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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2/16
    남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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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6/02/14
    스피노자의 역량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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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터널 선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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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6/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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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피박 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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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6/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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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6/02/11
    그림으로 이해하는 우주과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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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6/02/08
    결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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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6/02/08
    성의 구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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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오늘 새터책 회의에 들어가서, "우리의 존재 자체가 죄악일 수도 있다"고 얘기했다가, 납득이 안 간다는 대답을 들었다. 나도 안다, 전략적인 과장이었다. '고민하는 척' 하는 게 제일 싫어서 그랬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는 과장이 아니기도 하다.

 

권력은 최대한으로 버려야 한다. 물론 생존법으로서의 권력은 '필요할 때도 있다.' 그러나 모든 권력의 수혜를 입고 있는 그런 종류의 사람에게 그 말은 유효하지 않다. 그 사람은 바로 '남자'다.

 

여기서 물론 '남자'는 여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성적 소수자도, 장애인도 아니며, 학벌이 좋으면 설상가상이요, 결과적으로 재산도 있고 성격도 좋으니 첩첩산중인 인간의 종류를 말한다. 버려야 할 권력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이 중에 한 가지 권력을 완전히 버릴 수 있는지조차 의문이지만,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다. 문제는 이 다종다기한 권력들의 '한 곳으로 모이려는 경향성'이다.

 

이 권력의 결집체를 나는 그냥 '남자'라고 부른다. 기독교 신교(개신교)중에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측을 그냥 '기독교'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물론 이건 나의 어법일 수도 있지만, 이들이 스스로를 나머지의 '대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권력은 또 다른 권력을 찾아 모여드니 그 이름(이를테면 남자)으로 보통 지칭되는 영역 내에서 실제로 차지하는 비율도 가장 높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일리는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남자'의 경우, 모든 권력들이 그의 어깨 위로, 혹은 발 밑으로 집중되어 있다. 그는 움직이는 권력덩어리다. 많은 사람들의 그의 존재만으로 불쾌감을 느끼는 건 억지로 둘째치더라도,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악행들이 바로 자기가 서 있는 사회적 기반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따라서 나는 말한다. "'남자'는 존재 자체가 해악이다."

 

그래서 '남자'는 '권력을 어떻게 버려야 하나' 하는 질문에 앞서 다음을 먼저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왜 살아야 하나.' 좀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까뮈가 "진정으로 철학적인 문제는 단 하나뿐이며, 그것은 자살"이라고 했을 때 그는 제대로 짚은 것이다. 단 하나뿐인지는 모르겠으나, 거기가 출발점(혹은 도착점)은 맞다.

 

무기력하다. 나도 안다. 그러나 그 무기력을 곧장 딛고 일어서는 '남자'들에게 나는 '충분하지 않다'고 이야기하겠다. 자신의 어깨 위에 얹혀진 사회적 책임의 무게는 알량한 두 개의 다리 근육으로 버텨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 잘못이 있으면 내가 무언가를 해서 그걸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기보다, 하지 않음으로써 바꾸어지는 부분이 꽤 크다는 걸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권력의 자신감은 정말 메스껍다.

 

덧) 조금 고민하다가, 이것 역시 일부분이라는 걸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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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역량 개념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존재의 본질은 역량이다. 즉, 실존할 수 있다는 것은 역량을 갖는다는 말이다. 역량은, 정지 상태에서는 존재하지 않고, 언제나 그 자체로 활동이거나 활동 중에 있으므로, 무언가에 대한 일종의 작용이다. 즉, '실존할 수 있는 역량'은 '작용할 수 있는 역량'이라는 말과 같다. 또, 이 활동은 항상 무언가를 생산해낸다.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힘이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무언가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의 힘, 제도의 힘, 즉 권력은 우리에게 필요 없다. 그것은 비생산적이며 본질적으로는 실존할 수 있는 역량과 관련이 없으므로 존재의 고양을 가져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역량의 한 측면일 뿐이며, 다른 측면에는 실존할 수 있는 역량과 동등한 크기의 '변용될(affected)[영향 받을] 수 있는 역량'이 자리하고 있다. 작용할 수 있는 역량과 변용될 수 있는 역량, 즉 '생산'과 '감수성'은 동일한 역량의 두 측면이다. 이 때 역량의 크기를 증가시킬 수 있으려면 이러한 역량의 내부 구조를 먼저 파악해야 하는데, 작용은 단일한 순수 자발성에 의해 일어나는 것 같기 때문에 오히려 그 내부가 불분명하고, 변용은 구조를 파악하기가 더 쉽다.

