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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농의 샘, 보는 이의 마음까지 경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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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때리지 마세요!" 김해성·외국인 노동자의 집/ 중국동포의 집 소장 1. 반한감정(反韓感情): 위험수위에 도달한 분노 일전 동아일보에 보도된 내용이다. 필리핀을 방문하던 한국인 사업가 두 사람이 필리핀 마닐라 공항의 트랩을 내려서는 순간, 같은 비행기를 타고 와서 내리는 필리핀 청년 여섯명에게 둘러 싸여 몰매를 맞았다. 즉시 공항경찰대에 신고를 했고 출동한 경찰들에게 연행된 청년들은 한국에서의 취업기간 중에 당한 학대와 모욕을 이야기하자 이에 흥분한 경찰들이 합세하여 재차 폭행을 했다고 한다. 필리핀 주재 한국대사관에 신고하여 문제를 제기했으나 결국 강제 출국을 당하고 말았다.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당한 봉변이다. 한국인이 "WE ARE NEPALI" 필자는 취업도중 여러 가지 재해로 사망한 외국인 노동자들의 유해나 보상금 등을 전달하고자 다른 나라를 찾게 되는 일이 매우 잦다. 그런데 네팔을 방문했을 때 우리 일행이 길을 걸어가는데 자전거를 타고 지나쳐 가던 네팔의 청년 두명이 힐끗 얼굴을 살피더니 저만큼 멈추어 섰다. 잠시 후 우리가 다가서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영어로 "한국인이냐? 일본인이냐?"를 물어 왔다. 무의식적으로 "한국인"이라고 답하자 그들은 대뜸 "우리가 한국말을 할 줄 아는데 한번 들어보겠느냐?"는 것이었다. 한국에 와서 취업했다가 돌아간 이들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외국여행에서 외국인이 한국말로 한국말을 하겠다고 하는데 반갑기도 하면서 궁금하기도 하고 호기심이 일어나 "그럼 한국말을 해 보라"고 했더니, 얼굴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지면서 "이 씨팔놈아! 죽어 볼래"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듯이 그 자리를 빠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가는 곳마다 구걸을 하는 이들이 우리를 외국인으로 알아보고 유창한 영어로 "한국인이냐? 일본인이냐?"를 물어 대는 것이었다. 그 이후부터 우리는 어느 나라 사람인지를 묻는 질문에 꼬박 꼬박 "WE ARE NEPALI"(우리는 네팔사람이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네팔은 크게 2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나는 인도의 아리안 계통으로 얼굴이 조금 검고 윤곽이 뚜렷한 이들이고, 하나는 상당히 차별을 당하는 몽골리안으로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차림새 외에는 거의 구별하기가 어렵다. 봉변을 당한 후부터는 줄곧 네팔인 행세를 할 수밖에 없었다. '숯검뎅이' 주검으로 고향 가 몇 년 전 한껏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여름, 건축현장에서 열사병으로 쓰러져 3일만에 사망한 중국 내몽고에서 온 교포 유영희(남, 49세)씨는 국립의료원 영안실에 안치된 후 병원비와 영안실 비용을 내지 못해 235일간 방치되다가 약 8개월만에 장례를 치르고 화장하였다. 그것도 중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아버지의 비보를 접하고 한국에 온 아들(18세)이 부천에서 공장을 다녀 벌은 돈 100만원을 가지고 가 병원 측에 사정을 하여 서두른 결과였다. 프라스틱 사출공장의 천정 지붕 속에 창문도 하나 없이 만들어진 숙소에서 잠을 자던 중 발생한 화재와 유독가스를 피하지 못하고 세명이 온통 숯덩이처럼 타버린 방글라데시인 세명 모타레브, 굴짜르, 화룩의 처참한 모습이 지워지지 않는다. 하루에 4구의 장례를 치루어 시신을 방글라데시로 보내고자 비행기를 기다리며 김포공항 화물청사에서 세찬 눈발 속에서 허무하게 허공을 응시하던 방글라데시 대사관의 공사 바타차야씨와 그 직원들. 그들의 눈에 비친 한국의 모습은 무엇일까? 과연 한국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금년 초 중국에서의 한국인 납치사건이 일자 외교통상부에서는 발빠르게 중국에서의 한국인의 사건 사고 피해상황 통계치를 발표하였다. 98년도 84건에 108명, 99년도 182건에 218명으로서 2년동안 17건에 18명의 사망자가 있었다는 발표를 하였다. 사망사고의 내용은 피살 4명, 지병 8명, 교통사고 5명, 자살 1명이었다. 그런데 성남의 일개 상담소인 '외국인노동자의 집/중국동포의 집'에서만 해도 항상 일주일에 두 세명의 장례를 치르고 있고, 하루에 4명의 장례를 치르는 날도 있으며 한해에 평균 100여명의 장례를 치르고 있다. 한편 지하 창고에는 30여기의 유골이 쌓여 있다. 살아서는 불법체류자라는 이유로 쫓겨다니다가 죽어서 조차 외국국적자라는 이유로 행려사망자 처리도 되지 않고 납골당에 안치도 되지 못하고 있는 동포들의 슬픈 모습이다. 더 나아가 임금체불, 산업재해, 의료, 폭행, 사기 등의 상담은 이루 말할 수 없고 상담 파일이 산더미처럼 쌓여만 가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에 와 있는 동포들의 그 막대한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의 조그만 피해만을 내세우며 책임을 전가하는 일은 이제 그쳐야 하겠다. '남의 눈에 눈물나게 하면 제 눈에 피 눈물 난다'는 말이 있다. 이들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누가 닦아 줄 수 있으랴? 2. 외국국적 체류자 50만여명, 매월 3천여명씩 증가추세 IMF 위기 당시 외국인노동자 귀국 행렬이 이어져서 98년 한해에만 8만여명 귀국하는 모습을 언론을 통해 본 많은 이들이 당시 걱정스레 "요즘 외국인 노동자들이 다 출국한다고 하는데 상황이 어떠하냐?" 