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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추상과 구체의 변증법: 제1장 (5)」 『총명한 유물론』 제2집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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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개념과 그것의 분석으로부터의
몇 결론들
이제 위 내용을 고려하여 인간 개념을 고찰해 보자. 인간이란 무엇인가? 언뜻 보아서는, 그 문제는 말도 안 되게 단순해 보인다. 우리 각각은 어떤 특정한 관념을 이 단어와 연계시키고, 이 관념에 기초해서 어떤 다른 존재나 대상으로부터 인간을 쉽게 구별한다. 마르크스 전의 논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공통 감각을 지닌 모든 개인이 인간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마도 어떤 다른 개념도 철학자들 사이에서 이것보다 더 신랄한 논쟁을 야기하지는 않은 것 같다.
형이상학적(반변증법적) 견해에 따르면, 이 개념을 정의하는 것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전혀 어렵지 않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 종의 모든 개별 대표자[그 시대 생산양식에서 지배계급, 또는 자의로써 ‘가장 일반적이라 여겨지는 생활 양식을 누리는 집단’]에게 동등하게 내재되어 있지만, 다른 어떤 존재들에게는 그렇지 않은 일반적 요소를 추상화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권고를 수행하려는 시도는 근본적인 철학적 의미가 있는 수많은 어려움에 즉각적으로 부딪히게 된다. 이러한 추상을 하기 전에, 어떤 살아있는 존재들이 인류에 속할 수 있고, 또 어떤 존재들이 그럴 수 없는지를 결정해야만 하는 문제가 나타난다. 결코 형식적 성격이 전혀 아닌 고찰들이 그 즉시 여기에서 작용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적 존재’로서 인간이라는 그의 유명한 정의를 내오는 데서 노예를 고려하지 않았다. 노예는 하나의 다른 ‘종’, 즉 말을 하긴 하지만 ‘도구’에 포함되었다. 그 자신이 속한 계급의 이데올로그로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오직 자유로운 시민의 활동만이 ‘진정으로 인간적인’ 것이었다.
인간 개념에 관한 초보적인 분석은, 그것이 계급적 존재와의 투쟁, 계급적 세계관, 그리고 결코 비당파적이거나 순수하게 학술적이지 않았던 일정한 인간주의 해석과 무수한 끈으로 얽혀 있다는 것을 즉각적으로 드러낸다.
부르주아 체제는, 봉건적 질서에 맞서는 투쟁 속에서 자기 주장하며, 봉건제가 인간성에 관한 왜곡되고 거짓된 선입견에 기초한 데 반해, 자신은 인간의 진정한 본성에 부합하는 유일한 구조라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의 우월성을 입증했다. 현대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그들은 사회주의가 ‘인간 본성의 요구들’과 양립하지 않으며, 그것은 오직 “자유 기업” 체제 아래에서만 충족됨을 입증하려고 노력한다.
이와 관련해서 진보적인 프랑스 작가인 베르코르1의 소설에서 묘사된 상황을 분석해보자.2 일반화되어 있으며, 적확하고, 위트있는 방식으로 그 소설은 현대 세계의 대립적인 전형적인 인간관을 그려내고 있다. 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미지의 생명(creature) 공동체가 열대우림의 외딴 지역에서 발견된다. 현대 과학에서 유행하는 몇 기준에 따르면, 이들은 유인원이다. 하지만 다른 기준에 따르면 이들은 사람이다. 한 가지 점은 명백하다: 이것은 동물적·생물학적 세계와 인간적·사회적 세계 사이의, 과거에는 알려지지 않은 경이로운 이행 형태이다. 요점은 그들이 동물로부터 인간을 분리하는 인식하기 어려운 경계를 건넜는지 아닌지이다.
