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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운동

정보운동이 도대체 무엇인지 새삼 궁금해졌다. 내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새삼 모호해졌다. 옛 자료들을 뒤적였다. 그리고 찾아 낸 것들. 한동안 잊고 있었던 것들.
아직 우리나라의 진보운동 진영은 변변한 자신의 통신수단 혹은 네트워크 수단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사회단체들은 상업적인 통신망에 자신의 근거지를 마련하고 있지만, 자본에 의해 끊임없는 장애를 받기도 하고 기본권의식이 약한 국가당국으로부터 검열의 위협을 받기도 하여 자유로운 의견 개진이 쉽지가 않습니다. 게다가 각자가 여러 상업통신망에 뿔뿔이 흩어져 있어 대중이 접근하기가 또한 쉽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나라의 사회운동도 서로 힘을 모아 정보통신 공간에서 자신들의 실체를 드러낼 수 있는 전략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 통신 네트워크는 단지 자료의 전달 수단이 아니라, 사회운동을 보다 활성화하고 단체사이에 소통과 연대를 확장할 수 있는 시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안에서 전 세계의 민중들과 만날 수 있습니다. 자본의 정보화는 빠르게 진전하고 있습니다. 자본의 전세계적인 횡포에 맞서고 사회운동의 정보화를 추진하는 동시에 정보화가 또한 진보적인 운동의 성격을 갖게 하기 위해 사회운동의 바른 정보화를 이룩하는 작업은 현 시대를 움직여가는 여러분의 당연한 권리이며 책임입니다. 이러한 사회운동의 정보화에 진보네트워크센터가 작은 밑거름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김진균, [진보네트워크센터 추진위원회 발족식 자료집] 중, 1998.07.01
지금 우리는 '변변한 자신의 통신수단'을 가지고 있는가? '자유로운 의견 개진'이 쉬워졌나? '대중이 접근하기'는 쉬워졌는가? '사회운동을 보다 활성화하고, 단체사이에 소통과 연대를 확장할 수 있는 시공간'은 있는가? 이것들은 이미 모두 불가능한 것으로서 판명되었는가? 지금까지 불가능했다고, 쉽게 포기해버려도 괜찮은 것들인가? 또 하나의 글.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우리는 '정보운동'을 하나의 부문운동(혹은 부문운동들의 총합)으로 보지 않는다. 즉, 현대사회의 특수한 '이슈'로 보거나, 통신공간의 민주화 운동 등으로 한정시키지 않는다. '정보운동'은 새로운 생산/사회관계의 창출을 위한 변혁운동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기존 변혁 이념의 새로운 공간(cyberspace)으로의 확장으로도 보지 않는다. 정보화사회에서도 결국 자본관계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결론만을 확인하는 기존의 비판이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통신공간은 운동공간의 양적 확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현실 모순관계의 특수성에 대한 해명이며, 우리는 그 정점에 정보문제를 둘러싼 제반 모순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 아직 통신공간은 어떠한 질서도 정립되지 않은 이제 개척되고 있는 사회이다. 때문에 무척 무질서하게 보일 수 있으며, 특정한 문제점을 둘러싼 해결책 역시 전범이 없다. 그래서 통신 내외적인 권력선점의 각축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기도 한 것이다. 바로 통신공간을 통제하기 위한 자본/국가권력과 그 쌍방소통의 가능성을 활성화시켜, 새로운 소통과 연대의 형식을 모색하고자 하는 진보적인 흐름 사이에서 말이다. 군사/학술망으로부터 출발한 인터넷은 이제 세계 각지의 네트워크를 묶는 네트워크의 네트워크가 되었고, 자유로운 소통을 욕망하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점점 자신을 불려나가며, 아직 어느 특정 세력에 의해 통제되고 있지는 않다. 