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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혁명을 꿈꾸는 목사가 있다. 오산역 뒤편 허름한 교회에서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노동자 국제주의와 민중이 주체화되는 길을 실천으로 살아가는 장창원 목사를 만났다.
대전에서 태어나 자란 장창원은 어릴 적부터 운동을 잘해서 배구, 육상, 축구선수 등을 하면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런 특기를 살려 78년 고려대학교 체육교육학과에 입학까지 한다. 그러나 공고 시절부터 인문고 학생들과의 차이 속에 사회적 차별을 느끼기 시작한 그에 박정희 정권 말기의 대학은 사회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계기가 됐다.
“그 당시는 박정희 시대여서 시위가 자유롭지 않을 땐데... 1학년짜리가 뭣도 모르고 시위에 끝물로 참여했다가 많이 다치고 병원 신세를 지며 격리되기 시작하고 다른 세상에 살게 되어 졌어요. 독재타도 학내 시위가 처음으로 크게 일어났을 때였어요. 그 전에는 소소하게 일어나서 시위다운 시위가 없었는데... 작게 소리만 쳐도 학내에 산재해있는 사복경찰들에게 잡혀가는 상황이었는데... 화염병이 아닌 빈병을 던지는 시위에 참여하면서 많이 다치고 나니까 삶이 거기에 집중됐다고나 할까...
그 다음부터는 관심이 데모에 대한, 사회와 군사독재에 대한 생각만 많이 하다보니까... 지금처럼 시위를 한다거나 그런 거보다는 저항한다는 의미에서 유별나게 살았죠. 예를 들면, 혼자 머리 깎고 거지형색의 옛날 옷을 걸치고 다닌다거나... 그 당시에는 알코올 중독이 될 만큼 술을 먹었죠. 매일 먹었으니까...”
장창원이 소속된 체육교육과는 보통 학내문제를 폭력으로 해결할 경우 동원되는 구사대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또 당시 대학은 학생운동이 드러내놓고 활발하게 활동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학과의 부적응과 사회에 대한 분노를 개인의 일탈행위로 저항해갔다. 그렇게 2년 가까운 생활을 보내던 79년 10월 박정희가 죽었다.
“막상 박정희 죽고 나서 한 두 달 후에는 나도 떨어진 거예요. 그 후에는 의식이 없어서 대전 집에 돌아오고, 그 다음에는 3개월 정도 병원생활 하는 거고... 알코올중독, 우울증, 환시, 환청 등 병명이 십여 가지였어요. 굉장히 심각했었죠. 조금 의식이 회복됐을 때 쯤 5월 광주... 집에서 뉴스를 듣기도 하고, 다른 데서 들려오는 북한방송을 듣기도 하고... 그때까지 병원생활이라는 것이 굉장히 힘들었었어요. 마약 끊는 것만큼 힘들었으니까...”
힘겨운 병원생활 이후 군 입대를 시도했지만 군에서 마저 병력 등의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렇게 3년간 힘겨운 시기를 보내면서 정신적 치료를 위해 찾기 시작한 것이 동네 교회였고, 그것이 장창원과 교회와의 인연의 시작이었다.
83년 다시 복학을 할 즈음 학생회 부활움직임이 매우 활발해졌고, 장창원은 복학생으로서는 유일하게 학생회 체육활동부장 역할로 학생운동에 참여한다. 체육활동부장이라는 것도 체육학과의 특성을 살려 물리적 충돌이 있을 때 대처하기 위한 학생회의 보위직책이었다. 그렇게 학생회 활동 2년을 하면서 조직적 의식을 쌓아가기 시작한다.
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운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던 부천으로 가서 YMCA활동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에 적응하지 못해 얼마 후 지역에서 새로운 활동을 하기 위해 대전으로 내려와 기독청년회 활동을 하게 된다.
