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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의 정치학: 파업과 계급투쟁

파업의 정치학: 파업과 계급투쟁




고민택·{진보평론} 편집위원

남구현·한신대 교수/사회복지학






1. 들어가는 말


'파업'(strike)이란 자본주의사회에서 노동자계급이 전개하는 직접적인 투쟁의 한 형태로 정의될 수 있다. 이 점에서 파업은 말할 필요도 없이 역사적 산물이다. 그런데 파업은 자본주의 사회 이전에 피지배계급이 행했던 투쟁 또는 저항들과 비교해 볼 때, 지배계급에 대해 대항하는 투쟁이라는 측면에서는 동일(연속)성을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분명한 비동일(연속)성도 지니고 있다. 그러한 비동일성의 한 측면은 파업의 합법성이다. 물론 파업이 언제나 합법의 영역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정세적 영향이든, 법·제도의 제약이든, 이데올로기적 파급이든 파업은 언제나 불법의 경계를 넘나든다. 그렇지만 파업은 분명 자본주의 이전의 역사에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공(公)적 지위를 획득하고 있다는 점이 부인되어서는 안된다. 다른 하나의 측면은 자본주의 이전의 역사에서는 피지배계급의 투쟁 또는 저항이 처음부터 객관적으로는 '국가(권력)의 전복'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데에 비해 파업은 그와는 다르게 반드시 '국가(권력)의 전복'을 직접적인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파업은 봉기의 수준으로 발전하는 조건 아래에서만 비로소 '국가(권력)의 전복'을 떠올릴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닐 뿐이다.

파업의 이러한 특징들은 파업이 자본주의 고유의 산물이라는 사실로부터 연유한다. 파업은 노동자계급과 자본주의사회의 지배계급과의 타협의 산물이다. 다시 말해 파업은 자본주의 사회의 피지배계급인 노동자계급이 지배계급에 대항하는 투쟁의 영역에 속할 뿐만 아니라 지배계급이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제한하는 관리의 영역에 속하기도 한다. 이로 인해 파업은, 피지배계급이 벌이는 투쟁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상 최초로 합법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바로 그 때문에 자본주의 이전의 통칭 '민란'(民亂)이 가졌던 정치적 성격과는 다른 성격을 아울러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파업은 87년 전국 노동자 대투쟁 이후에야 비로소 일반적인 차원에서 하나의 사회적-정치적 현상으로 자리잡았다. 세계자본주의 역사와 비교해 참으로 매우 짧은 역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노동자대중이 이 기간동안 벌려온 파업의 역사는 세계사적으로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 파업의 빈도, 강도, 형태 모든 측면에서 현대자본주의 들어와 가장 활발한 양상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96년 말과 97년 초의 전국적 대중파업과 98년 현대자동차·만도기계, 99년 서울지하철·한라중공업 등의 파업투쟁은 '전투성'의 측면에서는 물론 오늘날 지구적 현상으로 되어 있는 '신자유주의' 정치와 이데올로기에 정면으로 맞선 대중적 투쟁이라는 측면에서 세계적 수준에서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다.

다른 한편 90년대 들어와 이른바 선진자본주의 나라에서 나타나고 있는 노동자대중의 파업투쟁 역시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다. 그 모두를 일일이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특히 95년 프랑스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파업투쟁, 미국에서 보여준 GE·UPS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은 한편으로는 선진자본주의 나라 노동자계급의 전투성이 새롭게 부활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오늘의 시점에서 '파업' 투쟁이 갖는 정치적 성격과 의미를 다시 되새겨 보게 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런 저런 이유 등으로 인해 파업에 대한 관심과 그것의 정치적 의미가 점점 퇴색해 가는 경향 또한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있다. 여기에는 무엇보다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에 따른 정치적 영향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사민주의적 정치 역시 그러한 경향을 부채질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또한 '신좌파'로 통칭되고 있는 정치적 경향 역시 이를 부추기는 하나의 원인이 되고 있다. 지배계급의 공세는 물론 노동자계급 내부의 정치적 미성숙과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전망과 대안이 아직 출현하고 있지 않다는 점도 당연히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자본주의 전체 역사에 걸친 무수한 파업투쟁에도 불구하고 파업투쟁을 통해 자본주의 정치를 극복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이 오늘의 역사적 현실로서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대중의 상태를 본질적으로 개선하는 데에도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점도 드러나고 있다. 이는, 파업이 노동자계급의 정치를 실현하는 데 있어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과는 별개로, 파업이 또한 노동자정치의 구현에 분명한 한계를 아울러 지니고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파업이 갖는 한계는 특히 노동조합이 갖는 한계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노동자계급의 파업은 노동조합에 의해 조직되고 실현되고 있는 까닭에 파업은 노동조합 활동이 지닌 한계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오늘날 '파업' 자체는 노동자 정치를 실현하는 데 요구되는 여러 수단 중의 하나로 기능하고 있다. 그러나 파업전술이 잘못 구사될 경우에 파업은 노동자 정치를 확장하는 데 오히려 장애로까지 작용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업은 노동자투쟁 가운데 여전히 가장 위력적이며, 대중동원을 위한 수단 또는 경로 가운데 가장 일반적인 형태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또한 자본주의 체제 고유의 성격으로부터 노동자대중의 자발성과 능동성을 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며, 나아가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집중과 지도력을 형성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자본주의 체제와 부르주아 정치를 극복할 수 있는 노동자 정치의 맹아가 그 속에 깃들여 있다는 점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글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파업'이 갖는 정치적 성격과 의미를 분석하고 그 연장 위에서 '파업'이 계급투쟁에서 차지하는 정치적 위상과 지위를 자리매김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역사적으로 드러난, 파업에 대한 다양한 정치적 입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오늘의 역사적 현실에서 '파업의 정치'가,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노동자계급의 정치 가운데 단순한 하나에 머물지 않고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파업이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상상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보고(寶庫)라는 점 때문이라는 점을 규명하고자 한다. 이 점이 곧 '파업의 정치'가 여타의 정치와 비교해 분명한 차별성을 갖는 이유임을 밝힐 것이다.



