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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묘지에서

96년 연말의 영국 런던 하이게이트 묘지의 맑스 묘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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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은하철도

  우리의 억제된 욕구와 욕망의 원천은 개인적인 성적 억압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사회 경제적인 모순에 기인한다.(자살의 원인을 살펴보라!)

편집증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분열증을 꿈꾸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끊임없는 분열증적 모습을 꾀한다.(선량한 아버지 그러나 원조교제의 '도너')

 

  '원조교제'라는 관계속에서 도너의 경우는 지배적 , 우월적인 위치를 점하고 상대방의 경우는

수동적, 피억압적 지위를 가지게 된다. 지배와 피지배 그리고 능동과 수동의 관계는

개인 각각의 성적,사회적 지위에 기인하기 보다는 개인이 가지고 있는 화폐의 량에 기초한

'화폐의 능력'에 기초한다.

 '호스트바'에서의 경우를 보면 관계의 전도(물론 성적 지위로만 보면)가 나타나는 듯 하지만

 두 경우의 공통점이 바로 '돈의 능력'임이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성적 도착, 색광증 등으로 설명하는 전통적인 정신 분석학의 설명보다는 사회 경제적 원인을 중시하면서 설명하는 들뢰즈 가타리적 설명이 더 설득력이 있는 부분이다. 물론 과도기적으로 구조적 언어학에 기반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개혁을 추구한 라캉의 학설도 있지만 라캉의 경우는 언의의 상징으로서의 기능은 인지하였지만 사회의 관계속에서의 언어의 능력과 전도된 허상의 인식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아무리 개인간의  관계가 유지 지속 된다고 하더라도 또는 종료된다 하더라도

관계속의 개인들의 욕구와 욕망은  고개를 쳐들게 되고 관계의 유지와 상관없이

재생산된다는 것에 근본문제가 있다.

과연 해결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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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 개념의 한계(The limit of concept of the Marginal)

한계 개념의 한계(The limit of concept of the Marginal)

은하철도

 

  19세기 후반 맑스의 잉여가치이론에 기초한 '정치경제학'의 계급적 과학적 성격을 희석시키기

위한 전세계적 부르주의 경제학의 노력은 '한계이론'이라는 국제적 공모의 결과물로 나타난다.

수확 체감의 법칙, 한계비용 체증의 법칙,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

 

  미분수학의 도움을 얻어 정교하게 짜여진 한 편의 소설같은 이 사이비 과학은 자본에게는

상품의 가격 인상의 정당성을, 노동계급에게는 임금 인상의 악마성과 절제 검약의 십계명을

가져왔다.

'단위당 소비량의 증가는 단위당 만족감의 절대적 감소를 초래한다'라고 요약될수 있는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은 실제 경제활동에서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작동한다.

오히려 끊임없는 욕구와 욕망 그리고 주체할 수 없는 이윤획득의 자본주의적 욕망이 도처에서

횡행하고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생산요소 투입의 단위당 증가는 이전의 생산량보다 생산량의 절대적 감소를 가져 온다'라는

수확체감의 법칙은 자본에게 상품의 가격 인상의 절대적 정당성의 기제로 작동하는 금과옥조이다.

그러나 교통과 통신의 발달과 세계시장으로의 확대 그리고 '규모의 경제'등으로 인해 맞지 않는 사이비 이론이다

 

  아울러 '수확 체감의 법칙'에 전제를 둔 '한계 비용 체증의 법칙'은 노동계급의 임금 인상 요구의 반대논리로 작동하고 있다.

 

  이것들은 과학성이라는 이름의 이데올로기 왜곡의 전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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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와 수정주의

 

맑스주의와 수정주의

레닌


『프롤레타리』29호, 1908년 4월 16일


  기하학의 공리가 인간의 이해관계에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을 논박하려는 시도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잘 알려진 속담이 있다. 신학의 낡은 편견들과 충돌했던 자연사에 관한 제이론은 가장 광적인 반대를 불러 일으켰으며, 여전히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므로 현대 사회의 선진계급을 계몽․조직하는 데 직접적으로 봉사하며, 이 계급이 직면하는 과제들을 지시해주고, 새로운 체제에 의한 낡은 체제의 (경제적 발전에 의한) 대체를 증명하고 있는 맑스주의의 교리-이 교리가 그 성장 과정에서 일보일보 전진할 때마다 투쟁해야 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이와 같은 것은 소유계급들의 자라나는 세대의 의식을 혼미하게 하고 그들을 내외의 적들에게 적대적으로 “훈련”시키기 위해 공식 교수들이 공식적으로 가르치는 부르주아 과학과 철학에 적용된다. 이 과학은 맑스주의에 관한 것이라면 들어 보려고도 않으면서 맑스주의는 논박되어 폐기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맑스는 사회주의를 논박함으로써 경력을 쌓고 있는 소장 학자들과 온갖 종류의 낡아빠진 “체계”의 전통을 보존하고 있는 쇠약한 노장들 양자에 의해 맹렬히 공격받는다. 맑스주의의 진보, 즉 그 사상이 노동계급 사이에 확산되고 확고하게 자리잡아 가고 있다는 사실은 불가피하게 맑스주의에 대한 이들 부르주아적 공격의 빈도와 강도를 증대시키며, 맑스주의와 공식과학에 의해 “폐기될” 때마다 그 공격은 더욱 강해지고 맹렬해진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투쟁과 관련된 그리고 주로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서 유행한 제교리 사이에서 조차 맑스주의는 결코 단번에 그 입지를 공고히 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이 존재한 첫 반세기(1840년대부터 계속해서)에 맑스주의는 자신에게 근본적으로 적대적인 제이론과 투쟁을 벌였다. 40년대 초 맑스와 엥겔스는 철학적 관념론의 관점에 있었던 급진적 청년헤겔파와 관계를 청산했다. 40년대 말 그 투쟁은 푸르동주의에 대항하여 경제이론 분야에서 시작되었다. 50년대에는 1848년의 폭풍의 해에 모습을 나타냈던 제당파와 이론에 대한 비판에서 이 투쟁이 완결되었다. 60년대에 투쟁은 일반이론의 분야에서 직접적인 노동운동에 더 가까운 분야, 인터내셔날에서 바쿠닌주의의 축출로 옮겨졌다. 70년대 초 독일의 무대가 잠시 프루동주의자 뮐버거에 의해 장악되었다가 70년대 말에는 실증주의자 뒤링에 의해 장악되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양자의 영향력은 이미 완전히 무가치한 것이었다. 맑스주의는 이미 노동운동 내부의 다른 모든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의심할 바 없는 승리를 획득하고 있었다.

  90년대가 되자 이러한 승리는 대체로 완결되었다. 심지어 프루동주의의 전통이 무엇보다도 오랫동안 고수되어 왔던 라틴 국가들에서조차 노동자당들은 실제로 맑스주의적 토대에 기초하여 자신들의 강령과 전술을 수립했다. 부활한 노동운동의 국제 조직-주기적인 국제 대회의 형태-은 처음부터 거의 한 번의 투쟁도 없이 모든 근본적인 점에서 맑스주의적 관점을 채택했다. 맑스주의가 자신에게 적대적인 다소 통합적인 모든 교리를 축출한 이후, 그 교리들 속에 표현되어 있었던 제경향은 다른 통로를 찾기 시작했다. 그 투쟁의 형태와 원인은 변했지만 투쟁은 계속되었다. 맑스주의가 존재한 두 번째 반세기는 맑스주의 자체 내부에서 맑스주의에 적대적인 한 경향의 투쟁과 함께(90년대에) 시작되었다.

  한때는 정통 맑스주의자였던 베른슈타인은 맑스 개정의 가장 소란스럽고 가장 고의적인 표현인 맑스주의의 수정, 즉 수정주의를 들고 나옴으로써 이 경향에 자기 이름을 부여했다. 더욱이-경제적 후진성과 농노제의 잔재에 짓눌린 농민인구의 웨 때문에-비맑스주의적 사회주의가 무엇보다도 오랫동안 근거를 갖고 있었던 러시아에서, 그것은 우리 눈앞에서 쉽게 수정주의로 넘어가고 있다. 농업문제(모든 토지의 시유화 강령)와 강령 및 전술의 일반적인 문제 양자에서 우리의 사회-나로드니끄들은 나름대로 통합적이고 맑스주의에 근본적으로 적대적이었던 자기들 체계의 사멸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잔재 대신 맑스주의의 “개정”을 더욱 더 도입하고 있다.

  전맑스주의적 사회주의는 패배했다. 그것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의 독자적인 근거가 아니라 맑스주의의 일반적 근거 위에서 수정주의로서 그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면 이제 수정주의의 이데올로기적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철학의 영역에서 수정주의는 교수들의 “과학”의 흔적을 쫓아 다녔다. 교수들은 “칸트로 되돌아”갔으며-수정주의자들은 자기만족적으로 웃으면서 유물론은 오래 전에 “논박되었다”고([편람] 최신호의 말 한자한자 그대로) 중얼거렸다. 교수들 자신들은 헤겔의 관념론보다 천 배는 더 조잡하고 맥빠진 관념론을 설교하면서도 헤겔을 “죽은 개” 취급하고 변증법을 비웃었고-수정주의자들은 정연된(그리고 혁명적인) 변증법을 “단순한”(그리고 정적인) “진화론”으로 대체하면서 과학의 철학적 천박화라는 늪에 빠져 버둥거렸다. 교수들은 자신들의 관념론적이고 “비판적인” 체계를 지배적인 중세 “철학”(즉 신학)에 맞게 각색함으로써 그들의 공식 봉급을 벌었고-수정주의자들은 종교를 현대의 국가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선진계급의 당과 관련되어 있는 “사적인 문제”로 만들려고 하면서 그들과 가까워졌다.

  그러한 맑스주의의 “개정”이 계급관계에서 실제로 의미했던 것은 기술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명약관화하다. 우리는 단지 국제 사회민주주의운동에서 일관된 변증법저 유물론의 관점에서 수정주의자들의 믿기지 않을 정도의 진부함을 비판한 유일한 맑스주의자가 플레하노프였다는 정도만 지적하겠다. 플레하노프의 전술적 기회주의를 비판한다는 미명하에 낡고 반동적인 철학적 찌꺼기를 밀수입하려는 깊이 잘못된 시도들이 현재 행해지고 있기 때문에 이 점은 더 더욱 강조해야 한다.