그 이후 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대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만 대선을 경과하면서 운동진영의 분열로 대선에 패배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대선 이후 ‘다시 나를 돌아보자’는 생각을 갖기 시작할 때 쯤 반려자가 된 오영이 목사의 영향으로 88년 결혼과 함께 신학대 입학을 결심하게 된다.
“배우자가 선택한 길속에 나를 찾으려고 했어요. ‘배우자가 선택한 길’이라는 것과 ‘내가 운동하는 것이 함께하며 조화롭게 살겠다’는 거예요. ‘예수를 따르는 목사도 운동인데, 바른 목사가 된다면 당신 가는 길과 결코 다른 길이 아니다’ 그렇게 서로의 초점을 맞추고...
나도 그때까지는 민족 또는 사회운동에 대한 중심을 잡았다면... 민주화운동 이후에 벌어지는 상황을 보고... ‘다 털고 다시 시작하자’는 의미는 세계사적인 눈으로 세상을 다시 보고, 앞으로의 나의 진로를 종교나 교육 같은 근본적인 사회운동에 대한 참여를 통해서 그쪽을 바꿔내야 한다고 생각했죠.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부분은 현상일 뿐이고 뿌리 깊은 곳의 변화를 해야 된다는 마음으로 신학대를 갔죠.”
신학대를 다니면서 나름대로 사회 참여적 활동을 하기는 했지만 또 다른 힘겨움이 있었다. 그런 과정에서 1년 휴학을 하기도 하는 등 쉽지 만은 않았다.
“암흑시대의 수도원처럼 한국의 신학교라는 것은 사회참여하기가 쉽지 않은 구조예요. 이미 나는 대학교를 갈 때부터 기본의식은 ‘나라는 존재는 공적 존재다’라는 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신학교에 가서도 그런 걸 했어요. 그런 사람들을 만나려는 모임도 하고, 학내투쟁도 있고, 사회투쟁에도 접목을 해서 참여를 하고 했어요. 하긴 했는데...
88년부터 93년까지의 과정을 사회운동과 함께 한다고 했지만 지금 와서 돌아보니까 수도원에 갇혀 있는 것이라는 걸 느꼈어요.”
신학대에서 휴학기간을 포함해 3년을 보내고, 목회(연수)과정 1년을 보내고, 다시 민중교회 훈련과정으로 2년을 보낸다. 민중교회 훈련과정은 공장과 건설현장에서 민중의 삶을 체험하고, 전국의 민중교회를 순회하고, 빈민, 민중교회에서 현장 전도사 생활을 하는 과정이었다.
그런 6년의 과정을 거쳐 94년부터 목사로서 처음 활동을 시작한 곳이 영등포산업선교회였다.
“영등포산업선교회는 60년대부터 민주적인 노동조합운동을 만들자고 협동조합 등 여러 가지 조직을 하다보니까 전두환 시절에 모진 탄압을 받아요. 그때 노동교회가 산업선교회 중심으로 가다가 전두환이가 너무 심하게 탄압을 해서 ‘산업선교회는 빨갱이다’하면서 9시 뉴스에도 내보내고 잡혀가지도 하니까 다시 이름을 바꾼 지역산업선교회의 활동이 민중교회운동이에요. 민중교회운동을 했지만 본부 같은 역할은 영등포산업선교회가 했죠.
90년대 초반까지는 노동자들이 모임의 공간이 없으니까 산업선교회를 많이 활용했죠. 그 이후 전노협이 만들어지고 모임이 사회적으로 확대되니까 밖으로 많이 나갔어요. 그 빈자리를 노동교육, 노동자학교, 산재, 현장에서 다뤄지지 못하는 해고자문제 등을 주로 했죠.”
당시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진행한 사업이 노동교육사업과 협동조합사업이었다.