 

변용될 수 있는 역량의 내부 구조를 살펴보자. 변용될 수 있는 역량 전체의 크기는 그 변용의 종류에 의해서 결정되는데, 변용에는 '능동적 변용'과 '수동적 변용'이 있다. 능동적 변용은 내부적 원인에 의한 것, 수동적 변용은 외부적 원인에 의한 것이다. 수동적 변용들은 '고통을 감내하는 역량'과 관련될 뿐이며, 따라서 역량의 결여를 표시한다. 능동적 변용들이 바로 작용할 수 있는 역량과 직접 관련되며, 내적인 원인을 산출해낼 수 있다는 것을 통해 자신의 역량이 충만하다는 것을 표시한다. 즉, 변용될 수 있는 역량을 구성하는 변용들 중에, 능동적 변용의 비율이 높을수록 변용될 수 있는 역량 자체의 총합이 증가하며, 이는 동시에 실존할 수 있는 역량의 증가를 의미한다. 반대로 수동적 변용이 상대적으로 많을 경우에는, 실존할 수 있는 역량의 총합이 감소한다.

 

그러나 인간의 변용될 수 있는 역량은 수동적 변용들로 채워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가 영향 받을 수 있는 것을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없고, 외부적인 어떤 것과 수동적으로 맞닥뜨린 다음에야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왜냐면 인간 실존에 비해서 자연의 힘은 무한히 크고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능동성이란 자연 앞에서는 보잘것없는 수준에 머문다.

 

이 수동적 변용은 다시금 두 가지로 구분된다. 물론 우연히 마주친 것이지만 그 신체의 본성이 나의 신체의 본성과 일치한다면, 즉 그것이 나의 신체와 '양립 가능'하고 '합성 가능'하다면, 그래서 나의 신체와 그 신체가 합성되어 새로운 신체를 생산해낼 수 있다면, 그 변용은 '좋은', '유용한' 변용이 된다. 이처럼 본성이 일치하는 신체들의 만남에 의한 변용을 '기쁜 수동적 변용'이라고 한다. 여기서 '좋은' 변용이라는 말은, 실존할 수 있는 역량이 커졌다는 말, 즉 능동적 변용의 상대적 비율이 증가했다는 말과 같다. 이 말은 기쁜 수동적 변용이 수동적 변용을 능동적 변용으로 변화시켰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우연히 마주친 신체와 나의 신체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어떤 본성을 찾아낸다는 것은 외부적 원인을 내부적 원인으로, 즉 능동성의 원리로 전환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나의 신체 안에도 존재하는 어떤 것을 다른 신체와의 공통성으로 찾아냈으니, 이것은 외부적 원인이면서도 내부적 원인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본성이 일치하지 않는 신체들의 만남은 '슬픈 수동적 변용'을 가져온다. 이 신체들은 우연히 만난 다른 신체를 제약하거나, 분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기쁜 수동적 변용은 능동적 변용으로 도약함으로써 변용될 수 있는 역량, 즉 실존할 수 있는 역량의 총합을 증가시키지만, 슬픈 수동적 변용은 계속해서 고통을 감내하는 역량과 관련을 맺을 뿐이므로 실존할 수 있는 역량 자체의 감소를 가져온다.

 

인간의 경우는 어떨까. 원리적으로 인간들은 본성이 일치해야 하기 때문에, 인간들의 마주침은 그것이 우연적이더라도 기쁜 것이어야 하며, 이렇게 찾아낸 인간들 본성 내부의 '공통적인 것의 관념'이 외부적 원인을 내부적 원인으로 전환하여 능동성의 원리를 낳고, 이어서 인간이 실존할 수 있는 역량을 증가시키게 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들의 변용될 수 있는 역량이 능동적 변용들로 채워져 있는 한에서만 맞는 말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자발적 본성을 충분히 발휘하지 않는 한 인간은 본성상 일치한다고 말할 수 없다. 각각의 인간 신체는 외부의 압도적인 힘에 의해 수동적 변용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서로 다른 본성들을 갖게 되며, 서로에게 슬픈 수동적 변용만을 일으킨다. 이로 인해 인간은 역량이 부족한 채로 살아가는 것이지만, 또한 역량을 증가시킬 수 있는 최후의 기회마저도 박탈당한 채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들은 서로 다르며, 서로간의 만남은 슬픈 수동적 변용만을 낳을 뿐이다. 그래서 그 만남들은 서로의 실존할 수 있는 역량을 감소시킨다.