2. 자본주의 사회에서 파업의 가능성과 현실성


자본주의 사회에서 파업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그것이 현실화하기까지에는 일정한 제약과 조건이 따른다. 파업의 이와 같은 두 측면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고려하지 않을 경우 파업에 대해 초역사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잘못된 인식을 범하기가 쉽다.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우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노동자계급의 파업 투쟁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으며 사실상 전투성을 상실했다는 하나의 가정이 한 때 상식처럼 통용되기도 했다. 반대로 한국에서는, 87년 이전에는 파업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87년 이후에는 파업은 언제나 가능하다는 분위기가 상대적으로 우위를 점하기도 했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선진자본주의 노동자계급이 새롭게 파업투쟁의 불길을 되살리고 있는 반면, 87년 이후 노동자대중의 파업투쟁이 거의 일상화되다시피 해 온 한국에서는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오랜 침묵과 함께, 서울지하철 배일도 집행부의 무쟁의 선언 등과 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이는 바로 파업의 가능성과 현실성 사이에 일정한 모순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파업의 필연성과 가능성은 자본관계에 내재하고 있는 모순과, 자본관계를 지속시키려는 자본주의 국가의 계급적 성격이 갖는 모순으로부터 객관적으로 주어진다.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잉여노동에 대한 착취가 이루어지지만, 노동과 자본 사이에 이루어지는 착취관계는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서와는 달리 그 방식과 과정상에서 새로운 양상을 보이고 있다. 자본에 의해 이루어지는 잉여 노동에 대한 착취의 진상은, 자본과 노동이 동등한 계약 당사자로 행사한다는 법적·제도적·이데올로기적·습관적 형식들에 의해 은폐되는데, 바로 이 점이 파업을 합법적 공간으로 나오게 하는 배경을 제공한다. 즉,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일반적으로 헌법과 법률로서 파업이 하나의 권리로서 인정되고 있는데, 이는 한편으로는 노동자계급의 투쟁의 결과라는 측면을 지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착취가 이루어지는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투쟁을 철저히 차단하는 대신 착취의 결과를 둘러싼 투쟁은 일정하게 인정함으로써 자본관계 자체를 기정 사실화하는 효과를 거두게 된다. 자본의 의도와 목적이 어디에 있든 간에, 이로써 노동자의 파업은 비록 착취의 원인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착취의 결과에 대한 투쟁이라는 한계를 갖긴 하지만, 합법적으로 전개될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합법성이 주는 가능성 자체가 곧바로 현실적인 파업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파업의 현실적 가능성은 오히려 자본관계 자체에 내재하고 있는 모순과 자본관계 재생산 방식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자본주의 역사에서 숱하게 나타난 불법 파업이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합법성이 노동자계급의 파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자본관계의 재생산 과정에 내재하는 모순성이 파업을 촉발하고, 그렇게 촉발되어온 노동자계급의 파업투쟁이 역사적으로 파업의 합법성을 획득·강화시켜 온 것이다. 다만 획득·강화된 합법성이 다시 원인이 되어 새로운 파업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조건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자본관계 자체에 내재하고 있는 모순과 자본관계 재생산 방식으로부터 어떻게 파업의 가능성이 도출되는가를 보자.

우선, 알다시피 자본주의 사회는 인격체인 노동자를 생산과정 내에서 비인격체인 자본의 한 부속물로 전락시킨다. 그 결과 노동자의 생존 조건은 자본의 축적 조건에 종속되고, 언제나 자본의 조건이 노동자의 생존 조건에 우선하고 있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노자관계는 처음부터 불평등한 관계이다. 그럼에도 외견상의 노자관계는 개별적·집단적 계약(협약)을 통해 서로의 자유 의사에 따라 맺어진 '대등한' 관계처럼 보여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노동조합을 통해 이루어지는 '단체협약'을 들 수 있다. 이 같이 노자관계가 형식적으로 대등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처럼 나타남으로써 원천적인 불평등 관계는 은폐된다.

그러나 협약 체결은 여타의 군더더기를 제외하면 결국 노자간의 힘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다시 말해 형식적으로 주어진 대등한 관계가 협약 체결 과정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극히 미미할 뿐이다. 협약을 결정하는 실질적인 배후는 노자 사이의 힘 관계이다. 이는 노자 사이에 서로 화해할 수 없는 모순과 대립이 존재한다는 것을 실증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바로 노자 사이의 서로 화해 할 수 없는 모순과 대립이 노동자로 하여금 불가피하게 투쟁에 나서도록 하는 객관적 조건이 되는 것이다.

한편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고유한 성격으로부터 자본의 이윤 실현과 축적 조건은 '위기'(공황)를 반복하여 맞게 된다. 물론 부르주아 경제학은 이를 단순한 경기순환이라고 말하거나, 자본의 특정한 방식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으로 설명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의 생존권 또한 심각한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으며, 여기에 노동자 투쟁의 한 형태인 파업이 일어날 거시적 혹은 잠정적 차원에서의 가능성 역시 객관적으로 주어진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본주의 정치(국가)는 자본관계를 재생산하는 또 하나의 영역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정치가 내용적으로는 특정 계급, 즉 부르주아 계급의 이해를 관철하기 위한 절차와 질서를 형성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면서도, 1인 1표라는 대의제 형식은 부르주아 정치의 계급적 성격을 또한 은폐시키고 있다. 바로 이러한 현실 때문에 노동자계급은 의회로 대표되는 부르주아 제도정치에 맞서, 단순히 1표를 행사하는 투표 행위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조건과 권리를 신장하고자 직접적인 투쟁에 나서게 된다. 법적·제도적 개선을 위한 여타의 대중투쟁이 그것이다.

물론 노동자계급이 이와 같은 투쟁을 의도한 대로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부르주아 정당을 지지하거나 그들과 연합함으로써, 또 때로는 자신이 직접 정당을 건설하여 부르주아 정치에 참여하는 방법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조건과 권리를 신장하고자 함으로써 직접적인 투쟁을 오히려 멀리 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자본주의 정치가 자본관계의 재생산을 가장 우선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자본주의 정치는 주기적으로 그 반동적 성격을 반복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조건과 권리는 심각한 위협을 받거나 위기에 처하게 된다. 바로 이 점이 또한 노동자계급으로 하여금 불가피하게 투쟁에 나서도록 하는 객관적 조건이 된다.

