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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칵테일 파티가 아니다!!

중국의 마오가 했다는 말이다.

 

한가로이 농담이나 따먹으면서 음풍농월은  물론이고

 

도덕이나 절차를 따지는것을 경계하는 말이다.

 

혁명과 관련된 두가지 영화를 보았다.

 

하나는 칠레의 쿠데타를 다뤘던 '산티아고에 비는 내리고'와 독일 적군파를 다룬 '바더- 마인호프'

 

대통령 궁에서의 아엔데

 

 

 

 

매일 같이 거리에서는 국회에서는 그리고 주변에서는 계급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칵테일 파티는 개인적으로 친구들과 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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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살은 싫어!!!

일요일 오후에 시작된 몸살로 이틀을 몸져 누워있다가

 

이틀만에 출근을 했다.

 

주위에서는 신종플루 아니나며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두려워한다.

 

예전 누가 마스크만 썼다고 택시가 승차거부를 했다고 하던데...... 쩝......

 

신종플루던 기존의 플루던 별반 차이없어보이는데............ 쩝........

 

그나저나 아파트 투기 몰빵 인플루엔자는 서로 걸려들고 싶어하니........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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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크를 막아선 그 시민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탱크를 막아선 그 시민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중국과 관련해서 떠오르는 기억 두 가지가 있다.

어렸을 때 동네에는 화교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전족을 해서 뒤뚱거리며 걷는 호호백발의 할머니와 흔히 ‘짱깨’라고 불렀던 말끝마다 ‘...... 해’ 라고 했던 중국집 주인 그리고 우리와 방학이 일치하지 않았던 화교학교 학생들... 우리가 국군의 날과 개천절 그리고 한글날이 몰려있어 10월 달을 기다렸다면 화교 학생들은 10월 10일 신해혁명 기념일인 쌍십절을 기다리면서 우리가 학교가 가던 그날 그 얘들은 동네 골목에서 신나게 놀았었다.

다른 하나의 기억은 대학 신입생 때의 일이다. 89년 5월과 6월의 천안문 사태가 일어났을 때 구내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4학년 선배중 하나가 ‘중국 대학생들의 무책임한 난동’ 운운에 1학년 신입생임에도 발끈하면서 나름대로 민주주의며 자유를 들어 당시 중국의 대학생들을 옹호했었다.

 

 

쌍십절과 국경일

1911년 10월 10일 부패한 만주족 봉건 왕조를 타도하고 공화제 정부를 수립한 신해혁명으로 새로운 중국의 역사는 시작이 된다. 반봉건 반식민지의 상황 속에서 신음하고 있던 많은 중국인들에게 신해혁명은 앞의 두 가지 모순의 지양을 위한 서막이다. 그러나 서양, 특히나 미국의 민주주의에 경도되었던 손문을 중심으로 하는 일부의 지식인들은 거대한 반동과 외세의 물결에 움츠러들고 반혁명의 나락으로 곧 떨어지게 된다. 원세개의 친위 쿠데타와 지역에 할거하던 군벌들의 실질적인 봉건 체제로의 퇴행 그리고 영국과 독일 그리고 새로운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움하던 일본의 수탈과 착취로 중국의 인민들은 ‘민주주의’ 와 ‘자유’의 세례를 받기도 전에 이전 구체제의 모순이 더욱 심화된 상태로 ‘아시아의 암덩어리’ 이자 숙주 역할을 해야만 했다.

당시 아시아 최대의 항구이자 첨단의 도시였던 상해는 아울러 범죄와 타락 그리고 마약의 소굴로 그 악명을 떨쳐야만 하였다. 그러다 1917년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에 고무된 일단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사회주의사상은 이런 ‘아시아의 매음굴’ 상해의 어느 빈민가에서 결성된 중국 공산당을 통해 급속하게 인민들 속으로 파급이 된다. 희망을 찾는 인민들에게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리라.

장개석의 음모와 배신 그리고 학살로 인하여 급속도로 세력이 위축이 되고 급기야 중국 남부의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하던 공동체에 대한 대규모 토벌작전이 개시가 되면서 전설이 탄생하게 된다. ‘대장정’ 진시황의 만리장성을 훨씬 능가하는, 지금도 오지로 잦은 재해로 인해 도로가 단절되곤 하는 지역을 종횡무진하면서 수많은 눈 덮힌 설산과 급류 그리고 초원과 습지를 맨발로 각종 무기와 식량을 짊어지고 질병과 배고픔을 견디며 수많은 희생을 거쳐 북서부의 척박한 농촌 지역으로의 ‘후퇴’..

이 와중에 토착 사회주의 사상과 전술을 견지한 마오를 중심으로 하는 혁명 1세대의 진영이 갖추어지고 나름의 전략과 전술 그리고 기율을 토대로 이전의 상해 등의 도시 중심의 기존 전략에서 탈피, 농촌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식 혁명 전술이 도모되면서 제 2의 흥기를 맡는다. 만주와 중국 북동부를 장악하던 일본 제국주의가 45년 8월 무조건 항복하게 되면서 중국 남서부에 거점을 두었던 장개석 국민당 정부와의 내전이 시작된다.

1911년 이후 인민들은 국민당 정부의 부패와 무능력 그리고 외세 의존 대신 기율과 희생을 몸소 실천하는 중국 공산당에 신뢰를 보내게 되고 드디어 1949년 10월 1일 전제 왕권의 상징이던 자금성의 정문인 천안문에서 새롭게 정비된 광장을 마주보고 역사적인 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게 된다.