“그때 중점으로 잡았던 것은 노동교육을 중점으로 해서 처음 노동운동을 접하는 사람들이나 간부들을 대상으로 해서 전문적인 노동자대학이라는 형태로 했어요. 노동자 정치참여, 노동자 경영참가, 노동자의 역사, 노동자의 철학, 노동조합 조직, 선전, 교섭실무, 교육방법 등. 활동가 간부교육이라도 하더라도 노동조합이 막 생기면서 간부 중에 교육이 필요한 사람들을 교육하는 거죠. 대기업 노동조합에서도 그때 교육받은 사람들이 지금 지도부에 많이 가 있어요. 그런 교육은 지금도 필요한 거예요. 자기가 조합간부가 됐지만 내용 없이 된 경우도 많거든요. 이런 분들 교육시키면 금방 큰다고요.
1년 1~2기 해가지고, 5년 동안 10기정도 했는데……. 지금 다방면에 지도자가 되어있어요.
마지막에는 IMF되면서 특별과정으로 실업노동자조직 해가지고 비정규직 교육도 많이 했거든요. 그때 비정규직 교육과정 받았던 학생들이 전국에 내려가서 10년 정도 활동했더라고요.”
산업선교회는 종교라는 형태로 노동자들에 대한 지원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갈등이 생긴다.
“산업선교회는 조직을 굉장히 중시해서 초기에 조직을 중시했던 목사는 건물이 필요 없다고 ‘조직하는데 건물이 꼭 있어야 되냐’ ‘건물이 있으면 한계가생길수 있다’ 그랬어요. 그런데 그 다음 세대의 한 목사는 ‘그래도 건물이 있어야 된다’ 그랬어요. 그 양면성이 있는 거예요.
건물을 만들어 놨을 때 건물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노동자들인데... 건물 만든 사람의 입장에서는 산업선교회 내부에 교회도 있고 노동자들의 다양한 조직도 공존하는 속에서 갈등 같은 건 있는 거죠. 그런 갈등에 대해 초기의 목사는 조합하고 교회하고 갈등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해서 건물이 없길 바란 거고...
원풍모방 같은 경우가 회사에서 쫓겨나서 1년 정도 산업선교회로 들어와 살거든요. 그때 원풍노동조합 지도자와 교회 지도자가 부딪히는 거죠. 교회 책임 맡은 목사의 입장에서는 ‘1년 동안 사는데 교회활동도 좀 책임져야 되는 거 아니냐’ 그러면 원풍 입장에서는 ‘우리가 조합으로서 와 있는 거지 교회 와 있는 게 아니다’ 그런 갈등이 있을 수 있고...
내가 겪은 경우는, 상담을 하다보면 교회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많이 있어요. 사찰 집사라든가, 교회 사무원이라든가 이런 사람들 상담 받아보면 노동문제거든요.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노동법으로 가면 승소해서 다 받는단 말이에요. 일부 교회에 일하는 사람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어요. 그리고 나에게 왔어요. 나는 노동조합 인정해서 함께 활동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있는 목사들 중에는 ‘교회가 노동조합이라니 무슨 얘기냐’ 하면서 갈등이 있죠.
그것 말고도 다양한 형태의 교회로서의 흐름과 노동자의 흐름이 갈등이 있을 수는 있죠.
우리 오산노동문화센터가 처음에 만들어질 때 일을 쉽게 하자면 교회의 하나 기구로서 센터가 되면 운영하기는 쉽죠. 헌금한 걸로 돈을 지원받을 수도 있고... 그렇지만 그렇게 하다보면 그렇게 부딪힐 수 있으니까... 교회 조직 속에서 센터를 만든 게 아니고 지역사회의 노동조합과 단체와 대표자들로 운영위원회를 구성해서 만들었어요. 누구든 올 수 있는 공간이 되고... 교회라고 해서 교회성을 너무 강조를 해서 다른 종교를 갖거나 그런 사람들이 오는데 부담이 되지 않도록... 이주노동자 중에는 무슬림이나 다른 종교들이 많거든요. 이런 사람들이 자유롭게 올 수 있는 틀을 만들어 놓은 거죠.”
