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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_창간준비 1호] 왜 지금 혁명당 건설을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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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지금 혁명당 건설을 말하는가?

 

 

- 고민택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01년 9.11 사태가 발생한 후 한 때, 세계의 역사는 2001년 9.11 전과 후로 나뉜다는 말이 등장했다. 미국 본토가 외부 세력에 의해 무참한 공격을 받는 전례 없는 일이 벌어지고 그를 계기로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외치며 비대칭 전략이라는 새로운 세계전략을 들고 나오자 서방은 물론 중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사실상 전 세계가 이를 지지함으로써 미국이 주도하는 단일 세계경영 시대가 열리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염두에 둔 일종의 정치적 수사라고 할 수 있다.   

 

  2001년 9.11과

  2008년 가을

  그러나 9.11이 보여준 정치적 진실은 미국의 패권이 강화되기는커녕 오히려 미국의 힘이 약화, 몰락하는 전초를 드러낸 것에 있다. 9.11 사태가 벌어진 것 자체가 미국이 갖는 허점을 보여준 것으로 미국이 결코 철옹성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보인 것이다. 미국의 힘의 약화가 무엇을 계기로 어떤 양상을 띠고 나타날지가 아직 불분명했지만 그것은 이제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시간이 갈수록 미국에게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음이 드러나면서 그 일단이 비쳐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미국의 힘이 약화되었다고 단정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점이 없지 않았다. 더구나 세계는 여전히 신자유주의가 대세를 이루고 있고 그와 함께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아직 건재한 듯이 보임으로써 미국을 정점으로 한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시대정신’을 일거에 무너뜨린 것은 다름 아닌 2008년 가을 홀연히(?) 솟구친 미국발 금융위기이다. 참으로 그것은 느닷없이 닥친 일처럼 보였지만 실은 이미 그 전부터 축적되고 있었던 바가 현실로 등장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것이 홀연히 등장한 것처럼 비쳤던 것은 그렇게 믿고 싶거나 비록 현실이더라도 현실로 받아들이기 힘든 정치적, 심리적 작용 때문이었으리라.

 

  그 뒤의 상황은 우리가 현재 목격하고 있는 바 그대로다. 그것은 단순한 금융위기만도, 자본주의에서 늘 반복해서 나타나는 주기적, 순환적 위기만도 아닌, 그것들까지를 포함하는, 1929년 벌어진 세계공황에 버금가는 심급의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위기가 폭발한 것이다. 자본주의 심장부 미국에서, 그 어떤 외부의 작용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원인에 의해 일어난 폭발이다.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에 불과한 쌍둥이 빌딩 정도가 무너지는 9.11 사태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차원의 것이다. 단지 상징이 아니라 본체가 무너지는, 단지 미국만의 문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를 위기로 몰아가는 엄청난 대사건이다. 9.11이라는 징후는 결국 그렇게 본 모습을 드러냈다. 미국의 패권과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동시에 뿌리부터 흔들리게 된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러나 지금의 세계공황은 단지 신자유주의 때문‘만’이 아니다. 오히려 만약 신자유주의가 아니었다면 자본주의와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그 전에 위기를 맞이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를 앞세워 위기를 관리해 왔으며, 폭발을 유예시켜 온 것이다. 신자유주의만을 원인으로 삼거나 그것에만 책임을 묻는 것은 자본주의에 면책을 주거나 그것을 옹호하는 것일 뿐이다. 단지 신자유주의만을 반대한다면 신자유주의조차 패퇴시킬 수 없다는 것이 진실이다. 오늘날 자본주의한테는 신자유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그 어떤 대안도 없다.

 

  공황, 전쟁, 혁명

  1929년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다시는 맞이하고 싶지 않은 악몽 같은 해다. 1929년은 세계대공황이라 일컬어지는 대사건이 발발한 해다. 이 공황과 함께 케인즈주의 경제학이 등장했으며, 이 공황으로 인해 파시즘이 발호했다. 자본주의 지배계급은 케인즈주의 경제정책, 즉 뉴딜정책이 마치 이 공황을 극복하게 한 것이며, 파시즘에 대한 정치적 승리라고 강변하지만 이 공황은 전대미문의 제2차 세계대전의 살육과 파괴를 통해서만 겨우 진정될 수 있었다. 그 전 제1차 세계대전 또한 그 당시의 자본주의 공황과 맞물려 벌어진 것으로 자본주의와 전쟁은 한 몸이라는 사실, 그리고 사멸해 가는 자본주의의 숨통을 노동자혁명으로 끊어내지 못하는 한 전쟁은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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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공황은 전쟁만을 낳는 것이 아니라 전쟁과 함께 혁명적 정세를 조성한다는 것을 또한 보여주고 있다.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이 바로 그러한 정세의 산물이다. 물론 혁명이 언제나 승리로만 끝나지는 않는다. 1923년 독일 혁명이 실패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혁명적 정세는 불가피하게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의해 주어진다. 여기서 불가피하다는 것이 핵심이다. 주체가 혁명적 정세를 스스로 만들 수는 없다. 그렇더라도 진짜 중요한 것은 객관이 아니라 주체의 의지와 태도다. 주체의 전략과 전술이다. 주체의 일상적 정치활동과 조직적 태세다. 객관적으로 형성되는 정세를 읽어내는 주체의 능력이 혁명에서 가장 커다란 변수다. 객관은 언제나 주체의 프리즘을 통해서만 의미를 갖는다. 

  주체가 혁명적 정세를 스스로 만들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곧 주체는 수동적 일 수밖에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수동적이어서는 이미 늦는다. 객관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오직 주체의 능동적 대응만이 사태의 전개와 흐름을 바꿀 수 있다. 볼셰비키당은 분명 러시아적 현상과 특수성이 반영된 조직 형태지만 주체의 능동적 역할이 무엇이며 그것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가를 증명해보였다. 그렇더라도 볼셰비키 조직 형태와 정치활동을 그대로 이식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가능하지도 않다. 필요한 것은 또 다른 볼셰비키다. 그럼에도 볼셰비키 조직 형태와 정치활동을 대체하거나 능가할 수 있는 또 다른 볼셰비키가 그 뒤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지금 전 세계 혁명세력이 안고 있는 문제이자 숙제다.
 
  자본주의 후진국 또는 식민지 나라들에서 나타난 민주주의 혁명 또는 반제 민족혁명은 모두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성장 전화를 이루지 못했다. 프랑스, 스페인 등 자본주의가 발전된 나라들에서도 인민전선에 의해 혁명이 패배하는 역사를 기록했을 뿐이다. 민주주의 혁명이든, 반제 민족해방혁명이든 모두 프롤레타리아 혁명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들을 이끈 인격체가 아무리 고귀한 품성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참여한 인민의 노력과 희생이 도덕적으로 아무리 숭고하다고 해도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아닌 이상에는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없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모든 형태의 2단계 혁명 전략은 프롤레타리아의 전략이 될 수 없다. 사실 러시아 혁명조차 바로 이 2단계 혁명 전략에 의해 좌초될 위기를 맞이할 뻔 했다.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권, 칠레의 아옌데 정권이 보여준 비극도 중요한 참고가 된다. 자본주의 반혁명에 대비하지 않은 혁명, 노동자계급에 의한 권력 장악을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한 혁명의 말로가 어떻게 끝장나는가를 이 두 사례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 뒤 브라질 PT(노동자당), 베네수엘라 차베스정권, 최근 프랑스의 NPA(반자본주의신당) 등이 선을 보이고 있지만 브라질 PT는 이미 부르주아 정치 질서로 편입된 지 오래며, 차베스정권은 무늬만 사회주의일 뿐 그 실상은 변종된 지배계급에 불과하다. 프랑스 NPA는 아직 완연한 개량주의 정당이라고 단정 짓기는 이르지만 현재 세계가 부딪치고 있는 근본적 문제에 정면 대응하지 않거나 아래로부터의 노동자투쟁에 의한 권력 장악을 공공연하게 밀고 나가지 않는다면 NPA 시도는 조만간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노동자계급은 사실상 혁명과 단절됐다. 전후 자본주의 부흥기가 가져온 정세의 산물이자 동시에 혁명세력이 후퇴하고 개량주의 세력이 득세한 역사적 결과 때문이다. 냉전체제가 또한 여기에 한몫했다. 냉전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체제 대립이라는 외피를 띠었지만 실은 미국과 소련을 정점으로 한 서구 자본주의와 동구 ‘가짜 사회주의’ 사이의 경쟁 체제에 불과했다. ‘제3세계’라 불린 블록 또한 반서방 색채를 띠었지만 결코 반자본주의로 나간 적이 없다. 그들 나라의 노동계급 역시 착취의 대상이었으며 노동계급이 전체 인구의 다수가 되지 못한 상태에 머물렀다. 노동자계급 투쟁과 혁명운동이 세계적 차원에서 오랜 침묵과 굴종의 시기를 맞이한 것이다.
 

