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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02/28
    알립니다
    wooll
  2. 2009/02/24
    無識, 또는 無心의 결과
    wooll
  3. 2009/02/08
    因果無情
    wooll

범아, 넌 여길 지킬 수 없어

 

 

오늘 창 밖으로 밧줄이 계속 오르락 내리락 한다.

뭔가 공사를 하거나 다른 집에서 인터넷 선이라도 끌어올리나보지.

 

그랬더니 범이가 하루종일 창 밖 감시/경계 경보 모드다.

미어캣처럼 펭귄자세로 서서 온 주의력을 다해 바깥에 신경을 집중한다.

방어 준비 자세와 공격 준비 자세를 번갈아 취하면서.

같이 있는 내가 괜찮다고 해도, 느긋하게 굴어도, 저 애의 영역 보호 본능을 어쩔 수는 없다.

 

평소의 적정 수면량을 반납하면서까지 낮 시간 내내 그러는 걸 본다.

 

저 조그만 고양이.

작고 바보같고 순진하고 본능뿐인 저 조그만 짐승.

말랑말랑한 몸뚱아리, 한 손아귀에 들어오는 목덜미를 잡으면 꼼짝도 못하는 작은 고양이.

쉘터와 이 집안 말고는 밟아본 적도 없는 어린 고양이.

네가 뭘 할 수 있다고.

만일 정말로 이 집이 침입이라도 받으면, 이 집에서 나나 네 주인이 없어진다면,

네가 뭘 할 수 있다고.

100% 속수무책일텐데, 저 조그만 고양이.

아무리 방어 자세를 취해본들,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은들,

이 영역의 아무것도 넌 지켜내지 못할텐데.

 

아(我)를 지각하려면 타(他)가 필요한 법이다. 

고양이를 보면 인간을 생각하게도 된다.

과연 우리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새삼 더듬어보게 된다.

끈에 매달린 장난감을 좇는 저녀석처럼 우리는 자동반사적으로 무엇에 집착하고 있을까,

사냥감을 겨냥하며 엉덩이를 씰룩대는 저녀석처럼 우리는 사뭇 진지하게 어떤 우스운 짓을 하고 있을까,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방어를 위해 저녀석이 경계를 늦출 수 없듯,

우리는 어떤 대항할 수 없는 것을 핸들링하기 위해 부질없는 몸짓을 그만둘 수 없어할까.

놓을 수가 없다는 것은, 인간에겐 의지일까 본능일까.

 

범아, 넌 여길 지킬 수 없어.

하지만 넌 그래도 괜찮아.

그런 네 인생을 책임질 의사도, 의지도 우리에겐 얼마든지 충만하니까.

어쩌면 그게 저녀석과 우리의 결정적인 차이일런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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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으니 가던 길이나 가세요

일단 만화가 양재현씨의 글이 촉발제가 되어 올라온, ZDnet의 기사.

http://www.zdnet.co.kr/Contents/2010/03/11/zdnet20100311115101.htm

...曰, "만화는 원천 콘텐츠로서 원소스 멀티 유즈(OSMU)의 가치가 높다.
업계, 기관, 독자 모두의 노력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만일 정말로 OSMU만이 만화라는 것의 가치라면,
그냥 망해버리라고 해.

딴데다 갖다 쓸 컨텐츠 풀이 문제라면,
만화 만들 머리가 되는 애들,
드라마 업계니 영화판이니에서 흡수해다가 컨텐츠 만들라고 하면 되는 거 아냐.

왜 만화더러 그런 일에 복무하라는 거냐.
그것이 만화의 '존재가치'라고?
그런 역할이라면, 굳이 꼭 만화가 아니어도 상관없다는 얘기잖아.
뭐가 됐든 같은 기능만 해 줄 수 있으면 된단 얘기니까.
결국 꼬리치고 새끼쳐서 번듯하게 다른 업계 배까지 불려줄 수 없다면 필요없단 얘기나 마찬가지잖아.

만화라는 것 자체엔 관심 없다는 얘기고,
만화는 그 자체로 자족할 만한 존재는 아니란 얘기지.
정말 그런 거라면, 뭘 반드시 보호해야만 하겠어?
회생시키려면 이만저만 수술해야 할 게 아닐텐데, 그냥 망해버리라고 해.
반드시 만화여야 하는 것도 아니라며. 대체제 구해서 갖다 써.

산업적 우월만을 논하는 정신상태론, 구멍가게 스케일로 전락한 이 업계 어차피 못 살려.
걱정하는 척이나 하지 마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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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도 돌고 돌아 다시...

다시 곧 뉴욕행입니다.

귀국은 6월 초 쯤이 되겠습니다.

 

 

 

http://ozzyz.egloos.com/4349769
허지웅씨의 글, "진보 예수는 없다"

 

이미 제목 본 순간 아이구야..엄청난 떡밥 던지셨구만..이란 생각이 들었으니.
본문 읽어보니 진짜루다가 예수쟁이들은 다 똑같으니 꺼지라고 못박는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댓글란은 풍어제 현장. 난리도 아니다.;;;
(여러 의미로다가)역시 허지웅 -_-d

 

언뜻 너무 흑백론..이라 반사적으로 생각하다가,
정말 그런가..라고 다시 생각해보고 있다.
정말 내 개인적인 기독교에 대한 생각을 말하라면 저것과 다른가,싶어서.
기독교에 대해-아니, 보다 좁히자면 예수에 대해 그리 잘 알지 못하니까,
어떤 판단유보를 하고 있을 따름이지,
사실 나도 김규항씨같은 좌파자처자가

어떻게 그토록 열심히 기독교도일 수 있는지는 이해하지 못한다.

 

좌파-기독교인들이 예수를 사회개혁운동가의 측면에서 바라보는 것도 알고있고,
대학 시절 종교학 수업 이것저것 들을 무렵 진보신학 목사의 클래스도 수강해본 바,
사회주의가 어떤 식으로 기독교와 융화될 수 있는 부분이 있는지 겉핥기로나마 대충은 알고 있다.
하지만 어쨌거나 기독교의 본령은 사회운동이 아니라 '신앙'이다.
딱 그 서구종교학적 의미에서의 '신'을, 믿는단 말이다.
아아 이상하기도 하여라. 기묘한 그 상태여.
어떻게 진보주의적 뇌를 가진 이들이 그런 상태를 용납할 수 있는지,
솔직히 난 아직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내가 종교학과 수업에서 가장 크게 (내가 몰랐던 걸)배운 것이
종교학은 신을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신을 믿는 인간을 바라보는 것이란 거였고,
또 그렇기에 신을 믿는 인간에 대한 관찰자의 태도도
어떤 특정 윤리적 가치관에 따라 무 자르듯 구획되기도, 그게 객관적이기도 힘들단 거였다.

 

따라서.. 내가 허지웅씨처럼 '말하지' 않는 것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저 '놔둬도 되는 것은 그냥 놔둔다'라는 '자세'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지 않나..란 생각이 든다.
또 그런 견지에서.. 저렇게 '말하는' 사람도 역시, 있어야 되겠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나는 몰매맞는 거 싫으니까 '유보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나서서 당장 나는 이리 생각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역시 도움이 되는 일이다.
그게 섣부른 오판이든 정말 일리가 있는 생각이든간에.

 

허지웅씨 지못미. 진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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