결론적으로 파업은, 자본주의 체제와 부르주아 정치가 지속되는 한, 부르주아 관념론자들의 주장이나 바램처럼 도덕적 판단이나 의식의 전환에 의해 멈출 수 없으며, 또한 개량주의자들의 생각처럼 생산력의 발전과 더불어 부르주아 정치를 개선하는 것에 의해서도 결코 사라질 수 없다. 그렇지만 파업의 가능성이 현실성으로 전화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 파업은 노동과정의 중단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는 곧 자본의 이윤실현과 축적을 위한 가치증식과정의 중단을 가져오므로 지배계급으로서는 결코 파업을 방치하거나 파업이 장기간 지속되는 것을 그냥 두지 않으려고 한다. 즉, 노동과정의 중단은 곧 가치증식과정의 중단이므로 파업은 대자본 투쟁에서 자본에 대한 치명적인 공격수단이 된다. 죽은 노동의 부속물로서 객체화되었던 산 노동이 이제 자신을 지배하는 죽은 노동에 대해 노동의 주체임을 선언한다. '자본은 노동이다.' 그러므로 파업이 행해지면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의 통일이 확인되고, 이윤은 노동 없이 발생할 수 없음이 확인된다. 자본주의적 생산 자체를 중단시키는 총파업은 노동자 계급만이 구사할 수 있는 투쟁전술이다. 그래서 파업이 효과적으로 수행되어 자본의 축적과정이 근본적으로 위협받게 된다. 또한 파업이 발전하게 되면 노동과정이 중단됨으로써 단순히 가치증식과정이 일시적으로 중단되는 것을 넘어 이제껏 은폐되어 있던 가치증식과정의 비밀이 폭로되는 것은 물론 부르주아 정치의 계급적 성격마저 따라서 폭로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 때문에 지배계급은 파업이 발생하면 만사를 제쳐놓고 우선 파업부터 파괴해 놓고 보려고 한다. 이 경우 직접적 폭력의 행사가 파업 파괴의 중요한 수단이 되며, 직접적인 폭력에 더해 법적·제도적·이데올로기적 제약과 공세 역시 파업 파괴의 수단이 된다.

파업의 현실화에서 나타나는 어려움은 지배계급의 탄압과 공세 때문만은 아니다. 노동자 운동 내부 역량의 한계 역시 파업투쟁 역량의 한계로 나타난다. 즉, 노동자 개별의 처지와 조건의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개별화 현상, 개별 기업과 산업의 경제 상황에 의해 규정받는 노동자계급 내부의 부문주의적 태도, 노동조합의 이념과 노선에 따른 정치적 경향으로부터 받는 영향, 노동조합 자체가 갖는 한계, 해당 시기 힘의 역관계에 의해 형성된 정세적 조건, 역사적으로 실패한 파업이 끼치는 패배주의, 파업 기금의 부족과 조직에 따르는 어려움, 파업의 승패에 대한 불확실성 등도 파업의 현실화을 가로막는 장애가 되고 있는 것이다.



3. 파업에 대한 제 입장


자본주의의 역사는 곧 노동자계급의 파업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파업에 대한 제 정치적 입장 역시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정치의 역사적 변화에 맞춰 다양하게 제기되어 왔다. 파업은 자본에 내재적인 모순의 결과로 발생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분석의 대상이 아닌 것처럼 아예 다루어지기조차 않거나, 다루어지더라도 마치 도덕적으로 판단해 없어져야 하는 것, 나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부르주아 이론의 역사적 경향이다. 파업은 현실세계에서 그것의 중요성에 비해 마치 학문적인 객관적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주제인 것처럼 다루어지고 있다. 다루어지는 경우에도 마치 시대가 이미 변해 이제 없어져야 하는 구시대의 유물이나, 시대착오적인 행위로서 취급된다. 이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역사의 종언'이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90년대 중반이래 구미와 자본주의 주변부를 불문하고 파업투쟁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오고 있는 현실은 이와 같은 입장의 비과학성을 입증하고 있다. 심화, 확대되는 자본의 모순적 운동은 지구적 차원에서 자본의 축적위기를 야기하였고, 자본은 자신의 내재적 모순을 노동자-민중에게 전가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하려 하고 있다. 이는 노동조건의 악화와 생활 수준의 저하로 이어졌고, 그 결과 우리의 새 천년은 총파업, 점거, 가두 시위 등 '지구적'인 노동자 민중 투쟁으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노동계의 '무파업 선언'은 노동자의 입을 빌어 표현된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무파업 선언이 나오면 자본은 환호성을 올린다. 우리나라에서도 2000년 벽두에 지하철 노조 배일도 위원장의 무파업 선언이 나오자 언론들은 일제히 대서 특필하면서 마치 노동자 운동에 신기원이 열려 새 천년은 노사분규가 없을 것처럼 띄워 주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러한 모습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노동자 투쟁이 터져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시기에는 언제나 이와 같은 선언이 사람을 바꾸어 가며 나왔었고, 그러한 선언을 무색케 하는 노동자 투쟁이 이어 터져 나왔었다. 무파업 선언에도 불구하고 일단 파업이 터져 나오고 기정 사실화 되면, 물리력을 동원하여 억압하는 한편, 여론을 동원하여 '국민', '시민'의 이름 아래 파업은 집단 이기주의로 매도당한다.

파업 자체가 마치 없어져야 하는 어떤 것으로 간주하는 부르주아지의 비과학적인 관점을 도외시한다고 하더라도 노동운동의 내부에서도 파업에 대한 다양한 입장이 존재하고 있다. 파업에 대한 정치적 입장은 크게 대별하면 대략 3가지 경향으로 나뉠 수 있다.

