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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_창간준비 2호] <희망버스> - 자본주의 체제의 변호론이 된 진보 담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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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버스> - 자본주의 체제의 변호론이 된

 

진보 담론들

 

 

- 임천용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리해고 없는 세상과 비정규직 없는 세상은 일부 단위사업장에서는 가능하지만 전체 사회적 차원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포로가 되어있는 사람들에게는 정리해고 없는 세상과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외치는 것이 황당하고 가망 없는 모순투성이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희망버스의 상상력과 사회주의를 향한 계급투쟁은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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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문제에 대한 해법이 백가쟁명식으로 제출되고 있다. 모두가 자칭 전문가부터 진보적 학자라는 명함을 가지고 있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문제가 지난 3년간 언론에 의해 조명된 횟수는 최근 3개월과 비교할 때 극히 미미하다. 희망버스는 대중적 참여를 끌어내면서 여론을 만들어 가고 있다. 그리고 한진중공업 지회의 직권조인과 자본가 언론들의 무차별적 이념공세, 여론몰이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날로 확산되고 있다. 6월에서 7월 그리고 8월로 넘어가는 동안 자본가 언론들은 한진중공업 사태가 해결되었다며 환호하다가 다시 대화로 해결되어야 한다며 비굴하게 논조를 바꾸고 있다.


  이미 7월 22일에 문화일보는 대화로 해결해야 한다는 논조로 전문가들의 의견을 실었는데, 거기에는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방송대 김기원 교수의 견해도 인용되어 있다. 인용된 내용인 즉슨, ‘한진중공업 사태는 기업의 근본적 시장경쟁력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반정부 시위하듯 정치투쟁에 전념해서는 안 된다, 경영진, 노조, 정부, 시민대책위 등이 모여 영도조선소의 정리해고 규모가 적절했는지 따져보고 해고자들의 고통분담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대부분 자본가 언론들에게 자칭 진보적 교수의 말들은 상품성이 없었다. 왜냐하면 2차 희망버스에 대한 무차별적 비난 공세로 3차 희망버스를 전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품에 안긴 진보적 담론

 

  그러나 7월 30일 3차 희망버스의 결과는 예상과 달리 참여의 폭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 정리해고제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함으로써 가일층 발전했다. 자본가들과 언론들을 당황했다. 자본가들의 이데올로기 공세가 먹히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다른 방법을 찾았고 이이제이 식으로 진보의 탈을 쓰고 희망버스를 비판할 만한 인사들을 물색했다. 이에 민감한 촉수를 가진 김기원과 김대호(사회디자인? 연구소장) 같은 “진보적 전문가들”은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문제에 대한 입장을 재빨리 쓰게 된다. 7월에는 크게 보도되지 않은 것들이 8월 초에 자본가들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언론들에 대서특필됨으로써 전면적인 논쟁으로 번졌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러한 배경은 자본가계급의 배타적인 논리로는 여론을 역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진보적인 척하는 학자들의 논리를 인용해서 상황을 타개하려는 전략이다. 여기에는 자본주의 옹호자이면서도 진보적인 외양을 갖춘 전문가들이 안성맞춤이다. 사회적 쟁점이 가라앉지 않을 때 양비론을 포함하여 중립적 가치로 포장되어 있는 논리들은 드디어 상품성을 획득하게 된다.
최근 희망버스에 대한 담론 논쟁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김기원, 김대호 같은 자들이 희망버스에 대해서 비난을 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문제는 이러한 자들을 진보로 포장해주고, 마치 함께할 수 있는 세력인 것처럼 온화한 태도를 가지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옹호하는 계급적 입장에 충실한 것이다. 이들은 자본가들을 상대로 한 문필 판매업자에 다름 아니고 이번에 운 좋게 희망버스 덕에 상품성을 극대화한 것이다.


  자본의 노예가 되어있는 학자들의 논리는 자본가들의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기껏해야 진보적인 탈을 쓰고 있지만 한 꺼풀 벗기면 그들의 본질이 드러난다. 자본주의의 유지를 위해 복무하는 학자들의 논리는 사실적 근거만 제시하면 금세 논박되고 만다. 자본주의 체제가 가하는 착취와 억압은 노동자들의 눈으로 볼 때 선명하게 보인다. 노동자들을 비정규직으로, 정리해고로 내몰고 자본가들에게는 감세를 하는 세상은 특별한 전문가가 아니어도 자본주의의 모순을 체감하게 한다. 그런데 김기원과 같은 자들은 어떻게든 노동자들의 투쟁과 희망버스의 상상력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것을 막으려 한다. 반정부시위와 정치투쟁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한진중공업 투쟁이 자본주의 시장경제 내에 한정되기를 희망한다. 시장의 논리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실현가능한 요구를 제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본주의 옹호자들은 정리해고 철폐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은 자본주의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요구하는 것은 사회주의라고 하면서 마치 사회주의는 모종의 불량 체제라는 듯 겁을 주려고 한다. 하지만 겁먹지 않고 실상을 똑바로 쳐다본다면 자본주의야말로 한줌의 자본가들이 대다수 노동자들을 끊임없이 착취하고 억압해야만 유지될 수 있는 불량 사회라는 걸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을 인정한다면 자본주의는 타도되어야 할 대상에 불과하다.
이처럼 야만적인 체제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자본가들이거나 자본가 정치인들뿐이다. 비겁하게도 자본가들, 자본주의 변호론자들은 자본주의 자체가 착취와 실업의 체제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정리해고 철폐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은 사회주의에서 가능하다고 한다. 이번 논란들의 성과는 착취와 실업으로 연명하는 자본주의의 비밀을 자본가 언론들의 입을 빌어 무의식중에 풀어놓은 것에 있다.

