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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7/02

조금은 기뻐할 일.

...이라고 말을 할 수는 있지만

한편으로는 운동을 잠시 접을 것 같아서 좀 그렇네요.

(누군가 운동=삶 이라고 말하지만...)

 

바로 다음 달부터 무일푼으로 다산에 있었는데

돈벌이를 하게 되었어요.

물론 면접까지 보고 바로 결정한 것이지요.

 

바로 용인 신갈에 있는 녹십자.

그 중 혈액 중 혈장(혈액을 가만 두면 위에 묽은 부분임)을

가지고 알부민이나 응고인자 등등 '혈액제제'를 만들 때

원료(?) 중 샘플 체취하거나 운반하는 등의 일을 합니다.

 

다행히 제가 예전에 잠시 알바로 바로 그 곳에서

비슷한 파트에서 일을 한 적이 있었고 수혈을 해야 함에도

워나 공급 부족이 되어서 일이 없어 시간이 남을 때

가끔 앞서 한 걸 도와준 적이 있어서

나름대로 익숙하긴 한데 그게 5년전이 되었네요.

 

그래서 가끔의 특근이나 파견근무 즉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건 이외에는 주5일근무에 임금이 100만원정도...

4대보험은 기본이고 집 근처에 통근버스를 탈 수 있고

밥도 주니... 누군가 '귀족'이라고 비아냥거리면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나름 괜찮습니다.

다만 오래 일해도 소용없다는 걸 빼고는...

 

그리고 면접에서 병역부분를 묻지 않고

예전 경력으로 무조건 오케이이라 말해서 좋았는데...

문제는 실제 일터가 다른 곳인데 버스로 가기가 어려운 곳이어서

조금은 기우뚱하네요.

 

그럼 전 주중에 열심히 현장에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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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흙색이여 안녕. 그리고 Hi! Blue - 기결수 방으로 이동...

앞서 증인 한 분이 방을 옳긴 후 몇몇이 기타방에 들어 왔지요. 그 몇몇은 이후 '바다이야기'로 난리가 났지만 성인오락실을 운영하면서 그 걸로 밥벌이를 하는 분이 있었고 공익근무요원에 있다 2번째로 무단 결근을 하여 법정구속으로 들어온 이가 있었지요.

 

그리고 누군가 '병역거부권이 인정하면 징병체제가 무너진다'고 한 인간에게 한 소리를 하듯이 필리핀에서 몇 년동안 거주를 하였다가 그 때가 되어 자진귀국과 함께 징역살이를 선택한 여호와의 증인이 들어왔지요.

 

특히 성인오락실 사장님은 그 당시 수원지검 모 검사가 성인오락실과 조폭와는 연계성이 있을 거라고 잡아들었는데, 자신이 한나라당 당원이라고 하면서 민주노동당 당원인 저와 나름 사상 논쟁(?) - 별 다른 건 아니고 비전향 장기수에 대한 유무 논쟁 - 을 벌었졌죠.

 

그러다가 개천절도 지나더니 10월 4일 아침이 되더니 담당 직원이 절 '전방' 즉, 방을 옳길 준비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앞서 출역신청을 하였기에 나도 여기서 일하게 되었다는 듯한 설렘과 함께 봉사원 등에서 준 물품과 많은 책들을 이불 속에 넣어서 그 때가 오기를 기다렸지요.

 

그 후 한 두 시간 후 담당 직원이 절 나오라고 하였고, 방 사람들과 해어짐의 손저음을 하면서 이 못난이에게 은혜를 주어서 고마움을 주며 두 달하고도 하루동안의 미결수는 끝난 채 짐을 들고 직원이 가라고 한 곳으로 갔습니다.

 

그 다음 저와 몇몇 이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처음 들어올 때의 공간으로 갔고, 상하의를 벗은 다음 수번줄만 때내었지요. 그 다음 세탁을 안한 듯한 퍼런 상하의 뭉치를 주었고, 전 아무거나 집어서 입었고 직원의 설명을 하였는데 역시 면회 횟수의 제한을 알고는 있었으나 좀 아쉽긴 하더라고요.

 

약간의 시간이 지나 각자 살 방을 찾아갔고 저도 그 무거운 짐을 들고서 제가 살 방으로 갔는데 그 곳은 나동 8층 17방. 역시 앞에 월드 메르디앙 아파트가 있어서 어두침침한 분위기였어요.

 

방 앞에서 도착한 후 짐은 방안에 넣고 그 사동담당 직원과의 대면하면서 대화를 했고, 잠시 후 그 방에 들어오니 처음인 것 자체가 뭔가 움츠리게 하더라고요. 다행히 조폭인 듯한 분이 없었고 인원수도 날 제외하면 3명뿐이어서 분위기는 좋을 듯 싶었으나 역시 작아진 난 변함이 없었지요.

 

그 다음 방 사람들은 짐을 풀어서 방 규칙에 의거하여 제 위치에 차곡차곡 맞추었지요. 그리고 실질 봉사원과 명목상의 봉사원의 방 시스템에 대한 설명을 하였지요. 그 중 핵심은 여기는 기결수 방이고 이감 가기 전에 잠시 머무는 곳이라고 하니 할 일은 하면서 편히 있으면 된다는 것이 기억이 나군요.

 

그런데 이방에선 왜 봉사원이 두 명이냐고요? 그 건 명목상의 봉사원 즉 소측에서 지정한 봉사원이 너무 오랫동안 하니까 이것저것 신경 쓸 일이 많다고 다른 분에게 위임을 하였거든요. 사실 지도자라는 위치가 남들이 보기에는 대단히 보이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중압감이 크잖아요? 그래서 내부적으로 넘겨 준 것이지요.