이는 순수하게 아카데믹한 문제, 그러니까 생물학이나 인류학 전문가들이나 취급할 그런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늘날 이것은 단지 순수한 아카데믹한 문제가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 트로피는 (작가의 창조물이 불리는 방식) 곧 다양한 이해관계 및 관점 간 대립의 중심이 된다. ‘이들은 사람인가 동물인가?’라는 하나의 추상적인 이론적 문제는 아주 명확하고 구체적인 답변을 요구한다. 그 소설의 주인공은 의식적으로 이 존재들의 하나를 죽인다. 만약 트로피가 사람이라면, 그는 처형되어야 할 살인자이다. 만약 그들이 동물이라면, 범죄의 구성요건(corpus delicti)에 해당하지 않는다. 같은 문제가 늙은 성직자를 괴롭힌다. 만약 트로피가 사람이라면, 그는 자기의 영혼을 구제할 의무와 사례의식을 행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만약 이들이 단지 동물일 따름이라면 어떤가? 이 경우 그는 눈이 멀어 펭귄들에게 세례한 성 마엘의 신성모독을 재현하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또 다른 강력한 이해관계는 트로피를 이상적인 노동력으로 보는 산업체(industrial company)의 이해관계이다. 노동조합도 계급투쟁도 모르며 생리학적 한계도 뛰어넘는 훈련된 동물─자본가의 관점에서 무엇이 더 나을까?
트로피가 발견된 영역을 소유한 산업체는 이것들이 회사의 사유 재산을 구성하는 동물이라는 점을 증명하려 노력한다. 트로피의 본성에 관한 논쟁은 수백의 사람들, 수십의 이론들 및 학설들을 참여시키고, 그 범위는 더 넓어지며 문제 자체는 더욱더 복잡해진다. 그 모든 게 매우 다양한 대상과 가치들에 관한 논쟁으로 발전한다. 그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엄격하고 분명한 방식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기준을 숙고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처음 볼 때보다 더 어려운 과제임이 밝혀진다.
만약 특정 ‘인간 속성’이 선호된다면, 트로피는 인간의 범주에 포함될 것이고, 만약 다른 것이 선호된다면,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특징들의 계열을 고안하는 것 역시 도움이 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 경우 문제는 그러한 특징들의 수가 몇인지가 되기에 그 어려움은 그대로 남기 때문이다. 트로피가 가지고 있지 않은 인간의 특징들의 수를 늘림으로써 자동적으로 트로피를 인류 밖으로 내보낸다. 특징들의 수를 줄여 이미 알려진 사람과 트로피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만을 남김으로써 인류의 가정 속에 트로피를 받아들이는 정의를 얻는다. 사고는 악순환으로 들어가게 된다: 트로피의 본성을 규정하기 위해 이미 사람에 대한 정의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트로피를 호모 사피엔스의 한 종으로 포함할지 말지 결정하지 않는 한 누구도 사람을 정의할 수 없다.
게다가 각각의 특징에 대한 해석은 즉각 폭발적인 논쟁을 초래한다. 사유란 무엇을 이해하는 것인가? 언어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노동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 등등. 이런 개념들의 어떤 의미에서 트로피는 언어와 말 모두를 가지고 있는 반면에 다른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다. 다시 말해 사람이 가진 각각의 속성에 대한 논쟁이 인간의 개념 자체에 관해 벌어지는 것과 같은 정도로 불타오른다. 토론 끝이 눈에 보이지 않으며, 토론은 가장 일반적인 철학적 개념의 영역에 도달하지만, 더 큰 정렬과 격정으로 불타오를 뿐이다.
그 논쟁은 특히 그 주제가 어떤 생활 양식이 ‘진정으로 인간적인 것’인가, 어떤 삶의 조직 형태가 ‘인간성에 합치’하는가, 그리고 어디에 이 ‘본성’이 존재하는가에 닿을 때 첨예해진다.
