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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2/08
    결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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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6/02/08
    성의 구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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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6/02/07
    컬럼바인: 누구의 잘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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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6/02/06
    dar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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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6/02/04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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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6/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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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론

결정론적 요소들이 무한히 복잡한 체계를 이루고 있다면 그 체계는 결정론적인가?

 

어떤 운동이 '예측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운동을 설명할 수 있는 법칙이 부재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존재하는 예측 불가능한 대부분의 운동들은, 일정한 법칙으로 환원은 가능하지만 무한히 많고 다양한 하위 구성 요소들을 가지고 있으며, 이 요소들이 운동 안에서 어마어마하게 복잡한 내부 구조를 이루고 있다. 서로에 작용하는 중력이 서로의 운동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만약 세 개의 별들이 모인다면, 그 별들간 중력의 상호작용을 모두 계산해 정확한 운동을 예측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한다. 이와 같은 복잡계의 운동들을 예측할 때 우리는 오직 근사치로만 만족해야 한다. 그러므로 (대부분 오차범위 내에서이겠지만) 예측에서 벗어나는 것도 생긴다. 단순히 기술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무한히' 많을 경우에는 기술의 진보도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법칙이 부재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 이유만으로 이것을 과연 결정론이라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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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구별

누군가가 여성이라면(또는 남성이라면) 그는 왜 여성(또는 남성)일까? 또는 그가 여성이라면 그는 어떠한 조건을 갖추었기에 여성이라는 것일까? 이것을 결정하는 요인은 매우 다양하며, 이러한 요인들이 서로 각축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하나의 동일적인 성이 하나의 개체에게 할당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잠정적인 것이고(그렇게 여겨지지 않고 있어서 문제지만), 아무리 잠정적이더라도 굳이 그렇게 동일적인 성을 각 개체에게 부여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반론도 가능하다. 여기서는 가능한 주장들의 접근 통로를 모두 열어두고 일단 밑그림을 그려보겠다. 왜냐면 이 작업은, '권력의 포기는 가능한가'라는 보다 포괄적인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 내가 생각했던 것을 정리하고 기록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성은 생물학적으로 규정된다. 대중들은 '생물학'이라는 잣대를 반박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 요인은 개체의 성을 결정하는 데 있어 지배적인 힘을 갖는다. 생물학 안으로 들어가 더욱 정확하게 짚어 보자면, 성을 구분하는 이 생물학적 잣대는 바로 염색체의 모양이다. 그러나 여기에 어느 정도 논점이 존재하는데(물론 이것은 학적 의견이므로 상대적으로 높은 정도의 객관성은 가지겠지만), 가령 호르몬의 분비량같은 생물학 내부의 다른 기준이 더욱 일반적인 성 구분 기준으로 자리잡을 수도 있었다고 가정할 수는 없을까, 혹은 이러한 다른 요인들은 성을 결정하는 데 아무런 학적 영향력을 가지지 않는 것일까 하는 물음이 그것이다. 또한, 이 염색체의 모양은 그것이 성기의 모양이나 체형 등을 결정하는 요인이기에 중요성을 갖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다면 수술이나 호르몬 조절을 통해 염색체가 부여한 성과는 다른 성의 외관을 후천적으로 획득했다면, 이 역시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 모호해진다.

 

성은 또한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개체는 이 과정을 통해 성적 구별을 획득한다기 보다는 경직된 성 구별 관념을 형성한다. 또한 법적인 기록을 통해 그러한 성 정체성을 공적으로, 그리고 고정된 것으로 인정받는다. 따라서 개체의 성을 결정하는 장에 다양한 기준들이 관여하고 있다는 생각은 두 번 반박당하는데, 한 번은 '객관적 과학'을 자처하는 생물학, 또는 그 생물학을 신봉하는 대중들에 의해서이고, 또 한 번은 개체가 사회화를 겪으며 받아들이도록 강요당한 경직된 성 관념에 의해서이다. 이 강요는 후에 자율성으로 둔갑한다.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라는 성을 부여받으면, 그 다음에는 사회적으로 '여성'이라는 성을 부여받을 차례다. 그러면 개체는 자신의 '여성임'을 '자율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는 법적인 '여성임'에 의해 보증된다.

