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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127회 – 이 축복된 삶이 고스란히 전해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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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하우스에서 할 일이 별로 없습니다.

혹시나 뒤늦게 병충해가 생기지 않는지 살피는 것이 전부입니다.

나뭇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감귤들이 다 자란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올 한해 고생한 보람이 느껴져서 기분이 좋습니다.

 

올해는 감귤재배에 대해 고민이 참 많았습니다.

그동안 쌓여왔던 경험이 근본에서부터 흔들리며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배운다는 생각으로 공부도 하고 조언도 들으면서 관점을 세우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디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할지 알 수가 없는데다가 이미 성년이 된 나무에 함부로 손을 대는 것이 무섭기도 했습니다.

조심스럽게 새로운 시도도 해보고 앞으로의 계획도 세워보면서 나무와의 소통에 좀 더 집중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6개월 넘게 고생했더니 나무의 상태가 좋아지고 열매도 풍성하게 달려 있어서 조금 뿌듯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해결해야 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지금 나무에 열매들이 너무 많이 달려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렇게 과하면 내년 수확 후에 꽃이 덜 피게 돼서 해거리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열매의 크기도 조금 큰 것 같아보여서 그것도 걱정입니다.

열매가 너무 크게 되면 수확시기에 껍질이 부풀어 올라 비상품이 될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올해 제가 고민했던 것들이 풀리게 되는데

앞으로 2~3년은 더 고민하고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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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감귤나무를 살펴보고 나서

의자에 앉아 쉬고 있으면

사랑이가 제 곁으로 살며시 다가와 머리를 들이밉니다.

사랑이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으면서

라디오를 틀었는데 한 노래가 제 마음으로 다가오더군요.

삶의 힘겨움을 노래하고 있었는데

“난 아무것도 모르겠어, 다 처음이라 어려워서, 아이처럼 떼를 쓸 수도 없는, 아직 무엇도 아닌 나”라는 가사가 제 마음에 접속을 했습니다.

저 역시 잘 모르겠고, 처음이라 어렵고, 아이처럼 떼를 쓸 수도 없고, 아직 무엇도 아니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노래를 살며시 껴안아 줬습니다.

 

 

(강아솔의 ‘다정하게 아름답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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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에서 시간을 보내고 나서 사랑이와 같이 산책을 나갔습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화창한 가을 날씨가 가벼움을 안겨주고

지난 달에 심은 월동채소들이 왕성하게 자라는 주변 풍경이 활력을 심어주고

땀과 고민 뒤에 맞이하는 뿌듯한 여유로움으로 인해 마음이 더 없이 풍성해지는 산책길입니다.

 

요즘에 산책을 자주 나와서 그런지 사랑이도 한결 여유로워졌습니다.

중간 중간 주변 냄새도 맡고 영역표시도 하며 편안하게 산책을 즐겼습니다.

산책길에서 가끔 마주치는 할머니를 발견하고는 사랑이가 살며시 다가가 인사를 합니다.

할머니가 반가워하며 사랑이를 쓰다듬으려 했더니 그 손길은 정중하게 거절하더군요.

잠시 후 사랑이를 끔찍이도 좋아하는 친구인 모카를 만났습니다.

서로 다정하게 인사를 나눈 후 사랑이가 다시 산책을 이어가려고 하니 모카가 가지 말라고 마구 짖어댑니다.

조금 더 같더니 근처에 사시는 분이 산책을 나오시고 있었습니다.

사랑이가 또 살며시 다가가 꼬리를 흔들며 인사를 하는데 그분이 환하게 웃으면서 “아줌마는 개를 싫어해”라고 하시며 뒤로 물러서시더군요.

산책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사랑이만 보면 으르렁거리는 천둥이를 만났습니다.

역시나 천둥이가 큰소리로 짖어댔지만 사랑이는 무심하게 주변 냄새를 맡으며 제 갈 길을 갈 뿐이었습니다.

 

화창한 가을날

여유로운 시골길에서

개와 사람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로의 마음을 나누다보니

이렇게 살 수 있음에 더없이 감사해졌습니다.

 

그 순간 떠오르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를 켜고 그 노래를 찾았습니다.

절망 속에서 발버둥 칠 때 참 많이도 들었던 노래인데

더없이 편안하고 행복한 날

그 가사를 음미하며 듣고 싶어졌습니다.

 

 

(Violeta Parra의 ‘Gracias a la vida’)

 

 

삶에 감사하네, 나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주었으니

두 개의 눈을 주어 내가 눈을 뜨면

검은색과 흰색을 완벽하게 구별하게 하고

높은 하늘의 별 박힌 배경과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내가 사랑하는 이를 보게 하네

 

삶에 감사하네, 나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주었으니

밤낮으로 온갖 소리를 담는 귀를 주었네

귀뚜라미와 카나리아 소리

망치 소리, 터빈 소리, 개 짖는 소리, 소나기 소리

그리고 내 사랑하는 이의 부드러운 목소리까지

 

삶에 감사하네, 나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주었으니

소리와 문자를 주었고 그것으로

내가 생각하고 선언하는 말을 주었네

어머니, 친구, 형제 그리고 빛을 밝히는

내가 사랑하는 이의 영혼의 길을

 

삶에 감사하네, 나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주었으니

지친 내 발로 걷는 것을 주었네

그 발로 도시와 웅덩이를 걸었고

해변과 사막, 산과 평원을 걸었네

그리고 너의 집, 너의 거리, 너의 마당까지

 

삶에 감사하네, 나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주었으니

인간의 지성의 열매를 볼 때

악에서 멀리 떨어진 선을 볼 때

너의 맑은 눈의 깊이를 볼 때

그 틀을 흔들리게 하는 심장을 주었네

 

삶에 감사하네, 나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주었으니

웃음과 눈물을 주었네

그래서 나는 기쁨과 슬픔을 구별할 수 있고

내 노래를 만드는 두 가지 재료

그리고 여러분의 노래도 같은 노래이니

모든 이의 노래가 바로 나의 노래이니

삶에 감사하네, 삶에 감사하네.

삶에 감사하네, 삶에 감사하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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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점심 저녁으로 산책도 자주 하고

하우스에서 화사한 가을 햇볕을 충분히 즐겨서 그런지

사랑이가 초저녁부터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나지막이 들리는 사랑이의 코 고는 소리가 얼마나 정겨운지...

 

세상에서 버림받고

지금도 수시로 무시당하며 살아가는 삶이지만

식물과 교감하며 고민할 수 있는 일거리가 있고

제 곁을 지키며 마음을 나누는 사랑이가 있고

편안한 기운을 가볍게 주고받는 이웃들이 있어서

이 삶이 너무도 행복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버림받아 발버둥치는 이들과

수시로 무시당하면서 여기저기 치이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제 삶의 축복이 고스란히 전해지길 간절히 빌어봅니다.

 

 

 

(범능스님의 ‘회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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