  혁명 세력의 부재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정세는 큰 틀에서 볼 때 자본과 부르주아 국가가 노동자 민중에 대해 절대적 우위를 점했던 것을 그 특징으로 한다. 자본주의 역사상 이토록 오랜 기간에 걸쳐 자본과 부르주아 지배계급이 순탄했던 적이 별로 없다. 적어도 2008년 이전까지는 그랬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전에도 자본주의와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또한 부르주아 지배계급의 노동자 민중에 대한 통치력이 마냥 증대된 것만도 아니다. 자본과 부르주아 국가 역시 크고 작은 위기를 주기적, 간헐적으로 맞이했다. 그러나 자본과 부르주아 국가가 심각한 위기에 처하는 결정적 국면은 형성되지 않았다. 그 핵심적 이유는 제국주의 나라의 노동자투쟁이 약화된 것과 함께 그들 나라의 혁명 세력이 지지부진한 상태에 놓여 있었던 데 있다. 비제국주의 나라의 투쟁이나 지역적 차원에 국한된 투쟁만으로 자본주의 세계 체제를 위협하기에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거의 두 세대에 걸쳐 노동자계급은 어둡고 긴 터널 안에 갇혀 있었다. 그로 인해 맑스주의 전통과 이론은 현실 노동계급 운동과의 연결 고리가 끊기게 되고, 혁명의 현실성과 가능성은 거의 무망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노동자계급 중심성론이나,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 사상은 강단에서의 학술 논문의 주제나 소재 정도로 전락했다. 그런 공백과 지형을 비집고 레닌주의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맑스주의에 대한 수많은 갈래의 비판적, 부정적 이론이 우후죽순처럼 번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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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스-레닌주의는 사실상 버려졌다. 맑스-레닌주의의 정수이자 핵심인 혁명, 계급, 당, 전략/전술과 같은 실천적 분야는 말할 것도 없고 그러한 실천의 이론적, 철학적 기초인 역사유물론, 유물변증법을 포함하여 사회주의/공산주의로의 이행 등을 다루고 탐구하는 풍토 자체가 사라졌다. 그 자리를 이른바 거대 담론을 부정하는 의미에서 등장한 미시 담론이 대신 차지했다. 미시 담론은 예컨대 인간을 사회적 관계의 총체로 보지 않았다. 또한 사회를 총체성 차원에서 보지 않음으로써 사회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현상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성과 유기성이 사라지고 대신에 그것들은 그저 고립분산적, 원자적으로 존재하는 우연적, 우발적 현상으로 받아들여졌다. 부르주아 국가가 강제하고 억압하는 현실에 눈감았다. 당연히 적대관계, 적대전선 자체가 희미해지거나 아예 사라졌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맑스주의로부터의 이탈, 포기의 근원은 노동자투쟁이 약화된 데 있다. 아니다. 그 또한 결과일 뿐이다. 원인을 노동자계급에게 돌릴 수는 없다. 사실 노동자계급은 어떤 형태로든 투쟁을 멈춘 적이 없다. 가시적이든 아니든, 크든 작든, 폭발적이든 그렇지 못하든 투쟁은 끊임없이 있어 왔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이듯이 노동자투쟁을 꿸 수 있는 조직과 노동자투쟁을 진전시킬 수 있는 전략과 전술, 노동자투쟁의 방향과 목표를 제시하는 강령이 없었던 게 진짜 문제다. 한 마디로 혁명 세력의 부재가 문제의 근원이다.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현실과 ‘사노위’ 시도

  한국 노동자투쟁과 사회주의 운동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거의 공백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랬다가 87년 노동자대투쟁이 벌어지면서 세계 노동자계급과 사회주의 세력으로부터 관심과 이목을 받게 되었다. 한국의 87년 노동자대투쟁은, 앞서 말했듯이, 세계적 차원에서 의미 있는 노동자투쟁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 속에서 일어난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한국에서의 노동자투쟁은 87년 이후 97년 노동악법철폐를 위한 전국 정치총파업투쟁 때까지, 95년 프랑스 공공부문 노동자투쟁과 함께 세계 노동계급에게 새로운 가능성과 전망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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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그 뒤의 역사가 말해주듯이 한국에서의 노동자투쟁은 세계사적 임무와 역할을 선도적, 지속적으로 밀고 나가지 못하고 극복했어야 할, 바람직하지 못한 의미에서의 세계사적 보편성, 즉 노동운동의 제도화, 관료화의 길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 길에 빠지게 된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정말 쉽게 어쩌지 못하는 커다란 장벽으로 서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자본주의 아래에서 노동조합이 가지게 되는 한계가 가장 큰 작용을 했지만 거기에도 정도와 수준이 있는 바, 그 책임의 주요 소재는 오늘날 ‘진보대통합’을 말하고 있는 그들 개량주의 정치세력에게 있다. 노동조합 또는 노동운동의 제도화. 관료화와 개량주의 정치세력의 발호는 서로가 서로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사회주의 세력이 이 과정에서 어떤 정치활동을 펼쳤는가를 보는 일이다. 한국 사회주의 세력은, 물론 국가 탄압이라는 외생적 변수가 없지 않았지만, 노동자계급 투쟁을 적어도 개량주의 정치세력에게 완전히 빼앗길 수밖에 없는 조건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이루지 못했다. 그 수많은 노동자투쟁이 있었음에도, 한국의 정치지형이 서구 제국주의 나라들처럼 아직 안정화되지 못한 상황에 처해 있었음에도 그런 조건들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 초기 민주노동당이나 지금의 진보대통합 세력에 대한 추상적, 일반적 비판, 즉 의회주의, 개량주의, 대리주의라는 개념을 문제 삼는 것을 넘어 현실투쟁에서 그들과 차별되는 전략과 전술, 나아가 노동자 권력 장악과 사회주의 정치를 향한 정치적 대안과 전망을 제출하기를 주저하고 머뭇거렸다. 그렇다고 이데올로기 차원에서라도 분명하고 선명한 정체성을 확보, 확립하지도 못했다. 기껏해야 전투성, 비타협성만을 반복적으로 주장하고 외치는 투쟁부대, 투쟁세력 이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 스스로가 사회주의와 사회주의 운동을 전면화, 대중화하기를 시기상조라는 이유를 내세워 꺼려했으며, 정파를 극복하고 당건설을 이루려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정치행위를 펼치지 못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노위 시도는 바로 한국 사회주의 세력이 처한 이 같은 현실을 더는 지속할 수 없다는 절박한 상황 판단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운동을 위한 운동, 조직보존을 위한 운동을 과감히 떨치고 나아가 개량주의 세력에 대한 불만 세력을 넘어 한국의 정치지형과 계급세력관계를 바꾸어 낼 수 있는 객관적인 정치세력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조직적 조건을 확보하고자 한 시도였다. 이 점에서 사노위 시도 자체는 한국 사회주의 운동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물론 결과적으로 사노위 운동은 실패했다. 그러나 그 실패는 사노위가 시도하고 추구하고자 하는 바를 공공연히 천명하고 실천에 옮긴 사실 자체에 비하면 결정적인 실패가 아니다. 사노위 실패에 대해서는 좀 더 시간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토론하고 평가해야겠지만 사노위 실패가 곧 당건설 운동 그 자체의 무망함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니 그 반대다. 사노위 실패는 오히려 혁명당 건설이 왜 필요하고 중요한 것인가를 역설적으로 강조할 뿐이다. 사노위 시도는 그 어떤 것과 비교해서도 이후 혁명당 건설에서 참고해야 할 중요한 교과서다. 사노위 실패는 당건설 경로와 과정에서나, 혁명운동의 대중화와 현실화를 위해 기존 것을 적당히 합하거나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정파적, 조합주의적 정치와 과감히 단절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사노위 출발도 그를 목표로 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의 조직화, 현실화에 성공하지 못했다. 단지 이질적인 세력이 모였기 때문에 나타난 당연한 결과가 아니다. 그건 하나마나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사노위에 동의하지 않으려면 그와 다른 당건설 노선과 경로를 총체적이고 종합적으로 제출하는 것을 통해서 대안을 주장해야 한다. 그렇지 않거나 할 수 없다면 지엽적이고 부분적인 논평은 될지언정 의미 있는 쟁점은 형성될 수 없다.

 

  왜 지금 혁명당 건설인가?

  적어도 2008년 가을 이후, 세계는 혁명의 시대로 돌입하고 있다. 그렇다. ‘혁명의 시대’다. 자본주의 철폐, 사회주의 건설 운동은 언제나 세계적/국제적 정세와 시야 속에서 진행해야 한다. 각국/일국이 처한 구체적 상태와 조건은 국제주의 관점에서 해석되고 배치해야 한다. 그 어떤 각국/일국도 아직은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지만 북아프리카나 중동에서 표출되고 있는 투쟁이나 유럽에서 나타나고 있는 투쟁도 사회주의로의 연속 혁명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승패를 떠나 유일한 침로이다. 각국이 처한 정세의 산술적 합이 세계정세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지구적 차원에서 형성되고 있는 정세, 즉 세계공황이 각국/일국의 정세를 규정하고 있음을 오늘 우리는 생생하게 목도하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적어도 2008년 이후 세계정세는 지난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이후 또 다시 명증하게 ‘야만이냐, 사회주의냐’를 제기하고 있다. 그것은 그러나 단순 반복을 넘어 그 당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범위와 강도로 형성되고 있다. 말 그대로 전지구적 차원에서 ‘이행’, 즉 ‘혁명’이 현실의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러시아의 경험을 단지 답습하는 것을 넘어, 그 경험을 참고하되, 오늘의 현실에서 필요하고 요구되는 혁명 강령과 혁명 전략을 창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이유에서든 혁명적 과정을 통한 자본주의 철폐, 혁명당 건설을 통한 노동자계급 조직화, 노동자계급 투쟁을 중심으로 한 적대전선 형성을 회피하는 맥락에서 들고 나오는 ‘새로운’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그 허구성이 증명된 가장 낡은 것일 뿐이다.    
   