 

그 과정에서 성은 자아에 의해 의된다. 이 의식은 이처럼 사회화가 어느 정도 진행된 이후에 등장한다. 문제는, 이러한 자아의 성적 의식은 생물학적으로 부여된 자신의 성과 대부분 일치하게 되지만(그 일치에 일조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성 관념이다),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바로 그 사회적 성 관념이 이 불일치에도 일조할 수 있다). 각각의 자아가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의식하려면, 필연적으로 사회적인 틀, 즉 여성과 남성의 이항 대립적 체계 속에 자신의 성을 끼워 맞춰야 한다. 이 과정에서 중간적 성 정체성을 가진 개체는 혼란을 겪게 되며, 좀 더 일반화하자면 모든 개체들이 어느 정도 혼란을 느낄 것이다.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성 관념이 경직되어 있을수록, 자아가 의식하는 자신의 성과 생물학적으로 부여된 자신의 성이, 더욱 강하게 일치하거나 불일치하게 된다.

 

그러나 성은 의식되지 않을 수도 있다. 자신을 남성으로 경험하는 어떤 심리적 사실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은, '어쨌든 나는 여성이니까'라고 그 개체가 생각함으로써, 혹은 그 개체의 언어적 틀 안으로 포착되지 않음으로써 의식되지 않은 상태일수도 있다는 말이다. 역시 성 구분의 요인이 (생물학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경직되어 있을수록 이런 상황이 발생할 확률이 크다. 하지만 이 기준은 너무 포괄적이며, 또한 실재하는지 의심스럽고, 그러므로 공시적으로 파악하기에는 설득력이 좀 떨어지는 부분이 있다.

 

성은 타인에 의해 의식될 수도 있다. 이로 인한 성 구분은 다른 모든 기준에 의한 것들과 어긋날 수도 있다.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며 법적으로도 여성이고, 심지어 자아에 의해서도 여성으로 의식된다고 해도, 외관상 남성이면 대부분의 타인들은 그를 남성으로 의식한다. 그와 동시에 남성에 해당하는 사회적 이미지 체계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즉, 권력이 발생한다. 왜냐면 권력은 개체-내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타인에 의해 의식되는 성 정체성에 관한 논의는 보통 옷을 입고 사회적 생활을 영위하는 가운데 발생하는 인식에 관한 것이지만, 수술이나 호르몬 조절을 통해 옷 안의 신체가 다른 성의 외관을 갖게 된 경우와도 문제를 공유한다. 이는 염색체의 모양이 지시하는 성과 신체적 외관이 가리키는 성이 서로 다른 경우와의 연관성을 가지며, 이것이 선천적 불일치라면 수술 등에 의한 것은 후천적 불일치이다. 생물학적으로는 불분명하며 법적으로는 남성이고 자아에 의해서도 남성으로 의식된다고 해도, 심지어는 그가 사회적 생활을 남성의 모습으로 영유한다고 해도, 그 생물학적 외관에 의해서 타인들은 그를 여성으로 규정할 수도 있다. 물론, 수술 등의 조치를 일부러 취해서 여성이 되고 싶은 것이었다면(그러면 물론 스스로 여성으로 규정할 것이며, 사회적 생활도 여성의 모습으로 영유하겠지만), 타인이 자신을 여성으로 규정하는 것이 그가 바로 원하던 바였을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한 명의 '남성'에게 있어서, 그가 생물학적 기준을 상대적인 것으로 여겨 거부한다고 해도, 사회적인 성적 규정을 무시하고 전통적으로 여성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일들을 적극적으로 수행한다고 해도, 심지어 스스로를 여성으로서 정체화하고 있으며 그것을 공공연하게 표출함으로서 남성으로서의 자신의 권력을 포기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해도, 일단 타인에 의해 자신이 남성으로 의식되기만 한다면 여전히 그 역겨운 권력은 자신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또한 안타깝게도 이 부분은 매우 결정적이다. 이 세상 속에서 그를 만나는, 혹은 그를 스쳐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겉모습만을 보고 그를 남성이라고 판단할 것이며, 바로 그 순간 권력이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잘 모르는, 그래서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너무 과장하고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폭력적인 권력 행사는 오히려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더욱 빈번하게 발생할 수 있다고 답하겠다.

