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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4/21
    채식
    pug
  2. 2006/04/10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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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6/04/06
    스피노자의 판글로스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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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6/04/05
    엄마, 화장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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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6/04/01
    코기토 명제의 도출 과정에 대한 문제제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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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6/03/26
    지하철 막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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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6/03/15
    무뎌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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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6/03/08
    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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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6/02/18
    베르그손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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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6/02/18
    니체, 생명과 치유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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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

"이렇게 지구를 착취하면서 지구의 암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부채감 역시 없지는 않았지만."

 

그 부채감에 짓눌려 죽고 있는 중. 누군가 와서 '그건 무게가 있는 게 아니니 허리를 꼿꼿이 펴면 된다'고 말해 주었으면.

 

"채식주의자들의 존재는 내가 단순히 '그냥' 고기를 먹고 있는 게 아니라 '굳이' 고기를 먹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자각을 시켜주었다."

 

"그건 내게 너무 먼, 나보다 훌륭한 다른 사람의 문제였다."

 

게다가, '난 다르게 훌륭한거야, 훌륭하지 않은 게 아니라' 하고 변명을 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견디기 어려웠을 테니까. 나의 말에 내가 질식하는거야. 나는 아마도 앨리스처럼 작아지고 있나봐.

 

"그래서 이 정도의 실천만으로도 뿌듯해 한다는 게 우습기도 하다."

 

사실 별로 뿌듯해하지도 않았다. 그만 좀 씨니컬하시지. 그게 없다면 뭔데? 뿌듯해해도 괜찮아, 그냥 좀 더 나을 뿐인 것도 아니야, 난 이렇게 해야만 해.

 

"식생활이 외식에 의존하는 만큼, 나는 곧장 동물의 살점들을(그러니까 고기를) 안 먹는 대신 버린다."

 

정당화와 비판 사이의 칼날. 머릿 속에서 수 만 마리의 새들이 푸드덕.

 

"난 내가 육지 동물의 고기를 덜 먹는 만큼 해양 동물의 고기를 먹고 있다는 걸 느낀다."

 

아는데도 말하지 못했다. 뭘 어쩌라는 거야! 제길.

 

"내가 이미 합법적인 선택지들을 편안하게 소비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면, 그것이 '새로운 윤리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은 것이다."

 

이제 그만.

 

정착하고 싶다. 나는 흄을 읽지 말아야겠다.

 

(따온 말들은 "언니네 방"의 한 글에서, 담담하게 그러나 조금 슬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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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4월

mono - you are there(2006)

과장된 아름다움.

 

sigur rós - takk...(2005)

약간의 전율과 약간의 실망. 다음이나 다음 다음 앨범쯤에 대박을 터뜨려야 할텐데.

 

radiohead - hail to the thief(2003)

라디오헤드에 처음으로 빠지는 중. 전반부는 최고! 조금 떨어지는 후반부에는 myxomatosis가 있다.

 

my bloody valentine - loveless(1991)

어렵잖아.

 

mogwai - come on die young(1999)

"Have you ever felt like that? When you just couldn't feel anything and you didn't want to either."

 

jeff buckley - grace(1994)

할렐루야.

 

mew - frengers(2003)

몇몇 참신한 순간들. 모든 것을 압도하는 보컬의 '미성'.

 

sufjan stevens - illnoise(2005)

이상한 포크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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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판글로스 비판

볼테르의 [캉디드]에 나오는 판글로스의 목적론적 주장을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비판해보시오.
1) A4 1장 이내로 작성하되, 판글로스와 스피노자 사이의 대화 방식으로 글을 꾸며볼 것.
2) 다른 사람들 것을 베끼면 F를 줄 거예요. (-_-b)

 



어쩌다가 스피노자가 100년쯤 늦게 태어나서, 1755년 리스본 지진의 폐허를 앞에 두고 판글로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캉디드는 폐허 속으로 음식을 좀 찾으러 갔다.

 

판글로스: 정말 엄청난 지진이로구나.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사실 잘 되어 있는 것이지. 이 지진 역시도 최고로 잘 되어 있는 이 세상의 일부인 것이네.


스피노자: 아니 이런 아비규환의 상황에서도 그런 말씀이 나옵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는 근거는 대체 뭡니까.


