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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5·18엔 광주에 가지 않으리

올해 5·18엔 광주에 가지 않으리

송경동


목졸린 시인, 가수, 화가
  
  두 번째 부상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3월 15일 2차 강제집행이 있던 날이었습니다. 마을 주민들이 맨몸으로 포클레인 바퀴 밑에 들어가 울며불며 자신의 농토에 차디찬 포클레인 삽날을 대지 말 것을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농민들의 가슴을 후벼 파는 짓들이었습니다. 가수 정태춘 선배와 화가 이윤엽과 함께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우리의 가슴도 찢어지고 있었습니다. 우리 문화예술인들이 항의 표시라도 함께 해야 하지 않는가 싶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고 적었던 펼침막을 들고 파헤쳐진 흙구덩이로 셋이서 뛰어 들었습니다.
  경찰이 정상적이라면 시민들이, 그것도 문화예술인들이 왜 그러는지 까닭을 묻고, 자신들의 공무를 설명하고 이에 협조해 줄 것을 부탁하는 게 순서였을 것입니다. 그때도 우린 공무를 막을 수 있는 어떤 물리력도 없었습니다. 맨몸뿐인 주민과 시민들 50여 명이 중무장한 전투경찰 600여 명과 용역깡패들 100여 명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경찰 지휘관은 앞뒤 사정 파악도 없이 무조건 "저 새끼들 연행해!"라고 소리쳤습니다. 미란다 원칙 고지 같은 기본적인 규칙도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펼침막이 목에 감겨 있는데 양 옆에서 그 펼침막을 잡아 당겼습니다. 주위에서 사람들이 "야 자식들아 목 졸려 죽잖아." 다급하게 외쳐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까무룩 하게 의식이 흐려지고,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끼는 순간 다행히 목에 있던 펼침막이 풀려 나갔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연행만이 목적이었습니다. 연행해 가던 전경들도 걱정이 되었는지 저희 지휘관을 향해, "이 새끼 목 아프다는데요…"라고 해봤지만 답은 역시나, "연행해!" 한 마디뿐이었습니다. 주변의 주민들과 기자들이 강하게 항의를 하고서야 그들은 내 몸을 논바닥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러고도 구급차가 오는 데는 30분이 넘게 걸렸습니다. 죽으라는 소리였습니다. 저물어가는 휑한 황새울 하늘을 보며 마냥 서글펐습니다. 한국사회의 민주주의를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낮게, 가난하게 살고자 했던 20여 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흘러갔습니다. 빈 하늘에 김남주 시인의 선한 얼굴이 떠오르고, 1980년대 어느 날 연세대에서 민족민주민중열사들의 이름을 부르던 문익환 목사의 간절한 외침이 아련히 들려 왔습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불의와 폭력이 없는 그런 삶과 사회를 바랐던 내 어릴 적 꿈은 단지 꿈이었을까. 슬펐습니다.
  그 일로 가수 정태춘 선배와 이윤엽 화가는 48시간 억류에 각각 벌금 300만원과 100만원 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단지 공사하는 것에 항의를 해 흙구덩이에 한번 들어갔다는 죄였습니다. 이제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어떤 관급공사든 민간인들이 조금이라도 항의했다간 전부가 다 현행범으로 체포될 판입니다.
  