 

 

짧았던 영광 그리고 고난과 모순의 아수라장

 

부패에 선수였던 국민당의 수뇌부와 군대는 후퇴에도 선수였다. 군함에 엄청난 명나라와 청나라는 물론 그 이전 전제 봉건 시절의 유물을 한껏 싣고 일찌감치 꽁무니를 뺐던 장개석, 그리고 그의 부하들인 국민당 장군들 역시 미국으로부터 받은 군수물자를 ‘적’들인 인민해방군에게 팔아 자신들의 부하들의 생명을 사지로 몰았다. 결국 바다 건너 조그만 대만에 본거지를 틀고 뒤의 미국만을 믿고 택도 없는 본토수복의 기치를 호언장담하고 있을 때 ‘인민의 해방군’들은 서쪽의 이슬람교도들 지역과 히말라야 산맥의 조용한 불교국가 티벳을 ‘해방’하기 위해 저항하는 그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애초에 ‘만주족에 의한 청나라 타도’라는 신해혁명의 기치에서 보이듯이 철저한 민족주의적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쇼비니즘이 결합된 혁명의 물결은 49년 인민공화국의 수립이후 영토팽창의 작태에서도 들어나듯이 처음부터 잘못 끼워진 단추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민공화국 수립 이전의 반봉건 반식민지 상태에 대한 지양이 진행되면서 50년대 빠르게 사회가 회복이 되고 인민들에 대한 후생 개선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경험의 부족, 잦은 재해 그리고 급속한 사회의 질적 변화로 인한 혼란은 이전 잠시 동안의 회복의 순간을 발목 잡게 만들었다.

경제 성장과 정부와 당의 거대화로 인한 각종 잡음과 퇴행이 횡행하는 가운데 문화대혁명이 66년에 시작이 되면서 76년 마오의 사망까지 10년간의 모색과 후퇴, 혁명과 반혁명의 시대가 지속이 된다.

하나의 국가라기 보다는 대륙이라고 불릴만한 인구와 영토를 가지고 다양한 기후와 풍부한 자원 그리고 풍요로운 토양을 가진 중국은 인민들에게는 고통의 세월이 대부분이었지만 권력을 가지고 있던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특별잉여를 끊임없이 창출할 수 있었던 수천년의 ‘기회’의 땅이었다.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 이후 십 여년의 시간이 지난 60년대 역시 소수 당원과 정부의 관리들의 특권이 서서히 발생하면서 평등의 기율이 무너지던 즈음 정치 경제적 혁명이후의 새로운 ‘문화’부문의 혁명이 계획되고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처음의 시작과는 달리 혁명의 말미는 시들하다. 어떻게 끝이 났는지 그리고 어떻게 마무리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없고 혁명 기간 몰락하고 퇴출되었던 혁명의 1세대들이 조용히 그들의 추종자들과 복귀를 하면서 권력을 거머쥐고 4인방에 대한 공개 재판을 방송중계하면서 모든 혁명의 과오를 그들에게 투영하면서 과오에 대한 반성과 도약의 기회가 막혀번린다.

 

카우보이 모자와 크로와쌍

71년 미국의 닉슨의 핑퐁 외교보다도 더 극적인 장면이 79년 미국에서 연출이 된다. 중산복의 덩샤오핑이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대통령의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 목장에 나타났다. 당시 최고 지도자였던 덩샤오핑은 미국의 카터와 나란히 미국 팝가수의 콘서트에 얼굴을 비추었고 카우보이 모자를 자연스레 쓰면서 죽(竹)의 장막을 거두었다. 유엔 연설 이후 덩은 돌아오는 길에 프랑스 파리에 들러 어렸을 때 파리에서 먹었던 크로와쌍을 잊지 못해 한 바구니 싸들고 와서 혁명 1세대들에게 돌렸다. 혁명의 이상과 고귀함에 스스로 박해받았다고 생각하는 그들은 이제 과거의 회상을 넘어서서 과거로의 회귀를 꿈꾸고 보상받기를 갈망한다. 대다수 인민들과는 격리되는 구중궁궐에 집단 거주하면서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는 여느 노회한 자본가로 탈바꿈한다.

개혁 개방이라는 이름으로 혁명의 성과를 무화시키고 자본주의 따라잡기를 넘어서 자본주의로의 진행에 박차를 가한다. 80년대 도시를 중심으로 불어닥친 소비의 광풍은 도시와 농촌은 물론이고 도시민들 사이에 심한 격차를 불러왔고 개방과 개혁의 광풍속에서 몰락했던 자본가 계급을 대신하여 사회주의정치와 자본주의 경제의 사생아인 새로운 자본가 계급을 형성했고 과거에 타도와 지양의 대상이었던 착취가 심화되는 가운데 격차와 갈등은 80년대 중반 심화된다..

문화대혁명 10년 간의 고통과 박해에 대한 보상을 받으려는듯 복귀한 당간부와 관료들은 게걸스레 국영기업을 사유화하고 외국 자본을 유치하여 장막 뒤의 착취자가 되었다. 노동자들은 물론 지식인들 그리고 대학생들에 대한 우려와 걱정은 비등하게 되고 결국 우려는 현실로 전화하여 89년 봄 북경 서북쪽의 대학가를 중심으로 교내에서 진행되던 토론과 공개비판이 담장을 넘어 혁명의 성지인 천안문 광장으로 옮겨지게 된다.

 

 

탱크와 시민 그리고 다시 천안문 광장

북경은 봄은 뚜렷이 대비된다. 초봄의 황사는 사람들의 눈과 호흡기를 고통스럽게 한다. 그러나 비가 내린 후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면 청명한 하늘과 길가의 회나무에 녹음이 지면서 뜨거운 여름을 준비하게 된다. 이런 89년 늦은봄 천안문에 학생과 지식인 그리고 노동자들이 모이게 되었다. 개혁 개방의 십년간의 퇴행과 모순에 대한 체험적인 토로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여러 경로를 통한 정부와의 대화 시도가 이뤄진다. 실제로 대화는 방송으로 중계되기도 하였으며 수 많은 다른 지역과 도시의 대학생들은 북경 천안문으로의 상경투쟁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런 순진한 발로와 대조적으로 복귀한 혁명 1세대들과 그들의 후손으로 권력을 세습받고 있었던 2세들은 대학생과 시민들의 자유와 민주주의 요구를 문혁기의 쓰라린 고통과 오버랩시켰다. 아니, 곧바로 목숨을 노리는 위협으로 여겼다.

