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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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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감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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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사전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감상문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읽기
                             — 기억과 공감의 연대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1)을 읽은 후에 이 책에 대해서 즉시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정리하려 한다면 이는 순서에 맞지 않는 일이 될 것이다. 왜냐면 이 소설은 ‘나’의 윤리적 결단을 촉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소설에 ‘대해서’ 쓰는 것은 오히려 나에 대해서, 그리고 내가 이 소설에 의해 영향 받은 것들에 대해서 쓰는 셈이 되는 것이다.


즉, 이 글은 나에 대한 윤리적 반성이 될 것이다. 나는 이반과 알료샤에게 동시에 감정을 이입하며 이 소설을 읽었다. 물론 이는 라끼찐의 말을 빌면 ‘까라마조프적’ 특성을 나 역시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내가 다른 까라마조프, 이를테면 드미뜨리와 나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스타일의 문제일 것이다. 알료샤 역시 정욕으로 가득 찬 드미뜨리와 자신이 단지 정도의 차이만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한다. 또한 이 ‘까라마조프적’이라는 형용사의 분열적 의미는 인간 일반을 수식하는 데 특별히 적절한 듯하며, 아마도 이로 인해 나에게도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즉, 우리는 인간인 이상 “아주 극단적인 모순”을 가지며, 우리의 안에서 “서로 다른 두 심연을 동시에(1221)”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충분히 가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나치게 확대된’ 해석으로 간주해 경계하고 인간 일반이 아닌 나 자신에 대한 반성으로 논점을 제한하는 태도가 소설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와 좀 더 맞아 떨어질 것이다. 앞으로 설명하겠지만, 이 소설은 인간 세계 전체에 대한 윤리적 평가를 시도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소설을 읽는 ‘나 자신’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반성’이라는 말은 아주 개인적인 의미를 갖는다. 나 역시 이반-라끼찐-꼴랴가 공유하는 오만불손한 가치관을 가지고 타인의 마음과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를 재단하곤 했었다. 이런 모습의 나, 그리고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굳이 변호하자면 이는 아마도 더욱 올바른 삶을 살고 더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려는 의지 때문일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삶과 사회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고 우리는 쉽게 가정하므로, 삶과 세상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욕구는 이를 치료하고자 하는 욕구와 구별하기 힘들다.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의식하고 또한 책임지겠다는 욕구가 정당하며 진실하다는 믿음을 가지고서, 나는 너무도 쉽게 ‘나의 지식’이라는 무딘 메스를 들고 세상을 해부하려 들었던 것 같다. 이에 반해 소설 전체에 걸쳐 빛을 발하는 작가의 심리학은 주요 주인공 중 어느 한 사람도 만만하게 파악되거나 분석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구체적 인간이 아닌 인간 일반에 대한 이렇고 저런 평가가 얼마나 쉬운가를, 또한 그러므로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알려준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 ‘쉽게’ ‘잘못된’ 평가를 내리는 것이 바로 오만일 것이다. 작가는 엄청나게 복잡한 인간의 내면을 보여줌으로써, 어떤 인간학적 현상이나 인간 자체에 대해서 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지식’은 그가 포착하려는 것 자체에 비하면 얼마나 보잘것없고 단순한가를 드러내고 있다.

 

오만한 이론과 이반


이렇게 무력한 지식, 혹은 지식의 무력에 대한 비판은 이반을 살펴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즉, 이반의 “모든 무신론자들의 입장에서 악행은 허용되지 않을 수 없으며 가장 필연적이고 가장 합리적인 출구로 인정된다(131)”는 사상이 설령 이론적으로는 흠이 없다고 할지라도, 작가가 이 사상과 얼마나, 그리고 어떤 식으로 거리를 두고 있는가를 먼저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요약할 수 있는 이반의 사상을 둘러싼 논의에서, 방점은 ‘신이 없다면’이라는 조건절에 찍힌다. 이 표현은 이반이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유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해 주는데, 이로 인해 문장의 명확한 의미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채로 남게 된다. 이반은 후에 동생 알료샤와 함께한 자리에서 신과 불멸이 존재하는가를 묻는 아버지 표도르의 질문에 둘 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243). 이에 따르면 모든 사람에게 모든 악행이 허용되며, 그것이 심지어 합리적인 해답이라고 해야 한다.