  정치경제학으로 넘어가서, 제일 먼저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영역에서 수정주의자들의 “개정”은 훨씬 더 광범위하고 포괄적이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경제발전에 관한 신자료들”로 공중에게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들도 있었다. 그들이 말한 바에 따르면, 대규모 생산에 의한 집중과 소규모 생산의 축출은 농업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으며 상업과 산업에서는 매우 서서히 진행된다. 공황이 이제는 희귀해지고 약화되어서, 카르텔이나 트러스트는 아마 자본이 공황을 완전히 제거하게 할 것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그들에 따르면 계급적대가 더 완화되고 덜 첨예하게 되는 경향 때문에 자본주의 “붕괴론”은 불건전하다. 마지막으로, 그들에 따르면 맑스의 가치이론을 뵘-바베르크에 일치하도록 교정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 문제들과 관련한 수정주의자들에 대한 투쟁은 국제사회주의에서 20년 전 엥겔스가 듀링과 벌인 논쟁만큼이나 풍성한 이론적 사유의 부활로 귀결되었다. 수정주의자들의 제논지는 사실과 수치의 도움을 받아 분석되었다. 수정주의자들은 현대의 소규모 생산을 장미 빛으로, 체계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공업뿐만 아니라 농업에서도, 소규모 생산에 대한 대규모 생산의 기술적․상업적 우위가 반박할 수 없는 사실들에 의해 입증되었다. 그러나 농업에서 상품생산은 훨씬 덜 발전해 있으며, 대체로 현대의 통계학자들은 농업이 점차 세계경제의 교환과정 속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특별한 농업분야(때때로 그 진행과정조차)를 선별해 내는데 별로 능숙하지 못하다. 항상적인 음식 질의 악화, 만성적인 기아상태, 노동일의 연장, 가축의 질과 관리의 악화  등, 한마디로 수공업 생산이 매뉴팩처에 대항하여 자신을 유지시켰던 바로 그 방법들에 의하여, 소규모 생산은 자연경제의 파멸위에서 자신을 유지한다. 과학과 기술의 모든 진보는 자본주의 사회에 존재하는 소규모 생산의 토대를 피할 수 없게 그리고 가차없이 잠식한다; 종종 복잡 미묘하기까지 한 이 과정의 모든 형태를 연구하여 소생산들에게 자본주의 아래에서 자기 것을 유지하는 것의 불가능성, 농민경영의 절망상태 및 농민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관점을 채택할 필요성을 증명하는 것이야말로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의 과제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과학적 의미에서 수정주의자들은 전체로서의 자본주의체제에 대한 언급없이 일면적으로 선택한 사실들에 기초한 피상적인 일반화라는 죄를 저질렀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불가피하게 그들은 자신들이 원했던 농민이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관점을 채택하는 대신 소소유자의 태도(즉 부르주아지의 태도)를 취하게끔 조장하고 부추김으로써 죄를 저질렀다. 공황이론과 붕괴이론에 대한 수정주의의 입장은 더욱 조악하다. 아무리 짧은 시간이었을지라도, 오직 가장 시야가 좁은 사람들만이 겨우 몇 년의 산업상의 번성과 번영의 영향을 받아 맑스 이론의 토대를 재주조하려고 생각할 수 있었다. 현실은 곧 공황은 과거의 것이 아니라는 것; 즉 번영 뒤에는 공황이 온다는 것을 수정주의자들도 분명히 알게 해주었다. 특수한 제공황의 형태, 순서, 양상은 변화했지만 공황은 자본주의체제의 불가결한 구성자로서 남아있다. 생산을 통합함과 동시에 카르텔과 트러스트는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을 만큼 생산의 무정부성, 프롤레타리아 존재의 불안정성 및 유례가 없을 정도로 계급투쟁을 격화시키는 자본의 억압성 등을 심화시켰다. 자본주의가 몰락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것-개별 정치․경제적 위기 및 전체 자본주의체제의 완전한 붕괴라는 의미에서-이 분명해졌으며, 바로 새로운 거대 트러스트들에 의해 대규모적으로 되었다. 많은 징후들이 보여주고 있는 임박한 산업공황을 굳이 거론치 않더라도 최근 미국의 금융공황과 전유럽을 덮친 가공할 실업의 증대-이 모든 것은 분명히 수정주의자 자신들을 포함하여 모두에게 잊혀진 수정주의자들의 최신 “이론들”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인들의 동요가 노동계급에게 준 교훈은 잊혀져서는 안된다.

  가치이론에 관해 말하자면, 뵘-바베르크를 모방한 아주 모호한 암시와 탄식을 빼고 나면 수정주의자들은 전혀 아무것도 기여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과학적 사유의 발전에 어떤 흔적도 남겨 놓지 못했다.

  정치학의 영역에서, 수정주의자는 맑스주의의 토대인 계급투쟁의 교리를 진짜 수정하려고 했다. 정치적 자유, 민주주의 및 보통선거로 인해 계급투쟁의 근거가 제거되며, 노동자들에게 조국은 없다는 『공산당 선언』의 낡은 명제는 비진리로 된다고-그들은 우리에게 말했다. 그들이 말한 바에 따르면, 민주주의에서는 “다수의 의지”가 지배하기 때문에, 국가를 계급지배의 기관으로 간주해서는 안되며 또한 반동들에 대항하는 진보적이고 사회개혁적인 동맹들을 거부해서도 안된다.

  이러한 수정주의자들의 논지는 결국 상당히 균형잡힌 관점의 체계, 즉 오래되고 유명한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의 견해가 된다는 것에는 재론할 여지도 없다. 자유주의들은, 투표권과 참정권을 모든 시민이 공유하기 때문에 부르주아 의회제는 계급과 계급분화를 파괴한다고 줄곧 주장했다. 19세기 후반 유럽의 전역사와 20세기 초 러시아혁명의 전역사는 그러한 견해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경제적 차별들은 “민주주의적인” 자본주의 아래에서 완화된 것이 아니라 심화되고 강화되었다. 가장 민주적인 부르주아공화국일지라도, 의회제는 그 계급억압 기관으로서의 본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노골화한다. 이전에 정치적 사건들에 능동적으로 참여했던 사람들보다 훨씬 광범위한 주민대중을 계몽․조직하는 것을 도움으로써 의회제도는 공황과 정치혁명의 제거가 아니라 그러한 혁명 동안 내전의 최대한의 격화로 나아간다. 1871년 봄의 제사건과 1905년 겨울의 제사건은 어떻게하여 이러한 격화가 불가피하게 일어나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프롤레타리아운동을 짓밟기 위해 프랑스 부르주아지는 국가 전체의 적이며 그 나라를 파괴한 외국군대와 거래했다. 의회제도와 부르주아민주주의의 불가피한 내적 변증법은-그것은 대중적 폭력에 의해 이전보다 훨씬 첨예한 논쟁의 결정으로 나아간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의회제도에 기초하여 원칙적으로 일관된 선동․선전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며, 그러한 논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노동계급을 진정으로 준비시킬 수도 없을 것이다. 서구 혁명에서는 사회개혁론자들, 러시아 혁명에서는 자유주의적 개량주의자들(카데트)과의 동맹, 합의 및 블록의 경험은 이러한 합의가 대중들의 의식을 몽롱하게 할 뿐이며, 투사들을 전혀 투쟁할 능력이 없고 가장 동요하고 배신적인 요소들과 결합시킴으로써 대중투쟁의 실제적인 중요성을 고양하는 것이 아니라 약화한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 주었다. 프랑스의 밀레랑주의-수정주의 정치전술을 광범위하게, 진짜 전국적인 규모로 적용했던 최대의 경험-는 전세계의 프롤레타리아트가 결코 잊지 못할 수정주의에 대한 실천적인 평가를 제공해 주었다.

  수정주의의 전제 및 정치적 경향의 자연스러운 보완물은 사회주의운동의 궁극목적에 대한 그 태도였다. “운동이 전부이며, 궁극목적이란 아무것도 아니다”-이 베른슈타인의 표어는 많은 긴 논문들보다 수정주의의 본질을 더 잘 표현하고 있다. 사건 하나 하나마다 행동을 결정하고, 그날 그날의 사건들과 수시로 변하는 사소한 정치를 쫓아다니며, 프롤레타리아트의 일차적인 이익과 전체 자본주의체제 및 모든 자본주의적 진화의 기본 특징들을 잊으면서, 순간의 실제적이거나 가상적인 이익 때문에 이 일차적인 이이들을 희생하는 것-그러한 것이 수정주의의 정책이다. 이 정책의 바로 그 본성으로부터 그것이 무한히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으며, 그리고 모든 다소라도 “새로운” 문제, 모든 예기치 못한 사건의 전환이 있을 때마다, 그것들이 사소한 정도로 또한 아주 짧은 시기 동안만 발전의 기본노선을 변경시키기만 해도 이런저런 류의 수정주의가 불가피하게 나타나리라는 것을 불을 보듯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수정주의의 불가피성은 현대사회에서의 그 계급적 기원에 의해 결정된다. 수정주의는 국제적 현상인 것이다. 아무리 정보에 어둡더라도 생각하는 사회주의자라면 누구라도 독일에서 정통파와 베른슈타인파의 관계, 프랑스에서 게드주의자와 죠레스주의자(지금은 특히 부루스주의자)의 관계, 영국에서 사회민주주의연합과 독립노동당의 관계, 러시아에서 볼셰비크와 멘셰비크의 관계는 이 나라들이 처한 현 상태에서 민족적인 제조건과 역사적 요인들의 엄청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동일하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현재의 국제 사회주의운동 내부의 분리는 세계의 모든 나라들에서 동일한 노선을 따라 진행되고 있는데, 이것은 여러 나라들의 이질적인 제경향이 하나의 국제 사회주의운동 내부에서 투쟁했던 삼사십 년 전에 비해 거대한 진보가 이루어졌음을 증거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혁명적 생디칼리즘”처럼 라틴계 나라들에서 형성되어 온 “좌로부터의 수정주의” 또한 맑스주의를 “개정”하면서 맑스주의에 적응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라브리올라와 프랑스의 라가드렐은 번번히 잘못 이해된 맑스에서 옳게 이해된 맑스에게로 호소하곤 한다.