누구의 소유도 아니기 때문에 어떠한 규정과 통제도 없으며, 다양한 정보가 오가고 갖가지 실험이 행해지며, 다양한 성격을 가진 수많은 단체들과 개인들이 각자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쌍방향적인 소통을 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 상업적 가능성을 포착한 자본이 발바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앞으로 어떻게 변모해 나갈지는 단언하기 힘들지만, 단일한 중앙에 의해 통제되지 않고 탈중심적 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인터네트를 통해 새로운 권력형태의 가능성을 실험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기존의 대부분의 매체는 소수의 정보제공자와 그것을 소비하는 소비자의 이분화된 구조 속에서 정보에 대한 통제권이 독점 되어 왔었다. 하지만, 인터네트에서는 정보의 제공자와 소비자가 따로 구별되지 않고, 누구나 정보를 제공하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정보를 선택하므로 정보생산자/소비자의 구별이 무의미해진다. 단일한 중앙을 갖지 않는 사회가 어떤 식의 질서를 형성해 나갈지 선험적으로 규정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네트워크를 독점적으로 통제하려는 세력에 대한 반대, 토론을 통한 새로운 합의 구조의 창출, 자율적인 네트워크의 계속적인 결합을 통한 말그대로 인터-네트의 풍부화를 도모해볼 수는 있지 않겠는가? 오병일, {정보와 진보운동}, [SING A SONG Vol.1 #0], 1996.01.17
'권력선점의 각축'은 이미 끝났는가? 이대로 끝나도 좋은가? 누가 '쌍방소통의 가능성을 활성화시켜 새로운 소통과 연대의 형식을 모색'하고 있는가? 누가 '새로운 권력형태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는가? 누가 '인터-네트의 풍부화를 도모'하고 있는가? 또 하나의 글.
하지만 통신망은 고급예술과 저급 문화환경의 경계를 잠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재한다. 이제 우리는 마침내 금박 입힌 억압을 깨고, 문화계의 기생적인 제사장과 문화병자들을 제쳐버리고, 보통 사람들의, 보통 사람들에 의한, 보통 사람들을 위한 평등의 예술을 건설할 수 있는 소통 매체를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전체주의적인 강제적이고 위계적인 사회적 리얼리즘이 아니라, 반위계적이고 현실감각 있는 컴퓨터 낙서이다. 그것은 풀뿌리 민주주의예술의 가능성을 내재한 것이다 신문의 사설이 아니라 글과 글들이 꼬리를 문 바로 우리의 토론이 우리의 가치판단의 기준이 될 수 있다. 01410문제를 보아라. 어느 신문지상에 이보다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높으신 학자와 정부기관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에 의해 지식/가치 체계가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우리에게 열려 있는 것이다. 지식의 소유권은 이제 끌어내려져야 한다. 과거 진보진영의 학습체계가 대학제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 스스로에 의한 것이었음은 명백하다. 그들은 맑시즘의 생산자이자 동시에 소비자였던 것이다. 지식의 소통을 우리 스스로에게로 끌어내리자. 이것은 진정 무한대 소통을 전제로 한다. 나의 글이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러할 보석처럼 빛나게 하지 말아야 한다. 나의 지식이 나만의 것이 아니듯 나의 창조물도 더 이상 나에게만 머물러 있지 않고 그것에 풍부히 덧붙여진 모습으로 돌아다닐 수 있게 하자. 심지어 값싸고 잡다하며 불결하기까지 한 것 까지도... 황규만, {Copyleft운동을 제안하며}, [SING A SONG Vol.1 #2], 1996.03(추정)
지금 '반위계적이고 현실감각 있는 컴퓨터 낙서'는 어디에 있는가? 지금 '글과 글들이 꼬리를 문 바로 우리의 토론'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 그곳에 우리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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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과의 대화를 위하여