하지만 이반의 생각은 알료샤에게 서사시 「대심문관」의 내용을 들려주는 대목에서 온전히 드러난다. 이반의 대심문관에 따르면 예수는 기적을 행해 보라는 사탄의 세 가지 유혹을 거부함으로써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선사해 주었다. 기적에 의해 강요된 신앙이 아니라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하고 결정하는 신앙을 예수는 인간에게 바랬던 것이다. 그러나 이반은 인간이 그렇게 강인한 존재가 아니라고 말한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오히려 견뎌내지 못하며, 자유로운 선택의 부담 때문에 짓눌리기 보다는 강제에 의한 평안을 원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기적을 사용해 빵을 만들어 보라는 사탄의 요구를 거부하였지만, 인간은 빵을 제공하는 권력에게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반납한다. “당신은 사람들이 […] 소리 지르며 조롱하고 놀려 대도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았소. 당신이 거기서 내려오지 않은 것은 인간을 기적의 노예로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며, 기적에 의한 신앙이 아닌 자유로운 신앙을 열망했기 때문이오. […] 그러나 당신은 사람들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말았소.(455)” 신, 즉 “<기적>과 <신비>와 <교권>(457)”은 인간을 ‘속박하고 동시에 해방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종교가 말하는 신은 이미 ‘악마’다(458). 혹은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이 있는지 없는지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되어 버린다. 그리고 이 사실은 권력과 지식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알려져 있으며, 그들은 인간에 대한 자기들 나름대로의 위대한 사랑으로 신/악마를 통해 인간의 자유를 빼앗고 평안을 보장한다. “인간을 덜 존중하고 그에게 더 적은 것을 요구하면 그의 부담이 줄어들 테니, 더욱 사랑으로 다가가는 길이 될 거요.(456)”


여기에서는 이반이 자신과 ‘일반 민중’에 대해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지성의 판단에 의하면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 존재 여부가 중요하지도 않지만, 허약하고 비열한 보통 인간들에게는 신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들을 이론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진정한 무신론자인 자신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되어 있다. 지식인인 자신만이 자율적 존재이며, 인간 일반이 자신의 수준까지 지적으로 고양될 가능성은 없다는 것. 이것이 이반의 오만이며, 지식과 이론의 오만인 것이다. ‘오만한 이론’이 아닌 ‘이론 그 자체의 오만’은, 이론의 바깥에 있기 때문에, 이론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것만을 다루는 ‘이론적 틀’을 가지고는 파악할 수가 없다. 따라서 그 오만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이론 스스로가 이론이 아닌 다른 것과 직면해야만 한다. 이반의 이론이 현실과 교접하는 지점이 바로 스메르쟈꼬프의 범죄이다. 불쑥 잠입한 이 실재 앞에서 이반은 자신의 언어(logos)를 잃고 침잠한다.

 