상황 초기 협상과 타협의 분위기는 시위대들의 힘이 약해질 무렵 강경책으로 돌변하였다. 심지어 미술대학 학생들의 집단 창조물인 ‘민주주의의 여신’ 조소작품이 미국 자본주의 추종하는 무모한 집단들의 ‘자유의 여신’으로 선전이 되면서 인민해방군이 출동하고 북경에 대한 계엄령이 전격 단행되면서 시민들의 육탄 저지와 설득에도 불과하고 6월 4일의 대학살은 감행이 된다.

당시 CNN을 비롯한 서방 언론에의해 보도된 사진과 화면을 보면 진압하려던 탱크를 가로막은 비닐 봉지를 든 용감한 시민을 볼 수 있었다. 오래 기억되는 장면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현재까지 없다고 한다.

급속도로 천안문은 잊혀졌다. 빛나는 경제 성과로 기록되는 90년대를 지나면서 사회의 경제적 모순과 적대는 쇼비니즘으로 포장되었으며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최고조로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아우르는 아(亞)제국주의국가로 발돋움을 하려하고 있다.

 

 

붉은 천안문의 성벽과 허무한 구호

다가오는 10월 1일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60주년이 되는 날이다. 아마도 여름부터 준비된 성대한 기념식이 바로 피로 얼룩졌던 천안문 광장에서 열릴 것이다. 중산복 대신 양복을 입은 중국공산당의 지도자들과 관료들은 천안문 정면의 단상에 서서 호기롭게 인민들을 너그러이 보면서 광장과 천안문을 사이로 지나는 장안대가에는 각종 신무기들과 자동소총을 든 ‘인민해방군’들이 지나갈 것이며 북경의 상업가인 조양구의 호텔은 기념 특식으로 노동자의 몇 달치 월급에 해당하는 메뉴를 내걸고 중국의 자본가들을 유혹할 것이다.

혁명기간 산화한 이름없는 혁명가들을 위해 백옥과 대리석 등으로 조각한 천안문 광장의 인민영웅기념탑은 여전히 조명을 받으며 군인들에 의해서 엄격히 출입이 통제될 것이며 바로 뒤 마오 기념관에 유리관 안에 누워있는 마오는 소리없이 중국 각지에서 온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들을 눈을 감고 환영할 것이다.

광장 너머 중남해에 은거하는 새로운 상위 자본가들은 군대와 경찰들의 호위속에 한달 월급만큼 비싼 고급 담배를 태우며 ‘인민공화국’ 수립 60주년 기념사를 준비하지 않을까?

 

행사를 위해서 천안문 광장은 물론 북경 시내의 통행에 대한 검문 검색은 물론이고 남루한 복장의 인민들에 대한 대테러 작전 수행이라는 명목의 무자비한 인권 탄압은 자행될 것이다. 10월 10일 행사 당일 날 수 백만의 잘 차려입은 북경의 시민들은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북경의 가을 하늘 아래에서 최신식 미사일과 탱크로 무장한 ‘인민해방군’의 사열식을 값싼 민족주의와 패권적 애국주의와 자기파괴적 민족주의에 기대어 환호할 것이다.

 

잘못 끼워진 단추

중국의 20세기의 현대사는 아마도 ‘잘못 끼워진 단추는 중간에 아무리 제대로 채우려해도 채워지지 않고 처음부터 다시 채워야 한다’ 라는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당연한 명제의 실례일 것이다.

애초에 ‘고소영’, ‘강부자’로 조롱받으면서 출범한 이명박 한나라당 정권은 우려와 염려에 부응하여(?) 반 서민, 반 민중적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다.

유모차를 끌고 거리에 나선 가정주부들에 대한 무차별적 기소와 살권리를 인정해 달라는 세입자들에게는 불세례를 서슴치 않았다.

어디 뿐인가? ‘학교자율화’라는 명목으로 학교를 통째로 사교육 시장의 먹이감으로 내던지더니 급기야 시국선언을 한 교사들에 대한 이메일 압수수색은 물론이고 은행계좌에 대한 금융 거래 내역까지도 조사하면서 전방위 압박을 전개하고 있다.

환경파괴를 염려하는 국민들의 여론을 개무시하고 삽하나로 경제를 살리겠다는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토건공화국으로 나라를 공사판으로 만들고 있으며 친정부, 친정권, 친한나라당의 나팔수로 모든 언론을 단일화(?)하기 위한 사전포석으로 미디어법 날치기 감행을 하면서 흡사 조지오웰의 1984에 나온 ‘빅브라더’가 되려고 하고 있다.

 

 

처음부터 다시 채워야

최근들어 ‘친서민정책’을 내세우면서 유화적 인물로 총리를 갈아치우는 등 양의 탈을 쓴 늑대마냥 둔갑을 해서 여론을 호도하려고 하지만 그 본질을 벗어날 수 있을까?

잘못 채워진 단추의 우화를 통해서 결국 해결책은 하나 밖에 없으며 중간은 없다라는 것은 자명하다. 처음부터 다시 채워야 한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중간적 타협점은 없는것 같다. 결국 잘못 채워진 단추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피해는 모든 피해는 사회 구성원 전체의 몫이 될 수 밖에 없다라는 또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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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림(陳淋)의 사랑은 사랑일뿐.....

10월 마지막날

 

북경에서 내나이 비슷한 여가수가 투신자살을 했다.

 

그녀의 대표곡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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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차오(唐朝)의 인터네셔날가

 

國際歌 〉

       起來 飢寒交迫的奴隸
      起來 全世界受苦的人

      일어나라! 기아와 추위의 노예들이여!

       일어나라! 전세계의 고통받는 사람들이여!
     

      滿腔的熱血已經沸騰 要為真理而鬥爭
      舊世界打個落花流水 奴隸們起來 起來
     
온몸은 뜨거운 피가 이미 진리를 위한 투쟁을 위해 솟구친다.

       구세계는 타도되어 떨어지는 꽃이 되어 흐르는 물에 흘러가고 노예들은 일어나고

       있다.

     

      不要說我們一無所有 我們要做天下的主人
      這是最後的鬥爭團結起來到明天
     
우리들이 아무것도 없다고 얘기하지 말자

       우리는 세계의 주인이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최후의 투쟁이다. 단결하여 내일을 위해 일어나자.