 

이후 저에게 할 예기가 있냐고 묻더니 전 당연하게 지문날인 문제로 영치금을 쓸 수가 없다는 걸 양해해달라고 말했지요. 그리더니 바로 봉사원이 직원 면담을 신청하는 등 그 싸늘함은 예상대로 이었지만 반응은 극악이었지요.

 

물론 그러한 불편에 대하여 이 사회에서 나름대로 받아줄 아량이라도 있겠으나 문제는 제한된 체제인 감옥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소측에서 최소한의 생필품 이외에는 지급하지 않는 현실에서 그나마 인간된 삶을 위해서는 돈을 써야 하는데 저와 같은 불순분자(?)에게는 솔직히 도움이 안될 뿐이지요.

 

잠깐의 시간이 지나 그 봉사원은 철문에서 나왔고 이 다음 교대하면서 제가 나왔지요. 그리면서 그 직원은 역시 알아보는 듯한 말로서 오해가 있었다고 하면서 잘 있으라고 하군요. 그럼에도 이후 뒤늦은 이 문제에 대한 해결 요구에는 인권위 진정 따위의 핑계로 기다리라는 답만이 들렸지요.

 

그래서 제 방으로 돌아왔는데 그 봉사원이 좋은 분이었는지 너그럽게 아니 어떻게든 대리는 듯이 나을 것 같거나 얼마 있으면 갈 사람이다라는 판단인 것 같이 받아 주었지요. 그 다음 오후에 두 분이 더 들어 왔으면서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좌충우돌한 하루는 끝났습니다.

 

그 다음날 기결수로서 처음 운동시간이 되었는데 그나마 햇빛이 들어와서 화사한 가동과는 달리 어두침침한 분위기가 감돌은 건 물론이고 구성원도 다르다보니 너무 달랐지요. 그리고 세월라 내월라 그냥 내버러 두었던 시스템과 달리 역시 30분이란 시간를 끝가지 지키려는 듯해서 약간의 부적응이 들었지요.

 

그리고 그나마 편안한 나날을 보냈는데 다시 '막내'로 들어오니 인원수도 적어서 아침저녁으로 설거지를 하게 되어서 좀 적응이 안 되었고요. 그래도 앉아서 TV를 보는 것과 달리 누워서 이불피며 보는 건 좋았지요.

 

그럼에도 직원이 이런 행동에 대하여 뭐라고 터치하는데 그 때 그 봉사원이 반격을 해주었지요. 특히 이분은 저같이 미결수에 있다 기결수가 된 경우와 달리 모 교도소에 있다 구속 전에 있던 사건으로 검사가 기소하여 재판을 받으려 온 상황이었는데 징역말로는 '추가건이 떴다'라고 하지요.

 

그래서 이 징역살이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누구보다 알고 있었기에 직원과의 대응방법을 알고 있었고, 또한 국가인권위 진정에 대하여 자주 건수를 높여서 조사관에겐 악질적인 행동을 하였던 분이라 저와는 약간 코드가 맞은 듯 하였지요.

 

그러기에 다음 날 바로 출역 신청을 해주었기도 하였지요. 그런데 그 당시 취사장이라도 좋으니 여기에 남아 있고 싶다는 바램이 좀 강한 것 같았어요. 물론 취사장이 새벽부터 나와서 쉴 시간 없이 고강도 초저임금으로 일하기에 싫을 수 있지만 병역거부자이기에 이후에 어떻게든 좋은 자리로 갈 가능성이 있어서 그런 걸 믿었지요.

 

전 여기서 일하길 바라면서 하루들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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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께 그리고 어제에는...

그저께...

 

그 날은 목요일. 즉 민가협에서 주최하는 목요집회에

병역거부를 주제로 치른다고 하면서

소위 '비밀결사체' 주도로 모 병역거부자가 떡을 준비하면서

그 날 즉 2월 22일에 잡기로 하여서 갈라고 하였는데...

 

요즘 날씨가 좋은 것과 슬 때 없는 밤샘으로 인한

피로감과 '느림의 미학'으로 정말 늦게 출발해서 역시나

늦게 도착을 하였지요.

 

다행히 집회가 중반 쯤이었고

전 뒤에서 바라보며 몇몇 이와 인사를 나눴지요.

 

그러다 출소한 병역거부자들의 인사 출현이 되어서

반의 두려움과 함께 나와서 마아크 대고 인사를 하였는데...

 

아~ 역시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허해지는 내 머리속이란...

결국 어쩌할 방법 없이 주절주절 하며 성함을 부르는 걸로

마무리를 하였지요.

 

그런데 집회 끝나고 어느 어르신(보시면 아실 듯)이

우리들에게 민가협에게 고맙다고 하면서

정작 영치금이나 책을 보내는 건 양심수후원회인데

출소 후에는 전혀 우리 쪽에는 고맙다거나

인사를 하지 않는다고 정말 대놓고 말했는데...

 

물론 제 자신도 미안함이 드네요...

 

그래도 나름 민가협에게 소통해준 고마움이 있었기에

자신있게 말을 했으나 무슨 의도로 극한 서운함을

표현을 하였는지 모르겠네요. 

(아마도 이후 어떻게든 양심수후원회로 가서

훈계 좀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 후 성대 근처의 사무실(사실 가정집)에 가서

녹두 뭍힌 떡(뭔지 모르지만 정말 맛있었음)과 과일을

먹으며 민가협 어미니의 조언을 듣으며 앉았지요.

 

그러다가 끝이 나자 각자의 일정인지 아니면

분위기에 대한 부적응인지 모두 나가게 되었고

전 그 떡에 대한 약간의 미련이 있으나...

다른 곳으로 향해 갔지요.

 

그리고 어제...

 

어제는 병역거부자 용석 씨의 외출일이었지요.

