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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혁명과 청계광장( 68혁명 40주년에 부쳐)

68혁명과 청계광장

은하철도

 

들어가면서

5월 초부터 시작된 촛불 시위가 한 달여를 넘게 계속되고 있다. 시위는 청소년들이 교복을 입고 초 한 자루 들고 현 대통령의 서울시장 시절 유일한(?)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유형의 토대인 청계천 광장에서 시작되었다. ‘우발적이고 일회적일 것’ 이라는 대다수 운동세력의 분석을 뛰어넘어 즉자적이고 감성적인 ‘미친소 ’반대를 넘어, ‘미친교육’, ‘대운하 반대’ 그리고 ‘미친 사유화(공공부문의 사유화와 공기업 사유화)’ 이슈로 까지 확대 고양되고 있다.

지난해 프랑스에서는 헝가리 이민 출신의 우파 사르코지가 시라크의 후임으로 선거에서 승리를 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새로운 프랑스’ 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상대적으로 신자유주의의 외곽지대인 프랑스에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행하려 하고 있다. 주35일 근무제등 기존의 투쟁을 통한 사회적 합의물을 효율성과 경쟁 그리고 ‘프랑스적’ 인 사회 규범을 내세워 무효화함으로써 대대적 사회개조(?)를 역설하고 있다. 이에 대한 민중의 저항도 청소년과 교사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전면적 조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보이지 않고 있다.

이데올로기 공세도 시작되었다. 사르코지 정권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과 정치권은 ‘68혁명’의 40주년을 맞는 올해 전면적 68혁명에 대한 폄하를 주 내용으로 하는 재평가를 획책하고 있다. 각종 미디어를 동원해서 폄하를 확대 재생산함으로써 신자유주의 드라이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하고 있다. 우리네의 청와대와 조중동을 중심으로 하는 부르주아 세력의 현 상황에 대한 ‘음모론’과 ‘배후세력’의 프랑스판 버젼을 보는 듯 하다.

40여년 전의 전세계적 차원에서 벌어졌던 68혁명에 대한 양상과 전개 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보는 가운데 현 시점에서의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촛불 정국과의 차이점과 공통점 그리고 전개 방향에 대한 시사점을 찾고자 한다.

68혁명의 조건과 양상 그리고 전개 과정

베트남에서 연초에 시작된 ‘설날 공세’에 뒤를 이어 대학 기숙사 문제라는 사소한(?)문제에 대한 대학생들의 저항으로 시작된 5월의 파리는 베를린과 로마 그리고 체코에서의 봉기로 이어졌고 대서양을 넘어 미국의 컬럼비아 대학 점거 사태와 부에노스 아이레스와 우루과이의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파업 시도로까지 이어졌다. 전후 안정적인 지배 체제를 구축했다고 여겨졌던 ‘브레턴 우즈’체제를 골간으로 하는 세계적 자본주의 체계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냉전체계의 1세계와 3세계의 파쇼정권들은 최악의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된다.

45년 종전과 냉전체계의 구축이라는 우산 아래에서 자본주의 축적은 눈부신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유럽도 미국의 마샬 플랜의 덕으로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고 전쟁 전 이상의 경제 능력을 갖출 수 있게되었고 미국의 경우는 케인즈주의 통한 대량소비 시스템 하에서 ‘세계의 공장’, ‘세계의 시장’역할을 하면서 황금기의 60년대를 지나오고 있었다.

맑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은 다른 측면에서는 자신의 무덤을 파는 국면을 양산한다고 했다. 최초로 현대화된 전쟁인 베트남 전쟁( 중세까지 왕조와 봉건 제후간의 갈등의 양상이었던 전쟁이 민족과 국가간의 갈등 국면으로 전환된 것이 나폴레옹의 정복전쟁이었다면 베트남 전쟁은 미사일과 전투기로 상징되는 최첨단의 과학전의 시작이요, 돈의 위력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게 만드는 현대전의 시작이다)은 제국주의의 주축인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달러 본위체계의 본질적인 위기를 만들었다. 냉전의 체제의 충실한 우방이었던 유럽과 일본의 경제 부흥은 도리어 화살이 되어 미국의 수출 감소와 수입의 확대를 초래했고 결과적으로 미국 내의 금의 유출을 가져오면서 복지국가로 대변되는 케인즈주의의 종언을 고하게 한다. 이러한 전세계적인 경제 위기 국면에서의 결정적으로 닉슨 독트린을 통해 파산 선언을 하게 된다.

경제적 위기의 전개에도 불구하고 상대적 ‘안정’ 된 조건 속에서의 삶을 누리던 노동계급과는 달리 달라진 환경과 열악한 조건 속에서 삶을 시작해야 하는 학생들은 당시의 암담한 자기 현실과 현실의 모순을 포착하였다. 프랑스의 경우 50년대 말 알제리 위기의 해결자로 나서면서 장기 집권에 들어선 ‘드골’의 억압적이고 탐욕스러운 ‘부르주아의 비루함’의 모습을 기성세대의 낡은 가치관과 결합시켜 그것들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와 저항의 상을 투사하면서 거리로 그리고 바리케이트로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나선다.

심성적 측면의 조건을 살펴본다면 미국에 의해 대량 학살로 확대된 베트남전의 진행과 이에 대한 베트남 민중들의 영웅적인 저항은 전세계적인 반전 운동을 만들어냈으며 중국에서 시작된 이른바 ‘문화대혁명’은 정보의 부족과 주관적 해석상의 문제를 지적할 수도 있지만 의식과 생활에서의 즉 미시적 차원에서의 또 다른 ‘대안’에 대한 공감과 필요성을 확산시켰다.

50년대 말 불붙은 미국의 흑인 인권 운동은 68년 킹 목사의 암살사건으로 체재 내화적 개혁과 사회 진보의 지체에 대한 전면적인 회의를 가져왔고 체제 외적, 체제 전복적 운동(블랙 팬더 당 운동 등)으로 확대 고양되었다.

일본의 경우 2차 대전 당시 불구대천의 숙명의 적이었던 미국과의 군사동맹으로 전범국에서 자신을 점령한 국가와의 동등한 우방국(?)으로의 격상을 꾀함과 동시에 세계 자본주의 안에서의 우월적 위치를 보전확대하기 위해서 정권과 자본에 의해 이루어진 미일방위조약등의 제반 조처를 감행한다. 이에 대해서 미시마 유키오로 대변되는 일본 극우 민족주의자들은 발악에 가까운 저항을 하였고 ‘도쿄대 전공투’ 로 대변되는 대학생들의 반정권 반체제 투쟁을 가져왔다. 바야흐로 반자본주의를 위시한 민족주의, 인종주의, 여성주의 , 성소수자 문제, 인권 문제 등 다양한 대안과 가치관의 분출의 시작을 알리게 된다.

 

 

68혁명 포스트 모던의 시작?!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저녁의 황혼 빛깔이 오고 나서 나래를 펴고 날아오르듯이 철학은 현상과 운동 너머를 보지 못하고 대체로 추수적인 입장에서 후일담을 정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중세 길드체계에서의 폐쇄적 생산체계의 붕괴와 괘를 같이 하면서 시작된 수공업적 매뉴팩쳐 경제에서의 인간의 혼란을 분석한 칸트의 철학, 산업 자본주의의 시작과정에서 소영주 국가의 붕괴와 민족국가의 수립기에 이데올로기의 부재에 혼란을 겪던 독일의 상황에서의 부르조아 국가와 부르주아 사회의 철학적 토대를 정리한 헤겔이 증명하듯이.

