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허접한 삶 18회 – 울고 싶은데 눈물이 나질 않으면

 

 

 

1

 

며칠째 마음이 뒤숭숭 한 채 어지러운 상념들만 시끄럽게 떠다녔습니다.

마음이 하는 얘기를 가만히 들으면서 그 마음이 진정되길 기다리는데

좀처럼 마음이 가라앉질 않더군요.

누군가랑 술 한 잔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라도 나누면 좋으려면

그럴 사람이 없으니 제 안에 있는 녀석을 불러냈습니다.

 

 

내 안의 성민이 : 야, 니가 나를 먼저 찾을 때도 있네?

 

성민이 : 그냥... 누군가랑 얘기나 좀 하고 싶어서...

 

내 안의 성민이 : 아이, 자식. 왜?

 

성민이 : 너니까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할게.

 

내 안의 성민이 : 응, 그래.

 

성민이 : 예전에 읽었던 책에 이런 내용이 있었어. 가난한 시골에서 서울로 가서 취직한 여자가 있었어. 명절이 돼서 오래간만에 고향에 내려가서 친척들도 만나고 친구들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 고향 사람들과 친구들은 세련된 모습을 하고 선물을 잔득 사들고 온 그를 보면서 모두들 부러워했거든. 그러면서 서울생활에 대한 동경을 갖게 됐지.

그런데 그 여자가 서울에서는 하는 일은 술집 종업원이었던 거야. 그 여자는 서울에서는 손님들 앞에서 웃음을 잃지 않았고, 고향에 내려가서 친구들 앞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지. 다만 가슴속에는 말 못할 응어리가 들어차있었고...

 

내 안의 성민이 : 음, 그래서?

 

성민이 : 이 얘기 꺼내는 내가 좀 유치하기는 한데...

 

내 안의 성민이 : 야, 서설 깔지 말고 그냥 말해.

 

성민이 : 예전에 아는 분이 이곳에 여행을 오셔서 만났던 적이 있어. 그때는 내가 삶의 구렁텅이에 굴러 떨어져서 정신없이 발버둥치고 있을 때였거든. 그래도 손님이 왔다고 웃으면서 대접을 했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그분과 같이 오신 분이 “이런데 사셔서 좋으시겠어요”라고 하는 거야. 그 말을 듣고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지만 속에서는 천불이 났어. “몇 년 째 벗어날 수 없는 진창에서 발버둥치고 있는 제 모습이 그렇게 부러우세요?”라고 쏘아붙이고 싶더라고.

 

내 안의 성민이 : 음, 그래서?

 

성민이 : 얼마 전에 반가운 이를 오래간만에 만났었잖아. 맛있는 곳에 가서 술도 먹으면서 극진하게 손님대접을 했지. 그리고 다음날 하우스에 와서 감귤나무들도 구경시켜주고 그랬거든. 그때 반응이 어땠냐면, “우와! 농장이 이렇게 크다고? 부자네.” “이런대서 감귤농사 지으면 좋겠네” 하는 식이야.

나는 농장주가 아니라 임차농이고, 감귤농사 700평이면 소농이고, 그렇게 해봐야 1년 수익이 2000만원이 될까 말까 하는 수준이고, 그마저도 각종 시행착오 때문에 고전하고 있다는 얘기를 전날 술 먹으면서 했는데도, 그들의 눈에는 이런 곳에서 감귤농사 짓고 사는 내 삶이 부러웠던 거지.

 

내 안의 성민이 : 음, 그래서?

 

성민이 : 그날도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지만 속에서 또 천불이 나더라고. “10년 동안 도와달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발버둥 칠 때, 저한테 한 번이라도 눈길을 돌리셨어요? 과거의 내 고통이 어땠는지, 지금 이곳에서의 삶이 어떤 지에 대해서도 관심 없잖아요. 그냥 도시와는 다른 이곳의 낭만적 이미지만 보이는 거잖아요”라고 쏘아붙이고 싶더라고.

 

내 안의 성민이 : 야, 보름이 지났는데 아직도 그걸 가슴에 품고 있는 거야?

 

성민이 : 그치? 미련하게...

 

 

그때 녀석이 살며시 다가오더니 저를 안아주더군요.