     

      英特納雄耐爾就一定要實現
      這是最後的鬥爭團結起來到明天
       인터네셔날은 꼭 곧 실현된다.

        이것이 우리의 최후의 투쟁이다. 단결하여 내일을 위해 일어나자

     

      英特納雄耐爾就一定要實現
      從來就沒有什麼救世主 也不靠神仙皇帝
       인터내셔날은 바로 실현된다.
       

        구세주는 없었으며 신이나 황제에게 기대지 말라.

     

      要創造人類的幸福 全靠我們自己
      我們要奪回勞動的果實 讓思想衝破牢籠
    
  전인류의 행복을 만드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고

       우리는 노동의 결과를 다시 회복하고,조롱안에 갇힌 사상을

       빼낸다.          

 

      快把那爐火燒得通紅 趁熱打鐵才能成功
      這是最後的鬥爭團結起來到明天
   
   저 이글거리는 화로의 불속에서 달궈진 철을 담금질해야

       강철이 되듯이

       이것이 우리의 최후의 투쟁이다, 내일을 위해 단결하여 일어나자.

      英特納雄耐爾就一定要實現
      這是最後的鬥爭團結起來到明天
     

      英特納雄耐爾就一定要實現
      最可恨那些毒蛇猛獸吃盡了我們的血肉
     
인터네셔날은 꼭 곧 실현된다.

       이 저주스러운 독사와 맹수들이 우리들의 피와 살을 다 먹어치웠으니

     

      一旦把他們消滅乾淨鮮紅的太陽照遍全球
      這是最後的鬥爭團結起來到明天
 
       저들이 사라지면 영롱하고 불은 태양은 전 지구를 비추리라

         이것이 우리의 최후의 투쟁이다. 단결하여 내일을 위해 일어나라.

     

      英特納雄耐爾就一定要實現
      這是最後的鬥爭團結起來到明天
      英特納雄耐爾就一定要實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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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최의 혈액형

 

 

Группа крови(혈액형)

따뜻한 이 곳, 그러나 거리는 우리의 발자국을 기다린다.
군화위엔 별빛의 먼지...
푹신한 소파, 십자나사, 제때에 당겨지지 않는 방아쇠
햇빛 비춰지던 시절이란 눈부신 꿈속에나 있을 뿐

치뤄야 할 댓가가 아무리 크다해도,
헐값의 승리는 바라지도 않는다.
전우의 가슴을 밟고 싶지 않기에...
너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단지 너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그러나 하늘 높이 솟은 별은 나를 전장으로 불러낸다.


 

내 소매 위에는 혈액형
내 소매 위에는 나의 군번
전투로 향하는 내게 행운을 빌어주게
이 들판에 남게되지 않기를
이 들판에 남게되지 않기를

전투로 향하는 내게 행운을 빌어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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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지미르 비소츠키의 야생마

영화 백야에 삽입곡

 

영화는 80년대 전두환 정권의 반공 영화였지만

 

중간 주인공이 옛애인과 마린스키 극장에서 관객없는 무대에서

 

강렬한 발레를 할때 나왔던 이 노래는

 

영화의 외면적 주제와는 상관없는 인간의 자유를 그리는 듯 했다.

 

바르시니코프는 죽었다.

 

야생마(뒷걸을 치는 말)

 

블라지미르 비소츠키

 

나는 벼랑과 아슬아슬하게 맞닿은 협곡을 지나간다.
나는 내 말에 박차를 가하고 매섭게 채찍질한다.
숨이 가빠 바람을 마신다. 안개를 삼킨다.
나는 길을 잃고 죽음의 황홀경에 빠질 것 같다.
말아, 천천히, 조금만 천천히 가자꾸나.
너는 내 채찍 소리가 듣기 싫겠지.
내 운명의 말은 자기들 기분 내키는 대로 움직인다.
내겐 생명의 시간이, 일을 마칠 시간이 없다.
나는 내 말에게 물을 먹이고 내 노래를 마치리라.
그리고 잠시나마 그 강가에 머물며 숨을 돌리리라.
나는 죽어간다. 한 포기 이삭처럼 폭풍우는 나를 쓰러뜨리리.
새벽에 썰매가 나를 눈 속으로 끌고 가리.
말아, 부탁하자, 조금만 그 걸음을 늦출 수 없겠니.
마지막 피난처에 도달할 때까지는 내 최후의 날을 늦춰다오.
말아, 천천히, 조금만 천천히 가자꾸나.
너는 내 채찍 소리가 듣기 싫겠지.
내 운명의 말은 자기들 기분 내키는 대로 움직인다.
내겐 생명의 시간이, 일을 마칠 시간이 없다.
나는 내 말에게 물을 먹이고 내 노래를 마치리라.
그리고 잠시나마 그 강가에 머물며 숨을 돌리리라.
신에게 초대받으면 우리는 지체하지 않고 도착해야 한다.
천사들은 왜 그토록 적의에 찬 분노를 노래하는가?
종은 왜 끝없이 오열하는가?
나는 내 말에게 울부짖는다, 속도를 좀 늦춰줄 수 없느냐고.
말아, 천천히, 조금만 천천히 가자꾸나.
너는 내 채찍 소리가 듣기 싫겠지.
내 운명의 말은 자기들 기분 내키는 대로 움직인다.
내겐 생명의 시간이, 일을 마칠 시간이 없다.
나는 내 말에게 물을 먹이고 내 노래를 마치리라.
그리고 잠시나마 그 강가에 머물며 숨을 돌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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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ors 의 Strange Days

 

 

 

Strange days have found us
Strange days have tracked us down
They're going to destroy
Our casual joys
We shall go on playing
Or find a new town

Yeah!

Strange eyes fill strange rooms
Voices will signal their tired end
The hostess is grinning
Her guests sleep from sinning
Hear me talk of sin
And you know this is it

Yeah!