1848년의 2월 혁명, 1871년의 파리콤뮌, 그리고 1917-19년의 사회주의 혁명의 고양기를 지나고 두 차례의 미증유의 세계 대전을 겪게 되면서 노동계급과 민중들은 복지국가 케인즈주의의 안온한 대량소비 사회 속에서의 삶을 지속하면서 기존의 투쟁과 저항의 정신은 거세당하게 된다. 군대폭력에 시달렸던 신임병사가 고참이 되면 다른 신임병을 폭력의 대상으로 삼듯이 오히려 체제와 구조의 거대함에 질식한 민중들은 전면적인 연대 투쟁을 포기하고 또 다른 권력과 구조의 하부가 되어 부분적으로 존재하는 다종다양한 운동(주택점거 투쟁, 성소수자 문제. 이주 노동자문제 등)에 탄압의 주체가 되곤 하였다.

50년대 시작되고 풍미되었던 ‘인간’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등장하던 ‘구조주의’ 물결의 최대 고양은 아마도 66년 푸코의 [말과 사물]과 같이 한다. 푸코는 책 마지막에 바닷가 모래사장에 그려진 얼굴마냥 소리 소문 없이 지워지는 인간의 말소를 얘기했고 72년에 출간된 들뢰즈와 가타리의 [앙티외디푸스]에서는 정신분석학적 차원에서의 자본주의 분석을 통해 당시 자본주의 사회의 분석과 모순의 원인을 밝히고자 하였다. 자신들이 폐기한 ‘인간’, ‘주체’,‘의식’의 차원이 부재한 상태에서의 모순과 분석은 역시나 자신들의 선배 철학자들처럼 별다른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고 속절없는 후일담이 될 수 밖에 없었다. 1917-19년의 혁명의 고양기에 뒤이은 20년대 파씨즘의 출현으로 혁명의 전망이 보이지 않았던 시기의 그람씨의 고민과 분석은 오히려 절박하고 현실적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앞에서 서술했듯이 68혁명의 시작과 전개에 있어서 세계적 차원에서의 자본의 위기는 분명히 존재했다. 그리고 그 모순과 위기는 명백했으며 치명적이었다. 68혁명의 진전 없이 체제 내화로 마무리 되면서 조우하게 된 70년대. 새로운 모습의 자본주의 -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가 그들 철학의 유효성 폐기를 보여주고 있다. 세계 자본주의 위계 속에 최상위에 속한 제1세계 제국주의 국가와 사회 속에서 전개 발전된 포스트 모던 류의 철학은 성급하게 모던(근대)를 정리하고 포스트 모던을 주장하면서 본의 아니게 자본주의 체계에 복무하게 된다.

 

68혁명의 연장 아니면 새로운 시작

 

68혁명의 세대들은 이제 육십 줄에 들어선 중늙은이가 되었다. 우스개 소리로 “파리의 노인들이 젊은 세대보다 더 진보적이고 급진적이다” 라고 한다. 당시 대학가인 카르티에 라탱에 바리케이트를 쌓고 공권력에 폭력으로 대치를 하면서 ‘모든 금지를 금지한다’와 ‘상상력에게 권력을!’이라는 구호를 외치고 성의 자유와 모든 금기와 억압에 대해 저항하였던 그들은 오늘날 프랑스 젊은 세대 사이에 늘어나고 있는 르펜으로 대변되는 프랑스 국가주의자들이나 네오 나치등의 인종주의자들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몇 년전 서울광장을 붉게 물들인 붉은 악마와 태극기의 물결을 보았던 우리는 오늘 저녁 서울 시청 앞과 광화문 사거리의 촛불 소녀들을 붉은 악마와 같게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다르게 보아야 하는가?

심야에 차도를 메우고 행진을 하고, 밧줄로 전경차를 밀어내면서 ‘비폭력’과 ‘평화시위’를 외치는 시위대를 보면서, 80년대와 90년대 곤봉과 방패의 세례 속에서 파이프들 들고 보도블럭을 깨고 화염병을 던지면서 시위를 했던 세대들에게 있어서 진압을 하는 전경의 방패 진압에 경찰의 폭력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요즘의 젊은 시위대와 전경들의 약간의 폭력의 전조에도 카메라를 들이대는 청소년과 시민을 보면서 80년대와 90년대 한국사회에 살았던 사람으로써 ‘늙었음’ 절실히 느낀다.

또 다른 잘못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우선 68혁명 이후 40여년이 지난 지금의 현실은 ‘과연 어떠한가’ 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신자유주의의 발전과정에서 투자 없는 투기의 전지구화로 인한 수십, 수백조 달러에 달하는 갈곳 없는 투기 자본의 유례없는 축적과 쌀값의 폭등으로 쌀 대신 진흙을 구워먹어야 하는 아이티의 어린이들이 병존하고 있는 21세기의 지구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수백 수만의 네이팜탄을 소총하나로 막아내야 하는 베트남의 정글유격대의 현실과 과연 차이가 있는가?

선진 제국주의 국가에서 케인즈주의에 의한 축적의 한계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발생한 최초의 ‘위험사회’화의 징후를 안정된 정규직 노동계급은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사회에 나가게 될 새로운 세대는 차분한 고민과 분석 이전에 본능적 위기감으로 모순의 파열점을 포착하고 거리로 광장으로 나왔다. 대한민국에 있어서 10여년간 착실하게(?) 진행되어온 신자유주의 시장화의 피로와 모순은 어쩌면 여론 주도를 하는 기성세대 정규직 노동계급에게 있어서 보다 오히려 대학생들에게 아니 오히려 살인적인 입시제도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미래의 ‘88만원 세대’인 청소년에게 더 위협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68년 5월의 사태가 발생하자 프랑스의 공산당과 CGT로 대변되는 노조단체들은 대학생들의 저항에 대해 ‘부르주아적 우발적 행동’으로 규정짓고 초반에 연대하지 않는 우를 범했다. 오늘날 청계광장에서의 청소년들의 저항에 대한 우리네의 안이한 분석과 비관주의적 평가와 큰 차이점이 없다. 이러한 평가는 바로 우리들의 둔감함과 상대적인 안온함 그리고 치열한 모순에 대한 고민의 부족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나가면서

프랑스에 있어서 68혁명 당시의 주체들의 요구와 이슈에 대한 평가는 당시에 철저하게 반동적 이데올로기에 오염된 결과라는 평가를 받았었다. 내부적으로 공산당의 의회정치의 역할이 중요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사회보장에 의한 정규직 노동자들의 기본적 욕구가 보장되고 있었으며 외부적으로는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권이 건재하였던 상황에서의 객관성이 결여된 그들만의 주관적인 분석이었다. 그러나 당시 세계적 차원에서의 자본주의의 위기가 시작되었었고 제3세계 특히 아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변화와 저항의 운동이 전후 활발하게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현재 대한민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아니 전지구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하루하루 늘어만 가는 홈리스, 폐업이 되어 또 다른 폐업 사장을 기다리는 가게들의 확대, 외부적 요건이라고 하지만 월급만 빼고 올라가는 물가들..... .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간과했던 모순이 여기저기서 허연 뼈다귀를 내보이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도래와 더불어 68이 시작되었다면 신자유주의의 몰락과 더불어 새로운 그 어떤 것의 시작과 더불어 촛불은 타고 있지는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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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 사랑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가?

일상적 사랑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가?

