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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1930년대 여성 사회주의자들

인터뷰 : 1930년대 여성 사회주의자들

1920년대 소위 맑스 걸, 엥겔스 레이디라 불린 여성들이 있었다. 우리나라 여성해방운동의 물꼬를 튼 사회주의 여성운동가들이다. 1930년대 들어와 사회 전반의 운동 세력이 약화되면서 숨죽이고 있던 그들의 처지와 심경을 엿본다.

인터뷰를 한 7인은 유영준, 우봉운, 정칠성, 허정숙, 김원주, 최은희, 황신덕, 나혜석이다. 그중 우선 유영준, 우봉운, 정칠성, 허정숙과 만난다.

일제시대의 사회주의 여성 운동가...
그들은 화려한 나방들이었다. 이전의 여성운동은 주로 구국을 위한 민족운동, 봉건적 질서로서의 억압을 극복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사회주의 이념의 불꽃속에 뛰어들었다. 최초의 횃불은 1924년에 창립된 <조선여성동우회>,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주의적 여성해방론을 주장한 여성단체다. 사실 이 단체는 조금 앞서 창립된 조선청년총동맹(김은국과 박헌영이 손잡은 사회주의운동단체)의 사주(?)를 받았다.

창립 당시 반응은 썰렁했다. 발회식에 참석한 사람은 80명 가량, 그중 50명이 축하나 방청을 위해 참석한 남자, 약 10명은 감시 경찰관, 여자는 발기인이자 간부들 13,4명밖에 없었다. 여자동우회가 아니라 남자동우회 같았다. 창립 당시 회원수는 불과 18명, 발기인이 그중 14명이니 '조선'이라는 말이 부끄러울 만큼 다른 여성들의 반응은 약했다. 2년 후 70명으로 늘어났지만 정말 약소한 단체였다. 그렇지만 회원은 학생, 의사, 간호부, 교원, 기자, 직공 등 대체로 사회 최고의 엘리트라 할 전문직 여성들이 주축을 이룬 정예부대였다.

35년 무렵 이들은 표면운동에서 물러난 상태였다. 조선여성동우회는 분파되었다가(전체 운동판에서 국내의 김은국 계열과 해외유학생 중심의 박헌영 계열의 대립과 흡사하게), 1927년 전국 단일노선의 <신간회>가 창립된 것과 마찬가지로 같은 해에 <근우회>를 만든다. 그러나 1931년 신간회 해소와 발맞춰 근우회도 해체된다. 여러 사정이 있었지만, 외적으로 일제의 사상탄압과, 내적으로 근우회 활동이 노동계급운동에 도움이 못된다는 비판때문이었다.

이 여성들은 근우회 해소 이후 조직활동을 중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근우회> 시절 유영준, 우봉운, 정칠성, 허정숙 등은 각각 정치연구부, 재무부, 선전조직부, 교양부의 임원이었다. 박헌영계열에 가까웠던 이들은 <조선여성동우회>가 분파되었을 때 '경성여자청년동맹'을 만들었는데, 첫 사업으로 국제부인데이 기념간친회를 열 만큼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정통성을 따르고자 했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페미니스트들이랄 수 있는 이들에게 기자는 집요하게 남성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기를 요구한다. '적나라한 남성의 정체'란 게 뭔가. 막연하기 짝이 없으면서 교묘하게 남성의 반감을 불러일으키려는 질문이다. 원하는 대답을 준다. 남성의 저열하고 추악한 면을 폭로하기는 가엽지만 한마디로 '저항력이 약하고 미련한 것'이라고 말이다. 이 강한 여성들이 볼 때 남성은 고통을 참지 못하는 나약한 것이고, 정치적으로 지조없고, 경제적으로 무능하다. 생리적으로도 이성의 유혹에 약하다. 조선의 일반적 남성을 인텔리 여성의 시각에서 하등동물(?)쯤으로 여기는 것이 역력하다. 성차에 대한 냉철한 인식에서 나온 대답이라기보다는 자기 체험에서 우러났다고나 할까. 당시 남성들이 보면 '무서운 여자'들이라고 할 만하다.