 


Strange days have found us
And through their strange hours
We linger alone
Bodies confused
Memories misused
As we run from the day
To a strange night of stone

 

파리의 페르라셰즈 묘지에 가면

 

1871년 파리 쿄뮨 당시의 코뮤나르들이 학살당한 벽이 서있다.

 

그 벽에 가기 전

 

유난히 꽃들이 떨어지지 않고 놓여 있는 무덤이 있는데 바로

 

짐 모리슨의 무덤이다.

 

마약의 환각을 빌어

 

뭔가 모른 위험, 고통, 낯설음의 압도를  표현한 곡

 

갑자기 복고 풍이 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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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본 오늘날의 중국의 초상

영화로 본 오늘날의 중국의 초상

은하철도

 

올해 8월은 무더운 날씨만큼이나 힘들고 짜증이 났다. 장마철과 더불어 시작된 ‘촛불’의 주춤거림에 기다렸다는 듯이 시작된 정권의 촛불 탄압, 그리고 베이징 올림픽의 시작과 더불어 불붙은 올림픽 광풍은 마치 14억 중국에서는 올림픽이외에는 다른 사건들이 일어 나지 않는듯 그리고 매일매일의 올림픽 출전 선수가 획득하는 메달의 갯수와 색깔만이 남한에서의 모든 사람들의 관심과 존재 이유인 듯 했다. 천억의 돈을 들여 연출했다는 장이모우(張藝謀)감독의 개막식은 엄청난 물량공세와 거대한 스케일에 따른 화려함으로 압도하였고 이 압도와 경탄의 이면에 중국의 전세계를 향한 중화주의의 선전포고를 보여 주었다.

2008년 현재 중국은 북경 올림픽 주경기장의 화려함이 보여주듯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힘찬 기세가 누그러들지 않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과연 대다수 인민들의 삶은, 북경을 포함한 중국 대륙의 모습 역시 그러할까?

이러한 소박한 의문과 질문에서 중국영화 몇 편에 대한 얘기를 하려고 한다.

 

 

 

 

 광활한 대륙의 황토고원

중국 민족은 흔히 黃帝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래서 인지 붉은색만큼이나 누런색을 좋아한다. 수 천년 중국의 봉건 전제 군주를 칭하는 天子를 대표한 색도 황색이다. 장이모우 감독이 우리에게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된 작품은 80년대 후반에 개봉된 붉은색이 스크린을 압도한 ‘붉은 수수밭’이라는 영화였다. 중국의 산동성 한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일본제국주의 침략기의 한 가족사를 소재로 웅혼하면서도 호쾌한 작품으로 감독과 더불어 주인공이었던 공리를 일약 세계적 스타로 알려지게 한 영화이다. 아울러 ‘중국 고량주에는 오줌이 들어간다’라는 잘못된 우스개소리도 회자되었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 소개하려는 장이모우 감독의 영화는 북경 주변의 끝없이 펼쳐진 황토고원에 위치한 낙후한 산골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현대극인 ‘책상서랍속의 동화’이다. 수입 개봉되었을 때 붙여진 제목이고 원제목은 一個都不能少(Not one less) 번역하면 ‘하나도 모자라면 안된다’이다.

한 산골마을의 초등학교 선생님이 멀리 고향에 급히 다녀올 일이 있어 임시교사를 들이게 된다. 한 달간 임시로 아이들을 맡아 가르치면서 받게 되는 돈은 50위안. 옆마을의 초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않은 여학생이 지원하고 30여명의 크고 작은 아이들을 가르치게 된다. 선생님이 고향으로 출발하려고 하자 이 어린 임시교사는 한달 간의 임금을 요구한다. 그러자 선생님은 돌아오면 주겠다고 약속하고 추가로 학생이 학교를 떠나지 않아 더 이상 학생이 줄지 않게 된다면 추가로 돈을 더 주기로 약속을 한다. 자기 친구의 언니인 몇 살 많지 않은 임시교사에게 교육을 받는 학생들은 임시교사를 깜보고, 임시교사 역시 돈을 바라고 하는 일이라서 건성건성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다 한 달리기 잘하는 학생이 도시의 체육학교로 스카웃되어 나가고 또 학교의 말썽꾸러기 한 남학생이 병든 어머니와의 생활에 지쳐 돈을 벌기위해 가출하면서 임시교사인 주인공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다. 가출한 학생을 다시 데리고 돌아오기 위해 마을의 벽돌공장에서 막무가내로 학생들과 아르바이트를 해 돈을 벌어보지만 마을에서 도시로 가는 버스비에 턱없이 부족하다. 결국 먼지 나는 길을 걸어서 도시에 도착하고 학생을 찾지만 행방이 묘연하다. 얼마 남지 않은 돈을 모두 털어 먹과 붓 그리고 종이를 사서 구인광고를 일일이 손으로 써보지만 자신의 생활에 바쁜 사람들이 과연 얼굴도 모르고 전화번호도 없는 구인 광고에 관심이나 가져줄까? 최후의 수단으로 방송국 광고를 하기로 하고 방송국에 가서 관리자와 어렵게 연결이 되어 방송을 타게 된다. 한편 가출한 학생은 도시의 혹독함에 하루하루 구걸과 노숙으로 연명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선생님이 자신을 찾는 방송을 보게 되고 결국 선생님과 학생은 눈물의 재회를 한다. 방송덕분에 전국 각지에서 답지한 성금과 학용품을 가득 싣고 마을로 학생과 선생님은 금의환향한다.