박영진의 옥상, 그 자리에 서서
  
  사실 이번엔 좀 걱정이 됐습니다.
  20여 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서 한창 기운이 오른 스무 살 초반의 전투경찰이 직격으로 던진 벽돌에 맞아 머리가 깨지고 구토 증세까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날(3일)은 1985년 구로공단에 있었던 신흥정밀이라는 회사에서 노동자로 일하다 분신한 박영진 열사의 20주기 추도 증언대회가 있었습니다. 관련 사업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고 오래된 선배들도 챙겨야 해서 서울에 남아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대추리 상황이 긴박하다 해도 갈 만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내내 어떤 벗이 오전에 했던 말이 뇌리를 맴돌았습니다. 그 벗은 낮에 대추리로 들어간다 하면서 열사증언대회를 말하는 내게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열사 정신이 뭔데. 열사가 죽던 그 상황이 오늘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데, 지금 여기서 추모만 하고 있을 거야."
  맞는 말이었습니다.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불의와 폭력에 맞서지 않으면서 얘기하는 어떤 과거의 민주주의도 다 허상일 뿐입니다. 어떤 386도, 과거의 어떤 인권변호사도, 과거의 어떤 투사도 모두 다 자신의 잇속밖에 모르는 비겁한 사이비일 뿐입니다. 그래서 인간되기가 참 힘든 일인가 봅니다.
  하지만 나까지 자리를 뜰 수는 없어 차질 없이 증언 대회를 진행했습니다. 지역에 있는 민주단체 회원들, 민주노조 조합원들 중 상당수가 대추리로 가고 없어 썰렁한 자리였지만 까닭을 알기에 진행을 맡은 누구도 위축되거나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첫 순서였던 영상상영 시간에 그만 눈물을 떨구고 말았습니다. 자료 영상 화면이 1989년 구로공단의 (주)서광물산에서 노동자로 일하다 죽어갔던 김종수 열사 분신 당시를 비추고 있을 때 앞자리에 앉은 누군가가 복받치는 설움을 참지 못하고 헉헉거리며 울고 있었습니다. 김종수 열사와 한 공장에 다녔던 나의형 선배였습니다. 십 수 년이 지났는데도 열사의 죽음은 그의 가슴 속에 풀리지 않는 한의 응어리로 남아 있었습니다.
  나도 따라 괜시리 눈물이 났습니다. 아마도 그런 이들의 숭고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민중들은 가난하고 멸시받고 탄압 받아야 하는 2006년 오늘이 비통해서였을 것입니다. 앞자리에는 200여 일째 거리농성 중인 기륭전자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이 앉아 2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도대체 무엇이 좋아졌고,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우리에게 묻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밤 12시쯤 뒷풀이 자리까지 마감되어 지역후배와 함께 대추리로 출발했습니다. 원래는 밤 12시쯤 침탈한다는 소문이어서 마음이 무척 급했습니다. 먼저 들어가 있는 민족문학작가회의의 류외향 시인과 이재웅 소설가, 서수찬 시인에게 무척이나 미안했습니다.
  20년 전 박영진 열사는 민주노조를 만들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공장에 쳐들어온 경찰들에게 신흥정밀 2층 옥상까지 쫓겨 올라가 온몸에 석유난로의 기름을 붓고 분신하셨습니다. 그 열사가 민주화유공자가 된 2006년 5월 어느 날. 그 기념식을 준비하던 내가 다시 그 경찰들에게 무자비하게 쫓겨 대추초교 1층 옥상에서 머리가 깨질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새벽 4시의 사이렌소리
  
  도착하니 새벽 1시쯤. 대추초교 운동장 곳곳에 모닥불을 피워두고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노숙을 하고 있었습니다. 문화예술인들은 들사람들 집에 조촐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11시 너머까지 침탈에 대비해 대추초교에서 농성을 진행하다 잠깐 쉬러 들어온 길이었습니다. 사온 야식을 풀어 간단하게 한 잔씩 하고 예상되는 새벽 침탈에 대비했습니다. 그때서야 마음이 평온해져 옴을 느꼈습니다. 이곳저곳에 누워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있을 천여 명의 삶의 동지들이 대추리에 있다는 생각을 하니, 그리고 그 속에 나도 함께 누워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까무룩 하게 잠이 든 새벽 4시 경, 주민회관 사이렌이 조용히 울렸습니다. 아직 컴컴한 새벽,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시커먼 사람 그림자들이 여기저기에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근 1천여 명, 언론은 나중에 '일부 순진한 신부들과 과격한 한총련 학생들'이 대추리에 개입하면서 문제가 꼬이고 있다고 했지만 왜곡도 그런 왜곡이 없습니다. 학생들은 일부였고 대부분이 이 사회에서 누구보다도 건강하고 바르게 살아가고 있는 양심적 시민들이었습니다. 반가운 얼굴들도 많았습니다. 수는 적었지만 전국에서 올라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제가 만난 벗들만 해도, 울산, 김해, 순천, 광주, 부산, 일산 등등이었습니다. 농부로, 교사로, 노동자로 살아가야 하는 생업들이 있어 모두가 올라오지 못했지 만약 그런 생업의 문제들이 아니었다면 아마 대추리는 수십만, 수백만의 민주시민들로 황새울 벌이 꽉 찼을 것입니다.
  피곤할 법도 한데 모두가 눈이 또렷또렷 빛나고 가벼운 눈인사들도 평소와 다르게 무척이나 예의발랐습니다. 어떤 싸움이 될지 모두들 각오하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가끔 언론이나 삼류 영화 등에나 나오는 그런 과격하고 파괴적이고 무식한 사람들이 한국사회의 민주주의를 이끌어 온 게 아닙니다. 누구보다도 겸손하고, 진중한 사람들이 그들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비폭력과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들이었습니다.
  그게 불의이고, 부당함이고, 폭력이라 생각하면 날아오는 미사일조차도 겁내지 않을 사람들이지만, 진실과 평화 앞에서라면 늘 자신을 숙이고, 자신의 마음을 늘 거울 닦듯 닦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들이었습니다. 어떤 물리적인 힘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때에 따라서는 그 어떤 핵폭탄보다도 더 웅혼한 폭발력을 담지한 '양심'이라는 숨은 무기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들이었습니다.
  사실 자기밖에 모르는 위정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이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종종 수만 명의 군경을 동원해 보기도 하지만 단 한 번도 그들이 그 사람들의 '양심'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그 '양심'은 패배하면서 오히려 승리하는 묘한 힘도 가지고 있지요. 그 '양심'은 승리하면서도 그 무엇도 천대하거나 굴복시키지 않고 오히려 끌어안는 묘한 힘도 가지고 있지요. 그 '양심'은 늘 묻히면서도 오히려 더 거대한 생명의 물결로 살아나는 힘도 가지고 있지요.
  