도스토예프스키적 윤리


이러한 이론 비판을 통해 작가는 더 이상 윤리‘학’으로 포섭될 수 없는 독특한 지점들을 가지는 새로운 윤리를 제시해야만 하는 입장에 처했다. 그가 제시하는 윤리는 다음과 같은 성격을 지녀야 한다. 첫째로, 도스토예프스키적 윤리는 (과)학적으로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라 종교에 기반을 두어야만 한다. 그에게 윤리는 이론이 아니라 믿음이다. 따라서 이론을 구성하는 증명의 확실성은 믿음이라는 좀 더 겸손한 원리로 치환된다. 아래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이 때 종교라는 말은 제도가 아니라 어떤 ‘영성(靈性)’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두 번째로 과학은 보편자에 대한 담론인 반면 이 종교/윤리는 개별자를 우선시해야 한다. 이 조건은 말 그대로 보편자보다 개별자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뜻이지, 보편적인 실천의 원칙을 제시하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세 번째가 가장 난처한 부분일 것인데, 이 윤리는 사실과 당위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맑스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진통제]’이라고 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현실의 행복을 위해서는 행복의 환상에 불과한 종교를 폐기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스스로 환상을 걷어내고 현실적인 지복의 세계를 만들어 나아갈 수 있는 고도의 정치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두고 이반은 맑스와 정 반대편에 선다. 즉, 이반은 인간에게는 신과 같은 강인한 능력이 없으므로, 종교를 폐기하기는커녕 이를 적극 이용해서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나름대로 사실(fact)을 존중했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반은 수많은 사례들을 들어 잔인하고 비열한 인간의 모습을 폭로하고 있기 때문이다(421-437). 이 점에 있어서는 작가도 섣불리 이반의 입장에 반대하지 않는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도스토예프스키 또한 어떤 완벽한 이론이든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구멍’이 있다고 주장하며, 따라서 인간의 이성/이론을 통한 사회의 개조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리가 없다. 요컨대 도스토예프스키는, 사회의 이성적 변혁을 추동하는 이론은 오만의 소산에 불과하다는 점을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이성에 대한 회의가 윤리적 허무주의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현실과 당위의 사이 어딘가에 서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전제를 바탕으로 작가가 제시하는 윤리는 이른바 ‘기독교적 윤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라는 단어가 떠올리는 이미지들을 잠깐 제쳐두고 이 윤리가 무엇을 말하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소설의 주인공 알료샤와 그의 또 다른 ‘아버지’인 조시마 장로를 통해 설파되는 작가의 윤리는 조시마 장로의 형이 했던 다음과 같은 말에 잘 드러나 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어머니, 우리들 중 누구나 서로에게 죄를 짓고 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제가 가장 많은 죄를 지었어요.(511)” 이에 따르면 우리는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영향을 주고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죄인의 처지가 인간의 존재 조건이다. 인간은 능력 없고 무식한 비열한이라기보다는 ‘서로에 대한 죄인’일 뿐이다. 따라서 이성의 능력을 계발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타인의 삶에 책임을 지는 것이 문제로 된다. 즉, 개인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헛된 믿음으로부터 이반의 윤리적 허무주의가 발생한 것이다. 또한 이것이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일까지 개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식으로 확대 해석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우리의 ‘이웃들’에 대해서 죄인이다. 이어서 이 깨달음은 1인칭으로 다시 표현되며, 그 순간 이 명제는 인간의 필연적 조건에 대한 인식의 원리를 넘어서서 윤리적 실천의 원리가 된다. 바로 ‘내가’ 가장 큰 죄인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성에 따라 판단하고 평가하는 투사가 아니라 이웃들에게 죄를 저지른 죄인이기 때문에, 세상의 온갖 악행과 부조리를 용감하게 떠맡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죄를 저지른 ‘나’는 구체적인 선행을 통해 용서를 구해야 한다. 세상의 불의를 모두 해결하는 엄청난 일은 ‘신이 아닌 이상’ 해낼 수 없다. 그저 내가 저지른 구체적인 악행에 대해서 사죄하고 개별 개인에 대한 구체적인 선행으로서 이를 되갚아야 한다. 이 작은 선행이 소설에서는 알료샤가 그루셴까에게 (상징적으로) 베푸는 “파 한 뿌리(633)”, 그리고 의사 게르쩬쉬뚜베가 드미뜨리에게 준 “호두 1푼뜨(1175)”로 나타난다. 이러한 작은 선행은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 고통에 ‘나’ 역시 책임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이러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한다면 책임과 선행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결국에는 촘촘한 그물 모양의 연대를 이루는 인류애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이는 구체적 개인에 대한 선행이 분명하게 우위에 있는 윤리적인 보편 명제이다. 이 윤리는 강령으로써 개인을 덮어버리지 않고, 하나하나의 개인에 대한 서로 간의 공감의 능력에 바탕을 둔다. 이 공감의 테마는 소설 속에서 조시마가 시골 아낙네들과 대화하는 장면(92-103), 스네기료프의 처절한 고통을 목격하고 알료샤가 눈물 흘리는 장면(361-371), 일류샤가 쥬츠까에게 바늘이 든 빵을 먹이고 괴로워하는 장면(933-934)에서 반복되어 나타난다. 드미뜨리-알료샤와 비교했을 때 이반에게 부족했던 것은 이러한 공감하는 마음, 고통에 반응하는 능력, 즉 형제[자매]애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고통에 대한 공감을 통해 인류는 비로소 ‘형제[자매]로서’ 하나가 된다.