또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다 나가면 할 일이 없어 <외국인 노동자의 집/중국동포의 집>이 문을 닫게 되는 것은 아닌가?"라는 물음을 던져 온다. 이에 대해 나는 한마디로 "제발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고 답을 했었다. 그런데 법무부는 2000년 10월 28일 현재 50만 2591명의 외국국적자가 머물고 있으며, 매월 3천여명씩 증가세에 있다고 보고한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외국인 노동자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 특히 현재 국내체류 외국인노동자는 약 30여만명에 이르고 있으며 그중 6%만이 취업이 가능한 체류자격을 가진 자들이고, 30.7%가 산업기술 연수생이며, 65%가 불법체류 취업자들이다. 이와는 별도로 4-5만명으로 추산되는 밀입국자는 그 숫자도 파악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는 국내 외국인력의 95%이상이 단순기능직 근로자로서 출입국관리법상 취업이 가능한 체류자격이 없이 취업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열악한 노동조건과 인권유린에도 불구하고 왜 한국에 올까? 중국에서는 사장을 경리, 또는 총경리라고 부르는데 사장의 한달 월급이 인민폐로 500원에서 천원을 받는다고 한다. 이를 한국화폐 가치로 하면 7만원 내지 12만원정도이다. 그런데 한국에 오기만 하면 하루 일당이 7만원 또는 12만원이 된다는 사실이다. 하루를 일해서 사장의 한달 월급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일확천금을 캐는 땅이 되는 것이다. 그 동안 많은 중국동포들이 꿈을 안고 기회의 땅이자 고국인 한국을 찾기 위해 중국에서 평생을 벌어도 모을 수 없는 500만원에서 천만원까지의 비용을 부담하고 한국에 온다. 개중에는 숱한 이들이 한국인에게 사기를 당하고서 빚을 갚지 못해 몰매를 맞거나 가정이 파탄되고 병석에 눕거나 야반도주를 하는 등 풍지박산의 아픔을 겪었다. 일부는 밀입국을 시도하다가 바다에서 실종이 되거나 일가족 5명이 컨테이너 박스에서 주검이 되어 고국(?)땅을 밟기도 했다. 다행히 한국에 온 경우에라도 이내 꿈은 사라지고 불법체류자라는 신분적 약점으로 인해 상상하지도 못할 차별과 냉대 속에 내동댕이쳐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한국에 들어오고자 줄을 서고 있고 사기사건과 밀입국 행렬도 꼬리를 잇고 있다. 한편 방글라데시는 남한 땅만한 작은 면적에 인구는 1억6천 5백만명이고 세계 최고의 인구밀도를 자랑(?)하는 국가이다. 인도의 커다란 강줄기들이 빠져나가면서 쌓아 놓은 퇴적물들이 쌓여서 이루어진 삼각주 지대로서 유용한 지하자원은 희박하고, 해마다 홍수가 국토의 절반이상을 휩쓸어 가는 상황에서 어떤 산업시설을 세울 계획 내지는 의욕을 갖지 못하고 있다. 오죽하면 물에 잠긴 자기네 나라를 도와달라며 가난한 우리 상담소에까지 원조를 요청하는 지경이다. 나라밖으로 나가 주는 것만 해도 애국이고, 나가서 달러까지 벌어 오는 것보다 더 큰 애국이 있을까 싶다. 이주 노동자의 문제는 세계적인 관심사이자 피할 수 없는 과제이다. 과거 '자본'은 이동하지만 '노동력'은 고정되어 있다는 이론이 무너지고 '자본'도 이동하지만 '노동력'도 이동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WTO 협정에 이은 블루라운드의 논의도 그 연장선이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자연스레 흐르듯 노동력도 저임금지역에서 고임금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시되는 그야말로 '노동의 지구화' 시대를 살고 있다. 3. 외국인노동자들에 대한 인권유린의 역사와 흐름 '한 지붕 세 가족' 외국인 노동자는 다 같은 외국인 노동자로 알고 있지만 같은 공장에서 똑같은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세 가지 부류가 있는데 그들이 처한 조건과 상황은 너무나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첫 번째 부류는 '해외 현지 투자기업 연수생' 노동자들로서 월급이 3만원부터 10만원까지를 받고 있는 이들이다. 이들은 해외 현지에서 계약을 맺고 연수명목으로 들어 와 있기에 현지의 임금을 지급한다는 것이 중점으로서 노동관계법의 적용이 전면 배제되어 있고, 말 그대로의 노예신세로 인권의 사각지대에 방치되어 있다. 둘째 부류는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이하 '중기협')가 운영하는 '산업기술 연수생'이다. 이들은 지난 95년 1월 9일 명동성당 농성을 통해 최저임금제가 적용이 되어 비로소 30여만원 정도에서부터 임금을 받고 있는 이들이다. 그리고 세 번째 부류는 방문이나 관광으로 입국을 해서 불법체류 중이거나 또는 연수생으로서 이탈한 모든 외국인들이 '불법체류 불법취업자'인 경우로서 이들은 월급 50-100만원까지의 그래도 가장 나은 대우를 받고 있다. 같은 공장에서 똑같은 일을 해도 이런 지경이니 이왕 돈을 벌러 왔기에 이탈을 하여 다른 공장에 가기만 하면 월급이 두배 이상 뛰어 오르니, 합법체류자보다 불법체류자가 혜택을 받는 기가 막힌 상황이다. 합법체류자는 '연수생', 불법체류자는 '노동자' 불법체류 외국인들의 문제가 심각해지고 사회 문제화되자 정부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합법적인 체류 자격을 주는 '외국인 산업기술 연수생제도'를 실시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연수생제도는 더더욱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를 심각한 양상으로 곪아터지게 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상식이 통하는 사회여야 한다. 법을 지키는 합법 체류자에게는 많은 혜택을 주어야 하고, 법을 지키지 않는 불법체류자에게는 많은 불이익을 주어야 한다. 