첫째는 아나키즘적 태도이다. 노동자주의 혹은 생디칼리즘이 이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일련의 개량주의자들이 보여주고 있는 태도이다. 끝으로 혁명적 노동자 운동 진영 혹은 맑스주의 내부의 제 경향을 들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대별은 단순히 파업에 대한 태도만을 둘러싸고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동시에 서로 다른 정치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파업에 대한 태도에서는 부분적으로나 일시적으로 일치하는 경우도 있으며, 그와는 반대로 하나의 정치적 입장 안에서도 파업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태도를 보이는 경우도 존재한다.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주관적으로는 자본주의 및 부르주아 정치를 바라보는 태도에서의 차이, 전략·전술을 배치하거나 구사하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의도를 갖는 경우, 정세분석 및 노동자계급의 상태와 역량에 대한 판단이 다르거나, 특정 파업이 갖는 정세적·정치적·계급적 성격과 의의를 다르게 위치지우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나 그것들 보다 더 중요하게는 자본주의 고유의 성격으로부터 발생하는 정치와 경제의 형식적인 분리 현상이 파업에 대해 서로 다른 태도를 갖게 하는 객관적·근본적 원인이다.

역사적으로 생디칼리스트들은 노동자대중의 집단적이고 직접적인 행동, 특히 파업투쟁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한편으로는 노동자대중의 집단적이고 직접적인 행동을 중시함으로써 부르조아 정치 혹은 개량주의 정치에 의존하지 않는 긍정적 측면을 지닌다. 또한 노동자대중의 직접적인 행동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실천 활동에 역점을 두고 있어 계급투쟁에 대한 개입과 결합력도 높은 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파업투쟁, 더 나아가 총파업투쟁이 갖는 정치적 성격과 의의를 극대화함으로써 그들의 주관적 의도와는 관계없이 반대로 노동자 정치를 협소화시키는 결과를 빚어 왔다. 그것은 이들이 파업투쟁을 계급투쟁의 한 형태, 또는 전술의 하나로 보기보다는 계급투쟁의 최고 형태 또는 유일한 전술로 위치지우고 있는 데에서 나타나는 불가피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결과 그들은 노동자 정치를 종종 산업투쟁 또는 노동조합 운동의 쟁점에 가두는 우를 범해 왔다.

생디칼리즘은 자본주의 체제가 지닌 정치와 경제의 통일성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뒤에서 나오겠지만 개량주의자들과는 달리 정치와 경제를 분리시키거나 그러한 분리를 전제로 한 실천에 대해 극도로 경계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이와 같은 생각은 너무 멀리 나가버려 정치와 경제를 극단적으로 동일시하는 데에까지 이른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들은 공통적으로 부르주아 정치를 분석하여 그에 대처하기보다는 부르주아 정치 자체를 아예 무시하거나 혐오의 대상으로만 상정한다. 그 결과 부르주아 정치에 대해서는 어떤 전술도 구사하려 하지 않는다. 경제가 정치에 미치는 방향만 중시할 뿐 반대로 정치가 경제에 미치는 방향은 무시하고 있다. 따라서 부르주아 정치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언제나 초역사적이다. 이것은 그들이 부르주아 정치가 관념의 산물이 아니라 계급투쟁의 산물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들의 이러한 인식은 그러나 단지 부르주아 정치에 대한 태도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사고를 현실과 분리된 외딴 섬에 가두거나 관념의 나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전투적인 노동자대중에게서 나타나기 쉬운 실천지상주의, 운동주의, 노동자주의적 경향은 생디칼리즘의 정치적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 전투적 노동자들이 종종 사회의 다양한 현상이나 노동조합 쟁점과 거리가 있어 보이는 사회적, 정치적 쟁점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거나 귀기울이지 않으며, 대중조직 외에 노동자 정치조직의 필요성과 그 역할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경우를 보이는 것이 그 예이다. 그들은 모든 문제를 총파업으로 해결하려 하며, 또 총파업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거기에서 유일한 전술로서의 총파업투쟁은 신비화되고 절대화된다. 최근에 총파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세계산업노동자(International Workers of the World)의 경우 일상적 정치투쟁을 배제하고, 총파업을 절대화시키는 경향에서는 생디칼리즘과 일치하고 있다. 하나의 노선으로 통일되어 집단행동을 할 수 있는 거대 산별노조를 반자본 투쟁과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위한 전술 운용의 단위로 생각하고 있으며, 의회 선거정치 중심의 정치투쟁과 맹목적인 무장투쟁을 비판하고 공장 점거를 중심으로 한 총파업만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은 입장의 경우에는 정치투쟁을 선거정치로 동일시하면서 정치투쟁 자체를 부정하는 한편 무장투쟁 역시 계급투쟁의 격화로 인해 계급내전의 형태로 발전하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 고려되지 않고 있다.

노동자 운동 진영 내부의 개량주의적 부분에서는 가능한 한 자본과 노동의 대립이 예각화되는 파업투쟁을 피하려 한다. 이와는 달리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을 매도하지 않고 총파업을 노동자 투쟁의 유력한 전술로 승인하는 경우에도 투쟁의 목표지점을 임금 인상, 노동조건 개선의 수준에 묶어 두려 한다. 정치적 개량주의는 경제주의와 짝을 이룬다. 경제주의에서는 노동자의 투쟁이 경제투쟁에 머무르기를 기도한다면 정치적 개량주의에서는 정치가 투표행위에 머무르도록 유도한다. 양자의 경우 모두에서 노동자 운동은 노동자들의 처지를 조금씩 개량하는 한도 내에서의 경제투쟁을 전개하는 조합이 담당하고, 정치투쟁은 의회/선거 정치를 통해 제도권으로 진출하는 선거정당에서 수행하는 식으로 정치와 경제는 관념적으로 분리된다. 경제투쟁이나 정치투쟁에 있어서 이제 노동자 대중은 동원전략 속에 배치되는 대상이 되며, 노동자 투쟁을 바탕으로 쌓은 정치적인 역량을 바탕으로 제도 정치권으로의 진출을 목표로 하는 정치활동이 전개된다. 어떠한 경우에도 경제투쟁과 관련된 파업은 인정하지만, 파업과 함께 격화되는 노동자 투쟁이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을 극복하려는 방향으로 발전하는 것은 막으려고 한다. 경제적 요구에 제한하여 파업이 벌어지는 경우, 정치와 경제는 기계적으로 분리되고 전 사회적 변화와 관련되지 못한 채, 또는 일정한 한계 속에서 통제되고 조절되는 가운데 노동자 투쟁이 벌어지게 된다는 점이 확인될 수 있다. 이와 같은 활동은 기능(수량)주의적 접근과 합법주의·평화주의·의회주의로 경사될 수밖에 없다.

