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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Umberto D'와 전후의 이태리

 

  ‘자전거 도둑’으로  유명한 이태리의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의 다른 영화중에 ‘Umberto D’라는 영화가 있다. 2차 대전이후 혼란과 곤궁의 이태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실주의 영화 중에 한 편이다. 1952년도 작품이니까 전쟁 직후의 ‘자전거 도둑’보다는 몇 년 후의 작품이다. 이전의 사실주의의 엄격함에서 약간은 벗어난 어른들이 보는 동화 정도의 작품이다. 물론 관람 내내 주인공 움베르토 도메니코 페라리의 삶에 동정을 하고 연민도 하는 씁쓸한 작품이지만....

  줄거리는 가난한 퇴직 공무원 움베르코 도메니코 페라리는 힘겹게 연금을 받아 생활을 한다. 일가붙이 하나 없이 애견 ‘플라이크’와 수십년간 한 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다. 인플레이션에도 연금수령액의 증가는 없고 하루 하루 하숙집 주인 여자에게 지불해야 하는 돈이 버겁고 급기야 빚을 지기에 이른다. 하나씩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산들( 괘중시계, 책들)을 팔지만 빚을 갚기에는 부족하다. 급기야 꾀병 소동을 벌여 병원 응급실에 실려가 며칠 신세도 지지만 제자리 걸음. 이전에 친절했던 하숙집 여주인도 결혼 준비로 도메니코가 세든 방을 빼려고 하고 급기야 병원에 있는 동안 수리를 위해 방을 엉망으로 만들고, 사랑하는 개는 실종되고.... 마지막으로 지나가는 열차에 인생을 맡기려 하나 그것도 여의치 않고.... 결국 한 없는 길을 애견 ‘플라이크’와 걷는 것으로 영화는 마친다.

  괘중시계를 사는 이는 바로 성당 앞에서 구걸하는 거지라는 웃기는 설정, 능숙하게 병원에 자주 신세를 지는 노숙자 청년, 그리고 돈에 철두철미한 바늘을 찔러도 피 한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하숙집 주인 여자, 이태리 남부의 가난한 지방에서 돈을 벌기 위해서 로마로 와서 하숙집의 가정부로 일하는 마리아의 혼전임신 등등....

하숙집에서 유일하게 도메니코와 대화를 하는 상대인 마리아를 통해 우리는 이태리의 엄존하고 있는 지역적 경제적 차이와 불평등(부유한 북부와 가난한 남부)을 알게 해주고 전쟁 이후 어려운 이태리 경제 상태에서의 서민들의 아픔등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간간히 보이는 로마의 유적지( 특히 옥타비아누스의 동료이자 사위였던 아그리파를 기려서 세운 판테온)를 볼 수 있는 것도 영화의 한 재미이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사람 살이에 큰 차이가 있겠는가?라는 답에 차이가 없다라는 답을 해줄 수 있는 영화이다.

  다만 이태리 리얼리즘의 거장이라는 감독 비토리오 데 시카의 사회를 보는 관점은 ‘자전거 도둑’에서도 그러하지만 다분히 친자본적이라는 점이다. 아다시피 2차 세계 대전이 종점에 치닫을때 무쏠리니의 파씨쓰트 세력에 대한 이태리 전역의 빨치산 세력의 투쟁이 활발했다. 결국 전쟁이 끝나고 이태리는 좌파정권의 국가 운영이 당연시 되던 상황이었다. 이런 역사적 상황에서 감독은 사실주의의 잣대를 가지고 국가와 사회를 보고 있는 듯 하다. 골치 아픈 것도 좋지만 재미있게 한 편 영화를 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칼로리 계산하면서 피자를 먹으면 무슨 맛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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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통제 ? 욕망의 생산? 전지구적 세계화 속에서의 욕망의 사회성

 

욕망의 통제?, 욕망의 생산?

은하철도 


  고등학교 시절 즐겨 듣던 심야의 라디오 방송이 있었다. 그리 좋은 목소리는 아니었고, 일관성 있는 주장은 아니었지만 ‘대명사’와 난해한 전문용어를 섞어서 영화를 설명하는 정성일씨가 담당하던 영화음악 프로였다. 금단의 땅이었던 소비에트러시아의 ‘에이젠슈타인’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영화부터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종교적 엑스타스즘, 그리고 주윤발이가 성냥물고 마구 총을 쏘던 ‘홍콩 느와르’에서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의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까지. 종횡무진 서구와 아시아를 아우르는 그의 영화 설명에 지금처럼 자료를 구하기 어려운 시절에는 상상만으로도  즐거워하면서 방송 시간을 기다렸던 것 같다.