그런데 외국인 노동자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상식이 무시되고 정 반대의 모순을 보여 주고 있다. 연수생에 대한 개선지침이 발표되기 전 까지 합법체류자(산업기술 연수생)의 경우에 하루에 12-16시간씩 밤낮으로 죽도록 일을 하고서도 받는 월급은 고작 15-20만원이었다. 이에 비해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들의 경우는 대부분 50-100만원까지의 임금을 받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일을 하다가 다치거나 죽는 산업재해를 당했을 경우에도 합법체류자(산업기술 연수생)는 사망사고 일지라도 최고 1.500만원까지 만을 임의로 가입한 상해보험회사에서 받을 수 있었지만 그나마 회사나 송출업체가 보상금을 가로채거나 보상금으로 병원비를 지불하고 실제 산재를 당한 연수생은 빈손으로 돌아가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불법체류자의 경우는 노동부의 산업재해 보상과 회사측의 민사 보상을 동시에 받을 수 있었다. 당시 불법체류 외국인에게는 산업재해 보상을 실시하고 있었던 바 이러한 모순의 이유는 '연수생은 합법체류자이지만 노동자가 아닌 연수생일 뿐이기에 노동자로서의 보상을 해 주지 않고, 불법체류 노동자는 체류는 불법이지만 노동자로 인정을 하여 산업재해 보상을 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이니 돈을 벌기 위해 온 합법체류자(산업기술 연수생)들은 불법체류자를 동경하게 되고 어떻게든지 불법체류자가 되고자 애를 쓰며, 직장을 이탈하기만 하면 불법체류자가 된다. 그 결과 산업기술연수생 중 2년 기한이 다 되었을 시점에서 90퍼센트 이상이 이탈한다. 검찰, 월급 한 푼 안 준 사업주에게 '무혐의' 결정 한국에 취업한 외국인 노동자들 중 거의 100%에 가까운 노동자들이 일을 했는데도 임금을 다 받지 못하고 5-6개월에서 2년치까지의 임금을 떼이고 있으면서도, 불법체류라는 신분적인 약점 때문에 관공서 어디에도 호소하지 못하고 있다. 일전 방글라데시 출신 M. D 알리라는 이는 예일산업이라는 가구공장에서 2년 동안 하루에 12-16시간까지 밤낮없이 죽도록 일을 했다고 한다. 그간 한 일의 월급이 천만원이 넘어 섰는데 사장은 한푼도 주지 않은 채 부도를 내고 잠적해 버렸다. 알리는 한국에 오기 위해 브로커에게 한국돈으로 400만원정도의 엄청난 금액을 지불하고 왔다고 한다. 알리는 우리에게 찾아와 "이대로는 절대로 돌아 갈 수 없다," "그 돈을 받지 못하고 돌아간다면 감옥에 가든지 죽게 될 것이다," "한국에 오기 위해 브로커에게 준 돈은 어떻게 갚아야 되느냐?"며 큰 눈을 껌벅이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이었다. 노동부 사무소에 진정서를 냈으나 조사도 하지 않은 채 "불법체류 외국인이기에 다른 방도를 강구하라"는 통지를 받게 되었다. 재차 노동부에 고소장을 접수했더니 그제서야 사업주와 알리 양자를 조사하고서 그 의견을 검찰에 송치하였고 의정부 지청(검찰)에서 결정문이 도착하였다. 처분결과는 '혐의없음'으로서 그 이유로 "사업주가 고소인에 대한 임금을 지불하지 못하고 있는 사안으로 인정이 된다. 그러나 고소인은 방글라데쉬 인으로 관광비자로 입국하여 국내에 불법취업한 자로서 적법한 근로계약을 전제로 하는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로 볼 수 없으므로 범죄혐의 없어 이에 주문과 같이 결정함" 이었다. 고소인의 주장이 모두 사실로 인정이 되지만 알리가 불법체류자인 관계로 사업주는 범죄혐의 없음이라는 것이다. 이 도대체 무슨 해괴한 논리란 말인가? 불법체류자의 일한 임금, 그것도 2년간의 피땀어린 노동의 대가를 떼어먹고 주지 않아도 범죄혐의조차 없단 말인가? 차라리 결정 내용 중 표현을 조금 바꾸어 "알리가 불법체류자인 관계로 사업주의 처벌은 곤란하다"라고 하여 처벌은 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범죄혐의만큼은 인정하는 태도가 아쉽기만 하였다. 강제 출국 당한 후 해외에서 농성으로 국제적 분쟁 야기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노동부에서는 '불법취업 외국인이 임금체불, 산업재해 등과 관련 소송을 제기할 경우 법원의 판결과 관계없이 이들을 우선 강제 출국 조치하도록 법무부에 요청'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93년 11월 26일 서울 고등법원이 필리핀인 아키노 시바은(26세)이 불법취업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산재보상을 받지 못한 것은 부당하다며 서울 동부 지방 노동사무소를 상대로 낸 요양 불승인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노동부는 요양 불승인 처분을 취소하라'며 원고 승소 판결을 내린 사실에 대한 노동부의 대책이었다. 불법 취업 외국인에 대해서도 산재보상을 해 줘야 한다고 판결함으로서 앞으로 불법취업 외국인들의 소송이 잇따를 것으로 보고 이같이 결정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팔이 잘리고 손가락이 잘려도 신고나 보상요구도 하지 말고 그냥 있으라는 것이다. 노동부가 산재를 방지하거나 줄이기 위한 대책을 수립하기 보다 산재를 당한 외국인 노동자가 보상을 요구하면 먼저 강제 출국시키라고 요구하는 웃지 못할 내용인 것이다. 이후 소송이 잇따르고 외국인 노동자 농성사건이 터지면서 94년 2월 7일부터 산업재해 보상보험법부분에 대해서 일부 제한적으로 보상을 하겠다고 발표하고 5인 이상의 사업장에 한해서 보상을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산재를 당하고서도 보상도 받지 못한 채 강제 출국된 이들의 해외 농성과 집단적인 움직임, 그리고 국제적인 분쟁의 조짐이 보이면서 94년 9월부터 출국을 당한 이들에게도 소급하여 보상을 해 주기로 하고 해외 공관을 통해 접수를 받고 보상을 실시하고는 있지만 성과는 미미한 상태이다. "강제징용 서러운데 동포차별 웬 말이냐!" 지난 해 12월에 발효된 '재외동포법'은 중국동포를 동포의 범주와 혜택에서 제외시키자 한국거주 조선족들은 "강제징용 서러운데 동포차별 웬 말이냐!" "부잣집에 시집간 딸은 딸이고 가난한 집에 시집간 딸은 딸이 아니냐?"