무화과님의 [기동단이여,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라] 에 관련된 글.

그들이라고 생각이 없을 것인가? 양심이 없을 것인가? 두려움이 없을 것인가? 매맞는 동료들이 보이지 않을 것인가? 그리고 왜 그들만이겠는가? 농민들을 그 자리에 나올 수 밖에 없도록 몰아간 자들. 강경 진압하라고 명령한 자들, 그 명령의 지휘계통에 있는 자들, 사람이 죽어도 책임지지 않는 자들... 또 왜 그들만이겠는가? 매맞는 시위대에 힘을 보태지 못한 사람들, 사람이 죽어도 분노하지 않는/못하는 사람들은 또 어떠한가? 우리는 누구와 어떻게 대화해야 할까?
가라타니 고진, [윤리21], 사회평론, 65쪽부터. 자유가 있다는 정명제와 자유가 없다는 반대명제가 양립한다고 본 칸트의 생각은 그렇게 난해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자유가 없다는 태도로 사물을 보아야 하고, 또한 자유가 있다는 관점에서도 사물을 보아야 한다. 예를들어 여기에 살인자가 있다고 하자. 통상의 재판에서는 그에게 살의가 있었는가 없었는가가 중요하다. 변호인 측은 그가 살인에까지 이른 원인을 말하며 변호할 것이다 검사는 가령 그렇다고 해도 당사자가 그것을 피하는 선택이 가능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칸트에게는 당사자에게 어떤 의도가 있었는지 혹은 어떤 원인으로 불가피하게 그렇게 했는지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 살의가 있어도 죽일 수 없는 때가 있고, 살의가 없어도 죽이고 마는 경우도 있다. 그러한 여러 원인을 구체적으로 따져 가면 이 범인에게 '자유' 따위는 없고, 따라서 책임도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 그러나 칸트는 이 범인에게 '자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가 행위하는 시점에서 자유가 있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 다만, 그가 스스로 자유에 의해 이 행위를 '한 것으로' 간주해야만 된다는 말이다. 자유는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의무)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결정론적 인과성을 배제하라는 것이다. ... 우리는 자유를 배제했을 때 현상(자연필연성의 세계)을 발견하고, 자연필연성을 배제했을 때 자유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뭔가를 저질렀다면 그것이 아무리 불가피한 것이라 하더라도 윤리적으로 책임이 있는 것은 '자유로워지라'는 당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상 그에게 자유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웠던 것으로 보야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칸트가 윤리학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을 하고 있음에 주의하기 바란다. 그것은 자유라는 관점에서 도덕성을 본 것이다. 그에게 있어 도덕성은 선악보다는 오히려 '자유'의 문제다. 자유 없이 선악은 없다. 자유란 자기원인적인 것, 자율적인 것, 주체적인 것과의 동의어다. 그러나 그러한 자유가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것이 그의 물음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자유로워지라'는 지상명령에서 찾아낸다. 지금까지의 윤리학은 선악이 무엇인가에 대해 논해 왔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것에는 두 가지의 사고 방식이 존재한다. 한편에 선악을 공동체의 규범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 다른 한편에 그것을 개인의 행복(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칸트에 따르면 그것은 모두 '타율적'인 것이다 공동체의 규범에 따르는 것이 '타율적'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행복주의-선을 행복으로부터 설명하는 공리주의적 사고-도 근본적으로는 감각이나 감정에 뿌리를 두고 있는 여러 원인들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에 '타율적'이다. 그에 비해 칸트는 도덕성을 오직 '자유'에서 찾는다. 자유가 없다면 주체가 없고 책임이 있을 수 없다. 거기에는 자연적/사회적인 인과성만 있다. 칸트가 자유를 '의무에 따르는' 것에서 구했던 것은 커다란 오해를 낳고 있다. 일반적으로 의무는 공동체가 각 개인에게 부과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트가 말하는 의무는 '자유로워지라'는 의무다. 거듭말하지만 그것은 자연적/사회적 인과성을 배제하라는 말과 같다. 자유를 의지(意志)함으로써만 자유가 생겨난다. 그 이외에 자유는 생기지 않는다. '당위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칸트의 말은 그것을 의미한다. ... 칸트가 "행위자가 이러한 행위의 결과를 완전히 새롭게, 스스로 시작하는 것처럼 간주해도 좋다"고 한 것은 그것을 말한다. 예컨대 그것이 죄라는 것을 모르는 채 저지르는 경우가 있다. 그럼 알지 못했다면 책임이 없는가? 그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라면 책임이 있다. 이 점에서 나는 칸트를 일관되게 공격한 니체에게서 바로 칸트적 윤리성을 발견한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 "정신이 얼마만큼의 진실에 견딜 수 있을까, 얼마만큼의 진실에 감히 맞설 수 있을까?" - 나에게는 이것이 본래의 가치척도가 되었다. -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서 무언가를 뺀다거나 제외한다거나 선택하는 일 없이 디오니소스적으로 그렇다라고 말하는 데까지 나아가길 원한다. - 이것을 나타내는 나의 정식이 운명애(amor fati)다. -니체, [권력에의 의지]
그가 말하는 운명애란 그러한 인생을 타인이나 주어진 조건 탓으로 돌리지 않고 마치 자신이 만들어낸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강자고 초인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다지 특별한 인간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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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블로그의 '펌'글의 비율