인간과 비인간 사이를 엄격하게 구분 짓게 하는 ‘일반적이고 본질적인 특징’을 설정하려는 모든 시도는 계속해서 아주 오래된 문제에 부딪힌다. 그러한 특징은 오직 인간과 그의 가장 가까운 동물적 조상 사이의 경계가 오직 사전에 그어져 있어야만 규정될 수 있다; 그러나 규정되어야 할 그 ‘일반적 특징’을 머릿속에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그 경계선을 그릴 수 있겠는가? 매우 찬 물과 매우 뜨거운 물을 구분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미지근한 물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의 돌로는 언덕이 만들어지지 않고, 두 개의 돌도 마찬가지이다. 얼마나 많은 돌이 있어야 언덕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탈모가 있는 사람이 대머리로 되는 그 지점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러한 명확하게 구분된 경계가 과연 존재하는가? 그것은 단지 분류의 편의를 위해 그려진 자의적인 상상의 선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것은 어디에 존재하는 것인가? 그것은 권력자들이 그것을 그리고자 하는 곳에 그어질 것이다─이것이 소설 속 주인공이 도달하게 되는 확신이다. 실제로 주관적 관념론자들─실용주의자, 도구주의자 등─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권력자들에게 넘겨준다. 그들의 목소리가 곧 진리의 기준이 된다; 모든 것은 그들의 의지와 변덕에 종속된다.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은 사람들이 아직 사람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가 어떠하기를 원하는지 합의하지 못했다는 사실로부터 비롯된다─이것이 소설 속 주인공이 철학을 하는 방식이다.
실천적 경험으로부터, 인간의 일반적이며 본질적인 특징이 처음 보기에 생각만큼 쉽게 발견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 소설 속 주인공들은, 철학적 및 사회학적 개념들 속에서 해결책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후자의 진리에 대한 기준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여기서 모든 게 다시 원점에서 시작된다. 베르코르와 그의 주인공들은 이 질문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해답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것이 ‘일면적’으로 보인다. 베르코르는 ‘인간들의 물질적 생산에서의 현실적 관계’로부터 출발하는 개념이 ‘인간적 연대의 다른 형태들’을, 무엇보다도 ‘의례적 철학’을 무시한다고 본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세계에는, 인간적 연대가 물질적 생산이 아니라 사냥, 전쟁, 혹은 토템적 의례 위에 세워진 부족들이 많이 있다.” “현재 3억의 힌두인을 가장 강하게 결속시키는 것은 그들의 후진적인 농업이 아니라, 그들의 의례적 철학이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작가의 의도에 따라, 인간 존재에 대한 일반적·본질적 기준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정의와 관념론적 기독교적 정의 사이에서 흔들리며, 어느 쪽도 감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은 변증법적 유물론과 기독교를 화해시킬 수 있는 제3의 것을 찾고 있는 것이다.
베르코르는 이 책의 러시아어판 후기에서 이렇게 썼다: “각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이며, 그리고 나서야 플라톤, 그리스도, 혹은 마르크스의 추종자가 된다. 나의 견해로는, 그러한 기준으로부터 출발하여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 사이에서 접점을 찾을 수 있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 그들의 차이를 강조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이념적 차이와는 무관하게, 인간의 본질은 어떤 특정한 교설에의 귀속에 있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인간은 무엇보다도 먼저 … 인간이다”라는 사실 속에 있다. 이것이야말로 베르코르가 변증법적 유물론의 ‘일면적’ 견해에 맞서 제시할 수 있었던 유일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대답’은 우리를 다시 출발점으로 되돌린다 ―즉, 어떠한 확정된 내용도 부여되지 않은 단순한 명칭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 동어반복에서 벗어나려면, 사고의 전개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베르코르가 매우 생생하고 재치 있게 개괄한 입장은, 오늘날의 첨예한 문제들과 고통스럽게 씨름하면서도 아직도 스스로에게 그 문제─즉, 휴머니즘의 고귀한 이상들을 구원할 길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해답을 내리지 못한 서방 지식인 계층의 일부가 가진 태도를 매우 잘 표현하고 있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그 본성상, 그 이상들에 적대적임을 명확히 본다. 그러나 그들은 공산주의를 받아들이는 것을 감히 하지 못하는데, 그것이 ‘사고의 독립성’, 곧 인류의 사고하는 일부가 누린다고 믿는 허위의 ‘특권’을 상실하는 일이라고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인류의 이 일부가 현대 세계의 두 개의 현실적 극 사이에서의 선택을 두고 고뇌하는 동안, 본래 단순한 이론적 문제 하나하나가 모든 비례를 넘어 극도로 복잡하고 완전히 해결 불가능한 문제로 불어나며, 형식논리의 가장 정교한 도구들을 동원하여 이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동어반복: A=A, “인간은 인간이다”에 이르게 된다. 현대 인류의 각 개별적 대표자가 모두 갖고 있는 추상적으로 동일한 속성을 찾아내어 인간을 규정하려는 탐구로부터는 그 이상의 것이 나올 수 없다. 이러한 공리(公理)에 기초한 논리는 여기서 아무것도 해낼 수 없다. 보편적 정의 속에서 표현되어야 할 인간의 본질은 결코 각 개인에게 내재하는 추상이 아니며, 인류의 각 개별적 대표자가 개별적으로 지닌, 그러한 동일한 특징이 아니다. 이러한 길을 통해서는 인간의 보편적 정의를 결코 얻을 수 없다. 여기에서는 보편과 개별의 관계에 대한 변증법적 유물론적 이해에 기초한 다른 종류의 논리가 요구된다.