  모두를 잃어도 꿈은 잃지 않으리
  
  대추초교에 모인 사람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하나씩 자기 몸을 지키고, 대추초교를 지킬 무기를 하나씩 집어 들었습니다. 1만 명이 넘는 전투경찰들이 군사작전 하듯 집결해 온다는 것을 다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도 새벽 침탈 계획이면 그간 민주주의 투쟁의 역사에서 보듯 무조건 연행과 폭력, 강제집행에 대한 의지를 분명히 밝히고 들어오는 셈이었습니다. 그래봤자 기껏 찾을 수 있는 게 황새울 벌에 평화의 깃발을 세울 때 썼던 대나무 가지들뿐이었습니다. 돌멩이라도 어디 있나 찾아보았지만 대추초교 운동장은 깨끗했습니다. 그 대나무도 한 1~2년씩은 삐쩍 말라 도무지 죽비로나 쓰지 무기로는 애당초 그른 것들뿐이었습니다.
  언론에서는 어린 학생들이 주민분들을 이용하고, 선동한다고 왜곡하는데 웃기는 소리였습니다. 오히려 주민분들이 우리에게 끝까지 대추초교를 지켜달라고, 그러나 제발 몸은 다치지 말라고 당부하고 다니셨습니다. 광주 5.18때나 먹었을 주먹밥과 멀건 계란 국물을 끓여 들고 다니시며 모두가 내 자식들인 것처럼 주민분들은 우리를 먹여 주셨습니다. 미군놈들에게 지지 말라고, 저 꼭두각시 정부와 무뇌아들뿐인 공권력들에게 지지 말라고 새벽부터 주먹밥 지어 주시던 그 따뜻함과 목메임이 우리를 그 자리에서 물러서지 않게 해주셨습니다. 1천여 양민을 향해 군사작전 전개하듯 새벽을 틈타 개미새끼 한 마리 나갈 수 없도록 우리를 포위해 오는 1만 5천여 전투경찰들을 보면서도 우리가 주눅 들지 않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아, 내가 여기에서 혹 예기치 못한 사고로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공포감 속에서도 고요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주민들과 우리들은 작은 지역을 떠나, 성씨를 떠나, 어떠한 경제적 이해관계도 없이 이 사회의 자주와 민주와 평화를 바라는 한마음으로 똘똘 뭉쳐진 동지들이었습니다.
  광주 5.18때도 광주 양민들은 폭도로 매도되었습니다. 일부 좌경세력에게 현혹된 불쌍한 민초들로 묘사되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그들을 민주화유공자로 만들었고, 광주를 세계적인 평화의 도시로 만들었습니다. 그 좌경세력들 중 일부는 그 민주주의 투쟁의 성과를 바탕으로 지금은 사회원로로 정치인으로 대접받고 있기도 합니다. 오히려 광주 양민들과 그들에 연대하는 민주세력들을 짓밟았던 당시 대통령과 그의 위정자들은 십 수 년이 지나 내란죄로 국가변란죄로 법정에 서야 했습니다.
  혹자는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변했다라고 아무런 역사적 개연성도 설명하지 못하는 세월의 흐름만을 근거로 들이대지만, 사실 광주 5.18을 가장 훌륭히 계승하고 있고, 아직도 5.18을 정신이 탈색된 역사의 박제로 만들지 않고, 개인 신분상승과 이권의 도구화시키지 않고, 현재화하고 있는 것은 2006년의 대추리이고, 양재동의 철탑에 올라간 하이스코 노동자들을 비롯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고, 한미FTA에 반대해 오늘도 거리에 서는 민주시민들입니다.
  어떤 괴변으로도, 주한미군이 이 땅에서 물러나기 전에, 평화로운 남북통일의 기틀이 세워지기 전에, 일부의 자본가들이 대다수 민중들이 창조적인 노동을 통해 생산한 사회적 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 초등학교 도덕교과서만도 못한 사회체제가 변화되기 전에, 5.18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6.10도 완성되지 않고, 4.19도 완성되지 않고, 8.15도 완성되지 않고, 갑오농민전쟁도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 과정일 뿐입니다. 그 과정의 어느 단계에 2006년 오늘 대표적으로 대추리가 서 있고, 하이스코가 서 있을 뿐입니다. 그 과정의 어느 한 단계에 우리 모두는 헌신적으로 참여해 연대하고 싸울 뿐입니다. 그래서 5.18은 숭고했는데 2006년 5월의 대추리는 한심한 보상금 문제일 뿐이라고 함부로 얘기하는 저 청와대의, 열린우리당의, 한나라당의 썩어빠진 정치인들은 사실 어떠한 역사적 인식도, 역사적 예의도, 역사적 철학도 가지지 못한 협잡꾼들일 뿐입니다. 사실은 이 시대에서 가장 비열하고 자신의 자리 욕심밖에 모르는 더러운 장사꾼들일 뿐입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밖에 모르지 사회역사적 상상력이라곤 아예 꿈꿀 줄을 모르는 불쌍하게도 꿈을 잃은 자들일 뿐입니다. 자기 나라 민중들에게 좀 더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꿈을, 좀 더 민주적일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을 모색하는 꿈을 제발 버리라고 선동하며, 한 사회를 꿈이 없는 무덤으로나 만드는 사실 가장 위험하고 악독한 반체제인사들일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소박하고 작고 조금은 배움이 적을지 모르지만, 상황의 논리가 아닌, 형편의 논리가 아닌 다른 민주적 사회에 대한 꿈을 꾸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짓밟혀서도, 머리가 깨져서도 그 꿈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그 꿈을 꾸다 지금의 저 위정자들처럼 자신의 정치적 경제적 야망만을 위해 변절해간 사람도 있고, 자신을 유폐시키며 좌절해간 사람도 있지만 작은 수의 그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그 꿈을 꾸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1만 5천의 검은 제복들
  