다시 말해서 평택대행진 건으로 법정에 가서 재판을 받는 날이었지요.

 

 전 별 일이 없는데도 또 다시 무기력함과 졸음으로

또 다시 제시간에 늦게 그 법정으로 갔지요.

 

그런데 앞서 재판이 많이 있다보니 아직도 시작이 되지 않았고

뭐~ 밖에서 죄인(?)이나 방청객과 대화를 하였지요.

 

그 후 누군가 들어오라고 하였고 법정에 들어서니

앞서 누군가 판사가 바꿨다고 듣었는데 역시 판사가 바꿨군요.

 

우리들은 판사가 바꿔서 기대나 우려함이 들었는데...

역시 어린 사람인 듯한 재소자에게 반말로 대하는 등

저번 판사보다는 좀 격이 떨어진 듯하게 보였어요.

 

그래서 앞서 공판에서 진행을 많이 하려고 하였으나

불출석한 어느 분의 심문과 변론만 하고 검사가

그 당시 상해입은 의경과 전경의 증인을 요청하였고

이에 판사가 응하면서 심문을 하겠다고 하면서

다음 기일을 3월 22일 오후 3시

수원지법 410호 법정에서 한다고 끝났지요.

 

그런데 검사 쪽에서 증거라고 하면서 대충 40cm 정도의

증거 서류를 제출하였고 그 두 증인이 피고인 중 누구라도 지목할

가능성이 있어서 걱정이 만발하게 하였어요.

 

(특히 용석 씨는 사회자로 나와서 더욱 그 가능성이 높은데

혹시라도 실형이 나오지 않기를 빌 뿐이지요.)

 

그 다음 죄인(?)들과 방청객은 밥 먹으면서 대책회의를

하였지요.

 

아~참 그 날의 경우 앞선 공판보다는 오는 이가 많이 없었고

CO 쪽에는 오리, 여옥 씨만 왔었지요.

 

또한 용석 씨는 제 두상이 어떤지 궁금하다고 12부로 삭발하면서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사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는데

이쁜  걸 넣어달라고 하더니 그 결과물은 제가 보기엔

진녹색 군복점퍼(?)인 듯...(미안한 소리인데...)

그래도 따슷하게 입은 듯하게 보였지요.

 

그 후 공석이 남아서 우연치 않게 오리와 면회까지 가게

되었는데, 알 수 없는 어느 교도관의 연락으로

(아마도 용석 씨가 오리 '이모'에게 연락해 달라는 듯.)

버스타서 구치소에 가고 3시 까지 기다리면서 과자 먹으면서

나와 운동관, 병역거부운동 내부, 감옥 쪽에 대한 심대한 대화를 나눴지요.

 

그러다 3시 넘게 면회 신청이 되었고 그 짧은 짧은 10분동안

대화하고 해여졌지요.

 

그럼에도 지금까지 그 대화에 대한 답이 왜 안 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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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소리 없는 외침 - 뒤늦은 전자서신 개통과 외부에 기고하다.

2005년 9월 십여일.


그 날도 하루를 지나가기 위하여 방안을 버티고 있는데 사동 담당직원이 오더니 나에게 서류를 내밀면서 쓰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 내용을 보더니 '정보공개청구서'이란 서류인데 명칭으로는 무슨 대단한 걸 요구하는 듯 하지만, 외부의 사람이 재소자에게 이메일처럼 보내는 전자서신이나 영치금 금액확인, 면회(접견) 확인을 하는데 쓰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앞선 서비스를 이용을 하려면 재소자 본인의 정보, 즉 이름과 수번을 공개하는 걸 동의하라고 이런 서류를 작성하는 것인데, 전 이미 이러한 걸 알았지만 본인확인을 오직 지문날인(무인)으로 처리한다는 서류 문구를 본 적이 있어서 주저하였지요.

 

그런데 밖에서 하도 뭐라고 해서 서명으로 하라고 해서 쓱싹 써서 적었고 이틀 후 이런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보낸 이에게 양해를 구해야 한데 무단으로 올리게 되어서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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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신인 : 813(수번) ○승규
* 거실(작업장) : 가6동 01층 10호()
* 수신기관 : 수원구치소
* 발신인 : 안○○
* 서신내용 : 승규야 나다...

 

엊그제 면회 다녀오고 나서 사람들에게 면회나 편지좀 하라고 이야기 했는데 다녀갔는지 모르겠다.
그곳에 있으면 바깥소식이 많이 궁금하긴 할텐데 너무 조급해하진 말아라. 별로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까.

 

예상했겠지만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승규에게 관심을 가져줄 만큼 여유롭지는 않은 것 같다. 다산은 다산나름대로 당은 당대로... 나도 나대로..

면회 자주 못가더라도 이해주길 바랄뿐이다...^^;

 

항상 이야기하는 거지만 남들에게 너무 큰 기대는 하지마. 그렇다고 무시하라는 이야기도 아니다. 항상 내가 뿌린 씨앗만큼 거두는 법이니까.
괜한 충고하는 것 같다.

 

전자서신 통해서 소식 종종 전해주마.
처음엔 이것도 니가 지문날인 안해서 안되더라..
그래서 내가 민원제기 했더니 서명으로 바꿔서 처리했다고 하더군... 쩝.

 

인권잡지(사람)은 아마 매달 넣을꺼구..
녹색평론도 정기구독 해서 넣을께..
혹시 더 필요한 거 있으면 이야기하고..

 

추석전에 얼굴 보려 가마..

 

사무실에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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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 글을 보면서 처음엔 누군가에게라도 편지가 왔다는 사실에 기뻤지요.

