위기의 책임을 환관에게 뒤집어 씌우고자하는 후세 지배계급의 한 분파의 오랜 공작의 결과에 불과하다. 문제의 근원을 특정 개인 혹은 집단의 무능력으로 몰고 '유능한' 집단의 영도가 계속되면 위기는 도래하지 않는다는 우리의 유학자들의 주장은 안타깝게도 사실이 아니었다. 정상적인 남성의 지배아래 조직된 이전 이후의 수많은 봉건 왕국들 역시 사회적 위기를 피할 수 없었다. 명문 사대부들에게는 대단히 미안한 이야기겠지만 그 두 집단 사이에 차이점이란 지극히 사소한 것-물론 그들에게는 큰 문제였겠지만-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2) 중앙 정부 지도력 부재론

 

  그나마 근대적인 분석가들이 주장하고 있는 바이다. 주장의 요체인 즉 중앙 정부의 지도력이 약해지고 지방 세력-영주, 호족, 군벌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이들이 토지 겸병을 일으키고 농민들을 가혹하게 수탈하며 토지에서 쫓아내서 봉건 사회에 위기가 도래했다는 주장이다. 이는 적어도 후한의 붕괴의 현상을 적실하게 묘사하고 있다. 황실의 권위가 추락하고 지방 군벌들이 세력을 강화하면서 농민들의 몰락이 촉진되고 그것이 황실의 붕괴와 호족에 의한 분할로 이어진 현상을 이 이론은 잘 설명해준다. 그러나 이것은 봉건제적 위기의 일반적인 양상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을 뿐더러 후한의 위기의 근본적 원인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

 

  이러한 주장은 곧잘 강력한 황권-중앙 권력-이 유지되면 사회의 위기가 찾아오지 않는다는 주장으로 연결되곤 했고 이른바 비국가 지주는 착취적인데 반하여 국가 지주는 그렇지 않다는 환상으로 이어져 왔다. 질문을 한가지 씩 던져보자. 이들의 이야기와는 달리 국가 지주가 아닌 지방의 지주가 '언제나' 농민의 토지에서의 유리를 강제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가령 국가 봉건제의 발달이 미약했던 중세 유럽이나 주나라 시대의 중국은 항시적인 '위기 상태'였는가? 그리고 국가 지주는 농민의 몰락을 가져오지 않는가? 국가 지주가 부과하는 높은 세금이 농민에게 비국가 지주의 높은 소작료와 어떤 차별성을 지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야기의 시작인 국가 봉건제의 붕괴는 왜 시작되는가?

 

  이 이론의 오류는 봉건제 하에서 국가 봉건 지주와 개인 지주가 질적으로 상이한 집단이라는 환상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환상은 사회와 역사에 대한 이해의 폭을 지배 계급 내부 분파 사이의 싸움으로 축소시키고 사회의 토대에 대한 진지한 분석을 가로막는다. 마치 한나라 당이 경제 위기를 운운하면서 자신들이 키를 쥐면 위기가 도래하지 않을 것처럼 사실을 오도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3) 위기의 진정한 원인은 무엇인가

 

  멜서스의 인구론은 그다지 세계를 분석하는데 유용하지 않아 보인다. 여러 이유로  인구가 꽤나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음에도 오늘날은 역사에 유래가 없을 정도로 풍부한 양곡-한 사람에 하루 3500kcal가 돌아갈 그것도 고기, 유제품, 채소 등을 빼고-이 생산되고 있지 않은가. (그래도 굶어죽는 사람은 수두룩 하다만) 그러나 중세 사회를 살펴보면서 이 인구론적인 상황은 상당한 설명력을 가진다.
  인구가 증가함에 불구하고 식량을 비롯한 생산력의 발달은 그것을 따라가지 못한다. 생산 외적 강제에 기초하여 직접 생산을 조직하지 않는 봉건 영주들은 그다지 생산력 발전에 큰 관심이 없다. 뭐 많이 생산해 봤자 세금이나 소작료로 대부분의 잉여가 털릴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농민 역시 생산 도구를 혁신하여 생산량을 늘릴 유인도 여유도 그다지 존재하지 않는다. 자급자족이 기껏인 사회에서 그것도 지배계급의 강력한 견제를 받는 상업이나 수공업은 그저 봉건영주의 필요에 기생적으로 종속된 형태로 존재할 뿐 유의미한 발전을 이루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생산의 발전은 인구 증가에 금방 옷깃을 잡히게 된다.
  인구가 증가하나 생산은 늘지 않는다. 생산량이 일정함에도 토지가 부양해야할 인구의 숫자는 늘어난다. 부담해야할 세금/소작료의 양은 늘면 늘었지 줄지는 않는다. 농민은 몰락하고 토지를 떠나 유망한다. 이것이 바로 봉건제 사회에서 주기적으로 부딪히는 위기의 정체였고 이것은 생산력이 증대될 수 있는 조건의 쟁취를 통해서만이 혹은 상당 수의 인구의 절멸을 통해 인구 압력이 완화됨으로서만이 해소될 수 있었다.

