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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7/13
    나는 민족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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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민족주의자

[73호]나는 민족주의자
(야생싸가지 / 언니네트워크 편집팀 , paramilta@hanmail.net)
타인에게 존재를 증명받지 않아도, 나는 나 - 우에노 치즈코

제목 참 선정적입니다. 그렇지요? 정치적으로 올바른 페미니스트들의 모임인 <언니네> 특집에 왜 저딴 제목이 올라왔는지 분노의 포스로 클릭한 언니들이라면 조금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비굴한 변명의 서를 읽어주세요. 나는 한 가지 질문으로 이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나는 한국인일까요? '우리나라'를 꼭 '한국'이라고 부르고 월드컵은 쳐다보지도 않으며 단군상이 망가져도 상관없고 일본 소설을 탐독하는 나는 한민족일까요? 해외에서 현지 여자들을 사서 끼고 다니며 가부장의 속성을 버리지 못해 못난 짓을 일삼는 악명 높은 한국 남자들과 다른 취급을 받기 위해 나는 부단히 애썼습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볼게요. 나는 얼굴이 까만편이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곧잘 깜둥이라고 놀림을 받았지요. 어리석게도 정말로 내 외모가 한국 사람이 아닐까봐 걱정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지나보면 알 수 있어요. 납작한 코, 평평한 얼굴, 영락없는 한국인입니다. 아, 눈은 좀 큽니다.
참 깨끗한 나라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민족도 인종도 국가도 모두 같은 곳이지요(이 글에서 복잡한 국가와 민족 개념을 혼동해서 사용한다고 해도 용서하세요). 그러니까 '순혈주의' 같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쓸 수 있는 건지도 몰라요. 이렇게 쉽게 민족을 찾고 혈통을 찾는 것도 어떻게 보면 어려운 일일 겁니다. 민족의 이름으로 전쟁은 터지고 아직까지도 수많은 이들의 추앙을 받는 도시락 폭탄을 던지고 죽었던 열사의 이름을 기억하기도 하지요.

아들들의 이름으로 민족을 찾기는 비교적 쉬운 일이지요(어떤 아들은 힘들기도 하겠지요). 잠깐, 나는 여기서 그동안 계속되어왔던 민족의 꽃인 딸로서 피해자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집에서 뛰쳐나간 뒤 가족과 절연을 선언한 딸로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도 아닙니다. 나는 마치 이 민족이라는 담론이 그토록이나 싫어하고 부정했던 가족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위험한 비유입니다. 그렇지요?)
유태인계 미국 작가인 예지얼스카의 <브레드 기버스>에서 주인공인 로라는 유태인 가정의 답답함이 싫어서 뛰쳐나가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결국 집으로 돌아옵니다. 앨리스 워커의 <은밀한 기쁨을 간직하며>에서도 아프리카계 흑인 여성인 타쉬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아프리카로 돌아가 여성 할례의식을 받습니다. 그녀들이 행복해졌을까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대답을 내리기 힘듭니다만, 그렇다고 해도 페미니즘의 세례를 받아, 혹은 신세계의 진보를 누리던 그녀들이 가부장적이고 구시대의 악습으로 왜 돌아가야만 했을까요. 나는 그녀들의 선택이 옳았다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녀들이 그렇게 선택하게 된 이유를 주목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몇 세기 전에, 어떤 훌륭한 페미니스트는 '나는 국가가 없다. 나는 여성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훌륭한 페미니스트는 <3기니>를 썼던 버지니아 울프랍니다) 나도 그 말을 믿었습니다. 지금도 그 말을 반쯤은 믿고 있지요. 하지만 때로는 나는 '나는 국가(민족)가 있다. 나는 여성인데도'라고 말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한때 친하게 지냈던 독일인 여자 친구가 한 명 있었습니다. 그녀와 저는 각자 자신의 모국(이 얼마나 눈에 거슬리는 말입니까)이 아닌 나라에서 만나서 우정을 나누었지요. 그녀는 레즈비언이었고 페미니즘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와인도 좋아하는 다정하고 착한 사람이었지요. 한마디로 좋은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어느 날, 평소처럼 클럽에서 술을 마시면서(저는 우유를) 그녀와 나는 그날따라 정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유가 너무 들어간 탓이었을까요? 나는 신이 나서 이 멋진 여성 동지에게 한국의 남자들이 얼마나 마초 같은 지를 떠들어댔습니다.
한참 내 이야기를 듣던 그녀는 내 이야기에 심하게 공감하면서, 그녀가 그려오던 제 3세계를 마구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1970년 대쯤의 한국 사회에나 들어맞는 이야기였습니다. 아마도 독일 통일 이전에 히틀러가 살던 시대쯤으로 한국 사회를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나는 분명히 저 훌륭한 독일 페미니스트인 알리스 슈바르처의 <아주 작은 차이>의 한국판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말이지요. 나는 어리석게도 가부장제는 세계적인 공통의 억압이라고 굳게 믿었는데 말이지요. 공감과 분노를 원했던 나의 이야기는 어느새 저 미개한 아시아 나라 중 하나에서 일어나는 특수한 상황이 되었있더군요.
그녀에게 나는 아마도 'Exception'이였을거예요(독일어로 쓰고 싶은데 독일어를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또 왜 영어인가요?). 내 기분을 상하게 하려던 의도는 전혀 없었을거예요. 그래도 나는 이 '무식한' 백인에게 설명해야 했을까요? 발끈하며 삼성이니 LG니 조금 유명세를 탄 기업들을 들먹여 가면서 한국이 얼마나 독일에 지지 않을만큼 성장했는지, 우리는 미개한 나라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야 했을까요. 또다른 제 3세계와 차별하기 위해 말이지요. 어쨌든 그 순간만큼 나는 민족주의자였던 것 같아요. 타자와 만나면 만날수록 나는 민족주의자인 나를 깨달아 갑니다.