 

그런데 내용을 보다 특히 '내가 뿌린 씨앗만큼 거두는 법이니까.'라는 문장을 보니까 2년여 동안 공들어 준비하며 인맥을 쌓더니 정작 수감하니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이가 없다는 현실에 대한 냉소와 분노가 쌓여서 그 문구가 너무나도 동감하게 하더군요.

 

특히 수감 전 그나마 저에게 지원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후 자기 일에 집중하다 보니 어려운 이에게 돌아보지 않은 것에 서운함이 들어서 '면회나 편지 숫자는 그 사람의 인간성에 비례한다'는 명제를 낳게 되었지요. 그럼에도 면회 오는 이에게 불만을 담은 말을 하였지요.

 

그런데 같은 날에 낮선 이의 편지가 왔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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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신인 : 813(수번) ○승규
* 거실(작업장) : 가6동 01층 10호()
* 수신기관 : 수원구치소
* 발신인 : ○○○
* 서신내용 :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승규씨
저는 민가협에서 일하는 ○○○입니다.
혹시 한 두 번 얼굴을 봤을 지도 모르겠네요.
생활하기에 어떠세요? 추석이 다가오는데 가족들이 많이 서운해 하시겠어요.

 

뜬금없이 연락을 하는 이유는 원고를 청탁하기 위해섭니다.
우리 소식지 '민주가족'받아보시죠?
그 소식지에 매달(8월호에는 못나갔지만) "나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라는 꼭지가 있어요.
그 꼭지 원고를 청탁하려고요.

 

그동안은 소식지에 오태양을 비롯한 비종교적 병역거부자들은 물론 여호와의 증인들 사례들도 여러차례 실었습니다. 민가협의 활동이 양심의 자유를 얘기하고는 있지만 아직 운동사회 내에서도 남성중심적 사고나 국가주의를 뛰어넘는 담론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는 것이 사실이기에 병역거부운동을 하는 이들의 얘기를 지속적으로 소식지에 담으려고 합니다. 뜬금없다고 생각하지 말고 쉬운 글로 원고를 써주시길 부탁드릴께요.

 

원고를 쓰신다는 전재로 설명하자면
병역거부를 결심하게 된 이유가 중심이 되겠지만 감옥가기전에 활동한 내용과 영치금 관련 지문날인 등에 관한 의견도 함께 주시면 좋겠습니다. 분량은 200자 원고지 15매 내외로 써주시면 됩니다. A4지로 치자면 두장정도 될 것입니다.

 

꼭 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원고는 우편으로 보내주시면 되고요.
마감이 넉넉하지는 않은데 다음주 목요일에 받을 수 있도록 되도록 빠른 우편으로 보내주시면 더 고맙겠습니다.

 

상황이 어떤지 잘 모르면서 갑작스럽게 연락하는게 실례가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듭니다.


그럼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잘 지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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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뜬금없는' 편지이었지만 저로선 할말이 많았지요. 특히 인권위 진정을 하였음에도 지문날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에 이러한 저의 입장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검열을 하지만 이런 시스템을 역이용을 하는 의미로서 원고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방에서 샤프와 지우개를 빌리고 편지지와 봉투를 얻어 아주 발랄하게 원고를 작성하여 우편물로 받은 310원짜리 빠른우편용 우표를 붙여 보냈는데 좀 늦게 보냈는지 결국 이후에 실리게 되었다는 답장을 받았지요.

 

그 후 저는 본 단체에 대한 소외감과 다른 이러한 은혜(?)를 입었는지 이따금 민가협에 편지를 보냈고 그 분은 그 힘겨운 해독 끝에 답변을 해주었지요. 물론 출소 후 바로 목요집회에 참석하여 감사의 뜻을 전하려고 하였는데 없다고 하여서 이후 직접 사무실에 가서 인사를 나눴지요.

 

그런데 문제는 당연한 심리이지만 제가 쓴 글을 제 눈앞에 보지 못한다는 성격으로 그 자세한 내용은 밑의 링크로서 보시길 바랍니다.

 

"갇혀있어도 평화와 인권은 소중합니다"('민주가족' 2005년 10월호)
 
그 후 몇 일 후에 김칠준 변호사(현 국가인권위 사무총장)가 변호인접견으로 찾아 왔는데, 앞서 말한 인권잡지 '사람'에 글을 기고하는 것이 어떻나고 물어 보더라고요. 특히 지문날인 문자와 심리공판 때 주민번호 육성발언 거부에 대하여 흥미롭게 보고 있다면서 그런 걸 중심으로 쓰리고 하더군요.

 

그런데 원고를 받는 방법을 우편이 아닌 변호사에게 직접 주도록 하라고 말하는데, 직원의 확인을 하면 공식적으로 줄 수 있지만 정 싫으면 원고를 숨겨서 몰래 주라고 유혹(?)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 글을 이해관계가 있는 다른 이에게 보여주기 싫지만, 그러한 절차를 거치는 것이 싫어서 저는 A4용지에 비좁게 원고를 쓴 다음 편지인양 '민가협 양심수후원회' 편지봉투에 원고를 넣고 공소장을 함께 넣어서 그 분이 오시길 기다렸습니다.

 

그리더니 변호인접견이 왔고 관복에 주머니가 상의 왼쪽에만 작게 있어 그 자리에 넣을 수가 없어서 저는 몰래 사타구니 반대쪽으로 바지와 팬티 사이에 봉투를 끼어 넣고 슬금슬금 걸어가 봉투가 아래로 떨어지지 않게 변호인접견실으로 갔습니다.

 

물론 양말을 신어 그 사리에 봉투를 넣는 것이 좋지만, 면회예약을 하지 않는 한 갑자기 연락이 오기에 그러한 준비를 할 수가 없었지요.