 

 

  개량주의적 환상에 빠진 진보적 담론

 

  그런데 진보적인 김세균 교수는 “변혁을 추구하는 운동 역시 현실에서는 개혁을 추구하는 운동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고 변혁은 사실은 개혁의 좌절이 만들어내는 질곡을 타파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로서 나타난다는 점... 때문에 사회주의적 목표를 갖고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운동을 추구할지라도 혁명적 상황이 아닌 한 정리해고의 남발과 비정규직의 최소화를 위한 운동의 형태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그러면서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사회주의적 구호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면서 자본가들을 안심시키려하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김세균 교수는 개량과 혁명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변혁은 개혁의 좌절이 만들어내는 질곡을 타파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라는 입장은 “개량은 혁명적 투쟁의 부산물”이라는 전통적인 혁명적 입장에 대립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개량주의적 변호론의 문학적 표현에 다름 아니다. 아직도 혁명의 여진이 계속되고 있는 이집트에서는 혁명적 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난 4월 공공부문 노동자 40만 명이 정규직화를 쟁취했다. 남한에서는 혁명적 상황은 고사하고 아직 북아프리카나 유럽, 남아메리카와 같은 반란을 경험하고 있지 못하다. 그렇다고 혁명적 시기가 아니라고 해서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향한 투쟁이 현실에서는 “정리해고 남발과 비정규직의 최소화를 위한 운동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한참 오산이고 대중의 혁명적 상상력을 과소평가 하는 것이다.
 

  이미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철폐투쟁위원회와 희망버스는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투쟁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해 현대차 비정규직노동자들은 모든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투쟁을 전개했다. 이러한 투쟁은 불가능한 요구를 내건 것이 아닐뿐더러 노동자들의 계급적 단결을 촉구하기 위한 요구이기도 하다. 모든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25일 동안 차가운 철판위에서 공장점거파업을 진행한 현대차 비정규직노동자들, 그리고 정리해고 철회를 외치며 희망버스에 오른 참가자들은 김세균 교수의 바람과 다르게 정리해고, 비정규직 최소화에 머무르지 않고 노동자들의 계급적 요구를 가지고 투쟁했다. 만약 개량주의의 관점에서 판단한다면 지금의 희망버스가 주장하는 정리해고 철회는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운동이고, 단순히 대중을 하나의 기치로 모으기 위해 적절한 구호를 제시하는 것에 머무르게 된다. 불가능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대중들을 수단으로 동원하는 것처럼 비춰지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를 은밀하게 변호하는 것이다. 이 측면에서 자본주의의 비밀을 고민하게 만들어 준 김기원 같은 자칭 진보적 인사보다 오히려 해로운 역할을 하게 된다. 자본가 언론들이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을 이야기 할 때, 이렇게 야만적인 체제를 타도할 것이 아니라 보수 수리해서 사용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야말로 개량주의적 환상에 빠져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향해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본가 언론들의 정략에 의해서 논쟁적으로 만들어진 “비정규직 없는 세상, 정리해고 없는 세상”이 사회주의 사회인가 아닌가는 핵심적으로 중요한 사안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계급투쟁과 계급역관계 속에서 결정될 문제이기 때문이다. 개별 사업장의 경우 정리해고 없는 정규직화 사업장은 가능하다. 한진중공업에서 정리해고 철회는 불가능하지 않다. 현대차 1만 명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정규직화도 산술적으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대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정규직화는커녕 탄압과 모르쇠로 일관하는 현대차를 보면 노사가 서로 양보해야 해결된다는 학자적 관전평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단위 사업장 사안일지라도 전체 자본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이기 때문에 자본가 단체와 정부가 절대 양보하지 않고 있다. 자본주의의 만성적인 위기 상황은 단위사업장 투쟁까지도 더욱 긴밀히 전체 계급투쟁과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있고, 전체 자본과의 대리전이 되고 있다. 아무리 단위사업장 투쟁을 전체 자본가계급에 대항하는 투쟁으로 확대시키기를 꺼려해도 이미 자본가계급은 전경련, 경총 그리고 청와대를 통해서 총체적 대응을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개량적 환상이 들어설 여지를 원천적으로 막아버린다. 단위사업장 투쟁이 전체 자본에 대한 대리전이 됨으로써 해결이 어려워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 전개되고 있는 대부분의 투쟁들만 보아도 단위사업장 동지들이 원하지 않더라도 이미 자본가계급에 의해서 노동과 자본의 대리전이 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은 거꾸로 자본가 계급에 대항한 투쟁 속에서만 단위사업장 투쟁도 풀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리해고 없는 세상과 비정규직 없는 세상은 일부 단위사업장에서는 가능하지만 전체 사회적 차원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포로가 되어있는 사람들에게는 정리해고 없는 세상과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외치는 것이 황당하고 가망 없는 모순투성이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희망버스의 상상력과 사회주의를 향한 계급투쟁은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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