간단하게 줄거리만 살펴보면 그리고 출연한 배우 전원이 직업적인 배우가 아니라 마을 주민이고 학생들인 점을 생각하고 본다면 ‘책상서랍 속의 동화’라는 개봉시의 제목만큼이나 감동을 주는 잔잔한 영화이다. 다 허물어져가는 학교 교사(校舍)며 남루한 옷의 천진난만한 학생들 그리고 끝없이 펼쳐지는 황토고원 등등 콘크리트와 아스탈트로 뒤덮인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목가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영화이다. 그러나 이면의 이들의 삶을 살펴 본다면 현재 중국이 안고 있는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부가 포기한 공교육정책으로 마을의 주민들에 운영되는 낙후한 학교 교육, 우리내처럼 대도시를 중심으로 입시중심의 기숙형 학교와 외국어 학교들이 세워지면서 교육에 있어서의 공공성은 오늘날 급격하게 사라지고 있고 교육의 국가의 책무성은 빛바랜 오래된 카렌다처럼 되어 버렸다. 육체노동자의 형편없는 저임금과 농촌의 상대적 빈곤의 댓가로 상해, 북경 같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하루가 다르게 고층빌딩과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으며 사회보장제도의 축소로 인한 사회안전망의 부족으로 발생하고 있는 빈곤층의 확대와 공동체의 실질적 붕괴와 가치관의 파괴가 우회적으로 - 임시교사로 한 달간 받는 돈이 50위안(한화로는 약 7천원)이고 2000년 당시 청소년의 하루 날품팔이 임금은 1위안을 약간 상회하였다 - 그려지고 있다.

 

청소년의 삶이자 소망인 자전거

2001년 제작된 북경의 오늘의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하는 ‘북경자전거’라는 영화를 소개한다. 원제목은 ‘17세의 자전거(十七歲的 單車)’ 로 자전거 한 대를 소재로 두 명의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이다. 시골에서 돈을 벌기위해 상경한 주인공은 어렵게 자전거를 이용하는 택배회사에 취직을 하고 월급에서 자전거 값을 까는 것으로 하고 하루하루 힘차게 페달을 밟는다. 회사에서 지급한 유니폼에 신형 자전거를 타고 중국의 심장 북경 시내를 힘든줄 모르고 누비면서 자전거가 온전하게 자신의 것이 될 그 날을 고대하면서 열심히 일을 한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인지 자전거 값을 다 물게 되는 그날 도난을 맞는다. 한편 명문 상업계 고등학교에서 우등생으로 있는 다른 한 주인공은 북경 뒷골목의 가난한 집에서 살면서 자전거 갖기를 소망한다. 가정 형편상 아버지는 자전거 구입 약속을 번번이 지키지 않고 급기야 새엄마와 같이 집에 온 의붓 여동생의 학비부담으로 자전거의 꿈이 사라지자 몰래 집의 돈을 훔쳐서 장물 자전거를 구입한다. 자전거의 소유권을 둘러싼 다툼으로 두 주인공 사이의 갈등이 계속되고 자전거가 두 주인공 사이에서 왔다갔다 반복하다 결국 하루씩 번갈아 타는 것으로 합의를 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화해도 마지막에 가서 두 주인공은 자전거로 인해 다른 청소년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같은 17세의 두 소년에게 있어서 자전거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하루하루 일을 해서 생활을 이어 나가야 하는 노동하는 청소년에게 있어서 자전거는 삶이요 목숨이라고 한다면 집에서 살면서 학교에 다는 학생 청소년에게 있어서는 등하교 때 여자친구와 같이 하기 위한 탈 것이고 친구들과 자전거 묘기를 하기 위한 매개물이다.

개혁 개방 이후 20여년 만에 세계의 공장으로의 지위를 차지한 중국은 하루가 다르게 경제 성장을 이룩하고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올림픽을 기회로 삼으려는 듯 과거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현재를 저당 잡혀 미래로 매진하고 있다. 수 백년 베이징 시민의 삶이 어린 뒷골목이 하루아침에 재개발이라는 명분으로 파괴되고 또 거기에 살던 수많은 서민들은 보금자리를 잃고 외곽으로 외곽으로 떠밀리고 있다. 수출산업 중심의 공업화 정책으로 농촌 경제는 붕괴를 하고 있으며 수 많은 중국의 농민들이 일자리와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몰려들고 있다. 가까이 살펴보면 7,80년대 우리의 모습이고 멀리 보면 인클로져 운동으로 농토를 빼앗기고 도시에서 노동력을 팔 수 밖에 없게 되는 영국의 농민들의 모습들이다. 이른바 자본의 ‘시초축적’이 중국 전역에서 무자비하게 대규모로 진행이 되고 있다.

현실같은 영화, 영화 같은 현실

무심히 지나가는 자동차와 자전거의 물결 속에서 주인공 소년은 체인이 빠지고 바퀴축이 휘어진 자전거를 어깨에 메고 무심한 인파들 속을 걸어가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북경자전거’는 끝난다. 하루하루 삶에 지쳐서 주변을 살펴볼 여유마저 잃어버린 오늘날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크게 과장하지 않고 커다란 서사(敍事)가 없어도 그냥 있는 그대로의 삶을 보여주어도 ‘영화’가 되는 것이 오늘날 중국의 영화의 저력인 듯 하다.

반면에 우리네의 영화는 어떠한가? 괴기, 공포 요소를 첨가하거나, 황당무개한 액션, 아니면 성과 폭력으로 의례히 포장해야만 영화가 된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현실이 너무 영화나 소설 같아 차마 영화의 영역이 쪼그라든것은 아닌가? 최근 사채와 관련된 연예인의 자살,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자살한 대학생, 그리고 사교육비와 관련한 고등학생의 부모 자해와 자살 등의 얘기를 들을 때 마다 현실이 영화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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쁘띠의 영원한 안식처 내쇼날리즘과 올림픽

쁘띠의 영원한 안식처 내쇼날리즘과 올림픽

 

들어가면서

벌써 몇 년전 일이다. 임지현 교수의 ‘민족주의는 반역이다’이다라는 책이 출간되어 화제를 몰고 왔었다. “5000천년 단일민족, 순수혈통...”의 대한민국에서 이 책의 출판은 지금까지도 논란이 벌어지고 있으며 민족주의 진영으로부터 따가운 질시를 받고 있는 실정이다.

2008년 8월 8일 베이징 시간 오후 8시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화려한 불꽃 놀이로 올림픽이 시작되었다. 1000억원 이상의 막대한 예산이 투입된 개막식에는 수 만의 인원이 동원되어 중국이라는 국가의 탄생과 현재까지의 모습을 ‘장려’하게 표현하였다. 화려함과 웅장함과 더불어 더운 한여름임에도 돋아나는 한기는 나만이 느끼는 것일까?