  그보다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깜장뿔테’ 안경을 쓰고 일요일에 방영할 영화를 설명해주던 정영일 선생이  있었다. 주말 9시에서 10시 사이 각 방송국에서는 ‘주말의 명화’니 ‘명화극장’이니 등의 이름을 걸고 고전영화들을 상영했었다. 방송 편성 기준에 따라 장면이 많이 삭제 된 체로 그리고 흑백 방송이었던 관계로 총천연색 영화도 당시의 우리의 정치 상황인양 양분법적 흑백의 기준으로 방송을 타서 브라운관을 통해 각 가정의 시청자들에게 전해졌던 것 같다. ‘잉그리드 버그만’의 초점 없는 눈빛, ‘비비안 리’의 뾰쪽한 입술, 율 브린너의 민머리를 극동의 한 꼭지에 살던 소년에게 새로운 땅과 미지의 역사를 알려주었었다.

  그 당시 기억나는 배우 중에 미남의 상징으로 일컬어지던 프랑스의 남자 배우 ‘알랭들롱’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초기작 ‘태양은 가득히’. 바다와 이국적인 이탈리아 시칠리 섬 연안의 도시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강렬했던 젊은 알랭들롱의 눈빛이 기억에 남는다.

 

  주인공 ‘톰’은  ‘필립’을 이탈리아에서 미국의 집으로 데려오면 거금의 돈을 받기로 하고 부호인 필립의 아버지의 부탁을 받고 필립에게로 간다. 그러나 필립은 요지부동! 급기야 톰의 존재에 부담을 느낀 나머지 필립은 오히려 톰을 미국으로 되돌려 보내려고 한다. 결국 최후의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다. 빈털터리로 고향으로 돌아가는냐 아니면 멋진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느냐! 사건은 햇살 작렬하는 지중해의 바다 한가운데 호화 요트에서  발생한다. ‘이방인’의 뫼르소의 햇살 가득한 지중해 연안의 북아프리카 어느 도시에서의 정오의 살인은 자기 실존의 확인을 위한 절규적 살인이었다면 단도로 필립을 살해하고 시체를 돛으로 감싸 바다에 버리는 톰의 살인의 자기 파괴적인 멸존적 살인이다. 앞의 살인이 정신적 자기 실존 확인을 위한 정신적 살인이라면 톰의 살인은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완전 연소시키고 새로운 육체와 정신을 위한 자본주의적 물질적 살인이다. 살인 후  부호의 아들인 또 다른 필립으로 가난뱅이 톰은 로마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그러나 또 다른 살인을 저지르고 마지막에 필립의 연인이었던 ‘마르쥐’의 사랑도 얻고 완벽하게 인생역전이 성공하나 싶더니 어처구니없이 버렸던 필립의 시체가 요트의 줄에 걸려 바다로 사라지지 않고 인양되는 순간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통속적인 줄거리에 복잡하지 않는 인물들의 성격 설정 그리고 ‘권선징악’의 단순한 주제. 그러나 이 영화가 기억에 남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알랭들롱의 마지막의 강렬한 눈빛이다. 1960년에 제작한 영화이기에 당시 그는 20대 초반의 신인이었다. 70년대 들어 ‘프렌치 느와르’ 류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한껏 주가를 올렸던 알랭들롱의 전성기와 10여년의 차이가 있다. 70년의 그의 눈빛은 세상에 대한 달관 내지는 절망에서 오는 피곤한 사람의 단발마적 인 것이라면 ‘태양은 가득히’에서의 그의 눈빛은 청년의 주체할 수 없는 희망과 세계에 대한 맹목적인 욕망에서 우러나오는 절규하는 ‘주어’ 없는 눈빛이다.

