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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부인과 승무원, 권력관계가 역전됐을 때 나타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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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부자들이 호화로운 요트를 타고 지중해의 아름다운 바다 위에서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사회당원인 남편과 공화당원인 아내는 일광욕과 포커를 하는 와중에도 시종일관 정치적인 논쟁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 와중에 선원들은 부자들의 까탈스러운 요구와 비인간적 대우를 참아가며 그들의 시중을 들고 있다.

 

다른 이들이 보트를 타고 관광을 나가자 뒤늦게 귀부인은 선원에게 보트를 내리게 하고 그 뒤를 쫓아간다.

선원은 이미 늦은 시간이라 위험할 수 있다고 경고했지만 안하무인인 부인은 빨리 가라고 다그치기만 한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던 중 갑자기 보트가 고장이 났다. 둘은 망망대해 한가운데서 조난을 당하게 됐고, 한참을 표류하다 무인도에 내리게 된다.

그 상황에서도 부인은 시종일관 고압적인 태도로 선원에게 지시만을 내렸고, 선원은 어떻게든 상황을 극복해보려고 갖은 노력을 하면서 부인의 태도를 묵묵히 참아냈다.

 

시간이 점점 흐르고 구조될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둘의 권력관계는 급속히 변하기 시작했다.

선원은 이것저것 다양한 것들을 스스로 해내면서 생존을 위한 기반을 만들어갔지만, 입만 살아있는 부인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점점 선원에게 의존하게 된다.

선원은 뒤바뀐 권력관계에서 그동안 쌓였던 감정들을 폭력적으로 쏟아냈고, 부인은 마지막 남은 자존심으로 버티면서 선원의 비위를 맞춰야 했다.

하지만 그에 만족하지 못한 선원은 물리적 폭력과 성폭력까지 서슴없이 자행하면서 부인을 자신의 노예로 만들고자 했고, 부인은 격렬히 저항하다가 결국 무너져 내리고 만다.

무너져 내린 부인은 선원에게 철저히 복종했고, 그 복종은 내면의 복종으로 이어져 사랑의 감정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렇게 완전히 뒤바뀐 권력관계에서 살아가던 중 배가 근처에 나타나자 둘은 다시 이전 삶으로 돌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고민한다.

여자는 돌아가지 않으려 했지만 남자는 자신의 권력에 확신을 얻기 위해 돌아가기로 한다.

극적인 구조를 통해 생환한 둘을 부인의 부자 남편과 선원의 다혈질 아내가 격하게 환영하며 맞이했다.

그 상황에서 선원은 자신의 권력과 사랑을 믿으며 부인이 돌아오기를 기대했지만, 부인은 선원과의 관계를 뒤로하고 자신의 안락한 삶으로 돌아간다.

 

몇 년 전에 봤던 ‘슬픔의 삼각형’과 너무도 비슷한 영화였다.

요트가 호화 유람선으로 바뀌고, 무인도에 정착한 인원이 좀 더 많았다는 점이 다를 뿐 이야기의 기본 구조는 똑같았다.

이걸 리메이크라고 해야 하는지, 표절이라고 해야 하는지, 오마주라고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두 영화가 너무 비슷해서 자연스럽게 비교하게 됐다.

‘슬픔의 삼각형’에서는 부르조아의 위선을 한껏 조롱한 후에 무인도에서 뒤바뀐 권력관계에서는 비판의 긴장감이 떨어져 버렸다. 뒤바뀐 권력의 중심에 여성 청소부가 위치하면서 계급적 대립뿐만 아니라 가부장적 대립도 역전해버렸는데, 그 역전된 관계가 현실감이 좀 없어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귀부인과 승무원’에서는 무인도에서 뒤바뀐 권력관계에서 더 생생한 긴장감이 살아났다. 부르조아와 노동자간의 대립은 야생의 날선 모습 그대로였고, 남성과 여성간의 대립은 폭력적인 상황을 만들어내며 살벌하게 이어졌다. 계급투쟁과 젠더투쟁이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역겨운 부르조아적 지배관계가 역전됐더니 폭력적인 가부장적 지배관계가 만들어졌다는 역설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부르조아적 위선을 조롱하는데 치중했던 ‘슬픔의 삼각형’보다 권력관계가 변하는 모습에 집중했던 ‘귀부인과 승무원’이 더 생생했고 깊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현실이 그랬기 때문이다. 혁명이 성공한 이후 타락하는 상황을 정면으로 들여다봤던 감독은 그것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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