는 구호를 외치면서 뜨거운 폭염아래 단식을 하며 철봉 끝에 거꾸로 매달려 분노를 표시하였다. 과연 누가 1948년 이전에 이 나라를 떠나갔는가? 일제의 침략과 수탈 속에서 강제징용, 학병, 정신대를 피하여 이주했거나 일제의 착취와 수탈을 피해 굶주림을 면해 보고자 또는 더 나아가 도탄에 빠진 민족을 구하려 열혈지사들이 떠나갔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피 흘려 싸웠던 독립투사들과 이들을 지원한 이들과 그 자손들을 동포로 인정하지도 않는 것은 민족감정에도 맞지 않을 뿐더러 애국심을 말살시키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이들은 지금까지 이국에서 외국인으로 살면서 차별과 멸시를 당해왔는데 꿈에도 그리던 고국에서조차 동포로 인정받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지난 8월 31일 김대중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재외동포법과 관련해 중국과 구 소련지역 거주 동포들도 우리의 동포임이 분명하고, 실질적으로 같은 혜택을 받도록 해야 하며, 국내의 불법체류 동포들에게도 생활안정과 귀국을 보장하라"고 지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법무부에서는 벌금면제 출국기간이 지난 6월말로 끝나고 7월 1일부터는 단속을 통해 추방조치를 발표하고 있다. 이는 국내 동포들의 한줄기 희망을 앗아가는 검은 구름으로 불길한 예감을 던지고 있다. 한편 한국에서 태어나 중국으로 이주한 동포 1세대들 중 호적이 버젓하게 살아 있으며 현재 한국에 머물고 있는 이들이 이제 남은 여생을 고국에서 살다가 고국 산천에 뼈를 묻겠다고 하는데 법무부는 '호적은 국적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불법체류를 문제삼아 국적회복을 불허하고 있다. 이들 해당자 대다수의 나이가 60세를 넘어서 7-80에 이르러 있고 그 숫자도 얼마 되지를 않는데 이들은 '언제 다시 나갔다가 들어와야 하느냐?'면서 그냥 여기서 죽겠다고 하는데 이는 국가가 조속한 조치를 취해야 할 사항이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외국인노동자 관련 국회 상정 4개안 자동 폐기 외국인노동자들의 노동권 및 인권침해의 심각성은 외국인노동자 유입 초기부터 활발한 외국인노동자 운동을 가져왔다. 각 종교단체 및 외국인노동자 운동단체들은 임금체불, 산재보상 등의 개별 외국인노동자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동시에 외국인노동자 정책 및 제도의 개선을 위해 여러 가지 활동을 해왔다. 산업재해를 당한 외국인노동자들의 농성을 통해 불법체류자에게도 산재보상을 실시하도록 하는 성과를 얻어내었고, 산업기술연수생들의 농성을 통해 연수생에게도 산재보상, 최저임금제 실시, 의료보험적용 등을 얻어냈다. 이 과정에서 농성장에 내외신 기자들이 몰려들어 열띤 취재경쟁을 하였고, 결과적으로 많은 개선도 이루어 내었지만 결국은 한국의 야만적인 모습을 폭로하는 '누워서 침뱉기'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상담이 폭증하면서 제도개선의 필요성을 느껴 전국적인 연대의 필요성에 따라 '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를 창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사업이 '외국인노동자보호법' 제정운동이었다. 법제정을 위해 서명운동, 공청회, 캠페인 등을 진행하던 중 불법체류 단속이라는 명목으로 외국인노동자 보호법제정운동을 탄압하며 발생한 필자를 비롯하여 양혜우 사무국장이 구속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그 동안 농성을 하면 요구사항이 관철되었는데,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법제정을 추진하다 구속되는 과정에서 '법은 멀고, 주먹만 가깝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다. 구속사태를 계기로 '외국인노동자보호법'제정과 상담소 탄압중지를 위한 37일간의 명동성당 농성은 사회적으로 외국인노동자 보호법제정의 필요성을 인식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단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간 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와 기독교계, 그리고 카톨릭 쪽에서는 법제정을 위해 범국민서명운동을 벌여 10만여명의 서명부와 함께 '외국인노동자 보호법' 입법청원서을 제출하였다. 한편 당시 신한국당의 이재오 의원 외 28명이 서명한 의원입법안, 당시 새정치국민회의의 방용석의원외 34명이 서명한 의원입법안 등 4개의 안이 국회에 상정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는 부처 이기주의와 이익을 둘러싼 집단 이기주의에 밀려 2000년 초 국회 회기 종료와 함께 자동 폐기되었다. 4. 외국인노동자들의 심각한 인권실태 불법체류의 신분적 약점: 인권유린의 출발 한국인이 기피하는 3D업종에서 밤낮없이 뼈빠지게 일을 해 주었지만 임금을 받지 못하고 임금을 달라고 항의를 하면 경찰에 불법체류자라고 신고, 체포3하도록 하여 추방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중국동포 김희택씨 부부가 비닐하우스에서 40만원씩 월급을 받기로 하고 일을 하였다. 5개월이 지나도록 월급을 주지않아 그만두었고, 상담소에 호소해 왔고 이를 안양노동부사무소에 진정하였다. 근로감독관의 출석요구에 따라 업주와 함께 출석을 하였는데 이 업주는 이내 휴대전화를 꺼내어 경찰 112에 "불법체류자 두명이 있으니 체포하여 추방을 시키라"는 신고를 하였다. 나이가 지긋한 동포 부부는 그 자리에서 땅에 무릎을 꿇고 딸같은 업주의 치마꼬리를 붙들고 "잘못했다," "용서해 달라," "월급을 받지 안겠다"고 몇번씩 다짐을 한 이후에야 눈물을 뿌리며 도망을 치듯이 빠져나갔다. 중국동포 장용남(42세)씨는 동포 43명과 함께 주택공사 운암지구 택지조성사업에서 일하였는데 한국인은 모두 노임을 지급받았지만 동포들만 노임 1억 5천여만원을 받지 못하였다. 