  우리는 아직은 기회주의적 수정주의만큼 발전하지 못한 이 수정주의를 분석하는 데서 멈출 수는 없다; 그것은 아직 국제화되지 않았으며, 단 한 나라에서도 사회주의당과의 한 번의 실천적인 대전투도 겪어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에서 묘사한 “우로부터의 수정주의”에 한정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정주의의 불가피성은 어디에 놓여있는가? 왜 그것은 민족적인 특이성이나 자본주의의 발전정도의 차이보다 더 뿌리깊은 것인가? 왜냐하면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나란히 항상 광범한 쁘띠부르주아지와 소소유자 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소생산자에서 발생했으며,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수많은 새로운 “중간층”들이 자본주의에 의해 불가피하게 생겨나게 된다(공장의 하청업체들, 가내노동, 자전가나 자동차산업과 같은 대산업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전국에 흩어져 있는 소규모 작업장들). 이 새로운 소생산자들 또한 불가피하게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열로 내던져진다. 그렇기 때문에 광범위한 노동자당들의 대열 내부에서 쁘띠부르주아적 세계관이 계속해서 고개를 치켜들게 된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일어나게 될 운명의 변화에 도달할 때까지는 그럴 수밖에 없으며 항상 그럴 것이라는 것도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대다수 인구의 프롤레타리아화가 본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이론적인 영역, 즉 맑스에 대한 이론적 수정들에서만 겪고 있는 것; 수정주의와의 전술적 차이 또는 그것에 기초한 분열처럼 현재는 노동운동의 개별적이고 부분적인 문제들에 관해서만 등장하는 것-이것을 노동계급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모든 논쟁점들을 첨예하게 하고, 대중의 행동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가장 직접적인 중요성을 갖는 문제들에 모든 차이를 집중시킬 때, 그리고 투쟁의 열기 속에서 적과 우군을 구별하고 적에게 결정타를 먹이기 위해 나쁜 동맹자를 버리는 것이 필요하게 될 때,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규모로 경험하게 될 것이다.

  19세기 말에 수정주의에 대항하여 혁명적 맑스주의가 벌인 이데올로기 투쟁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위대한 혁명적 전투의 전주곡일 뿐이며, 프롤레타리아트는 쁘띠부르주아지의 온갖 동요와 허약함을 뚫고 그 대의의 완전한 승리를 위해 행군하고 있다.

(1908년 3월 후반과 4월 3일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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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자본의 비정규직 확대 정책-그 배경과 의의

독점자본의 비정규직 확대 정책-그 배경과 의의
글쓴이 채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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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지금 실업문제와 싸우고 있다, 노동자는 물론 독점자본도!



노동자들이 실업문제와 싸우는 것은 물론, 진보적임을 자처하며 "노동사회를 넘어선 문화사회"를 운운하고, '노동거부'를 운운하는 일부 소부르주아 얼간이 지식인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노동중독' 때문도, '노동윤리'를 숭상하기 때문도 아니다. 그러한 정신질환이나 이데올로기적인 이유 때문이 결코 아니다. 단지, 노동능력을 가진 몸뚱이밖에는 어떤 유효한 생산수단도 소유하고 있지 못한 계급적 처지에서 안정적인 일자리를 갖지 못하고선 자신과 가족의 생계가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그러한 일자리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회이고 그러한 사회상태이기 때문에 싸우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받고 있는 것이다.



독점자본이 실업문제와 싸우고 있는 것은 물론 노동자들과는 전혀 다른 이유 때문이다. 그들의 싸움은 이중적이고 모순적이다. 한편에서는 그것을 더욱 확대하기 위해서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을 축소하거나 최소한 은폐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독점자본이 실업을 확대하기 위해서 싸우는 이유는 간단하다. 실업률이 높을수록, 실업자가 많을수록, 노동자의 임금은 저락하고, 그만큼 이윤은 높아지기 때문이다.1) 실제로 자본주의는 실업이 없이는, 즉 주민의 상당 부분을 빈곤과 그에 따르는 고통․절망․타락․범죄 속에 몰아넣지 않고는 성장․번영은커녕 생존조차 할 수 없는 사회경제체제이다!



그러면, 독점자본은 왜 실업을 축소․은폐하기 위해서 애쓰는가? 무엇보다도 일정한 정도를 넘어 실업과 그에 따른 빈곤이 확대될 경우 자본의 지배 자체, 자본주의체제 자체가 정치적으로 위협을 받기 때문이다. 실업과 빈곤이 일정한 정도를 넘게 되면, 경제적으로도 물론 생산과 소비 간의 격차라는, 발달한 자본주의적 생산 고유의 모순이 격화되기 때문이지만, 그보다도 더욱 직접적으로는 노동자계급과 근로인민 일반이 정치적으로 불온해지면서 파업과 시위 투쟁 등이 빈발하게 되고, 결국은 그것이 자본주의체제 자체를 전복시키려는 혁명적 투쟁으로 발전하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독점자본과 그 국가는 실업과 빈곤을 일정한 한계 내에 유지하려 할 수밖에 없고, 최소한 그 실상을 은폐하려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제는 우선 실업문제와 관련한 독점자본의 근래의 동향인데, 개별 독점자본은 물론 독점부르주아 국가마저도 갈수록 실업을 축소하려는 투쟁보다는 그것을 확대하려는 투쟁, 그것을 은폐하려는 투쟁에 더욱 열을 올리고 있다. "해고하기가 어려우니까 고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해고하기 쉽도록 법과 제도는 물론 노사관계의 관행과 의식까지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 이러한 주장이 공공연히 횡행할 뿐 아니라 '구조조정'이니, '노동(시장)의 유연화'니, '개혁'이니 하는 이름으로 강제되고 있다. 물론 동일한 이름으로 확대되는 실업의 실상을 은폐하기 위한 작업, 즉 비정규직화가 대대적으로 강제되면서 말이다.



사실, 실업의 실상의 은폐는 '실업'이라는 용어 자체에, 그리고 그 실업률의 통계 자체에 내포되어 있다. 내내 일자리를 못 구하다가도 실업통계의 기준이 되는 어떤 한 주일에 한두 시간이라도 무언가 일을 하게 되면 실업도 실업자도 아니게 되는 것이, 더구나 일자리를 구하다 구하다 구할 수가 없어서 포기하게 되면 그것 역시 실업도 실업자도 아니라는 것이 실업의 개념이요 통계이니, 그 실상이 은폐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모든 부르주아 국가의 실업통계는, 작성 기준상의 극히 사소한 차이를 별도로 하면, 모두 그렇게 실업의 실상을 은폐하고 있다.



그리고, 일자리를 구하다 구하다 지쳐 포기한 이른바 '실망실업자'를 '자발적 실업자'라 하여 아예 '경제활동인구'에서 제외해버리는 것을 별도로 하면, '비정규직화', 즉 불완전․불안정 고용과 취업이야말로 실업의 실상을 은폐하는 기구이다. 그리하여, 예컨대, 프랑스나 독일 등 서유럽 대륙국가들의 실업률은 장기간 10% 내외를 기록하면서 5 내지 7% 대를 기록하고 있는 영국이나 미국의 그것보다 높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보수언론을 위시한 독점자본의 이데올로그들, 즉 그들의 지적 하수인들은 그러한 통계를 들이대면서 "해고하기가 쉬워야 고용이 는다"는 예의 유명한 궤변을 내세운다. 해고의 자유 등, 이른바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높은 미국과 영국이 "개혁이 지지부진한" 독일이나 프랑스 등에 비해서 고용이나 실업의 상황이 낫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지난번 프랑스 정부가 역시 예의 궤변을 내세워 "최초계약제"라는 이름으로 26살 이하 청년노동자에 대한 해고의 절대적 자유를 독점자본에 부여하려 한 것을 대대적인 시위와 파업으로 좌절시킨 것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독일과 프랑스 등 서유럽 대륙국가들의 경우 신자유주의가 아직 노동자계급을 완전히는 장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일 뿐, 미국이나 영국의 고용 상황이 낫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표는 결코 아니다. 주지하듯이, 미국과 영국의 경우 서유럽 대륙국가들에 비해서 불완전․불안정 고용이, 즉 비정규직이 훨씬 더 광범하게 확산되어 있고, 따라서 고용․실업 문제의 실상이 그 속에 은폐되어 있는 것이다.











상대적 과잉인구의 존재형태와 비정규직



사실, 자본주의 경제의 고용․실업 문제의 실상을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개념은 '과잉인구',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본주의적 생산의 본성 때문에 자본주의적 생산 그 자체에 의해서 창출되는 '상대적 과잉인구'이다.2) '실업'이 전적으로 취업하고 있지 못한 상태만을 가리키는 데에 비해서 "어떤 노동자나 그가 반(半)밖에 고용되어 있지 않거나", 즉 불완전․불안정하게 고용되어 있거나, "혹은 전혀 고용되어 있지 않은 기간에는 상대적 과잉인구에 속하는"3) 것이기 때문이다.



맑스는 [자본론](제1권 제7편 제23장 제4절)에서 이 상대적 과잉인구는 4개의 형태, 즉 순환적, 그리고 "유동적, 잠재적, 정체적" 형태로 존재한다고 지적하고 있다.4)



'순환적 형태'란, 맑스가 "때로는 공황기에 급성적으로 나타나고, 때로는 불황기에 만성적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산업순환의 국면변화가 그것에 각인하는 바의 커다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형태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호황 및 번영기에는 현업노동자로 흡수되지만 공황 즉 경제위기의 시기에 급성적으로, 그리고 그에 이은 불황기에 만성적으로 나타나는 상대적 과잉인구의 형태이다. 지난 97년 말에 폭발한 심각한 경제위기를 계기로 한국의 노동자들도 절절히 경험한 바 있는 그러한 경제위기, 산업순환에 따른 실업과 불완전취업이 그것이다. 최근 대우자동차가 당시 해고했던 노동자의 대부분을 다시 채용했다고 하여 보수언론이 그것을 무슨 특별한 사건이나 되는 듯이, 더구나 '노사 협조․상생' 운운하는 역겨운 이데올로기 선전과 함께 떠들어댔지만, 공황․불황기의 이러한 대량해고, 대량의 과잉인구 배출과 호황․번영기의 그 재흡수는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항용 있는 일이다. 이러한 과잉인구가 얼마나 일반적인가는, 맑스가 상대적 과잉인구의 존재형태를 논하면서 아예 그렇게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형태들을 도외시"하고 있는 데에서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영국이나 미국에서 '해고'를 얘기할 때에 'lay-off'라는 말이 가장 흔하게 사용되고 있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이 'lay-off'는 바로 공황과 불경기로 인한 '일시적 강제 해고'를 가리키는 말이다.