먼저 이 글을 보셔야 합니다. 각 블로그 사이트의 '펌'글의 비율 상당한 CAN(Computer Aided Nogada, 컴퓨터를 이용한 노가다) 작업이 필요했겠더군요. 이런 일에는 또 제가 일가견있다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는터... 함 힘 좀 써봤습니다. 진보블로그의 경우입니다.

진보블로그

25일 23:30

흔적없는 펌

2 (2.4%)

흔적있는 펌

7 (8.4%)

( 펌 전체)

9 (10.8%)

직접 작성

70 (84.3%)

광고글

0 ( 0.0%)

비공개글

4 ( 4.8%)

종합

83 (100%)

그리고는 원래의 자료들과 더불어서 그래프를 한 번 그려봤습니다. 진보블로그, 올블로그, 이글루스는 많이 겹쳐서 잘 구분이 안되네요. 데이터와 방법론에 한계가 있지만, 그래프로 보기에는 명확하네요. 광고에는 야후, 흔적있는 펌에 네이버, 흔적없는 펌에 다음, 흔적있는 펌과 흔적없는 펌이 고른 엠파스, 직접작성한 글이 압도적인 진보블로그, 올블로그, 이글루스. 재미로만 보세요. 뭔가 더 의미있는 작업이 가능할 것도 같은데요. 아이디어가 있으신 분들은 얘기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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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 - 오감도

한반도 야경↑님의 [펌] CD굽던 노인] 에 관련된 글.

강호에는 고수가 구름처럼 많다더니, 또 한명의 고수입니다. 아래 소개했던 '대중운동을 목격하다'의 주인공이기도 하죠. 황우석-오감도 십일개의 줄기세포가 논문에 등장하오. (논문은 사이언스게제가 적당하오) 제일의 줄기세포가 구라라고 그리오. 제이의 줄기세포가 구라라고 그리오. 제삼의 줄기세포가 구라라고 그리오. 제사의 줄기세포가 구라라고 그리오. 제오의 줄기세포가 구라라고 그리오. 제육의 줄기세포가 구라라고 그리오. 제칠의 줄기세포가 구라라고 그리오. 제팔의 줄기세포가 구라라고 그리오. 제구의 줄기세포가 구라라고 그리오. 제십의 줄기세포가 구라라고 그리오. 제십일의 줄기세포가 구라라고 그리오. 십일개의 줄기세포는 구라인 세포와 재활용된 세포와 그러케뿐이모였소 (다른 사정은 차라리 없는게 나앗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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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운동을 목격하다'에 이어

지음님의 [대중운동을 목격하다] 에 관련된 글.

윗 글에서 꼭 쓰려고 했다가 빼먹은 것... 또 하나의 대중운동. 장귀연씨 글은 글 자체도 재밌지만, 정말 주목해야 할 건 댓글들이다. DC의 폐인들이 참세상을 공격하러 몰려 온 적은 있었지만, 인사하러 온 것은 처음이 아닐까? 확실히 '국민누나'로 오인(??)받은 것도 단단히 한 몫을 한 것 같긴 하지만...ㅋㅋㅋ 하여간에 그들은 적어도 참세상의 황우석 관련 기사는 보고 가지 않았을까? '민중언론' 참세상과 'DC' 과갤이 연결되는 장면이다. '국민누나(어떤 분이시길래...정말 궁금...ㅋㅋ)'의 과갤에서의 활동, 장귀연씨의 눈팅과 리플 달기에 이은 칼럼 포스팅, 이 또한 대중운동이라 불리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그리고 이들이야말로 '네트워커'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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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운동을 목격하다