맑스주의자들은 이와 같은 개량주의적 접근을 전사회적인 관계로서의 자본주의적 계급관계의 혁명적인 지양이라는 관점에서 비판해 왔다. 레닌은 노동자 투쟁을 경제적인 요구에 제한하려는 경제주의자들과의 논쟁과정에 계급투쟁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맑스주의를 이야기할 수 없으며, 무계급 사회로의 전망 속에서 계급투쟁을 전개해야 맑스주의적 운동이라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즉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경제적 투쟁을 전개하는 것은 노동자들의 의식이 계급의식으로 발전하는 학교의 역할을 하지만, 노동자 투쟁이 자신의 즉자적이고 경제적인 이해관계를 옹호하는 데에 머무른다면 자본주의적 계급모순을 지양할 수 있는 맑스주의 운동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에게 있어서는 노동자 투쟁을 개량주의 정치로 수렴하려 한 당시의 사민당 지도부가 비판의 대상이었으며, 자본주의적 모순을 지양할 수 있는 혁명적 노동자 운동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이 경우 대중파업은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효과를 높이려고 머리에서 쥐어짜 낸 교묘한 방법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운동 방식이며, 혁명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현상 형태"로서 이해된다. 즉, 총파업은 개량주의적인 정치가 가능하도록 필요할 때마다 선포되고 시작되다가, 일정 수준에서 '정치적인 효과'만을 노리고 멈춰지도록 통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 또한 대중파업은 혁명적인 정치로 이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레닌이 경제주의적인 개량투쟁을 넘어서는 혁명적 투쟁을 위해 전위정당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로자 룩셈부르크는 개량주의 정치를 넘어서 나아가는 대중파업의 정치적 성격과 대중투쟁의 역동성을 강조한다.

파업과 관련하여 우리는 다시 다음과 같은 입장을 다시금 확인할 필요가 있다.

파업은 자본주의적 생산이 발전하기 시작한 이래 시공을 초월해 항상 존재해 왔다. 파업은 도덕적인 판단에 따라 없어질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파업의 필연성은 자본관계 자체의 내재적 모순 속에 존재하며, 파업의 가능성은 자본관계가 재생산되는 방식 자체에 존재한다. 노동과 자본 사이의 착취관계는 다른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잉여 노동이 착취당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노자간의 관계는 임금을 매개로 하는 계약에 기초하여 형성되고, 노동자와 자본가는 노동력 상품의 판매자와 구매자로서 형식적으로는 동등한 권리를 지닌 평등한 계약 당사자이다. 나아가 임금이 결정되는 과정 역시 단체협약을 통한다는 점에서 '집단적'인 계약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적인 수요 공급의 원칙에 따라 결정되는 것처럼 보이는 임금 수준의 결정조차 실제로는 노자간의 힘 관계에 달려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노동자 투쟁과 그것의 한 형태인 파업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맑스주의에서는 전통적으로 파업전술을 사회혁명 과정에서 유력한 전술의 하나로서 간주해 왔다. 맑스에 따르면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은 단순히 상품이나 잉여가치만이 아니라 자본관계, 즉 자본가와 노동자도 생산한다. 즉, 상품, 잉여가치 등의 경제적 범주의 재생산은 형식적으로는 평등한 계약관계에 의지하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착취관계 속에 묶여져 있는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인적 관계의 재생산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생산과정에서의 자본관계의 재생산은 다시 생산 분배 소비의 전 사회적 과정에서의 자본주의적 계급관계의 재생산을 전제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때 계급관계의 재생산은 단순히 경제적 관계의 재생산을 넘어서 정치, 이데올로기, 사회 문화적인 영역에서도 진행된다. 또한 계급투쟁은 경제적 이해관계, 임금인상 투쟁에서 시작되어 연대, 결사의 발전을 매개로 하여 노동자들이 하나의 계급으로서 자본에 대적함으로써 결국은 계급과 계급간의 투쟁, 즉 정치적 투쟁으로 발전하는 양상을 보인다.

파업은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의 자본에 대한 집단적 행동으로서, 노동자투쟁의 유력한 전술이지만 유일한 전술은 아니다. 맑스에 있어서는 주로 경제투쟁과 관련된 노동자들의 즉자적인 투쟁과 관련하여 파업이 거론되고 있으며, 정치적 저작에서는 주로 의회를 둘러싼 정치투쟁, 꼬뮨의 노동자 직접정치, 계급 내전, 무장 투쟁 등이 분석의 대상이 되고 있다. 후자의 경우에 자본주의적 계급관계의 성립과 재생산 그리고 그것의 지양과 관련된 계급간의 충돌 및 국가 권력이 분석의 초점이 되고 있다.



4. 파업의 정치학


자본주의 사회 이전에 정치는 지배계급 내부의 행위일 따름이었다. 비록 피지배계급의 상태와 조건을 염두에 둔 정치 행위와 정치적 결정이 없지 않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배계급의 자의적인 처분에 의한 것일 뿐, 피지배계급의 공식적이고 공개적인 정치 행위란 존재할 수 없었다. 기껏해야 동양적 개념으로 일정한 '민심'이 형성됨으로써 간접적인 의사 전달의 효과를 갖는 게 고작이었다. 따라서 피지배계급의 정치 행위는 그것이 개인적으로 표출되든,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든 모두 당시의 체제에 대해 반란적 성격을 자연스럽게 띨 수밖에 없었다.

