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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의 세계화

>> 회의장을 찾아가는 길이 쉽지만은 않았다. 게다가 비까지 쏟아부었다. 그냥 여행길이었다면 근처 어디서 쉴 었다 갈 수도 있었겠지만 도착하기로 정해진 시간이 있어서 걍 빗속을 뚤고 달려달려 회의장에 도착했다. 무사히 도착한 기념으로 사진도 한 장 찰칵!

 

>> 비가 그치고 나타난 무지개, 조짐이 좋다!

 

여행 기간 중 참석했던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 국제회의는 내가 몰랐던 세상을 내게 보여주었다. 이번 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평화주의, 반군사주의자들은 모두 저마다 활동공간에서의 고민들을 가지고 와 국제적 시각에서 분석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하려 하였다. 물론 영어를 더 잘 했다면 더 많은 정보와 논점들을 챙겨들을 수 있었겠지만 앞으로 차차 알아갈 수 있을 거라 위안해본다.

 

>> 회의 장소에 도착한 후 너무 배가 고파 바로 저녁식사를 했다. 회의 참가자들 중 베지테리언들이 많아서(국제회의 참가신청서에 이에 대해 묻는 문항이 있었다) 베지테리언용 식사도 매우 훌륭했다. 동양인들은 많이 먹지 않을 것이란 편견을 깨고 우리는 엄청난 식성을 발휘해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 식사가 끝나고는 텐트를 쳤다. 텐트에서 자느냐 이 곳 숙소를 이용하느냐에 따라 참가비가 다르게 책정이 된다. 우리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텐트를 쳤다. 텐트족 말고도 걍 자연과 함께 담요 한 장으로 노숙(?)을 하시는 참가자도 있었다.

 

>> 회의가 그리 빡빡하지 않아 충분한 시간을 갖고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잠도 자고 오카리나도 불고 나와 영은은 한국의 병역거부 운동에 대해 발표할 자료도 만들 수 있었다.

 

우리는 밤마다 열렸던 바에서 술도 마시고 춤도 추면서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다. 이전에 만났던 반가운 얼굴도 있고 처음 보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이들이 앞으로 내 활동에서 든든한 동지이자 동반자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특히 작년 한국에서 있었던 회의에도 참가해서 이미 낯이 익은 르네 아저씨는 우리가 파리에 머무는 일주일 동안 갖은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고 우리 여행의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르네 아저씨와 함께 한 우여곡절 파리여행은 다음번에...


>> 밤마다 열렸던 바에서는 각국의 참가자들이 모여 함께 노래도 하고 춤도 함께 추었다. (맨 왼쪽에 반쯤 잘렸는데) 노래를 부르시는 분은 이스라엘에서 오신 분으로 음악으로 데모하시는 양반이다. 개인적으로는 별음자리표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미에서 온 친구들은 발군의 춤실력을 발휘했고 몇몇 친구들은 실력보다는 걍 열심히 추는 데 의의를 두고 나름대로의 해방춤을 선보였다. 한국에서 온 우리들의 춤실력도... ㅋㅋ 상상에 맡기겠삼.


>> 첨엔 그저 서먹하고 어색해서 한국 사람들끼리 놀기도 하였으나 마지막 밤에는 남미와 스페인에서 온 참가자들과 서로서로 데모할 때 추는 춤을 갈켜주면서 광란의 밤(?)을 보내기도 하였다.



>> 개막식 풍경. 젤 왼쪽에 서계신 분은 이번 국제회의 통역을 맡아주셨고 WRI Women's Working group 멤버이기도 하다. 파란 옷을 입고 머리가 하야신 양반이 이번에 새로 WRI Chair로 선출된 하워드 클락.

 

>> 회의장 내부 풍경. 이렇게 쭉 부스가 설치되어 있었다. DFG-VK는 이번 국제회의를 호스트 했던 독일 단체 중의 하나. 우리도 한 쪽 구석에 자그맣게 자리를 잡고 평화를 택하라 팩을 팔았다. 팩을 판 수익금은 독일에 망명해서 활동하고 있는 에리트리아 병역거부자들의 활동지원금으로 드렸다.

 

>> 중간에 문처럼 뻥 뚤린 곳 안쪽으로는 평화서점이 문을 열었다. 평화, 비폭력, 직접행동 관련한 갖가지 책들을 전시, 판매하고 있었다. 우리도 회의 끝나면 한국으로 부칠 요량으로 책을 좀 샀는데 결국 요금이 너무 비싸서 여행 내내 싸짊어지고 다녔다. -_-;;

 

>> 본격적으로 개막식이 시작되기 전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는 참가자들. 오른쪽으로 똑같이 흰색 티셔츠에 반바지를 맞춰 입고 얘기 나누는 사람은 환경, 기술, 비폭력 등 여러 가지 논문들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이름인 브라이언 마틴(왼쪽)과 이번에 새로 WRI Council 멤버로 선출된 스텔란 빈타겐이다.

 

>> 회의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으로는 이번 회의 기간동안 매일매일 진행될 주제별 그룹들의 홍보부스가 차려져 참가자들을 모으고 있었다. 나와 영은 날맹은 '살상하지 않을 권리(Rfight to refuse to kill)' 주제그룹에 참여하였고 가람, 나동, 아침은 '무기상인들(War Profiteers)' 주제그룹에 참여하였다. 그 이외에도 '경제세계화 속의 군사주의', '군대주둔', '시민들의 비폭력적 개입', '비폭력 전략과 세계화', '초보자를 위한 비폭력트레이닝', '비디오 액티비즘' 등 다양한 주제그룹이 활동하였다.

 

>> 이번 회의는 영어, 불어, 독어, 스패니쉬 4가지 언어로 동시통역 되었다. 통역부스 모습.

 

>> 부스 한 켠에 붙어있던 포스터. 예쁘다.

 

>> 회의장 밖의 모습. 한 참가자의 제안으로 이 곳 어디쯤에서 아침마다 요가 워크샵이 열렸다. 하지만 한 번도 못가봤다. -_-;;

 

>> 회의장 건물 바깥에 이렇게 염손지 산양인지가 뛰어놀고 있었다.

 

국제회의 개막을 선포하다.

 

개막식은 마이켄 쇠렌센(Majken Soerensen)의 사회로 시작되었다.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War Resisters' International, WRI)의 새로운 의장이 될 하워드 클락(Howard Clark)과 독일 DFG/VK(Deutsche Friedensgesellschaft/Vereinigte Kriegsdienstgegnerinnen, 독일 평화회/전쟁저항자연합)의 현 대표인 위르겐 그래스린(Jürgen Grässlin), 그리고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 현 의장인 조앤 쉬헨(Joanne Sheehan)이 첫 전체 모임의 발언자로 나섰다. 하워드의 발언은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레바논 혹은 아직 진행 중인 이라크와 같이 세계에 전쟁이 자꾸자꾸 발생되는 시기에 이 회의의 절박한 필요성과 대안적 견해를 계발할 필요성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었다.
또 다른 한편으론 처음으로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 국제회의에 참석한 나이지리아, 짐바브웨, 수단 그리고 한국의 참가자들에 대해 매우 기쁘다는 인사말도 덧붙였다.
위르겐 그래스린은 DFG/VK의 역사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DFG/VK는 4,500명의 회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독일에 존재하는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 7개 지부들 중 가장 탄탄한 단체라고 한다. DFG/VK는 1892년 베르타 폰 주트너(Bertha von Suttner)와 알프레드 프리드(Alfred H. Fried)에 의해 설립되었다. DFG/VK의 설립은 제1차 세계대전까지 프로이센 군사주의에 저항하는 것이었고 1927년 최대 30,000명의 회원들과 함께 20세기 르네상스를 목격하는 것이었다. 그들 중에는 카를 폰 오시츠키(Carl von Ossietzky)와 쿠르트 투홀스키(Kurt Tucholsky)와 같은 지식인들도 있었다. 그렇게 확장되어 가던 조직의 규모는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장악하던 시기 5,000명으로 감소하였다.
60년대 DFG/VK는 독일의 재군사화와 베트남 전쟁에 저항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독일의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차별적인 재판을 바로잡은 것은 DFG/VK의 큰 성과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오늘날 DFG/VK는 독일 연방군(Bndeswehr)의 역외개입(out of area-interventions)에 저항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그들의 장기적인 목표로 남아있는 군대를 없애는 것은 군사지출을 연간 5% 줄이는 것과 같은 작은 걸음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그래스린은 설명하였다. 이러한 전술에 대해서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에서는 매우 오랫동안 논쟁이 되어 왔으며 아직도 진행 중이다.
그래스린은 오늘날 42개의 진행 중인 전쟁이 있다고 계산했고 미국-이라크 혹은 인도-파키스탄과 같이 민족국가 간의 전통적인 전쟁보다는 내전이 늘어나는 경향이 있다고 보았다. 그래스린은 여전히 나토의 해산을 주장하고 있다. DFG/VK는 무기거래 반대 캠페인, 특히 독일 헤클러 & 코흘 G3 전투소총과 같은 소형무기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이 전투소총은 최근 다푸르(Darfour)/수단과 같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나라들의 시민들을 상대로 사용되고 있다.
그래스린은 비록 빈곤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전쟁을 끝장낸 집단의 능력에 대해 지적하였는데 이것의 매우 성공적인 사례가 소말릴랜드(Somaliland, 동아프리카해안지역)라고 한다. 신기하게도 이 평화로운 소말릴랜드가 유엔에 의해 인정되고 있지 않다.
그래스린은 죽은 이스라엘 사람 30명 당 300명의 레바논사람이 죽고 있다고 계산하였다. 희생자들의 대부분은 시민이다. 그래스린은 레바논뿐만 아니라 가자지역과 요르단강 서안지역에서도 이스라엘 군대가 철수해야 함을 명확히 요구하였다.
조앤 쉬헨은 세계화에 대한 이번 회의 주제가 참가자들 사이에 새로운 연결과 행동주의 네트워크로 이어질 수 있었으면 한다는 희망을 표현하였다. 그녀는 반세계화운동의 뭄바이 회의에서 아룬다티 로이(Arundhati Roy)의 감동적인 연설을 상기시켰다. 그녀는 또한 그녀가 만났던 인도 여성의 사례를 들면서 세계화의 귀결로서 가정폭력과 강간이 국가 차원이 핵실험과 연결되어 있음을 얘기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또한 우리의 차이에 대해 반추하면서 비폭력 혹은 페미니즘에 대한 우리의 정의가 같을 필요는 없다고 말하였다.
전체모임 말미에는 재밌는 게임을 했는데 이것은 서로가 질문을 하고 교환을 함으로써 참가자들이 서로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하워드 클락은 어느 누구도 스스로 쉽게 대답할 수 없는 16개의 질문이 담겨있는 인쇄물을 참가자들에게 나눠주었다. 유용하고 재미있는 질문들은 서로가 친해질 수 있도록 했으며 재미있는 반응들을 끌어내었다. “이번 월드컵에서 독일이 승리하길 바라는 사람을 찾아라.”