 

탈세의 현장 : "설마 이것까지 뜯어 가겠어?"

 

  다시 후한 시대로 돌아가자. 농민이 유망한다. 유망한 농민은 거지가 되기도 하고 혹은 도적이 되기도 했다. 농민 몰락에 의한 세수 감소, 치안 통제권의 파괴는 국가 봉건제의 기틀을 위협하고 지역 통제권이 약해짐에 따라 지역의 자경농들은 쉽게 지역 지주 세력에게 포섭된다. 또한 몰락 농민의 상당 수는 지역 지주들의 사병화되어 강력한 지역 군벌을 탄생시킨다. 위기가 낳은 것은 지방 군벌 세력만이 아니었다. 조직된 농민 반란 역시 위기 속에서 잉태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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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건적 위기의 원인에 대한 대강적인 분석이 마무리 된 듯 하다. 다음 시간에는 황건 농민 전쟁 이전의 농민 봉기, 그리고 황건 농민군의 발생과 성격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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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적인

* 이 글은 뎡야핑님의 [팔레스타인 비상사태 선포]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경성을 잠시 떠나 있던 때이니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의 일이었다. 파출소에서 근무를 서고 있는데 갑자기 신고 전화가 들어와서 출동을 하게 되었다. 자전거를 타고 신고 지역으로 가다보니 과연 오랜지 나무가 많이 열리는 농가에서 큰 소리가 나고 있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웬 복면을 쓴 자가 잠 옷 차림에 머리가 깨져 피가 줄줄 흐르는 중년인을 추수용 도리깨로 개잡듯이 패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피투성이가 되어 맞고 있는 중년인의 모습을 보나 그를 패는 자의 복면을 쓴 모양새를 보나 대단히 수상해 보이기는 했지만 복면인은 무공이 높다-주성치의 <파괴지왕>이나 <배트맨> <스파이더맨> 등에서 나오듯이-라는 말도 있고 하니 함부로 건들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문득 스쳐 함부로 경거망동을 하지 않기로 하였다.

 

  잠시 양해를 구하고 둘을 파출소로 데려왔다. 둘을 앉혀놓고 무슨 연고인고 들어보니 복면인이 중년인의 집에 무단으로 아니 자유롭게 출입하여 평화롭게 그 재산과 저택을 강탈...아니아니 양도 받고 있었는데 중년인이 문득 사술(邪術)인 테러지공을 사용하여 그 재산을 자신의 창고로 옮기던 하인을 다치게 했다며 호소하였다. 이에 분노한 복면인은 명문정파 제국문의 문하 답게 대노하여 비술(秘術) 양민학살지공으로 중년인과 그 식솔들을 노약자를 가리지 않고 개패듯이 패고 굶겨 이들에게 다시는 저항할 마음이 없게 하고저 한다고 이르니, 파출소장 부(富) 씨가 속으로 기뻐하며 '피고용인 따위가 수백 수천명이 죽어나가도 테러에 조금도 타협하지 않으니 그것이 바로 용(勇)이요, 노약자를 가리지 않고 저항을 섬멸하니 이것이 바로 의(義)이니, 어찌 이 같이 올곧은 제국주의자가 있단 말인가?'라고 생각하였으나 겉으로는 짐짓 "무공을 제한적으로 운용할 것"을 즉 적당히 죽지 않게 두들겨 팰 것을 당부하였다.