은하철도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1972년도 작품, 이하 ‘파마탱’ )는 우리 시대 우리에게 있어서 금기(禁忌) 그 이상이었다. 실비아 크리스텔의 ‘엠마뉴엘부인’은 이미 초등학교때 개봉이 되어 선배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전설이었다면 베르툴루치의 ‘파마탱’은 개봉조차 금지당한 금단의 그 무엇이었다. 80년대 말, 지금은 허물어 호텔이 되어 버린 서울의 국도극장에서 개봉되었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놀랐었는데 마구 삭제 되어 개봉되었다는 그 이후에 소문을 들으면서 이유없이 분개했었다. 인터넷 초고속망의 세상 속에서 손쉽게 파일로 구해 볼 수 있는 요즘에 비하면 ‘예술이냐 외설이냐’의 영화에 대한 개봉 당시의 논란 자체는 불과 20년 전이지만 옛 시절의 아득한 얘기인 듯하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초상화들

필림이 돌아가고 색소폰 소리가 애절하게 테마음악을 연주하는 가운데 아일랜드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의 일그러지고 찌그러진 뭉개진 인물 상(像)이 타이틀로 올라간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사람인지 아닌지 조차 구별이 힘든, ‘과연 인간의 것인가’ 라는 의문이 드는 처참하게 난도질당하고 총알로 뭉개진 듯한 얼굴이 그리고 눈, 코 그리고 입이 과연 제대로 기능을 할지 의아한 얼굴을 가진 군상들이 나른한 듯 카우치(긴 장의자)에서 누워서 번들거리고 뭉퉁한 몸둥이를 그대로 보이면서 흘러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인간의 정신을 기괴한 형태의 얼굴과 육체로 표현한 베이컨의 작품들은 안락한 의자에 나른하게 누워있는 인간의 위태로움과 기괴스러움 그리고 정신 분열을 보여주고 있다. 본질적으로 노동을 해야 하지만 그러나 노동을 천시하고 하기 싫어 발버둥 치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의 인간의 정신의 양립 불가능성 그리고 그 결과로 발생하는 필연적인 분열증세!

 

 

 

 

 

 

 

파씨(Passy)에서의 첫 만남

영화의 첫 장면에서 주인공 폴(마론 브란도)와 잔느(마리아 슈나이더)가 파리의 파씨 지역의 세느강을 가로 지르는 비르아켕(Bir Hakem)철교의 지하철 밑으로 지나간다. 20세기 초에 만들어져 낡은 지하철은 굉음을 내면서 철교를 지나고 소음에 주인공 폴은 하늘에 대고 욕을 한다. 나폴레옹 3세 이후 부르주아지를 위한 신흥 주택지역으로 급부상한 파씨의 고풍찬연한 아파트의 안에서 둘은 우연히 만나고 사랑(?)을 나누고 서로의 신분 확인도 안하고 헤어진다. 그 둘이 각각 걸어가는 길가에는 방탄차와 무장 전투경찰이 시위대에 맞서고 있다. 주인공 폴은 미국인이지만 정체를 알 수 없다. 세계 각국을 떠돌아 다녔으며 복싱선수에서 기자 그리고 남미의 혁명단원으로 그리고 지금은 파리의 어느 싸구려 여인숙의 여사장에게 기생하는 남편에 이르기까지... 분명한 것은 과거에 뜨거웠던 열정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지금은 심하게 좌절하고 체념하고 돈 많은 부인에게 더부살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폴은 이런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싶지만 그 부정의 방법으로는 단지 모르는 여인(잔느)의 끊임없는 질문에 대해서 끈질기게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기를 거부하거나 아니면 가학적 성행위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반면 잔느는 대령인 아버지를 둔 그리고 시골에 저택을 상속한 부르주아 계급의 젊고 희망에 찬 아가씨이다.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기를 거부하는 폴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얘기를 하면서 정체성 확인을 요구하고 폴과의 위험한 줄다리기를 한다.

폴의 아내는 여인숙에 장기 투숙하고 있는 한 남자의 정부로서 남편인 폴이 모르게 오랫동안 이중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폴은 아내와의 부부관계를 통해 과거의 자신의 정체성과의 단절과 혼란을 겪고 있었다. 그리고 자본주의에서의 금전적 종속의 전도(부자인 부인과 무일푼 기생하는 남편)로 인한 마초적 불만을 가지고 있다. 그 만큼 폴의 아내 역시 아무런 조건 없는 남녀 관계(정부와의 관계)를 통한 지금의 남편과의 관계(일반적 남녀 관계에서의 주도권은 남성이 가지지만 이 경우에는 역전되어 있다)에서의 해방을 느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잔느는 젊은 영화감독을 지망하는 남자친구를 두고 있다. 모범적 남녀관계와 시간이 지나게 된다면 안락한 부부생활로 이어지는 안전하고 넓은 길에서 이탈하여 정체모르는 폴과의 관계를 끊지 못하고 위태한 만남을 이어간다.

폴에게 있어서 아내와의 관계는 철저하게 자본주의적인 관계였었다. 아니 어쩌면 일상적인 남녀의 역할(일상적인 자본주의에서 남자는 사회에서 여자는 집안에서)이라는 것 자체가 가정에 들어온 자본주의적 관계 그 이상도 그이하도 아니다. 역전된 역할(돈 있는 아내와 백수인 남편, 돈 때문에 결혼했다라는 주위의 시선)과 결혼이라는 법적 제도로 엮어진 틀에서 폴은 다층적인 원인에의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으리라.

폴에게는 새로운 관계의 맺음(잔느와의) 아니 관계없는 관계, 전인격적인 관계, 사회경제적 조건이나 정체성을 괄호 안에 넣은 상태의 관계를 희구했었고 그 대상이 잔느였으리라.

그러나 잔느에게 있어 폴과의 관계는 일시적이고 충동적이었기에 그간의 단조로운 안정된 생활과 관계에서의 ‘악센트’나 ‘별미’ 정도에 불과했다. 오히려 계속적인 관계와 만남 속에서 만들어지는 그리고 늘어나는 불안과 고통 어색함은 일상적 관계맺음의 방식으로 되돌아 가고자 하는 충동을 확대한다. 끊임없는 상대방에 대한 물음과 존재 확인을 요구하는 잔느는 자본주의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영원히 처음으로, 제자리로 되돌아가는 나침반 같은 방식을 버릴 수 없었다. 결국 두 연인은 파국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68혁명: 자본주의적 관계 맺기의 회의

‘모든 금지를 금지한다’라는 슬로건이 생각나는 68혁명의 좌절과 더불어 ‘파마탱’은 만들어졌다. 영화가 만들어지던 바로 그해에 들뢰즈와 가타리는 [자본주의와 정신불열- 앙띠 외디푸스](1972)를 통해 ‘탈주’를 하나의 방책으로 제시했다. 벗어날 수 없는 편집증적 사회의 망(網)들 속에서 개인은 편집증내지는 분열증을 띌 수 밖에 없다. 체제에 순응하는 순간 편집증에 사로잡히고 벗어나려는 순간 분열증에 빠질 수밖에 없다. 편집증과 분열증은 구분할 수 없는 동전의 양면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개인의 상태이다. 들뢰즈와 카타리는 융이나 라이히라는 선구자가 있지만 무의식이라는 것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우회적인 자본주의 비판을 수행한다. 영화에서 폴은 자본주의적 관계 맺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분열증적 모습을 보인다면 잔느는 자본주의적 관계 맺기에 집착하는 편집증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좌파 작가의 아들인 베르톨루치는 영화와 인연을 아버지와 절친했던 좌파 감독인 파솔리니 감독의 조수로서 시작하였다. 파씨즘 체제의 음모를 폭로하는 ‘거미의 계략’과 ‘1900’이란 영화를 통해 좌파 감독의 대열에 들어섰다. 그러나 ‘마지막 황제’등으로 그간의 평가를 배신하는 듯하더니 최근 68혁명을 소재로한 영화(몽상가들)로 논란을 만들었다.

‘파마탱’ 곳곳에 감독 자신의 전력과 회한 그리고 불같이 시작되었다가 급격히 사라진 68혁명의 좌절이 영화 여기저기에서 짙은 패배의식으로 묻어나고 있다.

20세기 초반 아르헨티나에서 이민자들에 의해 만들어져 유행된 ‘탱고’는 오늘날 가장 퇴폐적인 춤 형식의 하나이다. 남녀가 밀착되어 녹아내리는듯 우수 짙은 선율에 몸을 맡기는 춤에서 과거는 없고 미래에 대한 전망은 발견할 수 없으며 오직 현재만 있는 듯하다.

탱고를 추는 무도장에서 마지막으로 폴은 잔느와의 관계의 진전을 시도하지만 이미 ‘기괴함’의 거북함을 감지하고 ‘편안함’에 마음을 둔 잔느를 되돌릴 수는 없다. 과거를 버리고 현재에 충실하려고 하는 폴에 비해서 현재에 충실했던 잔느는 이제 미래를 본다.