 

두 가지 운동이 함께?

 

제24차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 국제회의는 우리 모두가 지지하는 두가 운동이 함께 모일 수 있었다. 반세계화운동(혹은 “다른 종류의 세계화를 위한 운동”)과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로 대표되는 비폭력운동이 그것이다. 첫 번째 운동은 “운동들의 운동(movement of the movements)”으로 불려왔는데 왜냐하면 G8 정상회담 공격 혹은 이라크 전쟁 반대 등과 같은 반전캠페인을 조직할 때 대안운동, 인종차별반대운동, 페미니즘운동, 아나키스트운동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노동자운동(1995년 프랑스 파업과 2006년 학생-노동자 시위)까지도 함께 묶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세계화를 위한 이러한 운동들 내에서 아주 다양한 비폭력직접행동이 있어왔으나 전체로서의 운동은 스스로가 비폭력적이 되는 것에 대해 고려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인원이 많기 때문에 저항방법의 다양성을 고려하는 방식이었다는 것이 더 적합하다. 다른 운동, 즉 세계적인 비폭력운동은 보다 오래된 운동으로 세계적 차원의 캠페인을 조직했던 오랜 경험을 가지고 있으나 이 운동은 스스로를 반세계화운동의 일부로 여기로 있지는 않다.
함께 만나는 것의 첫 단계는 우리의 적은 누구이고 세계화 시대에 권력과 지배의 상황이 어떻게 변화 되었는가를 적절하게 분석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최근 세계화 과정에서 우리의 적은 누구인가?”
마리아 미스(Maria Mies)는 인도에서 여성운동에 참여했던 그녀의 경험을 끌어 설명하였다. 1997년 다자간투자협정(Multinational Agreement on Investments, MAI)에 반대하는 반신자유주의 캠페인에서부터 시애틀 세계무역기구 총회 시위까지 그녀는 이 모은 움직임이 성공적이었다고 느꼈다. 하지만 곧 그녀는 코소보,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목격하게 된다. 그래서 그녀는 이러한 새로운 전쟁들, 그리고 이러한 전쟁들과 세계화와의 연관성에 대해 분석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고 한다.
그녀에게 세계화의 단 하나의 행위자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대변자인 거대 초국적기업들이다. 그래서 무역과 경제는 더 이상 평화적이지 않고 전쟁은 이러한 경제를 끌어가는 원동력이 된다.
초국적기업들은 기업들이 원하는 것을 원하는 곳에서 생산할 수 있게 하는 권리, 어떠한 국가적 간섭 없이 기업을 운영할 수 있는 권리로 세계화를 정의한다. 이것이 우리가 국가를 상대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경제와 싸우는 이유이다. 우리는 세계경제전쟁 안에 살고 있고 그 곳에서는 시민사회와 전쟁사회 사이에는 아무런 국경이 없다. 세계화는 소규모 상인, 소농들, 많은 나라들의 생존능력을 파괴하는 거대 초국적기업의 자유를 뜻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테러리즘을 본다면 그것은 적에게 어서오십시오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테러리즘은 전쟁조직을 계속 가동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은 국경 없는 전쟁이다. 유럽에서 우리는 평화로운 삶을 사는 척 할 수 없다. 유럽 헌법은 이전의 군사적 개입을 기술, 경제, 그리고 성장과 같은 분야와 별개라고 선전하고 있다. 그래서 마리아 미스는 프랑스 사람들이 그러한 헌법을 받아들이지 않고 국민투표를 할 것을 요구한 것에 대해 매우 기뻤다고 하였다.
그녀는 우리가 우선 평화로운 사회가 어떨 것인가 생각하기 전에 이러한 현실을 봐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긍정적인 세계화라는 개념을 부정한다. 그녀의 슬로건은 세계화대신 지역화를!
마리아 미스는 오랫동안 다른 세계화운동에 참여해왔으며 특히 인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성운동에 함께하고 있다. 현재 그녀는 쾰른(Cologne)에 살고 있으며 퇴임한 사회학 교수이자 세계화에 관한 페미니즘과 생태주의 저서들의 저자이다.
주제별 그룹과 워크샵이 끝나고 오후 기조연설에서는 사이몬 하락(Simon Harak, 미국)과 앤 펠트햄(Ann Feltham, 영국)이 그들의 주제별그룹 주제이기도 한 “민간안보회사(private security enterprises)와 무기상인들”에 대한 분석을 이어갔다.
앤 펠트햄은 민간안보회사들이 국가경제의 역할을 점점 떠맡게 되는 것을 지적하며 민영화 전술을 비판했던 마리아 미스의 발언을 이어갔다. 무기거래에서 그것은 점점 더 그들의 이윤전략을 정부에게 지시하는 경향이 있는 록히드(Lockheed, 미국), 유럽항공방위우주산업(EADS, 프랑스, 독일), BAE 시스템(BAE-System, 영국) 사(社)와 같은 거대 기업들이다.
사이몬 하락은 최종적으로 정부를 기업들의 단순한 도구, 사적인 용무의 부속물에 불과하다고 얘기하였다. 그는 방위를 위해 1985년에 설립된 미국위원회(US-comittee)의 민간회사 로비스트들의 약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글자 그대로 180억 달러의 이익이 얼마만큼 인지 최선을 다해 우리에게 보여주려 애썼지만 그래도 실패하였다. 그것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많은 돈이었다. 과거 초국적기업들이 전쟁 바깥에서 이윤을 만들어 욕을 먹었으나 오늘날, 하락이 지적했던 것처럼 우리는 거대 기업들이 이윤을 위해 전쟁을 만든다.
대부분의 발언자들이 초국적기업들의 지배적 역할에 대해 강조를 했고 그것과 비교해서 다른 것들은 매우 부차적으로 취급되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세계화 과정에서 국가의 역할을 단순한 초국적기업의 마리오네트처럼 평가한 것은 매우 전형적인 분석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단순화는 르완다 대량학살, 밀로세비치의 세르비아 민족주의, 이라크의 후세인과 같이 지역독재자들이나 군대의 대량학살 등에 대해 간과하고 지나칠 수 있다. 세계화는 매우 복잡한 과정이고 그것에 대한 저항은 초국적기업, 군대, 경찰국가화 추세, 지역 군벌 등 매우 다양한 적들과, 목표를 가지고 있다.
하락이 테러와의 전쟁과 이라크에 대한 군사개입을 고찰한데 반하여 펠트햄은 유럽에 집중하였다. 사이몬 하락은 윤리학 교수이자 ‘전쟁저항자연맹(War Resisters League, WRL)’의 반군사주의 책임자이다. 그는 “죽음의 상인을 저지하라”는 이름의 캠페인에 집중하고 있다. 앤 펠트햄은 영국 ‘무기거래반대캠페인(campaign against arms trade, CAAT)’의 활동가이다.

