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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접한 삶 20회 – 아름답고 활기차고 풍요롭고 여유로운 한때

 

 

 

1

 

가을이 되면서 날이 밝는 시간이 늦어졌습니다.

새벽에 일어나면 밖은 깜깜합니다.

그 깜깜한 하늘을 쳐다봤더니 별들이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더군요.

여름 밤하늘에는 잘 보이지 않던 별들이 가을이 되니 선명하게 보입니다.

화려하지 않게 빛나는 그 모습에 마음이 경건해져서

사진에 담아봤더니 시커먼 하늘만 보이네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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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귤들은 제법 모양을 갖춰갑니다.

이제 조금만 더 크고 나면 다음 달부터 익어가기 시작하겠죠.

열매가 조그만 할 때는 많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데

제법 자라서 주렁주렁 달린 모습을 보니 비교적 풍성합니다.

아직도 깍지벌레는 완전히 방제하지 못했고

이래저래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꽤 자란 감귤의 모습은 가을의 풍요로움을 느끼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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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작물을 정리하고 겨울작물을 심은 지 한 달이 됐습니다.

씨를 뿌린 것은 이제 싹이 올라오고 있고

모종으로 심은 것들은 뿌리를 내려서 왕성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다음 달은 돼야 이런저런 채소들을 먹을 수 있기에

요즘에는 채소들이 조금 귀합니다.

그나마 성장이 빠른 청경채와 상추류가 제법 자라서 먹을만 해졌더군요.

귀한 채소들 덕분에 몸과 마음이 즐거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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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도 좋고 할 일도 많지 않아서 사랑이와의 산책도 여유로워졌습니다.

여름에는 이른 아침과 저녁에 두 번 산책을 했지만

요즘에는 아침 점심 저녁으로 세 번 산책을 합니다.

산책을 하면서 이웃 주민들과 만나 인사를 나누는 일도 잦아졌고

산책 나온 다른 개들과 서로 냄새를 주고받는 일도 많아졌습니다.

냄새 맡는 것에 누구보다도 진심인 사랑이는 냄새를 오래 맡는 편인데

그때마다 저랑 실랑이를 벌이곤 하지만

요즘에는 사랑이가 실컷 냄새 맡게 기다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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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는 활기가 넘칩니다.

지난 달에 심어놓은 각종 모종들이 왕성하게 자라면서 강한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고

더없이 맑고 활기찬 하늘과 바다와 땅이 어우러진 모습은 멋있는 풍경화가 됩니다.

1년 중 가장 아름답고 활기차고 풍요롭고 여유로운 한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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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덥지도 춥지도 않은 화창한 가을날이었습니다.

하우스에 바쁜 일도 다 끝나서 소일거리 하듯이 가볍게 일을 했습니다.

중간에 의자에 앉아 쉬며 책을 읽고 있는데 옆 마을에 사시는 친척 할머니 생각이 나더군요.

늙은 호박 한 덩어리를 들고 사랑이와 함께 할머니 댁으로 마실을 나섰습니다.

 

모처럼의 긴 산책에 한껏 신난 사랑이를 달래면서 할머니 댁에 갔습니다.

혼자서 적적하게 시간을 보내시던 할머니는 저의 방문을 반겨주셨습니다.

커피를 마시지 않지만 할머니가 내주시는 커피를 받아 마시면서 가벼운 대화를 나눴습니다.

대화의 내용은 별거 없습니다.

안부를 불어보고 건강은 괜찮은지 확인하는 것이 전부죠.

 

아흔이 넘은 할머니는

만성 두통에 시달리고 계시고

눈이 침침해서 멀리 있는 것은 잘 보이지도 않고

귀도 어두워서 심한 이명에 시달리고 있고

기력도 많이 약해서 집밖으로 잘 나가지도 못하고

치매는 없지만 깜박깜박하는 일이 잦다고 합니다.

이곳이 나고 자란 고향이지만 아는 사람은 대부분 이 세상을 떠나서 만날 사람도 없고

tv를 틀어도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낮에도 그저 집안에서 멍하니 보내고 있답니다.

“빨리 갔으면 좋겠다”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그 심정이 이해가 되더군요.

 

10여 분 정도 할머니와 나눈 얘기는 답답한 현실에 대한 토로였지만

서로 위로해주고 걱정해주다보니 그 시간은 즐거웠습니다.

짧은 대화를 나누고 할머니는 잠시 바람을 쐬겠다고 밖으로 나섰고

저와 사랑이는 할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제가 어린 아이였을 때부터 한결같이 아껴주셨던 할머니여서 지금도 만나면 포근합니다.

그런 할머니가 나이 들어 힘들어하시는 모습이 안타깝지만 이렇게 가끔 만나 얘기할 수 있어서 너무 좋습니다.

외롭고 아프고 힘든 이들과 마음을 나누는 시간이 제일 행복하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끼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사랑이의 발걸음은 출발할 때보다 한결 차분해졌고

이런저런 상념들로 어지러웠던 제 마음도 그지없이 편안해졌습니다.

 

 

3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에어컨을 틀어야 했습니다.

보름 전까지만 해도 선풍기를 돌렸습니다.

1주일 전까지만 해도 일하다가 그늘에서 쉬었습니다.

이제 에어컨과 선풍기는 다 정리했고

일하다 쉴 때면 햇볕을 찾아갑니다.

계절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실감하는 요즘입니다.

 

감귤나무에 해야 될 일들이 이제는 많지 않습니다.

주변 텃밭 정비도 거의 끝나서 잘 자라는지만 살펴보면 됩니다.

남는 시간이 많아 따뜻한 햇살을 즐기며 책을 읽습니다.

사랑이가 다가오면 한 손에는 책을 들고 나머지 한 손으로 살며시 쓰다듬어줍니다.

책을 읽다 무료해지만 자리에서 일어나 감귤나무를 둘러봅니다.

바쁘게 변하고 있는 세상이지만 여유롭게 지내려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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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섬의 ‘무해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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