  대추초교엔 따로 지휘부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알아서들 초등학교 울타리 빈자리들을 찾아 섰습니다. 그곳에 우리 문화예술인들도 함께 섰습니다. 펜이 아닌, 붓이 아닌, 카메라가 아닌, 힘없는 대나무 막대기를 들고 이름 없이 섰습니다. 때론 몸으로 시를, 그림을 그려야 하는 때가 있는가 봅니다. 때론 나의 문학을 지키기 위해 평범한 이들과 함께 더 평범한 자세로 그들과 같은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서야 하는 때가 있는가 봅니다. 사실은 늘 그렇게 서 있어야 하는 것을. 이 시대의 농부들이 농기구를 놓고 서울 여의도 아스팔트에서 '아스팔트 농사'를 짓듯, 이 시대의 노동자들이 연장을 놓고 나와 거리 위에서 피로 '민주주의'라는 글씨를 새겨야 하듯, 우리도 때로는 내 몸에게 내 문학의, 미술의 의미를 물어야 하는 때가 있는가 봅니다.
  황새울 벌판의 철조망 설치를 막기 위해 한 떼의 사람들이 나가 보았지만 전혀 싸움이 가능치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우리는 금세 대추초교 안에 고립되었습니다. 마을 골목골목까지, 정말 쥐새끼 한 마리 빠져 나갈 틈 없이 1만 5천여 명의 전투경찰들과 체포조들이 한 발 한 발 우리를 조여 들어 왔습니다.
  새벽 여명을 뚫고 헬리콥터 수십 대가 철조망과 자재들을 싣고 황새울 벌에 내려앉고 있었습니다. 우린 "야, 멋지다. 멋져"하고 괜한 호기를 부려 보기도 했습니다. 저 전쟁기계들이 내 세금을 잡아먹고 있는 기계들이지. 저 전쟁기계들이 내 노동의 결실들을 빼앗아 먹고 사는 것들이지. 가슴 속에는 분노가 치받쳐오고 있었습니다.
  어둠 속 곳곳에서 산발적인 전투들이 오갔습니다. 초교 정문 앞 쪽에 가 있던 류외향 시인은 강제 연행이 되었다가 기지를 발휘해 잠깐 벌어진 틈을 통해 탈출해 나오기도 했습니다. 과정에 '씨팔년', 뭔 년, 온갖 욕을 다 들어야 했다고 분을 못 이겼습니다.
  날이 점점 더 밝아오며 우리를 둘러싼 전경들의 기세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참, 장관이더군요. 여성이 절반이고, 부당한 공권력에 맞선 싸움이라곤 요 십여 년 새 해본 적이 없는 오합지졸의 양민 천여 명에 무장한 공권력 1만 5천 명이 작전을 감행해 오는데 참 장관이더군요. 그 장관이 이 조그만 대추리 마을을 향해서가 아니라, 저 무도한 미군기지를 향해 갔더라면 얼마나 자랑스러웠을까, 쓴물이 넘어 왔습니다.
  저들을 막는다? 모두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경솔히 말하지 않고 뒤로 슬슬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피비린내
  