 

윤리 체계로서의 종교


이처럼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속의 ‘기독교’는 종교적 제도라기보다는 하나의 가치관 체계로서 기능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즉, 그의 소설 속 인물들에게는 그들이 종교를 믿기 때문에 그 종교의 윤리관을 따라야만 하는 의무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윤리를 실천하기 위한 바탕으로서 종교가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지금-여기에 도스토예프스키적 윤리관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특별히 ‘기독교’라는 단어에 신경을 써야 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 ‘기독교’와 작가가 소설 속에서 사용하는 ‘기독교’라는 단어는 아마도 그 기표만을 공유하고 있을 뿐 완전히 상반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작가가 강조하는 것은 어떤 ‘영성’이며, 이는 신자들의 물질적 욕구의 절실함과 그들의 신앙의 깊이를 공공연하게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현대 한국의 개신교에도, 그리고 아마도 지금의 기독교와 별반 다를 바 없었던 당대의 기독교에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일 듯하다.


이렇게 본다면 작가가 말하는 ‘신(神)’도 기독교적 인격신으로 굳이 해석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즉, 작가가 말하는 기독교가 하나의 제도로서의 종교라기보다 영성을 바탕으로 하는 윤리적 관점이라고 본다면, 그가 말하는 신 역시 기독교적 의미의 신이라기보다는 형제[자매]애가 무한히 확대된 상태로서의 어떤 ‘전체성’ 혹은 ‘무한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라는 ‘종교적’ 주제는, ‘무한한 전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으라는 윤리적 언명으로 전환된다. 물론 이 전체라는 것이 개별자들을 단박에 엮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슬 모양으로 하나씩 하나씩 연결시키는 과정 중에 있다는 것 또한 중요하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에서의 신이 기적을 일으킬 리는 없다. 조시마 장로의 ‘썩는 냄새’가 바로 이를 증언한다. 왜냐하면 자연 전체에 ‘신’이라는 이름을 붙인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무신론이 전혀 아니다. 영성이란 굳이 인간적 형상을 가진 존재와 마주하고 있지 않더라도 가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후손에 대한 책임과 시간의 연대


과학과 이론 때문에 인간이 잃어버린 것, 혹은 인간에게 금지되어 있던 것은 바로 ‘전체로서의 연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모든 것을 보편적 틀로 포획하는 추상적인 이론과는 정 반대의 방향에서 접근해야만 얻을 수 있는 연대이다. 조시마는 소위 말하는 보편적 사랑이 구체적인 개인에 대한 사랑과 오히려 상충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 나는 인류를 사랑한다, 하지만 나 자신에 대해 놀라게 된다. 왜냐하면 내가 인류를 사랑하면 할수록 개별적 인간, 다시 말해서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은 줄어들기 때문이다.(111)” 이 구체적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알료샤는 자신이 책임져야 할 사람들을 직접 발로 뛰며 만나왔던 것이다. 한 인간의 보편적 철학이 세계를 남김없이 설명할 수 있을 때가 아니라, 각각의 개인이 한 명도 빠짐없이 서로에게 책임을 질 때 비로소 윤리는 구체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도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런데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러한 연대에 하나의 차원을 추가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시간’이다. 여기에 바로 도스토예프스키적 연대의 독특성이 있으며, 또한 이를 통해 작가의 윤리적 언명은 보편성을 거부하면서도 또한 다시금 보편적인 것일 수 있게 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소설의 서문에서 이 일대기는 두 개의 소설로 구성되어 있다고 밝혔다. 작가의 때 이른 죽음으로 인해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첫 번째 소설뿐인데, 이 소설의 말미에서 우리는 알료샤와 아이들의 테마가 그 다음 편에서 이어질 것이라는 점, 그리고 이 두 번째 소설을 통해 그가 자신의 윤리관을 좀 더 적극적으로 개진할 생각이었다는 점 등을 추측할 수 있다. 이 추측을 좀 더 강화하는 것은 바로 아이들 테마의 중요성이다. 알료샤는 어떤 의미에서는 서로 독립적인 두 이야기, 즉 ‘어른들’의 이야기와 ‘아이들’의 이야기 사이를 오가고 있는데, 전자의 이야기 속에서 그가 하는 일은 이미 타락한 인간들에게 파 한 뿌리를 선사하는 것, 그들을 윤리적으로 ‘회복’시키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일류샤와 아이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가르친다.’ 즉, 일종의 교육을 행하는 것이다. 이처럼 도스토예프스키가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 제시한 길은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화석화된 인간인 ‘어른’이 구원받는 길이고, 하나는 ‘아이들’이 구원받는 길이다. ‘어른’은 최소한 친부 살해범으로 기소되어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할 정도의 커다란 사건이 없이는 정신적 변화를 쉽게 일으키지 못한다. 작가는 드미뜨리를 통해 이를 집약해서 보여주는 것인데, 이러한 길 하나뿐이라면 그의 윤리관은 실천적 힘을 지니기가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아이들의 길을 제시한다. 아이들은 고통이 아닌 교육을 통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따라서 교육은 지식의 배움이 아니라 감정의 배움이어야 한다. 알료샤가 꼴랴에게 ‘가르친’ 것도 바로 사랑과 공감이었다(964-974).


