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삼국지(三國誌), 후한말의 계급투쟁 (2)

3. 봉건 사회의 위기

 

  주나라 이후 중국에 얼마나 많은 봉건 국가들이 들어섰는지 열거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많은 국가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이들의 흥망성쇠, 봉건 사회의 위기는 어떻게 도래하였는가? 봉건제의 역사가 긴 동아시아이니만큼 이 봉건 사회의 위기에 대한 다양한 분석이 존재한다. 일단 대표적인 오해의 사례로 환관원인론과 중앙 정부 지도력 부재론을 알아보고 진정한 위기의 근원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1) 환관(宦官)원인론

 

  삼국지 연의에서 공식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주장이자 다른 수많은 왕조의 멸망사에서도 거의 빠지지 않는 원인론이다. 정상적인 남성이 아닌 자가 정치를 하면 국가가 망한다는 가부장주의자들의 굳은 신념에 기인한 것으로 보이며 비슷한 종류로 여성이 정치에 관여하여 국가가 망한다는 주장도 있다. 유치하기 짝이없는 주장이지만 의외로 파급력이 만만찮은 주장이기도 하다.

 

  환관원인론은 마치 환관은 봉건 국가 운영을 위한 정치행정적 능력이 부재하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국익을 파괴한다는 근시안적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듯한 늬앙스를 강하게 풍기고 있다. 과연 그러할까?
  환관이 무식하다는 환상은 당시 유학자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사실이 아니다. 이들은 단순한 시종이 아닌 지성과 교양, 행정 능력 등을 두루갖춘 봉건 국가의 인텔리이자 행정 실무자들이었다. 진나라의 유명한 조고가 법률 전문가이었다는 점은 꽤나 유명한 이야기이고 제나라의 수조나 명나라의 정화, 사기를 쓴 사마천, 종이를 발명한 채륜, 심지어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당시 원정사업의 2톱 중 하나였던 나르세스 역시 환관이었다.
  환관이 국익을 해친다?! 국익이란 무엇일까? 대략 국가의 농민으로부터 최대한의 잉여를 수탈하여 지배 계급의 재정을 윤택(富國)하게 하고 안으로는 농민 등을 억누르고 밖으로는 타민족을 침략할 강한 군대를 만드는 것(强兵)을 뜻하는 것이라면 환관들의 이해 역시 지배 계급의 이해와 다르지 않았다. 왜냐면 환관들이 누리는 부의 근원은 국가 토지에서 나오는 잉여공출물이건 (월급 등의) 사유지에서 나오는 잉여공출물이건 봉건적 잉여 공출에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들에게는 안정적인 착취를 조직할 장기적인 안목이 없었다고 주장하고 싶은 자들도 있겠지만 앞서 이야기했듯이 안타깝게도 이들은 바보가 아니었단 말이다.

 

"어르신, 저희가 원인이라는데요." "이건 마초주의적 음모야!"

 

  환관원인론은 결국 가부장적이고 성리학적인 관점에서 위기의 책임을 환관에게 뒤집어 씌우고자하는 후세 지배계급의 한 분파의 오랜 공작의 결과에 불과하다. 문제의 근원을 특정 개인 혹은 집단의 무능력으로 몰고 '유능한' 집단의 영도가 계속되면 위기는 도래하지 않는다는 우리의 유학자들의 주장은 안타깝게도 사실이 아니었다. 정상적인 남성의 지배아래 조직된 이전 이후의 수많은 봉건 왕국들 역시 사회적 위기를 피할 수 없었다. 명문 사대부들에게는 대단히 미안한 이야기겠지만 그 두 집단 사이에 차이점이란 지극히 사소한 것-물론 그들에게는 큰 문제였겠지만-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2) 중앙 정부 지도력 부재론

 

  그나마 근대적인 분석가들이 주장하고 있는 바이다. 주장의 요체인 즉 중앙 정부의 지도력이 약해지고 지방 세력-영주, 호족, 군벌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이들이 토지 겸병을 일으키고 농민들을 가혹하게 수탈하며 토지에서 쫓아내서 봉건 사회에 위기가 도래했다는 주장이다. 이는 적어도 후한의 붕괴의 현상을 적실하게 묘사하고 있다. 황실의 권위가 추락하고 지방 군벌들이 세력을 강화하면서 농민들의 몰락이 촉진되고 그것이 황실의 붕괴와 호족에 의한 분할로 이어진 현상을 이 이론은 잘 설명해준다. 그러나 이것은 봉건제적 위기의 일반적인 양상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을 뿐더러 후한의 위기의 근본적 원인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