  아침 9시 6분. 그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싸움요? 극렬시위대요? 전경들이 다쳤다고요. 딱 10여 분 만에 우리는 일제히 운동장 안으로 몰리다 바로 초등학교 건물로 모두가 갇혀야 했습니다. 초등학교 건물로 피하지 못하고 뒤늦은 사람들의 비명소리로 작은 마을 대추리가 경악했습니다. 방패로 찍고, 곤봉으로 치고, 주먹으로 얻어터지고, 발길을 당하는 것은 예사였습니다. 지옥 풍경이 그러할까요. 부당한 외세에 맞서 가열차게 싸우는 제 나라 양민들을 무자비하게 도륙하는 그 공권력은 어느 나라 공권력일까요? 전쟁과 폭력에 반대하는 양민들의 입을 짓뭉개고, 머리를 깨는 공권력은 도대체 이 나라 양민들이 무엇을 원했으면 좋겠다는 걸까요.
  이라크에서 팔레스타인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인류의 치욕이 될 부당한 침략전쟁을 수행하는 나라의 군대, 그 군대에게 단 한 평의 땅도 주어서는 안 되다는 이 인류의 숭고한 목소리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이 나라 정부는 도대체 어떤 정부일까요? 그런 야만적인 인류의 공적에 맞서 평등 평화의 세계화를 이루는데 한국민들이 한마음으로 함께 하자고 선전선동하지 못하고, 그 인류의 공적들이 주는 떡고물이나 받아먹는 게 이 나라의 국익이라고 선전선동하는 이 사회 위정자들의 인식을 과연 뭐라 해야 할까요?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학교 교육을 뭐라 해야 할까요? 그러면서 세계시민들이 되라는 그들의 정신분열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 기상천외하고 복잡하고 오묘한 역사인식을 이 우매한 국민들이 어떻게 따라 잡아야 할까요?
  피투성이의 사람들, 절규들, 여기저기에서 터지는 욕설들, 아비규환. 1층에서 잠시 버티다 2층 창을 통해 마을도서관 옥상으로 올라갔습니다. 나는 사실 도망칠 곳이 있으면 초등학교 건물을 벗어나 연행과 폭력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그런 건가 봅니다. 며칠 살다 나오거나, 몇 달 살다 나오면 그만일 연행 구속이 두렵다기보다 그 잔인하고 폭압적인 상황이 자연스레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였습니다. 이러다 정말 크게 다치기라도 한다면 하는 두려움.
  하지만 역시 참 바보스럽기도 한 게 사람인가 봅니다. 2층 창문을 통해 보니 건물 뒤편 골목에서 한바탕 접전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어린 전경들 역시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졌다는 것이 확연히 보였습니다. 그곳에 지휘관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지로 몰린 것은 사실 양민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어린 전경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에겐 이성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끝끝내 진압하라는 절대 명령 하나 뿐. 양민들에게 밀려 고지를 탈환하지 못하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절대복종의 명령 하나. 그러니 그들이 사람이 아닌 개가 되고, 승냥이가 되고, 늑대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웠습니다.
  거기다 그들은 어떠한 민주주의 학습도 받아보지 못한 어린 청년들일 뿐이었습니다. 사실 민주주의 투쟁에 나선 어떤 양민도, 시위대도 그들을 적으로 삼지 않습니다. 그들이 맨 앞에 방패막이로, 침탈을 수행하는 폭력수행의 기계로 서 있기에 어쩔 수 없이 맞서지 단 한 번도 어린 전경들을 적으로 삼고 싸우지 않습니다. 그들의 뒤에 거만하게 서 있는 부패한 경찰권력들, 그 뒤에 나와 보지도 않고 앉아 전적만을 문제 삼는 고위 부패관료들, 그들의 뒤에 서 있는 부정한 정치인들, 대통령이라는 작자, 그리고 그보다 머나먼 바다 건너에 살면서 인류의 꿈과 소망을 전쟁과 폭력으로 빼앗아 가는 저 군국주의 세력들을 미워하고, 그들에 저항할 뿐, 어린 우리들의 벗들인 전의경을 적으로 삼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싸움은 아직도 그들의 세포조직의 가장 말단인 죄 없는 전의경들과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입니다. 그들을 밀고 나가지 않고서는 그들의 상관들에게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강력한 의사를 전할 방법도 없습니다.
  