마지막 잔느의 아파트까지 쫒아온 폴은 이름 없는 강도로 주인의 정당방위에 의해 사살 당한다.

미시적 혁명, 거시 담론

68혁명은 전세계 차원에서의 운동이었는가? 아니면 봉기이었는가?

전자에 대한 평가는 주로 자유주의자들의 평가이다. 이전의 각종의 금기와 고래의 가치관에 대한 근본적인 반대와 회의가 시작되는 계기라는 것이다. 실제로 ‘반전’과 ‘평화’가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었으며 환경문제와 소수자 문제 여성문제 등이 중요한 이슈가 되어 때로는 자본주의의 근본적 모순(착취관계의 재생산)을 능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68혁명은 현재 진행형이면서 실패하지 않은 혁명이다.

그러나 봉기의 차원에서 보자면 미쳐 횃불도 들기 전에 꺼져버린 횃불이다.

미시적 권력관계에 초점을 두고 투쟁했던, 지도부와 핵심 없는 수많은 리좀적 투쟁과 구호속에서 권력과 자본은 성적 자유와 문화적 차원에서의 허용의 확대는 허락했지만 자신의 양태를 케인즈주의 자본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 확대 강화하면서 본질은 굳건하게 지키고 개인과 사회의 조작과 통제를 오히려 고도화하였다. 허용할 듯 하면서도 핵심은 꽉 쥐어 잡고 변죽만 울리는 형국!

언제든지 국가와 자본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동원하여 개인들에게 또 다른 방식으로 기존의 가치관과 이데올로기를 강제한다. 미시적 차원의 허용을 용인하는 듯 하다가도 어느 순간 일거에 회수해버린다. 현재 각종의 사회운동 분야가 일정정도 진지를 구축하고 있다.

그러나 그 진지는 대륙이 아닌 섬이 아닌지.......고립되어 있으면서 다른 진지와의 연결점 없는 수 많은 산개한 섬들.....

그렇기 때문에 봉기여야 한다. 아직 끝나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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쁘티의 심리 - 왜 2mb가 청와대에 있을까?

 

“ ‘원한의 인간’은 숨는 것, 비밀통로들 그리고 뒷방을 좋아한다.

그는 어떻게 침묵하는지를 ,어떻게 잊지 않는지를, 어떻게 기다리며 그리고 어떻게 임시변통적 자기 비난과 자기 비하를 하는지를 이해함으로써 모든 가려진 것들에 의해  그는 그만의 ‘세계’, ‘안정’, ‘상쾌함’이 전부인양 주술에 걸린다. ”(니체 ‘도덕의 계보’에서 ) 


니체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이런 인간은 ‘삶을 긍정하는데’에는 거의 관심이 없는 본능적인 자기 확신과 자기 보존에 의해 추동된 자기 중립적이고, 독립적인 ‘주체’- 자아-의 믿음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여러 가지를 상상해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데까당스의 철학자 니체는


도래하고 확장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자 계급의 성장에 대해서는 의도적인 무시로 일관했고


헤게모니의 장악한 부르주아 계급에 대해서는 목가적인 한탄을 통해 비하했습니다.


결국 퇴행적 철학체계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글귀에는


광기의 저편에서 예리하게 사회와 사회 구성원의 의식을 분석한


번뜩이는 경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위의 글은


20년대 도래했던 파씨즘에서의 대중의 역할과 심리를 예연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현 우리 사회의 대다수의 쁘띠들의 심리이기도 하고요....


경제 살리기라는 은밀한 통로로 자신의 역동적 삶을 회피하고

대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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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는 반역이다!

티벳을 여행하는 동안

 

중국 젊은이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에서 절대로 빠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은

 

바로 '역사'문제!

 

본인도 뇌속에서 민족주의의 오염물이 다 빠지지 않은 관계로

 

흥분하게 될 수 밖에 없는 상황까지 가게 된다.

 

이미 중국은 천안문 사태이후 그리고 89년 티벳트 시위와 신장위구르에서 벌어지는

 

이슬람 교도들의 독립 운동 움직임에 대처하기 위해 엄청난

 

한족 중심의 역사 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그들의 논리는 간단하다.

 

아무리 예전에 여타의 민족들이 중국을 지배하고 나름대로의 문화와 역사를 가지고 ㅇ

 

 

있다고 하더라도 중국인들의 대답은 한마디로 간단하다.

 

"예전에 그런 역사가 있는것 다 인정한다. 그러마 그들은 고대 중국의 한 민족이었다."

 

결국 새빠지게 얘기를 하더라도 한마디로 "그들은 우리이다"라는 말로

 

모든 것을 정리한다.

 

작금의 티벳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당나라때 티벳의 독립 왕국이 세워지고 당시 당나라의 수도를 점령했었다는 사실을

 

다 인정한다. 그러나 결론은 "어쩌라고 그 티벳인들이 중국사람인데! 중국 사람들이 중국을

 

통치하고 다스렸는데 무슨 문제?"

 

고구려의 역사와 관련된 동북공정의 결론도 위와 같다.

 

힘겹게 이에 반응하는 우리들도 우습게 되는 대목이다.

 

현재 중국은 내부적 계급 모순이 심각한 상황이다.

 

지역별, 계층별, 거기다 민족별 빈부격차를 포함한 사회경제적 차이는

 

상상을 넘어서고 있으며 사회의 심각한 갈등의 직전까지 치닫고 있다.

 

마오의 사망이후

 

78년 이후 개방화정책 (자본주의의 원시축적 모방)이 시작되고

 

이런 갈등과 모순의  분출의 시작이 89년 대학생을 중심으로하는

 

천안문 사태였다.

 

중국공산당의 주자파(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하는 테크노크라트와 그의 족벌)들은

 

인민해방군을 앞세워 인민들의 요구를 총알과 탱크로 받아쳤다.

 

이제 20년이 지났다.

 

20년 가까이 진행되어온 한족 중심의 민족 교육이 새로운 중국인들

 

신세대들의 머리속을 오염시켰고, 여기에 역반응으로 중국의 소수 민족들

 

역시 계급의 모순보다는 민족의 지배와 피지배를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베이징 올림픽이 치뤄진다.

 

올림픽이라는 것 자체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의

 

쇼비니즘과 나쇼날리즘의 향연이 열리는 질뻑한 야음의 무대임를 감안할때

 

이 시점 중국의 올림픽 개최는 시기적이로 적절(?)하다.

 

오성홍기를 성화봉송을 환영하는 차원에서 들고 환호하는 오늘날의 신 중국인들을 보면서,

 

민족주의의 발흥의 시기가 도래하는 모습을 보면서

 

모골이 송연해진다.

 

뱀꼬리

 

1.티벳 독립을 민족주의적 관점(동아, 조선 등 자본가 계급지들이 유포하고 서경석등 우파들이 주장)

은 매우 위험하다.