올림픽 성화 봉송이 서울을 지나갈 때 우리는 두 번 놀랐다. 우선 엄청나게 많은 중국 학생들이 남한에서 유학을 하고 있었다. 어디서 무엇을 배우고 있을까? 그리고 두 번째 2002년 붉은악마를 벤치마킹했는지 빨간 옷과 붉은 오성홍기의 물결들.... 실은 붉은색은 중국을 상징하는 색이 아닌가?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2002년 서울은 시청과 광화문을 중심으로 붉은 물결이 넘실거렸다. 티셔츠에서 두건, 심지어 얼굴에도 붉은 칠을 한 붉은악마들에 의해 남한은 점령되었다. 때마침 축구팀의 선전도 있어서 예선전으로 끝나지 않고 길게 붉은 물결이 짧은 여름의 서울을 메웠다.

‘대한민국’을 목이 터져라 외치는 붉은악마에게 국가대표팀이 경기 선전에 대한 요구 조건은 ‘군면제’였다. 붉은악마들은 대한민국을 생각하면서 응원을 했지만 정작 선수들은 군대 면제를 통한 해외 리그의 진출이 목적이었다. 기막힌 동상이몽(同床異夢)!

6년후 2008년 봄 서울시내에 베이징 올림픽 성화가 도착했다. 전국각지에서 공부하고 있던 중국의 유학생들과 이주 노동자들이 중국의 국기인 붉은 오성홍기를 들고 서울 시내로 쏟아져 나왔다. 19세기 중반이후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고통 받고 신음 했던 중국인민들의 올림픽 개최에 대한 희망과 기쁨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의 표현에 대한 한국인의 반응은 싸늘하다 못해 남의 잔치에 재를 뿌리고자 하는 심산을 노골화 하였다. 원래 남의 민족주의와는 양립하지 못하는 것이 민족주의의 생리인가 보다.

 

 

올림픽의, 올림픽에 의한, 올림픽을 위한

올림픽 개최지가 결정되면서부터 베이징은 대대적인 개조 작업에 들어갔다. 명나라, 청나라를 거치면서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문화와 멋을 가지고 있었던 시가지 중심부에 위치한 수많은 후통(胡同)에 대한 ‘근대화’라는 이름의 철거가 시작되었다. 실은 후통은 사합원이라고 해서 전통적인 ㅁ 자 모양의 집들이 모여 있는 거리이자 동네이다. 20세기 격랑을 지내오면서 베이징의 거대해지고 인구가 밀집하면서 이 사합원이 단독주택에서 공동주택으로 변신을 하게 된다. 한 집에 많게는 10세대 이상 사는 공동주택이 되면서 쇠락을 하게 되었다. 좁고 냄새나는 거리, 칸막이도 없는 공중변소, 연탄을 이용한 난방문화 등등이 현대화를 상징하는 올림픽에 맞지 않다고 생각되었나 보다.

철거된 이 자리에는 수 십 층에 이르는 초현대식 빌딩과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서고 베이징의 스카이라인을 바꾸고 있다. 그 많던 후통에 살던 베이징의 민중들은 어디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잡고 정착할 것인가?

베이징의 대기는 악명높다. 이른 봄에 시작된 황사와 한여름의 스모그 그리고 겨울의 화석연료의 연소로 인한 대기오염으로 1년 내내 가을철 며칠을 빼고는 파란 하늘을 보기 힘든 실정이다. 이에 중국정부는 특단의 조처를 내렸다. 베이징을 포함한 인근 주변의 모든 공장의 가동을 중지시킨 것이다.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하는 중화학 공장은 물론이고 관계없는 중소규모의 경공업 공장에도 적용이 되어 많은 원성을 샀다. 공장주야 세금을 감면해주고 나름대로의 해택을 통해 살아가기에 별 문제는 없지만 이 공장들에서 일을 하는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정부의 조처는 가뜩이나 힘든 생활에 짐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올림픽이 있기에 참아야 한다.

중국인들은 8자를 좋아한다. 8의 발음이 재물을 불러온다는 의미의 發財(파차이)의 파와 같다고 해서 8자가 많이 들어있는 핸드폰 번호는 엄청난 프리미엄을 붙여서 거래가 이루어진다. 그래서 인지 2008년 8월 8일 8시에 개막식을 하였다. 날씨가 좋은 10월 달도 아니고 한참 무더운 한여름에 올림픽! 그래서 특단의 조처를 정부는 취했다. 수 조원을 쏟아 부어 베이징 주변의 구름을 향해 요오드 성분의 인공 강우 약품을 박격포와 항공기를 이용하여 뿌렸다고 한다. 덕분에 베이징 시민들은 올림픽이 열리기 전 한 여름에 매일 저녁 규칙적으로 내리는 비 덕분에 여름인데도 덥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베이징 주변의 농민은 비가 오지 않아 거북이 등짝마냥 갈라진 농토를 보면서 한해 여름 농사를 포기해야 했지만....

올림픽의 정치화 그리고 신화화

올림픽을 국가주의, 민족주의와 본격적으로 접목한 국가는 히틀러의 독일이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통해 1차 대전의 패전국의 이미지를 벗고 세계만방에 독일민족의 우수성을 선전하였다.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새롭게 건설된 백색의 스타디움에서 나찌식 경례를 하면서 입장하는 선수들에게 무한한 은혜(?)를 베푸는 지도자의 모습! 그리고 강인한 체력과 균형 있는 몸매를 보여주면서 전세계에 독일 민족의 우생학적 우월성을 과시하였다. 이 모든 사실을 우리는 레니 리펜슈탈이라고 하는 희대의 다큐멘타리 영화 감독의 ‘올림피아’라는 영화를 통해 볼 수 있다.

출전한 선수들에 대한 영광이 원조 올림픽의 전통이라면 이에서 벗어나 출전선수의 출신국이 도드라지게 되는 올림픽의 시작이 베를린 올림픽이다.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사건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이후 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면서 올림픽은 국가주의, 민족주의의 대결장을 넘어서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의 이념의 대결장이 되었다. 덕분에 남한의 사람들에게 적국이었던 소연방에서 열렸던 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은 이름만으로 존재한다.