상대적 과잉인구의 '유동적 형태'란, "근대 산업의 중심―공장, 매뉴팩춰, 야금공장, 광산 등―에서는 노동자는 때로는 배척되고, 때로는 보다 대량으로 다시 견인되어, 비록 언제나 생산 규모에 대해서는 감소되는 비율에서이지만, 대체로 취업자 수는 증가"하는데, "이러한 경우에" 존재하는 과잉인구의 형태이다.5) "즉, 이 '유동적 형태'는 자본축적이 진행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노동자의 배척과 흡인 속에서 존재하고, 이른바 '마찰적 실업'이라고 불리는 것이 이에 해당"6)된다. 이들 실업자들은 취업노동자의 수가 증가한다고 해서 반드시 재취업되는 것은 아니고, 특히 자본이 고령노동자들을 기피하기 때문에, 혹은 분업에 의해서 그 기능이 일정한 사업부문에 결박되어 있기 때문에, 한편에서는 노동력의 부족을 호소하는 속에서도 실업인 채 있는 경우도 많다.



상대적 과잉인구의 '잠재적 형태'는 농업부문에서 나타난다. 맑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농업을 점령하자 마자, 혹은 점령하는 정도에 따라서, 농업에서 기능하는 자본이 축적됨에 따라 농촌노동자 인구에 대한 수요는 절대적으로 감소하지만, 여기에서는 농업 이외의 산업에서와는 달리 노동자 인구의 배출이 그보다 큰 흡인에 의해서 메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 때문에 농촌 인구의 일부는 끊임없이 도시 프롤레타리아트 혹은 매뉴팩춰 프롤레타리아트로 옮겨가려고 하면서 이 전환에 유리한 사정을 기다리고 있다. (매뉴팩춰는 여기에서는 모든 비농업적 산업을 의미한다.) 따라서 상대적 과잉인구의 이 원천은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 그러나 도시로의 그 끊임없는 흐름은 농촌 자체에 잠재적 과잉인구가 끊임없이 존재하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고, 이 과잉인구의 크기는 단지 배수구가 특별히 크게 열릴 때에만 보이게 된다. 그 때문에 농촌노동자는 임금의 최저한도까지 내리눌리고, 한쪽 발은 언제나 빈곤이라는 수렁에 처박고 있는 것이다.7)







상대적 과잉인구의 '잠재적 형태'란 결국, 다른 산업과 달리 농업은 그것을 영위할 토지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 하에서 농업―농업 그 자체가 자본주의적으로 경영되든, 아니든―의 노동생산력이 발달함에 따라서 발생하여 아직 도시나 다른 산업으로 배출되지 못한, 그리하여 아직 농업부문에 머물고 있는 과잉인구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지난 1960년대 중반 이후 이러한 과잉인구가 참으로 대량적으로 대도시로 유입하여 고지대의 빈민촌, 판자촌과 저임금노동자군을 형성했음은 그 동안 우리가 목격해온 대로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했던 농업인구가 이제는 이미 6% 내외의 극소수를 차지하게 되었지만, 농축산물에 대한 대대적인 시장개방과 특히 정부가 추진하는 한미 FTA로 그나마 농민도 또 한번 대대적으로 과잉인구로 전락해가고 있다.



하지만, 근래의 상황 전개와 관련하여 특히 중요한 것은 상대적 과잉인구의 '정체적 형태'이다. 다름 아니라, 불완전․불안정 취업노동자들, 즉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맑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상대적 과잉인구의 세번째 범주인 정체적 과잉인구는 현역 노동자군의 일부를 이루고 있지만, 전적으로 불규칙하게 고용되어 있다. 그것은 그리하여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노동력의 고갈되지 않는 저장고를 자본에게 제공하고 있다. 그들의 생활상태는 노동자계급의 평균수준 이하로 저락하고, 실로 이것이 그것을 자본의 고유한 착취부문의 광범한 기초를 이룬다. 최대한의 노동시간과 최소한의 임금이 그 특징이다. 우리는 가내노동이라는 항(項) 속에서 이미 그 주요한 모습을 알았다. 이 과잉인구는 끊임없이 대공업이나 대농업의 과잉인구로부터 보충되고, 또 특히 수공업 경영이 매뉴팩춰 경영에 패배하고, 또 후자가 기계 경영에 패배해가는, 몰락해가는 산업부문에서도 보충된다. 축적의 범위 및 힘과 함께 '과잉화'가 진행됨에 따라 그 범위도 확대된다. 그러나 이 과잉인구는 동시에 또 노동자계급 가운데 그 자신을 재생산하고 영구화하는 요소를 이루고 있고, 노동자계급의 총증가 가운데 다른 요소들보다 상대적으로 더욱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강조는 인용자)8)







현역 노동자군의 일부를 이루고 있지만, 전적으로 불규칙하게 고용되어 있는 노동자군! 그리하여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노동력의 고갈되지 않는 저장고를 자본에게 제공하고 있는 노동자군! 그들의 생활상태는 노동자계급의 평균수준 이하로 저락하고, 실로 이것이 그것을 자본의 고유한 착취부문의 광범한 기초를 이루고 있는 노동자군! 최대한의 노동시간과 최소한의 임금이 그 특징인 노동자군! ― 바로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군의 모습, 바로 그것이다. 더구나 축적의 범위 및 힘과 함께 '과잉화'가 진행됨에 따라 오늘날 그 범위는 더없이 확대되어 있다! 머지않아 충분히 그 빈곤과 고통, 노예상태, 굴욕, 절망을 끝장내버릴 수 있을 만큼!











역사상 두번째로 ...!



앞에서 본 것처럼 맑스는, "근대 산업의 중심―공장, 매뉴팩춰, 야금공장, 광산 등―에서는 노동자는 때로는 배척되고, 때로는 보다 대량으로 다시 견인되어, 비록 언제나 생산 규모에 대해서는 감소되는 비율에서이지만, 대체로 취업자 수는 증가한다"(강조는 인용자)고 말하고 있다.



비록 언제나 생산 규모에 대해서는 감소되는 비율에서이지만, 대체로 취업자 수는 증가한다! ― 이것이 바로 맑스가 생전에 목격한 바였고, '대체로'라는 유보가 붙어 있긴 하지만, 논리적으로 논한 바였다. 그런데 지금 우리 눈앞에서는 이와 반대의 현상이 전개되고 있다. 취업자의 수가 생산 규모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감소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절대적 수에서도 감소하고 있는 것이다. 1920년대(!)에 이어9) 역사상 두번째로!



취업자의 수가 생산규모에 대해서 비율상 감소하는 이유는 물론 축적의 진전에 따른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변화는 노동생산력의 발전과 표리관계 속에서 진행되는데,10) 이 관계를 맑스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자본주의체제의 일반적 기초가 일단 주어지면, 사회적 노동생산성의 발전이 가장 강력한 축적의 지렛대가 되는 지점이 축적이 진행되는 동안에 언제나 나타난다. ...



토지의 풍요도 등과 같은 자연적 조건이나, 독립적으로 고립되어 노동하는 생산자의 숙련―하지만 제품의 총량에서 양적으로 실증되기보다는 오히려 품질에서 질적으로 실증되는 숙련―을 도외시한다면, 노동의 사회적 생산도(Produktivgrad)*는11)한 사람의 노동자가 주어진 노동시간에 노동력의 동일한 긴장도로써 생산물로 전화시키는 생산수단의 상대적인 양적 크기로 표현된다.**11)그가 노동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생산수단의 양은 그의 노동의 생산성이 증대함에 따라서 증대한다. 그때 이 생산수단은 이중의 역할을 한다. 한편에서 생산수단의 증대는 노동의 생산성이 증대한 결과이고, 다른 한편에서 생산수단의 증대는 그 [즉, 노동생산성을 증대시키는: 인용자] 조건이다. 예컨대, 매뉴팩춰적 분업과 기계의 충용에 수반하여 동일한 시간에 보다 많은 원료가 가공되게 되고, 따라서 보다 커다란 양의 원료나 보조재료가 노동과정에 들어가게 된다. 이는 노동생산성이 증대된 결과이다. 한편, 충용되는 기계나 역축, 광물성 비료, 배수관 등의 총량은 노동생산성 증대의 조건이다.  건물, 용광로, 운송수단 등으로서 집적되는 생산수단의 양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조건이든 결과든, 생산수단에 합체되는 노동력에 비(比)한 생산수단의 양적 크기의 증대는 노동생산성의 증대를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노동생산성의 증가는 그 노동량에 의해서 가동되는 노동수단의 총량에 비한 노동량의 감소로, 또는 노동과정의 객체적 제요인에 비한 그 주체적 요인의 크기의 감소로 나타난다.



이러한 자본의 기술적 구성의 변화, 즉 생산수단의 양이 그것에 생명을 부여하는 노동력의 양에 비해서 증대한다고 하는 것은 자본의 가치구성에, 자본가치의 가변성분을 희생으로 하는 불변성분의 증대로 반영된다. 예컨대 한 자본에 관해서 백분률로 계산하면, 처음에는 생산수단과 노동력에 각각 50%씩 투자되고, 나중에 노동생산성이 발전하면 생산수단에 80%, 노동력에 20%가 투하되다는 식이 된다.11)







결국, 자본주의적 생산체제는 그것이 발전하면 할수록 생산수단에는 상대적으로 더 많은 자본이, 그리고 노동력을 구매하는, 즉 노동자계급의 소득으로 되는 임금에는 상대적으로 더 적은 자본이 투하되게 된다는 뜻이다. 당연히 생산규모의 확대에 비해서 취업노동자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게 증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는 취업노동자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게 증대한다는 뜻이지, 절대적으로 감소한다는 뜻은 아니다. 실제로 맑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축적의 진전은 가변자본 부분의 상대적 크기를 감소시키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가변자본 부분의 절대적 크기의 증대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어떤 자본가치가 처음엔 50%의 불변자본과 50%의 가변자본으로 나뉘어지고, 나중에는 80%의 불변자본과 20%의 가변자본으로 나뉘어진다고 가정하자. 그 동안 최초의 자본, 예컨대 6,000파운드가 18,000파운드로 증대했다고 하면, 그 가변자본도 1/5만큼 증대한 것이 된다. 그것은 3,000파운드였는데, 이제는 3,600파운드다. 노동에 대한 수요를 20% 증대시키기 위해서 이전에는 20%의 자본증대로 충분했는데, 이제는 그를 위해서는 최초의 자본을 3배로 할 필요가 있다.12)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되고, 그에 수반하여 가변자본이, 따라서 취업노동자의 수가 이렇게 상대적으로는 감소하지만 절대적으로는 경향적으로 증대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어쩌면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과 축적의 진전의 '자연스러운'(?), 혹은 '정상적인'(?) 모습이나 상태일 것이다.