황우석 사태에 대해서는 참 관심이 없었다. 요란했던 광기는 이상할 것이 없었다. 다만 익숙한 악몽이 다시 도진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사태가 진정되기 시작한 이후다. 정말로 이상하고 궁금한 것은 광기 그 반대편에 있다. 어떻게 사람들은 그 광기의 도가니에서 그토록 빠르게 헤어나올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진실이 서서히 드러났기 때문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국익'이 최우선일 때 '진실'은 아무런 힘도 없었다. 변화의 단초는 확실히 그 전부터 감지되었던 것이 아닐까? 이른바 '대중파시즘'이 창궐하던 포털과 언론 홈페이지들의 공간 이면에는, 이와는 전혀 다른 공간과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진보블로그는 광기에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이는 단지 진보블로그만의 얘기는 아니다. 내가 본 다른 여느 블로거들의 공간도 황우석을 지지하는 견해가 더 많았을 수는 있어도, 광기와는 사뭇 거리가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공간들도 있었다. "그러나 오래동안 대중을 두려워했던 나는 차라리 희망을 보았다. 그렇게 해일이 거셀 때, 전문기자가 국익을 위해서 진실을 버리자고 노골적으로 선동할 때, 진보적 지식인들이 경악에 찬 목소리로 대중을 질타할 때, 한구석에선 시답잖게 노닥거리면서도 합리와 상식을 잊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대중이었다." - 장귀연, 'PD수첩의 용기, BRIC의 전문성, DC과갤의 상식을 사랑한다' 중 "포기하다시피 한 인터넷에서 청년과학자들이 소통하고 활동하고 있었다. ...... 이데올로기나 정치 이런 것과 관계없이 진실을 찾아내고 있었다. ...... 브릭(BRIC-생물학연구정보센터)에 주목하고, 브릭에서 다시 한 번 정신을 맑게 하고, 그들이 대화하고 소통하는 모습에서 힘을 얻었다. 청년과학자들, 그분들이 영웅이다. ...... 그들이 언론인이고 그들이 지식인이었다." 전규찬, '지식인은 도대체 뭐 하는 작자들인가' 중 "대략 지난 일주일동안은 먹고 살기 위해(?) 읽어야 하는 책들까지 모두 제쳐놓고 브릭에 들어가 살았다. 이 사태를 이해하는 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그래도 진실이 모든 걸 앞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직 꽤 있다는 게 소득이라면 소득이다. 아니, 소득 정도가 아니라 이것이야말로 희망이다." 신기섭, '어떤 사태에 대한 짧은 기록' 중 그들은 광기의 흐름에 휩싸이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생각을 내뱉고 서로의 정보를 교환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흐름이 뒤바뀌었다. 광기의 흐름 그 자체였던 '대중'과, 그 흐름을 조용히 거스르다 끝내 흐름을 뒤바꿔 버린 '개인'들 그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들은 다른 사람들일까? 대중파시즘의 진원지라고 지목되었던 것도 인터넷이지만, 이를 뒤엎은 개인들이 모여 있던 곳도 인터넷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온 이야기들이 퍼져나갈 수 있었던 계기도 인터넷이다. 두 공간에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두 공간의 차이, 그것이 궁금하다. 브릭에서 글을 쓰던 사람들이 그들이 이러한 사태를 대비하고 준비했을리야 만무하다. 광기의 휩싸인 대중들을 굳이 설득시키기 위해서 글을 쓴 것도 아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그들의 스타일대로 그들이 연구실에서 토론하는 방식대로 얘기했을 뿐이다. 브릭은 원래 그런 공간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수많은 대중에게 생물학 교양과 과학적 방법론에 대해 교육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디씨 과갤은 또 어떻게 봐야 할까? 그곳은 놀이터다. 파시즘이 놀이터 앞에서 멈췄다. 그곳은 바깥 세상과는 무관했냐 하면 그런 것은 또 아니다. 그들은 황우석과 관련된 광기를 놀이감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단지 놀이 이상을 한 사람들이 있다. 다음을 보는 순간, 나는 외쳤다. '대중운동이닷! 정말 오랜만이군.' melona로 살았던 며칠 지난 대선에서 오마이뉴스는 조선일보를 눌렀지만, 브릭과 과갤이 주된 정보의 원천이 되는 지금은 또 다른 국면이지 않을까? 그리고 이러 저러한 공간들이 혼재하는 세상에서 지식인, 언론인의 역할, 대중과 전위, 그리고 대중운동의 개념은 다시 정립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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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버시 보호도 이제는 능력이다?