 

섣불리 대안을 생각하기에는 여운이 너무나 강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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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종 드 히미코

개봉하는 날 종로에 가서 봤다. 일부러 개봉일에 맞춰 가려던 건 아니었는데, 어쨌든 포스터도 받았다. 뒷면에는 이누도 잇신의 전작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포스터도 있다. 조제가 더 좋았다, 혹은 더 좋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난 조제를 그리 즐겁게 보지 못했다. 그 때 난...... 어렸었다. 뭐, 그 말이 무슨 의미든. 아직은 생생히 되살리기에 조금은 고통스러운 기억들.

 

좋다. 난 영화를 보러 가면서 이런 느낌을 기대하나보다. 영화를 보고 전율하며 나올 때는 기대 이상의 것을 얻은 것 같은 느낌이다. 이 영화는 물론 그럴 의도는 없다. 따듯하고, 거슬리지 않는 것. 딱 그만큼.

 

관객이 3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인디 영화는 관객 1만명을 흥행의 기준으로 본다니, "엄청" 흥행한 셈이다. 좋은 소식이지만, 인디 영화씬 전체의 선전을 예고하는 작은 사건이었으면 더 좋겠다. "왕의 남자"는 관객 천만명을 돌파했다지만, 인디 영화 관객이 천만명이 넘으면 그건 인디 영화가 아니니까.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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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터널 선샤인

두 번째로 보니까 좀 더 눈에 들어왔다. 아아, 그리고 여전히 슬프다. 얼어붙은 찰스 강 위에 누워있는 것처럼, 아름답지만 시리고 함께 있지만 외롭고 뭐 그렇다. 오래 사귀면 수도 없는 그 사람의 단점이 드러나는 법, 그걸 전부 알고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될까. 더 잘 이해하는 문제에 불과한데도, 그걸 알면서도, 끙끙대기만 하는 우리이니 말이다.

 

한 장면은 특히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클레멘타인과 조엘이 몬톡에서 처음 만난 날 밤. 클레멘타인이 남의 집에 창문으로 무단 침입해서 주인 행세를 하고 마치 아이처럼 쉴 새 없이 말하고 심지어 남의 술을 찾아서 꺼내 마시는 등 소란을 피우는 반면 조엘은 남의 집에 들어온 게 못내 두려운지, 개가 있지 않을까 주인이 오면 어쩌나 아무래도 이건 너무한다는 등의 핑계를 대며 클레멘타인을 떠나 집을 빠져 나온다.

 

그 장면을 회상하면서는 이렇게 말한다.

 

"난 네가 아마도 괴짜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넌 들떠있던 거였어.(i thought maybe you were a nut. but you were excited.)"

 

덧) 이 장면이 왜 인상적이었는지 잘 설명을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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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 시나리오