 

2. 티벳 독립을 개인의 양심이아 종교적 관점(쁘띠 부르주아적 관점으로 우리나라의 많은 티벳동호회들과 한겨레 신문의 관점)은 사태해결과 문제 해결에 절대 도움이 되지 않고 민족주의 관점에 결국 포섭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실제 티벳 현지의 민중들은 달라이 라마의 종교적 지도자는 당연히 인정하지만 과거 달라이 라마와 소수 귀족들의 봉건제 착취 형태의 경제와 정치 구조는 거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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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스 로마나, 팍스 브리타니카 그리고 팍스 아메리카나

 

팍스 로마나, 팍스 브리타니카 그리고 팍스 아메리카나

들어가면서 

  세계 역사를 바꾼 한 순간을 나름대로 꼽아본다. (한 개인의 선택에서의 가정도 의미 없는 일이라고 하는데  세계 역사에서 가정이란 정말 의미 없는 일이지만 추운 겨울날 밤도 길고 심심파적이라고 생각해주시기를!) 가까이부터 보자. 한반도에 있어서 고구려의 나당연합국에 의한 멸망? 그럼 어떻게? 고구려가 중심이 되어 삼국을 통일한다!! 민족주의자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후의 역사전개에 큰 이변을 가져오지는 못할 듯 하다. 항우의 유방에 대한 승리는 어떨까? 아마도 ‘사면초가’가 ‘사면한가’로 바뀌었을 것이고 경극 ‘패왕별희’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서양을 살펴보면 알렉산더의 장수와 제국의 확대는 어떨까? 기왕에 알렉산더 당시의 지중해 연안의 인간들의 세계 인식은 소아시아와 그리이스 그리고 북아프리카와 인디아 정도라고 볼 수 있으니 32살에 요절한 것이나 차라리 70살 넘어 천수를 누리는 것이나 알렉산더의 제국은 차이가 없을 듯 하다. 카이사르의 암살과 아우구스투스와 안토니우스 그리고 클레오파트라와의 대결은 어떨까?

 

영웅인가? 학살자인가?

  로마의 영걸 카이사르는 온 몸에 피를 뒤집어 쓰면서 서유럽을 로마의 영토로 편입시키면서 본격적인 제국의 시대를 연다. 시오노 나나마는 [로마인 이야기]를 쓰면서 입에 침이 마르게 카이사르를 칭송한다. 심한 인종주의자 정도는 아니지만 시오노 나나미는 그의 책 여기 저기에서 거침없이 기독교와 유대인에 대한 그의 편견을 내비친다. 아울러 힘에 대한 숭상과 ‘질서’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폭력과 살육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는 극우 보수주의자이다. 지금의 프랑스와 스페인 그리고 독일에서 ‘로마의 안전보장’이라는 명분으로 벌어진 수십만의 학살과 문화 파괴와 정복을 로마인의 편에서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그를 보면 다음으로 그가 저술할 책이 “혹시 히틀러의 ‘제 3제국’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예초에 조그만 도시국가에서 출발한 로마는 주변의 부족과 도시를 정복하면서 이탈리아 반도에서 세력을 확대하고 지중해의 지배자였던 페니키아 인들의 ‘카르타고’와 격돌하게 된다. 한니발과 스키피오와의 대결로 유명한 카르타고와의 전쟁은 지중해의 유일한 패자로 로마서 서게 되었다는 점뿐만 아니라 전쟁중 세습귀족 계급(파트라이키)의 쇠락과 신흥 기사 계급(에퀴타스)의 부흥을 가져오면서 로마 과두정체제의 한계가 노출된다. 소수 세습귀족에서 운영되던 원로원 중심의 과두제 체제에 신흥기사계급이 월등한 경제력과 수적 우세로 위협을 하게 되는 것이다. 카이사르 이전에 그라쿠스 형제의 암살과 마리우스와 술라의 대결은 모두 사회 경제체제의 모순으로 인한 내란 내지는 혁명과 반혁명의 상태였다. 웅장하고 화려한 로마의 유적을 보면서 하얀 대리석의 로마 석상들을 보면서 생각하는 로마의 모습은 투쟁과 갈등과 피의 연속의 로마역사와는 너무도 다르다.

  첨예한 계급 갈등 속에서 카이사르는 해결책을 제국주의에서 찾는다. 세습귀족 계급의 기득권을 보장하면서 신흥 기사 계급 등을 위한 토지와 자원을 이탈리아 반도 밖에서 찾는다.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화’라고 말하는 정복과 약탈을 통한 경제체제의 수립을 꾀한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시작된 원로원과 폼페이우스를 중심으로 하는 세습귀족세력과의 내전이 마무리 되었음에도 숙청을 하지 않은 것은 카이사르의 ‘클리멘티아(관용)'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고 100여년 간의 내전 속에 세습귀족 자체가 수적으로 적어져서 세력이 거의 미미해 졌으며 숙청을 통한 계속되는 무리한 계급 투쟁과 내전의 불필요성을 없애기 위해서다. 이런 측면에서 안토니우스와 아우구스투스의 투쟁에서 아우구스투스의 승리는 예견 가능하다. 세습귀족의 계급과 연계를 가지고 있는 세습귀족 출신의 안토니우스와 비록 카이사르와는 외가쪽에 연결되어 있지만 할아버지의 이력조차 알려지지 않은 옥타비아누스(후에 아우구스투스)는 신흥기사계급의 세력에 기반을 하고 있어 악티움 해전에서 클레오파트라와의 연합군을 무찌르고 당당히 제정을 열게 된다.

  

전성기의 영국의 식민지 지역

양들이 사람을 잡아 먹는다!!

  영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좁은 섬나라에서 수 많은 영지로 나뉘어서 농업을 기반으로 하던 봉건제 사회에서 봉건 귀족의 입장에서는 왕이란 결국 자신의 계급의 일부이며 강력한 왕권의 존재는 불필요하다.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시작되면서 자급자족적 농업 경제체제의 한계를 신흥 계급(부르주아지)는 생득적으로 느끼게 된다. 봉건귀족 세력과의 한판 싸움이 시작된다. 마치 로마 오현제 중에 하나인 철인황제(哲人皇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공익을 우선’으로 하는 스토아 철학이라는 이데올로기로 무장하고 제국을 이끌었듯이 부르주아는 자유와 평등 그리고 사유재산이라는 이데올로기로 무장했다. 양들이 농민을 몰아낸 것이 아니고 사유재산이라는 ‘복음’을 통해 봉건귀족의 몰아낸다.

이윤축적에 신들린 듯한 생산력의 폭발은 새로운 시장과 원료 공급처를 필요로 한다. 흡혈귀가 하루하루 연명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피가 필요하듯이 신대륙(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지역을 의미한다.)에 대한 정복과 착취의 시작이다. 19세기 영국은 잘 알 듯이 ‘해가지지 않는 나라’로서 전세계의 공장역할을 하면서 최전성을 구가한다.

로마의 황제와 제국주의가 천재적인 카이사르 개인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았듯이 영국의 제국주의 역시 엘리자베스 I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역사의 종언?, 자본주의의 우월성?

  1989년 헤겔의 역사 철학을 속류화한 일군의 학자들이 ‘역사의 종언’을 합창한다. 때마침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연쇄 붕괴와 뒤이어 소련의 해체가 뒤를 이었다. 그들의 합창은 천상의 목소리 인양 간주되었다. 역사의 종언이라는 것은 종말이나 멸망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직 ‘민주주의 대의체제’의 승리 솔직하게 얘기하면 ‘자본주의’의 우월성과 진리성을 의미한다. 대결에서 한쪽의 몰락은 다른 쪽의 승리를 의미하지만  결코 이긴 쪽의 우월성과 진리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한쪽의 승리가 영원이 지속되지도 않는다. 91년 걸프전의 발발로 상대방 없이 시작되었던  미국의 일방독주 시대(팍스 아메리카 라고 하겠다)는 삐걱거렸으며 자본의 세계화로 재편하던 지구화 시대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다양한 계층과 계급의 봉기와 거부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ATTAC과 멕시코 남부 치아파스에서 벌어지는 사파티스타 운동 그리고 미국의 앞 마당인 중남미의 쿠바와 베네수엘라의 실험들......

  독일에서 ‘반세계화 운동의 교황’이라고 불리는 엘마 알트파터는 이런 자본주의 체제 외부의 충격과 아울러 차분하게 자본주의 체제 내적 모순을 설명하고 있다. 하나의 사회경제체제의 혁명적 변혁은 외부의 충격만으로 가능하지 않으며 내부의 첨예한 모순의 폭발을 기폭제로 필요하다. 이런 차원에서 과연 현재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과연 최상의 경제 체제인지 그리고 문제가 없는지에 대해 화석자원의 희소성과 그에 따른 자본주의의 계속적 성장에 근본적인 회의를 하면서 구체적 예를 들고 있다. 






