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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연맹 유기수 처장을 면회하고 나서...

 

건설연맹 유기수 처장을 면회하고 왔다.  오며가며 하루를 전부 썼는데 단 5분 정도 면회를 했다. 내가 쓸 수 있는 용돈에 비하면 차비, 영치금, 책값 등으로 돈도 꽤 썼다. 그래도 마음은 좀 편해졌다. 최소한의 할 바를 했다랄까...

 

유기수처장은 포항건설노조 싸움으로 구속이 되었다.

구속이 처음이니 실형을 안살고 집행유예로 나오지 않을까도 생각을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통상 2개월정도면 끝나는 1심 재판이 6개월을 끌었다. 실형은 기정사실로 굳어지더니 실형이 2년 떨어졌다는 소식이 들렸다.

굼뜬 나도 도저히 빠져나갈 도리가 없어 며칠 전에 연맹에 예약을 하고 대구교도소에 면회를 하고 온 것이다.

 

전날 사회진보연대에서 몇권의 책을 준비하고, 면회당일 교보문고에서 꼭 읽었으면 하는 책 한권을 사 대구로 향했다. 연맹에 예약을 해 놓은 상태지만 혹 '몰지각한'(?!) 사람이 연맹에 알리지도 않고 면회를 해버리면 대구까지 가서 허탕을 칠 수도 있어 가능하면 빨리 가자는 차원에서 케이티엑스를 탔다. 서울역 대합실에서 케이티엑스 해고조합원들이 이철사장을 규탄하는 발언을 하고 있었고, 유인물도 나눠주고 서명도 받고 있었다. 안쓰럽고, 미안하고, 대견한 생각에 수고하신다는 말을 하고 서명을 했다. 노조의 '노'자도 몰랐을 나어린 사람들이 저런 투사가 되어 있다니... 이 사회가 투사를 만들어낸다는 말이 맞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대구에 도착해서 박문진 전 민주노총 부위원장에게 면회제의를 했더니 막 근무에 들어가야 할 시간이란다. 대구에 내려올려면 하루 전에 좀 연락을 하지 그랬냐, 나중에 대구에 올려면 허락을 받고 오라는 핀잔아닌 핀잔을 들었다. 나중에 따로 하시라 하고 혼자 갔다.

 

교도소에 가서 영치금을 약소하게 하고(내 재정적 처지가 날 째째하게 만들었다. 어디 이번뿐인가! 결혼축의금, 부의금을 할 때 언제나 나는 째째해진다), 책을 넣고 차례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무슨 이야기를 압축적으로 해야할까 잠깐 생각을 했다.

우선 당국에 대한 분노를 좀 쏟아내야겠지... 그리고 교도소 생활에 대해서도, 그리고 가족이야기(사실 같은 지역에 살아 가족을 어느정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또 바깥 투쟁 이야기 등을 하면 되겠지...

사실 교도소 면회시간이 단 몇분간인데도 의외로 할 말이 없어 시간이 애처로이 흐르는 경우도 꽤 있다. 왜나하면 교도소 면회라는 상황, 아주 제한된 시간 등으로 인해 면회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의 종류는 어느정도 정해져있는데 이런 이야기를 잘 못풀면 그렇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즉 그 시간에 자잘하고 사사로운 이야기를 농담따먹기식으로 할 수는 없는 일이고, 그러다보니 말이 막히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기수처장과는 서로 잘 아는 사이고 해서 할 말이 많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웬 걸... 유기수처장 처음 반응이 왜 이렇게 멀리 혼자 왔냐는 반응이었다. 마치 나무라는 듯이. 다른 일 없이 혼자 자신의 면회만을 위해 대구를 왔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다른 신 모동지와 같이 오려다 일이 있어 못오게 되었다, 대구 박문진 동지와 같이 오려 했는데 앞서 말한 사정이 있었다는 등의 얘길 했는데도 유기수 처장은 부담감을 떨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이야기가 썩 잘 진행되지 않았다.

그런데 내 경험으로는 사실 단 5분간의 면회는 면회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수형자가 답답한 좁은 공간에서 풀려난다는 게 중요했다. 그래서 운동시간이 중요하고 면회시간이 중요했다. 특히 내가 구치소에 있을 때엔 일요일엔 운동시간과 면회가 없기 때문에 토요일 오전 면회 이후 월요일 면회시간까지 약 48시간을 갇혀지내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월요일 면회는 특히 필요했다( 주 5일제가 도입되고 토요일까지 면회가 없어져서 이것이 문제가 되었는데 현재는 개선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한치 걸러 두치' 으으 미안할 따름.) 그렇게 본다면 수형자의 감방으로부터의 탈출(단 몇분간이긴 하지만)은 면회를 온 사람의 비용을 훨씬 웃도는 효용(물론 비용과 효용의 주체가 다르긴 하지만)이 있었던 것이다(사실 비용-효용을 따지기 이전에 동지애라는 더 중요한 요소가 있지만 따지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요일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지만 월요일 면회의 의미를 상기하고 나선 더욱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유기수 처장은 내가 치러야 하는 비용만을 부담스러워 한 것으로 보였다.

첫 매듭이 시원하게 풀리지는 않았지만 신모의 근황, 대구교도소 수형조건, 항소문제, 체중문제, 빵 동료들, 유기수 처장 아이들 문제, 우리 가족 안부 등 이런 저런 이야기를 되는대로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빨리 나와야죠 했더니, 접견실 문을 나가면서 "이 철옹성을 어떻게 나가? 이렇게 떡 버티고 서 있으니" 하면서 문틀을 살짝 발로 찼다.

맨날 씩씩만 하던 유기수 처장도 약간 힘겨워해 했다. '이런 망할놈의 **&&^&()!!!'

 

사실 내가 보기에 유기수처장은 운동과 생활이 일치하는 몇안되는 사심없는 노조간부다.

건설연맹 내 사무직노조 출신이면서 지역노조 사람들과 더 잘 어울였다. 투쟁엔 언제나 앞장을 섰고, 노동자정치에도 관심이 많았다. 썩은 세상을 노동자정치로 갈아엎어야 한다는 생각이 철저했다.

집안에서의 아이들에 대한 교육도 운동의 원칙에 충실했던 것같다. 큰 아이(?)는 대학가서 학생운동을 하고 있고, 둘째 아이는 축구선수인데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어떤 매체에 선수노조 어쩌구저쩌구 발언을 해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이런 유기수처장이 구속된 것은 당연하고,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 그 수많은 투쟁에 참가하면서 50줄에 들어서 이제야 처음 구속이 되다니... (으으, 이 놈의 방정!)

 

유기수 처장은 포항건설노동자 투쟁 때 계속 선동마이크를 잡았다. 유기수처장의 마이크는 여느 마이크들처럼 청원하는 투도, 적당히 중재하는 투도 아니고 말그대로 투쟁을 선동하는 마이크였다.

대 자본 포스코(와 포스코의 하수인인 지역 검 경)에 대들었으니 구속이 될 수밖에...

 

유기수 처장을 감옥에 두고 돌아오는 마음 한 켠이 아릿해 졌다. 그리고 느슨하고 나태한 내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어제 하루 면회는 내게도 비용을 넘는 커다란 '효용'이 있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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