  생산력의 무한한 확대를 꿈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연적인 소비의 무한한 확대는 필요충분조건이 된다. 확대된 생산력에 의한 상품의 무더기를 보면서 자본주의는 상품의 생산 말고도 ‘소비의 무한한 확대 생산’을 새로이 기획하고 고민해야만 했다. 상품의 생산이 한 공장차원과 국가 차원의 결정이라면 ‘소비의 생산’은 공장 밖의 그리고 국제적 차원의 결정과 기획이어야 한다. 필연적으로 자본주의의의 탄생과 더불어 스페인, 포르투칼의 ‘신대륙’ 정복과 식민지 시대의 개막은 동전의 양면이다. 콜롬부스가 카리브 해 연안에 상륙하면서 당시의 선주민과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서양의 상품과 그 지역의 산물과의 교역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인가? 처음에는 선물 수준의 체면치례였지만 점점 규모는 커지고 배 한척의 화물에서 거대한 선단 규모의 화물로 확대되며 공정한(?)교환에서 폭력적 수단을 통한 선주민의 노예화와 선주민의 토지로부터의 구축을 통한 플랜테이션적 생산과 채찍과 고문으로 상징되는  강제 노역 등을 통한 수탈로 발전한다. 19세기 극단의 식민지 확대는 극단으로 치달아 ‘제국주의’시대를 맡게 된다. 한계의 노출이 바로 20세기 초반의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다. 전쟁의 양상이 국지전에서 세계전으로 바뀌고 군인간의 전쟁에서 민족 대 민족, 국민 대 국민의 총력전의 양상으로 바뀌는 자기파괴적 자본주의의 광기는 결국 파탄과 한계 그리고 자기 붕괴라는 자아 불안적 불안을 낳게 되었다. 21세기 전지구적 세계화 시대에서 상품의 생산과 소비의 생산은 전지구적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다. 미국의 ‘나이키’ 운동화가 중국 남부 연안의 중국 노동자들에 의해 생산됨과 더불어 피부와 눈동자 색깔의 차이와 체형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리바이스’청바지를 입어야 하며, ‘베네통’의 티셔츠를 걸쳐야 한다.  

  여기서 21세기의 자본주의가 그친다면 이전의 자본주의와 큰 차이점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전 지구적 세계화 시대의 자본주의는 공간적 외연의 확대는 필연적인 한계를 보일 수 있다는 제국주의 시대의 ‘교훈’과 로자 룩셈부르크의 경고를 잊지 않고 한계가 없는 영역으로의 확대와 침투를 꿈꾼다. 공간적 외연을 가지고 있지 않는 인간의 의식과 정신이 바로 그것이다.  어차피 공간을 차지 않는 것이라면 한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24시간 쏟아지는 정보와 데이터의 흐름 속에 인간 주체의 인식과 판단은 극단적인 혼란과 착란 속에 무엇이 자신의 생각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에 의한 판단인지를 구분할 수 없는 상태에서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 내가 살기 위해서 인지 아니면 유명 연예인이 살기 위해서 인지 착란 속에서  아파트를 구하고 배가 고파서 인지 아니면 쿠폰과 마일리지를 쌓기 위해서인지 혼란 속에서 피자를 시켜 먹는다. 겨울철에 설원에서 신나게 눈을 가르면서 내가 스키를 타기 위해선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스키 타기에 배경이 되기 위해서인지 햇갈리면서 강원도의 스키장을 향해 간다.

  톰의 욕망은 친구인 필립의 아버지에 의해 촉발되었고 미국에 갈 듯 말 듯하면서 톰을 우롱한 필립의 태도와 필립과 생활하면서 경험하지 못했던 화폐의 놀라운 권능과 소비의 흥청 망청에 서서히 확대된다. 자본주의 현란한 소비와 욕망 속에 자신의 몸과 정신을 맡기게 된다. 원래 욕망이란 사회적인 것은 아닐까? ‘지방시’의 양복과 ‘샤넬’구두의 착용감과 산뜻함을 톰은 원래부터 욕망했던가? 

  포장마차라도 하려고 3천만원을 어떻게든 모으려던 택시 강도단이 등장하고, 10억이 생긴다면 어느 정도의 범죄도 가능하다라는 물음에 50% 정도의 고등학생이 긍정하는 사회의 광기 속에, 주가 조작과 각종 탈세와 부동산 투기 등을 통해 수백억의 재산을 모은 대통령 후보에 대한 국민들의 무절제한 지지가 2007년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누가 과연 ‘톰’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그리고 누가 던질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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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선생을 만나다.