 

[이 내용은 '권력의 포기란 가능한가'라는 더욱 큰 문제의 일부분으로 읽혀져야 할 것이다. 여기에 쓴 것은 그러한 문제를 설득력있게 제기하기 위한 하나의 자세한 예증이다. 그러므로 세부 사항에 대해서 논박할 여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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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바인: 누구의 잘못인가?

컬럼바인 누구의 잘못인가? (Columbine: Whose Fault Is It?)

 

이 지상에서 초창기에 살았던 사람들이 냉혈적인 살인을 고무시키기 위한 책이나 영화, 게임, 음악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카인이 아벨의 머리를 박살내던 날 그가 필요했던 유일한 동기는 자신이 가진 인간의 폭력성향이었으나 성경을 문학으로 해석하든 신-그것이 뭐든지 간에-의 마지막 말로 해석하든 상관없이 기독교는 우리 문화의 근간이 되는 죽음과 성의 이미지를 표현했다. 반라의 죽은 사내가 대부분의 가정에 그리고 우리의 목에 걸려있고 우리는 그것을 평생 당연시해왔다. 그것은 희망의 상징인가, 아니면 절망의 표상인가? 이것이 나타내는 지구상에서 가장 유명한 살인-자살 사건은 또한 죽음의 아이콘의 탄생, 명성을 위한 청사진이었다. 불행하게도, 이 모든 숭고한 도덕성에도 불구하고 가스펠의 어디에도 지성이 미덕으로 칭송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나의 밴드를 이러한 절망과 위선을 비판하는 도구로서 시작했다는 사실을 잊었거나 결코 깨닫지 못했다. 나 마릴린 맨슨은 미국이 살인자들을 타임지의 커버면에 실어 인기 영화배우 못지않은 평판을 부여한다는 슬픈 사실에 기뻐해 본 적이 없다. 제시 제임스에서 찰리 맨슨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는 초창기부터 범죄자들을 대중적으로 영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딜런 클레블랜드와 에릭 해리스, 이 망할 것들의 사진을 모든 신문의 1면에 실어 그들을 마치 영웅인양 미화하였다. 아직 지각이 없는 아이들이 이 둘을 새로운 우상으로 섬기게 되더라도 그것은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전 인류를 파멸할 수 있는 폭탄의 제조에 갈채를 보내고, 또 텍사스에서 우리의 대통령의 머리가 박살나는 것을 보며 자랐다. 시대는 더욱 과격해지지 않았다. 단지 시대가 텔레비전 미디어에 좀더 많이 포착되고 있을 뿐이다. 남북전쟁이 전혀 문명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텔레비전이 있었더라면, 분명 그들은 거기에 가서 영국의 다이아나 왕세자빈의 차를 맹렬하게 쫓던 것처럼 남북전쟁 현장을 취재하고 아마도 거기에 참여하기조차 했을 것이다. 그들은 역겨운 독수리처럼 시체를 찾고 그것을 착취하고 엉망으로 만들어 그것을 필름에 담아 우리의 탐욕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제공한다. 이것은 끝없은 인간의 우둔함의 탐욕스러운 현시이다.

콜로라도주의 리틀튼의 한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에 대해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돌 하나를 던져보라. 그러면 책임져야 할 누군가를 맞힐 것이다. 우리가 무책임하게 아이들이 총을 소유하는 것을 내버려 둔 바로 그 당사자들이다. 우리가 바로 텔레비전을 켜놓고 아이들이 총으로 무엇을 하는지 시시각각 생생하게 지켜본 사람들이다. 한사람의 죽음은, 특히 그 죽음이 알고 지내고 사랑하는 사람의 것이라면, 그것은 아주 끔찍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TV 연속극의 마지막회를 시청하는 것 이상으로 신경쓰지 않는다. 미디어가 뱀처럼 살며시 들어서서 눈물 한방울도 놓치지 않고 죽은 아이들의 부모들을 인터뷰하고 장례식을 중계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녀사냥은 이 법석에 뒤이은 것이다.

인간은 무질서를 가장 두려워한다. 이 아이들이 단순한 흑백논리에 따라 행동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희생양이 필요했다. 해리스와 클레볼드가 검은 복장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마치 나 마릴린 맨슨처럼 화장을 하고 옷차림을 하고 있다고 보도된 적이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 추측은 삽시간에 과장되어 나를 세상의 모든 악을 전파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 두 천치들은 화장을 하지도, 나나 고쓰(Goth)의 복장을 하지도 않았다. 그 아이들이 실제로 즐겨들었던 음악은 KMFDM과 람슈타인(Rammstein)과 같은 음악들이었는데 미디어는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다른 것을 골랐던 것이다.