 

그런데 저의 이러한 어수룩한 행동에 교도관의 시선이 보일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았는데 무사히 피해갔고 김 변호사가 와서 자리를 잡자 바로 그 봉투를 바로 넘겨주었지요. 그 후 원래 10월호에 실리려고 하였는데 앞서 누군가 빨리 도착을 하게 되어서 11월호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그 글은 밑의 링크에...

 

… 관행, 관행, 관행! ('사람' 2005년 11월호)

 

그 후 또 다른 직원이 만기일 통보를 하였고 그 날이 2007년 1월 24일이었는데 봉사원 말로는 많이 안 준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다시 말해 형량이 짧아진 것 같지 않다는 것이지요.

 

또한 이번 내용과 다른 것이지만 예기를 더하자면, 불구속 원칙으로 구치소 내의 수용인원이 줄었고 싱크대 설치의 이유로 사동 전체를 비우게 되었어요.

 

그래서 직원이 재소자에게 빈 사동으로 데려가 이것저것 잔일을 시키려고 하는데, 물론 출력을 한 이들에게 시켜야 하지만 인원이 없는지 그 직원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환자가 아닌 방이 제가 있던 방이나 옆의 절도방에 있는 이들에게 일을 시키려고 하더라고요.

 

물론 미결수가 강제노역을 하는 건 안되지만 운동이나 면회가 아니면 움직일 일이 거의 없는 미결 생활이어서 그러한 잡일꺼리에 오히려 환영할 정도이지요.

그러다 옆의 절도방의 사람이 얼마 없어서 소측에서 다른 방으로 재배치를 한 후, 직원은 생생한 나이가 많은 기타방 사람들을 이용하게 되었고, 짙은 녹색 메트리스천 안쪽에 스폰지을 넣거나 방과 복도 사이의 창문을 제자리에 옳기는 일에 우리들은 동원을 받아서(?) 수행하였지요.

 

그리면서 빈 방 구경을 하면서 잠시 땀내며 노동의 기쁨을 느끼며 직원이 준비한 사이다를 마시며 일을 하였는데 누군가 무슨 대가가 있냐고 묻더니 사동담당 직원은 '(행형점수) 1점 더 줄께'라는 답이 나와 지금이라도 석방에 노심초사하는 재소자에게 염장(?)을 부렸다고 하나 뭐하나...

 

그래도 저의 이적행위로 그 직원에게 고생을 시켰는데, 이후 저의 행형점수표를 보았는데 그 직원이 일반적으로 2점을 주는 상황에서 3점을 주더라고요. 그 직원 나이도 많은데 근황이 궁금하네요.

 

그리면서 저와는 같은 선고일에 같은 형량을 받은 여호와의 증인은 구치소 안에 친형이 있다는 이유로 빨간 색 공범마크를 찍힌 채 이감을 할 우려를 안고서 기결수가 되어 전방갔고 저도 그 날을 기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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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데없는 강남 땅 휘젓기.

어제 아침. 어디 갈 곳이 없기에 푹 자고 있는데

어머니의 이 한마디에 어떻게라도 나가야 했지요.

 

바로 ' 친가 및 외가 쪽 친척들이 온다는 것'이었지요.

 

사실 어린 시절이외에는 이따금 만나도 무슨 할 예기가 없고

활동가이지만 실제 돈벌이 없이 보내고 있어서 취업이나

결혼(이미 비혼으로 살겠다고 각오함) 예기가 나올까바

짜증이 밀려 나왔는데...

 

더욱이 내 자신이 그들의 눈에는 군대 안 가서 감옥을 간

이해할 수 없는 인간으로 비춰질까봐 도저히 방안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날 아침부터 상 좀 내려놓거나 방 청소를 하라고 해서

일어나 이것저것 하다가 얼굴 씻고 바로 나가겠다고 말한 뒤

'하루 가출'을 하였지요.

 

다행히 친척들이 아침 식사를 하려고 올라고 하였으나,

좀 늦게 온다는 전화가 와서 천천히 나갈 준비를 하였고

정말 수년만(!)에 가족들이 모여 식사를 하였지요.

 

결국 아침 9시에 집에 나선 후 걸어서 남문을 거쳐 수원역으로 간 뒤

잠시 어디로 가는지 고심한 후 가까운 곳인 유행의 첨단을 달린다는

'강남'으로 가기로 하였지요.

 

그래서 시간을 보내려고 하였음에도 먼 거리로 전철 및 지하철을

통해 출소 후의 처음으로 고속터미널역에 내렸습니다.

 

그 다음 S백화점 지하층과 5층을 둘려보고 7호선을 따라

쭉 걸어간 뒤 그 중심인 '청담역'에서 시종에 달리는 듯히 걸어서

삼성역으로 향하였지요.

 

그래서 COEX나 지하 몰 그리고 H백화점를 둘려본 뒤

그 비싼 음식 사이에 가장 저렴한 컵라면 하나으로서 끼니를 채웠지요.

 

그 후 2호선을 타듯이 걸어가서 강남역 거리를 둘려본 후

어느 정도 시간이 되어서 교대역에서 타서 잡으로 갔습니다.

 

그래서인지 잠깐의 휴식 이외에는 거의 서며 걸어가서

왼발등에서 예리한 통증이 나네요. 아후~

 

특히 밤에 집에서 누우며 쉬는데 갑자기 친척 한 분이 전화가 와서

날 찾는데 정말 할 말이 없는데 무슨 알려고 하는지 정말...

좀 그랬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대신 받았는데 왜이리 나의 생각과는

왜국된 말만 하는지 한심함까지 들었고요.

 

결국 쓸 때 없이 하루를 보냈어요.

물론 오랜만에 낮선 거리를 하게 되어서 좋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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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당장의 기쁨을 위해 ‘양심’을 저당 잡힌다. - 감옥 안에서의 ‘빽’들...