이 본질은 모든 개별자에게 내재하는 일련의 추상적 특징들 속에서는 결코 발견될 수 없다. 아무리 그것을 찾아본다더라도, 보편자는 여기서 발견될 수 없다. 이러한 길을 통한 탐구는, 가장 정교한 논리의 도움을 받는다 하더라도, 결실이 없다. 이 점을 잘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가 미국 철학자 구스타프 E. 뮐러(Gustav E. Mueller)3의 『변증법』에서 발견된다. 그 책을 보면, 저자는 헤겔로부터 무언가를 배운 듯하다. 그는 심지어 헤겔의 “대립물의 상호침투”, “과학적 명제의 발전에서 모순이 수행하는 역할”, “의식과 자기의식의 관계” 및 그 밖의 많은 명제를 자기 것으로 흡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형식적 ‘변증법적 박식함’은 헛돌 뿐이며, 결국 공허로 귀결되고 만다.
“만일 인간이 자신을 인간과 동일시할 수 없다면, 그는 인간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그가 자기 자신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할 수 없다면, 그는 인간에 대한 경험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4 뮐러의 인간이 형식적 변증법 도식의 규칙에 따라서 자기 내부에서 수행하는 일련의 ‘동일시’와 ‘구별’은, 그것들의 창조자 자신조차 풀어낼 수 없는, 이해 불가능하고 복잡하게 얽힌 구성물들로 그를 이끈다. 이 허위인 변증법적 논리의 최종 결과는 다음과 같다: 즉, 인간은 너무나 복잡하고 모순적인 존재이므로, 그를 연구하면 할수록 그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다. 상호작용하는 개별자들의 복잡한 총체 속에서 뮐러가 간신히 고립시킬 수 있었던 유일한 ‘일반적 특징’은 결국 ‘반성의 힘’과 ‘반성에 대한 사랑’임이 드러난다. “그의 진정한 인간성은 이 반성의 힘 속에 있다. … 그리고 그 자기가 그 자신을 더 잘 알게 될수록, 그것은 더욱 의심스럽고 불확실하게 보인다. 이 의심스러운 개별자 속에 절대를 포괄하는 것, 그것이 플라톤이 ‘에로스’, 곧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인간의 진정한 자아는 ‘사랑’이다.”5
여기서 ‘반성의 힘’을 식별해 내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무력함이 훨씬 더 뚜렷이 드러난다. 인간의 본질은 물론 이와 아무 관련이 없다. 여기에서 표현되고 있는 것은, 순전히 한 철학자의 [머릿속] 본질, 그리고 자신이 사유하는 방식을 사유하는 것에 대한 그의 애착일 뿐이다. 이 모든 것에 대해 뮐러 자신을 나무라는 것은 매정할 뿐만 아니라 무익하다. 그의 사유의 무력함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일면적이고 추상적인 심리학─즉, 대중의 실제 생활과 투쟁으로부터 완전히 유리된 지식인의 심리학, 오직 자신이 사유하는 방식을 사유하는 방식만을 사유하는 인간의 심리학─을 만들어 내는 조건들에 그 책임이 있다. 만약 뮐러가 이러한 ‘사유의 사유’를 ‘진정한 인간성’으로 보고 있다면, 그의 처지를 이해하기는 쉽다: 어쨌거나 인간에게는 어떠한 위안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현실의 인류, 곧 노동하고 투쟁하는 인류는, 고립 속에서 무력한 사유와 그것에 대한 무력한 애착을 기르는 개인주의 철학자의 개별성을 자기 본질과 동일시하는 것에 결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현대 인류의 본질, 그리고 그를 통해 얻어지는 인간의 보편적 정의는, 물론 철학자가 가장 세심하게 주목해야 할 주제이다. 세계에 대한 명확한 시야는 이 문제에 올바르게 접근하기 위한 첫 번째이자 필수적인 전제이다. 그러나 또한, 현대 인류의 모든 개별적 대표자에게 각각 내재하는 ‘일반적이고 본질적인 속성’을 찾는 데서, 그리고 보편자를 단순히 동일성으로 환원하는 데서 해답을 구하도록 하는 논리가 아닌 더 발전된 논리가 필요하다. 그러한 논리는 공허한 동어반복 외에는 아무것도 산출할 수 없다. 게다가, “일반적인 것을 찾으라, 그러면 그대는 본질에 대한 지식을 발견하리라”라는 추상적 표어는, 일반적인 것이 추상되는 사실들의 범위를 설정하는 데서 자의성과 주관주의에 전적인 자유를 부여한다.