노조와의 갈등만이 아니라 민주노조가 확산돼 민주노총이 만들어지면서 산업선교회 역할에 대한 내부 논쟁이 벌어지면서 홍역을 치르게 된다.
“크게 흐름을 보면 10년 단위로 흐름이 바뀌어요. 작게 보면 87년 이후에 민주노조들이 만들어지고 나니까 교회가 비게 되고, 산업선교회는 비어 있는 공간을 교육 사업을 중심으로 하고, IMF 때 실업자나 노숙자문제 같은 사회바닥에 있는 문제에 접근을 하면서 노동조합활동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형태가 돼요. 그런 속에는 나 같은 경우는 전해투 지원대책위 활동가들 하고 같이 활동을 하다가 지금은 이주노동조합 같이 노동조합 중 비정규직 노동운동의 가장 어렵게 활동하는 곳에 초점이 가 있는 거죠.
큰 흐름에서는 교회가 내 주장처럼 안 되고, 실업자지원이나 노숙자지원이나 이런 복지사업으로 가다보니까 거기서 나는 떨어지게 된 거죠. 노동교회나 산업선교회는 교회가 시작했지만 노동자에 의해 채워졌고, 역사 자체가 노동자의 교회인건데 그것을 교인의 교회인거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거죠. 그 갈등이 98-99년에 있었어요.
지금도 그런 건물이 있다면 다양한 형태로 쓸 수 있어요. 최근에도 전해투 해고자들 만나니까 ‘목사님, 그런 곳이 우리가 필요합니다. ‘지금 오갈 데 없이 됐습니다’ 이런 해고자들이 있단 말이에요. 그런 사람들이 쓸 수 있는 공간이 돼야 된다는 거죠.
세계교회도 산업선교라는 틀은 없어지고 ‘경제정의 실천위원회’ 이런 식으로 명칭과 기구가 바뀌었어요. 유일하게 아직도 만나 있는 산업선교회는 한국 밖에 없어요. 세계교회로부터 산업선교분야에서 가장 큰 지원을 받은 곳이 한국이에요. 그때가 70~80년대 어려울 때니까... 받은 게 있기 때문에 그 만큼 일도 많이 하면서 지금까지 있는 거죠. 있는 사람들이 지금은 이름을 조금 달리하지만 아시아 속의 노동운동과 아시아 속의 산업선교를 지원해야 되는 과제를 내부적으로 갖고 있는 거죠.”
산업선교회 내부에서 갈등이 일단락될 즈음 장창원은 7년간의 영등포산업선교회 활동을 정리하고 아프리카 르완다로의 활동을 결심하게 된다.
“세계교회에서 ‘산업선교나 민중교회운동은 한국이 모범적인 경우다’라고 평가를 했어요. 아프리카나 동남아 쪽에 전쟁이 일어난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가 복구중이면 그 나라에 이런 사례를 갖고 가서 소개도 하고 적용을 한다면 어떨 거냐... 그걸 97년부터 세계교회가 원했어요. 한국의 산업선교회 민중교회가 아프리카에 가서 자기 활동을 소개하고, 잘 할 수 있으면 ‘저희들이 70년데 산업선교회 센터를 지었듯이 아프리카에 하나 짖는 게 어떠냐’ 그런 결의를 한 거예요. 그래서 7~8개국에서 재정 지원을 해서 아프리카에 평화센터를 하나 지어라 그랬는데, 거기 갈 사람이 없는 거예요. 잘 못 하면 죽을 수도 있고... 또 당장 생활이 어렵고...
97년부터 그런 사람을 요청받았는데... 민중교회 산업선교회 틀 속에서 내가 볼 때는 거기 갈 만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불어를 전공한 사람도 있고, 아니면 이주노동자사업을 잘 하면서 외국인에 대한 접근을 잘 하는 사람도 있고... 이런 사람들이 안 가니까...