사무실에 찾아가 항의를 하자 경찰에 신고하였고 이내 체포되어 조사 후 외국인보호소에 100일간 수감되었다가 강제 추방되었다. 억울함에 치를 떨다가 천여만원을 주고 다시금 한국에 왔으나 아직도 한푼도 받지 못하고 있다. 중국동포 김길원(36세)씨는 손가락을 모두 잘리우고 사장에게 보상을 요구하다가 삽자루로 두들겨 맞아 허리를 다친 채 사장의 신고로 경찰에 불법체류자로 체포되어 방광파열로 피오줌을 싸며 외국인보호소에 수감되어야 했다. 지난 6월 3일 중국인 왕균당씨는 출근을 하며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차량에 충격당해 떨어져 정신을 잃었다. 얼마 후 정신을 차리고 보니 경찰관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고, 다가서는 경찰을 보고 "괜찮다"며 깨진 턱뼈와 쏟아지는 치아를 추스리며 그 자리를 피했다. 자동차가 뺑소니를 쳤다는 이야기는 종종 들어보았지만 피해자가 도리어 뺑소니를 쳤다는 것은 외국인들 사이에서는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불법체류자라는 신분적인 약점이 얼마나 이들을 옥죄고 있는지 실증적으로 증명해 준다. 임금체불, 상담의 70% 정도를 차지 외국인노동자들은 한국에 돈을 벌기 위해 찾아 왔다. 그런데 돈을 받지 못해 고통을 겪는 경우가 전체 상담의 70%정도이고 외국인노동자 전체의 약 80% 정도에 이르고 있다. 일부 사업주들은 돈을 받으러 온 외국인이나 상담소의 직원들에게 '법대로 하라!' '경찰서에서 만나자'는 등 반(半) 협박으로 일관하거나 실제 경찰에 신고하여 체포하도록 하는 경우도 종종 벌어지고 있다. 이에 대해 경찰청에서는 피해사실을 확인할 경우 무분별한 단속이나 체포, 연행보다는 피해복구를 우선시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있음을 볼 때 전향적인 모습을 보인다. 한편 전에는 노동부에 진정하면 아예 처리조차 외면하였다. 고소, 고발에 대해서는 무혐의 처리를 해왔다. 그러나 1999년 1월 1일부터 근로기준법을 제한적으로 적용하고 있어 숨통이 트이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감독관들은 사건의 처리도 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먼저 출입국사무소에 통보하여 체포하도록 하는 등의 행동으로 규탄집회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일부 외국인노동자들은 사업주의 이름, 주소, 전화번호 등을 자세히 알지 못하는 어려움도 있다. 전화번호 하나만 알고 있거나 할 경우에 주소 등 모든 내용을 알아 오라고 윽박지르면 외국인 노동자들은 차라리 포기해 버리기도 한다. 노동부의 근로감독관은 '특별사법경찰리'(特別司法警察吏)이고 수사권을 가지고 있다. 좀더 적극적으로 외국인노동자들의 고통을 헤아려 문제에 접근을 하고 해결을 모색해 주기를 간곡히 요청한다. 또한 한 두번 확인해 보고 사업주를 입건하고서 검찰에 송치를 한 후 책임이 끝이 났고, "우리가 돈을 받아 주는 기관이 아니다"라고 하며 소송을 제기하라고 하면, 한국인도 소송이 쉽지 않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 진다. 사업주에 대하여 벌금을 부과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체불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동부와 검찰의 적극적인 역할이 절실히 요구된다. 심각한 산업재해: "콩팥을 팔아서라도 가족의 품에 갈 수 있게 해 달라" 지금까지 한국에 취업했다가 돌아갔거나 지금까지도 일하고 있는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일을 하다가 죽거나 다치는 산업재해를 당하고서도 보상을 받지 못한 채 체포되어 강제 출국된 이들이 많다. 중국교포 류정기(63세)할아버지는 중국에서 태어나 그토록 그리던 조국에 꿈을 안고 찾아 왔다고 한다. 선조들의 고향인 김제를 찾았고 '이제라도 조국을 찾아 와서 고향 땅을 밟았고, 조상들의 묘지를 찾아 성묘까지 했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후 성남시에 있는 프라스틱 옷걸이를 만드는 사출공장에서 야간작업을 하던 중 옷걸이를 스무개 쯤 뽑았을 때 사출기에 손목아래가 찍혀 다 부서지고 손가락 네개가 절단되는 재해를 당하였다. 사업주는 650만원을 들여서 봉합수술을 해 주었는데 얼마 후부터 통증이 심해지고 부어 오르며 냄새가 나기 시작해서 후속치료를 요구했다고 한다. 사업주는 "당신 때문에 1차 치료비로 많은 돈을 썼는데 이제 와서 더 요구하면 어떻게 하느냐? 심사가 혼란하니 차라리 치료비가 싼 중국에 가서 치료하라"고 하며 더 이상의 치료와 보상을 외면했다는 것이었다. 우리를 찾아 왔을 때 손가락은 오이 만큼씩 부풀어 있었고 붕대를 풀자 썩는 냄새가 진동하였다. 즉시 병원으로 후송을 하여 봉합한 손가락을 모두 절단을 하고 360일 동안 입원하여 수술과 치료를 받은 결과 치료비가 1300만원을 넘어 서게 되었다. 그 동안에 대책을 강구하고자 사장을 만났는데 "가진 재산이 없으니 사글세 보증금이든지 노후된 사출기 전부(2대)를 다 가져 가라. 더 이상 책임질 능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노동부에 산업재해로 처리하고자 요양을 청구하면서 단계를 밟았지만 5인이하 사업장이기에 산업재해 보상을 적용할 수 없다는 결론만을 통보받았다. 어쩔 수 없이 진정서 등을 각계 요로에 제출하며 할아버지를 청와대 민원실까지 가시도록 했으나 결국 안된다는 답변에는 변함이 없었다. 변호사를 통해 사업주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통한 보상을 확인했더니 소송을 하면 100% 승소를 보장하지만 100% 절대 소송을 않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재판에서 이기더라도 재판 실익(實益)이 없기 때문에 차라리 인지대라도 아끼라는 것이었다. 류정기 할아버지는 눈물을 글썽이며 "그 동안 돌보아 주신 것은 고맙지만 이제 얼마 후에 중국의 가족에게로 돌아가야 하는데 보상비는 제치고서라도 병원비는 어떻게 갚으며 가족들에게는 무어라 설명해야 하느냐?"