'윤리적' 문제로 섀튼과 결별했던(그에게 결별을 당했던) 황우석 박사는 줄기세포연구의 또 다른 중심 인물인 미국의 P 박사와 손을 잡고 연구를 계속한다. 논문이 조작되었다는 MBC의 주장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고 만다. 혹은 그렇게 발표된다. 진실은 그 누구도 몰랐으나, 그저 대중들이 'MBC 드라마 안보기 운동'을 일사불란하게 전개하는 동안, 클럽박스에 올라오는 드라마 영상 파일의 다운로드 횟수는 단연 MBC의 것이 압도적으로 많을 뿐이었다. 연구는 수월하게, 그러나 특별한 성과 없이 계속되었고, 언론에서는 적절한 시기에 한 번씩 별 것 아닌 자잘한 실험의 성공을 대서특필함으로써 대중의 관심이 계속해서 유지되도록 엄호한다. 사실, 대중의 관심은 '유지된다'는 말이 무색하게도 기하급수적으로 증폭한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정치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던 대한민국 대중들은 이제 신문의 정치란보다는 모든 일간지에 신설된 교양과학란을 본다. 대통령보다 더욱 큰 영향을 행사하는 그 인물의 자리는 종신직이었다. 문제는 P 박사가 특허와 관련해서 논란을 일으켰다는 것인데, 이것이 과연 어느 정도의 문제였는지는 이 세상 모든 언론이 없어져야지만 명확해질 것이었으나, 어쨌든 문제는 사후적으로 일파만파 커져갔다. 황우석은 참담한 표정으로 P 박사에 대한 담화문을 발표하였고, 그 발표문의 마지막 문장이 '대한민국 국민들'의 기형적으로 증폭된 분노의 심지에 점화의 불꽃을 당겼다. "과학기술의 역사, 인류의 역사에 길이 남을 미국에 의한 이 수모를 우리 국민들은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대중들 앞으로 미국의 경제적 보복 의혹에 관한 기사들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급기야 황우석이 청와대에 친히 왕림하시어 대통령과 함께 오찬을 하며 '국력 증강'의 필요성에 대해 역설한 후, 국방비의 비율이 국민의 분노 게이지 만큼이나 엄청나게 올라간다. '전쟁막는세상' 등에서 목숨을 걸고 성명서를 발표하였지만, 오히려 거시적 수준의 테러를 당하고 잠수한다. 양복을 입은 중년의 신사가 외국인이 많이 모이는 명동의 한 가게에 난입해 사냥용 엽총으로 7명을 살해한다. 문제는 그들이 3명의 미국인, 2명의 독일인, 1명의 캐나다인, 1명의 혼혈아(캐나다-한국)였다는 것이다. 국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 사건을 정당화하며, 전 세계를 상대로 하는 전쟁을 치를 각오를 다진다.

 

후에 학자들은 한숨을 내쉬며 파시즘을 새롭게 정의하였고 역사적 사례를 추가하였으며, 제 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지 않은 것만을 다행으로 여겼다. 한국은 독일이나 이탈리아만큼 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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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박 넘기

스피박 넘기 - Critical Thinkers 03 | 원제 Gayatri Chakavorty Spivak (2003)
스티븐 모튼 (지은이), 이운경 (옮긴이) | 앨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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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친 김에 이것도. 영국 루틀리지 출판사에서 나오는 "Critical Thinkers"라는 시리즈물 중 한 권이다. 원서들은 전부 책이 다루는 인물의 이름을 곧장 제목으로 썼다. 우리나라에선 거기에 무언가 덧붙여야만 제목같아 보인다고 생각하는 걸까. 사이드와 지젝, 그리고 스피박이 먼저 번역되었고, 다른 저작도 번역중인 듯 하다. 서발턴과 포스트식민주의에 대해선 트랜스토리아 지난 몇 호에서 계속 다뤄 왔으니, 같이 읽으면 좋을 듯. 이제 슬슬 읽어야할 때가 아닌가, 궁금해한 지도 너무 오래 됐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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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 Critical Thinkers 01 | 원제 Slavoj Zizek (2003)
토니 마이어스 (지은이), 박정수 (옮긴이) | 앨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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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의 설명에 의하면, "가장 쉬운 지젝 입문서."

지젝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세 사람, 헤겔, 맑스, 라캉에 대해 예비적 설명을 한 뒤, 다음의 다섯 가지 주제를 통해 지젝의 핵심 사상을 전달한다고 한다. 1) 주체란 무엇이며 왜 중요한가, 2) 탈근대성에서 끔찍한 것은 무엇인가, 3) 현실과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4) 남성과 여성의 관계는 무엇인가, 5) 왜 인종주의는 환상인가.

 

로쟈의 마이페이지 전체내용 -> http://www.aladdin.co.kr/blog/mypaper/686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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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이해하는 우주과학사

그림으로 이해하는 우주과학사

혼다 시케치카 (지은이), 조영렬 (옮긴이) | 개마고원

 

 

정   가 : 10,000원
판매가 : 9,000원(10%off, 1,000원 할인)
마일리지 : 270원(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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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 사고싶다.

이거 대신 트랜스토리아 최근호 샀다. '스피노자의 현재성'이 특집이라 진태원씨 글이 실려 있는. 어쨌든 이것도 언젠가 살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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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론

결정론적 요소들이 무한히 복잡한 체계를 이루고 있다면 그 체계는 결정론적인가?