알렉상드르 카바넬이 그린 클레오파트라

반세계화 시위에 참여한 이탈리아 노조원들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변명

  지중해 건너 아프리카의 풍요로운 신들의 땅. 이집트의 아름다운 여왕인 클레오파트라는 이미 즉위 이전부터 로마의 사실상의 속국의 형태에 들어갔었다. 죽은 부왕 프톨레마이오스는 유언의 집행자로 국가 ‘로마’를 지정했으니 동아시아적 형태로는 중화와 주변국가의 ‘조공’ 형태보다도 더 기속력이 강한 지배권을 인정하고 있었다. 뛰어난 능력과 임기응변으로 카이사르 생존시에 이미 어느정도의 자치를 이루었으며 기원전 31년 9월 그리이스 서부에 위치한 악티움 해전으로 로마 제국과 정면 승부를 겨룬다. 한 사람의 왕이 자신의 주권과 영토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라고 볼 수 있지만 강력한 제국이 되어 가고 있는 로마에 저항하고 싸움을 건 그녀의 행위를 제국주의 정책에 대한 저항이라고 한다면 너무나 큰 의미 부여일까?

  클레오파트라의 원수는  그녀 사후  수 백년이 지나 이슬람세력의  확대와 게르만 제 종족의 이동으로 이루어졌다. 지중해권 중심의 경제체제가 이슬람세력에 의해 곳곳에서 막히게 되면서 교역에 이상이 생기는 등 동맥경화 증상이 나타나면서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곧 체제의 붕괴에 이르게 된다.

전지구적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이 발효하는 가운데 세계 곳곳에서 여러 계급이 계층이 또는 ‘다중’의 활발한 활동과 투쟁을 하는 자본과 미국 중심의 전지구적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여러 ‘클레오파트라’들이 나날이 늘어가기를....



[로마혁명사 1, 2] 로널드 사임  한길사

[로마인 이야기 1-15] 시오노 나나미 한길사

[자본주의의 종말] 엘마 알트파터  동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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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 유랑기

 

 

 티벳 유랑기 

靑藏열차를 타고 티벳으로 

 12월 대선이 끝나고 어수선한 연말연시를 뒤로하고 07년 마지막 날 북경행 비행기에 올랐다.

중국도 그렇지만 한국도 이제 양력의 설은 무의미한가 보다. 오후에 떠나는 비행기에 자리가 헐렁하게 비어있다. 한 시간 남짓 승무원이 주는 밥을 먹고 맥주 두 병을 마시고 나니 북경 수도 공항이라고 한다. 1000킬로미터 남짓이니 가깝기는 가깝다. 어둠이 내린 북경은 늘 그렇듯이 스모그가 낮게 깔려 있고 연탄이 탈 때 나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  8월에 올림픽이 열리니 여기 저기 새로운 건물들이 무서운 속도로 들어서고 있었다. 40여분 만에 북경 시내에 도착을 하고 천안문 근처의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근처 가게에서 독한 빼갈을 큰 병으로 하나 사고 택시를 타고 북경서역으로 향한다.

  중국에서 가장 큰 역중에 하나라서 그런지 항상 사람으로 붐볐다. 원칙적으로 외국인의 경우는 티벳으로 가기 위해서는 중국 당국의 허가서를 받아야 한다. 긴장을 하고 표를 내미니 역무원이 개찰을 하면서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성공이다’ 초록색의 육중한 북경발 라사행 T-27열차에 오른다. 9시 반에 출발해서 이틀을 달려 46시간여 만인 저녁 8시에 라싸에 도착한다고 한다. 장시간 기차여행의 경험이 한국에 태어나 살아온 나로서는 없었으니 걱정이 앞선다. 예상대로 출발 전 이미 기차는 꽉 차있었다. 같은 칸의 승객들과 인사를 나누고 양치를 하기 전에 술을 마신다. 빼갈의 장점은 빨리 술기운이 몸전체에 퍼진다는 점이다. 양치를 하는데 몸이 휘청인다. 창 밖으로 불빛이 빠르게 지나가고 한 두 시간 간격으로 잠을 깨고 다음날 새벽 서안을 지나고 저녁에는 란주에 그리고 3일째 아침에 서녕에 도착한다. 정차한 틈을 이용하여 기차 밖으로 나와 대륙의 찬 공기를 한껏 폐속에 집어넣는다. 청해성의 성도인 서녕을 지나니 6명이 정원인 침대칸에 달랑 승객은 나와 세 살배기 아이를 둔 엄마만 있다. 올해 28살의 ‘스이’의 엄마는 서안 주변의 농촌에서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는데 남편이 3년째 라싸에서 노동일을 한다고 한다. 다시 10여시간을 달려니 거얼무 자정이 한참지나 새벽에  꺼얼무에 도착한다. 靑藏(칭짱)철도가 놓이기 전까지는 선로는 꺼얼무에서 멈추고 꺼얼무에서 라싸까지는 靑藏공로를 이용해서 15시간을 가야만 했었다. 지금은 철로가 놓여서 10여시간만에 라싸에 다다를수 있게 되었다. 자리에 누워 불면의 밤을 보내니 어느덧 새벽이 다가 오고 있었다. 하늘의 별들의 빛이 약해지고 지평선 저 너머로 희뿌연 가느다란 빛이 올라오고 있었다. 집들도 보이지 않고 저 멀리 산들이 보이는 평원 한 가운데를 기차는 쉼 없이 달린다. 기차에 있는 전광판에는 해발 고도가 이미 4000미터를 넘고 있었다.  투통과 소화불량 그리고 심장 박동의 이상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같은 칸의 스이 엄마는 고산증 증세가 심하게 나타나나 보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맥을 놓고  누워만 있다. 나도 식욕이 없어 맥주만 마시게 된다. 환한 아침이 되자 순정무구한 티벳의 대지가 눈에 확 들어온다. 저 멀리 만년설이 덮힌 설산이 보이고 간혹 야생 당나귀와 야크 무리가 기차에 놀라 뛴다. 라싸 중심지에서 남서쪽에 위치한 역에 도착 하고  티벳 사람의 자가용을 얻어 타고 시내로 향한다. 광장에서 조명을 받은 포탈라 궁전이 궁전 건너편 중국이 연못을 메우고 만든 광장을 굽어보고 서있었다.


(조캉 사원 근처 바코르에서 설날을 맞아 라싸로 온 순례객들이 점심을 먹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 그리고 사람들

  동이 트기 전인 7시 즈음 티벳 각지에서 온 순례객들만이 바코르를 순례하고 조캉사원에 있는 당나라 태종때 문성공주가 가져 왔다는 12살 석가모니불을 친견하기 위해 줄을 길게 서고 있었다. 티벳의 순례객들에게서는 어른이나 아이나 할 것 없이 같은 냄새가 난다.  불교 사원에서 염원을 하면서 사르는 향냄새와 젖먹이 아이들에게서 나는 우유냄새. 두 냄새가 티벳 사람들의 삶을 대강 설명한다고 할 수 있다. 티벳 사람들의 종교적인 면과 유목 생활을 통한 쇠고기와 우유를 즐겨 먹는 그들의 식생활이 녹아 있다. 티벳이라는 나라를 알게 되고 티벳의 역사와 현재 상황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티벳의 독립’이 절대 절명의 진리처럼 여겨졌던 적이 있었다. 중국의 강제적 점령과 티벳 문화의 말살을 통한 중국으로의 동화. 수백만 티벳인들을 학살하고 중국 한족의 대량 티벳 이주로 인한 티벳의 중국화. 이 모두는 티벳이라는 성스러운 나라와 성스러운 민족에 대한 절대악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대책으로는 티벳의 독립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티벳 사람들과의 대화 그리고 티벳 현지에서 본 티벳의 현실이 다가오면서 조금씩 생각이 변하기 시작했다.