며 아침마다 전화를 해 온다. "한국에서 콩팥을 팔면 5천 만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데 나는 3천 만원만 받으면 된다. 콩팥을 떼어도 겉으로는 표시가 나지 않으니 그 돈에서 1500만원은 병원비를 갚고 남은 돈은 한국에서 많은 이들이 도움을 주어 보상을 받아 왔노라고 가족들에게 설명하겠다. 그러니 발이 넓은 목사님께서 소개를 해 달라"고 말을 이어 가시는 데 차마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어서 말을 끊고서 "나는 그런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그런 사람들은 잡혀가서 감옥에 가야 한다"고 설명을 드렸다. 그랬더니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며 큭 큭 울음을 터트리신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독자들께서 좋은 의견을 주시기를 바란다. 진료의 사각지대에 방치 불법체류자들은 의료보험도 혜택도 받지 못고 일반 진료비는 너무나 비싸 진료는 그림의 떡이다. 몽골인 바트센드씨가 급성맹장염이었는데 진통제 몇 알을 먹고 참고 참다가 결국은 혼절하여 병원에 후송되었고, 수술을 했지만 맹장이 파열되고 복막염이 되어 결국 패혈증으로 하루만에 사망을 하였다. 스리랑카인 서짓 쿠마라씨는 작업 중 발등에 부상을 당하였는데 치료를 받지 못하였고, 결국은 무릎 밑을 절단하였다. 서짓 쿠마라씨는 절단하여 없어진 부위가 '아프다', '가렵다'며 호소하는데 의사에게 물었더니 '환각통'이라는 설명이다. 아픈 배를 감싸 쥐고 진통제 몇 알에 의지하여 참을대로 참다가 결국 쓰러져 사경을 헤매던 중, 병원에 후송되었을 때는 이미 췌장염이 터져 복막염을 일으켰고, 결국 8가지 합병증이 발병해 중환자실에서 6개월을 보내고 일반병실로 간신히 옮겨와서 2개월이 된 네팔 사람 엠 구릉씨 등, 의료문제의 해결이 절실한 시점이다. 한국에는 병원과 약국, 의사와 약사가 홍수처럼 넘치는데도 외국인들은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고 있다. 특히 인권규약에는 응급의료권을 보장하고 있는 바 최소한 응급진료를 받을 수 있는 제도의 마련과 사망자들에 대해서는 내국인에게처럼 적어도 행려환자 처리가 요청된다. 수갑, 폭행도 모자라 강간까지: 무방비 폭력에 노출 각 사업장에서는 가뜩이나 인력이 부족한 지경에 이탈자가 생겨나면 당장 일손이 끊길뿐더러 추가배정도 되지 않고 값싼 노동력 상실을 예방하고자 골몰하게 되었다. 작업장 이탈을 위한 정보교환을 차단하고자 전화통화 금지, 편지금지, 외출금지, 여권압수 등을 일상적으로 행하고 고의적으로 5-6개월씩 임금을 지급하지 않고 붙잡아 두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심지어 송출업체에서는 작업장을 이탈한 외국인 노동자를 붙잡아다가 수갑을 채우고 폭행을 하고, 일주일간을 감금하고 하루종일 물 한 컵과 빵 한 조각만 주어 아사직전에 이르게 하는 야만적인 행위가 고발되어 구속이 되기도 하였다. 결국 이러한 결과가 지난 95년 1월 9일부터 17일까지 9일동안 전 국민을 충격 속에 몰아 넣었던 외국인 산업기술연수생들의 명동성당 농성사건이었다. 이는 정부가 자초한 정책의 결과이며 필연적으로 터질 수밖에 없었던 사건이었다. 한편 명동성당 농성장에는 불길에 기름을 끼얹듯이 1월 8일 새벽에 경기도 광주의 한 가구공장에서 외국인 여성 노동자가 공장장에게 강간을 당했다는 속보가 날아들었다. 결국 명동성당 농성장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은 엄동설한의 추위 속에서 목에 쇠사슬을 감고 꽁꽁 언 손을 모아 쥐고 "우리는 노예가 아닙니다," "제발 때리지 마세요!" "월급을 직접 제 손에 주세요!" "강간하지 마세요!" 라며 외치게 되었다. 공장을 그만 두겠다는데 나가지 말라고 사장님이 옥상에서 '엎드려 뻗쳐'를 시키며 폭행을 하고 그래도 간다고 하자 옥상 난간에 앉혀 놓고 따귀를 때리다가 밀어서 9미터 아래로 추락하여 양팔이 다 부러지고 만신창이가 된 채 6개월간을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는데도 사장님은 약식기소되어 벌금 100만원만을 물었다며 힘없이 신세를 한탄하는 네팔인 고빈다. 중국동포 서문봉(45세)씨는 지난해 5월 31일 한국인의 몽둥이에 맞아, 아산재단 강릉병원에 실려가 뇌수술을 받고 치료도중 뇌사에 빠졌다. 범인은 돈도 가족도 없이 몸으로 때우겠다며 구속되었고, 병원 측에서는 치료비를 대신 받으려고 장기기증을 주선했지만 책임을 질 가족도 없어 불발되었고 6월 10일 끝내 사망하였다. 장례라도 치르려고 찾아갔지만 병원에서는 치료비 1,300여 만원을 내지 않으면 시신을 내줄 수 없다는 단호한 입장 앞에 물러서야만 했다. 입국을 하고 사망한 지 5개월이 넘어서자 부인이 찾아와 "고국이라고 찾아와 몽둥이에 맞아 죽은 것도 서러운데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5개월 째 시체를 놓고 어떡하란 말이냐? 나도 따라 죽겠다"며 통곡하였다. 협박성 통곡에 병원에 사정을 하고자 찾아가니 그 동안의 영안실 안치료가 500만원이 추가되었고, 안치료까지 지불해야만 사체를 내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던 끝에 정주영 회장에게 면담을 신청했으나 거절당하고 결국 청와대 대통령에게 편지를 띄웠다. "고국을 찾아 와 맞아 죽은 것도 서러운데 한푼 보상도 받지 못하고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는 이 땅이 과연 이들의 고국입니까?" 그 며칠 후 장례를 치뤘지만 보상은커녕 고인의 월급 450만원과 꾸어준 돈 200만원을 아직도 받지 못하고 있다. 방글라데시인 라흐만은 국립대 출신으로서 한국인 공장장이 머리를 부수고 손, 발을 잘라내고 드럼통에 넣어 휘발유를 부어 태워 산 속에 있는 배수구에 버려 놓았다. 수사를 통해 뒤늦게 사체를 찾았는데 대사관에서는 코오란 율법에 따라 화장을 할 수가 없으니 사체를 송환해 달라는 요구였다. 어떻게 난도질당하고 불에 타서 등판만 남은 그 사체를 차마 보낼 수가 없었다. 만일 그 사체가 가면 방글라데시의 모든 언론이 대서특필을 할 것이고 한국은 야만국가로 난도질당할 것이 염려되었다. 