 

어떤 운동이 '예측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운동을 설명할 수 있는 법칙이 부재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존재하는 예측 불가능한 대부분의 운동들은, 일정한 법칙으로 환원은 가능하지만 무한히 많고 다양한 하위 구성 요소들을 가지고 있으며, 이 요소들이 운동 안에서 어마어마하게 복잡한 내부 구조를 이루고 있다. 서로에 작용하는 중력이 서로의 운동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만약 세 개의 별들이 모인다면, 그 별들간 중력의 상호작용을 모두 계산해 정확한 운동을 예측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한다. 이와 같은 복잡계의 운동들을 예측할 때 우리는 오직 근사치로만 만족해야 한다. 그러므로 (대부분 오차범위 내에서이겠지만) 예측에서 벗어나는 것도 생긴다. 단순히 기술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무한히' 많을 경우에는 기술의 진보도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법칙이 부재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 이유만으로 이것을 과연 결정론이라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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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구별

누군가가 여성이라면(또는 남성이라면) 그는 왜 여성(또는 남성)일까? 또는 그가 여성이라면 그는 어떠한 조건을 갖추었기에 여성이라는 것일까? 이것을 결정하는 요인은 매우 다양하며, 이러한 요인들이 서로 각축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하나의 동일적인 성이 하나의 개체에게 할당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잠정적인 것이고(그렇게 여겨지지 않고 있어서 문제지만), 아무리 잠정적이더라도 굳이 그렇게 동일적인 성을 각 개체에게 부여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반론도 가능하다. 여기서는 가능한 주장들의 접근 통로를 모두 열어두고 일단 밑그림을 그려보겠다. 왜냐면 이 작업은, '권력의 포기는 가능한가'라는 보다 포괄적인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 내가 생각했던 것을 정리하고 기록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성은 생물학적으로 규정된다. 대중들은 '생물학'이라는 잣대를 반박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 요인은 개체의 성을 결정하는 데 있어 지배적인 힘을 갖는다. 생물학 안으로 들어가 더욱 정확하게 짚어 보자면, 성을 구분하는 이 생물학적 잣대는 바로 염색체의 모양이다. 그러나 여기에 어느 정도 논점이 존재하는데(물론 이것은 학적 의견이므로 상대적으로 높은 정도의 객관성은 가지겠지만), 가령 호르몬의 분비량같은 생물학 내부의 다른 기준이 더욱 일반적인 성 구분 기준으로 자리잡을 수도 있었다고 가정할 수는 없을까, 혹은 이러한 다른 요인들은 성을 결정하는 데 아무런 학적 영향력을 가지지 않는 것일까 하는 물음이 그것이다. 또한, 이 염색체의 모양은 그것이 성기의 모양이나 체형 등을 결정하는 요인이기에 중요성을 갖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다면 수술이나 호르몬 조절을 통해 염색체가 부여한 성과는 다른 성의 외관을 후천적으로 획득했다면, 이 역시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 모호해진다.

 

성은 또한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개체는 이 과정을 통해 성적 구별을 획득한다기 보다는 경직된 성 구별 관념을 형성한다. 또한 법적인 기록을 통해 그러한 성 정체성을 공적으로, 그리고 고정된 것으로 인정받는다. 따라서 개체의 성을 결정하는 장에 다양한 기준들이 관여하고 있다는 생각은 두 번 반박당하는데, 한 번은 '객관적 과학'을 자처하는 생물학, 또는 그 생물학을 신봉하는 대중들에 의해서이고, 또 한 번은 개체가 사회화를 겪으며 받아들이도록 강요당한 경직된 성 관념에 의해서이다. 이 강요는 후에 자율성으로 둔갑한다.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라는 성을 부여받으면, 그 다음에는 사회적으로 '여성'이라는 성을 부여받을 차례다. 그러면 개체는 자신의 '여성임'을 '자율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는 법적인 '여성임'에 의해 보증된다.