'이현상'선생을 만나다.

 

도서관에서 '이현상평전'(실천문학사)를 빌어서 읽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영화와 이태가 쓴 '남부군'을 통해 알고 있었지만

 

이전의 '경성트로이카'를 통해 이재유, 이관술 등을 알게 해준 안재성씨의

 

새로운 평전으로 이현상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생적 사회주의자 중 한사람으로

 

20년대 후반과 30년대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절멸한 상황에서

 

동지들과 더불어 끊임없이 학습, 조직, 투쟁했던 그!

 

해방이후의 공간에서

 

남들이 꺼려하는

 

死地로 가는 길인

 

빨치산을 통한 인간해방 조국 해방 투쟁에 나서는 그네들의 모습을 통해서

 

저간에 남미의 체게바라를 능가하는 우리네의 투쟁의 역사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6.10만세 운동후 감옥에서 20세의 이현상 선생

 

 

20년대 이재유, 이관술과 더불어 '경성트로이카' 시절의 조직원이었던 이효정 할머니

 

 

 

이현상 선생 최후의 아지트 지리산 빗점골의 오늘날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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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4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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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드 러너' 다시 보기

 

 

 

82년 블레이드 러너가 개봉되었을때 이미 컬트가 되었다.

 

82년 E.T와 비슷한 시기  개봉되어 흥행에 기대만큼의 성공은 거두지 못했지만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마니아층이 두텁게 그리고 새로운 세대의 마니아가 등장한다.

 

반젤리스의 전자음과

 

추적추적 내리는 산성비!

 

어둡고 횡량한 메트로폴리스의 거리들

 

거대한 전광판에서 계속되는 영상광고들...

 

그리고 거대한 빌딩숲!

 

일본풍의 광고와 거리의 네온사인 그리고 행인들의 복장과 일본음식들....

 

당시 미국의 일본공포증을 읽을수 있다.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의 관심은 

 

주인공 데커트(해리슨 포드 분)의 인간이냐 안드로이드냐로 모여진다.

 

여러가지 정황으로 보아서

 

;해리슨 포드의 유니콘을 꿈꾸고 , 죽기 직전 인조인간 대장이 살려주고 마지막에 사랑하는

 

인조인간(레이첼) 과 탈출을 하고......

 

나의 생각은 데커트는 인조인간(레플리컨트)임이 맞다.

 

나는 다른 각도로 한번 생각해 본다.

 

'레플리컨트'는 혹시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을 해야만 살아갈수 있는 '노동자'를

 

은유하는 것은 아닐까?

 

자본가들의 끊임없는 이윤추구의 도구로 전락한,

 

죽은 노동(자본)에 의해 착취 당할 운명의 노동자계급!

 

그리고 결국 폐기(영화에서 레플리컨트의 사살을  Retirement(퇴직, 은퇴))당하는.....

 

새로운 노동자에 의해 기존의 노동자는 폐기처분되고 

 

노동자들에 의해 노동자들이 탄압당하는 현실(경찰이나 군대에 의해)을 은유적으로 읽을수도 있다.

 

다행히 레플리컨트를 사살하는 불레이드 러너였던 데커트가

 

자신의 본질을 깨닫고(자각이 아닌 로이가 살려줌으로써)

 

또 다른 아니 하나 남은 레플리컨트(레이첼)와 탈출을 하는 것으로 영화를 마친다.

 

하나의 낙관을 볼 수 있다.

 

원작은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양을 꿈꾼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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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s'빨갱이들

 

 

번역하면 '빨갱이들"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인 81년 미국에서 워렌비티가 주연 감독 제작한 영화이다.

 

82년 아카데미 3개부문수상

 

미국도 레이건 등장이후 '스타워즈'계획등으로 냉전의 극점에 도달했던 시기에

 

'세상을 뒤흔든 10일'의 저자 존 리드의 일대기를 영화화 하다니......

 

영화에서 워렌비티는 당시(1910년대 후반) 미국의 노동운동을 포함한 진보운동을

 

리뷰하고 있다.

 

17년 러시아 10월 혁명의 영향으로 고무되었던 노동운동 전반과

 

민주당 대통령의 지지자 중 하나였던 리드는 '빨갱이'가 되었다.

