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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조그만 우편 취급소에서 일하는 여자 정혜의 평범한 일상을 보여준다.
아파트 화단에서 어린 고양이를 데려와서 기르고, 홈쇼핑으로 물건을 사고, 직장 동료들과 밥과 술을 먹는 등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모습들이 약간 흔들리는 카메라 속에 담담하게 담겨있다. 그렇게 무탈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다가 우체국에 가끔 와서 등기우편을 붙이는 남자를 알게 되고, 그 남자에게 살며시 다가서려다가 사소한 문제들로 주춤거리게 된다.
영화의 줄거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이게 전부다. 밋밋하게 정혜의 일상을 보여주고 작은 파도가 일렁이는 모습만을 보여줄 뿐이다. 텃밭에서 뽑아온 채소들로 적당히 쓱싹거리며 간단한 된장국을 끓이는 모습을 보여주는 1시간 40분짜리 브이로그 같은 영화인데 지루하거나 심심하지가 않았다.
평범한 일상 속의 나른함, 무력함, 다정함, 차가움 같은 온갖 감정들이 정혜의 표정과 손짓, 짧은 대화와 상황들 속에 배어있었기 때문이다. 맹물에 된장 풀어 넣고 채소만 넣은 것 같지만 알게 모르게 정성스러운 천연조미료들이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평범한 일상 속에 등장한 남자와의 접촉과 말미에 등장하는 또 한 남자와의 접촉이 그나마 드라마로서의 역할을 하지만 그 마저도 아주 절제되어 보여 진다. 된장국만 있으면 허전할 것 같아서 마트에서 사온 반찬을 몇 개 올려놓기는 했지만, 주 메뉴는 된장국임을 강조하고 있었다.
평범한 일상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중간 중간 스냅사진처럼 정혜의 과거와 상처들(아픈 엄마, 정신과 치료, 어릴 적 기억 등)이 스치듯 보여 진다. 정갈한 된장국으로 편안한 아침을 먹는 가 했는데 뭔가 자그만 이물질이 혀끝에 걸리고 있었다. “이게 뭐지?”하며 신경이 쓰이기는 했지만 워낙 작은 것이기도 하고 된장국 맛도 좋아서 그냥 삼켜버리고 있었다.
우연한 자리에서 만난 남자가 심하게 힘들어하자 그를 따뜻하게 안아준 후 정혜는 자신에게 끔찍한 상처를 줬던 이를 찾아간다. 그에게 복수를 하려고 했지만 끝내 그러지 못한 정혜는 화장실에 가서 참아왔던 눈물을 흘리고 만다. 맛있게 먹고 난 된장국 바닥에 약간 신경이 쓰였던 이물질이 있어서 확인해봤더니 그것은 아주 작고 날카로운 유리조각이었던 것이다.
일상 속의 정혜는 조용하고 무던했다.
살짝 불편한 상황에서는 움츠러들기도 하고, 어떤 때는 옆으로 살며시 돌아가 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무작정 수그리고 있거나 도망가지도 않았다.
용기 내서 불쾌함을 얘기하기도 하고, 밀려오는 파도를 말없이 마주하기도 했다.
그래봐야 본인만 휘청거릴 뿐 주변에는 큰 반향을 만들어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정혜는 조용하고 무던하게 삶의 파도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맞서고 있었다.
그런 정혜가 마지막에 참아왔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목 놓아 통곡하는 것도 아니고
속으로 삼키며 억누르는 것도 아닌
더 이상 담아둘 수 없는 욕조의 물이 밖으로 흘러넘치는 그런 울음이었다.
그 울음을 보면서
누군가는 같이 울었을 테지만
나는 서늘한 고통이 느껴졌다.
우는 정혜의 모습에서 내가 상처를 줬던 이들이 떠올라
가슴에 박힌 유리조각들이 나를 날카롭게 찔러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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