나는 조직적 갈등이 있으면서 많이 싸웠거든요. 그러면서 노동자센터를 정리하지 않는다든가, 내가 활동하던 틀을 유지하고 존속한다는 약속을 받는 등 내가 제기한 것은 많이 받아들여졌어요. 그 대신 그런 조직적인 문제가 내분으로 비쳐지는 것에 대해 내가 정리해야 되는 입장에 있는 거예요. 그런 것을 책임지는 면으로 아프리카에 대한 세계교회의 요구를 내가 받아들인 거죠.
거긴 10년 정도 해야 되는 일인데... 1년은 조사 정도잖아요. 10년 정도 하려면 거기서 원해야 되잖아요. 거기서 원하는 것은 평화센터나 영등포산업선교회 같은 그런 것을 원하지 않고 ‘신학대학교를 해 달라’ 그러는 거예요. 르완다에 기독교대학 터를 마련해 놓았으니까 세계교회가 기독교 대학을 만들어 주고, 그 안에다 평화센터를 해 달라. 이런 거예요. 그래서 나는 돌아왔고, 지금 그 사업은 10년 세계교회의 사업으로 계속되고 있어요.”
르완다에서 1년 생활을 마치고 부인인 오영이 목사와 가족이 98년부터 부임하여 있던 오산 다솜교회로 와서 본격적인 지역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 2002년이다.
“오산에 왔을 때 처음 생각은 ‘내가 영등포에 있었을 때 못했던 거, 내가 하고 싶었지만 그 틀 속에서 못했던 거’를 해보고 싶었어요. 그게 뭐냐. 교회 속의 제도적인 틀을 갖고 활동하지 말고 자유롭게 사회 속에서 활동 틀을 갖자. 그게 오산노동문화센터를 만드는데도 교회 위원회 속의 틀이 아니라 지역사람들이 하는 틀을 만든 거죠. 그게 2002년에 와서 1년 동안 지역사람들 만나면서 준비를 해서 2003년에 센터를 만들었어요.
지역에 와서 지역 노동운동이나 지역운동 하는 분들 얘기를 들어보니까 ‘제일 시급한 것이 이주노동자들 많이 왔다 갔다 하는데 전혀 만남의 자리나 그런 게 없으니까 힘들다. 목사님이 아프리카까지 갔다 왔으니까 그런 걸 하면 좋겠다’고 꾄 거죠. 나는 ‘노동자는 똑같은 노동자다. 노동자는 하나라는 마음을 가지면 못할 게 없다’라고 생각했어요. 원래 그 당시나 지금이나 초점은 비정규직사업인데... 이주노동자사업이나 비정규직사업이나 같은 거니까 일차적으로 이주노동자사업을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노동문화센터 속에 이주노동자센터를 만든 거죠.
국제연대활동은 영등포 있을 때부터 계속 연계돼 있었으니까... 아프리카 가서도 계속 연계돼 있었으니까... 98년부터 영등포에 있을 때부터 노동네트워크 활동을 계속 했었으니까... 그런 것이 여기 와서도 이주노동자 활동과 계속 연계되니까...
다른 사람들이 이주노동자 활동을 하는 것이랑 틀린 것이 네팔이라든가 이미 알고 있는 나라에서 계속 연락을 하고 있었으니까 거기 사람들이 ‘여기 오면 거기 가봐라’ 이렇게 연결이 되는 거죠. 이미 80년대 초반부터 연결된 조직이라는 거죠. 그걸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는 교회 쪽으로 정리를 했고, 나는 여기 와서 노동 쪽에서 접목하고... 영등포는 내가 나올 때 실업이나 노숙자운동으로 갔으니까 노동 쪽에 대한 것은 좀 등한시 하게 되고, 나는 그쪽에는 좀 등한시 하면서 노동 쪽에 집중하니까 그 조직은 다시 여기로 연결이 되는 거죠.