알량한 민족자존심으로 고민하던 중 일주일동안 사체송환을 가지고 말다툼을 하다가 방부처리가 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어렵게 화장을 하였고, 유골을 보관 중에 있다. 중국동포 김인성(48세)씨가 지난 98년 3월 3일 부천의 한 공장에서 분신 자살하였다. 그는 근무했던 공장 복도 벽에 스프레이로 사장을 지칭하여 '나쁜 놈 김** 천벌을 받는다. 내 영혼이 영원히 너를 괴롭힌다. 한국이 슬프다. -金寅星-'이라고 마지막 유서를 써 놓았다. 무슨 한이 그렇게도 쌓였는지 사장을 저주하며 죽어갔는데 경찰조사에서 사장은 아니라고 발뺌을 하고 죽은 자는 말이 없었다. 5개월이 되어서야 보상 한푼 없이 간신히 장례를 치르고 부인은 "'한국이 슬프다'는 남편의 마지막 글이 마음에 걸린다"며 "왜 고국인 한국이 우리에게 슬픈 나라가 되었는가?"라며 울음을 터트렸다. 외국인노동자들의 절규는 해방 50돌을 맞이하는 새해 벽두부터 일그러진 우리의 자화상을 보는 듯 하여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연수생들의 농성은 파장이 컸고 연수제도의 문제점이 폭로되는 계기가 되었다. 정부당국은 외국인 산업기술 연수제도의 개선지침을 발표하고 연수생들에게도 의료보험 적용, 산업재해 보상보험 적용, 최저임금 적용 등을 95년 3월 1일부터 실시하게 되었다. 또 연수생 산업재해자의 경우 95년 3월 1일 이후의 사고는 산재보상을 추진하면서 그 이전의 사고는 보상해 주지 않았는데, 이는 형평의 원칙에도 어긋나는 내용이다. 이전에 불법체류 외국인노동자들에게 산업재해보상을 적용하면서 3년 전 사고까지 소급하여 적용해 주었고, 이미 출국을 한 이들은 해외 공관을 통해 접수를 하면 보상을 해 주기까지 하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95년 3월 1일 이전의 연수생 피재자(被災者)들에게도 산재보상을 소급하여 추진해야만 한다. 정신대 배상문제처럼 우리도 제소 당해 우리 나라에는 법치국가로서 근로기준법이 있다. 이는 근로의 최저 기준선을 제시한 법으로서 기준선 이상은 보장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법으로 정해 꼭 지키도록 하고 어기면 처벌을 하겠다는 내용이다. 근로기준법 제 5조에 보면 '국적, 신앙, 또는 사회적 신분을 이유로 근로조건에 대한 차별적 대우를 하지 못한다'라고 차별금지를 명시하고 있으며 이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게 적용됨을 알리고 있다. 또한 우리 나라의 헌법 제6조와 유엔법 제2조 2항은 '인간의 사회, 문화, 경제적 기본권리에 대한 차별 금지'를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외국인 노동자들은 이러한 최소한의 기본적인 권리마저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며, 정부는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예전 한·일 양국 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에서 '전후처리, 전후 보상과 재일 한국인의 인권'이라는 주제로 협의회가 열렸었다. 여기에서 한국 측 사례보고로 정신대 배상문제(발제-정대협 김경희 총무)와 외국인 노동자 문제(발제-필자)발표가 있었다. 외국인 노동자 문제 발제가 끝나자 먼저 사례를 보고했던 김경희 총무께서 마이크를 잡더니 "우리에게 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를 이렇게 학대를 하면서 일본에 대해 어떻게 배상요구를 할 수 있겠느냐?"고 지적하였다. 어떤 목사님은 "50년도 더 지난 정신대 문제에 대해 우리는 지금도 배상을 요구하며 유엔에 제소하고 있는데 외국인 노동자들이나 그 국가가 50년이 지난 뒤에도 제소하고 배상을 요구할 것이 아니겠느냐?"고 자탄하였다. 그런데 결국 작년 여름 필리핀 주재 한국대사관 앞에 한국에서 취업도중 산업재해를 당하고 보상도 받지 못한 이들이 집단으로 반한(反韓)시위를 벌이며 한국정부를 규탄했었다. 더 이상 그들에게 '코리안드림'은 사라지고 없다. 다만 그들에게는 '한국에의 증오'와 '추악한 한국인'의 이미지만이 덧칠되고 있다. 5. 외국인노동자문제의 해결방안 송출비리를 척결하고 연수생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 산업기술연수생제도는 우선적으로 그 제도와 운영의 편법성에 문제가 있다. 연수생명목으로 외국인력을 들여와 연수는 없이 단순노동을 시키면서도 그 법적 지위는 연수생이므로 노동자들이 기본적으로 갖는 권리를 가질 수 없다. 즉 산업기술연수생제도는 말이 연수제도이지 단순인력을 싼값에 활용하는 제도일 뿐이다. 외국인 산업기술연수생이 국내 노동시장에서 지니는 실제적 지위가 '연수생'이 아닌 '근로자'임은 명백하다. 또한 불법체류자가 합법적인 연수생보다 높은임금을 받고 있음이 문제이다. 더 나아가 외국인산업기술연수생 인권백서에는 연수제도와 관련된 인권 침해사례 보고서로서 현대판 노예제도라는 오명을 쓰고 있으며 잘못된 제도까닭으로 선량한 기업주나 관리자가 노예감독자로 전락하고 마는 수모를 당하고 있다. 산업기술 연수제도는 처음부터 잘못된 결과를 가져 올 수밖에 없었다. 최소한 국가간의 쌍무협정에 의거하여 법률적 근거를 바탕으로 제도가 마련되었어야 함에도 단지 법무부장관의 훈령만으로 특정부문이나 단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내용으로 진행되어 왔다. 도입과 관리에 있어서도 국가나 공익기관이 감당해야 할 내용을 노동자의 도입과 관리를 사업주의 연합단체인 중소기업협동조합 중앙회에 모두 위임한 결과 최소한도의 인권도 보장되지 않은 채 이익집단의 논리만이 관철되어 왔다. 이는 고양이 입에 생선을 물려준 격으로써 사업주 단체에 노동자의 관리를 맡긴다는 것으로써 상식 밖의 일이다. 그토록 파문을 일으키며 파행을 가져 왔고 여러 가지 개선책이 보완되었다고 해도 문제는 여전히 상존하고 있기에 산업기술연수제도는 반드시 철폐되어야 한다. 