판글로스: 원래 모든 사물들은 목적을 가지고 있네. 이 코를 보게나. 코가 없으면 안경을 쓰지 못할 게 아닌가. 그러니 코는 우리가 안경을 쓸 수 있도록 존재하는 것이네. 마찬가지로 돌은 성벽을 만들기 위해 있고, 돼지는 먹히기 위해 있는 것이니, 이 지진도 무언가를 위해서 있는 것이네.


스피노자: 그렇다면 저기 저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도 무언가를 위해 있습디까?


판글로스: 그 개개인에게는 불행이로되 이것은 필시 인간 전체에게는 이익이 될 것이네. 왜냐면 목적을 가진 모든 사물은 필연적으로 더 좋은 목적을 원할 것이고, 결국 가장 좋은 목적을 얻게 되니까 말일세. 이 모든 것은 필요 불가결한 것일세.


스피노자: 개인들의 불행이 오히려 더 큰 목적의 달성을 위한 것이라는 말씀이군요. 그렇다면 이 지진의 목적은 뭡니까. 그건 어떻게 알 수 있나요.


판글로스: 자네도 참. 그건 알 수 없는 게 아닌가. 왜냐면 그건, 이미 있다고 하더라도 아직 실현되지는 않았을 것이니까 말일세. 그건 앞으로 차차 알 수 있을 테니, 내 말에 일일이 토를 다는 수고는 그만두게나. 어차피 최고로 잘 되어 있는 세상, 무어 그리 의심이 많은가.


스피노자: 의심할 수밖에요. 지금 당신은 결과를 원인으로 간주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 어찌하여 이미 일어난 일의 원인입니까? 그리고, 더 큰 목적과 더 작은 목적이란 게 있다는 모양인데, 이를테면 돼지를 기르는 농가에서 돼지에게 먹이를 주었다고 합시다. 그 음식물들은 돼지에게 먹히기 위해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돼지 자신은 또한 인간에게 먹히기 위해 존재한다니, 그렇다면 그 돼지는 무엇하러 먹이를 먹었다는 말씀입니까?


판글로스: 그거야, 살이 피둥피둥 쪄서 인간에게 더 많은 고기를 제공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그것이 돼지가 존재하는 목적인 것이야. 이처럼 모든 사물에는 목적이 있네. 이것이 바로 모든 일의 원인이 아닌가. 그 원인은 아직 우리가 모르는 것일 뿐, 원래부터 있는 것일세.


스피노자: 철학자여! 당신의 무지를 정당화하려 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모든 사물들이 목적을 갖는다고 해 놓고는, 모든 사물들이 인간의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논증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당신의 말 속에서 나는 인간의 목적 이외의 것은 찾지를 못하겠더이다. 게다가 자기도 모르고, 또 어떻게 해도 알 수 없는 원인에다가 목적이라고 이름을 붙여 놓다니, 그런 것이 사물들의 참된 원인을 구하는 철학자의 판단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판글로스: 어쨌든 나는 저 위대하신 형이상학자인 라이프니츠를 따라 내 입장을 유지하겠네. 철학자로서 말하건대, 그는 틀릴 수 없어!

 

스피노자는 판글로스를 떠나 한숨을 크게 쉬며 독백을 한다.

 

스피노자: 자신의 의지만을 의식하고 있을 뿐, 그 의지의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구나! 그러고서도 철학자라고 착각하고 있다니. 모든 일에서 놀라며 신만을 찾으며 생각하려 하지는 않는 우중들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아, 그들은 자신들의 무지 속에서 이 세상을 그저 정당화하고 있을 따름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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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화장실

 

 

 

 

 

엄마, 화장실

_피들밤비

 

몸 위에 내려 몸을 숨겨 주는 것

몸 위에 내려 몸을 숨겨 주는 것

 

아이가 잠들기를 기다려 살며시 팔을 빼고

화장실에 다녀오는 엄마처럼 돌아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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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기토 명제의 도출 과정에 대한 문제제기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도 코기토 명제의 도출 과정에 대해 의문점들을 좀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 몇가지는 아래 학생의 질문에 대한 선생님의 대답을 읽은 뒤에 어느 정도 해결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의심가는 것이 있어 이렇게 질문 드립니다. 회의를 중요한 철학적 방법으로 설정한 데카르트인 만큼, 그의 명제에 대한 제 의심에 대해서도 그가 기특하게 생각해 주길 바라면서 말입니다. ^^