  피흘리는 이 땅에 인권은 없다
  
  어떤 식으로든 아래에서 싸움을 하고 있는 시위대들을 도와야 된다는 절박함에서 2층 창에서 연결된 도서관 지붕으로 올라갔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1층에서 가져온 연탄밖에 없었습니다. 연탄이라도 부지런히 던지고, 집단 구타하지 말라고, 제발 방패로, 곤봉으로 치지 말라고 사람 죽는다고 악을, 악을 쓰고 있는데 어느 순간 머리가 띵하며 힘이 쭉 빠졌습니다. 어, 하며 고개를 숙이는데 거기 어른 주먹만 한 벽돌이 툭 떨어졌습니다. 이거였구나. 반대편에 있던 전경들이 계속 우리를 향해 돌을 날리고 있었는데 결국 맞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선 내가 죽었는가 안 죽었는가를 몇 초 동안 점검해 보았습니다. 의식이 계속 유지되면 난 괜찮은 거야라고요. 다행히 그 몇 초 동안 의식이 계속 잡히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선은 괜찮은 거야. 불행 중 다행이야. 잠시 후 사람들이 달려 왔고, 얹고 있는 손 사이로 뜨뜻미지근한 것이 쭉 흐르더니 바지 위에 빨간 점들이 점점이 생겨났습니다. 비로소 안심이 되었습니다. 터졌군. 그러면 안 죽는 거야, 라고요. 제 발로 걸어 의무대를 물어 찾아 갔습니다.
  거기는 더 아수라장이었습니다. 대부분이 머리가 깨진 이들이었는데 얌전히 앉아 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나마 양호한 편이었습니다. 얼굴이 피칠갑이 되어 부어오른 사람들. 그런데 그런 사람들 정도도 양호한 편이었습니다. 너댓 사람들이 계속 사람들을 들고 들어오는데 사지를 못 움직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처럼 머리 정도가 깨진 사람들은 의식을 잃고 계속 들려오는 사람들을 먼저 돌보라고 몇 번이나 자기 차례를 양보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희한하게 사람들 얼굴이 평온하고 편안해 보였습니다. 머리가 터졌는데 응급치료란 게 소독약으로 소독 한 번하고, 무슨 연고 한번 바르고, 가제 대고 반창고로 붙인 후 "꼭 누르고 있어요" 하면 끝이었습니다. 무슨 전쟁터도 아니고. 제가 들어갔을 때는 이미 반창고도 없어 내가 여기저기 청테이프나 비닐테이프를 찾아다 주기도 했습니다. 누구도 이렇게까지 무자비하게 침탈을 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터였습니다. 무슨 간호사들도 아니고, 평택지킴이로 활동하고 있는 사회단체 여성회원들이 울먹울먹하며 그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따뜻한 동지애들에 가슴이 미어지기도 했습니다.
  나중엔 정말 응급처치를 해 줄 아무런 대안들이 없었습니다. 의식을 잃은 사람들에겐 빨간 소독약 정도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의식을 잃고 실려와 바닥에 동댕이쳐진 환자들은 이미 넘쳐나고….
  그런데도 미친 전투경찰들은 바로 2미터 앞의 문 앞까지 다가와 있었습니다. 우리가 있는 교실 복도 창을 모두 깨트리며 가장 잔인한 욕설과 인상으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경찰이 아니었습니다. 밖에서 전투경찰들이 던지는 돌을 피하기 위해 모두가 벽 뒤에 숨어 오들오들 떨고 있었습니다.
  "야, 새끼들아. 여긴 환자들 있는 곳이라고…. 사람 죽어 가는데 이게 무슨 짓들이야." 하고 소리 질러 봤지만 "이 개새끼들 니들 오늘 다 죽었어"라는 욕뿐이었습니다. 한 2미터 앞에 있는 전선만 무너지면 그들은 환자들까지도 다시 짓밟을 태세였습니다.
  겁에 질려 있는 사람들에게 빨리 전화들을 해라 했습니다. 언론이든 어디든 환자들이 다 죽어가는데도 대책은커녕 오히려 탄압뿐이니 빨리 경찰들에게 이성을 되찾고 위험한 상황인 환자 우송부터 해달라고 밖에서라도 연락들을 해주라고. 저도 다급한 마음에 회원으로 있는 민족작가회의 사무처로 전화를 하기도 했습니다.
  