  한국은 지난 시기 동안 사회주의 운동의 주변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세계 사회주의 운동의 주요변수가 되지 못하고 종속변수, 즉 부차적 지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지금에서는 비록 핵심 지위는 아니더라도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나 유의미한 변수가 될 수 있는 위치에 이르렀다. 특히 동북아는 세계 자본주의의 주요 지역으로 떠올라 있을 뿐만 아니라 지정학적으로도 세계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잠재력을 안고 있다. 한국이 동북아 지역에서 사회주의 대중화와 혁명운동을 이끄는 견인차가 되어야 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적어도 87년 이후 한국사회는 여전히 대중(계급)투쟁이 사회변화를 이끄는 주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럼에도 현실적으로 한국 사회주의 역량은 아직 취약하다. 그러나 이것이 사회주의 대중화, 혁명당 건설을 미루거나 유보해야 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 아니 사회주의 역량이 열악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민주노동당 창당 이후 전면적인 사회주의 운동을 펼치지 못한 것이 오늘의 현실을 낳게 한 주요 원인이다. 다행히 아직 진보정당, 즉 개량주의 세력이 노동자계급 속에 완전히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고, 비록 약화되긴 했지만 노동자투쟁의 경험이 이미 잊혀진 과거가 아니라 현실적 맥락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비정규직 운동을 포함한 촛불투쟁, 등록금 투쟁 등 대중(계급)투쟁의 양상이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고 있다. 혁명세력이 개입하고 조직할 수 있는 객관적 토대와 여건은 여전히 존재한다. 문제는 사회주의자, 혁명세력 자신이다.  

 

  한국 사회주의 세력은 비록 그 전체 역량이 아직 취약하고 각 세력은 더욱 열악하지만 적어도 사회주의를 공공연하게 말하고 있으며, 각자의 구상과 계획은 다르지만 사회주의 당건설을 당면 과제로 삼고 있다. 이 점은 분명 이전에 비하면 진전된 것이다. 이제 어떤 사회주의 세력도 자신이 처한 상태와 조건과 무관하게 당건설 문제를 비껴갈 수 없으며 응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조차 벌써 현실에서는 또 다시 뒤쳐질 수 있다. 사회주의 당건설이라는 일반적 과제를 넘어, 다시 말해 그러한 일반적 과제가 구체적으로는 현실에서 혁명을 예비하고 혁명을 수행하려는 태세를 갖추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혁명정당 건설은 다른 한편으로 혁명 강령 건설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강령주의’ 문제는 별개로 하더라도, 누구든 자신의 강령을 가져야 하며 강령 수준에서 논쟁을 해야 하는 것이 이제 기본이 되었다. 이 또한 과거에 비하면 진전이다. 강령 또한 조직의 역사와 현실 그리고 세력관계를 감안한 정치적 산물이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거칠고 조야한 형태로 표출되는 측면이 불가피하게 나타날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강령 논쟁이 더욱 중요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계급투쟁에 대한 개입은 물론 개량주의 세력에 대한 대응에서도 사회주의 당건설과 강령이라는 무기를 들지 않고는 그 어떤 사소한 쟁점조차도 분명하고 명확하게 형성하기 어렵다. 물론 현실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필요한 것은 ‘구체적 상황에서의 구체적 전술’을 제출하고 이를 관철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정치적 방향(전략) 없는 전술이 갖는 한계 또한 분명하다. 어떤 면에서 지금까지 한국 사회주의 세력은 사실상 이런 운동에 익숙해져 있다. 그조차 전술이 지도력을 획득하고 전략적 침로를 열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조합주의에 갇히거나 기껏해야 전투성 그 자체를 강조하는 이상으로 나가지 못했다. 사회주의 세력이 전술 주체로 서지 못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당과 강령으로 무장하지 않고는 꽁무니 전술과 정치적 대기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혁명정당은 ‘인민의 호민관’이 되어야 한다. 노동조합 운동의 배후세력에 머물러서는 결코 지도력을 확보할 수 없으며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없다. 국제주의 관점과 시야, 전 계급적인 쟁점에 대한 정치적 입장과 방침 제시, 무엇보다도 ‘구체적 상황에 따른 구체적 전술’을 구사할 수 있는 태세와 능력을 갖춰나가야 한다. 직접적 당건설을 당면 목표로 분명히 할 때만이 그러한 정치적 긴장과 행동을 형성할 수 있다. 혁명정당 건설을 분명한 목표로 삼아야 비로소 그를 위해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을 강화해야 하는지가 명료하게 드러날 수 있다. 만약 그것을 유보하거나 기각한다면 모든 것은 안개에 갇힌 것 마냥 흐릿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우리의 모든 일상 활동과 정치토론을 혁명당 건설과 혁명운동 현실화를 위한 도상 위에서 펼쳐야 한다. 여기에 그 어떤 머뭇거림도, 주저함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시간은 혁명의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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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_창간준비 1호] 현 국가부채 위기와 자본주의 체제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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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국가부채 위기와 자본주의 체제 위기 

 

 

- 양효식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리스가 부채위기로 국가부도 사태에 처하면서 유럽이 금융 붕괴 직전 상태로 치닫고 있다. 그리스의 뒤를 이어 스페인, 이탈리아까지 부채의 늪에 깊이 빠져 들어감에 따라 유로존(유로화를 사용하는 유럽국가들)이 와해되는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유럽만이 아니라 미국도 재정적자와 부채위기로 흔들리면서 국가신용등급 강등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에 직면했다. 8월까지 부채 법정한도를 현재의 14조3000억 달러(약 1경5158조원) 이상으로 상향하는 데 실패하면 국가부도를 맞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심화되고 있는 세계경제 위기

  재정위기는 유럽과 미국만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를 두고서 전 세계 자본주의 국가에서 나타나고 있다. 일본에서 국가부채는 쓰나미와 지진 뒤에 급격하게 증가했다. 한국의 국가부채(약 400조원)도 현재 빠르게 증가하고 있고, 그로 인해 이명박정부는 ‘재정 건전성’을 강조하면서 현재의 복지 확대 논의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그나마 얼마 안 되는 복지비 예산조차도 삭감하고 있다. 이러한 전 세계적인 재정적자 ⁃ 부채 위기는 세계경제 위기가 일시적으로라도 ‘회복’되기보다는 더욱 심화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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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미국의 국가부채 위기는 유로존의 위기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2008년 금융위기가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에 기반한 파생금융상품 등 과잉축적된 가공자본을 파괴(주식, 채권, 부동산 등 자산 가치의 하락 및 그에 따른 은행과 기업의 도산)했지만 다시 수익성을 회복할 만큼 충분히 과잉축적을 털어내지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천문학적인 액수의 구제금융 투입(이른바 양적완화, 즉 달러 찍어내기)으로 위기는 오히려 다른 방향으로 번졌다. 미국 국가부채가 GDP의 100%를 넘어서는 한편, 구제금융으로 흘러넘치는 달러 자산이 2009년 중반 이래 전 세계의 원자재와 곡물 등에 대한 투기로 흘러들어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세계경제가 2010년 말에 다시 ‘더블딥’(재침체)에 빠져들 기세를 보이자 미국 연준은 11월에 ‘값싼 화폐 정책’(인플레 정책)의 추가 연장을 결정하여 6천억 달러 규모의 2차 양적완화를 실시했다. 그러나 물가 급등과 새로운 투기거품(원료, 식료품, 국가부채에서)만 가져온 채 지난 6월말로 2차 양적완화를 종료해야 했다. 국가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상태에서 더 이상 재정적자를 조금이라도 더 늘리는 것이 어렵다보니 지금 부채 한도 증액과 3차 양적완화 문제를 놓고 국가부도 사태까지 거론되면서 정치권 내에 쓰디쓴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특히 당장 미국 지자체들의 높은 부채 문제가 걸려 있는 상태에서 추가 양적완화가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면 지자체들의 연쇄부도와 함께 중간규모 은행들의 대대적인 연쇄 파산으로 이어질 상황이다. 전체 세계경제로 볼 때 이것이 최대의 위험요소이다. 그래서 지금 미국 국채와 지방채를 보유하고 있는 투자가들(은행, 투자회사들, 대기업들)이 극심한 불안에 휩싸여 있다.

 

  EU(유럽연합)에서 국가부도 사태와 미국에서 은행들의 파산 물결이 결합하면 2008년 보다 더 큰 금융공황을 맞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미 재정위기에 휩싸여 있는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들이 더 이상 구제금융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호러 시나리오가 현재 주요 은행들과 대기업들, 그리고 정치가들을 휘감고 있다.