자본주의 사회에 이르러 비로소 피지배계급의 공식적이고 공개적인 정치 행위가 가능해짐으로써, 정치는 이제 지배계급의 일방적이고 절대적인 독점물에서 사회 성원 모두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장이 되었다. 한마디로 정치가 대중화된 것이다. 이는 물론 이론적이고 초역사적인 무엇에 의해서가 아니라 계급투쟁의 결과로서 가능해진 것이다. 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피지배계급의 정치적 행위는 공식적이고 공개적인 만큼 이제 그 이전 피지배계급의 정치적 행위가 가졌던 체제반란적 성격을 점점 잃어 갔다.

부르주아 정치는 사회 성원들로부터 권력을 위임받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권력 또는 정치 행위의 법적·도덕적 정당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부르주아 정치에서 말하는 이른바 절차적(형식적) 민주주의가 그것이다. 또한 부르주아 정치는 종교, 계몽주의 사상, 부르주아 혁명의 대의명분인 자유·평등·박애와 같은 몰계급적 개념으로부터 자양분을 공급받아 부르주아 정치가 마치 보편타당한 정치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데에도 일정하게 성공하고 있다. 또한 부르주아 정치는 선거를 통해 사회 성원 전체가 권력을 새롭게 위임하는 통과의례를 주기적으로 실시함으로써 단순히 새로운 정권을 세우는 것을 넘어 부르주아 정치체제 자체를 재생산하고 있다.

그런데 부르주아 정치가 오늘날 이와 같은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지배계급이 인위적으로, 혹은 스스로 부르주아 정치제도를 그렇게 만들어 내어서가 아니다. 거기에는 결정적인 두 개의 배경이 있다. 하나의 배경은 계급투쟁이다.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부르주아 정치가 모두 동일한 적은 한번도 없다. 역사적, 지리적 차원에서 계급투쟁이 진전하거나 후퇴함에 따라 부르주아 정치는 변화를 겪어 왔다. 이른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혹은 일반민주주의의 수준과 그 적용이 역사적, 지리적으로 다르게 나타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다른 하나의 배경은 보다 객관적인 배경을 이루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 고유의 특징인 정치와 경제의 형식적인 분리 현상이다. 역사이래 정치와 경제가 내용적으로는 물론 형식적으로나마 분리된 적은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에 와서 최초로 형식적인 차원에서의 분리가 나타난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정치와 경제가 외견상 분리된 모양을 취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자본주의 착취양식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도 잉여노동이 착취당한다는 점에서는 다른 사회와 마찬가지이지만, 임금을 매개로 하는 계약에 기초하여 노자간의 관계가 형성되며, 이 때 노동자와 자본가는 노동력 상품의 판매자와 구매자로서 형식적으로는 동등한 계약 당사자로서 출현한다. 여기서는 순전히 경제적 과정만이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여기에 정치가 개입할 여지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정치는 경제적 과정과 분리되어 별개의 방식으로 존재하고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자립적으로 갖춘 형태를 띤다.

그러나 부르주아 정치가 아무리 외견상 경제와 분리되어 독자적 양식으로 움직이는 듯한 형태를 띠고 있다 하더라도, 그 본질은 자본주의 착취양식을 보장하고 재생산하는 하는 데에 있다. 이는 정치와 경제가 분리된 두 개의 독자적 영역으로 존재할 수 없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부르주아 정치 과정이 제도 정치 혹은 의회 정치로 모든 것을 해소하지 못하고 비제도적, 비의회적 정치행위를 끊임없이 불러일으키고, 또 이러한 정치행위들과 병행할 수밖에 것도 정치와 경제가 내용적으로 분리되지 않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형식적으로 분리된 정치와 경제가 내용적으로 통일된다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위기 상황에 극명하게 드러난다.

노동자계급이 행하는 대중파업은 때때로, 비록 그것이 합법적 틀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순간에도, 제도 정치, 의회 정치와 대립되는 양상으로 발전해 왔다. 다만 파업에 참여하고 있는 노동자대중 모두가 그러한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는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오히려 이점을 누구보다도 가장 정확히 포착한 것은 지배계급이다. 따라서 지배계급은 일차적으로는 가능한 한 대중파업 자체가 성립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자신의 정치력을 집중시키고,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대중파업을 제도 정치 또는 의회 정치로 수렴하는 것을 통해 대립을 최소화하거나, 심지어 대중파업의 정치적 성과조차 부르주아 정치를 강화하는 한 방편으로 삼아 왔다. 이 점이 노동자계급 내부에서 대중파업을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게 만드는 원인의 하나가 되고 있으며, 바로 여기에서 대중파업이 갖는 정치적 성격과 의의, 즉 파업의 정치학은 갈림길에 서게 된다.

다시 말해 대중파업의 결과가 어느 계급의 성과로 귀결될지, 그 결과 어느 계급의 정치를 강화하게 될지는 예정되어 있지 않다. 현실에서는 이 둘의 가능성이 모두 존재한다. 이제까지의 역사가 그러했으며, 앞으로의 역사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반복될 가능성은 여전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볼 때 파업이 갖는 정치적 의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친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먼저 파업투쟁은, 이미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대중의 운동 방식이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부딪칠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

다음으로 추상적 차원에서 하나의 파업이 최악의 결과를 낳는 경우에조차 파업 자체가 없음으로써 나타날 수 있는 결과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만한 의의가 있다. 파업은 노동자계급이 대중적으로 겪을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정치 학교이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노동자의 계급의식이 싹트고 성장할 수 있는 기본적인 토대가 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수많은 정치 선전과 선동으로도 이룰 수 없는 정치적 성과를 단 한 번의 대중파업만으로 이룰 수 있다. 선전, 선동이 효과를 발휘하는 경우에도 결국 대중 자신이 직접적으로 경험해야 하는 과정은 여전히 남아 있다.