양식있는 저널리스트들은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해리스와 클레볼드가 나 마릴린 맨슨의 팬이 아니며 그들이 나의 음악을 싫어하기조차 했다고 보도했다. 그들이 설사 팬이었다고 하더라도 이 사실은 그들에게 전혀 변명거리가 된다거나 음악이 비난의 대상이 될 이유가 되지 않는다. 제임스 휴버티가 맥도날드에서 총기를 난사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무엇이 그를 고무시켰는지 알아 본 사람이 있는가? 티모시 맥베이는 무엇을 즐겨 시청했는가? 데이비드 코레쉬나 짐 존스는 또 어떤가? 당신은 오락물이 킴 킹클을 고무시켰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오레곤 주의 스프링필드에서 살인을 위해 사용한 총을 사주었다는 사실을 비난해야 하는가? 무엇이 빌 클린턴을 자극하여 코소보 시민들을 박살내고 있는가? 모니카 르윈스키가 그에게 한 말 탓이었을까? 살인은, 그것이 베트남에서든, 존스보로(Johnsboro)나 아칸소에서든 상관없이, 그저 살인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정당한 명분을 가진 것으로 여겨진다고 해서 살인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정당한 명분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누간가가 차를 몰거나 총을 살 나이가 되면 이것은 또한 그 자신이 차와 총을 가지고 행하는 행동에 대해 개인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혹은 만약 그가 아직 십대라면 그로 하여금 18세에 걸맞는 도덕적 수준을 갖추게 시도하지 못한 것에 대해 누군가 책임질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미국은 죄를 전가할 아이콘을 즐겨 찾는다. 내가 적그리스도의 역할을 맡았다는 것은 인정한다. 사람들은 다르게 보이고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을 불법적이고 비도덕적인 활동과 연관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대부분의 어른들은 자신의 기질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우스꽝스럽게도 사람들은 벌써 그렇게 빨리 앨비스와 짐 모리슨, 오지를 잊어버렸을 정도로 순진하다. 이들 모두는 한때 똑같은 해묵은 논쟁과 검열, 편견에 시달렸다. 내가 'Lunchbox'라는 곡을 쓴 일이 있는데 어떤 저널리스트는 그것을 총에 대한 노래로 해석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노래의 내용은 괴롭힘을 당하는 한 아이가 도시락통으로 저항하는 것이다. 도시락통은 내가 어릴 적 놀이터에서 무기삼아 사용하던 것이기도 하다. 79년에 철제 도시락은 비행 청소년들이 위험한 무기로 사용할 소지가 있다고 해서 금지되었다. 나는 'Get Your Gunn'이란 곡도 썼다. 제목의 철자에 두 개의 'n'이 있는 것은 그 곡이 플로리다에서 낙태반대론자에게 살해된 닥터 데이빗 건(David Gunn)에 대한 것으로 곡의 'Gunn'이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을 살린다는 명분으로 사람을 죽이다니, 그 사건은 점차 증가하고 있는 위선의 극단적인 형태였다.

이들 노래들의 다소 긍정적인 메시지는 선정적 미디어가, 내가 실제로는 스스로 맹렬하게 비난하는 것들인데도, 오히려 그것들을 조장한다고 오역하는 부분이다. 현재 모든 사람들이 리틀튼에서의 사고와 같은 것들을 어떻게 방지할 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에이즈를, 세계대전을, 공황을, 자동차 사고를 어떻게 예방할 것인가? 우리는 자유로운 국가에 살지만 그 책임과 함께 개인적인 책무의 부담도 있다. 아이에게 무엇이 도덕적이고 비도덕적이고, 옳고 그런 것인지를 가르치기 전에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를 지배하는 법이 무엇인지 분명히 규정해야 한다. 당신을 지옥을 믿지 않음으로써 항상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죽음과 감옥은 벗어날 수 없다.