근우회 해소 이후 여성운동이 다시 미비한 대로 일어나고 있지만, 이들의 의식 수준에서는 만족스럽지 않다. 그 수위보다 더 나아가 활약하고 싶지만 활동의 두려움도 컸던 듯하다. 동지들의 규합도 어려웠고 형사의 눈초리도 매서웠기 때문이다. 아무리 무서운 여자들이라도 경찰의 권력은 무서운 것이다.

남녀 문제에 대해서 대답은 의외다. 사회주의적 여성해방론자이지만, 남녀의 애정, 결혼, 부부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돌리고 있다. 물론 개인적 문제가 바로 사회적 모순 해결을 통해 바로 해결될 수는 없다고 해도 양성문제를 극히 개인적 차원으로 한정시키는 것이다.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을 자본주의체제에 대한 저항이나 국제적 연대 정도로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세간의 관심에 대해 프라이버시를 주장하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제 2회장

정칠성은 본래 기생 출신이었다. 기생은 사회구조적으로는 남성중심주의의 희생물이지만, 가정이라는 보호막이자 감옥을 모르기에 남성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이탈자가 나올 가능성도 높지 않을까. 황진이가 그러했고, 근대초기 대중문화의 푸른 꽃인 배우와 가수로 등장한 기생들도 그러했다.

정칠성은 일찍부터 남녀평등 실현을 꿈꿨다. 17세 때 우리나라의 유명한 여장부가 되고자 승마를 배운 여성이다. 3.1운동 뒤 홀연히 화류계를 떠나 사회주의 서적을 탐독하였고 여성 동우회 발기에 참여하였다. 그 후 일본 동경기예학교에서 유학하면서 여성 사회주의자가 모인 독서모임인 삼월회를 조직하여 활약했다. 여기서 사회주의 사상의 이론적 기반을 쌓고 1926년 봄에 귀국하여 근우회의 기관지인 <근우>의 편집인으로 활동했었다.

활동적이고 독립적인 성격 탓인지 정칠성은 근우회 해소 이후에도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작은 활동들을 시도했었다. 그러나 다시 조직적인 단체 활동은 꺼리는 듯하다. 본래 남성과 무관하게 자기 나름대로 살아온 그녀라 특별히 남성에게 불만을 갖고 있지는 않다. 사상적으로 남성이 유동적이라고 하는데, 반대로 여성이 더 맹목적이고 헌신적인 면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통이 큰 그녀는 앞서 유영준이나 우봉운보다는 남자에 대해 너그럽다(?). 함께 일할 때 든든하다는 것이다. 남성을 손아귀에 놀게 하기는 하지만 남성 지배를 받아보지 않은 그녀이다. 지식인류의 소심함과 거리가 먼 그녀는 남성과 대등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조선 여성 일반이 처해 있는 상황을 생각한다면 남성의 횡포나 사회적인 억압에 대해 할 말이 정말 없을까? 기자의 질문 자체가 그녀와 연인 관계에 있던 남성들을 향해 던졌기 때문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정칠성 역시 작은 기술 강습회 정도만 하고 있을 뿐, 여성단체 활동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근우회와 같은 실패를 다시 되풀이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무엇이 그녀들을 환멸에 젖게 한 걸까?


제 3회장

허정숙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 없다. 기자는 허헌의 동정을 묻고, 우연히 송봉우를 발견하는 소득을 얻었을 뿐이다.
허헌이나, 송봉우는 허정숙의 남성으로 세간에 떠들썩하게 알려졌던 인물들이다. 허정숙은 주세죽, 박원희와 더불어 여성동우회 발기 핵심멤버 3인 중의 한 사람이다. 사실 여성동우회의 창립은 당시 사회의 요구에 의한 것이기보다는 이들 3인 여성의 남편들인 골수 사회주의자들의 의도에 의해 이뤄진 측면도 있다.
허정숙의 남편은 임원근, 주세죽의 남편은 박헌영, 박원희의 남편은 김은국이다. 모두 일제하 한국공산주의 운동의 핵심적 공산주의자들이었다.