'프라이버시 보호'라는 구호는 대부분 침해에 대한 방어로서 기능해 왔다. 쓰나미 처럼 밀려드는 개인정보 침해 사건들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잠시 시간을 늦추는 것에 만족할 수 있을 것인가? 프라이버시의 영역이 먼저 존재하고, 이를 수비하는 것, 말하자면 프라이버시 보호의 옵트아웃 방식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널리 퍼져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반대로 프라이버시의 영역은 없다는 것을 가정한 채, 반드시 보호해야 할 영역을 별도의 보호장치로서 보호하는 옵트인 방식이 시작되고 있는 것일까? 이제 막 오픈하는 서비스다. 디지털 시크릿, 스위스박스 프라이버시 보호도 이제는 능력이다. 프라이버시도 이제는 구매해야 한다. 돈 없는 자여, 안타깝지만 프라이버시는 없다. 장사는 될 거 같다. 참으로 '자본스러운'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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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언제 '서식'을 찾을까?

지음님의 [아. 이 놈의 주민등록번호] 에 관련된 글.

'서식'이라는게... '문서의 형식'이라는 뜻일텐데... 이게 참 별 거 아닌 거 같지만, 생각보다는 꽤나 중요할 때가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서식은 우선 사람들의 행동을 규정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서식에 맞춰 항목을 채워넣으면서 왜 이 서식은 이렇게 되어 있을까? 왜 이 항목은 있고 다른 항목은 또 없는지 등을 의심하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죠. 그리고 사실 처음 보는 종류의 서식은 채워넣는 것 조차 힘이 듭니다. 정확히 어떤 걸 요구하는 지 모르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비슷한 걸 몇 번 해보다보면서 익숙해지는 거죠. 주민등록증 처음 만들 때 열손가락 지문날인 하는 것도, 사실 주민등록법도 아니고 시행령 한 귀퉁이에 붙어 있는 서식이 그러니까 그런 거지 법률에 정확히 규정되어 있는 건 아니라죠. 서식이 주어지는 경우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찾아야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예전에 한 번 이력서 쓸 때 한 번 인터넷을 뒤져 봤고, 일하면서 재직증명서 따위를 찾아 본 적이 있습니다. 다들 경험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서식만 팔아서 돈버는 사이트들도 있는 것이겠죠. (사실 왜 서식이 유료가 되는 건지도 따져 볼 필요가 있는 거 같아요. 서식 따위 그 회사가 직접 만든 것도 아니고, 단지 떠도는 서식을 모았을 뿐인데 그걸 유료로 팔다니요. 나 참.) 하튼 사람들은 보통 문서를 어찌 써야 할지 모를 때 서식을 찾는 것 같습니다. 서식을 찾는 것 자체가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쓰나를 참고 하는 셈이니까요. 즉 눈치를 봐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찾죠. 그리고 또 한가지는 법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 있는 문제를 다룰 때 찾게 되는 거 같습니다. 뭔가 상대가 의심쩍고, 만일에 사태에 대비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찾는 것이겠죠.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어떨 때 서식을 찾을까요? 뭐 대충 짐작이야 가겠지만... 궁금하지 않나요? 이번에 민간영역 서식에서 주민등록번호가 얼마나 많이 쓰이고 있나를 조사하면서, 가장 유명한 서식 판매 인터넷 사이트를 수천번 들락거렸습니다. 눈도 아프고, 손목에 등허리까지 땡기지만... 다소 재밌는 부수입을 얻었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서식 순위를 내봤습니다. 먼저 머리 속으로 생각을 잠시 해 보신 후에....