 

세계적인 비폭력행동

 

이 대규모 운동은 비폭력직접행동의 훌륭한 실천을 다양하게 보여주는데 성공하였다. 거기에서 우리 모두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초국적 협력과 연대행동은 새로운 연결과 네트워크를 창조하였다.
팔레스타인의 비폭력활동가 시린 알-아잡(Shireen Al-Ajab)은 영국 주재 독일대사관에 의해 비자가 오래 거부당했었는데 다행히도 결국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녀를 테러리스트라고 추측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녀는 전체모임에서 이 여행에 대해서도 얘기해주었다.
유감스럽게도 독일 당국이 소말릴랜드의 사미라 자마 엘미(Samira Jama Elmi)의 비자를 승인해주지 않았다. 이것은 그녀가 이번 회의에 참석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 날의 전체 모임은 원래 계획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진행되었다. 사미라와 소형무기에 대해 발언할 예정이었던 폴 루스만(Paul Russmann) 대신 힐랄 데미르(Hilal Demir)와 안드레아스 스펙(Andreas Speck)이 터키의 빈군사주의 캠페인에 대한 발언을 하였다.
오전 모임은 바깥에서 온 평범한(?) 뉴스로 시작되었다. 레바논 전쟁이 400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그 중 380명이 레바논 시민이라는 것이다. 해서 군사주의와 전쟁이라는 환경 아래서 어떻게 비폭력적으로 저항할 것인가 라는 주제는 더 없이 긴급한 것이었다.
터키 이즈미르에서 온 비폭력트레이너인 힐랄 데미르는 먼저 터키 병역거부 운동의 역사를 소개하였다. 1989년 첫 선언으로 시작하여 19세기 초반 세계병역거부자 회의(International Conscientious Objectors' Meeting, ICOM)까지. 터키에서 최초로 공개적으로 병역거부를 선언한 오스만 무랏 울케(Osman Murat ϋlke)가 박해를 당하던 1996~99년 국제연대는 절정에 달했다. 병역거부운동 연합인 ISKD는 강연회와 비상네트워크를 조직했고 터키에 대표단을 파견했다. 오스만이 풀려난 후 ISKD는 서로 다른 목표를 갖게 되었고 그 결과 해산했다. 이 과정에 대해 힐랄은 그들이 다뤄야할 일종의 “군사주의”라며 한탄했다. 남성지배 때문에 여성들은 2년 간 따로 만나서 해결방안에 대해 논의했고 그 이후 그들은 운동에 젠더적 관점이 필요함을 얘기하고 토론을 요구하였다. 터키 운동에는 현재 많은 여성병역거부자들이 있다. 비록 여성에 대해 징병제가 실시되고 있지는 않지만 그들은 군사주의에 대한 거부를 공개적으로 선언한다고 한다.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 활동가인 안드레아스 스펙은 터키 정부에 병역거부를 인정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 유럽인권법원(European Human Rights Court)의 판결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었다. 그래서 오늘날 터키에서는 사회적으로 병역거부에 관한 법을 도입하는 것에 관해 심각한 토론이 진행되고 있다. 국제연대캠페인 동안 상호 기대치와 능력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언어의 문제가 발생해왔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은 터키 여성 병역거부자에 대한 책을 출판할 계획을 하였다. 그러나 하워드 클락은 병역거부자들의 존재가 터키 군대와 쿠르드 노동자당(PKK) 사이의 전쟁을 실제로 예방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킴으로서 포괄적인 긍정적 평가를 줄였다. 더욱이 스펙 또한 오늘날 병역거부자들이 존재한다고 해서 반군사주의 운동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했다.
레바논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은 오후 전체 모임의 초점이었다. 이 전쟁은 이전에 실행되었던 매우 풍부하고 다양한 비폭력직접행동을 무색하게 하였다. 특히 비폭력직접행동과 장벽건설에 반대하는 국제적 활동, 그리고 이스라엘과 펠레스타인 간의 모든 다양한 종류의 대화를 위한 그룹들의 활동들 말이다. 이러한 활동들은 아래로부터의 세계화의 사례들로서 고려될 수 있다.
몇몇 국제연대행동들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명령전략(dictating strategy)이라고 비판받아왔다. 국제적 그룹과 지역 운동가들 사이에 만들어진 관계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진정 무엇인가?
첫 번째 발언자는 앤지 첼터(Angie Zelter)로 국제여성평화봉사(International Women's Peace Servie, IWPS)에서 활동하고 있는 분이었다. 그녀는 먼저 중세 이후 유대인과 무슬림 공동체 사이 평화적 공존의 세기가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강조하였다.
3, 4년 동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는 뉴프로파일(New Profile), 분리장벽에 반대하는 아나키스트(Anarchists Against the Wall), 블랙런드리(Black Laundry, 게이, 레즈비언, 성전환자)와 같은 새롭고 젊은 다양한 비폭력 그룹들이 많이 생겼다. 그들은 국제연대운동(International Solidarity Movement, ISM)의 지원을 받고 있다. 비록 이러한 연대가 도움이 되는가 사실 방해가 되는가에 대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그룹들 사이에 토론이 있긴 했지만 그들의 행동과 자유행진은 성공적이었다. 적어도 이러한 초국적 네트워킹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만나고 함께 행동그룹들을 만들 수 있는 안전지대를 제공했다.
두 번째 발언자였던 도로시 나오르(Dorothy Naor)는 뉴프로파일이라는 반군사주의그룹의 활동가이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에 맞서는 많은 비폭력직접행동에 참여해왔다. 그녀는 보다 회의적이었는데 평화운동이 여전히 이스라엘 사회에서 주변부라고 강조하였다. 그녀에게 점령은 1967년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유엔이 이스라엘에게 영토의 55%를 배분한 1947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 비율은 겨우 6~8%였다. 그녀는 모든 여성의 50%가 징집되는 지구상 단 하나의 국가인 이스라엘을 군사화 된 나라로 설명하였다. 이러한 군사화 된 사회를 시민적, 진정으로 시민적 사회로 바꾸는 것이 평화운동의 목표라며 힘주어 말했다.
마지막 발언자는 팔레스타인인인 시린 알-아잡이었다. 몇 년 동안 그녀는 이스라엘과 아랍사람들이 함께 구성한 그룹에서 활동해왔고 나중에는 독일연합에서 활동하였다. 시린은 예루살렘에서 평화와 분쟁에 관한 연구로 학위를 받았고 최근에 영국에서 두 번째 학위를 공부하고 있다. 그녀는 팔레스타인 여성으로서 비폭력 운동의 전망에 대해 얘기하였다. 그녀가 비폭력에 대해 실천하는 근거는 3가지이다. 첫째 무슬림 여성으로서 그녀의 신념은 살상을 금하고 있다. 둘째 사실상 그녀는 앉아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도 총을 쏠 수도 없다. 그리고 그녀는 적과 닮아가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저항의 도덕률이 필요함을 느끼고 있다.
시린은 또한 1936년 영국 위임통치에 저항하여 6개월 파업을 벌였던 Ez Eddeen Alquassam 운동처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했던 비폭력저항의 사례를 우리에게 상기시켜주었다. 그러한 전통과 반대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는 폭력사용을 옹호하였다. 세상에 의해 이러한 전통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폭력은 첫 번째 인티파다(1987~1991) 기간에 나타났다고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첫 번째 인티파다는 마드리드 평화회의에 이르게 하였다. 그러나 소련 멸망과 걸프전쟁 이후 오슬로 평화협정은 마드리드과정(madrid process)으로 대체되었다. 시린에게 오슬로는 그들의 땅에 대한 일종의 자동분할로 큰 실수였다. 이후 1993년부터 이스라엘은 그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각종 장애물과 검문소를 이용해 압제를 강화했다. 이러한 비안간화 과정은 11명의 살아있는 목숨을 대가로 한다. 팔레스타인 자살폭탄이라는 현상은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도로 봉쇄에 대한 반응으로 1993년 처음 시작되었다.
심지어 시린의 시각에서 두 번째 인티파다의 첫 한 달은 폭력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지속적으로 억압적으로 무기와 폭탄을 사용한 전술을 강화했다. 서구 나라들의 세금으로 만들어진 모든 기반시설은 다시 파괴되었다. 종종 곧바로 복구되기도 했다. 이스라엘은 또한 국제연대캠페인을 방해하고자 했다. 가장 최근의 법률 중 하나는 전 세계에서 온 방문자들이 팔레스타인에 들어가는 것을 막는 것이다. 시린에게 팔레스타인은 미국에서 인디언을 위한 정부지정보류지에서 토착 미국인들이 살았던 것과 같은 삶의 형태인 것이다.
레바논 전쟁에 저항하는 우리의 대응행동으로 그녀는 남아프리카의 사례에서 성공적으로 실행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에 대한 보이콧을 유럽인들에게 요구하였다. 그녀는 그녀의 이해에 근거해서 거의 대부분의 팔레스타인 여성들은 비폭력저항을 실천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자살폭탄은 개인적인 실천이며 팔레스타인 집단적인 저항으로 봤을 때 중요한 게 아니다.
세 발언자들은 모두 새로운 전쟁이 시작된 이래로 지역에서 비폭력그룹들의 상황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에 관해 보여주었다.
토론에서 시린은 조금 있으면 두 국가 해법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 얘기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팔레스타인 국가는 원래 영토의 단지 22%만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필연적으로 팔레스타인 주류는 한 국가 건설이라는 결론으로 옮겨갈 것이라는 것이다. 첫 번째 인티파다가 진정으로 비폭력적이었던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그녀는 이스라엘은 심지어 언어폭력 등 어떤 것도 폭력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대답하였다. 그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함께하는 그룹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폭력의 행위자가 아니라 항상 스스로를 피해자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배웠다고 한다.
실지적 전쟁을 마주하고 있는 시린의 이야기는 감동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억이 있는 독일에서는 이스라엘과 유대인에 대한 보이콧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들이 나왔다. 차라리 이스라엘에 독일 무기를 공급하는 공급원에 대한 공격 등의 다른 방법과 전술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전략을 찾아!