 

  “과도한 복지 지출” 때문?
   - 재정적자를 빌미로 한 위기 전가 공세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그 후 2년 동안 전 세계적인 불황으로 번지면서 경제위기의 고통을 죄다 노동자 민중들이 이 때 이미 뒤집어썼다. 그러나 당시 2008년-09년 공황의 첫 2년 동안은 누구나 경제위기의 책임이 금융파탄을 가져온 거대 은행들에게 있다고 말했다.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문제 삼는 수준까지는 아직 아니더라도 최소한 금융자본의 탐욕이 위기를 부른 주범이라는 것이 대중적 상식으로 자리 잡았었고, 여기에 자본가들도 감히 이의를 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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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2010년 이후 재정적자 ⁃ 국가부채 위기가 터져 나오면서 비판의 화살이 은행을 비롯한 금융자본한테서 떠나 엄한 데로 돌려지는 상황이 벌어졌다. 자본가들과 정치가들이 공공 서비스 등 복지비 지출과 연금 ⁃ 임금을 경제위기 책임 논쟁의 도마 위에 올려놓으면서 ‘국면 전환’을 꾀한 것이다. 정부가 “재정 지출을 너무 많이 해서” 위기를 낳았다, 즉 “의료와 교육 등 복지에 돈을 너무 많이 써서”, “연금과 임금에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재정적자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빤한 거짓말이지만 곧 복지비 지출삭감 및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사용되어 성공을 거둔다.

  실제로 지난 6월 29일 그리스 의회가 2차 구제금융을 앞두고 통과시킨 재정감축안을 보면 마치 공공서비스를 비롯한 복지비 지출과 노동자들의 임금 ⁃ 연금 때문에 재정적자와 부채 위기가 생겨난 것처럼 온통 노동자 민중들의 생존권과 고용에 대한 공격으로 채워져 있다. 통과된 긴축안은 부채 상환을 위해 2015년까지 예산을 줄여나가 280억 유로(그리스 GDP의 12%)를 확보하도록 되어 있다. 결국 노동자 민중들에게 위기를 전가하겠다는 것이다. 부가세를 13%에서 23%로 인상(전형적인 ‘서민 증세’)하고, 15% 임금삭감을 실시하며 주당 노동시간을 37.5시간에서 40시간으로 연장한다고 한다. 또한 공공부문에서 15만 명 인력감축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 대대적인 정리해고 광풍을 예고하고 있다. 이날 그리스 의회 의사당 밖에서는 노동자와 청년들이 격렬한 항의 투쟁을 전개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7월 14일 이탈리아에서도 상원이 460억 유로에 달하는 재정감축안을 승인했는데 여기에는 공무원 임금 동결과 보건의료 서비스 비용 인상(즉 복지 축소) 등이 핵심 내용으로 들어 있다. 미국에서도 공화당이 부채 한도액을 증액시키는 대가로 서민층에 대한 복지혜택 축소를 들고 나와 위기의 원인이 과도한 복지비 지출에 있는 것처럼 몰아가고 있다. 그리스나 미국처럼 아직은 디폴트(채무불이행) 사태에 직면하지 않은 영국에서도 보수당 중심의 연립정부가 재정적자를 빌미로 임금 및 복지 삭감, 연금개악, 공기업 사유화와 정리해고, 교육 재정 삭감(대학 등록금 인상) 등을 골자로 한 긴축안을 밀어붙이고 있다. 이에 맞서 6월 30일 공공부문 노동자 75만 명의 총파업을 비롯하여 청년층과 가난한 민중들이 항의투쟁에 나섰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국에서도 보수언론과 전경련, 경총 등이 유럽 나라들의 재정적자와 국가부채 위기가 “복지에 대한 과도한 지출” 때문이라고 선전하면서 현재 한국에서의 “복지 포퓰리즘”이 유럽 같은 사태를 불러올 것이라고 연일 경고하고 있다. 이것은 재정적자를 빌미로 자본의 위기 전가 공세에 첨병 역할을 하고 있는 국제 신용평가사, 예를 들어 스탠다드 앤 푸어스(S&P)가 미국의 신용등급 강등 필요성을 거론하면서 오바마 정부에게 대대적인 긴축 재정과 복지비 삭감을 압박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2008년 금융위기와 뒤이은 세계 공황 속에서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 마치 우리가 다 잊어버리고 있는 것처럼 자본가들과 정치가들, 그리고 부르주아 언론들은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있다. 당시 미국 오바마 정부를 비롯한 전 세계의 정부들이 세계경제 붕괴를 막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을 쏟아 부었던가. 재정적자는 은행과 금융기관들을 살리기 위한 천문학적인 구제금융 투입 때문이다. 그리고 공황으로 인한 국가 세수의 붕괴(주로 기업 이윤 축소로 인한 법인세, 소득세 감소에서 비롯한 세수 급감)와 치솟는 실업수당 비용(정리해고, 일자리 축소로 인한) 때문이다. 결국 자본주의 위기가 재정적자와 부채를 야기 시킨 것이지, 의료와 교육에, 연금과 임금에 돈을 너무 많이 썼기 때문이 아니다. 결국 국가부채 위기는 금융자본을 필두로 한 자본가계급이 국가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손실을 사회화시켰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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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당시 어마어마한 액수의 구제금융 조치 같은 자본가 국가의 ‘경제 살리기’ 개입이 없었더라면 세계경제는 이미 붕괴했을 것이다. 그 덕에 세계경제 붕괴는 일시적으로 유예되었지만 그 유예의 대가로 생긴 것이 바로 재정적자와 국가부채인 것이다. 따라서 이 국가부채 위기를 끝내 막지 못하면 일시 유예된 세계경제 붕괴는 다시 직접적 일정에 오를 수밖에 없다. 그리스 국가부도가 현실화되면 2008년 미국의 리먼 브라더스 파산 사태 같은 것은 애들 장난처럼 보일 것이라는 경고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세계의 지배계급들은 재정적자와 국가부채 위기를 불러온 이 같은 대대적인 국가 개입으로 세계경제 붕괴를 지연시킬 수 있었지만, 그러나 2008년 이래 전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공황을 가져온 근본적인 모순을 조금도 완화시킬 수 -- 해결은 고사하고 -- 없었다.

 

  이윤율 하락에 따른 과잉축적 위기

  생산력의 사회적 성격과 생산수단의 사적, 자본주의적 소유 간의 대립 ⁃ 충돌은 자본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모순이다. 이 모순의 발전은 19세기 말까지의 자본주의를 특징지었던 자본가들 간의 자유경쟁이 독점자본주의로 대체되는 지점으로까지 자본의 집적과 집중을 가져왔다. 독점자본주의 시대에 더 높은 규모로 자본의 가치증식은 자본주의적 이윤 전유의 족쇄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첨예한 모순을 빚는다. 자본가는 노동생산성을, 그리고 그에 따라 이윤을 증가시키기 위해 해당 산업의 평균 생산비용보다 더 낮은 비용으로 생산하여 경쟁 자본가들에 대한 우위를 확보하고자 한다. 전체 투하 자본 내에서 가치를 창조하는 인간 노동, 즉 가변자본의 비율이 줄어드는 데 반해 단지 가치를 전달할 뿐인 기계, 원료, 부동산 등 불변자본의 비율은 상승한다. 이러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는 이윤율의 장기적 저하 경향을 낳는다.

 

  이윤율 하락 경향 때문에 자본가들은 취득한 잉여가치를 생산적 부문에 투자하길 점점 더 꺼려하게 되고 비생산적 부문으로, 금융 투기로 돌린다. 예를 들어 대기업들의 사내유보금을 보라. 한국에서 이명박 정부는 법인세, 소득세 감면 등 부자감세 혜택을 통해 대기업의 이윤축적이 생산적 투자와 일자리 창출로, 그리하여 사회 전반의 소비와 소득 증가로 이어지는 이른바 ‘낙수 효과’를 가져올 것을 기대해 왔다. 그러나 대기업들이 수백조 원의 사내유보금을 쌓아놓기만 하고 일자리 창출을 위한 투자를 하지 않자 정부와 한나라당은 이에 대해 노골적인 불만을 표하고 있다. 나아가 정치권 내 가장 보수적인 세력(예를 들면 한나라당 내 친박세력)까지도 나서서 낙수효과론은 “실패로 검증된 이론”이라고 반박하며, 이제는 부자감세 혜택을 철회하고 확대된 세수를 통해 서민 복지와 수요 진작에 나서야 한다는 케인스주의 노선을 주창하기까지 한다. 이는 물론 선거를 의식한 ‘좌클릭’ 정치 쇼로 치부될 수 있겠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정부가 대기업에 아무리 감세 혜택을 주고 심지어는 ‘기업의 팔을 비트는’ 압박을 해도 자본가들 입장에서 이윤을 가져올 전망이 안 보이는 곳에 투자를 할 리가 없는 현실을 보수세력 스스로의 입으로 밝힌 것이다.