바로 알료샤-아이들의 연대가 도스토예프스키적 연대의 독특성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공동체적 의식은 공간이 아닌 시간의 축을 따라 확장되고 전파된다. 공동체 의식은 무엇보다도 후손에 대한 책임과 기억이다. 후대 사람들에 대한 책임의 문제를 작가가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가 하는 것은 소설의 에피그래프에 잘 드러나 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19)” 실제로 악의 화신 표도르 까라마조프가 가장 크게 잘못한 일 역시 아들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 것이다. 표도르는 자신에게 세 아들이 있다는 것조차 망각하고 자신의 쾌락만을 추구했다. 후에 아들 드미뜨리가 그루셴까를 두고 아버지와 다툴 때에 그는 엄청난 질투심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그루셴까가 새로운 연적인 폴란드 인과 떠나버리자 그는 놀랍게도 연적에 대한 증오나 질투심 없이 순순히 양보하는 태도를 보인다. “나는 방해하지 않고 양보하겠어. 나도 양보할 수 있단 말이야.(700)” 그 후에 변호사의 증언에서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나지만, 드미뜨리는 아마 어느 정도는 자신의 연적이 바로 아버지 표도르였기 때문에 더욱 질투와 복수심에 불타올랐을 것이다. 자신을 책임지지 않고 심지어 기억하지 않은 아버지 표도르에 대한 드미뜨리의 증오는 동정을 받고 다소간 정당화되는 것이다. 이처럼 사건의 발단이 아버지 표도르가 자식들의 존재를 망각한 데 있는 만큼, 이 소설에서는 아이들에 대한 책임이 가장 중대한 윤리적 기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기억의 윤리


도스토예프스키적 윤리를 실천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감정을 망각하지 않고 잘 기억해두어야 하며, 이러한 기억을 새로운 연대의 기초로 삼을 필요가 있다. 타인의 고통에 온전히 공감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우리가 직접 ‘타인이 되는’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런 식으로는 타인과 온전한 연대를 이룰 수가 없다. 그러나 인간은 또한 고립된 채로는 살 수 없는 동물이다. 따라서 인간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를 이루어야 하지만, 동시에 완전히 타인의 입장에 서지 않고서는 타인의 감정을 온전히 느낄 수 없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시간적 차원의 연대이다. 어른은 과거에 누구나 아이였으며, 아이 또한 자라서 어른이 된다. 어른이 과거의 기억을 보존하고 있다면 그는 이를 바탕으로 아이들과 공감할 수 있게 된다. 아이들 또한 자라서 어른의 입장에 서게 된다. 이처럼 연대는 시차를 두고 이루어진다.


나의 오만을 극복하는 방법은 최대한 많이 나의 경험들을 꺼내어 보고, 그 때의 감정들을 되살려 보는 데에 있을 것이다. 과거의 어느 때에 나는 분명 내가 지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타인과 비슷한 상황에 처했던 적이 있을 것이고, 그 때의 나의 감정을 기억해냄으로써 타인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도스토예프스키적인 기억의 윤리이다. 언어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인간 내면의 복잡성, 그 한 쪽 극단이 보여주는 사악함의 심연, 개별자의 차이를 사상하는 연대와 이성적인 사회 변혁 기획의 허구성. 이러한 사실들을 인정한 후에도 여전히 윤리라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도스토예프스키적인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끝)

 

 

1) F. M. 도스또예프스끼, 이대우 옮김,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상), (하)>>, 열린책들, 2002. 너무 익숙해져서 쉽게 바꿀 수 없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제외하고는 모든 인명 표기는 책에 나온 것을 기준으로 하였다. 인용할 때에는 괄호 안에 페이지만 적어 넣었다.

 

 

["러시아 명작의 이해" 레포트를 조금 수정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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