선고공판이 끝난 후 기결수가 되어 확정방으로 올라가기 전까지 언 한 달 동안은 저에게 편안한 시절이었지요. 왜냐하면 ‘병역법 위반’으로 들어온 이들이 많이 수용하는 방 특성상 구속 후 한두 달 후에 있는 1심에서 집행유예로 출소하거나 실형을 선고한 즉시 항소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 바로 나가는 이가 많았거든요.


그래서 먼저 자리 잡던 이들이 몇 주후가 되어 방에서 나가서 제가 No.3이 되었지요. 그러기에 봉사원은 제가 나이가 많고 오래 있었다는 걸로 이따금 설거지나 청소를 하는 것 이외에는 이후에 들어온 사람에게 방내 시설의 사용법이나 규칙을 알려주거나 방내 업무(?)에 대한 기획 정도만 하는 역할이어서 편했지요.


그리고 위의 두 어르신 또한 성격이 나쁜 편이 아니라서 저에게 뭐라 터치를 하지 않았지요. 물론 다른 이에게도 마찬가지이어서 자화자찬으로 이 방이 편한 방이다 이라고 말할 정도이었지요.


하여튼 그렇게 파란 옷을 입을 때를 기다렸던 저에게 참 대단하신 분을 보았지요. 먼저 이후에 들어온 ‘군무 이탈자’인데 이 사람은 (지금도 근무하고 있어 실명을 말할 수 없고...) 모 법원에서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를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원 거주지는 서울 쪽인데 이 사람의 친형이 바로 그 모 법원에서 공무원으로 근무를 하고 있어서 좀 편하게 있으려고 여기로 끌어온 것인데...


본인의 말로는 구속된 것이 여자 친구와 어디 좀 갔는데 데드라인인 8일 동안 출근을 하지 않았다는 걸 몰랐다고 하면서 친형을 통해 이 사실을 무마하려고 하였는데 걸린 것이라고 하다군요.


그래서 이후에 경찰서에서 연락이 와서 자진 출두를 한 후 잡혔는데, 초범이어서 집행유예로 나올 것이라고 봉사원은 판단을 하였는데 문제는 심리공판에 간 후 선고기일을 알려주지 않고 구형량도 1년만 주는 거예요.


물론 본인의 말로는 그 법원에서 근무하고 있어서 검사나 판사들과 안면이 있다고 하였고, 추석 전까지 나올 수 있도록 말을 하였지만 통산 2주 터울로 정하기에 ‘빽’이 없이는 안 될까라고 보았지요.


그 후 나흘 후에 그 사람의 선고일이 나왔다고 직원이 알려주었고, 역시 그날 아침에 나간 뒤 정오가 되어도 오지 않은 채 방에 붙여있는 표도 뺐지요. 더욱이 이런 경우에는 통상 변호사를 사지 않는 것이 태반인데도 그 법원에서 잘 나가는 이를 샀다는 걸아니까 좀 씁쓸함이 드네요.


더욱더 확정방으로 가기 전쯤에 들어온 어느 ‘군무이탈자’의 경우 앞서 집행유예로 선고를 받았는데 유예기간 막바지에 같은 걸로 실형을 받고 법정구속을 당했다고 하면서 몇 주 후에는 앞선 결정이 ‘깨진다’고(소멸이 되는 것이 맞지만 이 쪽 용어로...) 말을 하여서 결국 변호사를 사야 공판연기가 가능하다고 판단을 하였지요.


그럼에도 문제는 부모님과의 연락이 오지 않아서 이 작전을 성공할 수 없을 수가 있어서 걱정이 태산 같았지요. 물론 이후 소식을 모르지만 아마도 이대로 구금시설에 살고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다음은 어느 전직 조폭인 듯한(대화를 듣어보니...) 근육질의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인데, 앞서 김지태 이장에 대한 글을 쳤지만 그렇게 오래있지 않게 놀라운 사실을 보았습니다. 바로 오후 4시 반쯤에 재소자를 방콕하게 하는 ‘폐방’의 잠금 소리 이후 도무지 알 수 없는 열쇠소리가 나는 것이에요.


그리면서 그 직원이 그 아저씨를 부르면서 나오라고 하더군요. 그리면서 그토록 듣고 싶었던 ‘보석’이란 말과 함께... 물론 저를 포함한 방 사람들 모두 이 사실에 기뻐서 축하한다는 말을 하면서 식기를 챙기고 나갔지요.


물론 그 분이 변호인 접견을 통해 보석신청을 할 것이라는 건 알려 주어서 미리 알고 있었지만 그 걸 실현이 되었다는 걸 보면서 내 자신도 어서 나가고 싶다는 심정이 들었지요.


특히 방에서 두 번째로 있는 ‘수청동 주민’에게는 더욱 참담한 심정이 들었지요. 이 분의 경우 지역의 공안사건을 담당하는 모 변호사가 아닌 ‘전관예우’로 벼락부자를 꿈꾸는 최근 퇴직한 검사출신 변호사를 선임을 하였는데 그 당시 철거민 투쟁에서 처음 사망사건이 나왔고 구속자도 26명이나 되어서 정말 비싼 돈을 주어서 빨리 출소를 하려고 발버둥을 치었지요.


그래서 장시간 공판이 길어져 있어서 그 일환으로 변호인 일동이 ‘보석’ 신청을 하려고 시도를 하였는데, 역시 담당 판사는 안 되는 반응이었지요. 그 후 ‘양심수 후원회’ 소식지를 보며 대다수에게 중형을 선고한 걸 보며 역시나 판사** 이라고 되묻고 싶었지요.