 

  이러한 주장은 곧잘 강력한 황권-중앙 권력-이 유지되면 사회의 위기가 찾아오지 않는다는 주장으로 연결되곤 했고 이른바 비국가 지주는 착취적인데 반하여 국가 지주는 그렇지 않다는 환상으로 이어져 왔다. 질문을 한가지 씩 던져보자. 이들의 이야기와는 달리 국가 지주가 아닌 지방의 지주가 '언제나' 농민의 토지에서의 유리를 강제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가령 국가 봉건제의 발달이 미약했던 중세 유럽이나 주나라 시대의 중국은 항시적인 '위기 상태'였는가? 그리고 국가 지주는 농민의 몰락을 가져오지 않는가? 국가 지주가 부과하는 높은 세금이 농민에게 비국가 지주의 높은 소작료와 어떤 차별성을 지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야기의 시작인 국가 봉건제의 붕괴는 왜 시작되는가?

 

  이 이론의 오류는 봉건제 하에서 국가 봉건 지주와 개인 지주가 질적으로 상이한 집단이라는 환상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환상은 사회와 역사에 대한 이해의 폭을 지배 계급 내부 분파 사이의 싸움으로 축소시키고 사회의 토대에 대한 진지한 분석을 가로막는다. 마치 한나라 당이 경제 위기를 운운하면서 자신들이 키를 쥐면 위기가 도래하지 않을 것처럼 사실을 오도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3) 위기의 진정한 원인은 무엇인가

 

  멜서스의 인구론은 그다지 세계를 분석하는데 유용하지 않아 보인다. 여러 이유로  인구가 꽤나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음에도 오늘날은 역사에 유래가 없을 정도로 풍부한 양곡-한 사람에 하루 3500kcal가 돌아갈 그것도 고기, 유제품, 채소 등을 빼고-이 생산되고 있지 않은가. (그래도 굶어죽는 사람은 수두룩 하다만) 그러나 중세 사회를 살펴보면서 이 인구론적인 상황은 상당한 설명력을 가진다.
  인구가 증가함에 불구하고 식량을 비롯한 생산력의 발달은 그것을 따라가지 못한다. 생산 외적 강제에 기초하여 직접 생산을 조직하지 않는 봉건 영주들은 그다지 생산력 발전에 큰 관심이 없다. 뭐 많이 생산해 봤자 세금이나 소작료로 대부분의 잉여가 털릴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농민 역시 생산 도구를 혁신하여 생산량을 늘릴 유인도 여유도 그다지 존재하지 않는다. 자급자족이 기껏인 사회에서 그것도 지배계급의 강력한 견제를 받는 상업이나 수공업은 그저 봉건영주의 필요에 기생적으로 종속된 형태로 존재할 뿐 유의미한 발전을 이루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생산의 발전은 인구 증가에 금방 옷깃을 잡히게 된다.
  인구가 증가하나 생산은 늘지 않는다. 생산량이 일정함에도 토지가 부양해야할 인구의 숫자는 늘어난다. 부담해야할 세금/소작료의 양은 늘면 늘었지 줄지는 않는다. 농민은 몰락하고 토지를 떠나 유망한다. 이것이 바로 봉건제 사회에서 주기적으로 부딪히는 위기의 정체였고 이것은 생산력이 증대될 수 있는 조건의 쟁취를 통해서만이 혹은 상당 수의 인구의 절멸을 통해 인구 압력이 완화됨으로서만이 해소될 수 있었다.

 

탈세의 현장 : "설마 이것까지 뜯어 가겠어?"

 

  다시 후한 시대로 돌아가자. 농민이 유망한다. 유망한 농민은 거지가 되기도 하고 혹은 도적이 되기도 했다. 농민 몰락에 의한 세수 감소, 치안 통제권의 파괴는 국가 봉건제의 기틀을 위협하고 지역 통제권이 약해짐에 따라 지역의 자경농들은 쉽게 지역 지주 세력에게 포섭된다. 또한 몰락 농민의 상당 수는 지역 지주들의 사병화되어 강력한 지역 군벌을 탄생시킨다. 위기가 낳은 것은 지방 군벌 세력만이 아니었다. 조직된 농민 반란 역시 위기 속에서 잉태되고 있었다.

 

-----------------------------------
  봉건적 위기의 원인에 대한 대강적인 분석이 마무리 된 듯 하다. 다음 시간에는 황건 농민 전쟁 이전의 농민 봉기, 그리고 황건 농민군의 발생과 성격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