박헌영과 임원근은 상해 강습소에서 영어를 배우면서 알게된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역시 영어를 배우던 허정숙과 임원근은 열애 중이었고, 이때 허정숙이 피아노공부를 하던 주세죽을 박헌영에게 소개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여성동우회의 사상적 원천이 어디로부터 흘러나왔는지는 짐작할 만하다.

여성동우회가 지지부진하게 될 때 경위를 보면 사상적인 대립도 원인이었지만, 구성원들의 사정도 있었다. 1925년 박헌영은 신의주 사건으로 잡혀 들어가고 허정숙은 임원근과 헤어져 송봉우와 동거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정칠성은 동경 기예학교로 갔으며, 박원희는 여성동우회를 탈당하였다.

남편들의 입김때문이라면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여성동우회와 근우회를 이끌었던 이 여성들은 가정 안에 자신의 정체성을 가두기를 거부하고 밖으로 나선 자들이었다. 옳든 그르든, 제대로든 아니든. 그건 사실이니까. 또 사회에서 그런 여성을 곱게 볼 리는 없었다. 대체로 세간의 관심은 그녀들의 '성적인 자유분방함'이었다.  

허정숙을 비롯해 여성운동가들은 언론의 난도질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붉은 연애의 주인공들」이라는 제목으로 당시 새로운 연애를 실천하는 여성운동가들에 대한 적나라한 기사가 실렸는데, 그 주인공들이란 대개 여성운동가이거나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공산당 당원이었다. 동아일보 기자였던 허정숙은 임원근, 허헌 등 '나이 30이전에 애인을 세번 가졌고 가졌을 적마다 옥동자를 얻었던' 여성이었다고 폭로되었다.

당시 사회주의 사상가들 사이에는 맑스와 엥겔스의 이론에 토대를 둔 가족관과 여성론이 퍼져있었고, 콜론타이의 연애론이 유행했었다. 신여성들은 여성해방의 시각을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공격의 수단으로 적용할 뿐만 아니라, 더러는 개인적인 실천의 지침으로 삼았다.
그들은 때로 반사회적이고 파괴적일만큼 대담했다. 남녀 사이의 편향적인 정조관을 비판하고 봉건적 굴레를 벗어난 연애관을 실천하려고 했던 것이다. 맑스 걸, 엥겔스 레이디라 불리는 여성들의 사회주의적 연애는 그 나방이 뛰어든 또 하나의 불꽃이었으리라. 그 불꽃은 사그라지고 남은 건 추문과 환멸이었다



옛날 인터뷰 원문 - <중앙> 1935.1

그뒤에 이야기하는
「제여성(諸女性)의 이동좌담회(移動座談會)」


프롤로그

기자독백 : 그 전날 사회제일선상에서 화려하게 활약하던 제여사들의 최근심경은? 생활은? 어떠하며 현재에 느끼는 감상은 여하한가를 들어서 이를 궁금히 여기시는 독자제위께 전하려는 것이 이 이동좌담회를 개최하는 본의올시다.

제 여사 중에는 말씀하기를 회피하는 분도 있고 더 나아가서는 만나기까지를 꺼리는 분까지 있어 아무리 이동좌담이라고는 하지만 그 진행이 상당히 순조롭지 못했던 것을 미리 헤아려주심과 동시에 허덕지덕 이 고개를 넘고 저 골목을 돌면서 삼동설한에 땀을 흘리며 돌아다닌 기자의 고심을 또한 거들떠 주신다면 다행하겠습니다.

화제의 진행은 이동좌담인 만큼 레뷰-형식을 택하였고 그러면서 읽으시기에 지루하지 않게 '커트'와 '클로즈업'을 적의히 하였음을 미리 말씀해두고 또 한가지 기자가 이번 좌담에 만난 분과는 전부가 초면이라 각 양면마다 초면 대담의 항렬적 인사가 왕래하고 그리고 좌담은 시작되었으나 그러나 그 진행에 관한 장면은 일체 말소하고 간혹 기자 소회있는 때는 '독백'으로써 울부지젓사오니 혜독하야주시기 바랍니다.