 

영화 후반에 가서 소비에트 정부에 의해 리드가 '이용'당하는 점이

 

약간 보여지지만 아마도 한국에서는 개봉이 어려웠을듯......

 

아쉬운 점 몇가지는

 

냉전의 영향이 엄존한 상황이어서 그랬겠지만

 

러시아의 페크로그라드 로케이션이 아닌 동유럽 어느 도시에서 촬영해서인지

 

혁명의 열기가 제대로 전달이 안되었고

 

리드와 그의 부인 루이스가 이미 나이 먹은 워렌비티와 다이앤 키튼이어서

 

젊은 그들(20대 후반)을 묘사하기에는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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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전유죄 유전무죄 그리고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

 

70년대와 90년대에 걸쳐 3부작의 영화!

 

우리 사회에도 많은 사람들이 보았던 흥행작!

 

시칠리아계 이태리 가족의 3대에 걸친 미국 이민사이면서

 

미국의 20세기 한 부분을 엿볼수 있는 영화

 

폭력의 정당성과 폭력의 미학을 정당화 한다라는 비판도 있지만

 

재미있는 영화!

 

대부 1편에서

 

대부 꼴레오네(마론브란도)는

 

다른 폭력 조직으로부터 동업(?)제의를  거절한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정치계와 법조계의 힘을 공유하자"를

 

거절하자 바로 보복을 당한다.

 

최근의 삼성관련 내용을 보면서

 

이것은 대부의 마피아 저리 가라라고 생각한다.

 

조직적 구조적인 권력사유화 현상이 작금 우리사회에서 자본에 의해 이루어진다.

 

혁명적 상황이다!

 

대부보다도 더 더티하고 디스커스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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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들롱의 "태양은 가득히"

 

 

르네 클레망 감독의 1960년작

 

아! 거의 50년이 지났네요!!!

 

젊은 알랑들롱의 모습과 매력을 볼수 있는 영화입니다.

 

배경은 이태리!

 

남부의 시칠리섬의 타오르미나라는 조그만 도시와 로마.....

 

화면 내내 이글거리는 태양과 열기를 느낄수 있습니다.

 

태양이 바로 주인공 톰의 욕망?!

 

욕망을 추구하다 욕망이 막히자 살인을 하는 주인공 톰

 

해피 엔딩이 아닌 자신의 범죄가

 

사소한 실수로 천하에 드러나는 비극적 결말!

 

몇 년전  매트 데이먼이 주연했던 "톰 리플리"의 원작 영화로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재주많은 리플리"라는 소설이 원작입니다.

 

주인공 톰과 부자 친구와의 관계가 노자 계급의 적대적 관계를 은유하는듯....

 

그리고 절대 화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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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유산 능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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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툴루치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초딩시절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

 

실비아 크리스텔이 주연한 '엠마뉴엘부인'과 같은 동경 내지는 금기의 대상이었다.

 

한참 나이가 들어 국도극장에서 어느정도 편집(?)된 '탱고'가 상영된다는 소식이 화제가 되었다.

 

72년 베르툴루치가 만든 이 영화는 첫장면에서 마론브란도가 분한 폴이라는 주인공의 "fucking

 

God"라는 독신의 절규와 처음 보는 남녀의 그것도 부녀지간만큼의 나이차는 남녀주인공의

 

정사씬이 충격이었다.

 

영화 시작 프롤로그에서 아일랜드 화가 프란시스 베이커의 뒤 틀린 인물들의 초상이 지금와서 생각하는 더 기괴했다,.

 

스스로 맑스주의자라고 했던 감독의 영화 제작 당시 이미  좌절되고 굴절된 '68'에 대한 오마쥬는 아닌지......

 

영화 내내 많은 정치적 은유와 설정이 눈에 띈다.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정체모를 주인공 미국인 폴

 

대령의 딸로 부르주아적 삶을 사는 여주인공 잔

 

이둘의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존재적 만남

 

외로운 호화 부르주아 저택에서 이유없는 정사를 벌인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은유와 아울러 남녀간의 성 정치학적 역학 구조!

 

마지막의 파괴적 결말은 결코 공존할수 없는 그리고 극복될수 없는 계급간의 모순과 적대감을 표현한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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