현재 자본가들은 투기 카지노가 다시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 취득 이윤을 배당 지급, 자사주 매입, 부채 축소 혹은 해외투자에 지출한다. 잉여가치를 낳는 생산적 부분에서의 낮은 이윤율 때문에 투자할 곳을 찾지 못하는 과잉 자본이 쌓여 있는 상황(그래서 비생산적 금융부문의 투기로 몰리는 상황), 이것이 자본의 과잉축적 위기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08년 금융공황은 바로 이러한 자본의 과잉축적의 산물이다. 단순히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들의 탐욕과 도덕적 해이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본주의를 면책 시켜주는 논리가 된다. 맑스가 <<자본론>>에서 밝힌 자본 축적 및 붕괴의 법칙은 자본주의 발전의 일반적 경로뿐만 아니라 현 경제위기를 이해하는 데서도 열쇠를 제공한다. 현 위기의 본질은 지속불가능한 신용 확대와 축적 붕괴로 끝나는 자본의 과잉축적/ 과잉생산 공황이다. 정확히 맑스가 미래의 공황에 대해 자기 시대에 관찰하고 예견했던 것처럼, 과잉축적은 자본의 가치파괴와 불황이라는 폭력적인 과정, 즉 공황을 가져왔다. 이른바 ‘금융의 비대화’로 표현되는 가공자본의 증대는 이윤율 저하 경향의 산물이자 잉여가치 생산 부문들에서의 과잉축적의 산물이다. 그러나 그것은 ‘순수한’ 자본주의 발전의 ‘정상’ 경로로부터 비정상적인 이탈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 축적의 필수적인, 실로 본질적인 요소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와 분리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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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인플레 압력의 증대 또한 중국, 인도 등 빠르게 발전하는 아시아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자본의 과잉축적으로 인한 결과이다. 애초 중국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의 거대한 팽창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에서 가변자본 및 불변자본(특히 고정자본 부분)의 가치를 낮추는 효과를 가졌었다. 중국으로부터 사용자 삽입 이미지수입되는 값싼 제조업 제품이 세계적으로 인플레 억제 효과를 가져다 준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제는 급속한 중국 산업의 성장이 원자재와 식량, 연료에 대한 수요를 급증시킴에 따라 인플레 압력이 증대하면서 애초의 디플레 효과는 끝나버렸다. 이러한 모순의 작동이 2008년 공황을 그 직전 공황보다 더 첨예하게 만들었고, 중앙은행들의 끝없는 신용 확대 능력에 제약을 가했다. 그리고 그 결과 세계경제가 동시 불황으로 빠져들었다.

 

  현 위기의 뿌리와 성격

  현 위기를 7-10년 주기의 통상적인 순환적 위기를 넘어 “1930년대 대공황 이래 최악의 위기”로 만든 것은 이 현재의 위기가 역사적으로 누적된 구조적인 과잉축적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1930년대 대공황은 수천만 명을 살육한 2차 세계대전으로 극복되었다. 전쟁으로 자본의 과잉축적이 확실하게 해소되면서 20여 년 간의 장기호황을 누렸지만, 다시 1973년-75년 과잉축적 공황이 터졌다. 이후 이삼십 년 동안 세계경제는 과잉축적과 하락하는 이윤율, 위기의 가중화 ․ 누적화 경향, 생산력의 정체 경향을 특징으로 하는 만성적인 위기에 빠져들었다. 1990년 이래 부르주아지는 세계화 프로젝트(이른바 신자유주의 공세)를 통해 이윤율 하락 및 정체 경향을 극복하려 했지만 이 경향은 역전되지 않았고 오히려 추세적으로 더 강화되었다. (물론 이러한 경향은 매우 불균등했는데 왜냐하면 기존의 서방 제국주의 중심국들과는 달리 중국과 인도 등에서 이 시기에 자본의 가속화된 축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1991년에서 2008년 공황 발발까지의 세계화(글로벌화) 시기는 부르주아지의 전면적인 공세로 특징지어진 시기이다. 노동자계급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 동구권의 세계자본주의로의 편입, ‘제3세계’의 예속과 착취 증대 등, 이러한 공격을 통해 부르주아지는 잉여가치율을 증가(주로 절대적 잉여가치의 증가)시킬 수 있었고 제국주의 초과이윤도 증가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상쇄조치’로 하락하는 이윤율을 멈추게 하는 것이 더욱 더 어려워 질 정도로 자본의 유기적 구성도가 너무 고도화 -- 제국주의 시대에 자본주의 쇠퇴 경향을 가져오는 근원 -- 되어갔다.
  이런 이유로 인해, 증가된 이윤 총액 가운데 자본 축적으로 들어가는 몫은 계속 감소했다. 투기 영역으로 이동하거나(거액의 화폐자본이 고도로 투기적인 통화시장 및 헤지펀드 세계로 이동했다), 부채상환으로 지출 되는 비율이 점점 더 커져갔다. 세계화 시기에 부르주아지는 자본주의적 축적을 다시 소생시키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세계화 시기의 더 중요한 결과는 부르주아지가 갈수록 탐욕에 눈이 멀어 근시안적으로 오로지 미래의 비축고에서 미리 꺼내 씀으로써만(예를 들어 사내유보금에서 차입) 세계경제의 대대적인 쇠퇴를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세계화 시기에 글로벌 경제에 일정한 안정을 가져온 것도 대규모 부채 누적에 의한 것이었고, 소위 세계화의 ‘번영’을 낳은 것도 투기 부문의 거대한 인위적 팽창에 의한 것이었다. 현재의 모순을 잠시 은폐하고 얼버무릴 수 있었지만 이는 곧 미래의 모순을 팽창시키는(카드 돌려막기 식의) 결과를 내포하는 것이었다. 

 

  세계화 시기에 이러한 악화되는 과잉축적 경향은 세계경제의 심장부 미국에서 이윤을 기대할 수 없는 조건 때문에 자본가들이 그들의 잉여가치 가운데 자본스톡 확대를 위한 투자 몫을 줄여 나갔다는 사실로 나타난다. 이러한 자본축적 과정의 이완은 순투자(즉 확대 투자) 수준의 감소로 반영되었다. 자본의 가치증식 과정에서의 어려움으로부터 발생하는 자본축적 과정의 이완 경향은 세계화 시기에 줄지 않고 오히려 아주 뚜렷해졌다. 유럽 제국주의 강대국들에서도 마찬가지로 순 자본스톡의 증가율은 지속적으로 낮아졌다.(1961-73년 기간 4.2%에서 2001년-05년 기간 2.0%로까지).

 

  사용되지 않는 잉여자본의 비율이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자본의 가치증식이 어려워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산업설비가동률이 감소하고 있는 사실이 바로 이에 대한 증거이다. 미국 내 산업에서 설비가동률이 고점에 이른 것은 1980년대에 85.1%, 1990년대에 84.9%였다. 2000년 이래 설비가동률은 결코 81% 지점을 넘어본 적이 없다. 반면 이 세 시기 경기순환(위 80년대, 90년대, 2000년 이후)에서의 저점들은 각각 78.7, 73.5%, 그리고 2009년 6월에 68%라는 역사적인 저점에 도달했다. 거칠게 말해서, 2009년 중반에 미국에서 생산적 자본의 약 1/3이 가치증식 과정을 위해 사용되지 않은 것이다! 이와 같이 여기서도 우리는 세계화 시기에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모순이 극대화되었음을 본다. 
  이 비틀거리는, 위기에 시달리는 자본축적 과정으로 인해 잉여가치는 더욱 더 투기 부문으로(2007년에 미국 이윤 전체의 41%가 금융부문에서 나왔다!) 흘러들어가거나, 아니면 해외 자본 수출로 빠져나갔다. 결과는 자본 확대재생산의 하향 곡선으로, 이는 세계화 시기에 상품생산 증가율의 하락으로 나타났다. 1960년대에 제국주의 중심국들에서 산업생산 증가율은 연평균 5%-13%였었는데 이 추세가 1980년대에는 1.7%- 4%로 떨어졌고, 2000년대에는 0.5%- 1%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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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같이 2008년-09년의 “대공황 이래 최악의 위기”는 앞선 자본주의 시기, 특히 세계화 시기에 축적된 모순의 결과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호황기(1948년-72년)처럼 1992년 이후의 새로운 세계화 시기도 거대한 생산능력의 파괴로 시작했다. 이윤을 가져올 수 없는 기업(특히 러시아와 중국의)이 폐쇄되고 심지어는 아예 폐기되었다. 수백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그러나 1939년-45년의 훨씬 더 큰 파괴와는 달리 세계화 시기의 시작 때의 파괴 과정은 과잉축적된 자본을 충분히 제거하는 효과를 가지지 못했고, 세계자본주의 체제로부터 생산력 정체 경향을 들어내지도 못했다. 그리하여 1992년-2007년의 세계화 시기는 결코 세계적 규모로의 생산력 발전이 지배적인 추세가 되는 자본주의 팽창기가 되지 못했다. 독일과 일본에서의 장기불황과 정체, 동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에서의 격렬한 가치파괴 공황, 그리고 무엇보다 미국의 미약한 회복 -- 미국 경제의 핵심적인 잉여가치 생산부문들을 쇠퇴하는 상태로 남겨 놓은, 또는 매우 부진하고 완만한 성장세로 머무르게 한 그 미약한 회복 -- 을 고려할 때, 결론적으로 1992년-2007년의 세계화 국면은 1973년-92년 국면과 다르지 않게 여전히 생산력 정체 경향으로 특징지어지는 시기로 남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세계화 시기는 결코 상향 발전의 ‘장기파동’ 국면이 아니다. 전후 호황이 종식된 1973년 이래 자본주의 체제를 괴롭혀 온 고질병인 구조적 과잉축적이 근본적으로 극복이 되지 못한 시기이다. 구 ‘제3세계’에 속한 신흥국들 및 중국에서 생산의 광적인 발전에도 불구하고 세계화 시기는 가장 발달한 제국주의 강대국들의 경제를 구조적인 과잉축적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없었다. 가장 발달한 경제들에서의 지배적인 추세는 여전히 정체 경향이었다.