  현재 티벳의 공식적인 명칭은 西藏(시짱)자치구로서 중국의 행정 구역상 하나의 省(성)에 속한다. 59년 중국인민해방군의 점령이후 50여년 간 지속된 중국화 정책으로 티벳의 인구의 절반은 한족이 차지한다. 실제 티벳의 수도(성도)인 라싸의 경우 포탈라 궁과 조캉 사원 근처 지역을 제외하면 다른 지역은 티벳인 보다 한족이 숫적으로  우세한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라싸시내는 물론이고 시골에서도 한자로 쓰여진 간판들과 한족의 문화는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티벳 고유의 것들을 빠른 속도로 사라지게 하고 있다. 게다가 인적이 드문 오지에까지 설치된 군부대를 보면 티벳의 얼마남지 않은 고유성 조차도 시간 문제인 것 같아 보인다.

 

(포탈라 궁전 앞 광장의 중국공산당이 세운 기념비를 경비하는 중국 인민 해방군)



철도가 개통되면서 한족의 티벳 이주는 가속화되고 있다. 현재 사천성의 충칭이나 청뚜는 물론이고 수도인 북경에서 그리고 저 남쪽 홍콩의 옆인 광쩌우와 상하이에서 티벳의 라싸까지 직통열차가 연결되면서 새로운 신흥개발지인 티벳으로의 가난한 한족 농민들의 이주는 간편해졌다. 새로이 건설되는 건물이나 대단위 아파트 단지에서 힘겹게 일하는 한족 이주 노동자들과 저 멀리 야크를 방목하다가 또는 농사를 짓다가 추수를 마치고 설날에 즈음하여 라싸로 성지순례를 온 때묻은 티벳 전통 복장의 유목민들과 농민들을 보면 얼굴과 체격의 차이가 있을 뿐 힘겨운 삶의 무게는 차이가 없는 듯 하다.


2002년 처음으로 티벳에 갔을 때만 하더라도 관광객의 대부분은 한국인을 포함한 서양의 외국인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중국의 경제 성장과 더불어 관광수요의 폭증은 티벳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몇 몇 서양 단체 관광객들을 제외하고는 광동지방이나 북경에서 오는 중국인 배낭여행객들의 숫자가 두드러지게 늘어난 것으로 보였다. 그들의 기호에 맞는 식당이나 술집이 포탈라 궁전을 조금 벗어난 지역에 즐비하게 들어서면서 조캉사원 주변의 바코르가 맡았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티벳인들이 밀집한 이 지역은 저녁이 되면 용량 문제로 자주 정전이 되었지만 새로운 한족의 환락가는 정전을 모르고 밤이 되면 각종 식당과 유흥업소의 네온사인이 여타의 중국 대도시와 다르지 않게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티벳의 과거와 티벳의 미래

  티벳의 한족화는 5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지금도 중국 당국이 세운 학교를 통해서 티벳어와 문자는 잊혀지고 한자와 한문이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티벳의 정치적, 종교적 유일한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의 망명과 더불어 새로운 티벳 세대들의 세속화는 학교 교육이라는 미명하의 한족화와 중첩되어 가속화 되고 있다. 이전에 할리우드 영화를 통한 서구화는 한류라는 이름의 한국 영화와 드라마의 유입이 더해져  급속히 티벳 청소년들 사이에 확산되고 있다. 이들 새로운 티벳의 젊은 세대들은 과거의 전통과 종교 그리고 티벳의 독자성을 부정하기에 앞서 잊은 상태로 태어나 성장하고 있었다. 

우연히 티벳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중국의 북경에서 대학들을 마치고 공무원으로 그리고 교사를 하는 소위 ‘인텔리’라고 할 수 있는 친구들이었다. 그들의 공통적인 점은 서구화에 경도 되었지만 여전히 티벳의 전통적 종교에 대한 신심은 두터웠다. 몰래 조그만 목걸이를 만들어 달라이라마의 사진을 지니고 다닐 정도로 현 달라이 라마에 대한 존경심도 대단했다. 그러나 그들의 달라이 라마의 세속적 권력에 대해서는 대단히 부정적이었다. “중국이 침공하지 전에 티벳은 소수의 특권층이 지배하는 계급사회”였다라고 분명히 비판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국으로부터의 “자치와 독립은 원하지만 과거처럼 신권정치 형태는 반대한다”라고 말을 했다. 아울러 중국이 티벳을 침공할 당시의 “200만명의 양민학살을 잊지 않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80년대 이전까지의 중국 공산당의 티벳에 대한 내치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90년대 이후 특히 89년 천안문사태 이후의 중국공산당의 티벳에 대한 더 나아가 중국 전체에 대한 정책에 대해서는 비판을 삼가지 않았다. 자리에 함께 늘 했었던 한족의 중국인 친구도 상당부분 티벳의 자치와 독립에 공감을 표명하면서 중국 공산당의 무늬만 사회주의 슬로건에 대한 심한 혐오감과 나날이 확산되는 계급간의 그리고 민족간의 모순과 분열 그리고 갈등을 우려하고 있었다.

독립과 자치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한결같이 “중국의 문화와 교육을 통한 한족화로 인한 티벳인들의 자치 능력의 저하를 우려”했으며 서부대개발이라는 명목하에 벌어지는 티벳의 부존자원에 대한 무분별한 개발과 티벳  제의 중국 의존성 심화를 이유로 들면서 상당기간 능력을 배양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민족을 넘어 People로

티벳에 머무는 기간 많은 서구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수 있었다. 대개는 관광객이었지만 많은 수의 서구인들은 영어권 나라에서 온 중국 현지의 학교의 영어 교사들이었다.  그중에 미국 오레곤중에서 온 A라는 친구는 홍콩 옆의 션쩐의 외국어 학교에서 작년 여름부터 초등학생을 상대로 영어를 가르치는 신출내기 교사 였다. 나름 영어를 모국어로 둔 덕분(?)에 세계 곳곳을 누비며 돈도 벌고 여행도 하는 그가 부럽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가 중국에서 한국돈 60여만원을 받고 영어를 가르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들으니 세계 최고의 부자나라라는 미국의 일반 시민들의 사상누각의 삶이 안타깝기도 하였다.

A는 백남준과 같은 비디오 아티스트가 꿈이라고 한다. 당연히 전공도 비디오 아트이고 졸업후 당장의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 중국영어교사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대형 마트의 매니져 였으나 50세 이후 정리해고 상태이고 바로 밑의 동생은 소아당뇨병으로 18세에 돌연사망했으며 중국에 있는 동안 여동생도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고 하면서 자신도 “올해 6월 말 미국으로 돌아가면 의료보험 혜택이 없는 상태”라고 하면서 걱정을 하고 있었다. 꾸준히 지속되어온 미국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단란하고 평범한 한 미국의 가정의 가장 큰 고민거리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낙천적이고 너그러운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얼핏 보면 걱정없는 미국의 20대 청년으로 보였지만  커다란 여행용 배낭보다 더 무거운 제도적 모순을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친구의 뒷 모습을 보면서 그 날 저녁 남은 친구들과 만취를 할 수 밖에 없었다.

티벳의 억압받는 티벳인들, 하루 하루 먹고 살기가 버거운 티벳에 온 한족 이주노동자들, 그리고 세계 최고의 부자나라 미국에서 온 영어 선생. 모두들 얼굴과 언어 문화 그리고 핏줄과 인종은 다르지만 하나로 묶을 수 있었다. 바로 억압받고 고통받는 ‘인간’이라는 틀이었다. 따지고 나누고 분류할 필요없이 ‘인간’이라는 점을 술 기운을 빌어서 토로를 했고 친구들도 선선히 수긍했었다. 그 날 술집 창문 밖으로 새벽 하늘에 초승달은 맑은 티벳의 대기 덕분에 밝았고 그리고 창백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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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에게 보내는 송가

 

클레오파트라 1963년


40년이 훨씬 지난 영화이다.


세기의 커플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리차드 버튼이 각각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를 맡아 현실같은 연기를 보여준다. 영화 크랭크인 직전인지 직후인지 둘은 결혼을 하게 되고 나중에 이혼을 하지만 극중에서는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사랑을 , 누구나 동경하는 혹은 존재하지 않는 사랑을 한다.