아이들이 자라나면서 점점 냉소적으로 변하는 것은 당연하다. 아이들은 수많은 정보를 직접 접할 수 있다. 그들은 헛소리로 이루어진 세상속에 자신들이 살고있다는 사실을 직접 볼 수 있다. 과거에는 무언가를 보다 낫게 바꾸고 운영하고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항상 있었다. 하지만 이제 미국은 하나의 거대한 시장이 되어버렷고 인터넷과 과학기술 때문에 어디로 벗어난 길이 없다. 사람들은 어디에도 똑같다. 때때로 음악이, 영화가, 책이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이 우리처럼 느낀다는 것을 알게하는 유일한 매체가 된다. 나는 항상 지배 이데올로기에 함몰되지 않는 것이 괜찮거나 더 낫다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하려고 노력해왔다. 자신의 상상력을 발휘하라. 오하이오 출신의 어떤 괴짜가 꽤 괜찮은 무언가가 될 수 있다면, 의지력과 창의성을 지니고 있기만 하다면 당신이라고 해서 안될 이유가 있겠는가?

나는 온갖 TV쇼로부터 출연요청을 받았지만 모두 거부했다. 미디어의 광기에 뛰어들어 그것에 맞서 나 자신을 방어하려 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나는 독선적 비난의 목소리를 이용해 명예를 쫓는 저널리스트나 기회주의자들을 이롭게 하고 싶지 않다. 그들이 오락물을 비난하다니, 종교도 결국 최초의 오락물이 아닌가?

사람들은 의상을 입고 노래를 부르며 영원한 팬의 세계에 자신을 바친다. 클린턴이 그의 적을 제거하고 진정한 정치적 형태의 폭탄을 퍼붓는 것만큼 재미있는 것은 없다는 것에 어느 누구라도 동의할 것이다. 그리고 뉴스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오락물이 비난받아야 하는가? 나는 미디어계의 논평자들의 지성을 촉구하고 싶다. 그들의 사건 취재내용이 바로 우리가 보아온 것 중 가장 끔찍한 오락물이 아니었던가?

나는 사람들이 전미총기협회(National Rifle Association)가 너무 벅찬 상대라서 컴퓨터 게임이나 기타 오락물에 대신 시비를 건다고 생각한다. 이런 논쟁은 내가 레코드나 표를 파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그렇게 되길 원하지도 않는다. 나는 논객이다. 나는 감히 그리고 기꺼이 나의 생각으로 맥빠지고 공허한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에 도전하는 음악과 비디오를 만든다. 나의 작품에는 우리가 살고있는 미국을 진단하고 우리에게 커다란 고통을 준다고 비난하는 악마가 실제로는 우리 각자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항상 노력했다. 어느날 별안간 세상의 끝이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매일 세상의 끝을 경험해 온 것이다.

 

99년 5월 28일, 마릴린 맨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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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ron

"당신의 세상에서 당신이 펜을 들고 종이 위에 뭔가를 쓰면 20만명 또는 그 이상을 죽일 수도 있고 그러고도 당신은 아무렇지 않을 수 있지요. 당신이 그 장면을 볼 필요는 없으니까요.

in your world you can take a pen and write on a piece of paper and destroy 200,000 people or more and it's ok because you don't have to see it."

─ charles manson

 

system of a down의 기타리스트/보컬인 daron malakian이 mezmerize 앨범의 "thanks to" 자리에 이런 말을 적어놓았다.

 

덧) 후에 알아보니 찰스 맨슨은 마릴린 맨슨이 자기 이름을 만들 때 선택했던 두 명중 한 명이었다. (나머지 한 명은 마릴린 먼로다) 추종자들과 함께 수 명의 사람들을 죽이고도, 전혀 죄책감을 갖지 않고 오히려 위와 같은 말들을 내뱉었다는 희대의 살인마. 비틀즈 광이며 나름대로의 철학─흑인들이 들고 일어나 백인을 모두 죽일 거라는 혁명적(?) 철학─을 가졌고 많을 때는 100명 이상의 추종자를 거느렸다고 한다.

 

덧2) 컬럼바인에 대한 마릴린 맨슨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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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아무런 바탕 없이 책을 읽는 경우는 드물다. 특히 학술서일수록 더 그렇다. 서평을 이미 찾아 읽어보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저자의 학문적 성향이라든가, 최소한으로는 그/녀가 속해 있[다고 간주되]는 학파나 무슨무슨주의, 그리고 그것들의 주요한 주장과 개념 등에 대해 알고 있거나 입소문으로라도 들어보았을 확률이 크다. 나름의 평가도 아마 내려 보았으리라.