 

  세계화 시기는 자본주의 체제의 ‘번영’과 ‘역동성’을 보여준 시기이기는커녕 레닌이 ≪제국주의론≫에서 정립해 낸 제국주의 시대의 주 특징들(기생성, 독점, 부후화와 쇠퇴, 세계의 분할 및 재분할)이 확장되고 전면화된 시기이다. 이 시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분명하게 레닌이 다음과 같이 정의한 자본주의의 최고, 최후 단계 -- 자본주의의 쇠퇴 및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시대 -- 에 속한 한 시기임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제국주의에 대해 가능한 한 가장 정확하고 풍부한 정의로 시작해야 한다.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특수역사 단계이다. 제국주의의 고유한 특징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이다. 제국주의는 독점자본주의이다. 기생적인 또는 부후 쇠퇴하는 자본주의이다. 사멸하는 자본주의이다. 독점에 의한 자유경쟁의 대체가 근본 특징, 제국주의의 본질이다.”

 

  이행 시대로서 제국주의 시대의 역사적인 성격은, 자본주의가 생산력 및 생산의 사회화를 크게 높여냈기 때문에 이것이 부르주아적 생산관계와의 충돌 -- 너무 첨예하여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붕괴를 일정에 올릴(물론 영구적으로는 아니지만) 정도의 충돌 -- 을 일으켰다는 사실에 있다. 다시 한 번 인류는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의 갈림길에 직면한다. 현재의 극적인 경제위기는 레닌 제국주의론의 타당성을 완전하게 확인해 준다.
  끊임없이 진전되고 있는 생산의 사회화와 국제화는 자본주의가 역사적 퇴물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쇠퇴하고 사멸해 가는 자본주의 하에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생산력의 풍부하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레닌의 다음과 같은 규정은 지금 특히 옳다.

 

“왜 제국주의가 사멸하는 자본주의인지, 사회주의로의 이행기의 자본주의인지는 분명하다. 자본주의로부터 성장해 나온 독점은 이미 죽어가는 자본주의, 사회주의로의 그 이행의 시작이다. 제국주의에 의한 노동의 거대한 사회화는 동일한 결과를 낳는다.”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시대는 무르익어서 썩어문드러져 가는 자본주의 시대, 즉 막 붕괴하려 하는 그리고 사회주의로의 길을 만들 정도로 충분히 성숙한 자본주의 시대이다.”

 

  세계화 시기의 특수한 특징들이 우리 시대, 제국주의 시대, 자본주의의 최고 최후 단계의 본질적 특징을 제거할 수 없었다. 그렇기는커녕 제국주의 시대 내의 한 시기로서 세계화 국면은 쇠퇴하고 사멸해 가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한으로까지 축적한 시기이다. 현 위기가 순환적 위기를 넘어 자본주의 체제의 역사적인 위기인 것은, 제국주의 단계의 최근 국면으로서의 세계화 시기에 이 누적되고 극대화된 모순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개량주의자들의 공상적 해결책

  개량주의자들은 경제위기 상황에서 자본주의 그 자체에 대한 도전과 침해로 나아가는 것을 한사코 기피하기 위해 언제나 체제 내적인 정책과 방안들을 찾는다. 금융위기에 대해서는 금융기관에 대한 규제 및 금융 통제, 금융 공공성 강화, 토빈세 부과 등, 단지 표피적인 접근에 바탕한 공상적인 방안들을 해결책이라고 내놓았다. 재정 적자와 부채 위기가 터지자 이제 부자증세와 조세정의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진보정당 의원들과 시민단체, 노동조합 지도부들을 포함하여 진보진영에 널리 퍼진 논리가 있는데 탈세를 막고 부자들에 대한 과세를 통해 재정적자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빈부 양극화 증대와 대기업들의 파렴치한 세금 탈루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옳지만 그것이 모든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탈세를 막고 부자증세를 하더라도 자본주의의 반복되는 위기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문제는 훨씬 더 깊은 곳에 있고, 따라서 우리의 해결책도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자본가계급은 재정 적자가 “망국적인 복지 포퓰리즘” 때문에, “퍼주기식 복지” 때문에, 심지어는 “각종 복지혜택으로 노동자들이 놀고먹기 좋아해서” 일어났다는 둥 온갖 참주선동을 펼치고 있다. 그래서 정부 지출을 감축하고 “재정 건전성을 확보”하여 적자를 멈추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복지비가 삭감되고, 등록금을 1천만 원이나 내면서 대학에 다녀야 하고,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최저임금을 강요받고 있고, 연금 개악으로 연금 수령액을 삭감 당하고,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정리해고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개량주의자들도 복지 확충을 위해서는 재정건전성을 높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대기업의 탈루 세금 환수를 요구하고 탈세와 싸워야 한다고 제안한다. 우리는 여기에 동의한다. 부자 증세와 부자에 대한 누진세 요구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민주대연합 정부가 들어섰다고 가정해보자. 탈세를 막고 일자리를 위해 투자하라고 정부에 압력을 넣는 것에 대해 사회주의자들은 지지한다. 그러나 그것이 경제위기를 종식시키고 긴축을 멈추게 할 것인가? 결코 아니다.

 

  만일 탈세를 막는다면 자본가들은 그들의 돈을 해외로 빼돌릴 것이다. 그래서 탈루 세금 환수 요구를 넘어 자본가들의 은행 자산을 동결하고 이를 몰수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은행들을 보상 없이 국유화하여 노동자통제 아래 두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만일 정부가 긴축을 거부하고 유용한 일자리 투자에 수십조 원을 지출하면 국제 채권시장, 즉 금융자본가들은 원화를 공격하여 가치를 저하시킬 것이다. 물가가 치솟고 인플레가 임금 가치를 저하시킬 것이다. 이에 맞서 우리는 임금을 실제 물가에 연동하는 물가지수를 작성하고 국가부채 무효화를 선언하고 투기꾼들을 감옥에 보내고 금융자본가들이 보유하고 있는 채권 수백조 원을 몰수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한국의 부채에 대해 외국 금융사들이 재정적자가 너무 급속히 불어나고 있다고 우려를 보내고 있다. 이명박 정부 대신 민주대연합 정부가 들어서도 마찬가지로 채권 시장의 거대한 압력에 곧바로 굴복하여 이명박 정부와 동일한 삭감을 실행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급진적인 정부가 삭감안을 거부하고 케인스주의자들이 제안하는 대로 지출을 시도한다면 자본가들은 투자 파업에 착수하여 자금을 차단하고 한국 원화에 대한 공격을 개시할 것이다.

 

  여기에 맞서 사회주의자들은 이들 거대 금융기관 및 투자가들의 기금을 몰수하고 외환에 대한 국가 통제를 부과하고 일체의 채무를 무효화하기 위해 투쟁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을 가능한 한 가장 빠르게 다른 나라들로 확산시킬 것이다.
복지 삭감 및 긴축에 대항하는 우리의 행동강령은 고액 탈세자들의 탈루 세금 환수 요구만이 아니라, 일자리와 공공서비스에 더 많이 지출할 것에 대한 요구만이 아니라 부채 무효화와 국채 보유자들의 투기자금 몰수 요구를 포함한다.

 

  만일 한나라당이 4년 안에 부채와 적자를 없애겠다고 한다면, 그리고 민주대연합 정부가 이를 2년 안에 해결하겠다고 한다면 우리의 대답은 ‘하룻밤이면 충분하다’이다. 이 세계의 국채보유자들과 금융자본가들한테 당신들에겐 단 한 푼도 갚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주면서 말이다. 그리스와 포르투갈, 아일랜드에서도 우리가 한 선례를 따라 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자본가들은 국가부채 위기의 전염병이 EU의 주변국에서 중심국으로 번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제 저들은 이러한 투쟁의 전염병이 번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 할 것이다.  
  유로존에서든 한국에서든 결과는 계급투쟁에 달려 있다. 자본주의의 안정화와 자본의 확대재생산 안착은 오직 노동자계급의 일자리와 복지가 파괴된 폐허 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는 복지 삭감과 긴축에 저항하고 그것을 분쇄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와 이집트 노동자들의 길을 따라가고 그들의 분투를 넘어설 수 있다면 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긴축에 반대하는 전투에서 모든 승리는 의심할 바 없이 국제 금융자본으로부터 광란의 대응에 부닥칠 것이다. 국제 금융자본은 국가가 노동자들에게 위기를 전가시키지 않으면 국가 전체를 파산시킬 기세로 덤벼들 것이다. 왜 대중적인 반긴축 운동의 논리가 전 계급적인 정치권력 투쟁으로 직접 이어지는지 그 이유가 여기 있다. 왜 긴축에 대한 전투적 반대가 반자본주의 논리를 취하는지 이유도 여기 있다. 우리의 투쟁들을 대안적인 체제,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으로 연결시켜서 이 반자본주의 논리를 대중적 의식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필요하다.