조금 이야기를 돌려서, 어떤 경우에는 민족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여전히 무섭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강연을 들은 한 일본인 남학생이 강연이 끝난 뒤 벌떡 일어나서 '죄송합니다. 저는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이야기하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얼마나 순진하고 착한 남학생인가요? 사람들은 너무 쉽게 사람들을 국가(민족)와 자신을 동일시해버리는 게 아닐까요. 이라크 전쟁이 나고 김선일씨가 살해당했을 때, '저 더러운 이라크 놈들을 다 죽여라'고 소리쳤던 한국 사람들의 목소리는 섬뜩한 것이었습니다.
딜레마는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우에노 치즈코가 '여성'이자 전쟁 가해국의 시민인 자신의 정체성에 관해 고민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나는 일본군인들이 조선인 여성들에게 한 것과 똑같은 짓을 했던 한국남자들의 행위에 대해 베트남 사람들에게 미안해해야 하는 걸까요? 아니면 여성으로서 아픔을 공유하고 남자들을 미워해야 할까요? 나는 내가 하지 않은 일까지 책임 지고 싶지 않습니다만 그렇다면 일본 대사관 앞에서 매주 시위를 하는 할머니들은 우스운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녀를 괴롭혔던 사람들은 이미 죽어 흙이 되었을테니까요.

이 모든 것이 내가 선택하진 않았지만 선택한 것과 진배없는 민족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피해와 가해는 얽혀있습니다. 다른 민족이 저질렀던 간악한 범죄를 내 민족이 받았고, 이제는 내 민족이 저지른 범죄로 다른 민족이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가능하다면 나는 그저 여성으로서, 어느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면서 그저 '나'로 남아있고 싶습니다만 세상은 이미 나를 하나의 '민족'으로 규정해 놓고 그 틀에 맞추어 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나는 김치 따위 잘 먹지 않고 대장금을 잘 안보는 한국인입니다만, 그러나 언제나 내게 돌아오는 질문을 그런 것이지요. 나도 남들에게 그렇게 합니다.

부모는 누가 뭐래도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어쩐지 화가 나는 말이지만 불교에서 말한대로 전생의 업에 따라 좋은 부모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는 말이지요. 어디서나 이 납작한 얼굴과 "Where are you from?"은 나를 따라다닙니다. 나는 시작된 게임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지요. 그래도 가족이 점점더 그 중요성을 잃어가는 개인 사회에서 언젠가는 나도 이 공고한 국가 권력과 민족 정체성과 인종주의의 꼬리표가 조금은 희석되어서, 그 경계가 흐려지고 '타인에게 존재를 증명받지 않아도, 나는 나'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가능하다면 '그 사람'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겠고 그들도 내게 그렇게 해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당장에 나는 치사한 방법을 써보려고 합니다. 이미 세상은 그들의 경계 나누기로 나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지요. 나를 내부로 생각하는 곳에서 나는 반민족주의자가 되겠고, 나를 외부로 생각하는 곳에서 나는 친민족주의자가 되겠습니다. 결국 나는 아무것도 아닌 기회주의자일 뿐이겠지만 어쨌거나 내가 선택하지 않은 조국을 다시 선택하는 셈이지요. 어쩐지 말장난에 한바탕 놀아난 것 같지요. 선정적인 제목에 분노하기도 아까울만큼 우유부단한 글이지요. 그래서 또 하나 우유부단한 말을 던지고 글을 마칠까 합니다.

나는 여성입니다. 그래서 나는 한국인이기도 하고 한국인이 아니기도 합니다.


사족: 이 글의 물음의 많은 부분은 우에노 치즈코의 글이 실려있는 <경계에서 말한다>(2004)에 빚지고 있습니다. 이번 특집을 계기로 나는 이 여자를 아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1994), <내셔날리즘과 젠더>(2000)같이 재미없는 책만 쓴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말이지요(빛나는 글입니다만 안타깝게도 재미가 없습니다). 이 책에 실린 우에노 치즈코의 글은 아주 읽을 만한 글입니다.


* 글을 퍼가실 때는 출처를 반드시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월간 언니네(www.unninet.co.kr) 2006년 6월 특집 "민족주의에 박치기!" 중

 

[아래쪽에 써있듯, 언니네에서 퍼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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