그런데 이미 그 전성기를 지나 임종이 가까워진 자본주의에는, 앞에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이러한 '자연스러운', 혹은 '정상적인' 모습이나 상태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사태가 출현"13)했다. "제1차 대전 후인 1920년대의 미국에서, ... 즉, '미증유의 번영'의 시기라고 불린 20년대의 지속적인 호경기 속에서 구조적인 실업자를 낳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실업형태가 발현한 밑바탕에는 자본주의가 발생한 이래 그 발전을 주도해온 제조업의 동향에 있어서의 변화가 보인다. ... '제2차 산업[제조업]에 종사하는 노동인구의 비율이 최고한에까지 상승하고, 그 후에 저락하는 경향'의 전개"14)가 그것이다. 그런데 1920년대 미국 제조업에서의 고용은 사실은 인구에 비해서, 혹은 전체 취업노동자 수에 비해서 그 비율만 감소한 게 아니었다. 그 절대 숫자에서도 정체 혹은 감소를 기록하고 있었다. (공황과 만성적 불경기였던 1930년대는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다.) 다음 통계를 보자.







제조업 노동자의 수와 비율 (사람수 단위: 1,000명)



***<표는 첨부한 본문을 참조 바람>







주: '총수'는 비(非)농업산업의 임금․봉급노동자의 수.



출처: Historical Statistics of the United States, colonial times to



     1970, p. 137 (重田澄男, 같은 책, p. 182에서 재인용).







그런데 사실은 정체되거나 감소된 것은 제조업 노동자의 수만이 아니었다. 농업과 제조업, 광업, 운수업으로 이루어지는 '생산적 노동자'의 수가 사실은 절대적으로 감소해서, 1919년에 2천4백96만9천 명이던 숫자가 1926년에는 2천2백83만2천 명으로, 이 기간 동안에 2백12만5천 명이나 감소하고 있다.15) 1920년대에 고용이 증대한 부문은 "상업, 써비스업, 공무원, 금융․보험 등의 비생산적 부문과 건축업"16)이었고, 이는 명백히 경제의 부후화(腐朽化)․기생화(寄生化)를 보여주는 현상이었다.



위의 통계들에는 물론 비정규직화 등 불완전․불안정 고용의 실태, 즉 고용의 질적 악화17)는 은폐되어 있다. 1920년대에는 "산업노동자에게 대단히 불안정한 지위를 강요해서, 그것은 노동자의 산업간 이동의 변화, 특히 방출의 증대와 흡수의 감소로 되어 나타나고 있다. 즉, 제1차 대전 전(1899-1914년)에는 5년간의 국세조사(census) 기간 사이에 1,000명 중 평균 21명이 그때까지 일하고 있던 산업으로부터 다른 산업 혹은 비제조업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않을 수 없으면서도 동시에 149명의 새로운 노동자가 흡수되고 있었음에 비해서, 전후(1923-29년)에는 2년마다 벌어진 국세조사 기간 중에 1,000명 중 49명이 방출되고, 45명이 흡수되었다고 한다."18) 이러한 통계가 고용의 질 자체를 보여주진 않지만, 그렇게 흡수보다 방출이 많고 불안정한 지위를 강요받는 속에서 불완전․불안정 고용이 대폭 증대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1920년대에 미국에서는 왜 이러한 새로운 사태가 발생했는가?



다름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의 대량화와 발전으로 시장이 포화상태에 다달아 있거나 포화상태에 육박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독점자본 간 경쟁이 격화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경쟁전은 상품의 저렴화를 통해서 수행된다." 그리고 "상품의 저렴은, 다른 사정이 불변이라면, 노동생산성에 의존"한다.19) 따라서 경쟁이 격화됨에 따라서 독점자본은 노동생산성의 증대를 위해 기술개량을 가속화했고, 이것이 다시 원인이 되어 경쟁이 격화되는 악순환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주요 제조업 부문에서 이른바 '포드주의적 생산방식'이 일반화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1920년대에 미국에 출현한 '새로운 사태'란 바로 이러한 생산기술의 개량, 노동생산성의 비약적 증대에 따른 '기술적 실업'이었고, 따라서 실업자․과잉인구를 구조적으로 누적시켜가는 '구조적 실업'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이 시기 실업의 성격과 의의에 대해서는 부르주아 경제학자인 J. M. 케인즈조차 1930년 10월에 발표한 "우리 자식들의 경제적 가능성"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고 한다.







... 제조업이나 운수업에서의 기술개량이 지난 10년 동안 사상 유례없는 정도의 속도로 진행되어 왔다. 미국에서는 1925년의 제조업에서의 1인당 산출량은 1919년의 그것을 40% 상회하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일시적인 장애 때문에 억제되어 있었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기술적 효율은 매년 1%의 비율로 지수적으로 증대하고 있다고 해도 틀림이 없다. ...



지금 이러한 변화 속도 그것이 우리를 해치고 있고, 해결하기 곤란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 우리는 새로운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일부 독자는 그 병명을 아직 듣지 못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이후 수년 사이에 빈번히 듣게 될 것이다. 그 병명은 기술적 실업(technological unemployment)이다. 이는 우리가 노동의 새로운 용도를 발견하는 속도를 넘는 속도로 노동이용을 절감하는 수단을 발견한 데에 기인하는 실업을 의미하고 있다."(강조는 원저자)20)







맑스주의자인 루이스 코리(Lewis Corey) 역시 1928년 3월에 쓴 한 논설에서 다음과 같이 그것이 기술발전에 의한 실업으로서 만성적일 수밖에 없음을 명확히 하고 있었다.







과거에는 심각한 실업은 순환적 불황의 결과로서 일어났다. 그런데 현재 확산되고 있고 일반적으로 심각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실업은, 그 극히 일부분만이 순환적 원인에 의한 것일 뿐이다. 실업의 대부분은 개량된 기술의 결과에 의한 것으로서 기술개량은 노동자의 과잉을 낳고, 그에 대해서 우리의 경제생활은 이전과 같은 고용을 제공할 수 없었다.



...



... 경기회복은 순환적 실업을 끝내겠지만, 그러나 생산이 1926년의 정점에 달한다고 하더라도 기술적 실업을 끝내지 않을 것이다. 경기회복은 기술적 실업을 증대시킬지도 모른다.21)







자, 이제 1920년대를 넘어 21세기 초로 시선을 옮겨보자. 그러면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이미 1970년대부터 자본주의가 자랑해왔고, 최근 10여년 동안 참으로 가속도가 붙여 전개되어온 '과학기술혁명'이다. 실제로 현재 전개되고 있는 과학기술혁명은 1920년대의 기술개량과는 그 차원이 다르게 눈부신 것이다.



당연히 시장은 포화되어 있고, 사실상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실업, 정확히 말하면 상대적 과잉인구는, 대공황기였던 1930년대를 도외시한다면,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대량화, 구조화되고 있다. 구차하게 통계를 들 것도 없이 제조업 노동자를 위시한 '생산적 노동자군'은 빠른 속도로 감소되고 있고, 자본의 '금융화', 즉 투기자본화, 그리고 경제와 노동의 '써비스화', 즉 부후화․기생화가 빠르게, 그리고 전반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기이하게도 '경제의 선진화'라는 찬사를 받으면서!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1950년대 중반 이후 이른바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 체제 속에서 노동자계급 상층부의 노동귀족화, 노조관료화가 현저하게 진전되어 노동자계급운동 일반이 무력화되고, 게다가 20세기 사회주의 세계체제의 붕괴로 노동자계급이 그 역사적 전망을 상실했기 때문에 독점자본과 그 국가는 과거에 노동자계급에게 베풀었던, 사실상 일체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배려를 회수하고 있다. 독점자본과 그 국가는 실업, 과잉인구를 줄이고 해소시키려는 노력 대신에, '구조조정', '감량경영', '노동(시장)의 유연화' 등등의 구호, 기치를 내걸고 그것을 확대하고 은폐하는 데에 시쳇말로 '올인'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적 공세의 무자비한 강화다.











이러한 상황 진전은 도대체 어떻게 귀결될 것인가



1920년대의 거대한 기술개량, 그에 따른 노동생산력과 생산의 급속한 증대는 1930년대의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대파국, 대파멸, 대비극, 대살육으로 귀결되었다. 포스트 포드주의니, 신경제니, 사회적 축적체제니 운운하는 일부의 얼간이 '경제학자'들은 대체로 노동생산성 발전의 지체(遲滯)가 공황, 즉 파국의 원인이라는 헛소리를 해대고 있지만, 1920년대의 거대한 기술개량이 1930년대의 대공황을 불러온 것에서도 명확한 것처럼, 자본주의적 생산체제에서는 노동생산성의 비약적 발전이야말로, 그로 인한 과잉생산이야말로 공황, 즉 파국의 원인이다.



나아가 노동생산력의 발전과 관련해서는 맑스의 다음과 같은 지적도 상기하여야 한다.







자본주의적 체제 내에서는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을 높이기 위한 모든 방법은 개개 노동자의 희생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 생산의 발전을 위한 수단은 모두 생산자를 지배하고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일변하고, 노동자를 불구화하고 부분적 인간으로 만들어 그를 기계의 부속물로 격하시키며, 그의 노동의 고통으로 노동의 내용을 파괴하고, 독립적인 힘으로서의 과학이 노동과정에 합체됨에 따라서 노동과정의 정신적인 힘들을 그로부터 소외시킨다고 하는 것, 이들 수단은 그가 노동하기 위한 조건을 망가뜨리고, 노동과정에서는 그를 극히 천하고 비열한 전제에 복종시키며, 그의 생활시간을 노동시간으로 만들어버리고, 그의 처자식을 자본이라는 자거노트의 수레바퀴*22)아래로 내던져버린다고 하는 것.22)







그런데 지난 수십 년 동안의 과학기술혁명으로 그러한 노동생산력의 발전이 사상 유례없는 속도로 전개되어왔고,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내에서의 당연한 결과로 시장은 지금 만성적인 과포화상태에 있으며, 노동자계급은 실업과 비정규직이라는 불완전․불안정 취업, 그에 따른 빈곤으로 고통받고 있다. 1930년대의 대공황이 우연이 아니었다면, 이러한 상황이 결국은 조만간 필연적으로 1930년대 이상의 대공황, 대파국으로 귀결되리라는 것은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실제로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로부터조차 대공황을 예고하거나 경고하는 목소리를 듣는 것이 최근엔 드믄 일이 아니게 되었다.