실제로는 노동을 하는 노동자임에도 연수생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저임금으로 노동력을 착취하는 악랄한 제도로서 국제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합법적인 체류자격인 연수생 신분에서 받는 저임금으로는 입국 시 꾼 돈의 원금과 이자를 갚기가 어려워서 이탈하여 불법체류와 불법취업시장으로 유입되고 있고 30퍼센트 정도가 이탈을 했다고 하는 바 세사람 중 한사람이 이탈을 하여 규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를 지니고 있는 제도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연수생이 이탈을 해도 이탈자가 생겼다고 보고를 하지 않고 은폐를 한다. {산업 기술 연수 관련 사후 관리 방안}에 의거 업체에서 소속된 산업 연수생의 이탈율이 높으면 다음 인력배정에서 제외되며, 산업연수생의 이탈율이 높은 인력송출회사의 경우 송출권을 박탈하고 해당송출국가도 연수생 배정에 불이익을 주겠다고 발표한데 기인하고 있다. 추가 배정 등의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보고를 하지 않고 있는 모습들을 볼 때 실제 이탈율은 보고보다 훨씬 높다는 사실이다. 외국인노동자의 지위보장: 외국인노동자 합법화는 기업주들의 요청이다 실제 외국인력을 쓰는 이유는 한국인을 구할 수 없는 인력난 때문이며 약간의 임금의 차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한편 안정적인 외국인력의 고용을 확보할 수 있고, 현행 연수생을 고용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서류준비와 1년여의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복잡함이 해결될 수 있기에 합법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있다. 한편 실제 외국인을 써야 하는 영세 사업장은 연수생을 배정 받지 못하는 바 불법체류자를 고용하여 불안에 떨기보다는 합법적으로 고용을 하겠다는 것이다(외국인 불법체류자 고용 적발 시 일인당 출입국관리법 위반으로 삼년이하 징역이나 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짐). 특히 중소기업협동조합에서 분리독립하여 새로이 출범한 소기업연합회에서는 공식적으로 외국인력의 합법화를 환영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불법체류자 사면에 대해서는 불법체류자를 고용하고 있는 사업주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을 한다. 많은 중소기업주들이 인력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불법체류 취업자들을 고용하여 생산활동을 하고 있는 바 국가경제를 위한 생산활동이 불법의 토대 위에 구축되고 있으며, 불법이라는 굴레 까닭에 사업주들이나 외국인 노동자들 모두가 단속과 과도한 벌금에 대해 항상 마음을 졸이며 불안한 처지에 떨고 있다. 합법화가 되면 마음을 졸이지 않고 마음놓고 고용하고 외국인노동자들도 마음놓고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들이 우리 경제에 이바지했음도 사실이다. 더 나아가 먼저 들어 온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들의 경우에는 한국의 문화나 음식에 이미 잘 적응을 하고 있고, 한국말도 잘 할뿐더러 숙련공들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생산성 향상과 산업재해 예방에 절대적인 기여를 하게 되는 바 잘 적응한 이들은 모두 강제로 추방을 하고 생짜인 연수생을 새로이 들여오는 경우 먼저 들어 온 이들이 겪었던 몸살과 아픔, 여러 가지 위험성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중기협에서는 산업기술연수생들에 대해 현재 체류기간 2년까지를 위와 같은 이유를 들어 3년으로 연장하였다. 6. 맺음말: '한국의 따뜻함'을 보여주자! 얼마 전 우리 외국인 노동자의 집 요양소 <쉼터>에 네팔인 '채왕'이라는 사람이 일년여를 치료를 받으며 요양하던 중 문둥병 환자라는 사실이 밝혀져 우리 모두를 충격에 빠뜨렸었다. 물론 요양소의 환자는 물론 직원들까지 모두 혈액검사, 피부 조직검사 등의 나병검진을 받기도 했었다. 채왕은 그동안 번 700여 만원 전액을 송금사기 당해 날리고, 남은 돈은 치료비로 탕진하고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 결국 나(癩)관리협회 병원에 입원하였고, 자살하고 싶다며 눈물로 시간을 보냈었다. 우리들은 정성을 모아 기금을 마련하여 네팔로 떠나 보내 결국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후 지금까지 계속 6개월 치씩 약을 보내 주면서 오고 가는 편지들 속에 "한국인은 내 생명의 은인이며 한국의 따뜻함을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다"며 우리를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직후에 사경을 헤매던 방글라데시인 준토가 백혈병으로 밝혀져 병원 중환자실에서 옮겨 치료를 받았으나 결국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다. 값비싼 영양제 덕택으로 기력을 조금 회복한 후에야 떠듬떠듬 입을 열어 고향의 가족에게 보내어 달라는 요청해 왔다. 사실 하루에 100여 만원씩 올라가는 병원비를 감당할 수도 없거니와 본인의 의사를 존중하여 대사관측과 상의하여 귀국을 시켰다. 결국 준토는 의사들의 소견대로 15일만에 유명을 달리했다. 그러나 단 하나 위로가 되는 것은 그의 마지막 소원대로 가족들 품에 안겨 영원히 잠드는 것 하나를 이루어준 일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불치이거나 사망자는 감면대상이 아니다'는 원칙 때문에 아직도 치료비가 그대로 남아 있고 헌혈카드를 100여장 모아 제출하면 병원비 중 수혈료는 감면해 주겠다는 약속만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토는 편안히 잠들었고 마을의 모든 이웃들과 친척들이 한국의 따뜻함에 감사를 드린다"는 가족들의 전언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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