대중파업이 특히 공장점거투쟁의 양상을 띠면서 전개되는 경우에는 그것의 정치적 성격과 의의가 보다 강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 공장점거투쟁은 노자 사이의 대립과 모순이 어디로부터 발생하고 있는가를 생생하게 드러나게 해주는 매우 유력한 투쟁양식이다. 공장점거투쟁은, 자본주의 사회가 왜 사적 소유를 신성 불가침한 영역으로 삼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해 줄 수 있다. 또한 사적 소유가 자본가들이 생산수단을 배타적으로 장악하기 위한 법적·형식적 수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더 이상 비밀이 될 수 없도록 만든다. 그리고 파업, 공장점거와 함께 진행하는 가두 투쟁은 노동자계급이 투쟁과정에서 여타 계급 대중과 연대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물리력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전체 사회적 관계 속에서 노동자 투쟁을 인식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된다. 나아가 의회 정치에 대한 경험과 선거 참여로는 좀처럼 포착하기 힘든 자본주의 국가의 계급적 성격이 드러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파업과 함께 진행되는 이와 같은 투쟁들은 자본주의 국가가 일상적으로 행하는 그 어떤 화려한 정치적 행위도 결국 자본관계 자체가 재생산되는 조건 아래에서만 의미가 있으며, 그를 위한 정치활동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함께 폭로하는 단서를 제공한다.

대중파업은 노동자계급이 공동투쟁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유력한 수단이자 경로이기도 하다. 비록 노동자계급이 의회 및 선거에 대한 정치방침을 통해 공동행동에 나설 수 있다 해도 그 때의 공동행동이 갖는 정치적 성격과 의의는 대중파업을 축으로 하여 이루는 공동투쟁이 갖는 정치적 성격과 의의와는 다르다. 대중파업을 통한 공동투쟁은 노동자대중을 정치의 주체로 서게 하는 투쟁 형태임에 반해 의회나 선거에 대한 공동행동은, 비록 그로 인해 상당한 정치적 성과를 거둔다 해도, 대부분의 경우 노동자계급을 정치의 객체로 전락시키고, '표나 찍는' 수동적인 상태로 남겨 두는 가능성을 높인다. 사민주의적 프로젝트가 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대안이 될 수 없는가는 역사적·경험적 차원에서 드러난 문제 때문만이 아니라, 이론적 측면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유하게 나타나고 있는 정치와 경제의 분리 현상을 극복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할 수 없다는 데에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파업 역시 그 자체만으로 노동자계급 정치의 전부일 수 없다. 그것이 아무리 격렬하게 일어나는 경우에조차, 심지어 격렬하게 일어날수록 노동자계급의 독자적인 정치적 전망과 결합되지 않는다면 노동자계급의 정치는 더 이상 앞으로 진전하지 못하고 게 걸음 치듯 옆으로 걸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중파업이 노동자계급의 정치를 이루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아닐지라도 절대적인 필요조건이라는 것만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며,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필수불가결한 것이라는 점만은 확실하다.

대중파업은, 질적인 차원에서 그것이 갖는 정치적 한계 외에도, 양적 수준에서도 아직은 완결된 형태가 아닌 미완의 것이다. 대중파업이 내포적 차원에서는 공장점거투쟁 양식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야 하지만, 대중파업의 외연은 가두투쟁을 통해 더욱 확장되지 않으면 안 된다. 대중파업이 가두투쟁으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은 옆으로는 노동자 정치를 타 계급으로까지 확산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위로는 자본주의 국가의 물리력을 극복할 수 있는 무기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대중파업의 외연적 확장이 가두투쟁이라는 물리적 형태로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부르주아 정치에 속해 있는 다양한 정치 공간은 물론 일상적인 생활 공간으로까지 침투해 들어가야 할 것이다. 문제는 그 결과가 부르주아 정치를 유지·강화시키는 것으로 귀결될 것인가,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을 것인가에 달려 있다.



5. 오늘날의 계급투쟁 현실과 파업


지금까지 다룬 일반적인 차원에서의 문제의식과 함께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독자적 정치를 강화하고 나아가 자본주의 체제와 부르주아 정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 글 전체에서 강조하고 있는, 결국 자본주의 고유의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정치와 경제의 분리 메커니즘을 노동자계급이 어떻게 실천적으로 극복해 갈 것인가가 문제된다. 이 문제는 매우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문제라는 이유로 과거의 이야기에 불과한 것처럼 취급당하거나, 현실의 계급투쟁과는 분리된 채 아카데미즘 차원에서만 회자되는 상황도 없지 않다. 그러나 오늘날의 계급투쟁의 현실은 여전히 이 문제에 대한 해명 없이는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한 발짝도 진전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이는 앞으로도 그러할 것인데, 왜냐하면 이 문제는 자본주의가 지속되는 한 항상 제기될 수밖에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정치와 경제의 분리 현상은 노동자계급의 실천에 대해 경제투쟁과 정치투쟁 및 대중파업과 의회(부르주아)정치간에 올바른 관계를 설정할 것을 과제로서 요구한다. 이 문제는 이론적인 차원에서의 해명을 요구하는 동시에 보다 중요하게는 결국 노동자계급의 실천을 통해 극복해야 하는 과제로서 제기된다.