 

활동가들은 비폭력직접행동에 어떤 전술을 취할 수 있을까? 그들은 “다른 세계화”를 위한 운동의 구조에 함께 해야 할까 아니면 그들로부터 떨어져 있어야 할까?
오랫동안 아래로부터의 세계화 운동은 세계은행(World Bank)이나 세계무역기구(WTO)와 같은 국제금융기구들에 도전해왔다. 이러한 운동들은 세계적으로, 대륙별로, 그리고 지역 사회포럼의 자체적인 구조들을 창조해왔다. 오전 전체모임에서 전 트라이던트 보습만들기(Trident Ploughshares) 활동가이며 현재 스웨덴의 고텐부르그 평화와 개발연구소(Gothenburg Peace and Development Research Institute)에 있는 스텔란 빈타겐(Stellan Vinthagen)은 위의 질문에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하였다. 우리는 “전쟁” 전술과 “용병술”을 개발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들로 능력을 길러 세계사회포럼에 함께해야 한다.
빈타겐에 의하면 이러한 “운동들의 운동”은 세계사회포험에서 사실상 힘을 가지고 있으며 무장투쟁조직과 마찬가지로 정당 정치인들도 참여가 허락되지 않는다고 한다. 누구도 세계사회포럼에 대해 말할 수 없으며 이 운동 내에는 다양한 운동들의 연합이 있다. 비폭력행동은 그 안에서 일정한 역할을 해왔다. 1976년 시브룩(Seabrook, 핵발전부지를 비폭력적으로 점거하는 경향을 만들었던 직접행동. 그 행동에서 합의에 의한 의사결정 방법이 개발되었다)에서 개발된 원형은 시애틀 반세계화 활동가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조제 보베(Jose Bove)는 비폭력행동을 옹호하고 있으며 지구적민중행동(People's Global Action)도 비폭력전통에 의존하고 있다.
빈타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상회담에 반대하는 캠페인들은 너무나 자주 폭력적 충돌로 귀결되었다는 것을 상기하며. 왜 그랬을까? 라는 질문을 던졌다. 빈타겐은 활동가들의 일부가 지식과 경험이 부족한 것뿐만 아니라 이러한 새로운 운동 내에 오래된 평화운동가들의 참여 부재가 원인이라 주장한다. 그것이 이 운동의 약점이라는 것이다. 빈타겐은 이어 그들이 기댈 수 있는 대안들은 어디에 있는가? 세계사회포럼 구조 안에서 누가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가? 무슬림들, 아프리카인들, 동유럽활동가들은 어디에 있는가? 질문을 던졌다.
세계적인 비폭력운동이 여기에 참여해서 이러한 약점들을 해결할 수 있을까? 이것의 의미가 바로 비폭력의 세계화이다. 그러나 빈타겐은 오래된 운동은 그것의 실천과 목표를 잃어버렸다고 주장하였다. 요즘에도 국가는 여전히 중요하지만 어떠한 세계적 기구도 유독 드러나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는 정부 없는 세계적 가버넌스가 있다. 대신에 민간기구들이 힘을 가져가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환경에 대처하기 위해 빈타겐은 세계적 규모의 투쟁뿐만 아니라 지역적 투쟁을 제안한다. 다차원적 접근, 협력관계 구축, 그리고 새로운 형태의 민주적 기구 개발. 간디가 말했던 것처럼 경제적 대안을 개발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현재는 기술이 발달한 시기(오픈소스 소프트웨어, 공정무역 등)이기 때문에 비폭력 활동가들은 그들의 활동방법들을 업데이트해야 한다.
토론에서의 반응들은 그의 전술적 사고에 대해 전폭적 지지를 보내는 것에서부터 이러한 전술들이 진정으로 비폭력에 대해 관심이 있는 젊은 활동가들에게 매력이 있는지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들까지 다양했다. 이러한 것들이 투쟁과 캠페인을 위한 수단으로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강요되는 것으로서 거부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토론 시간에 제기된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어떻게 우리가 이러한 운동들에 비폭력적인 성격을 강화할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가 다국적 회사들의 권력구조에 맞서 싸울 수 있을까? 이러한 관계에 있어서 시민불복종은 얼마나 중요할까? 전쟁무기상인들에 맞서 우리는 어떤 행동들을 만들 수 있을까? 어떤 목표들을 가질 수 있을까? 그리고 비폭력혁명을 달성하기위하여 우리가 어떻게 단순히 항의하는 것을 넘어설 수 있을까?
오후 전체 모임은 평상시와 다른 방법으로 개최되었다. 아쉽게도 초청된 발언자인 펠릭스 콜브(Felix Kolb)와 시안 존스(Sian Jones)가 참석하지 못해서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 의장인 조앤 쉬헨이 전 세계사회포럼 주최자인 자이 센(Jai Sen)과 함께하였다. 진행자인 하워드 클락은 생생한 토론을 위해 전형적인 발표대신 두 발언자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이 성공적인 운동을 하고 싶은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쉬헨은 시브룩과 같은 과거 성공적인 운동에 대해 우리에게 상기시켜주었다. 그것의 조직모델(합의에 의한 의사결정)은 전쟁저항자연맹 활동가들이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 회의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쉬헨은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이 여성회의를 시작하던 1975년으로 초점을 옮겨갔다. 그 회의에서 페미니즘과 비폭력에 관한 토론이 시작되었고 1992년 유명한 방콕 여성회의를 이끌었다. 그리고 쉬헨은 몇몇 서적들과 사회적 방어에 관한 국제회의를 인용했다. 그녀는 빈타겐이 제안했던 캠페인 계획과는 약간 의견을 달리했고 지역적 요구와 의식과정에 집중했고 풀뿌리 차원의 사례연구가 보다 많아져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다함께 하는 전술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뭄바이 세계사회포험의 공동주최자인 인도의 자이 센은 “다른 세계화를 위한 운동”주류의 문제가 있는 발전의 상황을 설명하였다. 세계사회포럼 참가자들이 중산층에 의해 점점 더 지배되는 시민사회를 상징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빈타겐과 대조적으로 자이 센(스스로를 아나키스트로 생각하는)은 대규모 행동과 보다 활동적인 참가자들의 연합을 위해 열려있는 전술을 옹호했다. 그는 트레이너들이 혹은 주최자들이 어떻게 활동할지, 그래서 그것으로 지역 공동체 사람들이 힘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공식화했다. 그는 나아가 어떻게 국가 구조가 진정으로 민주화될 수 있겠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토착주민들은 자신들 스스로가 사회의 주변부라고 보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를 중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시각은 그들의 힘을 만들어낸다. 주변화라는 이러한 서술(“궁핍한 사람들”)은 정말로 북반구 부자들의 시각이다. 자이는 세계사회포럼 구조 안에서 무장그룹의 활동가들이 토론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토론이 점점 더 독단적이 되어 가고 있으며 자유로운 공간을 창조하는 포용력이 줄어들어가거나 혹은 새롭게 대안적인 사회포럼이 만들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이 센은 세계사회포럼에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이 참여하는 것을 옹호한다.
토론에서는 두 명의 참가자가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의 세계사회포럼 참여에 반대하는 발언을 하였다. 한 여성은 지난 아테네 유럽사회포럼(European Social Forum, ESF)에서의 자신의 경험을 말하며 그곳의 많은 대표자들이 더 이상 반군사주의자들이 아님을 참가자들이 인지해줄 것을 원했다. 그녀는 반제국주의 그룹들뿐만 아니라 많은 트로츠키 그룹들이 아테네 회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으며 그 곳에서의 시위도 서로간의 물리적 충돌까지 갈 뻔했다고 한다. 칠레의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 지부에서 온 페라오 까발로(Pelao Cavallo)는 카라카스 사회포럼에 대해 비판했다. 소위 베네수엘라 차베스의 혁명에 대해 축하하는 잔치였다는 것이다. 그는 이 정부가 사회 안에서 주요한 군사적 힘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공식적으로 칠레의 병역거부는 인정이 되지만 실지로 거부당한다. 준군사조직들이 국가통제주의자 차베스의 하부구조에서 다시 부흥하고 있다. 카라카스에서 있었던 사회포럼의 경험이 목격했던 것처럼 보다 넓고 자유로운 공간과 관용을 믿는 사람들과 반대되게 차베스에 대한 비판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곳에서 차베스의 군사주의에 대한 비판은 세계사회포럼과 베네수엘라 당국자들에게는 파시즘과 같은 것이다. 점점 더 활동가들이 차베스를 지지해야 할 것인가 반대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결정적 질문과 맞닥뜨리게 된다고 페라오 까발로는 말했다. 그래서 모든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의 평화주의, 반군사주의, 반군사주의 페미니스트, 비폭력 아나키스트 참가자들도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전쟁에 반대하는 세계적 캠페인들!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의 국제비폭력운동과 다른 세계화를 위한 운동, 이 두 가지 운동이 서로 함께하는 것이 가능했던가? 첫째 날, 우리는 함께 활동하는 것의 실제적 가능성에 대해 토론하는 것으로 모임을 시작하였다. 무엇이 이러한 연대를 가로막고 있는가? 세계화 시대에 어떻게 권력구조, 자본주의, 가부장제가 구성되는가? 둘째 날은 세계적 규모의 비폭력행동에 대해 분석하는 것에 할애되었다. 최근 들어 다른 세계화 운동에서 비폭력행동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그리고 오랫동안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은 세계적 규모의 비폭력행동을 전파해왔다. 셋째 날, 이러한 분석은 세계화 시대 비폭력저항의 전략에 대한 실질적 토론으로 이어졌다.
전체 회의기간 동안 매일 반복해서 만났던 주제별그룹(theme group)의 활동 결과 발표와 토론에 의해 이러한 전략들은 보다 단단해졌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이러한 결과들은 다가오는 해 펼쳐질 활동들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이번 회의는 네트워킹 행사였다. 만약 워킹그룹들이 만나고 반전캠페인들이 시작된다면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은 이러한 회의 사이에서만 오로지 존재할 있다. 아마도 이러한 국제적 캠페인은 레바논 전쟁을 끝장내기 위해 필요할 것이다. 견고한 세계적 거부행위야말로 오로지 살상을 저지하고 뚫고 나갈 수 있다. 그리고 군대를 철수시킬 수 있다.