  전쟁터보다 못한 대추리
  
  사람들이 악을 쓰고 여기저기 전화들을 하자 그때야 환자들은 나오라는 소리가 들려 환자들 우송이 가능했습니다. 사실 저는 나오지 않을 참이었습니다. 왠지 더 같이 싸워야 한다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구토가 시작되었습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발 디딜 틈도 없는 곳에서 이 바닥 저 바닥을 기며 구토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버럭 겁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머리 다치고 구토 증세가 있으면 위험하다던데…. 화가 나고, 남은 사람들에게 미안하긴 했지만 이런 경우엔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환자들 나간 곳이 어디예요?"
  "환자들 나간 곳이 어디예요?"
  누군가가 저기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밖에서 전경들이 유리창을 깨며 돌을 던지고, 욕설을 퍼붓는 그 험한 복도를 뛰어 끝 쪽에 난 문을 나서니 참 평온했습니다. 초등학교 밖은 너무도 조용하고 정돈이 잘 되어 있었습니다. 이미 진압이 끝났으니 말이에요. 시커먼 전경들이 쭉 도열해 서 있는 것 말고는 그런 평화로움이 없었습니다.
  가로막는 전경들에게 병원에 가는 환자라고, 구급차는 어디 있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객관적으로 저희들이 봐도 환자니 길을 조금 터주는데 낯익은 지휘관 한 명이 그 길 앞에 서 있다 저를 보더니 "저 새끼 연행해" 하더군요. "환자라는데요." 하고 전경들이 얘기해도 소용없더군요. "무조건 연행해!"
  화보다도 사실 겁이 났습니다. 몸 상태에 대한 자신감을 급격히 잃은 상태라 하소연하듯이 얘기했습니다. "이보세요. 환자를 연행하라니 무슨 말입니까. 나 지금 보다시피 머리 터지고 구토 증세나 있는 환자예요. 연행되어도 좋으니, 빨리 병원부터 좀 보내주세요." 하지만 그 무궁화 두개인가, 세 개짜리 지휘관은 뒤도 돌아보지 않더군요.
  그러니 그 부하들도 똑같았습니다. 어린 전경들이 갖은 욕설을 다 해대고 머리통이 깨져 붕대를 감은 머리를 비틀어 가며 여섯 놈이 번쩍 들어 연행해 갔습니다. 연행 과정에서 구두 한쪽이 논바닥에 떨어져서 신발, 신발 해봤지만 소용이 없더군요. 가난한 살림에 치료비, 구두 값을 생각하니 처량해지기도 했습니다. 진짜 전쟁터에서도 제네바협정이란 게 있어 환자와 포로에 대한 예의 규정이 있는 세상에 이게 뭔 꼴이람. 참 깝깝했습니다.
  간신히 연행은 면했습니다. 먼저 환자들을 데리고 나갔던 한 여성동지가 몇 번이나 연행차에 실어 가려는 나를 "환자를 연행하는 놈들이 어딨냐"고 끝끝내 붙들고 늘어지며 여기 저기 구경하고 있는 기자들과 사람들의 여론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우선은 좀 내려놓고 환자를 쉬게 좀 하라는 소리에 길바닥에 철푸덕 내려놓더군요. 그렇게 한 30분이 소요되었던가 봅니다. 정말 응급환자일 경우 죽기 딱 좋겠더군요. 휑한 들판에서 다른 진압계획은 그리들 잘 짜 왔으면서 구급차 한 대 없이 사람들을 짓밟다니.
  