 

먼저 데카르트 자신은, "나는 사유한다"는 사실로부터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를 이끌어낼 때 사용한 논증 구조에 대해 별다른 부연을 하지 않은 듯 합니다. 이 논증은 "어떤 것이 사유한다는 사실은 바로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함축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를 좀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어떤 것이 사유한다는 사실은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제한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사유한다"는 말은, "어떤 것이 [이미] 존재하며, 그렇기에 그것은 사유한다[고 말해질 수 있다]"는 명제로의 확장에 의해서 그 사유 행위자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유 행위의 증명으로부터 존재의 증명으로 이어지는 추론 과정은, 그 두 증명의 엄격한 선후관계에 기반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만약 "나는 사유한다"는 명제에 대해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가 후행하는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앞의 명제로부터 뒤의 명제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과정'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이 논리적인 것이든, 직관적인 것이든, 혹은 하나의 절대적인 흐름이든 간에,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다고 가정된 이 세계에서, 심지어 악령의 가설을 통해 수학적 사실마저 믿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는 이 상황에서는, 그러한 '과정'에서 어떤 왜곡, 어떤 방향 전환이 일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유한다"는 명제에 대해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를 선후관계상 앞선 것으로 생각할 경우에만 우리는, "나는 사유한다"의 확실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나는 존재한다"의 절대적 필연성을 선취된 것으로서 확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추론과정은 다음과 같은 명제를 암묵적으로 도입하고 있다고 생각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행위자가 사유한다는 것은 그 행위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 명제에 엄격히 따르자면, 어떤 행위자가 존재한다는 것이 이미 증명되어 있지 않은 경우에는, 즉 전제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경우에는, 그 행위자가 사유한다는 것 역시 말해질 수 없습니다. 데카르트의 경우, 그는 "내가 의심한다"는 그 사실만은 의심할 수 없는 확고한 것으로 규정하고 그것으로부터 의심하는 "나"의 존재를 증명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그는, 의심하는 행위의 행위자인 "나"의 존재가 아직 증명되지 않았으므로 "나는 의심한다"라는 명제 역시 참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한 듯 합니다. "프랑스 왕"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의 여부를 미리 증명하지 않은 채로 "프랑스 왕은 대머리다"라는 명제의 참/거짓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존재하지도 않는 프랑스 왕에 대해서 그가 대머리다, 혹은 아니다라고 얘기할 수 없는 것과는 달리, "나는 의심한다"는 명제는, 어떤 특별한 이유, 이를테면 그것은 의식 외부의 대상과 관계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의식의 내부로부터 알려진다는 사실 등에 의해서, 위에서 우리가 논증 과정 속에 암묵적으로 들어와 있는 것으로 동의했던 명제─행위자의 사유는 그 행위자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는 명제─의 도움 없이도 증명이 가능하다고 가정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명제의 도움 없이는 어떤 행위자가 사유한다는 사실로부터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도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로써 여전히 "나"의 존재여부는 불투명한 것으로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행위자가 사유한다는 것은 그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명제에 동의할 경우, 우리는 "나"의 존재에 대한 증명 없이 "나는 사유한다"는 것을 참으로 간주하지 못할 것이며, 그 명제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우리는 "나는 사유한다"는 사실로부터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를 이끌어내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저의 생각입니다. 나름대로 하나의 완결된 사고과정 속에서 도출한 결론인 만큼, 그 과정 바깥에서 바라볼 경우 쉽게 오류가 보일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저로서는 그곳이 어디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읽고 지적해 주세요.

 

그럼 다음 수업시간에 뵙겠습니다.