끝으로 저에 대한 말인데, 아마 추석연후 전일 것입니다. 오후 쯤 어느 직원이 갑자기 절 부르면서 나오라고 하더라고요. 통상 무슨 일이 있으면 그 걸 말하고 나오라고 하는데 앞서 지문날인에 대한 국가인권위의 진정확인으로 나오라고 한 것 이외에는 이런 경우는 없었거든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오더니 사동에 있는 직원공간에 기다리더니 앞에서 또 다른 직원이 다가와서 저의 신원 확인을 하더니 2층으로 내려가 조사실에 넣어 기다리라고 하더라고요. 그리면서 전 혹시 말로만 듣었던 특별면회가 아닌가란 상상을 하였지만 다른 것도 있겠지이라고 생각을 하였지요.


잠시 후 어느 직원이 절 부르면서 어느 사무실으로 가라고 하더니 제 앞에 어느 낮선 두 분이 있었습니다. 그리면서 본능적으로 정식명칭으로 장소변경접견 즉 특별면회이라는 걸 알게 되었지요.


그 다음 소개를 듣으니 ‘유선희’ 민주노동당 전 최고위원과 청년 담당 당직자이라고 하면서 지금 추석이 다가오는데도 갇혀진 ‘구속당원’에게 위안을 주려고 당 차원에서 특별면회를 하였다고 하네요. 이 때 저는 언제나 불만이 쌓였던 민노당에 약간 덕을 보았구나 싶었지요.


그리면서 저는 ‘지문날인거부’로 당하고 있는 불편에 대하여 해결을 요구를 하였더니 이미 중앙당에서도 알고 있으니 노력하고 있다는 지극히 사무적인 답변을 듣었지요. 또한 지역에서 ‘면회’나 편지 조직을 안하고 있는 등의 본인에게 너무 관심을 없다고 말하더니 역시나 지역위위원장에게 알아보겠다고 말했지요.


하여튼 이런저런 불만이나 요구를 말한 것에 고마웠지요. 그럼에도 제 성격이 나쁜 건 알지만 밖에서 무관심한 것에 불만을 표출한 대화이었지요. 그리면서 당내에서 병역거부에 관심있는 모 씨에게 와달라고 전하는 걸 끝으로 그 밖의 대화와 잠깐의 손을 만지는 걸로서 30여분의 접견이 끝났습니다.


이후 몇 번의 특별면회를 하였는데, 앞서 모 님의 특별면회에 대한 냉소한 듯 한 글을 보며 생각한 것이 있었어요.


바로 비록 짧은 시간의 면회이지만 재소자의 입장으로는 소중하거든요. 특히 최근 전국 행형시설에서 무인접견시스템이 도입한 후 여분 없이 정해진 시간동안 마이크를 통해 대화를 하니 감시당하는 건 싫지만 대동한 직원에게 몇 분이라도 시간을 얻어내었던 예전 시스템이 좋았다는 걸 느꼈어요.


그렇기에 마이크는 물론이고 서로에게 장벽이 되어버린 유리창 없이 시간이 넉넉히 주면서 직원 눈치를 보며 가끔 손을 잡을 수 있는 이 장소변경접견은 당사자에게는 정말 소중한 것임에도, 누구나 신청할 수 있지 못하고 국회의원이나 정부기관을 통해서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도 씁쓸한 느낌입니다.


또한 이러한 ‘빽’에 저항해야 함에도 이용해 버리는 공범이 되거나 추가 면회를 허용하라면서 단식을 해야 하는 투쟁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이 현실에 미안하고 감옥 내 다른 문제에 제기하지 못 하였다는 것에 고개가 숙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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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모교 사이트에 보니...

먼저 고교 사이트에 대하여 말하지면

기술력이 좋은 건지 홈피는 깔끔하긴 하는데

참 '대학' 배너가 덕지덕지 붙어 있어 조금은 짜증이 나군요.

 

그럼에도 눈에 띄는 건 공지사항에 나온

'2006학년도 대학진학현황'... 그래서 클릭해보니

참 상전벽해라는 말처럼 주변에 아파트 단지가 생기니

소위 명문대도 가긴 진핵하였구나 싶네요.

 

그 목록을 보면 " 연세대, 고려대, 성균관대, 한양대, 경희대, 

중앙대, 동국대, 아주대, 숭실대, 단국대, 세종대, 숙명대,

상명대, 호서대, 서원대, 한신대, 경기대, 건국대, 백석대,

한라대, 경동대, 호원대, 인하대, 수원대, 강남대, 나사렛대 등등 "... 

 

더욱이 내가 졸업할 때에는 수시 모집이 처음이어서

숙명여대에 진학한 이가 있었고 내가 진학한 대학도 두 명만이

합격받아서 그나마 괞찮다고 부르는 정도이었는데...

 

참 부럽더군요.

물론 '학벌사회'에 징글징글하게 싫어하지만 과거의 어둡고

불운한 시절이 끝이 났는 듯 해서 좋아 보이네요.

 

그럼에도 올해도 S대는 나오지 않았네요.

심지어 농대라도 들어갈라고 기를 썼던 시절을 안 나로선

다음엔 과연 되는 것인지 궁금하고요.

 

그리고 교직원 명단을 보며 아직도 살이있는

선생님(왜 붙여야 하지?)이 있지만 공립학교로 가서

사라진 이도 있어서 언제 찾아가야 할 것인데 싶네요.

 

또한 대학 학과 홈피에도 본 즉

처음엔 모 교수의 정년 퇴임 소식이 보였고

역시나 '취업 이데올로기'에 편승 당해 어디로 취업을 하였는지

학번과 이름(실명으로)을 쫙 보여 주는데...

 

지금 내 자신이 어디라도 밥벌이를 하려고 있는 걸

감안한다면 개인정보를 공개하는 것이 문제있는 건 물론이고

'취업'에 대해서도 좀 짜증이 나더라고요.