 

  국가부채 위기는 자본가들이 국가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손실을 사회화시켜서 생긴 것이다. 부채는 계속 늘릴 수 없다.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가 더 이상 굴러가지 않고 있고, 이제 막장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본가들이 설사 이번에 채무불이행이나 국가부도를 넘기고 이후 2년을 버텨낸다 하더라도  다음번 금융위기는 자본가 정부들이 또 다시 구제금융 기금을 걷는 것을 불가능하게 할 것이다. 다음번에는 이번보다 훨씬 더 깊은 체제 붕괴를 가져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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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_창간준비 1호] 진보대통합, 처음엔 비극(悲劇) 이젠 소극(笑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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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대통합,

 

처음엔 비극(悲劇) 이젠 소극(笑劇)!

 

                                    - 남궁원

 

 

  한 가지는 분명하다. 최근 몇 년 동안에 일어난 급속하고 거대한 유럽 · 중동의 계급투쟁 흐름과 자본주의 경제위기는, 부르주아 계급이 이 위기 극복을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다가오고 있다는 점이다.
  알다시피 자본주의는 전 세계적으로 통합되었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 시대다. 미국과 유럽 경제위기는 실시간으로 한국 자본주의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부르주아 언론에서도 양극화 (즉 노동자 궁핍화) 현상을 심각하게 언급하고 있듯이, 전 세계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서 한국 노동자라고 예외는 아니다.
  미국 같은 나라에서도 계급투쟁이 부활하고 있는 모습이다. 올해 초에 미국 노동자와 학생, 시민들은 공공부문 정리해고, 임금삭감, 노동조합 단체협상권 박탈에 맞서, 1970년 베트남 전쟁 반대 이후 대규모 시위를 벌여 위스콘신 주 의사당을 16일 동안 점거 농성했다. 유럽과 아프리카 중동지역에서는 연일 시위와 광장 점거, 파업 상황이 언론에 보도되고 있다.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한국은 조용하다.
  유성 기업 투쟁과 한진 중공업 정리해고 반대 크레인 농성투쟁 (희망 버스 투쟁), 반값 등록금 투쟁이 전개되고 있지만, 대대적인 파업과 가두 투쟁은 최근 몇 년 동안 시도조차 되고 있지 않다. 쌍용자동차 노동자와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립된 공장점거 파업투쟁이 전개되었지만 연대 총파업으로 투쟁이 확대되지 못했다. 민주노총 차원에서의 총파업도 그 동안 실행되지 못하고 매번 ‘뻥파업’이라고 비난 받는 가운데 이젠 논의조차 되고 있지 않다. 민주노총은 현장 투쟁을 확대 발전시키는 것은 이제 아예 포기하고 오직 진보대통합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듯이 보인다. 물론 민주노총만이 문제가 아니다. 진보대통합만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말하는 세력들을 보면 계급투쟁을 확대시켜야 할 임무를 모두가 한결같이 포기한 모습이다. 투쟁 확대의 포기와 진보대통합 ‘올인’은 상호 연동되어 있는 것인가? 

 

지배계급의 위기관리 본능

  최근 우리는 지배계급이 내놓는 몇 가지 담론을 듣는데, “공정사회” “초과이익공유제” “반값 등록금” 등이 그 예다. 공정사회란, 말 그대로 MB정부가 정권 말기에 공직사회 ‘군기 잡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법과 질서를 엄격히 적용해서 노동자 파업이나 시위대를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집회 참가자에게 날라드는 수많은 출두요구서와 최근 잇달아 터지는 강릉 청년단체협의회 , 인천지역 노동자, 민주노동자전국회의 국가보안법 사건들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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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초과이익 공유제”와 “대학생 반값 등록금”이다. 시민사회단체에서나 낼 법한 초과이익 공유제라는 재벌개혁 정책을 정부 ⁃ 여당에서 내놓고 논쟁을 하고 있다. 초과이익 공유제는, 말 그대로 “대기업이 초과이윤을 냈을 경우 그 이익을 중소기업과 나누자는 것”이다. 이에 대해 삼성 자본가 이건희는 “초과이익 공유제가 사회주의 용어인지 공산주의 용어인지 도무지 들어 본적이 없다”고 반발했다. 더 나아가 보자. 최근 한나라당 지도부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에서 정통 보수 박근혜 측근은 “대학생 등록금 45% 지원을 약속하고, 보수보다는 진보에 강조”를 내걸고서 당 지도부에 선출됐다. 그 이면에는 지금과 같이 한나라당 운영을 보수적으로 했다가는 망한다는 생각이 짙게 깔려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가.
물론 립서비스 차원이겠지만, ‘노동자투쟁의 잠재적 폭발 가능성을 사전에 막기 위한’ 지배계급의 자본주의 위기관리 본능이 발동되는 것 같다. 보수적 진보(?)’를 말하며 이제 자본주의 경제위기에 대응해서 고도의 전략적 개입을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진보정당 대통합 논의

  지배계급의 정치세력 및 블록들 간의 이해나 갈등을 자본주의 경제위기, 계급투쟁과 연관시켜 총체적으로 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부르주아 정치평론가들이 즐겨 표현하는 인물주의나 지역 · 계파 중심으로 정치행위를 분석하는 오류에 빠지기 쉽다. 현재 자본주의 경제위기를 둘러싸고 지배계급은 대(對) 프롤레타리아 투쟁을 염두에 두며 ‘자본(주의) 재구성’을 위한 치열한 논쟁을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진보, 좌파,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또한 예외일 수 없다. 최근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지난 5월31일에 진보대통합에 합의했다. 사회당은 진보대통합 합의문 서명에 불참하고 새로운 진보정당 구상에 나서고 있으며, 국민참여당은 진보대통합 참여의사를 밝히고 있다. 여기에 진보정당 통합 논의에 민주노총이 적극 참여하고, 진보정치세력의 연대를 위한 교수연구자모임(진보교연)이나 진보통합-복지국가를 위한 시민회의(시민회의)가 진보대통합 참여 논의를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개혁 진보 좌파 정치세력들의 정치행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 진보 좌파 정당 운동의 통합 역사와 행태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과거는 단순히 지나간 역사를 회고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되는 진보(정당)대통합 정치의 주체들의 역사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판단하기 위한 것이다. 
  

  선거를 겨냥한 과거 진보 · 좌파 통합의 실패

  91년 7월 인민노련, 노동계급, 삼민동맹 3파 연합은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진보정당 결성을 추진하게 된다. 당시 <한사노당>은 “광범위한 좌파연합을 통한 대중정당 건설과 이 속에서 사회주의 세력의 독자적인 분립”이라는 기본테제를 확정한다. 이른바 3파 연합인 <한사노당>은 사상 노선에 대한 토론과 확립 없이 (이른바 좌파 연합을 통한 대중정당 건설을) 연방주의적으로 구성하는데, 92년에 <한국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로 이름을 바꾼 뒤 민중당과 통합하게 된다. 그리고 통합민중당은 1992년 14대 총선에서 참패하고 해산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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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5년 인민노련 중심의 진보정당추진위(대표 노회찬) 와 민중정치연합 (대표 김철수)내 우파인 (사노맹이 외화된) 사회당 추진위 세력은 진보정치연합을 건설하고 곧 바로 96년 15대 총선에 나섰다. 당시 진보정치연합은 15대 총선방침을 논의하는 대의원대회를 열고 ‘진보정치연합은 개혁신당의 후보로 출마하는 것을 중심으로 15대 총선에 참여한다.’는 방안을 놓고 격론을 벌였다. 진정추 세력을 대표하는 노회찬은 개혁신당을 거쳐 ‘꼬마 민주당’ 당무위원으로 선출되고. 강서 을에서 조직책으로 선임된다. 그러나 노회찬은 96년 총선을 한 달 앞두고 최종적으로 사면복권이 되지 않아 출마자격을 얻지 못했다. 15대 총선 실패 이후 진보정치연합은 사실상 내부 갈등 관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식물’ 정치조직으로 존재한다. 이후 97년 전국연합과 국민승리21를 구성, 민주노동당에 참가한다.
  한편, 93년 민중회의에서 분화 발전한 우리청년회는 97년 대선 독자 후보 논쟁을 둘러싸고 정치연대를 탈퇴한 뒤, 98년 독자적인 <청년진보당>을 결성한다. 이들은 2000년 16대 서울 전 지역 총선후보를 낸 뒤, 이후 반(反)조선노동당 정체성을 기초로 한 사회당으로 개명한다. 사회당은 2002년 대선 독자 후보 활동을 한 이후 내부 사상투쟁에 휩쓸리고, 사회당 내 자율주의 세력이 이탈한다. 사회당은 특히 2007년 대선에서 ‘사회적 공화주의’를 핵심으로 내세우는데 , 사회적 공화주의 요체는 “국민 모두가 진짜 주권자” “민주주의” “평화주의” “신자유주의 반대” 등이다. 사회당은 몇 번의 선거에 독자 후보를 내지만, 의회 진입의 높은 벽을 매번 실감하고 실패한다.