지금은 얼굴조차 차마 볼 수없이 많이 늙었지만 30대 초반의 ‘리즈’의 농염한 아름다움이 풍기는 영화다.

농담삼아 ‘영국의 거지는 다 리처드 버튼처럼 생겼다’라는 말이 있지만 세계적인 미남으로 리처드 버튼의 출중한 외모와 연극에서 다져진 대사도 영화를 보는 재미를 톡톡히 한다.


거기다 화려한 의상과 문자 그대로 스펙터클한 장면들....

60년대 헐리우드 아니면 어떻게!!!!

실제로 50년대 말부터 60년대 초까지 ‘벤허’, ‘쿼바디스’등 헐리우드는 말그대로 대작을 쏟아냈다. 마치 자본주의의 맹주인양 자본의 풍부함을 자랑하듯이 거대한 세트와 엄청난 인력을 쏟아 부은 대작들의 시대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의 전진이 계속될듯했던 시기

월남전에 발이 빠져 허우적 거리지도 않고 아직 달러화와 금태환이 계속되고 쌍둥이 적자라는 말도 모르던 시대에 행복했던 미국의 모습과 상황이 고스란히 영화들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들은 수십년이 지나 학창시절 단체로 학교에서 이 영화들을 보았고......

다분히 ‘헐리우드 키드’임에 틀림이 없다.


감독은 또다른 주인공인 옥타비아누스(후에 아우구스투스가 되어 제정을 열었다)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과 평가를 숨기지 않고 있다. 말 그대로 아우구스트(존엄)라는 호칭을 얻었지만 실제로는 테러블함을.....


로마제국의 권력에 저항하는 이국의 아리따운 여왕!

그리고 여왕의 비극적이면서도 드라마틱한 최후!(독사에 물려죽었다고 한다.)

누가 클레오파트라를 동정하지 않으리요!!!


거리 곧곧에는 대통령 당선자의 당선사례가 붙어있다.

‘잃어버린 10년’ 운운하면서 언론은 당선자에게 화환을 바치고 있다.

현재 우리에게는 테러블한 옥타비아누스만 있고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없음이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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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허(漠河)로 가는 방법

갑자기 모허(漠河)가 생각났다.

 

중국 최북단의 마을

 

기차역에서 140키로 떨어진

 

여름에는 해가 20시간 이상 지지 않고

 

겨울에는 영화 40도까지 내려가기도 하는

 

달랑 잡화점 하나와 쇠락한 여관한 채와 몇 몇 집들이 있는

 

하얼빈에서 기차로 18시간 정도 가야하는

 

중국의 최북단이요, 중소 접경지대인 아무르강(흑룡강)이 흐르는

 

그리고 흑수말갈의 본산지인 모허가 생각났다.

 

지난 여름 우연히 텔레비젼에서

 

모허와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잠깐 보았다.

 

"당신의 물고기는 안녕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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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요일과 희망 찾기

 

제 8요일과 희망 찾기


  프랑스의 유명 배우를 뽑으라면?  아!!! 너무 많다.

장 가뱅, 이브 몽땅, 장 뽈 벨몽도, 시몬느 시뇨레(이브몽땅의 부인), 브리짓 바르도(개고기 먹다 걸리면 이 여자한테 죽음), 알랭 들롱,제라르 드 파르듀, 이사벨 아자니( 이 여자는 나이도 안 먹는 것 같다.), 소피 마르소(초딩시절 나의 로망스!!!!), 벵상 페레. 그리고 뭐 평범하게 생겨서 인지 잘 모르는 그러나 프랑스 80년대 이후 계속적인 프랑스의 ‘안성기’ 같은 ‘다니엘 오테유’가 있다.

  이 배우가 파스칼 뒤켄느 라는 다운증후군 환자와 더불어 96년에 출연한 ‘제 8요일’이라는 영화가 있다. 하루 하루 바쁘게 살아가는 ‘일중독’에 걸려 직장내에서의 출세와 물질만을 추구하면서 결국 아내와 자식에게 버림받는 현대인의 자화상인 주인공이 우연히 수용시설에서 외출하여 가족을 찾아가는 다운증후군 환자 ‘조르쥬’를 만나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 영화이다.

  몇 년 만에 집에 찾아갔지만 이미 조르쥬의 사랑하는 엄마는 돌아가시고 하나 남은 그의 누나와 그 가족은 조르쥬를 반기지 않는다. 조르쥬와의 의도하지 않은 ‘동행’,‘동거’를 통해 주인공은 가족과 사랑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고 결국 자신이 조르쥬에 의해 ‘구원’받게 된다. 그러나 구원자 조르쥬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되고........

  

  가족중심의 부르주아 가치관의 포장과 확대 재생산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는 영화이다하지만 목적 없이 또는 허상의 목적을 추구하면서 자신을 파괴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인간의 삶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도 있다. 직장내에서의 성공과 더 좋은 자동차, 비즈니스 석으로의 해외 여행, 주말의 골프 투어를 인생에서의 성공으로 그리고 목적으로 삼고 자신을 하루 하루 옥죄고 파괴하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현대인의 삶!

  비정규직 노동자나 비취업자의 경우는 이런 그들의 목적자체가 이미 그림의 떡이라는 희망을 넘어 절망의 상징으로 보여질 수밖에 없는 현실!

또 다른 사회에서의 또 다른 삶의 방식은 분명 자본주의 물질 세태를 넘어서는 그 무엇인가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다만 조르쥬의 자살을 통한 주인공의 ‘구원’이 시사하는 바는 이런 일들의 어려움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다. 단, 수 많은 조르쥬의 행동은 이런 비극을 피하게 할 수도 있다라는 희망을 가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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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인 스포팅과 다람쥐 쳇바퀴

 

트레인 스포팅과 다람쥐 쳇바퀴


  이완 멕그리거를 일약 세계적 스타로 등극시킨 영국 영화는 빠른 영어(이것도 잉글랜드 영어가 아닌 스코틀랜드 영어로 거의 뭔 말인지.....)와 70년대 브리티쉬 록음악이 결합되어 90년대 불황기의 신자유주의 절정의 대처와 그녀을 뒤이은 보수당 정권하에서의 영국의 젊은이들의 출구없는 쳇바퀴를 보여주고 있다.

  버릇없는 그리고 도저히 감화할 수 없는 청소년 범죄를 저지르는 청소년들의 자기 파괴적 행동을 통해서 약물 중독과 비행의 일상화를 보고 만다면 작가와 감독의 이야기하는 바의 절반만 이해하는 것은 아닐는지....

주인공과 그 친구들은 약물중독에 빠져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마약 투여가 아니면 음주에 그리고 또 돈이 떨어지면 범죄를 저지르고 급기야 환각 상태에서 한 여자친구의 아이를 ‘미필적고의’에 의한 살해까지 저지른다

마지막 주인공과 친구들은 공모하여 스코틀랜드에서 런던으로 진출하여 한 탕 크게 저지르고 환호를 지르고 그러나 주인공의 배반으로 그들의 범죄 행각은 막을 내린다. 마약 밀매를 통해서 엄청난 돈을 가지자 주인공이 돈을 독식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고자 하는 것이다.

엔딩 타이틀이 나오기 전에   Underworld의 Born Slippy (NUXX)가 흘러나오면서 주인공은 힘차게 이른 아침의 런던을 걷는다. 그리고 나오는 독백!

“초대형 텔레비전, 치아를 포함한 개인 사보험, 골프 클럽, 해외로의 바캉스, 넓은 집 등등”

  자본주의의 경쟁과 배제의 사회에서 음지로 전락한 주인공이 결국 추구하는 것은 철저한 자본주의 체제로의 편입이 아닌 다른 것이 아니었다. 주인공의 앞길이 밝아 보이지만은 안은 것은 이것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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