진짜 문제는 거기에서부터일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1930년대의 대공황은 왜 사회혁명 대신에 제2차 대전이라는 대살육으로 전화되었는가를 깊이 성찰하고, 그때에 범했던 오류를 다시 범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 오류, 그것은 다름 아니라 노동자계급이, 그것이 파시즘이었든 뉴딜이었든, 국가주의적․애국주의적․코퍼러티즘적, 즉 이른바 '사회적 합의주의적' 선동에 영혼을 팔아넘긴 것이고, 노동귀족․조합관료들로 하여금 노동자 대중을 그렇게 이끌고 팔아넘기도록 허용한 것일 것이다.



지금은 분명 노동운동이, 노동자계급이 그 어느 때보다도 시급히 이념적으로도 조직적으로도 혁명적 정치화, 혁명적 의식화를 서둘러야 할 때이다. 《노사과연》







이론



독점자본의 비정규직 확대 정책



―그 배경과 의의―











채만수|소장




1) "산업예비군은 침체나 중간정도의 호황기에는 현역 노동자군을 압박하고, 과잉생산이나 경련의 시기에는 현역군의 요구를 억제한다."([자본론] 제1권, MEW, Bd. 23, S. 668.)




2) 자본이, 따라서 그 자본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서 '상대적 과잉인구'라는 개념이 별로 쓰이지 않는 이유도 필시 그 때문일 것이다.




3) MEW, Bd. 23, S. 670.




4) 맑스가 "상대적 과잉인구 ... 그것은 언제나 3개의 형태를 취한다. 유동적, 잠재적, 정체적 형태가 그것이다"라고 쓰고 있는 데에 주목하여, 맑스는 3가지 형태의 상대적 과잉인구를 들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사실은 맑스는 "상대적 과잉인구가 때로는 공황기에 급성적으로 나타나고, 때로는 불황기에 만성적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산업순환의 국면변화가 그것에 각인하는 바의 커다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형태들을 도외시하면, 그것은 언제나 3개의 형태를 취한다. 유동적, 잠재적, 정체적 형태가 그것이다"(강조는 인용자)라고 쓰고 있기 때문에, 그가 말하고 있는 형태는 크게 4가지이다. 이외에 물론 "부랑자나 범죄자, 매춘부 등 한 마디로 본래의 룸펜 프롤레타리아트"(MEW, Bd. 23, S. 673)를 포함한 여러 형태의 피구휼궁민(被救恤窮民), 즉 생활보호대상자가 있지만, 여기에서는 논외로 한다.




5) MEW, Bd. 23, S. 670.




6) 重田澄男, [資本主義と失業問題 ―相對的過剩人口論爭―], 御茶の水書房, 1990, p. 174.




7) MEW, Bd. 23, SS. 671-72.




8) MEW, Bd. 23, S. 672.




9) 重田澄男, 같은 책, pp. 181-232 (제8장 1920년대의 새로운 사태) 참조.




10) 참고로 말하자면, 다른 기회(채만수, [노동자교양경제학(전면개정판)], 노사과연, 2006, p. 386)에도 지적한 것처럼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수호자"(정성진, [마르크스와 한국경제], 책갈피, 2005, p. 11)임을 자임하는 저명한 학자님조차, 노동생산성이란 일정량의 노동이 얼마만큼의 사용가치를 생산하느냐의 문제여서 생산에 투여되는 노동량이 같으면 노동생산성이 어떻든지 간에 언제나 동일한 양의 가치를 생산한다는, 맑스주의 경제학에 대한 최소한의 기본적 이해조차 갖추고 있지 못하고, 노동생산성을 "부가가치/종업원수"(정성진, 같은 책, p. 130)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 우리 사회의 엄연한 지적 현실이다.




* 노동생산력과 노동생산성이 서로 다른 개념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노동생산력이나 노동생산성,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노동생산도는 모두 동일한 개념이다.




** 위의 주 10) 참조.




11) MEW, Bd. 23, SS. 650-51.




12) MEW, Bd. 23, S. 652.




13) 重田澄男, 같은 책, p. 181.




14) 같은 곳.




15) 重田澄男, 같은 책, p. 187의 '제4표'. 참고로, 이 통계와 위 본문의 '제조업 노동자의 수와 비율'의 통계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16) 같은 책, p. 183.




17) "...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및 노동의 생산력이 발전―이는 축적의 원인임과 동시에 결과이기도 하다―함에 따라서 자본가는 같은 액수의 가변자본을 투하하더라도 개개의 노동력의 외연적 또는 내포적 착취의 증대에 의해서 보다 많은 노동력을 유동(流動)시킬 수 있다. 또한 ... 자본가는 같은 자본가치로 보다 많은 노동력을 살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더욱더 숙련노동자를 비숙련노동자로, 성숙노동자를 미성숙노동자로, 남자노동자를 여자노동자로, 성년노동력을 소년 또는 유년노동력으로 구축해갈 수 있기 때문이다." (MEW, Bd. 23, SS. 664-65.)




18) 重田澄男, 같은 책, p. 222.




19) MEW, Bd. 23, S. 654.




20) 重田澄男, 같은 책, pp. 183-84에서 재인용.




21) Lewis Corey, "An Estimate of Unemployment: Cyclical Idleness Added to Technological", THE ANNALIST, 9 March, 1928. (重田澄男, 같은 책, pp. 186, 192에서 재인용.)




*  자거노트의 수레바퀴 ― 자거노트(Juggernaut)는 힌두교의 최고의 신들 중 하나인 비슈누(Visnu) 신이 취하는 모습의 하나. 자거노트 숭배는 대단히 화려한 제례나 극단적인 종교상의 광신으로 유명한데, 이 광신은 신자의 고행과 자기희생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대제삿날에 신자들은 비슈누 신, 즉 자거노트 신의 초상을 실은 수레바퀴 아래로 몸을 던졌다. ― (MEW 편집자의 주.)




22) MEW, Bd. 23, S. 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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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onio Gramsci의 생애와 사상


Antonio Gramsci의 생애와 사상(1)

-노동운동과 그람시 이종래(경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연구교수)

1. 들어가면서: 그람시 사상의 배경

안토니오 그람시는 이탈리아 반도의 최남단인 자르디니아 지방인 알레스(Ales)에서 1891년 출생하여 1937년에 죽었다. 이태리 공산당 활동을 한 대가로 1927년부터 1937년까지 만 10년간의 수형생활을 하였으며 이 기간에 '옥중수고'라는 저작을 남긴 맑스주의자이다. 그의 아버지가 낮은 직위의 공무원이었고 어머니는 평범한 주부였던 사실이 말해주고 있듯이, 그의 어린시절은 가난과 질병으로 점철되어 있다. 즉 그는 어린시절 얻은 질병으로 인해 곱추라는 신체적 장애까지 얻게 되지만 당시 맑스주의자들이 일반적으로 가졌던 소아병적 편협에서 비롯된 사상적, 정신적 불구에서 벗어난 사상가로 평가된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보면 그람시의 정치적 입장은 너무나 예외적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예외성과 특수성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안토니오 그람시에 대한 생애사적 연구는 여전히 필요하다.

이 런 의미에서 그람시의 출생지역인 남부 이태리의 사회적 상황을 먼저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남부 이태리는 산업화된 북부와는 판이한 농업지역이다. 그람시 스스로가 강조한 '남부 이태리 문제'란 종교적인 이데올로기가 경제적인 갈등을 봉합하는 현상에서 출발한다. 이 지역에서 카톨릭이라는 종교는 사회적으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산업화된 북부의 노자간의 계급대립과 달리 봉건적인 지주와 소작인 관계가 여전히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적 상황으로 인해 그람시는 남부 이태리에서 사회주의 운동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인습과 관념과의 투쟁 없이 불가능한 사정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본다. 남부 이태리 문제에 대한 그람시의 이런 평가는 사회주의 운동 전체로 이전되면서 이른바 전략과 전술의 수립으로까지 확장된다. 다시 말해 사회구조와 행위주체 사이에 놓여 있는 간극을 메우기 위한 의식적 활동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즉 그람시가 그렇게도 강조하는 '일상적인 사고방식'을 벗어나는 '변혁적인 사고방식과 행위양식'의 도입은 주체의 자각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가능해진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람시가 자신의 인생을 "3배 혹은 4배로 뒤떨어진 지방민"이기 때문에 "후진적인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을 벗어나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옥중수고 15: §19)1)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자평한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일상생활에서의 인식과 활동을 변화시키는 계기의 문제를 문화와 결합하려고 시도한다. 이런 사실에서 우리는 그람시를 문화주의와 맑스주의를 결합하려 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칭호를 붙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람시의 이런 시도는 자신의 성장과정에서 나온 경험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그람시는 경험에서 체득된 생활의 원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규범과 질서로 사회화되는 장을 '시민사회'(societa` civile)로 개념화한다.2) 하지만 동유럽과 서유럽사회의 차이를 시민사회의 역사적 존재유무로 구분하였다고 안토니오 그람시의 사상을 협소화 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그람시의 본래적 모습인 실천가로서의 모습보다 그에 대한 평가가 이론가로서 국한될 가능성이 커지기도 하지만 그람시의 본래적 관심사는 노동자 계급운동이었다는 사실이 호도될 위험까지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먼저 그람시의 생애를 짧게나마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안토니오 그람시라는 이름을 세계에 알린 계기가 된 '옥중수고'에서 '남부 이태리문제'에 관한 글들은 이태리에 국한되는 문제를 가진 반면 서유럽사회의 특수성을 강조한 '포드주의' 혹은 '아메리카주의'라고 표현한 주제들은 국내에 소개조차 변변히 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노동운동가로서 안토니오 그람시를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2. 청년기의 그람시: 대학시절

그람시의 청년기는 1912년 투린 대학 입학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3) 그람시는 이태리??그리스 문학, 역사학, 철학, 언어학, 법학(사법)을 전공과목으로 택한다. 이 과목 중에서 언어학을 첫 번째 전공으로 한다. 이후 자신의 정치이론에서 대표적인 개념으로 알려진 '헤게모니'도 언어학에서 차용된 개념이라는 사실도 알고 보면 바로 이런 전공과목의 선택으로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4) 그리고 전공과목들의 선택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인문학에 대한 그람시의 높은 관심과 반대로 경제학은 빠져 있다는 점이다. 이런 대학시절 전공과목들의 조합은 이후 2차 인터내셔날 시기에도 그람시가 경제주의로 기울지 않고 문화적 관심을 강조한 이유를 밝혀주는 논거로 될 수도 있다. 게다가 당시 노동자계급 운동에서 경제주의적으로 환원하는 우파와 문화적대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좌파로 쉽게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람시의 독자성은 두드러진다. 그람시의 이런 독자성은 유년시절의 경험과 함께 대학시절의 학업과 정치활동에서 토양이 마련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이후 그람시의 사상을 가능하게 한 토대로 보여 진다.