1. 회사 서식 순위 서식이름 조회수 1 이력서양식 749451 2 기본적인 이력서 양식(기본) 506766 3 이력서 양식(공무원) 492775 4 재직증명서(기본) 483265 5 사직서 438455 6 사직원1 434546 7 국문 자기소개서 무료샘플(컴퓨터관련-신입) 367303 8 이력서 컨테스트 대상 수상작 샘플 308950 9 이력서 컨테스트 우수상 수상작 샘플 306450 10 일반견적서 271945 11 이력서 샘플(대졸 신입 상세) 261884 12 [엑셀자동화서식] 세금계산서(부가세선택) 237166 13 위임장 200925 14 이력서 샘플(일어교사) 198713 15 급여지급명세서1 153270 16 사업계획서 작성요령 137616 17 견적서 132052 18 자기소개서 샘플 생산,자재관리(전자)_경력 121276 19 업무일지1 120570 20 연봉근로계약서 95638 다른 모든 서식들에 비해서 회사서식이 차지하는 비율이 너무 커서, 따로 순위를 냈습니다. 사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가 1위를 차지할 것이라는 건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사직서가 그 뒤를 바짝 쫓고 있다는 건... 좀 웃기지 않나요? 참고로... 수만 건의 서식들 중에서 상위 20개가 차지하는 조회수의 비율은 무려 34%에 육박합니다. 그러니까 이력서와 사직서가 차지하는 비율은 상당한 거죠. 그 아래에도 조금씩 형식이 다른 이력서 등이 상당히 많이 나옵니다. 2. 나머지 서식 순위 서식이름 조회수 1 금전차용증서 291689 2 차용금 증서 245271 3 부동산임대계약서(전세) 238021 4 부동산임대차,월세계약서 176495 5 내용증명 샘플서식 165998 6 위임장,법정대리인동의서 131431 7 별표제4호통신판매업휴업폐업영업재개신고서 125052 8 재직증명서 108005 9 차용증 102195 10 사업계획서 92627 11 동거계약서1 86624 12 내용증명이란 81364 13 이혼신고서(개정 2003.9.17) 67131 14 영수증 60367 15 전세계약서 57897 16 각서(신혼부부) 57032 17 인감증명발급위임장(2003.3.26 변경) 54730 18 동업계약서 샘플 54023 19 재직(취업)증명서 53517 20 고소장 양식 50914 21 부가가치세법 제11호 세금계산서 43491 22 탄원서 43136 23 팩스용 표지 41960 24 각서(약속)-부동산 41573 25 2003년 월별 달력 41006 26 부고장 40147 27 경력(재직)증명원 39826 28 재직증명서 39354 29 내용증명(초상권 침해를 받은 경우) 39318 30 부동산매매계약서 38892 31 이행각서 38184 32 건설공사도급계약서(인테리어) 37693 33 표준임대차계약서(전세계약서) 37425 34 견적서-건설관련 37072 35 자동차 매매계약서,양도양수 36771 36 부동산위임장 36133 37 레포트표지(서울대) 34565 38 내용증명(빌려준 돈 반환 청구에 관한 건) 34443 39 운전경력증명서발급신청서 33925 40 부동산매매계약서 33917 41 가계부 33573 42 내용증명-부동산매매계약해약통보(해제통보) 33290 43 탄원서예제 32605 44 위임장양식 31914 45 민원서류 신청서 (위임장),국세청,세무소 31627 46 건설공사하도급계약서 31260 47 내용증명 샘플(전세금 반환 요구서) 30789 48 자기소개서,학업계획서 29732 49 별지 제37호 서식 근로소득자소득공제신고서 29726 50 표준각서 29330 내용을 보시라고 50개까지 올려봤습니다. 여러분들 보시기에는 어떤가요? 제 느낌은 이렇습니다. 1. 하튼 압도적으로 돈이 문제입니다. 그것도 목돈. 차용증 쓸 정도로 큰 돈. 어떤 경우에 그 돈이 필요한 가는 대충 뒤에도 나옵니다. 집과 차가 문제죠. 아 물론 애도 있겠습니다만. 2. 그리고 돈과 무관해 보이는 듯 하면서도, 아주 상위에 랭크되어 있는 세가지가 있습니다. 하긴. 뭐 이것도 돈과 관련된 문제다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하튼 같이 사는 문제입니다. 정말 재밌는 건... 결혼보다도 이혼이 상위에 있고... 이혼보다도 동거가 상위에 있다는 거죠. 저는 결혼 할 때 서약서 낭독하는 건 봤지만, 각서 쓰는 건 별로 못들어봤는데... 꽤 쓰나 봅니다. 이혼 할 때야 뭐 당연해 보입니다. 남는 건 법적인 문제와 금전적인 문제... 쩝. 동거의 경우는 의외였습니다. 그래서 기사를 찾아 봤더니만..... 있네요. 인터넷 계약서로 보는 신세대 연애관 다양한 가족형태가 증가하고 있다는 게 다시 한 번 실감이 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러한 가족형태가 상당히 불안한 위치에 처해 있고, 아무런 사회적 지지도 없다는 상황판단이 당사자들 사이의 계약의 형태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특히 여성의 경우는 더욱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구요. 동거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계약'을 통해서 서로의 역할과 의무를 규정하고 시작한다는 것은 저로서는 분명 긍정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왜 둘 사이의 관계를 규정할 때 일반적인 경우를 참고하기 위해 서식을 찾았어야만 했을까? 또 그것이 왜 주민등록번호까지 써넣은 법적인 형태를 가졌어야만 했는가?는 의문입니다만. 또 구체적인 현실에서는 과연 어떤 모습일지도 참으로 궁금합니다. 동거계약서를 다운받은 사람들의 경우 여성과 남성의 비율은 과연 몇 대 몇일까? 혼자서 다운받았다면, 실제로 상대방에게 그걸 내밀은 사람들은 또 얼마나 될까? 그걸 쓰는 과정은 그들에게 유쾌한 경험이었을까? 그 계약서는 실제로 효력을 가졌을까? 지루하고 단순한 작업 끝에 얻은 결과라서 그런지 이런 저런 생각에 그저 재밌네요. (표로 예쁘게 정리하고 싶어서 처음으로 나모 웹에디터도 써봤는데... 잘 안되네요. 일단 포기. 뭐가 문젤까?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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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놈의 주민등록번호