제1회장

유영준(劉英俊), 우봉운(禹鳳雲) 양씨에게서 「적나라한 남성의 정체」를 듣는다.

장소 : 수송동 유영준씨 자택
시일 : 초동 어느날 오후 2시
인물 : 유, 우 양씨와 기자 모두 삼인

기자(유에게) : 표면운동에서 들어앉으신 지 퍽 오래시지요.
유 : 글쎄요. 한 7, 8년 되지요.
우 : 그러나 뒤에 앉어서 우리 여성들의 운동을 퍽 많이 지지해주고 응원해주었지요. 표면에 나선 이 못하지 않게 활동한 셈이지요

기자 : 우선생은 지금 댁이 어디십니까?
우 : 가회동 78번지외다.
기자 : 혼자 계신가요?
우 : 그럼요. 단신으로 철두철미 자활을 하려고 갈팡질팡입니다. 이때까지 남성에게 도움을 받았다거나 부모의 덕을 입었다거나 하지를 못했습니다. 다만 친구의 덕은 종종 입습니다만은 그것도 내 본시의 요구에서는 아닙니다.

기자 : 그런데 오늘 찾아온 것은 두 분 선생에게서 「적나라라한 남성의 정체」 다시 말씀하면 두분이 보신 「남성관」을 들으려고 하였는데요, 바쁘지않으시면 기탄없이 말씀을 하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유 : 글세요. 퍽 막연하잖아요. 남성관이라 하면 그 관점에 따라서 다 다를 것인데 그걸 별안간 앉아서 이야기하기는 어렵다구 생각하는데요.

기자 : 그렇겠습니다. 그러면 그 하나만 떼어서라도 어느 점으로 보아서는 이렇다 하고 말씀을 하시지요.
우 : 하여간 부분부분으로 남성의 장단을 들춰가지고 논평을 하자면은 참 거창하게 할 말이 많으니까 차라리 덮어두고 보는 것이 당분간은 좋겠지요.

기자 : 그렇니까 남성관의 공개를 기피하시는 것인가요?
우 : 그렇지는 않지요. 너무 저열하고 추악한 데가 폭로된다면 가엽지 않아요. 그렇니까 이렇다저렇다 하지말고 덮어두자는 것이지요.

기자 : 그렇지만 그 결론만은 말씀하셔도 좋지 않으십니까?
우 : 글쎄요. 요약하고 요약해서 말한다면 남자란 「저항력이 약하고 미련한 것」이라고 할까요. 여자에게는 남자의 이 배 삼 배의 고통을 갖고 있으나 그것을 「참어내는 무기」가 있지만 남자의 정체를 본다면 「가여운 것」 그 하나뿐입듸다.

기자 : 유선생도 말씀해주시면 좋겠는데요.
유 : 그 말이 그 말이지요만은 대강 말씀을 한다면 남성을 세 가지 관점에 비추어 봅니다. 첫째 정치적 방면에서 볼 때 남성의 절조없는 것이 너무 역력하게 드러나드군요. 이즘만해도 누구누구할 것없이 그 행동이 무엇입니까.
둘째 경제적 방면에서 볼 때 남성의 추악스러운 것이 그리고 하잘것없는 무능한 것임을 볼 수 있드군요. 요약해 말하면 현하 조선남성들은 하나도 줏대가 없이 갈팡질팡합니다. 당면만 자기 개인문제를 해결못하면서 사회요 민족이요 하는 것은 말하자면 골자(骨子)없는 인간이라는 관념을 줍듸다. 더욱이 경제문제 앞에 그렇게 쉽게 자기의 「씨」까지 바쳐가면서 아첨하는 양은 도리어 가엽습듸다.
셋째 생리적 방면에서 볼 때 남자들은 이성앞에 너무나 약합듸다. 여성은 이성에게 애정을 주게되기까지에 상당히 신중한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만 남성은 순간적입듸다. 그리해서 그들은 그 순간적 유혹을 못이기고는 심각한 비극의 중인공들이 됩듸다.
하여튼 결론에 가서는 우봉운씨말대로 강한 체하면서 약하고 영리(冷悧)한 체하면서 미련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기자 : 그런데 지금 여성운동만이 아닙니다만은 하여간 여성운동이 침체를 지나 정돈(停頓)되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 대해 어떤 소감을 갖고 계십니까?
우 : 적막을 느낍니다. 그렇다고 자기 의식의 수준을 내려가지고 합법비합법간에 무슨 운동을 하고싶지는 않고 전날 근우회의 수위보담도 한 걸음 더 나아간 단체를 조직하야 용맹스럽게 활약해보았으면 개인으로도 긴장되고 사회적으로 의의가 크겠으나 그것은 나 개인의 생각뿐이외다.