  계엄, 음산한 밤 대추리
  
  다행히 CT촬영 결과 머릿속은 괜찮다고 합니다. 2~3일 입원해 있어 보라 했지만 다음날인 5일 오후에 퇴원해 나왔습니다. 나와서 다시 대추리로 갔습니다. 2시에 범국민규탄대회가 잡혀 있었습니다. 나가보니 여기저기 머리 앞뒤에 반창고를 붙인 이들이 여럿 보여 킥킥킥 웃기도 했습니다. 밤새 그나마 안녕했던 사람들입니다. 다행이었습니다. 저들은 그토록 무자비하게 탄압하면 사람들이 겁을 먹고 사회적 연대를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그럴수록 더 단단해지고 푸르러집니다. 같은 민족문학작가회의 소속인 이재웅 소설가도 꽁지머리처럼 뒷머리에 하얀 반창고를 붙이고 왔습니다. 얼마나 진한 사람애가 그런 과정에서 오가는지 저들은 모르겠죠.
  그렇게 다시 만난 우리는 이번엔 1,000명이 아닌 3,000여명이 되어 다시 씩씩하니 싸웠습니다. 저들은 아마 놀랄 것입니다. 1,000명에서 520명을 연행하고, 100여 명의 머리를 깨놓았는데, 또 어디서 3,000명의 사람들이 불쑥 솟아났으니 말입니다.
  대추리 가는 길을 막아 본정리 농협 앞에 모여 전경들을 뚫고 대추리 십 몇 키로의 동리와 언덕과 들을 넘고 넘어 기어코 우리는 대추리의 평화동산 앞까지 갔습니다. 간단히 결의 발언하고 바로 황새울 들로 나갔습니다. 우리들 가슴에 처진 저 분단의 철책선, 전쟁과 야만의 철조망을 걷어 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다시 100여 명이 연행되었습니다.
  밤 9시 30분쯤엔 평화동산에 모여 늦은 저녁을 먹고 있는 사람들을 전경들이 침탈해 들어와 잡아가기도 했습니다. 낮 동안 맛보았던 잠깐의 승리감은 서서히 공포가 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문화예술인들의 거처인 들사람들 집에 모여 있던 우리 문화예술인 10여 명도 황급히 집에 켜진 불을 다 끄고 나와 집 뒤편 비닐하우스 뒤 어둠 속에 숨어야 했습니다. 아, 이게 무슨 시절이란 말입니까. 밤 10시 30분경, 옆집 민가를 똑똑 두드려 숨겨줄 것을 부탁했더니 쾌히 들어오라 해서 그곳에서 숨죽이며 하룻밤을 보내고 나왔습니다.
  비는 내리고 참 음산하고, 긴장되는 밤이었습니다. 모두가 "야, 정말 준계엄이구나, 계엄."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습니다. 수천의 무장한 전경들이 여기저기에서 갑자기 "억, 억" 소리를 질러대고 정체불명의 승용차들만이 동네 골목골목을 소리 없이 천천히 지나 다녔습니다.
  문자나 전화를 통해 서로들 오늘밤은 피해야 한다는 소식들이 소리 없이 오갔습니다. 우리가 있는 집으로 황급히 도망쳐 왔던 한 대학생 친구는 새벽 내내 문자메시지를 통해 이야기를 주고받다 새벽 4시경 긴장이 풀린 상태를 타 마을을 빠져 나갔습니다. 5.18이 있던 시절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형은 화순 산을 타고 넘어, 넘어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누구에게도 온 사실조차 말하지 말라는 아버지 말씀이었습니다. 지금이 그런 시절인지.
  마을 정찰을 다녀온 이윤엽 화가는 마을이 공동묘지 같다고 했습니다. 모두 벽을 타고 숨어, 숨어 다니는데 만나면 깜짝 깜짝 놀란다는 것이었습니다. "누구야?" 하면 "나 주민이다" 하면서요. "넌 누구냐?"하면 "나도 주민이다."하면서요. '무슨 3자개입금지법이 있던 박정희 전두환 때도 아닌 때 이게 무슨 꼴이람' 했지만 5월 5일 대추리는 충분히 그런 공포를 자아내기에 충분했습니다. 대추리로 들어오는 모든 길은 봉쇄되었고, 기자 한 명 없는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논길을 기어 거어서라도 밖으로 나가 이런 참혹한 현장에 대해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불쑥 불쑥 들었습니다.
  
  평화의 씨앗은 넘치지 않는다.
  
  아침 골목들도 수상했지만 그래도 대낮인데 하고 어깨를 조금 펴고 동네길을 걸어보기도 했습니다. '아, 이게 국가폭력이라는 것이구나' 새삼 다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후 2시로 예정된 대추리에서의 2차 범국민규탄대회는 실제 힘들다는 판단 후 어제 병원문병을 왔다가 함께 대추리 들어와 싸우던 중 연행된 선배 면회를 위해 분당경찰서에 들렸다 오후 늦게야 집에 돌아 왔습니다.
  버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참 평온하고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그게 조금은 서럽기도 했지만, 늘 보이지 않는 곳에서 폭압이 일어남을 잘 알기에 크게 개의치 않았습니다. 진실이 알려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곧 평등 평화를 바라는 평범한 사람들의 물결이 다시 광화문에서, 전국 각지에서 봄 진달래들처럼 앞다투어 일어날 것입니다. 그 물결이 우리 사회를 다시 한 번 더 성숙시키고, 아름답게 만들 것입니다. 아무리 막아도 한국민들은 대추리에 전쟁기지가 들어서지 못하도록 막아 설 것입니다. 파란 모들이 자라나 황금이삭으로 여물도록 할 것입니다.
  아무리 많이 심어도 평화의 씨앗은 넘치지 않습니다. 넓힐수록 좋은 것은 이런 평등 평화의 마음이지, 전쟁기지가 아닙니다. 5.18이면 매년 갔던 광주를 이번엔 가지 않을 참입니다. 난 다시 대추리로 갈 것입니다. 그곳에서 아직도 광주가 피 흘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구묘역에 잠든 김남주 선생도 '당연히 그래야지.' 하실 것입니다. 죽어간 수천 광주의 원혼들도 미군에게 땅을 내주고 뻔뻔히 나와 화려한 신묘역 앞 기념식 내빈석에 앉아 있을 당신들을 피해 황새울 벌로 날아들 것입니다. 제발 정부와 정치인들이 자신을 위해 역사를 욕되게 하지 않기를. 제발 자신을 위해 모두의 미래를 훼손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민주주의는 무슨 과거가 아닙니다. 오늘 있거나 없는 것입니다. 없으면 다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 <대추리·도두리 헌정 반전평화 시산문선 - 거기 마을 하나 있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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