 

  문득 취조를 위하여 중년인에게 말을 걸려 하였으나, 옆에서 이름 높은 로 경(sir Roh)이 큰 소리로 병사들을 닥달하는 통에 그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그의 큰 소리를 제지하려 했지만 로 경은 제국을 따라 검은 용인 거무틔틔르를 잡으러 간 몇 안되는 충성스러운 기사 중 하나였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영민(領民) 중 한 명이 용에게 잡혔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개의치 않고 황제를 도와 거무틔틔르의 기름을 짜는데-동시에 그 불쌍한 부역자의 피를 짜는데-헌신을 바친 이름높은 기사인지라 감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는 병사들에게 열악한 노동조건과 고율의 소작료에 반발하며 부역을 거부한 농민들을 방패와 쇠몽둥이로 때려잡으라 명하면서 큰 칼 허리에 차고 높은 달을 보며 탄식하길 "아 그들이 반항하여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을 ..."하며 카메라를 의식하며 눈물을 훔쳤다.

 

  "그들은 일상적으로 제도적이고 체제화된 폭력을 행사하고 때로는 가장 노골적이고 야만적인 폭력을 행사하면서 우리의 작은 저항이 존재하는 한 더욱더 악랄한 폭력을 행사하겠다고 외친다. 그들은 우리에게 노예로서의 삶, 가장 천천히 다가오는 고통스러운 죽음을 선택하기 요구하나 우리는 그것에 맞선 죽음이 우리의 존엄을 지키는 것임을 알고 있다." 중년인은 피에 젖은 눈으로 모두를 대표하여 진술을 마쳤다.

 

  제목이 '환상적인'인 이유는 이 글이 퓨전 판타지 소설이기 때문인가, 3인칭과 1인칭을 넘나드는 정신나간 서술이 판타스틱하기 때문인가, 남을 억누르고도 저항에 낯설어하는(혹은 뻔뻔해하는) 저들의 사고 체제를 이름인가, 저항에 선두에 나서지 못하고 있는 또한 자신들의 주인의 선택에 의해 대신 피를 흘리고 있는 농노와 하인과 병사와 피고용인, 그리고 식솔의 모습을 이야기 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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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란 무엇인가?

* 이 글은 이러나님의 [정말 싫은 말] 을 보고 삘 받아서 주위 사람들도 생각해 보면 좋지 않을까 해서 쓰게 된 트랙백(이게 뭔말이야?)입니다.

  87년 투쟁의 성과일까? 민주주의라는 것이 사회에 그 약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구타와 기합으로 유지되던 공장 규율은 세련된 규칙과 평가제로 개편되었고, 야만적인 폭력으로 유지되던 초중고 역시 '사랑의 매'-그 표현방식이 극도로 새디스틱하다는 것이 문제지만-가 내신 반영으로 대체되고 있다. (초중고 순으로) 무조건 쥐어패고 보던 사회는 대화의 외피를 거치게 되었고 노사정 위원회나 교장선생님과의 대화의 시간 ... 등의 극도로 무의미하고 기만적인 자리도 심심찮게 만들어지(려)고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시즘의 시체는 살아서 걸어다니고 있다. 87년의 타협은 파시스트들의 정권을 연장시켜주었고 국가 기관에서 언론에서 경찰 정보과에서 그들의 하수인들을 아직까지 남아있게 하였다. 아직도 상명하복의 병영의 규율은 학교와 공장에서 관철되고 있고 국가보안법이나 족벌 기업 등은 싱싱하게 그 모습을 뽐내고 있다. 자유주의자들의 뒷걸음질 위에서 파시스트들의 세상은 임종의 순간을 계속 미루고 있다.

 

  그렇기에 파시즘이 끝장났다고 학교에서 배운, 우리나라가 민주주의 공화국이라는 것을 늘 암기해온 사람들, 특히 사회초입자들에게는 세상 엄밀히 말하자면 파시즘의 잔재는 도대체가 불합리한 것일 수밖에 없다. (파시즘 덕에 더 근본적인 불합리는 쉽게 그 모습을 숨긴다.)

 

  군대는 파시즘과의 대화이다. 파시즘이 불합리하다고 믿는 사람들을 군대는 2년 넘는 시간 동안 악랄하고 끈질기게 설득한다. 군대는 부당한 권위에 굴종하는 법, 불합리한 명령에 의문을 품지 않는 법, 강자에게 약하게 굴고 약자에게 잔인해 지는 법 등 파시즘을 이해하고 그에 순응하는 법을 배우게 해 준다. 군대는 우리에게 파시스트와 자신을 동일시 하거나 적어도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부당한 권위에 쉽게 굴복하고 뒷걸음질치는 자유주의자들을 용서하게 해 준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의 파시스트들은 이야기하는 것이다.