기자 : 그러면 전날의동지 여러분과 모일 때에는 혹시 그런 말씀을 해보십니까?
우 : 어딀요. 않습니다. 성산없는 이야기를 꺼내서 소득도 없고 공연히 형사들에게 비밀결사하였다는 혐의만 받게요.

기자 : 그렇겠습니다. 여담입니다만은 앞날에 양성문제가 해결될 날이 있을까요?
유 : 나의 이즘 생각은 양성문제 즉 애정문제라거나 결혼문제 부부관계 같은 것은 모두 그 개인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이 모이여 사회가 되였다고 하여 연쇄적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문제는 그 개인과 개인, 당자와 당자간에서 해결되는 것으로 그 해결이라 할 것이지 더 다른 것이 있지 않을 줄 압니다.
남편과 아내 이 두 사람의 관계를 알 사람이 없습니다. 남편된 이가 사회적으로는 명망이 있다 하드라도 가정에 돌아가 안해 앞에서도 그렇겠느냐 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다른 제 3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간섭할 수 없는 관계가 양자간에는 있다고 봅니다.
이것은 애정문제에 있어서도 그렇고 결혼문제에 있어서도 그럽니다. 제3자가 자 막대기로 잴 수 없는 이 문제가 사회적으로 해결될 날은 없을 것이지요.

기자 : 바쁘실텐데 이처럼 이야기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제 또 다른 분을 맞나야 하겠어서 이만 실례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요.

  
제 2회장
丁七星씨에게서 「내가 본 남성의 불만」을 듣는다.

장소 : 낙원동 정칠성씨 하숙
시일 : 초동 어느날 오전 10시
인물 : 정칠성씨와 기자

기자 : 서울 오신 지가 여러 날 되십니까?
정 : 한 2주일가량됩니다.
기자 : 그 간 어듸 계셨습니까?
정 : 원산 있었습니다. 원산서 강습소를 경영하려고 그동안 꽤 애를 썼었으나 그것도 뜻대로 되지를 않드군요.

기자 : 그러시면 서울서 바로 원산으로 가셨나요.
정 : 아-니요. 작년 겨울에는 평양 대구 등지에도 가 있었습니다.
기자 : 서울에서 여성운동단체를 조직하시고 다시 활약해보고 싶으시지 않으십니까?
정 : 글쎄요. 아직은 공상이겠으니까 대답하고싶지 않습니다.

기자 : 선생이 생각하시는 「남성의 불만」을 말씀해주신다면 퍽 긴하겠는데요?
정 : 글쎄요. 내 자신으로 보는 바에 의하면 남성에 대하야 밉다니 좋다니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생활을 영위해 가는 데에는 남녀가 함께 있어야 할 것이니까 특별히 남자라고 해서 그에게 불만한 점을 가져본 일은 없습니다. 사상적으로 볼 때 남자가 여성보다 더 유동적이요 변동하는 것이 어떻게 말하면 불만이라 하겠으나 그것은 불만보다도 결점이겠지요. 오히려 어떠한 사업을 하는 때는 남자와 함께 일을 하는 것이 더 든든하고 보람이 있는 생각이 나드군요.

기자 : 남성의 고집이라거나 소유욕 같은 그 성질에 대해서 숨김없이 말씀하신다면은 어떠하십니까?
정 : 글쎄요. 조선의 남성을 일반적으로 본다면 거긔 어떠한 불만이라든가 그 횡폭에 대하야 말이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지금까지 남성을 내 손에 놀게는 하였으나 남성의 지배 밑에 속박을 받아보지도 못했고 그 앞에 머리를 숙여보지를 않고하야 남성의 횡폭에 대하야 나만이 가진 무슨 할말은 없습니다.