이 모든 게 논리학과 세계관 사이의 연관이, 일반화 작용과 삶과 철학에서의 일정한 당파적 입장 사이의 연관과 함께 분리될 수 없는 통일적 관계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진 일반화의 형식적 규칙 체계라도, 그것이 명확하고 진보적인 세계관 원리와 결합해 있지 않다면, 참된 일반화를 보장할 수 없다.
그리고 또 하나, 결코 덜 참되지 않은 사실이 있다. 진보적인 세계관은, 어떤 세계관에 대해서도 중립적임을 하나의 미덕으로 내세우고, 어떤 특정 세계관에 대한 비이성적·감정적 편향에 따라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얼마든지 적용될 수 있는 추상적 규칙들을 만들어 내는 데로만 스스로를 제한하는 그러한 논리학과 기계적으로 결합될 수 없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세계관은 윤리적 규범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정립된 사실적 개념에 기초한다. 그것은 전면적으로 논리적이다. 그러나 이 세계관을 정립하는 데 사용된 논리학은, 그 외부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명제들 속에 일정한 세계관 원리를 내포하고 있다. 노동계급과 공산주의 이상에 대한 가장 뜨거운 감정적 애착이라 할지라도, 오래된 순수 형식논리─‘비당파성’을 주장하는─를 사용하는 이론가를 구제하지 못한다. 그런 이론가는 결코 올바른 결론과 일반화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인간의 본질에 대한 자기의 변증법적 유물론적 규정을, 이 유명한 본질을 규정하려 했던 과거의 모든 시도와 대립시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의 본질은 각 개인에게 내재하는 추상이 아니다. 그것의 현실성에서, 그것은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이다.”6 이 명제는 단지 하나의 세계관적 및 사회학적 진리를 표현할 뿐 아니라, 변증법적 논리학의 가장 중요한 명제들 가운데 하나인 심오한 논리 원리를 표현하고 있다. 이 명제는 추상, 구체, 보편, 개별 범주들에 대한 이해를, 오래된 비변증법적 논리가 전제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제하고 있음이 쉽게 드러난다. 논리학의 언어로 번역하면, 이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곧, 각 개별 구성원이 공통으로 가진 동일한 속성을 추출함으로써, 종(種)의 본질에 대한 보편적 정의를 찾으려는 것은 헛된 일이라는 것이다.
종의 본질을 표현하는 것은, 아무리 애써도, 일련의 ‘추상’ 속에서는 찾아낼 수 없다.
인간 본성의 본질, 그리고 따라서 각 인간의 진정한 인간성은,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에 대한 철저히 구체적인 연구, 즉 인간 사회 전체와 각 인간 개인의 발생과 발전을 규정하는 법칙들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다.
인간 사회는 구체적 공동체의 가장 전형적인 사례이며, 사회에 대한 개인의 관계는 보편에 대한 개별의 관계의 특징적 사례이다. 이러한 관계의 변증법적 성격이 여기에서 선명하게 드러나며, 구체에 대한 추상의 관계 문제가 특수, 개별에 대한 보편의 관계 문제와 밀접하게 얽혀 있다.
번역: 노준엽 | 집행위원
2025년 9월 5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