유난히 스포츠를 좋아한 대통령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처음 추진한 일이 올림픽 유치였다. 08년 베이징올림픽과 관련한 중국에서 일어난 일들이 20년 전 이미 서울에서 일어났었다. 서울 시내의 보신탕집이 철퇴를 맞고 서울시 외곽으로 쫓겨났다. 당시 대규모 빈곤층이 밀집되어 살고 있었던 상계동 지역이 주거 환경 개선이라는 이름으로 주민의 눈물겨운 투쟁에도 불구하고 폭력적으로 철거되면서 88년 서울 올림픽은 잠실과 더불어 ‘상계동올림픽’으로 기억된다.

고대로의 회기와 과거에 대한 노스탈지아

히틀러의 제3제국이 붕괴될 때 수상이었던 괴벨스가 선전상으로 나찌즘을 선동하였다고 한다면 제3제국의 이상을 건축물로 구현하려 했던 히틀러에게는 제3제국 붕괴당시 군수상이었던 건축가 슈페어(A. Speer)가 있었다. 유명한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의 무대 세트를 기획했고 베를린 히틀러 총통부를 건축했던 히틀러가 아꼈던 건축가이다. 석재로 조성한 베를린의 웅장한 총통부는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시작된 베를린 재건축의 시작이었다. 마지막 전승기념탑과 거대한 돔의 건설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도면과 모형으로 우리는 그 거대한 규모와 웅장한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만약 건축되었더라면 엄청난 폐건축물로 환경을 엄청 파괴했겠지만 다행이 건축되지 않아 다행이다. 아리안 족의 우수성을 철의 법칙으로 믿었던 히틀러와 나찌들도 고대 그리이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의 기둥과 , 고대 로마의 판테온의 주랑, 그리고 가까이 중세 시대 피렌체와 로마의 산타마리아 델 피오리 성당과 산 파올로 성당의 거대한 돔 양식의 짬뽕을 그들의 정신을 구현하려 했던 건축물의 원형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중국 고대의 신화와 전설 그리고 수천년 전의 전제 왕정시대의 일들을 소재로 한 베이징 올림픽의 개막식 연출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재의 비루하고 고통스런 모습에 대한 거울 이미지로 잊혀진 그리고 허구의 검증 불가능의 고대를 삼는 것은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공통의 고향이다.

우리의 경우는 어떠한가? 미국식 기업경영, 미국식 은행 운영, 어메리칸 스타일의 의식주 문화가 판을 치고 영어 몰입교육까지 시도되고 있지만 민족주의 진영의 영원한 고향은 고조선 단군이요, 고구려 주몽이다. 저 인도 아대륙 북쪽 히말라야 골짜기의 석가모니도 고대 한민족의 일족인 고리족의 왕자라는 말에는 ‘논어를 쓴 공자도 동이족 이다’는 깜찍한 애교로 보인다.

중립적인 거대한 자아로서의 민족과 국가

 

19세기 민족주의 발흥의 원인과 유래를 개인적 심리적 측면에서 찾아보면 니체의 경구가 떠오른다.

 

“ ‘원한의 인간’은 숨는 것, 비밀통로들 그리고 뒷방을 좋아한다. 그는 어떻게 침묵하는지를 ,어떻게 잊지 않는지를, 어떻게 기다리며 그리고 어떻게 임시변통적 자기 비난과 자기 비하를 하는지를 이해함으로써 모든 가려진 것들에 의해 그는 그만의 ‘세계’, ‘안정’, ‘상쾌함’이 전부인양 주술에 걸린다. ” (니체 ‘도덕의 계보’에서 )

 

라고 하면서 19세기에 도래한 시민사회와 시민사회의 ‘시민들’을 폄하하면서 아울러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이런 인간은 ‘삶을 긍정하는데’에는 거의 관심이 없는 본능적인 자기 확신과 자기 보존에 의해 추동된 자기 중립적이고, 독립적인 ‘주체’- 자아-의 믿음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니체 ‘도덕의 계보’에서 )

 

니체의 나찌즘과의 연관성은 지난한 논쟁거리이다. 니체를 옹호하는 쪽은 뇌혈관 문제로 쓰러져 식물인간으로 병석에 누워 있을때 그의 누이에 의해 국가주의로 왜곡되었다고도 하니까 논쟁은 접어두어야만 한다. 그리고 시민사회의 문제 이전에 자본주의적 사회 경제적 구조를 도외시 한 부분도 접어두자. 단지 우리는 여기서 나찌즘에 이용되기 전 젊은 철학자 니체가 본 이른바 시민사회에서의 일반적인 시민들의 의식 경향과 멘탈리티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비관적인 판단을 엿볼 수 있다.

‘원한의 인간’들로 구성된 사회에서 삶의 긍정과 주체성은 거세되고 본능적인 자기 확신과 보존의 원칙만 강조된 상태에서 자신만의 ‘세계’, ‘안정’ 그리고 ‘상쾌함’의 주술 속에서 안주하지만 자신의 짐승적인 비루함에 갈증을 느끼고 결국 자기중립적이고 자기독립적인 주체나 자아를 필요로 하는데 바로 이 주체나 자아가 민족 내지는 국가가 되는 것이다.

즉, 시민사회에서 민족이나 국가는 도덕과 가치관의 까다로운 기준과 잣대에서 벗어나서 오직 경제적 동물로만 살아가는 인간에게 있어서 부족한 그 무엇(인간다움?)의 대체물로서 만들어지고 이것을 중립적이고 독립적인 자아와 동일시한다고 볼 수 있다.

매일같이 반복적인 삶 속에서 주체성과 삶의 긍정은 어느덧 사라지고 매일매일의 노동과 의식주 해결이라는 동물적인 욕구만이 강요되는 상황에서 거대하고 웅장한 커나란 또다른 나의 모습을 국가와 민족에서 찾고 여기에 속절없이 희망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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