  90년대 공개적으로 등장한 진보 좌파 주류 세력은, 군부파시즘 타도라는 역사적 시기를 걸쳐,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형성된 노동자정치세력화 열망의 일부 표현이기도 하다. 또한 민족해방파의 부르주아 (김대중 )비판적 지지에 맞서 투쟁한 점 또한 성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위에서 봤듯이 진보 좌파 ‘주류’ 세력은 전략적 과제로서 ‘선거 정치에 집착’하면서, 체제 내적 운동으로 전화된다.
  사실 진보, 진보정당, 좌파라는 단어는, 사회주의 정치 운동세력이 85년부터 89년 비합법 정치운동 시기에서 벗어나, 90년 공개 정치운동을 하면서 자신을 드러내면서 썼던 용어다. 한편에서는 90년 현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사회주의를 방어하면서 ‘진보 좌파 정당’ 용어를, 다른 한편에서는 NL(민족해방운동) ‘반정립을 위해 좌파’라는 말로 자기 정체성을 드러냈다. 진보/ 좌파라는 단어는 NL 운동에 대한 상대적 개념이며, 사상 이론 혼란에 따른 90년대 방어적 사회주의 정치운동을 관통하는 말 가운데 하나다.
다시 말해 진보/좌파는 사상 이념적으로 다양하게 해석되는 불명확한 개념이며, 이러한 인식에 기반을 둔 진보 좌파 정당 주류 세력은 역사적으로 사민주의 선거용 정당으로 나갔다.

 

  2008년 민주노동당과 분당한 진보신당은 개혁주의적 (노사모 수준) 성향의 촛불당원이 대거 들어와 그 옛날의 좌파 진보 정체성조차 불투명한 상태다. 특히 진보신당 안에는 이번 진보대통합과 관련해서, 아예 복지국가를 중심으로 민주당, 국민참여당까지도 함께 하자는 세력, 민주노동당과 통합하자는 세력, 사회당과 통합을 우선시하는 세력 등 다양한 세력이 존재한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진보 좌파로 표상되는 진보정당은 명확히 실패로 귀결되었다.
사회당은 진보 좌파의 전형을 보여주는 데, 그 정점이 바로 ‘반조선노동당’ 핵심 슬로건이다. 이는 당의 성격을 반국(半國) 관점에 근거한 것으로, 국제주의 관점과 세계혁명 전략을 스스로 제거해버린다. 또한 사회적 공화주의는, 자본주의 발전 역사에서 부르주아 국가와 민족주의 형성은 영토를 중심으로 한 (국민/민족) 주권, 민족자결권을 핵심으로 내세운다는 점에서, “국민 모두가 진짜 주권자”를 모토로 한 ‘사회적 공화주의’는, 사회당이 과연 사회주의자 정당인지조차 의심스럽다. 이른바 이들이 최근에 주장하는 ‘기본소득론’은 자본주의 ‘생산’ 문제는 외면한 채, ‘분배’ 문제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체제 내적인 전략을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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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선 대선 판짜기: 진보대통합 논쟁의 의미

  민주진보대통합은 2012년 4월 총선과 대선 선거 정국 판짜기용이다. 그 정치적 귀결은 반MB 정권교체이며 2013년 연합정부다. 따라서 이를 위한 부르주아 정치가와 진보정당들 상층부 인사들의 ‘그림 그리기’와 이합집산이 상층부 차원에서 추구된다. 부르주아 계급정당인 민주당 일각에서는 국민참여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야4당 통합을 주장한다. 진보정당 상층부 일각에서는 연합정부 하에 장관자리까지 언급하고 있다. 시민단체 또한 진보대통합을 주장하고, 민주노총 현 집행부는 1만 추진위원을 제안하면서, “노동자 집권”, “노동자는 하나”, 그래서(?) “당도 하나”라는 1국 1정당론에 기초한 진보정당 대통합을 주장하고 있다.
  이른바 ‘민주진보 대 반민주’ 구도다. 여기서 더 나아가 민주진보세력의 총 단결인 ‘정당연합’을 추구한다. 이는 결국 대선시기 민주당 비판적 지지로 귀결되며, 이들은 다시 노무현식 대선 바람을 꿈꾼다. 한 정치연예인은 “국민의 명령”을 얘기하면서 백만 민란과 야권 통합을 위해 행동에 나서고, 발 빠른 부르주아 정치인은 자신의 지역구를 민주노동당 대표 이정희에게 물려줬다. 국민참여당 유시민 대표는 중앙위원회를 개최해서 만장일치에 가까운 진보대통합 추진을 이끌어 냈다. 여기에 민주진보대통합에 진보신당 스타급 연예인 심상정과 노회찬 참여. 이 ‘그림 그리기’는 과히 공상적이지도 않고 진보대통합을 둘러싼 정치 지형을 볼 때 현실적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진보신당 당원중 상당수가 자유 개혁주의적 성향임을 볼 때 더욱 그렇다.
  여기에 민주노동당 NL파의 친 국민참여당 행보는 사실 80년대부터 노선적으로 예견되는 상황이었다. 민주노동당 NL파의 “우리민족끼리’로 표현되는 소부르주아 민족주의 정치노선은 이론적으로 ‘민족적’ 내용 확보가 핵심이며, 이는 언제나 국민경제를 둘러싸고 논의하게 된다. 그런데 ‘국민경제의 지배/종속’이라는 관점은 정확하게 말하면 부르주아 경제학의 관념이다. 우리는 현 자본주의 위기 속에서 수많은 부르주아 연구 · 정책 보고서가 어떻게 하면 국민경제를 대외 의존에서 벗어나 자립적인 경제구축 강화 방안을 모색하는 연구보고서를 숱하게 본다. 왜냐하면 국내 부르주아에게 국외 부르주아와의 경쟁과 상호 모순적인 협력은 사활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부르주아 세력과 연합하기 위한, 민주노동당의 ‘사회주의 문구’ 강령 삭제는, 민주노동당의 ‘친 부르주아적 성격’을 더욱 강화한다. 

 

  새로운 진보정당, 아직도 신자유주의 반대?

  다른 한편, 보수- 개혁- 진보(좌파) 구도가 존재한다. 이들은 진보신당 (새로운 진보정당)독자파, 사회당, 새로운노동자정당추진위원회(새노추)로 표현되는 세력이며, 진보대통합에 반대하는 ‘새로운 진보정당 추진’ 세력이다. 이들은 대체로 반신자유주의 진보정당에 동의하며, 정치적 목표로 여전히(!) “신자유주의 극복의 대안과 전략”을 모색하면서 “진보정치 혁신세력과 연대하여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을 추구한다.
일부 좌파 사회운동 단체는 사회운동 관점에서 “통합진보정당 내부에서 좌파적 블록을 강화하고 노동운동의 중앙파 등과 협력하여 ‘민주당과의 선거연합’중심의 방침을 최대한 제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함께와 진보교연은 “진보대통합에 찬성하면서, 국민참여당 저지”로 요약된다.
  이들 세력들은 여전히 90년대 중반 이후 형성된 애매모호한 진보/좌파 정치 연장선상에 있으며, 앞서 역사적 과정에서 봤듯이, ‘자본주의의 나쁜 측면들’에만 반대하는 ‘윤리적 반자본주의(규제)’ 운동에 머무른다. 사회주의 / 공산주의 전망을 뒤로 미룬 채, 기껏해야 자본주의 국가기구 ‘좌파’의 역할에 머무른다.
  이들은 여전히 ‘신자유주의 반대’ 슬로건에서 멈춰서 있다. (2008년 스위스 다보스 포럼에서 글로벌 자본가 빌 게이츠조차 신자유주의 폐해/반대를 주장하면서 ‘창조적 자본주의’를 촉구하는 상황에서!). 신자유주의 반대는 재벌의 특정한 정책을 반대하고 민주적인 경제정책을 제시한다는 일반론적 의미 수준에서 머무른다. 반이명박 정부에 머무르면서, 결코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도전과 침해를 감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리를 둔다. 신자유주의 반대에서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다양할 수 있지만, 그 귀착은 서구의 계급타협인 사회민주주의 정책으로 수렴될 가능성이 높다.

 

  사회주의 / 공산주의 지향을 분명히 하는 당 운동에 나서야

  현재는 과거의 축적이며, 동시에 미래를 향한다. 역사적으로 선거를 앞두고 진보 좌파의 이합집산 세력은 실패로 끝났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진보대통합은 총선/ 대선 선거대응을 위한 개편이며, 기껏해야 서구에서 실패한, 노동자 투쟁을 배신한 인민전선 재판이다. 특히 통합진보정당론자들은 소부르주아 민족주의(NL)와의 동거를 통해 끊임없이 인민주의와 사실상 반혁명적 시각을 확산시킨다.
자본주의의 장밋빛 환상에서 벗어나는 것, 노동의 미래를 제시하는 것은 오직 노동자의 계급투쟁 능력과 권력의지에 달려있다. 이른바 ‘부르주아 개혁 정치(제도권 민주주의)’, ‘윤리적 반자본주의(규제)’ 운동을 뛰어넘는 혁명적 시각과 실천이 절실하다. 자본주의 위기가 본격화되고 있는 지금 시점에, 좌파, 진보라는 애매한 규정에서 벗어나, 이제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전망에 기초한 당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사회주의자는 실천적으로 가장 단호하고 언제나 계급투쟁을 추동하고, 이론적으로 노동자 투쟁의 조건과 경과, 결과에 대해 인식해야 한다.
여기서 일체의 머뭇거림을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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