그람시는 대학시절 새로운 지식습득과 더불어 실천 활동을 병행한다. 1913년 이래 그람시는 이태리 사회당(PSI)의 당원이었고, 1914년 그는 사회당내 '변혁적 좌파그룹'에 합류한다. 1915년 그는 졸업이후 대학이나 중등학교에서 이미 보장된 교수나 교장과 같은 좋은 직장을 얼마든지 얻을 수 있었지만, 사회당 중앙위원회에서 발간하던 잡지 'Avanti'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한다. 그는 이 사회당 기관지에 지방정치, 시사문제 그리고 각종 문화 비평적인 글을 주로 발표한다. 그람시가 1916년에서 1920년 사이 170편에 달하는 연극평론을 발표한 것도 바로 이런 활동의 연장선상으로 보여 진다.

그람시는 1915년 키엔탈(Kienthal)과 1916년 짐머발트(Zimmerwald)에서 열린 반전회의에서 레닌의 정치적 입장을 처음으로 접하면서 정통 맑스주의와 교감을 시작한다. 물론 이전의 시기에도 그람시는 속류 맑시스트들의 글을 알고는 있었지만 정통 맑시스트의 이론을 처음으로 접하는 기회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정통 맑스주의와의 만남이후 그람시는 맑스의 글을 정독하면서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한다. 1918년 5월 4일 사회당 투리노 시지부의 주간지에 맑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발표된 '우리의 맑스'에서 그람시는 맑스의 정치경제학을 자신의 시각으로 새롭게 해석하기 시작한다. 그람시는 먼저 정치경제학에 담겨진 이념이 순수한 진실로서 의미가 있기보다 그 이념이 경제적 현실의 부당성을 알리고 폭로하는데 유용하다는 점에서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즉 정치경제학적 이념은 "자의적인 성격"과 "허구로 가득 찬 종교적이거나 사회학적인 추상"이 아니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할 뿐만 아니라 실현될 수 있는 이념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그람시는 주장한다(Gramsci, 1918: 37).

여기서 우리는 2차 인터내셔날 시기 자본주의 경제의 자연붕괴에 따른 국가소멸론이 유행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그람시의 주장이 지닌 의미성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경제주의자들이 말하듯이 자본주의가 자연 붕괴할 때까지 기다리고 준비하는 것보다 자본주의 모순의 본질인 경제적 착취 구조를 널리 알려 사회적 설득력을 높여야 할 뿐만 아니라 이런 실천적 활동이 당면과제라고 그람시는 본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에 대한 인식은 맑스주의를 절대적 진리로 인정할 때 가능한 것이 아니라 경제적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실천적 활동을 통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맑스의 정치경제학은 종교적인 진리로서가 아니라 실천적 활동을 밑받침할 수 있는 정당성을 보장해 주기 때문에 맑스주의의 탁월성은 존재한다고 그람시는 주장한다. 그람시의 이런 맑스주의 해석은 주의주의(Voluntarismus)적 전통에 근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후 노동자 계급운동에서 자신의 입장은 주의주의적 운동과 거리를 분명히 두면서 자신만의 독자성이 분명히 드러난다.

3. 노동운동가로서 그람시

러시아에서 소비에트혁명5)이 일어난 1917년에 그람시는 세계 1차대전(1914-1918)으로 야기된 자본주의 위기국면에서 노동자 계급의 적극적 개입은 절박할 뿐만 아니라 필수불가결하다고 주장한 '화해할 수 없는 혁명 그룹'에 가입한다. 그람시의 이런 정치적 입장은 당시 사회당이 취한 전쟁 불개입이라는 소극적 태도에 대한 명확한 반대가 분명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리고 그는 이 혁명 그룹의 조직원이자 이태리 사회당 투린 시지부의 책임자로서 1919년 6월 기업내부 노동자 조직을 러시아의 소비에트 모형에 따라 재편할 것을 제안한다. 즉 그람시는 이태리에서 '노동자평의회'운동을 제안한 것이다. 그람시의 이런 제안은 1920년 투린 시에서 2십만 명이 참가한 총파업으로 현실화되지만, 그람시가 주도한 '노동자평의회'운동은 독일의 칼 립크네히트(Karl Liebknecht: 1871-1919)와 로자 룩셈부르그(Rosa Luxemburg: 1871-1919)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6). 독일의 '노동자평의회'운동이 가진 급진적인 '기동전'에 반대하여 '진지전'적인 사고를 그람시는 이미 그 당시에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독일의 '노동자평의회'운동이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의미에서만 한정되었다면 그람시는 이 운동을 문화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하기 때문이다. 즉 이태리 '노동자평의회'운동의 기관지인 'Ordine Nuovo'는 정치적인 선전??선동잡지가 아니라 문화 잡지라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람시가 노동자평의회 운동에서 관심을 가졌던 것은 노동자적인 사고, 표현방식과 태도라는 점이다. 여기서 기존의 지배질서가 묻어 있는 사고와 표현방식, 태도가 아닌 노동자적인 혁명적인 사고, 표현방식과 태도를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가 혁명의 관건이라는 그람시의 문제의식이 돋보인다. 하지만 스파르타쿠스단을 모태로 하는 독일의 노동자평의회운동은 1918/19년에 독일 공산당(KPD)을 만드는 계기로 되듯이, 이태리에서도 노동자평의회운동은 1921년 이태리 공산당(PCI)이라는 조직을 만드는 초석이라는 점에서 두 운동의 공통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이런 조직건설은 러시아의 소비에트 혁명의 방식이 일반화되던 시기에 이른바 전위정당 건설이 시대적으로 요청된다는 사실에서 이해가 되긴 하지만, 노동자평의회운동의 활동내용의 차이는 이후 서유럽 사회주의 운동에서 전위정당의 역할과 내용을 두고 논쟁거리로 된다.

4. 정치가로서 그람시

1921년 아마데오 보르디가(Amadeo Bordiga)의 지도 아래에서 이태리 공산당(PCI)이 건설된다. 당시 이태리는 무솔리니의 파시스트운동이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위협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보르디가의 이태리 공산당은 파시즘을 특별한 위협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당시 이태리 공산당 지도부의 견해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는 어차피 부르조아 계급독재의 사회이기 때문에 파시즘은 그 다지 대단한 위협이 아니라 정상에서 조금 벗어난 변종일 뿐인 것이다. 이런 정세인식에 따라 보르디가의 이태리 공산당은 볼셰비키 혁명과 같은 군사 쿠테타를 일으킬 수 있는 전위정당화가 주요한 당면과제라고 보았다. 즉 파시즘에 반대하는 계급연합의 결성이 당면한 일차적인 과제가 아니라고 주장한 것이다. 보르디가는 부르조아적인 자유를 지키기 위한 계급연합 보다 노동자 계급내부의 단결력과 응집력을 높이는 도구로서 전위조직의 건설이 당면 과제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보르디가의 이런 정세인식과 달리 그람시는 노동운동에 대해 파시즘이 지닌 위협요소를 제거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대중의 동원이 필수불가결하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파시즘 반대를 위한 대중동원 투쟁은 사회당, 부르조아 민주주의자와의 연합으로 더욱 사회적 압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입장이 나오게 된다. 바로 이렇게 해당 시기의 단기적인 정세에 대한 두 사람의 대조적인 인식과 운동전망을 뚜렷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명목적인 이런 차이는 결과적으로 노동운동을 바라보는 실제적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람시가 '노동자평의회'운동을 주도하였을 때 그의 정치적 입장은 1차 대전이라는 자본주의 위기상황을 방관으로 일관하던 당시의 좌파 주류세력에 반대하여 노동자 계급의 적극적 투쟁을 조직하려 하였다는 점에서 주의주의적 전통에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으로 비쳐진다. 하지만 이 주의주의적 흐름이 급진화된 소수 전위정당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 그람시는 대중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주의주의적 흐름과 일정 정도 차이를 분명히 한다. 대중이 주체가 된 투쟁이 없으면 서유럽 사회에서 사회주의 건설은 불가능하다는 그람시적인 인식은 바로 이 시기에 획득된 것으로 보인다. 파시즘을 자본주의가 가진 모순의 단순한 표현양태로서 인식한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및 노동운동에 결정적 타격을 주는 반동의 시대가 올 수도 있다는 인식은 시대를 앞선 그람시만이 가진 탁월성이다.

