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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을밀대 위의 여류 투사 -평양고무공장 강주룡

1931년 을밀대 위의 여류 투사 -평양고무공장 강주룡

역사는 기억되지만 망각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삐딱한 자들에게 역사는 가혹하다.

여기, 망각된 과거로부터 하나의 목소리를 불러낸다.
때는 1931년 5월 28일. 평양의 을밀대에 한 여자가 올라갔다.
을밀대는 평양 금수산 마루에 있는 대와 그 위에 세워진 정자인데, 지붕까지 높이는 40척, 즉 12미터이다.
그 지붕 위에서 장장 9시간 반 동안 농성을 해서 화제가 된 그녀의 이름은 강주룡!
그녀는 지붕 위에서 머물렀다고 공중에 체류한 여자, '체공녀'라는 별명이 붙었다. 지금으로 치면 남대문 지붕 위에 올라간 격.
여자라는 이유로, 노동자라는 이유로 이중의 굴레를 쓰고 있던 여성노동자를 만나본다.




[을밀대(乙密臺)의 체공녀(滯空女)-여류 투사 강주룡(姜周龍) 회견기]
(<동광(東光)>, 1931. 7.에서)




<동광> 1931년 7월호 기사

평양 명승 을밀대 옥상에 체공녀가 돌현하엿다.

평원(平元) 고무직공의 동맹파업이 이래서 더 유명하여젓거니와 작년 노동쟁의의 신전술을 보여준 일본 연돌남(煙突男)과 비하야 좋은 대조를 이루는 에피소드라 할  것이다.(중략)

「우리는 사십구 명 우리 파업단의 임금감하를 크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평양의 이천삼백 명 고무직공의 임금감하의 원인이 될것임으로 우리는 죽기로써 반대하랴는 것입니다. 이천삼백 명 우리동무의 살이 깍기지 않기 위하여 내 한 몸덩이가 죽는 것은 아깝지 않습니다.
내가 배와서 아는 것 중에 대중을 위하야서는(중략) 명예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가장 큰 지식입니다. 이래서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 집웅우에 올라 왓습니다. 나는 평원고무사장이 이 앞에 와서 임금감하의 선언을 취소하기까지는 결코 내려가지 않겟습니다. 끝까지 임금감하를 취소치 않으면 나는 자본가의 (중략)하는 노동대중을 대표하야 죽음을 명예로 알뿐입니다.
그러하고 여러분, 구타야 나를 여기서(집웅) 강제로 끄러내릴 생각은 마십시오. 누구든지 이 집웅우에 사닥다리를 대놓기만 하면 나는 곳 떠러져 죽을 뿐입니다.」

이것은 강주룡이 5월 28일 밤 12시 을밀대 집웅우에서 밤을 밝히고 이튿날 새벽 산보왔다가 이 희한한 광경을 보고 뫃여든 백여명 산보객 앞에서 한 일장 연설이다. 이 연설을 보아서 체공녀 강주룡의 계급의식의 수준을 엿볼 수 잇다. 이 여자는 어떤 사람인가. 어떤 생애를 하며 어떠한 환경의 지배를 받앗나? 이것이 편집자로부터 내게 발한 명령이다.

6월 7일. 부외(府外) 선교리(船橋里) 평원 고무직공 파업단 본부로 강주룡여사를 방문하엿다. 유달리 안광을 발하는 작은 눈, 매섭게 생긴 코, 그리고 상상이상의 달변은 첫 인상으로 수월치않은 여자라는 것이엇다.

그러나 그보다도 그의 과거 생애가 듣는 나를 놀라게 하엿다. 오늘 그의 가진 의식과 남자이상의 활발한 성격이 우연한 바가 아님을 알수잇다. 이제 잠간 나는 붓을 돌리어 그의 입에서 나오는 대로의 그의 과거 생의 독백을 속기한다.

고단했던 간도길 - 결혼에서 사별, 노동자가 되기까지

나의 고향은 평북 강계(江界)입니다. 열네살까지는 집안이 걱정없이 지냇으나 아버지의 실패로 가산을 탕진하야 내나히 열네살쩍예 서간도로 갓습니다. 거긔서 농사하면서 칠년동안 살앗는데 스므살 나든 해에 통화현에 잇는 최전빈(崔全斌)이라는 이에게 시집갓습니다. 남편은 그때 겨우 15세의 귀여운 도련님이엇습니다. 나는 남편의 사랑을 받았다기보다도 남편을 사랑하엿습니다. 첫눈에 아조 귀여운 사람 사랑스런 사람이라는 인상을 얻엇습니다. 부부의 의도 퍽 좋앗습니다. 동리가 다 부러워 하엿답니다.