 

  "군대를 갔다와야 정신을 차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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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三國誌) - 후한말의 계급투쟁 (1)

1. 시작하며

 

  봉건 무협지 삼국지 연의에 대한 재평가가 근래에 들어 꽤나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근래에 들어서야 이 반동적 문학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그동안 얼마나 우리 사회가 이 악랄한 반동에 타협해 왔는가를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한 생각이 든다.

 

  물론 성군 유비와 폭군 조조를 이야기하는 봉건적 관점보다 CEO 조조와 유비를 이야기하는 자유주의자들의 판타지가 썩은 내는 덜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승상과 황제의 패거리가 되지 못한 대다수 농민의 후손들이 즐겨 먹을 수 있는 신선한 음식물인지는 장담하지는 못하겠다. 그렇다고 필자가 삼국지를 재구성하겠다거나 하는 의도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농사를 지어 세금을 내고 나면 짚신이라도 엮지 않으면 다음 가을을 맞을 수 없는 자들의 입장에서 삼국지의 시작을 장식했던 황건 민중봉기라는 계급투쟁과 이 계급투쟁에 의해 전개된 이후 계급 간의 역관계에 대한 사소한 생각을 풀고자 한다.

 

2. 후한 말의 사회

 

  태양 아래 천자가 있고 그 주위에는 승상 이하 문무 백관이 그를 보필하며 천하를 13주로 나누어 천자가 보낸 자사가 다스리며 고을 고을 마다 현령이 내려와 백성들을 보살피니 ... 운운하는 이야기는 적당히 하도록 하자. 이런 이야기의 흐름대로라면 천자가 백성들을 먹이고 살리는 셈이지만 실상은 보통 반대라서 하늘 같은 천자가 쓰고 다니는 양산과 승상부 창고에 쌓여있는 금은 보화부터 이들의 실질적 힘인 창칼에 이르기까지 직접생산자의 땀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당시 열악한 생산력은 이 직접 생산자의 절대 다수를 식량 생산을 위한 농업에 종사하게 하였고 이 사회의 분석을 위해서는 이 농민들을 중심으로 이 사회의 생산이 어떤식으로 조직되고 잉여가 어떤 식으로 흘러다니는 지를 명확히 분석할 필요가 있겠다.

 

  농민은 농사를 짓는다. 2세기 중반 이들은 이른바 자경농민이다. 자경농민이라고 해서 오늘날 남한의 중농이나 16-17세기 영국의 농민 등을 생각한다면 곤란한 노릇이다. 5인 가족 기준으로 농민 1호가 100무(전근대적인 면적 단위는 생산량이 기준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 역시 그런 맥락으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를 경작하면 매년 150석을 수확한다. 기본적인 토지세로 100석이 우리의 현령 나으리를 통해 수탈되고, 그것은 자사의 손을 거쳐 천자의 지갑에까지 올라간다. 아, 50석이나 남았군! 이라고 긍정적인 사고를 하기엔 아직 이르다. 성인의 경우 120전, 아동의 경우 20전의 인두세를 더 납부해야 하고 성인 남성에게 부과되는 노역을 구실로 300전의 세금이 추가로 부담된다. 곡식을 팔아 그것들을 내고 나면 거의 손에 남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 종자, 가축, 농구, 의복, 잡비 등을 생각하고 다음 가을까지 먹고 살 궁리를 하면 역시 부업을 좀 더 뛰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인생이 괴로운 농민들은 흉년이라도 들면 더욱 더 삶이 빡빡해진다. 그러다 농가부채도 쌓이게 되고 빚에 떠밀려 혹은 총칼..아니 창칼에 떠밀려 토지를 인근의 대지주에게 넘기고 전객(佃客) 즉 소작농이 된다. 이들 소작농은 국가에서 조사하는 인구조사에서 제외되는 모양이니 각종 세금은 납부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면 인구조사 따위 할 이유가 뭐겠는가?) 그 대신 비슷한 비율의 곡식을 지주에게 소작료로 납부한다. 뭐 그다지 인생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이들 농민은 노예가 아니다. 이들은 제한된 형태나마 신체의 자유와 재산권을 가졌다. 특히 자신의 생산 도구를 소유하고 있었고, 특히 토지에 대한 소극적인 권리 역시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생산을 자신이 통제하였다. 생산에 대한 통제권이 생산자에 있었기에 약탈자들은 생산(경제)외부에서 강제적인 수단으로 이들의 생산을 약탈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바로 세금이나 소작료의 형태이며 이는 소작 계약, 신분제, 그리고 창칼에 의해 관철된다. 바로 그것이 경제외적강제의 본질이며 이러한 경제 관계, 직접 생산자에 의한 경제 외적 강제를 통해 잉여가 추출되는 사회를 바로 바로 봉건제라고 이르는 것이다. 후한말 농민은 자경 농민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 본질은 국가가 지주로 존재하는 국가봉건제 하의 소작농과 비정부지주(NGL?)에 소속된 소작농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면 타당하며 이들은 중세 유럽의 농노, 조선시대의 전호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빼앗기는 자의 반대 축에 서 있는 빼앗는 자들에 대해서 알아보자. 기본적으로 이들 중 눈여겨 볼만한 두 세력은 천자와 그를 보필하는 관료 집단을 위시한 중앙의 국가 봉건 지주 세력과 호족이나 군벌 등으로 알려진 지방의 대지주 세력이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경제적으로 동일한 계급적 이해 위에 서 있고 의식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비교적 동질적인 집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나눠놓은 것은 후한말 중앙집권체제가 붕괴하고 지방 군벌이 발호하면서 삼국 시대가 개막되었다는 점에서이다. 이들의 차이는 크지 않았고 실제로 대표적인 군벌 조조의 경우 중원을 장악하자마자 구품중정법 등을 통해 대족지주를 견제하고 국가봉건제를 재건하기 위해 매진하게 된다.