 

그 과정에서 성은 자아에 의해 의된다. 이 의식은 이처럼 사회화가 어느 정도 진행된 이후에 등장한다. 문제는, 이러한 자아의 성적 의식은 생물학적으로 부여된 자신의 성과 대부분 일치하게 되지만(그 일치에 일조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성 관념이다),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바로 그 사회적 성 관념이 이 불일치에도 일조할 수 있다). 각각의 자아가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의식하려면, 필연적으로 사회적인 틀, 즉 여성과 남성의 이항 대립적 체계 속에 자신의 성을 끼워 맞춰야 한다. 이 과정에서 중간적 성 정체성을 가진 개체는 혼란을 겪게 되며, 좀 더 일반화하자면 모든 개체들이 어느 정도 혼란을 느낄 것이다.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성 관념이 경직되어 있을수록, 자아가 의식하는 자신의 성과 생물학적으로 부여된 자신의 성이, 더욱 강하게 일치하거나 불일치하게 된다.

 

그러나 성은 의식되지 않을 수도 있다. 자신을 남성으로 경험하는 어떤 심리적 사실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은, '어쨌든 나는 여성이니까'라고 그 개체가 생각함으로써, 혹은 그 개체의 언어적 틀 안으로 포착되지 않음으로써 의식되지 않은 상태일수도 있다는 말이다. 역시 성 구분의 요인이 (생물학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경직되어 있을수록 이런 상황이 발생할 확률이 크다. 하지만 이 기준은 너무 포괄적이며, 또한 실재하는지 의심스럽고, 그러므로 공시적으로 파악하기에는 설득력이 좀 떨어지는 부분이 있다.

 

성은 타인에 의해 의식될 수도 있다. 이로 인한 성 구분은 다른 모든 기준에 의한 것들과 어긋날 수도 있다.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며 법적으로도 여성이고, 심지어 자아에 의해서도 여성으로 의식된다고 해도, 외관상 남성이면 대부분의 타인들은 그를 남성으로 의식한다. 그와 동시에 남성에 해당하는 사회적 이미지 체계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즉, 권력이 발생한다. 왜냐면 권력은 개체-내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타인에 의해 의식되는 성 정체성에 관한 논의는 보통 옷을 입고 사회적 생활을 영위하는 가운데 발생하는 인식에 관한 것이지만, 수술이나 호르몬 조절을 통해 옷 안의 신체가 다른 성의 외관을 갖게 된 경우와도 문제를 공유한다. 이는 염색체의 모양이 지시하는 성과 신체적 외관이 가리키는 성이 서로 다른 경우와의 연관성을 가지며, 이것이 선천적 불일치라면 수술 등에 의한 것은 후천적 불일치이다. 생물학적으로는 불분명하며 법적으로는 남성이고 자아에 의해서도 남성으로 의식된다고 해도, 심지어는 그가 사회적 생활을 남성의 모습으로 영유한다고 해도, 그 생물학적 외관에 의해서 타인들은 그를 여성으로 규정할 수도 있다. 물론, 수술 등의 조치를 일부러 취해서 여성이 되고 싶은 것이었다면(그러면 물론 스스로 여성으로 규정할 것이며, 사회적 생활도 여성의 모습으로 영유하겠지만), 타인이 자신을 여성으로 규정하는 것이 그가 바로 원하던 바였을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한 명의 '남성'에게 있어서, 그가 생물학적 기준을 상대적인 것으로 여겨 거부한다고 해도, 사회적인 성적 규정을 무시하고 전통적으로 여성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일들을 적극적으로 수행한다고 해도, 심지어 스스로를 여성으로서 정체화하고 있으며 그것을 공공연하게 표출함으로서 남성으로서의 자신의 권력을 포기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해도, 일단 타인에 의해 자신이 남성으로 의식되기만 한다면 여전히 그 역겨운 권력은 자신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또한 안타깝게도 이 부분은 매우 결정적이다. 이 세상 속에서 그를 만나는, 혹은 그를 스쳐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겉모습만을 보고 그를 남성이라고 판단할 것이며, 바로 그 순간 권력이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잘 모르는, 그래서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너무 과장하고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폭력적인 권력 행사는 오히려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더욱 빈번하게 발생할 수 있다고 답하겠다.

 

[이 내용은 '권력의 포기란 가능한가'라는 더욱 큰 문제의 일부분으로 읽혀져야 할 것이다. 여기에 쓴 것은 그러한 문제를 설득력있게 제기하기 위한 하나의 자세한 예증이다. 그러므로 세부 사항에 대해서 논박할 여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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