 

덧) 지난 수업에 몸이 좋지 않아서 가지 못했거든요,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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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막차

해도 해도 끝나지 않는 숙제를 뒤로 하고 집으로 출발했다. 막차를 탈 정도로 늦게까지 있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주말인 걸 깜박해서 계산을 잘못한 결과로 결국 안산행 막차에 겨우 올랐다. 시간은 12시가 다 되어갔다. 방송에서는 자꾸만 이게 막차라는 걸, 이거 놓치면 집에 못 간다는 걸 강조했고, 그게 고맙기도 했지만 짜증도 났다. 평일 막차와는 달리 앉을 자리도 있어서 불평은 미뤄두고 남은 숙제를 펴 들었다. 그 때, 문이 열리면서 중년의 남자가 바퀴 달린 바구니를 끌며 열차 칸의 중앙으로 왔다. 수도 없이 본 장면이다. 그래도 뭘 파나 싶어서 슬쩍 봤는데, 흔한 건 아니었고 이리저리 돌려서 맞추는 큐빅 모양의 퍼즐이었다. 피곤하거나 술취해서 자는 사람도 많았기에 열차 안은 꽤나 조용했고, 그 침묵을 비집어 열며 행상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순간, 시간이 꽤나 늦었다는 생각, 행상인이 돌아다니기는 좀 힘들 만큼 늦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 남자는 오프닝 멘트를 끝내고 제품을 보여주고 있었다. 큐빅이다. 바구니 안에도 같은 게 잔뜩 들었다. 12시 근처였다. 평범하디 평범한 중년 남자였다. 그 무표정한 얼굴 뒤에, 그리고 그 바구니 안에 과연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는 함부로 추측할 수 없었다. 몇 년 전의 대구 지하철 사고의 악몽이 구름처럼 피어오르며 형언할 수 없는 공포가 온 몸을 휘감았다. 12시인데. 퍼즐을 팔며 돌아다닐 리가 없다. 게다가 이건 막차고, 여기 탄 사람들은 다들 필사적으로 탄 거다. 그 아저씨가 퍼즐을 소개하려고 팔을 번쩍 들 때마다 소름이 확 끼쳤다. 갑자기 아저씨가, "야이 새끼들아, 지금껏 니네 사람 우습게 봤지!"하며 퍼즐을 바닥에 냅다 던지고, 그 외피 속에 들어있던 폭탄이 터지며 불길이 치솟는 상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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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뎌졌을까

무뎌진건지 그 반대인지도 잘 모르겠을 만큼, 무뎌졌거나, 혹은 그 반대가 되었다. 굳이 '그 반대'라고 하고는 그걸 '예민해졌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민망하기 때문이다. 재수없는 표현이지만, 살아가는 방법을 조금은 알았달까. 재수없는 표현일 수도, 그냥 내가 재수없어진 것일 수도. '생각하기'의 기준을 높게 잡다 보니, 그게 두려워졌고, 그래서 잘 하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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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길을 걸어가다 퍼뜩 떠오르는 생각들을 그냥 흘려보내는 게 너무 아쉬웠는데, 요전에는 그나마 그 기억들을 다시금 떠올리느라 머리를 쥐어 짜면서 보내던 황금같은 밤시간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잠깐 컴퓨터가 집에 없어서, 아예 생각들이 줄줄 밖으로 새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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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그손의 철학

베르그손의 철학 
홍경실 (지은이) | 인간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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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둘러싸고 별 반응이 없다. 결국 사서 봐야 하는 걸까. 황수영의 <<베르그손>>은 너무 어렵고 딱딱하고 설명도 명쾌한 편은 아니었으며,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느낌은 안 들었다. 이건 어떨까, 궁금. 동양철학과의 비교철학적 관점이 들어있어서 더 끌리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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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생명과 치유의 철학

니체, 생명과 치유의 철학
김정현 (지은이) | 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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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집중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출간된 백승영의 니체 연구서의 제목은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이었다. 이 책 제목은 <<니체, 생명과 치유의 철학>>이다. 왠지, 백승영의 책 제목을 염두에 둔 것도 같다. 사실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건 나다. 디오니소스적 철학이든 뭐든 일단 니체의 관심사는 삶과 세상의 치유이며, 니체 철학을 공부하려면 철학적 노동자가 아닌 철학적 의사가 되어야 한다는 요지의 서문을 읽고는 이렇게 구매 리스트에 올려 놓는다. 이상하게 이 책은 (인터넷 서점들을 돌아다녀 본 결과) 별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난 이런 책이 출간되었는지도 오늘 서점에서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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