시집간 지 1년후부터 우리 부부의 생애에는 큰 변동이 생겻습니다. 그것은 남편이 00단 수령 白狂雲(지금은 그이도 죽엇습니다)씨의 제이중대에 편입된 것입니다. 물론 나도 남편과 같이 풍찬노숙하며 00단을 따라다녓습니다.

6,7개월 00단을 따라다녓는데 나종에는 「거치정거려서 귀찮으니 집에가잇으라」는 남편의 명령을 받고 나는 본가에 도라와 잇엇습니다.

남편이 백광운씨의 제2중대에 편입된지 1년만이엇습니다. 그 때는 내가 본가에 도라온지 5~6개월후이엇는데 우리 본가에서 백여리나 되는 부락에서 남편의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갓슬때는 벌서 틀렷습디다.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 먹엿더니 좀 정신을차렷섯으나 그날밤으로 죽엇습니다. 밤에는 단지 나혼자 그를 간호하고 잇엇는데 잠간새에 숨이 끈허젓습니다. 죽엇는지 살앗는지 몰라서 바늘로 살을 찔너보고야 아조 죽은줄 알앗스나 기위(이미) 죽은 사람이라 시신옆에서 한잠 자고 이튿날 아츰 병문안왓든 사람들의 손으로 무첫습니다.

그리고 나는 시집으로 도라갓섯습니다. 좀 창피한 이야기지만은 시집에서는 나를 의심하야 남편 죽인년이라고 고생햇습니다. 하도 원통하고 또 돌봐주는 이도 없서서 1주일을 꼽박굴멋습니다.(그런데 이번 사흘쯤 단식이야 쉽지않아요?)

서간도서 귀국한 것은 내가 스물네살 되든 해엿습니다. 처음에는 사리원서 1년쯤 지냇는데 부모와 어린동생을 다리고 내가 밥버리를 하면서 아들노릇을 하엿습니다. 그러다가 평양온 것이 벌서 오년째 됩니다. 처음부터 고무직공으로 밥버리를 햇지요. 고무직공조합에는 작년파업이 이러나기 바로전에 입회햇습니다.

을밀대에서

을밀대에 올나갓든 얘기요? 그야 다 아시지 않아요? 5월 29일밤 우리는 전술을 고치어 단식동맹을 조직하고서 공장을 사수하기로 하고 공장을 점령하엿습니다.

그러나 밤 한시나 되니까 공장주는 경관에 의뢰하야 우리들을 공장밖으로 내몰앗습니다. 동무들이 대성통곡하면서 쫓겨나올때 나는 차라리 이 목숨을 끊어서 세상사람에게 평원공장의 횡포를 호소할 맘을 먹엇습니다. 그래서 나는 공장에서 쫓겨나오는대로 거리에서 일목(日木) 한 필을 사가지고 을밀대로 올라갓습니다. 그러나 「사구라」 나무가지에다 일목을 거러놓고새각하니 내가 이대로 죽으면 젊은 과부년이 또 무슨짓을 하다가 세상이 부끄러워 죽엇나하는 오해를 받을뜻하여 기왕이면 을밀대 집웅우에 올나갓다가 아츰에 사람이 모이면 실컨 평원공장의 푕포나 호소하고 시원히 죽자고 맘을 돌렷습니다.

그러나 을밀대 집웅우에 올라갈 길이 망연하엿습니다. 궁리끝에 일목 한끝을 올가미를 지어서 집웅마루에 걸어보랴고 애썻으나 실패하엿습니다. 마즈막의 묘책에 나는 성공하엿습니다. 일목 한끝에 무거운 돌을 달아서 지붕 건너편으로 넘겨놓고 줄을 다려보앗더니 괜찮앗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줄에 매달녀 「그네」를 뛰어서 안전함을 시험한 후에 이 줄을 타고 집웅으로 올라갓습니다.

그때가 아마 새벽 두시는 되여슬 것입니다. 사면이 고요한데 기생을 끼고 산보하는 잡놈을 두개나 보앗습니다. 아즉 날이 밝기는 멀었는지라 일목을 걷어 올려몸을 가리고 한잠 잣습니다. 동이 트기 시작하면서 내가 요란한 소리에 놀라 깬 때는 벌서(중략)

그는 벌서 한개 로동자가 아니라 사십구명의 로동자를 거느리고 투쟁의 선두에 나선 「리-더」의 한사람이다.(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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