>> 국제회의 3일째 되는 날, 뜻밖의 손님들이 회의장을 찾았다.


>> 자전거를 타고 벨기에에서 모스크바로 평화순례를 하고 있는 'Bikers for Peace' 였다. 그 면면도 굉장히 다양했는데 이제 한 5살 정도밖에 안보이는 꼬마아이에서부터 다리 한 쪽을 잃은 아저씨까지. 참, 한국사람도 있었다. 독일에 살고 계신 분이었는데 집 앞으로 'Bikers for Peace'가 지나가는데 너무 멋있고 좋아 보여서 그 길로 자전거를 타고 따라나섰다는 분이다. 평화를 택하라 팩도 사주시고 우리를 격려해 주시기도 하였다.

 

>> 'Bikers for Peace'의 무대. 석유를 위해서 전쟁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며 모두 자전거를 타자고 외쳐서 참가자들의 우뢰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 회의가 끝나고 다시 길을 떠나기 위해 텐트를 걷었다.

 

>>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소나기와 함께 우박도 내려서 우리는 하루 더 이 곳에서 지내기로 하였다. 이 곳 회의장에는 실내 수영장도 있고 탁구대도 있어 탁구도 치고 수영도 하며 하루를 즐겁게 보냈다. 저녁엔 텐트를 치기가 너무 귀찮아서 우리도 하루 노숙을 경험해 보기로 하였다. 잼있었다.


>> 다음 날 길 떠날 준비를 모두 마치고. 근데 회의 기간 동안 친해진 외국 친구들이 부득이하게 먼저 간 사람들 식권을 걷어서 우리에게 주었다. 덕분에 우리는 돈 안내고 공짜로 하루 점심을 해결하고 또 광란의 밤을 보내면서 친해진 남미와 스페인 친구들이 몰래몰래 음식들을 싸들고 와서(회의 기간 동안 식사는 부페식으로 운영되었다) 길떠나는 우리를 응원해 주었다. 고마운 친구들이다.

 

>> 헤어지는 아쉬움을 사진으로. 서있는 사람들 왼쪽부터 스페인에서 온 츄치, WRI 런던 사무국의 안드레아스, 터키에서 온 힐랄, 아침, WRI Chair로 선출된 하워드, 나, 나동, 가람. 아래 줄 앉은 사람도 역시 왼쪽부터 오랫동안 평화운동 여성운동을 해온 WRI Women's Working group의 조앤, 미국에서 온 페트릭, WRI 런던 사무국의 하비엘, 스페인에서 온 요안나, 칠레에서 온 페라오.


>> 이번 회의에 아이들을 데리고 온 참가자도 여럿 있었는데 느므느므 귀여웠다. 젤 왼쪽에 서 계신 분은 미국의 'Veterans for Peace(평화재향군인회)'에서 오신 분인데 한국의 평택에서 근무하신 적이 있는 분이다. 평화를 택하라 팩을 달고 계셨는데 때문에 우리와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셨다. 과거 군인이었을 때 본인은 정말 바보같았다고 하시면서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평택의 얘기를 알았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 하비엘, 요안나와 함께 한 컷 더! 하비엘은 칠레에서 왔고 요안나는 스페인에 살고 있다. 둘 다 모두 스패니쉬와 영어에 능통하다. WRI 활동이 남미에서도 활발한데 이런 분들의 도움으로 남미 쪽과는 꾸준하게 연대를 해오고 있다.

 

>> 역시 하비엘, 요안나와. 요안나는 스페인의 'Women in Black'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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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캠핑장


>> 라인강변 가이젠하임이라는 마을에 위치한 캠핑장. 라인강을 따라 쭉 이런 캠핑장이 많다. 여기는 별로 유명하지 않은 캠핑장인데 우리도 원래는 좀 더 유명한 뤼데스하임 캠핑장에 묶을 예정이었다. 예상치 않게 영은이가 자전거에서 떨어져 팔을 다치게 되어 근처 캠핑장에 짐을 풀었다. 저녁거리를 사러 가면서 뤼데스하임 캠핑장을 슬쩍 스쳤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규모가 크고(수영장도 있다) 북적북적해 보였다. 이에 비해 가이젠하임 캠핑장은 조용하고 고즈넉한 분위기여서 좋았다.

 

유럽의 캠핑장은 좋다. 암튼 좋다. 특히 암스테르담이나 파리의 캠핑장처럼 대형화되어 있고 복잡한 곳보다는 라인 강변에 조그맣게 자리한 캠핑장이나 안트베르펜의 저렴하고 소박한 캠핑장들이 훨씬 좋았던 것 같다. 텐트를 치게 되면 시멘트나 벽돌로 만든 집보다 훨씬 자연과 가까이 만날 수 있다.



또 가까운 수퍼에 가서 비싸지 않은 먹거리들을 사다가 식사를 해결하면 적은 돈으로도 푸짐하게 배를 채울 수 있어서 좋다.

 

>> 우리는 한국에서 각자 일주일 분의 쌀과 가루카레, 채식주의 라면을 싸가지고 갔다. 첫 일주일은 그 덕분에 별로 끼니 걱정을 하지 않고 음식 땜에 향수병에 시달리지 않고 잘 지낼 수 있었다.

 

>> 유럽에는 ALDI나 colruyt 등의 큰 수퍼들이 많이 있다. 말하자면 한국의 이마트와 같은 곳. 이곳의 식재료들은 엄청 싸다. 세계화된 세상 속에서 분명 이렇게 싼 식재료들이 공급될 수 있는데는 여러 가지 인권적 문제점이 존재할 것이지만 걍 우리는 눈 딱감고 가난뱅이 자전거 여행자의 모드로 쭉 살았다. -_-;;


>> 종종 냉동피자를 수퍼에서 사서 저녁을 때웠다. 물론 맛있는 맥주나 와인을 곁들여서 말이다. 캠핑장에는 오븐이나 전자렌지 시설이 되어 있는 곳은 없기 때문에(내가 가 본 곳에서는) 점심쯤 냉동피자를 사가지고 밤중까지 자전거에 매달고 다니면 저녁 해먹을 때쯤에는 코펠에다 잠깐만 데워도 될만큼 알맞게(!) 녹아있다. 유럽의 냉동피자는 종류도 다양하고 베지테리언용 피자를 따로 팔아 선택의 폭이 넓었다.


가끔씩 만들줄도 모르는 서양식 음식도 만들어 먹었는데 나름대로 재미도 있고 맛도 있었다. 같이 여행했던 친구들이 대부분 채식가들이라 그것도 함께 여행하는 데 스트레스를 덜 하게 했다.