 

안타깝게도, 이렇게 얻은 선입견으로 우리는 그 책의 주장을 미리 재단한다. 책을 직접 읽어 내려가도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악화된다. '믿는 것이 보는 것'이라고, 자신의 선입견과 배치되는 부분은 눈에 안 들어오거나 심지어 반대로도 읽히고,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틀에 들어맞지 않는 부분은 이해되지 않거나 억지로 그 틀에 끼워맞춰진다.

 

이러니 책을 읽어도 남는 게 없다. 그저 몇 가지 개념들을 얻었고, 자신이 즐겨 사용하던 개념들과 새로 얻은 이 개념들을 사용해 뭔가 있어 보이는 '명언'을 가공해낼 것이며, 그것을 자신의 학문적 성향이라고 굳게 믿을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학문도 독서도 아니며, 자신의 신변잡기의 어줍잖은 일반화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탈주'를 좋아하는 사람은, 이 책을 읽어도 탈주, 저 책을 읽어도 탈주,라고 진지하게 해석해내며, 그 책은 탈주를 못했네, 그래서 좋은 책이 아니네,라며 거리낌없이 평가한다.

 

개념과 범주들은 편의를 위해서 개발된 것이다. 하지만 그 편의가, 더욱 철저하게 공부할 힘과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방대한 내용을 개념과 범주로 축약하여 표현하고 소통하라는 말이지, 생각해야 할 부분에서 생각하지 않고 개념들을 편하게 막 사용함으로써 그것으로 자신의 생각없음을 가리라는 뜻이 아니다. 거의 모든 세미나에서는 후자의 편의가 난무하고 있으므로, 정작 중요한 부분에서 생각들이 없다. 그러니 세미나를 아무리 많이 해도, 남는 건 자존심과 배짱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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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글을 다시 쓰기 시작하는 중이다. 그 전에 한 가지 확실하게 해 둘 것이 있다.

 

내가 왜 글을 쓰는지, 왜 한동안 쓰지 못했는지, 그리고 왜 기어코 다시 쓰기 시작하려는지. 뭐 이런 질문들에 대한 나름의 대답이 필요하다. 잠깐이라도 붙들 수 있는 어떤 확신이 없다면 나는 다시금 곧 주저앉을 것이다.

 

공유욕 때문일까.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도 알게 하고픈 욕망이 내게 있는 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쳐도, 그 욕망으로부터 또 다른 욕망, 즉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나의 욕망을 분리해낼 수 없다. 내가 정말로 읽고 감명받은 책인지,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그 책을 읽었다는 사실을 알림으로서 그들로 하여금 어떤 종류의 반응, 이를테면 존경이나 부러움 따위를 유도하려는 책인지 알 수 없다는 이야기다. 정확히 말하면 둘은 섞여 있을 테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나를 보여주려는 욕망을 갖고 있다는 것, 그것이 순수한지 아닌지를 따지는 그 고민의 와중에 나를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그저 서둘러서 무언가라도 끄집어내고 만들어내려는 욕심이 내게 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도록 만들고 싶어하는 마음이 내게 있으며, 그게 꼭 그렇게 나쁜 마음은 아니라는 것 등을 나는 알고 있다. 여기서 이렇게 이러한 것들을 명백하게 해 두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나를 보여준다는 것은, 강요하는 것도 소리 높여 고함을 지르는 것도 아니다.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나는 무언가 항상 급했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을, 내가 알고 있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주어야만 했다. 그런게 적으면 적을수록, 나는 그저 고함만 질렀을 것이었으며, 지금에서야 이런 것까지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나 자신에게 자연스러워질 때도 되었다. 그러고 나서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연스러울 수 있을 테니까. 결국은 소통을 갈망하는 것이지만, 내 모습을 온전히 보여줌으로써, 그 이외의 다른 불필요한 이야기들에 대해서는 서로 침묵함으로써 맺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소통을 나는 갈망한다.

 

아니어도 좋다. 기록해두지 못하는 아쉬움이 그간 나를 괴롭혀왔다. 이제 내 손끝은 내가 보고 느낀 것만을 기록하도록, 그 이상의 더 많은 것들을 주조해내지 않도록, 더욱 예민해져야 할 것이다. 거짓말은 이제 그만이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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