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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121회 – 불가능한 꿈을 가진 리얼리스트

 

 

 

1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꾸자.

 

 

어떤 분의 책을 읽다가 나온 이 문구가 저를 잡아끌었습니다.

워낙 유명해서 예전부터 곱씹곤 했던 문장인데

잊고 지내다가 오래간만에 접하니

반가우면서도 왠지 모를 거리감이 느껴지더군요.

 

20대 초반, 혁명의 꿈을 가슴 속에 품기 시작했을 때

사회주의권의 붕괴를 이유로 혁명을 내팽개치고 현실에 투항하는 이들을 경멸하며

‘리얼리스트’가 되기보다는 ‘불가능한 꿈’을 키우려고 노력을 했었습니다.

 

이후 본격적인 노동운동을 하게 되면서

“현장과 지역 속에 뿌리 내려야 한다”는 각오로

‘불가능한 꿈’을 보듬으며 ‘리얼리스트’가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크고 작은 투쟁 속에 10년의 세월을 보냈더니

어느 순간 투쟁의 중심에 서게 됐고

‘불가능한 꿈을 가진 리얼리스트’로서 작지만 소중한 꽃을 피우게 됐습니다.

 

어느덧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었을 때

주위에 쌓인 자원에 안주할 것인지, 젊었을 때의 열정으로 돌아갈 것인지를 고민하다가

과감하게 ‘불가능한 꿈’을 다시 쫒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상상 이상으로 냉혹했고

저는 뿌리 채 뽑혀 내팽개쳐진 채

‘불가능한 꿈’도, 뿌리내릴 ‘리얼리스트의 터전’도 사라져버렸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고향에 내려와 농사를 짓다보니

새로운 터전에 뿌리를 내리며 소박한 삶을 살아가게 됐습니다.

그러던 중 문득 찾아온 이 문장이 제게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너는 지금 어디에 서 있고, 무슨 꿈을 꾸고 있냐?”

 

그 질문을 받고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지금 세상에서 한 발 떨어져 식물과 개와 소통하며 살아가고 있어.

내 삶의 경험이 세상을 냉철하게 바라보도록 철두철미한 리얼리스트로 만들어줬지.

더 이상 불가능한 꿈을 꾸지는 않지만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자’는 작은 꿈은 간직하고 있어.”

 

그런 제 대답에 아무런 반응이 없어서 괜히 머쓱해진 저는

제 자신에게 변명처럼 질문을 던져봤습니다.

“냉철한 리얼리스트야, 이제 불가능한 꿈은 완전히 버린 거니?”

 

 

2

 

읽는 라디오를 진행하면서 ‘삶의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거렸을 때’라든가 ‘진보를 얘기하는 이들에 의해 내팽겨졌을 때’라는 말을 종종 합니다.

이제 시간이 꽤 흘러서 10년도 넘는 옛일인데 아직도 이 상처를 부여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제게 상처를 줬던 사람들에 대해 기억들이나

제가 상처를 줬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 흘러가버려서 더 이상 저를 괴롭히지 않는데

제가 상처를 받았었다는 자국만이 남아서 자꾸 그 사실을 환기시킵니다.

‘힘들었던 그때의 생생한 기억들’이 아니라 ‘힘들었던 시절을 건너왔다는 사실’이 말을 걸어오는 겁니다.

결국 “나 이렇게 힘들게 살아왔어”라고 말하고 싶은 자기연민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었던 겁니다.

 

그런 제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자꾸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자기연민은

삶을 살아가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사실 과거의 인연들은 이미 다 끊겼고

과거의 영광과 상처들도 희미해져서 지금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남은 것은 조그만 미련인데

“그 마저도 놓아버리자”고

제 마음에게 조심스럽게 얘기를 해봅니다.

 

 

3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침에 하우스 안에서 일을 하고나서

팽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

조만간 심어야 하는 쪽파와 마늘을 다듬습니다.

아직 햇살은 뜨거워도 바람은 훨씬 선선해져서

사랑이도 한결 편안하게 자리를 잡아 쉬고

저도 여유롭게 가을준비를 합니다.

 

뜨겁고 길었던 여름도 이제 끝이 보이면서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는 요즘입니다.

이 흐름에 몸과 마음을 맡긴 채

지난 여름의 찌꺼기들을 흘려보내고

새로운 기운으로 다시 채워 넣고 싶어지네요.

그러다보면 마음 속 미련도 살며시 사라질지도 모르지만

‘불가능한 꿈’도 사라져버리지 않을까 살짝 걱정이 됩니다.

 

 

 

(김호철, 김한, 황현의 ‘나의 꿈이 네게 닿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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