 

>> 우리가 저녁으로 자주 애용했던 내 맘대로 만드는 파스타. 토마토 페이스트, 양송이 버섯, 다양한 색깔의 파프리카만 있으면 준비 끝이다. 가끔 치즈를 뿌려 먹거나 반찬처럼 함께 먹기도 했다.

 

>> 또띠야. 이 음식이야말로 우리 유럽여행에서의 주식이었다 감히 말할 수 있다. 수퍼에서 파는 갖가지 채소(주로 피망, 양배추 등의 단단한 채소)를 볶다가 랩소스와 모짜렐라 치즈를 넣어 같이 볶는다.

 

>> 다 만들어진 속을 이렇게 또띠야에 말아서

 

>> 한 입에 쏘~옥! 그래 이 맛이야!!!

 

>> 파스타, 또띠야와 함께 우리의 주식 중 하나였던 야채국(?). 한국으로 치자면 머 즉석국같은 건데 푸슬푸슬한 밥에다 말아서 주로 아침에 많이 먹었다. 이 역시도 야채로만 만들어진 것이 있어 잘 애용하였다.


>> 이것들이야말로 우리의 주식! 다양한 맥주를 맛보고 싶었으나 금전적인 관계로 주로 싼 술을 전전했다. 와인도 가격이 무척 싸서 자주 애용하곤 하였다.


>> 안주로는 주로 냉동식품이 애용되었다. 난 생선을 안 먹기 때문에 맛보지 못했으나 맛은 걍 그랬던 모양이다. 나동, 지대로 썩소를 짓고 있다.

 

유럽의 새벽은 무척 춥다. 그리고 서유럽 쪽 여름은 비가 계속 오락가락하기 때문에 잘 때를 대비해서 두꺼운 옷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내가 가 본 캠핑장은 전부 뜨거운 물 샤워를 제공하고 있었고 브뤼헤의 캠핑장을 제외하곤(이 곳 캠핑장은 만원이어서 결국 그 동네 천사아주머니의 정원에서 텐트를 쳤다. 친절하게도 잘 곳이 없어 헤매고 있는 불쌍한 우리를 위해 정원도 제공해주시고 와인도 한 병 주시고 아침엔 따끈한 커피까지 끓여주셨다) 특별히 예약하지 않아도 작은 텐트 3개쯤은 칠 수 있는 공간이 언제든지 있었다(유럽의 캠핑장은 대부분 캠핑카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어떤 캠핑장은 아예 텐트를 허락하지 않는 곳도 있다).


>> 코블렌츠의 캠핑장은 라인강과 모젤강이 만나는 곳에 위치해 있다. 시설은 별로 좋은 편은 아니었으나 조용하고 편했다. 가람의 셀카 샷이지만 캠핑장의 분위기를 살짝 엿볼 수 있다.


>> 쾰른의 캠핑장. 쾰른 중심가에서 5km 정도 떨어져 있다. 역시 가람의 셀카 샷이나 살짝 캠핑장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 프랑스 릴르의 캠핑장에서 본 일몰. 프랑스 릴르에는 캠핑장이 많이 있으나 전부 도심에서 상당히 떨어진 거리에 있고 시설 또한 훌륭한 편은 아니었으나 사람이 거의 없어 한적했다.


>> 유럽의 캠핑장들은 대부분 캠핑카들이 중심이다. 몇 달씩 캠핑카를 세워놓고 쉬다가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그렇게 오랫동안 마치 별장처럼 캠핑카를 애용하기 때문에 캠핑카와 그 주변을 정말 잘 꾸며놓았다.


 

>> 캠핑장에서 이렇게 가끔 낮잠도 즐겨 주시고...


>> 춥고 배고픈 우리에게 선뜻 자신의 집 정원을 내주신 천사와 함께 사진 한 컷! 우리는 별로 드릴 것이 없어서 평화를 택하라 팩과 두레방에서 만든 엽서셋트를 선물로 드렸다.

 

>> 비가 너무 많이 오거나 근처에 캠핑장을 찾지 못했을 때는 가끔 유스호스텔을 이용하였다. 캠핑장에 비하면 엄청 비싼 가격이지만 그래도 심신이 지쳤을 때 우리에게 달콤한 휴식을 제공하였다. 비 오는 날 텐트를 치는 것은 정말 뷁이었다.

 

캠핑장에는 세탁과 건조를 할 수 있는 세탁실, 갓 구운 빵과 음료, 맥주, 와인 등을 파는 가게 등이 대부분의 캠핑장에 갖춰져 있고 수영장이나 테니스장 등의 시설이 갖춰진 캠핑장들도 있다.

 

>> 뮌스터 캠핑장 안에 있던 까페에서. 꽤 규모가 되는 캠핑장에는 이렇게 캠핑장 안에 바나 까페가 있다.


>> 캠핑장마다 있었던 놀이기구. 애들을 위한 놀이기구일텐데 아마 우리가 타서 스프링이 뿌러지지 않았나 모르겠다. 하지만 엄청 잼있었다.


>> 헤이그 캠핑장은 캠핑장 중간에 커다란 테니스장도 있고 옆에 이렇게 다양한 놀이시설이 구비되어 있었다. 아마도 애들 타는 놀이기구일텐데 우리가 하도 가지고 놀아서 애들이 손가락 빨면서 옆에서 쳐다만 보고 있었다.


>> 역시 애들타는 놀이기구. 쯔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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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자전거 타기

 


>> 왼쪽과 같은 모양으로 자전거 앞뒤 바퀴를 풀고 핸들도 풀고 페달도 풀고 해서 자전거나라에서 얻은 박스에 담에 뱅기에 실어왔다. 풀었던 차례를 생각하며 다시 오른쪽처럼 낑낑대며 조립했다. 그 모양이 신기했던지 사람들이 많이 와서 구경도 하고 어디서 왔냐고 물어도 보고 그랬다. 파리에서 한국으로 돌아올 때는 에어프랑스에서 파는 자전거박스를 이용했다. 그 박스는 커서 자전거 앞바퀴만 빼면 너끈히 자전거가 들어가 편했다.

 




>> 당초 계획은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마인츠까지 자전거로 가는 것이었으나 공항에서 물어보니 고속도로밖에 없어서 자전거로는 힘들다고 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기차에 자전거를 싣고 마인츠로 갔다. 공항에서 자전거 조립하느라 너무 오랫시간을 지체해서 기차 안에서 빵으로 밥을 대신하였다. 가능하면 자전거로 모든 도시를 이동하고자 하였으나 크고 작은 사고로 인해 국경을 넘을 때는 거의 기차를 이용하였다.

 

>> 자전거에 많은 지식이 없었던 우리는 여행을 하면서 하나하나 많은 것들을 알아갔다. 짐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나동의 자전거(아테네)는 뒷바퀴 스포크가 맛이 갔고 결국 벨기에서 아예 휠을 바꿔야했다.

 

>>유럽의 기차는 대부분 이렇게 자전거를 실을 수 있도록 따로 칸이 마련되어 있었다. 한국에는 물론 없다.

 

>> 독일에서 네덜란드 가는 기차에서 대강 저녁을 때우며 맥주도 한 잔!

 

>> 독일에서 네덜란드로 넘어갈 때도 여러 우여곡절 끝에 자전거로 못가고 뮌스터에서 기차를 타고 암스테르담까지 이용했다. 네덜란드 국경의 어느 도시에서 기차를 갈아탔어야 했는데 갈아타는 시간이 워낙 길어서 대합실에서 잠을 청했다. 중간에 관리인이 오셔서 나가 달라고 얘기했지만 사정사정 해서 하룻밤 신세를 질 수 있었다. 덕분에 하루 숙박비도 굳었다.

 

>> 파리 북역. 벨기에 겐트에서 파리의 북부 도시인 릴르까지는 자전거를 타고 어찌어찌 도착했으나 열악한 기상상황과 형편없는 자전거 도로때문에 릴르에서 파리까지는 다시 기차를 이용했다.

 

유럽의 자전거 도로는 정말 신기했다. 특히 네덜란드는 고속도로 옆에다가도 자전거 전용도로를 만들어 놓아서 정말 기운만 받쳐준다면 자전거를 타고 네덜란드 전역을 여행하는 것이 자동차를 끌고 여행하는 것만큼 편할 것 같았다. 또 자전거 도로용 표지판도 굉장히 잘 되어 있어 여행하는 내내 아주 감탄을 연발했다. 한국처럼 생색낸답시고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자전거 도로가 중간중간 끊긴다든가 턱이 있어서 중간에 내려 자전거를 들어야 하는 열 받는 시츄에이션이 없어 토탈 점수를 매긴다면 98점쯤?? 하지만 아무리 이런 유럽이라 할지라도 암스테르담이나 파리 같은 곳에서 자전거를 타는 것은 서울에서 자전거를 타는 것만큼 힘들었다. 차가 너무나도 많고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이어서 그런지 여유도 없어보였다. 서울만큼 빨리빨리 걷는 사람들 속에서 특히 여행자로서 느긋하고 천천히 자전거를 즐기며 돌아다닌다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다. 암스테르담에서는 하도 욕을 먹다 못해 자전거를 두고 걸어 다니니 이제야 편하다는 얘기를 서로 나눌 정도였다. 개인적으로 추천하고픈 코스는 강이나 운하를 따라 가는 코스다. 우리가 가 본 코스는 독일의 라인강 코스와 벨기에의 브뤼헤에서 겐트 사이의 운하를 따라가는 코스였는데 일단은 경치가 아주 끝내주고(라인강 코스에는 강변 양 옆으로 야트막한 언덕이 보이고 언덕 위에 고성이 아주 멋지게 자리잡고 있다. 브뤼헤 겐트 운하코스는 아주 한적으로 고즈넉했다) 강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니까 길을 잃을 걱정하지 않아서 좋다.