노동자대중의 파업(투쟁)을 경제파업(투쟁)과 정치파업(투쟁)의 영역으로 분리하는 것은 현실을 분석하기 위한 불가피한 측면이 없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임의적인 분리이며, 때로는 자의적인 분리에 불과할 수 있다. 이는 절대적으로 또는 기계적으로 분리될 수 없으며, 상대적인 의미에서만, 구체적인 정세와 관련해서만 그 측면이 달리 서술되거나 강조될 수 있을 뿐이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경제와 정치를 극단적으로 동일시하거나, 반대로 완전히 서로 다른 별개로 취급할 때, 그것이 노동자계급의 정치를 어떻게 왜곡할 수 있는가를 알 수 있다. 경제파업과 정치파업은 하나의 파업 속에 포함되어 있는 각각의 측면이다. 따라서 이 둘을 어느 하나에서 어느 하나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단계 등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예컨대 신자유주의 아래에서 노동자계급이 벌리는 구조조정 반대 파업만 보더라도 그것을 경제파업이냐, 정치파업이냐라는 기준을 놓고 가르는 것은 커다란 실천적 의미를 지닐 수 없다. 특히 신자유주의는 이전의 이른바 케인즈주의에 비해 경제와 정치가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역으로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시장을 국가와 대립시키고, 시장을 국가로부터 떼어 내려고 하면 할수록 그 둘이 분리되어 있지 않는다는 사실은 더욱 선명해 진다. 자본가와의 투쟁은 국가와의 투쟁에 맞서도록 이끌고, 국가와의 투쟁 역시 자본가와의 투쟁을 거치도록 만든다. 단위 사업장의 요구는 노동자계급 전체의 요구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으며, 노동자계급 전체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단위 사업장으로 묶여 있는 구체적인 노동자대중의 투쟁동력을 필요로 한다. 산별노조라 해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한편 대중파업과 의회 정치와의 관계에서도 경제투쟁은 대중파업을 통해서, 정치투쟁은 의회 정치를 매개로 해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의회를 전혀 매개로 하지 않고도 대중파업만으로도 의회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가 하면, 의회에서 결정된 법안이 대중투쟁의 조건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이러한 상호 영향력을 갖는다는 사실 전체가 이 둘을 수평적으로 대등한 관계에 놓이도록 하는 것은 아니다. 그 각각이 조직되고 운동하는 성격과 방식은 질을 달리한다. 어느 전술이 보다 효과적이냐, 또는 어느 전술을 구사할 수 있는 조건과 역량이 준비되어 있느냐가 문제될 수 있지만, 대중파업으로 의회 정치의 공백을 메우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 반대로 의회 정치로 대중투쟁이 갖는 정치적 효과를 거둔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여기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에서 왜 의회 정치가 대중파업에 비해 부차적인지를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계급 내부에서 대중파업을 의회 정치로 수렴하려는 정치노선이 계속적으로 시도되고 있다. 이는 대중파업의 성과가 끊임없이 부르주아 정치에 의해 왜곡되거나 흡수되는 상황이 극복되지 못하고 있는 데에서 비롯되고 있다. 또한 대중파업을 통해 노동자계급이 단결을 강화하고, 그 과정에서 정치적인 성장을 할 수 있는 계기만이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계급투쟁의 한 방식이자 결과라는 점에서 반대로 패배와 좌절을 겪게 되는 계기로도 기능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 체제와 부르주아 정치를 극복하고 자신의 독자적인 정치를 실현하는 과정은, 자본주의 체제와 부르주아 정치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다는 조건을 전제하고 있다. 따라서 관념적으로 현실과 분리하여 초역사적이고, 극좌적인 선전과 선동을 외부에서 주입한다고 해서 그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반대로 의회에 진출하는 것을 통해 부르주아 정치의 한 부분에 참여하거나, 심지어 집권에 이른다고 해도 자본주의 생산관계 자체가 유지되는 한 자본의 정치를 대변하는 역할을 자초하거나 파시즘과 같은 반동 정권에 의해 철퇴를 맞는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역사적 현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을까? 이제야말로 노동자계급의 정치는 대중파업의 정치적 의의와 그 동력을 새롭게 복원하는 것으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미 세계적 차원에서 노동자대중의 직접적인 행동이 일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와 함께 노동자 정치의 명확성을 다시 세우고 여기에 근거하여 일관된 실천을 조직할 수 있는 정치 조직이 건설되어야 한다. 의회 정치나 대중과 유리된 채 자족적인 수준의 정치 활동을 유지하며 미래를 꿈꾸는 수준의 정치로 기울여져서는 상황을 타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노동자대중이 겪는 고통에 동참하여 그로부터 동력을 이끌어 내고, 그 과정에서 단순히 고통을 완화시키는 실천에 그치지 않고 고통을 낳는 원인과 맞서 싸우며, 모순을 척결해 나갈 수 있는 조건이 지속적으로 창출되어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현실의 다양한 정치적 쟁점에 개입해 계급투쟁의 조건을 한 걸음이라도 진전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6. 맺는 말


한 때 '역사의 종언'이 시대의 대세인 듯이 활기를 띠었던 그 순간에도 노동자계급의 운동은 한 번도 중단되지 않았다. 도리어 90년대 중반이래 구미의 선진자본주의 국가와 자본주의 주변부를 불문하고 대중파업은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오고 있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그와 동요하는 얼치기 진보 이론가들이 새 시대를 외치며, 새로운 패러다임을 들고 나왔지만, 이들의 패러다임은 우리나라의 비디오 가수들의 생명력만도 못할 만큼 단명에 그치고, 바로 역사의 힘에 의해 역사의 뒷편으로 사라지고 있다. 심화, 확대되는 자본의 지구적 모순으로 인해 자본은 축적위기에 직면해 있으며, 자본은 자신의 내재적 모순을 노동자 민중에게 전가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하려 하고 있다. 이 때문에 노동조건은 악화되고, 이는 다시 노동자대중의 생활 수준 저하로 이어져 노동자 민중이 투쟁에 나서도록 하는 조건을 만들어 내고 있다.

현실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WTO로 상징되는 새로운 무역질서의 구축에 따라 명실공히 자본의 자유로운 운동의 장애물이 사라진 지금, 자유주의에 의해 세계가 평정되었고 이러한 의미에서 자본의 헤게모니가 지구적으로 관철되고 있는 지금에 이르러 역설적으로 자본주의가 등장한 이래 사상 유례없는 규모로 아메리카,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를 불문하고 온 세계가 총파업의 물결에 휩쓸려 들고 있다. 총파업으로 상징되는 노동자의 공장·가두정치가 어느 때보다도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의 96-97년 총파업 투쟁에서, 1997년의 독일과 1999년의 멕시코에서는 신자유주의적인 대학정책에 반발한 학생들의 파업과 대학 점거 투쟁, 1999년의 시애틀에서 WTO에 반대하는 가두시위에 이르기까지 파업, 공장·대학 점거와 가두 시위 등의 저항 정치는 자본운동이 '지구적'으로 자신의 운동영역을 확장하는 만큼 첨예화되어 가는 모순들의 결과로서 개량주의 정치를 휠씬 뛰어넘는 새로운 역동성을 보이면서 출현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현실은 자본·제국주의 관계의 지양이라는 관점에서 노동자 대중파업, 즉 파업의 정치학을 다시금 새롭게 분석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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