  일부 자유주의자들은 한의 붕괴와 위의 건국을 혁명적인 변화, 조조와 그의 패거리를 혁명적인 세력 등으로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이는 황당한 이야기이다. 그가 행한 것은 국가 봉건제 재건을 위한 가장 단호하고 개혁적인 조치였을 뿐, 그것을 뛰어넘는 어떠한 대안도 실천도 창출할 의도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물론 그러한 대안조차 제시할 수 없었던 황실의 꼴통들에게는 조조가 볼셰비키보다도 더 무섭게 보였겠지만. 한나라 당이 노무현을 두려워하듯이 말이다.

 

  진과 전한 시대의 상업 억압 정책에도 불구하고 상인 세력은 꾸준히 성장하였다. 소금과 철 등을 매매하여 거부가 된 자의 이야기가 사서에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이러한 거부들은 오늘날 이건희와 정주영의 무리와 같은 산업 자본가들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이들은 수공업 등을 조직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미약한 수준이었고 이들의 부의 원천은 지주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서민들에게 소금 등 생필품을 비싸게 판매함으로써 생기는 기생적이고 약탈적인 것이었고 취약한 기반 위에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에 '상업으로 재산을 모으는 대상인은 비록 자산이 수천만에서 억에 이르나 여전히 농업을 통해 그것을 지켰다'라고 이르기도 했다. 상인자본의 기반은 항상 취약하였고 그것은 봉건 지주의 기반을 가졌을 때에만 생존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상인은 아직 유의미한 독자적 세력으로 부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봉건 세력은 일견 자신들의 필요 충족을 위해 상업을 이용하면서도 봉건적 경제 질서를 흔들 우려가 있는 상업 발달과 그를 통한 자본주의적 맹아의 성장을 항상 견제하였다. 한무제는 소금과 철의 전매제를 실시하고 평준제와 균수제를 실시하는 등 대상인을 견제하는 정책을 폈고, 조조-전한시대 사람입니다-는 문제에게 억상(抑商)법령의 형식화를 탄식하며 "지금의 법률은 상인을 천하게 여기나 상인은 이미 부귀하다"며 상주하였다. 이러한 억압 속에서 상업 발달은 정체되었고 이들은 대안 세력으로 나설 역량이 부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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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대강적인 시대에 대한 묘사가 끝난 듯하다.

다음 편들에서는 봉건제의 파국적 위기의 도래와 그 분석, 황건 농민군의 등장과 본질, 계급 투쟁의 양상, 계급 투쟁의 결과 1) 후한제국 붕괴 2) 국가 봉건제 재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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