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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농의 샘, 보는 이의 마음까지 경건하...
- 12/13
무척이나 더운 여름날, 서울의 평범한 서민아파트 단지 안에서 마을 주민들이 모여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그늘막 아래서 돗자리를 펴고 수박을 나눠먹는 모습이 참으로 90년대다웠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가운데 갑자기 젊은 여성이 밖으로 뛰쳐나왔고 뒤를 이어 남편이 달려 나와 그 여성을 붙잡아서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지만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지켜보던 여성들이 “왜 지켜보고만 있어요, 좀 말려요”라고 소리쳐봤지만
지켜보던 남성들은 “남의 집안일에 끼어드는 거 아니야”라며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다.
매 맡는 여성을 모른 척 눈감아버리는 그 모습도 참으로 90년대다웠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와중에도 폭행은 멈추지 않았고
참다못한 여성들이 그 남편에게 달려들어 두들겨 패기 시작하자
방관만 하던 남자들이 그런 여자들을 뜯어말리며 난장판이 벌어진다.
잠시 후 경찰이 출동해서 난장판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됐지만
경찰은 장시간 폭행을 당한 여성은 내버려둔 채 집단폭행을 당한 남편만 병원으로 호송했고 남편은 호송도중 사망하고 만다.
졸지에 살인사건의 피의자가 된 여성들은 경찰을 피해 황급히 아파트 옥상으로 피신을 하면서 경찰과의 대치가 시작됐다.
여성들은 우선 바리케이트를 치고 경찰의 진입을 막으며 대책을 논의하는데
마침 아들의 괄시 때문에 옥상에 와있던 할머니가 투신하면서 상황은 더 심각하게 번져버린다.
그때부터 영화는 옥상 농성장을 중심으로 그 여성들의 갈등과 연대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가정폭력의 피해 당사자, 아파트 부녀회장, 음식점 주방장 겸 사장, 술집 종업원, 밤무대 가수, 홀로 사는 여성, 평범한 가정주부, 트랜스젠더, 우아한 차림의 사모님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다양성을 맞추기 위해 다소 억지스럽게 이질적인 캐릭터들을 모아놓은 것 같았는데
그들의 행동과 상황을 풀어가는 방식이 너무나 활력 넘치고 자연스러워서
실제 농성장에 가있는 것 같았다.
남성 경찰들에 의해 포위된 상황에서
농성자들은 머리끄댕이를 잡으면서 자기들끼리 싸우기도 하고
회의와 논쟁보다는 행동이 먼저 앞서기고 하고
트랜스젠더의 존재에 대해 분란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경찰과 맞서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응원하며 힘을 합쳐나간다.
준비 없는 투쟁이라 갈망질팡했지만 울면서 약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 없이 당당하기만 했다.
노출이 심한 짧은 옷을 입고 있던 술집 종업원이 가장 적극적으로 싸움에 앞장섰는데
싸우면서 노출이 되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는 것은 물론이고
옥상 아래 있는 경찰들을 향해 치마를 들어 올려 엉덩이를 보이며 거침없는 조롱을 날리기도 했다.
가부장적인 남성 사회를 향한 거침없는 어퍼컷을 날리는 정말로 속 시원한 전개였다.
80년대 건국대 농성투쟁이나 90년대 한총련 연세대 농성투쟁 등을 연상하게 하는 장면들이었지만
아프트 옥상에서 벌어진 그들의 투쟁은 비장하기보다는 발랄해서 더 힘이 느껴졌다.
막바지에 대규모 진압을 앞두고 수많은 사람들이 아파트 주변으로 모여들어 연대집회를 하는 장면에서는 가슴이 뭉클해질 정도로 그들의 투쟁과 함께하고 있음을 느끼게 됐다.
대대적인 진압에 몰린 농성자들은 결국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리게 되는데
‘델마와 루이스’를 연상시키는 그 장면에서도
비장함보다는 유쾌함이 더 강해서
속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 영화가 개봉했을 때도 봤었는데
그때는 심각한 사회문제를 코미디로 우회해버리는 것 같아서 그다지 좋게 느껴지지 않았었다.
그런데 20여 년이 지나서 다시 봤더니
이 유쾌한 코미디영화는 민중의 자발성과 활력을 제대로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이런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던 그 시대의 활력이 새삼 부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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