그람시가 미리 예측한 노동운동의 위기상황은 1922년 10월 무솔리니가 '로마로의 행진'을 통해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사실로 드러난다.7) 권력을 장악한 무솔리니는 1926년까지 의회주의 체제를 유지하긴 했지만 이태리 공산당에 대한 합법??반합법??불법적인 백색테러를 벌인다. 이런 정세에서 그람시는 1922년 이태리 공산당 대표로 임명되어 코민테른의 본부로 이동하여 잠시 화를 면하지만, 1923년 파쇼정권은 공산당 지도부인 보르디가와 그람시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하면서 탄압을 본격화한다. 파쇼정권의 탄압으로 당의 유지가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1924년 4월 그람시는 면책특권을 지닌 의원 신분을 가지고 이태리로 돌아온다. 같은 해 코모(Como)에서 비밀리에 열린 이태리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그람시는 보르디가의 종파주의적 노선을 강력히 비판하지만, 대의원 다수를 획득하는 데에는 실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람시는 같은 해 8월 코민테른에 의해 이태리 공산당 사무총장으로 임명된다. 이로서 그람시는 정치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그람시는 당 사무총장으로 취임하면서 반파쇼 연합을 위해 야당들에게 '반(Anti)의회'를 제안하지만 성사되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람시는 반파쇼 연합의 필요성을 계속해서 주장하였고 농민과 노동자의 계급연대를 최종적인 목표로 설정한다. 이 노력은 1926년에 당내에서 성과를 거두게 된다. 즉 그람시의 노선이 이태리 공산당 3차 전당대회에서 다수파의 지위를 획득하였기 때문이다. 이태리 공산당은 전위정당에서 대중정당으로 지향하는 방향성의 전환을 하게 되었지만, 파쇼정권은 같은 해에 의회를 해산하면서 공산당을 불법화한다. 그람시는 1928년 재판에서 20년의 형을 판결 받는다. 이렇게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그람시는 1928년부터 집필허가를 얻어 사상의 편린이 담긴 짧은 글들을 쓰기 시작한다. 바로 이 짧은 그들의 모음집이 이후 '옥중수고'로 출판되면서 안토니오 그람시라는 이름이 세계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로 된다.8)

4. 사상가로서 그람시

그람시가 사회주의 및 노동운동에 끼친 공헌과 평가는 우선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가장 먼저 그람시는 서유럽 맑스주의의 원조로서 이야기된다. 이전의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동구권 사회주의와는 성격이 다른 서유럽 사회주의 운동의 이론적 근거를 그람시가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이후 정통 맑스주의의 이론적 근거가 거의 사라지다시피한 지금의 상황에서 그람시 연구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경우에 따라 정통 맑스주의와 서유럽 맑스주의의 차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대비해 봄으로써 지금의 노동운동이 처한 대안 상실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즉 그람시 연구를 통해 노동운동에게 하나의 대안적 방향성을 제시해 줄 수도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그람시 연구는 그람시의 사상적 공헌에 대한 평가만이 아니라 새롭게 진행될 필요가 있다.

두 번째로 그람시가 맑스주의를 새롭게 해석하면서 차용한 많은 개념들이 현대사회에서 일상적으로 회자되면서 일반화되었다는 사실이다. 현대 사회과학에서 학문적으로 빠뜨릴 수 없는 중요 개념인 '시민사회', '헤게모니', '역사적 블록', '진지전', '기동전', '포드주의'와 같은 개념들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그람시가 개발한 개념들 중에서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분석을 위한 개념보다 문화에 대한 개념이 현대사회에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는 점이다.9) 그람시하면 문화주의자라는 애칭이 의례적으로 붙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통속적인 분류법은 그람시 이해에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 왜냐하면 그람시가 문화에 관심을 가진 까닭은 문화 그 자체가 아니라 당시 노동자 계급의식과 노동조합운동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문화적 접근법을 채택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람시는 자본주의적 생산력발전이 가져오는 상부구조의 변화는 노동자 계급의식에 필연적으로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고 본다. 즉 그람시는 현대자본주의 발전은 노동자 계급운동에 부정과 긍정이라는 이중적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고 본다. 당시의 속류 맑스주의자들은 기술발전에 무한한 신뢰를 주었지만 그람시는 기술발전에 부응한 생산력 상승이 계급운동의 성장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람시는 기술발전이 노동자 운동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면서 기술발전에 대한 신뢰는 아무런 근거 없는 믿음이라고 논박한다는 점에서 시대를 뛰어넘는 그의 탁월성을 알 수 있다.

노동운동의 전망에 대한 그람시의 이런 평가는 먼저 '미국주의와 포드주의'에 대한 짧은 글들에서 파편적으로 실려 있다. 그람시는 포드 자동차회사에서 노동자들에게 지급한 고임금이 어떤 사회적 의미를 지니는지에 우선 관심을 가진다. 여기서 그는 포드기업의 고임금정책이 산업발전에 따른 필연적 결과라는 주장에 대해 먼저 반론을 제기한다. 그 이유로 그는 포드기업 종사자의 높은 이동성을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람시는 빈번한 직장이동이 일어나는 포드기업의 고임금정책은 사회적으로 어떤 파장과 결과를 가지는지에 주목한다. 먼저 그람시는 포드의 고임금정책은 노동자 계급의 내부분화를 촉진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즉 기업은 평균노동시간이 동일한 조건에서 생산성 증가를 이루기 위해서 새로운 유형의 숙련 그리고 노동력의 양과 사용방식의 변화를 강제해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포드 자동차회사의 고임금을 그람시의 표현대로 하면 "기업이 노동자들에게서 차별성을 요구"(옥중수고 9: 1129)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 인식에서 그람시는 포드주의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합리화를 꾀한 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본다. 하지만 포드주의는 노동자 계급의식의 약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지적한다. 바로 그람시는 포드주의적 대량생산방식이 기업과 노동조직의 합리화로 이어져 생산체제의 변화를 수반하지만 이것이 노동자의 삶에 부정적으로 영향을 줄 수도 있다고 본다. 즉 산업자본에서 금융자본 중심으로 자본운동이 전환하는 사회적 이행과정에서 자본주의적 모순은 심화되면서도 기술발전으로 인한 물질적 분배는 더욱 용이해져 노동자 계급의 체제내 포섭이 강화되는 이중적인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적 생산력 발전이 노동자들을 체제의 이익에 충실하게 복무하는 결과를 가져오면서 자본주의의 본래적 모순은 더욱 은폐될 수도 있다는 지적인 셈이다.

자본주의적 생산력 발전이 위기가 아니라 자본주의 그 자체의 생존의 가능성을 열어둘 수도 있다는 그람시의 지적은 미국주의적 문화적 비평으로 더욱 강화된다. 그람시는 유럽과 미국사회의 차이를 먼저 개인주의적 전통의 유무에서 구한다. 유럽사회에서 이해관계에 기초한 경제적 개인주의는 다양한 이해집단을 형성하는 근거가 된다. 즉 유럽에서는 전통적인 성직자, 관료, 대지주, 대상인과 같이 경제적 이해관계에 기초한 집단의 형성이 불가피한 반면, 미국에서 이해집단은 생산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노동자와 자본가로 구분될 수 있다는 점이다.10) 다시 말해 구체제의 잔존물인 사회집단이 부재한 미국은 자본운동의 진행에 따라 사회적 재편이 그 만큼 더욱 용이할 수도 있다고 그람시는 평가한다. 즉 유럽과 비교하여 산업생산에 기초한 금융자본의 분배와 축적의 기제가 미국에서는 더욱 쉽게 적용되면서 미국적 실용주의의 전통이 형성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된다.

자본이 산업자본에서 금융자본 중심으로 이행하면서 자본운동의 고도화는 진행된다. 금융자본주의의 단계에서 자본운동은 수와 양의 계산에 바탕을 둔 자본 합리성으로 현상적으로 드러난다. 게다가 이 단계에서 자본운동은 시장의 무계획성까지 조절 예측하려 한다는 점이다. 즉 자본주의가 경쟁자본주의에서 독점자본주의 단계로 진입하면서 시장의 비예측적인 성향 역시 제어될 수 있다는 평가한 그람시는 당시 서구자본주의를 '계획된 경제'로의 진입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람시의 이런 평가는 당시 힐퍼딩(Hilferding)이 산업자본에서 금융자본으로 자본운동이 중심이 이동하면서 자본주의는 자신의 얼굴을 '조직된 자본주의'(Organisierter Kapitalismus)로 바꾼다는 주장과 동일한 맥락에 놓인다. 쉽게 말해 금융자본이 중심이 되면서 자본주의는 자본 합리성에 의해 운용될 수밖에 없다고 그람시는 본 것이다. 수요에 대한 예측에 기초한 대량생산방식의 등장은 자본주의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람시는 노동자가 개성을 상실하는 시대가 도래할 수 있다고 본다. 노동자의 운명이 테일러가 말했듯이 마치 '옷 입은 고릴라'와 같은 대량생산 노동자로 전락할 가능성을 그람시는 미국에서 본 것이다. 노동운동에 대한 이런 비관적 전망과 더불어 그람시는 미국주의의 유럽적 적용은 자본주의 발전에서 또 다른 변종을 가져올 수 있다는 걱정과 염려를 한다.

미국과 달리 유럽에서 노동자 계급의 탈계급화 현상은 또 다시 굴절될 가능성이 있다고 그람시는 평가한다. 즉 미국주의에 반대하는 사회적 세력인 대토지를 소유한 전통적인 지주계급과 대자본이 기존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 간의 합의를 도출할 수 있다고 그람시는 보기 때문이다. 이른바 전통적 부르조아지와 신생 부르조아지간의 계급연합이 형성되면서 파시즘적인 국가조합주의가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람시의 파시즘에 대한 해석은 정통 맑스주의적 해석과 달리한다. 즉 파시즘의 등장을 자본주의가 지닌 내재적 모순의 결과로 해석하는 정통적 해석과 달리 그람시는 자본과 전통적 지배세력이 야합하는 결과로 보기 때문이다. 이런 지배계급 내부의 타협은 자본주의의 체제위기를 극대화하려는 노동운동의 급진성을 사전에 봉쇄하는 효과를 가지면서 노동운동의 위기를 가져온다. 그람시가 당시 코민테른의 지배적 견해와 달리 이태리에 등장하기 시작한 파시즘을 노동운동의 위기로 받아들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파시즘의 도발에 대해 노동자 계급운동은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과제보다 자유민주주의적인 체제의 유지가 당면의 과제라고 그람시는 강조한다. 전통적 지배계급과 신흥 지배세력이 연합하여 사회적으로 세력을 행사하는 '헤게모니'를 약화시키기 위해서 노동자 계급운동은 우선 권위적 국가조합주의의 대응형태인 '사회적 조합주의'를 내세우는 것이 타당하다고 그람시는 본 것이다. 이런 '사회적 조합주의'의 건설이 노동자 계급운동에 유리한 조건을 형성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그람시는 전통적 맑스주의 내에서 오랫동안 계속되어 오던 개량과 변혁이라는 이분법적 인식구조에서 벗어나게 된다. 즉 자본주의적 발전은 노동자 계급에게 의도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개량이 아닌 변혁적 내용을 담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그람시는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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