아시아-태평양노동자연대(APWSL) 흐름도 조금 위기가 있어요. 2002년까지는 유럽의 노동운동 쪽에서 아시아를 위한 기금으로 운영이 됐어요. 그게 2002년에 끊어 졌어요. 돈이 없으니까 활동을 중지해야 되는 상황이 되는 거예요. 그걸 교회 쪽에서도 많이 봤어요. 교회 쪽에서도 94년 한국이 OECD국가 되니까 한국은 지원대상국에서 지원해야 되는 국가로 바뀌었거든요. 그러니까 기독교 쪽의 조직들도 돈이 오다 안 오니까 다 없어지고 그러는 거예요. 노동도 마찬가지예요. 돈이 오다가 안 오니까 해체해야 하는 위기가 온 거죠.
그런 것을 나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고... ‘돈이 없더라도 할 수 있는 조직이 돼야 된다’ 그런 주장을 한 것이 APWSL 공동대표를 맡게 된 계기가 되고... 돈 없어도 재건을 해야 되니까... 돈이 없는 게 아니라 모을 줄을 모른다는 거죠. 우리가 80만 조합원이고 1500만 노동자들인데 조금씩만 내면 되는데...”
그렇게 시작한 이주노동자 활동에서도 장창원은 이주노동자 스스로 주체화되는 활동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주노동자운동 속에서 나타나는 다른 형태의 흐름에 대해서도 배격하지 않고 함께 할 수 있는 것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이주노동자운동에는 3~4가지 흐름이 있어요. 초기에 이주노동자가 오기 시작한 88년부터 외국인이 와서 불쌍하니까 무조건 도와주는 것으로 시작한 것이 기독교였고, 그러나보니까 그것을 좀 더 조직적으로 하자고 해서 만들어낸 것이 외노협(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이고, 외노협을 하다보니까 문제점이 나타난 것이 ‘너무 상층부 중심이고 교회중심이고 지역중심이 아니다’해서 만들어진 것이 이주인권연대, 그 다음에 만들어진 게 평등노조 속에서의 이주노조예요. 긍정적으로 보아야 할 것은 어쨌든 그런 다양한 모임을 통해서 이주노동자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는 거예요. 내가 이주노동조합 전국조직화를 하면서 얘기를 하는 것은 ‘그렇게 됐을 때 이주노동자들이 연결이 되면 조합으로 네트워크가 될 수 있다’는 거예요.
그걸 조합으로 네크워크가 되기 전까지는 서로가 개별화돼 있어요. 내가 외노협이나 이주인권연대나 어디를 가든지 ‘우리가 조합을 필요로 하고, 당신들 모임이 있다면 이 모임이 연결이 돼서 조합으로 돼야 되는 거 아니냐. 그러면 반대하는 사람 없어요. 현실적으로 지금 현재는 그게 안 되고 있으니까 개별적인 활동을 하는 거라는 의미가 있어요.
우리 같은 경우는 여기 필리핀이나 네팔 친구들이 90년대 초반부터 나라별모임이 조직화됐거든요. 그건 그 나라 자체가 워낙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오다보니까 나라별 조직을 갖추고 나라에서도 지원하고 있고 그런 거거든요. 이런 것들이 어떻게 자주적인 노동조합과 같이 할 거냐. 그건 당면한 문제죠.”
노동운동이나 사회운동의 기반이 척박한 오산에서 다솜교회는 지역연대의 구심으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 오영이 장창원 목사 이전에 1991년부터 민중교회 우예현 목사가 있을 때부터 다솜교회는 지역현안과 사회운동에 대한 교류의 장으로서 역할을 했지만,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의 갈등이 나타나기도 하는 등 지역연대활동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런 속에서도 다솜교회는 사회의 낮은 곳에서 연대활동을 만들어내기 위한 역할을 끝임 없이 이어오고 있다.