>>라인 강에는 다리가 정말 없다. 미관상의 문제, 환경의 문제 때문에 가능하면 다리를 놓지 않고 가끔 이렇게 배로 양쪽을 왕복한다고 한다. 배를 기다리면서 한 컷!

 

>> 라인강변에 위치한 고성. 40도를 오르내리는 무척 더운 날씨였지만 강변을 따라 달리니 힘든 줄도 몰랐다. 라인강변에는 이런 멋진 고성이 계속 이어진다.


>> 라인 강변엔 정말 자전거 도로가 잘 되어 있다.

 

>> 헤이그 캠핑장으로 들어가는 길. 여행 초반부터 팔을 다친 영은을 위해 날맹이 기사 역할을 선뜻 자청하였다.

 


>> 네덜란드 델프트. 헤이그에서 로테르담 가는 길에 있는 작은 운하도시다. 자전거 타고 가는 내내 이런 이쁜 운하들을 볼 수 있어서 기분 좋게 달렸던 곳 중 하나!

 

>> 결국 나동의 뒷바퀴가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네덜란드와 벨기에 국경의 어느 도시에서 나동은 결국 자전거로 벨기에까지 이동하기로 결정. 나머지는 우는(?) 나동을 떼어놓고 벨기에로 향했다.

 

>> 벨기에 브뤼헤에서 겐트 가는 길. 이 운하를 따라서 쭉 가면 겐트다. 어찌나 가는 길이 한적하고 고즈넉하던지 MP3를 끼고 음악을 들으면서 천천히 기분을 만끽하며 라이딩을 하였다.

 

>> 벨기에의 자전거도로 표지판. 벨기에 뿐만 아니라 독일과 네덜란드 모두 이렇게 자전거도로는 따로 전용 표지판을 마련해 두었다. 프랑스는 파리에만 있어서 그런지 자전거도로가 있긴 있었지만 잘 되었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 세느 강변에서 자전거 타는 아침. 세느 강변은 자전거 도로가 없다시피 했다. 그래도 기분 좋게 달렸다.

>> 네덜란드에서 본 자전거. 이렇게 네덜란드에는 생활형 자전거들이 아주 잘 보급이 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자전거 도둑도 만만치 않다고. 해서 유럽 나라 자전거들은 걍 굵은 쇠사슬로 자전거들을 묶어 놓는다.


>> 자전거를 타고 다니다 미술관같은 데를 들어갈 때면 가져간 자전거 열쇠들을 다 동원해 이중삼중으로 이렇게 묶어 놓았다. 신기하게도 한 번도 우리 자전거는 도난당한 적이 없다.

>> 로테르담 델프스하븐에 위치한 한 저전거 가게. 간판이 하도 예뻐서 한 컷 찍어보았다.

>> 여기는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자전거 가게. 각종 자전거 용품들이 잘 구비가 되어 있다. 아침저녁으로 펑크나는 바퀴를 견디다 못해 가람은 여기서 두껍고 튼튼한 타이어를 샀다. 유럽에는 꽤 괜찮은 자전거샵들이 도시마다 몇 개씩 있었다. 필요한 공구들이 잘 갖춰져 있어서 무슨 나사를 하나 잃어버리면 통째로 새로 사야하는 우리 실정과는 다르게 필요한 재료들을 그때그때 잘 공급받을 수 있었다. 가격은 글쎄... 대충 한국과 비슷하다. 하지만 자전거를 수리할 줄 모른다면 따로 수리해주는 사람에 대한 요금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가격이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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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하기

왜 여행을 떠나는가? 모르겠다. 왜인지. 벌여놓은 일 때문에 몸도 무겁고 돈도 없고 여행을 다녀와서는 다시 일상모드로 돌아오는 데 고달프기도 하지만 늘 여행은 내게 백 권의 책보다 더 큰 깨달음을 주는 시간인 것 같다. 뭐랄까 일상에서 금 거 놓은(사회적으로 그어놓은 것일 수도 있고 또 간혹 내 스스로가 그어 놓은 것일 수도 있는) 선을 눈 딱 감고 넘어가는 기분이랄까. 30살로 접어들 무렵 매년 여행(일주일 이상의 긴 여행)을 다녀야지 결심했고 올해로 6번째 그 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매번 여행에는 늘 가족이나 친구가 함께 했었는데 이번 여행에는 평생 오랜 친구로 남을 동지들 5명이 내 여행의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 네덜란드 로테르담 델프스하븐(Delfshaven)에서 이번 여행을 함께한 친구들과, 델프스하븐은 17세기 로테르담 도시의 모습을 보존해 놓은 지역이다.



이번 여행은 내 6년 여행의 역사(?)에서 비용 면이나 준비 면에서 굉장히 큰 프로젝트였다. 유럽 여행은 내 오랜 꿈 중의 하나이다. 물론 처음부터 자전거로 다녀봐야지 했던 건 아니었고 3년 전 자전거를 타기 시작하면서 꿈이 본격화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언제쯤 그 꿈이 현실화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입버릇처럼 얘기했던 '조금만 더 시기를 넘기면 기력이 떨어져서 자전거를 타고 여행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라는 조바심이 내 꿈을 어거지로 현실화시킨 셈이다. 또 마침 병역거부운동으로 2001년부터 꾸준히 연대를 해온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War Resisters' International, WRI)의국제회의가 독일에서 있을 예정이어서 이보다 더 근사한 계획이 있을 수 없겠다 싶었다.


>> 여행 내내 우리의 훌륭한 다리 역할을 해준 자전거들. 한국에서 패니어 가격이 넘 비싸고 종류 또한 다양하지 않아 걍 큼직한 가방으로 짐가방을 대신 했다. 패니어 달고 폼 나게 여행다니는 외국인들을 볼 때마다 부러워 했다는... 머 꼭 패니어가 있어야 하냐고도 할 수 있지만 패니어가 있으면 확실히 편하고 안전하다. 일단 균형을 잡기가 더 쉽고 매번 가방을 짐받이에 끈으로 묶었다 풀렀다 하는 수고도 덜 수가 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대략 만족! 그리고 자전거는 RCT나 아테네처럼 로드용 하이브리드보다는 엠티비나 내 것과 같은 철티비가 좋다. 나동의 아테네는 짐무게를 견디지 못한 뒷바퀴 스포크가 나갔고 가람의 얇은 바퀴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펑크가 났다.

 

티켓은 거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가장 싸면서도 대한항공과 마일리지 교환을 하고 있는 베트남 항공(775,000원)을 택했다. 게다가 한 번 베트남에서 스탑오버까지 허용하기 때문에 정말 가격대비 최강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베트남항공이 유럽에 취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와 프랑스 파리 편밖에 없었기 때문에 우리의 여행 루트는 티켓을 구입한 순간 이미 정해져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이번 여행에는 자전거 초보들도 함께여서 가능하면 오르막이 적은 서유럽 쪽으로 올자고 했었기 때문에 독일 라인 경변을 따라 국제회의 장소인 게세케(Geseke)까지 갔다가 네덜란드로 넘어와서 암스테르담, 헤이그, 로테르담을 쭉 돌고 벨기에의 안트베르펜, 브뤼셀, 브뤼헤를 거쳐 파리에서 아웃하는 일정이 세워졌다.

 

>> 베트남항공의 채식 기내식과 음료. 채식 기내식을 티켓팅할 때 미리 주문을 했으나 베트남항공 쪽의 착오로 주문이 접수되지 않아 갈 때 좀 애를 먹었다. 음료는 블러드메리라는 칵테일이었는데 맛은 별루... 베트남항공이 저렴해서 그런지 기내식과 음료 이외에 별다른 서비스는 없었다.