 

 

내 안의 성민이 : 니가 어떻게 버텨왔는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세상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잘 알고 있잖아. 니가 어떤 상황에 있든 나는 항상 너와 함께 있는 거야, 알지?

 

성민이 : (울컥해져서) 왜 그러냐, 너답지 않게.

 

내 안의 성민이 : (제 등을 토닥이며) 자식아,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

 

성민이 : 아... 울고 싶은데 눈물이 나지 않네.

 

 

2

 

‘노인들이 모여 사는 황혼의 집, 노인요양원 72시간 (kbs 다큐멘터리 3일)’이라는 영상을 봤습니다.

나이가 들어 기력이 약해져서 몸을 제대로 가누기 힘들거나, 치매가 있어서 정상적인 대화가 힘든 노인들이 생의 마지막을 보내는 곳의 일상을 보여줬습니다.

 

카메라를 든 젊은이를 손짓으로 부르고는 알아듣기 어려운 얘기를 하시는 분

휴지를 혼자만의 소중한 장소에 차곡하게 모아놓으시는 분

돈이 없어졌다면서 직원에게 하소연하시는 분

방금 밥을 먹었는데도 배고프다고 투정을 부리시는 분

너무 쇠약해서 침대에 누워 지내지만 미소가 아름다우신 분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 헛소리를 하시는 분

새벽에 깨어서 몇 시간을 가만히 누워 있다가 아침이 되자 일어나서 세수하러 가시는 분

이런저런 얘기를 조잘조잘 늘어놓으시는 분

 

한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아직 움직이는 것은 문제가 없는데 약한 치매기가 있었습니다.

밝은 모습으로 얘기를 하시다가 노래를 부르시는데 그 솜씨가 대단했습니다.

PD가 “젊었을 때 노래하셨어요?”라고 물어도 할머니는 짧게 “응”이라고만 대답할 뿐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으십니다.

그 할머니의 모습을 보여주며 내레이션이 나옵니다.

 

“할머니는 젊은 시절에 대해 말이 없고, 할머니의 청춘에 대해 아는 사람은 이곳에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죠. 흐르는 세월 속에 육신과 기억은 시들지언정 가슴 속 깊은 곳에 지녔던 열정은 빛이 바래지 않는다는 겁니다.”

 

 

머지않은 미래에 저도 그런 곳에서 지내게 될 수도 있을 텐데

그때 저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요?

괜히 자존심 세우면서 이것저것 요구를 하거나

도움이 필요한데도 혼자 할 수 있다며 실수를 연발하거나

무기력한 자신에 대한 자괴감 때문에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거나 한다면

저도 힘들고 요양보호사분들도 힘들겠죠.

 

음...

요양원에서 가장 편하게 지내는 방법은

그곳에서 주는 것을 맛있게 받아먹고

시키는 일은 군소리 없이 잘 따르고

괜한 고집 부리지 않고 착하게 지내는 겁니다.

그래야 도와주시는 분도 도움을 받는 저도 서로 힘들지 않을 테니까요.

어차피 제가 젊었을 때 무슨 일을 해왔는지 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테니

제 알량한 자존심은 버리고 그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 텐데...

편안한 말년을 보내기 위해

지금부터 자존심을 버리는 연습을 조금씩 해나가야겠네요.

 

 

3

 

책상에 앉아 있으면 사랑이가 슬며시 다가와 머리를 들이밉니다.

쓰다듬어달라는 거죠.

그러면 하던 일을 멈추고 사랑이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줍니다.

사랑이는 제 손의 온기를 느끼고, 저는 사랑이의 보드라운 털을 느끼면서 서로 하나가 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편안하게 침대에 누워 영상을 보고 있을 때도 사랑이가 슬며시 침대로 다가와 머리를 들이밉니다.

그러면 저는 발을 뻗어 사랑이 머리 위에 살며시 올려놓습니다.

손으로 쓰다듬을 때보다는 못하지만 그 순간에도 우리는 서로의 체온을 느끼면서 하나가 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 순간 떠오르는 노래가 하나가 있었습니다.

유튜브로 그 노래를 틀어놓고

사랑이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고 있는데

메말랐던 제 마음이 뭉클해지더니

눈물이 살짝 흘러내리더군요.

 

 

 

(이적의 ‘다행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