 

그 중 나에게 가장 큰 생각은

지금 당장 모교에 찾아가서 병역거부자이면서

'무임금유노동'의 활동가라는 걸 보여준다면 참 우습겠지요...

 

특히 '빨갱이'라는 걸 안다면 더욱 웃길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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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알 수 없는 무기력함이란...

요즘 전 핸드폰(저로선 필요감이 없으나 주변에서 하도 성화쳐서...)등의

마련을 하면서 용돈이라도 벌어야 해서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지요.

 

그러던 중 모 주류회사에서 꺼리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비록 숫자는 적지만 잔업 없고 집에서 멀지는 않으면서

특히 요일 및 날짜를 협의해서 그 일정만큼 일할 수가 있어서

활동가에게도 굉장히 땡기는 것이어서 저로선

신청을 하고 싶었는데...

 

수감 한 걸 제외해도 몇 년동안 일을 하지 않았던 저는

대인관계이나 의사소통에 약간의 장애(?)가 있고

병역에 대한 '커밍아웃'에 대하여 준비하지 못 하였는지

육체이나 정식으로 힘들다는 건 물론이고 참 두려움이 드네요. 

 

그리고 오랜만에 밥벌이를 한다고 마음을 먹긴 하였는데

집에서 같이 서식하는 '참새'도 밖에 안 나가려고 해서

내가 일꺼리를 보여주며 제발 취업해라고 말을 하였음에도

정작 내 자신은 알바라도 하려는 걸 못하는지...

 

이 무기력의 때인가?

 

차라리 로또나 당첨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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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무슨 일이?

어제는 좀 바쁜 나날을 보냈지요.


먼저 그저께 수원구치소에 가서 용석 씨 추가접견을 시도를 하였는데
직원이 횟수 초과로 매정히 거부당해 돌아가는데...

집에 들어서니 서식하고 있는 '참새'(친누나)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돼지(나)! 수원구치소에서 연락이 왔는데 다이어리 찾아가라고 하더라고...'

 

처음엔 하도 그러한 걸로 겁주며 놀렸던 적이 있어
무시하였는데 들고 갔던 백팩 안에서 뒤져보니
오~ 내 자신이 왜 이러지... 없네?

 

그렇습니다. 제 다이어리가 구치소 민원실에 두고 왔고
그러한 사실을 모른 채 있다가 밤 늦게에서야 알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분실 자체를 '난 정말 몰랐었네~'라고...

 

참 그 다이어리엔 중요한 것이 있어서
언제나 유무를 확인하는데 앞서 지갑을 통째로 날아가 버린 때가
언제쯤인데, 20대 말에 접어들은 지금 서서히 '건망증'이
걸리고 있으면서 '점점 더 멀어져 간' 나 자신에 우울해 지네요.

 

그래서 어제 또 구치소에 가서 다이어리를 되찾았고,
이참에 지갑이 있었냐고 물었더니 없다고 직원이 말하더군요.

 

지금도 그 지갑이 잃어버린 걸로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참새'가
나의 기억감퇴에 대하여 나('새'니까...)와 같다고 놀리는데... 휴~

그 후 국가인권위로 갔는데 고민을 하게 되었죠.


바로 활동보조인 총력집회이냐 아니면 유엔 자유권규약 토론회이냐...
원래 집회 참석을 위해 온 것이었는데, 토론회에서 병역거부 관련 부분이
있어서 여차저차해서 토론회로 선회하여서 갔죠.

 

지금 춥다보니 역시 같은 단체의 활동가도 거기로 갔더군요.
이 토론회에서는 발제 → 관련부서 입장 → 토론 순이었는데
전 국방부 관계자도 있어서 그 분의 말을 귀담어보니...

 

역시 올 3월중에 병역거부의 인정유무에 대한 검토 완료이나
6월중 결론이 나올 것이라는 것 이외에는 별 다른 '펙트'는 알려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국방일보 1월 30일자에서 대통령이 군부대에 방문하면서
“군 복무제도 변경은 꼭 필요한 것으로 청년 인적자원 활용 측면에서
학제 개편과 함께 긴 시간을 두고 점진적으로 군 복무제도가 합리화될 것”과
“청년 인적자원 활용과 병역 의무 형평성을 위해
복무 기간을 포함한 군 복무제도 개편과 학제 개편,
복지·봉사근무 등을 포괄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라고 말해서 이 사안에 대하여
뭔가 보고를 한 듯 싶다고 그 관계자가 추측하였지요.

 

또한 그 관계자의 개인적 입장인지 아니면 홍영일 님의 언질을 받았는지
발표 중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라는 명명을 자주 하여서 저로선
뭔가 좋은 일이 나올 듯 싶은데 절 모르겠군요.

 

그 후에도 토론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더 이상 듣을 것이 없고
그 집회에 가야 해서 나갔고, 인권위 앞부터 동화면세점 앞까지

행진에 동행하였지요.

 

그럼에도 장애인 투쟁에 처음으로 가서 몇몇 활동가의 안면이 있어
같이 갔음에도 이 알 수 없는 낮설음이 느꼈지요.

 

그리고 스스로 소수의 길을 선택한 한 사람으로서
활동보조인제도에 관련하여 가장 큰 수혜를 줄 수 있는 집단에 속함에도
이제야 (보잘 것 없지만...) 연대를 하였다는 것에 미안함이 드네요.

 

심지어 어떤 장애관련 활동가가 사회복무제과 관련하여
탈시설화를 요구하는 입장과 달리 역행할 수 있다는 의문을 제시한 적이
있어서 뭔가 오해를 풀어야 할 필요성이 느꼈거든요.

 

하여튼 이것저것 생각하며 천천히 집에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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