“오산에서 와서 가장 큰 투쟁은 2005년 수청동 철거민 싸움이에요. 서울에서 내려온 개발논리가 여기 오산까지 온 거예요. 이런 것에 맞선 하나의 대표적인 싸움이 된 게 수청동 철거민 싸움이 됐고, 그게 전국적으로 상당히 큰 사건이었죠. 이전에 이 지역에서 삼성이 폐물질을 방류하면서 대책모임을 하고, 그러다가 또 이순자 아버지가 민족유물이 있는 독산성 세마대에 골프장을 만든다고 해서 거기에 반대하는 운동을 지역이 같이 하면서 지역운동의 구심점을 환경모임이라는 것으로 잡기도 하고... 가난한 이들의 대안경제공동체로 협동조합운동을 시도하기도 했지요.
오산지역은 민주노조 사업장은 거의 없었어요. 공무원노조나 전교조의 흐름이 지역운동에서는 주요한 역할을 해요. 불모지 같은 지역에서는 전교조나 공무원노조의 해고자가 있어서 전국판을 깔기도 하고... 여기 올 때는 공무원노조가 만들어지는 과정이어서 거기에 지역대책위가 만들어지고 하고... 다솜교회가 지역 운동의 거점이 되었지요.
그런 흐름이 이어져서 수청동 철거민들이 탄압을 받으니까 민주단체연석회의나 지역모임에 참여를 해서 자기들 상황을 충분히 설명했고 이후 투쟁도 지역모임에서 같이 가야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철탑을 쌓는 과정에서 첫날 싸움이 붙었는데 철거용역깡패가 죽으니까... 그 바람에 두 달 동안 경찰들이 포위하고, 그걸 지역이 엄호하면서 같이 한 거죠. 경기도 지역뿐 아니라 서울에서 단체들이 같이 결합해서 했어요. 결국 테러집단 잡듯이 잡아가지고 다 감옥살이 하고... 내부적으로는 그동안 잘 모이던 단체 중에서 그 싸움에 참여했던 단체와 떨어진 단체도 있어서 다시 잘 추슬러서 하려고 하는 과정에 있어요.
그런 주변부 같은 싸움에 노동자들도 같이 해야 되고... 민주노총 경기본부나 지역노동자들도 같이 했으니까... 대대적인 싸움이 안됐다 해도 그것이 지역연대의 상징적인 모범이 되고, 센터가 그동안 연대하면서 가졌던 틀이 지역연대의 토대가 된 거죠.”
다솜교회가 지역에서 벌이는 사업들은 의외로 많았다. 그런 사업들을 통해서 남미와 같은 지역공동체운동을 활성화 시켜 보냈다는 것이 장창원의 목표다.
“열악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공부방도 하고, 주민도서실과 문화사업도 하고, 밥 못 먹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밥집도 하고... 여기는 알코올중독자나 거지들도 많이 오거든요. 알코올중독자 거지들 오면 다 자유롭게 먹고 자고하고... 그러다가 내가 와서 노동문화센터를 만들고, 그 속에서 이주노동자센터가 첫 번째 사업으로 4~5년 하면서 자리가 좀 잡혔고, 지금 시도하는 것이 오산지역의 민주적인 여성모임을 준비하고 있고, 공부방을 통해서 자라난 중·고등학교 아이들을 위한 대안교육모임을 계획하고 있고, 아이들과 농장에서 농사도 지으려하고, 이주노동자방송국을 하고 있고, 지역 FM 라디오도 준비 중이예요.