기자 : 선생은 현재 선생의 생활에 권태를 갖고 계십니까?
정 : 그런 말은 물어서 무엇하시오. 권태라기보다 부족을 느끼지 않을 이유가 어데 있단 말이요.

기자 : 이번 동아의 편물강습회는 성적이 좋습니까?
정 : 김장 때가 되여서 효과가 아주 적습니다. 될 수 있으면 김장이 끝난 때 따로 다시 주최하였으면 합니다만은 적당한 장소가 없습니다.

기자 : 이즘 서울에는 여성의 교양단체가 여럿 있는데 그 중에 들어가시어 활동하시지 않으시렵니까?
정 : 그렇게 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과정을 되풀이하고는 싶지 않습니다.


제 3회장
許貞淑씨에게서 「다음 기회에 말하겠다」함을 듣는다.

장소 : 팔판동 태양광선치료소
시일 : 초동 어느날 오정
인물 : 허정숙씨와 기자

기자 : 태양광선치료하신 지 꽤 오래 되시지요?
허 : 한 삼 년 됩니다.
기자 : 재미를 보십니까?
허 : 무얼요.

기자 : 그런데 오늘 찾어뵙고 운동을 떠나신 뒤의 소회를 들었으면 하고 왔는데 말씀을 해 주시면 퍽 감사하겠습니다.
허 : 글쎄요. 창졸간에 말씀드리기도 어렵고 그리고 그런 이야기는 말로 하기보담은 이 다음 기회에 쓸 줄은 모르지만 글로 써드리지요.

기자 : 이 다음 기회라시면 저의 입장이 퍽 곤란한데요. 말씀으로 하여 주시지요.
허 : 그렇겠지만 이야기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기자 독백 : 남향한 응접실로 볕이 어찌 쪼이는지 몹시 덥고 땀이 막방 쏟아진다. 면대한 허여사는 그간의 '까싶'에 꽤 심로를 하였는지 기자 백방 애청하며 근일 소회를 물었으나 종시일관 다음 기회에 맞나자 한다. 기자 필시 허여사에게 '다음 기회'를 '캣취'하자고 온 '형편'이 되었다.

기자 : 許憲선생님도 함께 계십니까?
허 : 아-니요. 삼청동에서 살림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늘 여기와 계십니다.

기자 : 그러면 화제를 바꾸어 지금 새로 여성운동단체가 생긴다면 선생은 또다시 나아가 활동하시렵니까?
허 : 그것도 다음에 말씀하지요. 간단하게 대답은 할 수 있지만 그 영향이 뜻밖으로 크니까요. 깊이 생각해 말씀드리지요.

기자 : 그러면 이 치료원으로 앞으로 오래 계속하실 작정이십니까?
허 : 글쎄요. 모르지요.

기자독백 : 응접실 옆방에 인기척이 있다. 이때 방문객이 있으매 기자 그만 퇴각을 하려하는데 그 방문객은 응접실 옆방에 계신 분을 찾아오신 양이었다.

기자 : 예전의 동지를 자주 만나십니까?
허 : 가끔 만나지요. 찾아도 오고 찾어도 갑니다. 그런데 저같은 사람보다 이러한 방문은 지금 사회적으로 활동을 하시는 황신덕씨를 찾아뵙는 것이 어떠세요. 그러면 거기서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이 들으실텐데-.

기자 : 고맙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그분도 찾아가려는 중입니다.
기자 독백 : 응답 20분간에 '이다음 기회'를 약 20여차 들었다. 다시 더 앉아있어서 소득없을 배는 이미 화제를 꺼낸 그 다음 기간에 각오하였든 배라 여기서 할 수 없이 퇴각을 펴다. 문을 나오다가 옆방의 주인공이 宋奉瑀임을 알았다. 그러나 인사가 없었으매 그냥 발거름을 띄여놓고 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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