올해는 주민등록번호와 함께 시작해서 주민등록번화와 함께 끝을 맺는가 봅니다. 올해 초에는 3차에 걸친 '공공기관 홈페이지 주민등록번호 노출 실태조사'를 했고, 지금은 '주민등록번호 사용 실태 조사 프로젝트'를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올해 초에 한 일이 나름대로 성공적이어서 지금하고 있는 일을 하게 된 것이기도 하지만요. 이 일이 어떤 일인가 하면요... 행인님이 하는 일과 같은 일입니다. 행인님의 [내가 미쳤지...] 에 관련된 글.

순 데이터와의 싸움입니다. 사실 결론은 이미 나와 있거든요. "주민등록번호는 무지하게 많이 쓰이고 있다. 그런데 쓰지 않고서도 잘 살 수 있다. 쓰지 말자." 쌓여있는 데이터에서 어떻게 의미있는 데이터를 뽑아낼 것인가가 관건입니다. 쌓여있는 데이터라는 게.... 공공부문 서식 : 16233개 민간부문 서식 : 38544개 공공부문 데이터베이스 : 1077개 설문 대상 민간/공공 기관 : 371개 뭐 대충 이런 식입니다. 서식들은 일일이 확인하면서 주민등록번호가 있는지 없는지를 봐야 하는 거죠. 일일이 웹페이지를 열어서 있나 없나 확인하고 체크하는 작업인데요... 이걸 좀 쉽고 빠르게 해보겠다고 손가락 세 개만 놀려서 할 수 있도록 했는데... 그것도 마감에 밀려서 하루에도 몇천건씩 반복작업을 하니까... 아직도 등 근육까지 땡기네요. 지난 주 내내 전화돌리고, 서식보고, 엑셀-엑세스 돌리고... 정신이 하나도... 블로그 못 쓴 핑계를 좀 길게 써봤습니다. 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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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키퍼...

아다치 미츠루, [진배] 中 오늘이 처음은 아니지만, 문득 생각이 났다. "몇 점을 따든 그 이상의 점수를 잃으면 패배야. 하지만 설령 점수를 적게 따도 점수만 안 주면 지진 않아. 이기는 것 보다 지지 않는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포지션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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