최근에 시작한 것이 사회적 일자리 속에서 재활용센터인 녹색가게(다솜환경)를 2006년부터 시작했어요. 그것은 사회기업으로 지역의 바닥에 있는 사람들을 조직하고 경제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는 거죠. 협동생산, 공동분배, 사회공헌이 하나의 큰 목적이고, 새로운 공동체운동으로 공장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처음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왔어요. 처음에는 적응이 쉽지 않았고... 젊은 사람들이 오길 바랐는데, 젊은 사람들은 왔다가 적응이 안 되고... 지금은 조금 나이 먹은 사람들이 중심인데, 그래도 2년 하니까 자체적으로 회의도 하고 그래요. 지금까지는 생산력보다는 팀워크를 맞추는데 주력을 많이 했고, 올해는 최소한 자립할 수 있는 생산을 해야죠. 처음에는 공동체를 지향하는 사람도 좀 있었는데 다 떨어지고, 지금은 먹고 살기 위한 방편 속에서 일을 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이 오는 거죠.”
오산에서 4~5년 동안 이주노동자 사업을 벌인 결과 ‘자리가 잡혔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 의미는 이주노동자 스스로가 이주센터를 자신들의 공간으로 생각하며 주체화되고 있다는 것이라고 했다.
“이 지역에 네팔, 인도네시아, 필리핀,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이런 모임들이 만들어지면서 노동조합 만들어지는 것도 같이 했죠. 지역에서 많이 잡혀가기도 하고...
이주센터 운영위원회에 나라별 대표들이 같이 참여를 해서 회의를 해요. 작년에 평가하기를 ‘2008년에는 이주센터의 주체를 이주노동자가 할 수 있도록 한다’라고 할 정도로 가 있어요.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일정 정도 자리가 잡혔다고 보는 거죠. 4~5년 활동 속에서 후원회원 60~70명 됐다면, 올해는 여기 드나드는 이주노동자들도 회원으로서 자주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죠. 그런 걸 통해서 주인의식을 갖게 하고... ‘거기는 우리 도와주는 곳이구나’ 하는 개념을 벋어날 때라는 거죠.”
어려운 사람들을 대상으로 교회를 운영하고, 다양한 지역사업들을 하다보면 재정적 어려움이 심각한 문제의 하나로 닥쳐온다. 그에 대해서도 장창원은 스스로가 주인이 되어야 재정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교회수입으로는 목사 한 명에 대한 월급도 못주는 상황이거든요. 노동문화센터가 만들어질 때는 재정이 힘들어서 실무자가 우유배달도 해보고 그랬어요. 그거 하다보면 일을 제대로 못하거든요. 그때 사회적 일자리를 받게 된 계기도 그런 점이 작용하기도 했어요. 경제적인 어려움은 아직도 많아요.
경제적 어려움은 여기 드나드는 사람들이 주인의식을 갖게 되면 된다고 봐요. 그동안에는 그걸 많이 시도를 안했어요. 이주노동자뿐만 아니라 모든 드나드는 사람들이...
양면성이 있죠. 자유롭게 드나들었는데 어느 날부터 회원을 요구하고 회비를 요구했다 그러면 부작용도 있을 수 있겠죠. 그것을 잘 조절해야죠.
교회 같으면 십일조를 내잖아요. 그건 사회운동에서 배워야 할 부분도 있는 거거든. 자기가 운동한다고 드나들면서 자기 삶은 10분의 1정도 때어낼 수 있죠. 원래 교회는 11명이 모이면, 10명이 10분의 1씩 내서 한 명을 사무 일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거거든요. 30명만 모이면 웬만한 일을 다 하는 거예요.
다양한 형태의 회원구조나 후원구조가 필요하다는 거죠. 그렇지 않으면 독립할 수 없죠.”
50대에 접어든 장창원은 아직도 민중 스스로 주체가 돼서 바닥에서 일어나는 혁명운동을 꿈꾸고 있다.
“지역의 센터로서 다양한 문제에 대한 접근하는 민중들의 센터역할을 하면 좋겠죠. 그런 모델들을 민중교회나 지역 센터들이랑 연결해서 같이 전체적으로 바닥에서 일어나야 되는 운동이 돼야죠. 바닥이 기초가 되는 혁명을 꿈꿔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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