 

날짜

 

 

7월 12일

출국

 

13일

프랑크푸르트(Frankfrut Am Main) 도착

마인츠(Mainz)까지

오전 6시 반

42㎞

14일

마인츠 여행

휴식

15일

마인츠 → 뤼데스하임(Rüdesheim)

47㎞

16일

뤼데스하임 → 코블렌츠(Koblenz)

73㎞

17일

코블렌츠 → 본(Bonn)

82㎞

18일

본 → 쾰른(Cologne)

28㎞

19일

쾰른 → 뒤셀도르프(Dusseldorf)

39㎞

20일

뒤셀도르프 → 도르트문트(Dortmund)

78㎞

21일

도르트문트 → 파더본(Paderborn)

81㎞

22일

도착

 

23일

WRI Seminar

 

24일

WRI Seminar

 

25일

WRI Seminar

 

26일

WRI Seminar

 

27일

WRI Seminar 출발 →

 

28일

→ 

 

29일

→ 

 

30일

→ 암스테르담(Amsterdam)

323㎞

31일

암스테르담 여행

 

8월 1일

암스테르담 여행

 

2일

암스테르담 → 헤이그(Hague)

63㎞

3일

헤이그 여행

 

4일

헤이그 → 델프트(Delft) / 델프트 여행

14㎞

5일

델프트 → 로테르담(Rotterdam)

14㎞

6일

로테르담 여행

 

7일

로테르담 → 안트베르펜(Antwerpen)

104㎞

8일

안트베르펜 여행

 

9일

안트베르펜 → 브뤼셀(Brussel)

52㎞

10일

브뤼셀 여행

 

11일

브뤼셀 → 브뤼헤(Brugge)

96㎞

12일

브뤼헤 여행

 

13일

브뤼헤 →

 

14일

→ 

 

15일

→ 

 

16일

→ 파리(Paris)

316㎞

17일

파리 여행

 

18일

파리 여행

 

19일

파리 여행

 

20일

파리 여행

 

21일

파리 여행

 

22일

파리 여행 / 파리 → 호치민

오후 2시

23일

호치민 도착 → 무이네

오전 6시 32분

24일

무이네

 

25일

무이네

 

26일

무이네 → 호치민

 

27일

메콩델타

 

28일

메콩델타

 

29일

호치민

 

30일

호치민 → 인천

새벽 12시 45분 → 오전 6시 50분

>> 이번 여행 일정표. 거의 비슷하게 여행했는데 안트베르펜에서 브뤼셀로 가지 않고 브뤼헤, 겐트를 거쳐서 파리로 바로 들어가는 일정으로 바뀌었다. 베트남 일정도 메콩델타는 가보지 못하고 걍 무이네 바닷가에서 죽쳤다.

 

극기훈련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루에 너무 많은 거리를 달리지 않는다, 박물관이나 미술관 등 평상시 관심있었던 장소는 적극적으로 가본다, 가능하면 잠은 텐트에서 이동은 자전거로 밥은 해 먹는다 정도의 원칙만 가지고 무작정 비행기에 올랐다.



>> 비행기에서 바라본 하늘. 구름이 예쁘다. 나는 고소공포증이 좀 있기 때문에 비행기 타는 게 디게 무섭다. 이착륙시 젤루 심하다. 그래도 일단 구름 위로 올라가면 괜찮다.

 

준비물은 대강 이랬다.

 

1. 공동물품

- 텐트3개(오리, 날맹, 영은), 코펠 5인용 1세트(강돌), 버너(현지구입), 모기향(현지구입), 스위스칼(오리)

- 의약품(연고, 밴드, 맨소래담, 지사제, 감기약, 소화제)

- 펑크패치(영은, 한 개 더 구입), 드라이버, 육각렌치(날맹), 스패너, 체인오일 1개, 펌프, 지도(미리 출력), 목장갑 2컬레, 걸래 2장

- 손톱깎기(오리), 전자사전(영은), 바느질도구(아침), 청테이프2개(나동)

- 카레가루, 라면

 

2. 개인물품

- 기능성 티셔츠, 바지, 속옷 등등, 썬크림, 스킨, 로션, 세면도구(수건, 치약, 칫솔, 면도기, 샴푸), 엠피쓰리, 충전기, 배터리, 다카, 필기도구(노트, 펜), 매트리스, 침낭, 컵, 샌들(슬리퍼), 운동화, 양말

- 자전거 분해하고 바퀴 축에다 끼울 막대기(?, 1인당 4개), 자전거 담을 박스, 스패어튜브, 앞랜턴, 헬멧, 선글라스(렌즈, 안경 등등), 자전거 짐받이, 배낭, 자전거장갑, 허리색, 물병, 시계, 잡주머니, 침낭 묶을 끈, 짐받이용 줄, 한국 친구들 연락처/주소록

- 국제전화카드(아이비전 국제로밍플러스카드, 3만원), 여권, 비행기표, 여권 사본, 여벌사진, 여행자수표 복사본

- 쌀 7끼

 

- 옵션 : 방석, 복대, 국제 학생증(가람의 친구꺼 만들어 빌려감.)

 

** 현금과 여행자수표(아멕스)로 골고루 바꿔감. 생각보다 아멕스 사무소가 도시에 별로 없어서 환전할 때 고생을 좀 했다.

** 여행자 보험(제일화재 단기 여행자보험)

** 선물들(안티월드컵 캠페인 티셔츠, 평택 평화를 택하라 팩)

 

예산은 대강 이랬다.

 

숙박비 30만원

  (독일에서 8천원*11일 = 88,000원

   네델란드에서 1만원*11일 = 110,000원

   벨기에에서 5천원*7일 = 35,000원

   프랑스에서 7천원*6일 = 42,000원 

   275,000원 + 알파)

식비 40만원

문화관광비 10만원

베트남 20만원

예비비 10만원

이렇게 110만원

 

이밖에

회의 참가비 15만원 + 각자의 용돈(담배 피는 사람은 담배값, 술 마시는 사람은 술값, 선물살 사람들은 선물값 등등)

 

<여행가기 전에 유용하게 참고했던 싸이트들>

http://mappy.com : 인터넷 유럽지도 서비스로 명소, 음식점, 교통상황, 캠핑 등등 거의 모든 정도를 담고 있다. 심지어 PDA에 지도를 저장할 수도 있다.

www.prettynim.com : 유럽 전반의 유용한 정보가 가득. 추천 개인 사이트를 통해 다른 사이트들의 다양한 정보도 접할 수 있다.

www.train4world.com : 유럽뿐만 아니라 세계 다양한 나라의 정보를 접할 수 있다.

http://uhmssi.netian.com/ : 우리 계획과 루트가 다르기는 해도 정말 환상적인 자전거 여행 싸이트

http://bicycletour.cafe24.com/ : 2004년 5월부터 6개월간 다녔던 유럽 자전거 여행 에코토피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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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의 우왕좌왕, 좌충우돌 쎄컨드 신분쯩 만들기


 

드디어 쎄컨드 신분증(운전면허증, 2종 보통)을 손에 넣었다. 너무 감개가 무량해 울뻔 했다. 집에서 셀프 타이머 맞춰놓고 기념사진 한 장 찰칵! 그래, 이 기분이야!!!

 

내가 원래부터 주민증이 없었던 건 아니고 90년대 후반, 지금의 주민증인 플라스틱 주민카드 반대운동이 한창일 때 나도 그 대열에 동참했더랬다. 깸용, 최교 등 친구 몇 녀석과 굴복해서 주민증 만드는 사람 있으면 나머지 사람에게 맛난거 사주기 내기까지 걸었다. (이후 아마 깸용이 보험을 탄다고 했나 머라고 했나 암튼 주민증을 만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직까정 맛난거 못얻어먹었다.)

 

하지만 지문날인거부자의 길은 쉽지만은 않았다. 하루가 멀다하고 동네 통반장이 돌아가며 집에 찾아와가지고선 '아가씨, 우리 동네에서 아가씨만 주민등록증 안했어요. 빨리 가서 하세요. 사람 귀찮게 하지 말고...' 한다. 나만 괴롭히면 괜찮은데 엄마, 아빠한테까지 귀찮게 구니 내 듣기로 이런 전방위적 괴롭힘에 굴복해 주민증 만든 사람 여럿 있다 들었다.

 

하지만 나, 본래부터 고분고분 누구 말 듣는 것과 거리가 먼 승질드러운 오리다. 결국 굴하지 않고 주민증 안만드는데 성공, 그 이후 모든 관공서, 은행, 각 구치소, 교도소 면회 등은 여권으로 대체하였다. 막 주민증이 바뀌고는 은행업무 볼 때 여권들이대면 곧잘 은행직원이랑 이게 되네 안되네 하면서 실갱이가 붙곤 했었는데 것두 시간이 지나니 다 통용되더라.

 

그래서 별루 어려운 줄 모르고 살았다. 하지만 나의 첫 위기는 작년 봄 돌아왔다. 바로바로 여권만료일이 된 것이었던 것이었다. 뜨~쉬!

 



종료일을 얼마 안남기고 비장한 각오로 종로구청엘 찾아갔다. 그런데 이게 웬 하늘의 계시란 말인가. 공무원노조 조끼를 턱 하니 입고 계신 분이 여권과에 선녀처럼 서 계신 것이 아닌가. 초록은 동색이라고 일단 그 분께 접근하였다. 자초지종을 다 말씀드리고 다른 신분증 없이 구 여권으로 여권연장을 해달라 졸랐다. (사실 공무원노조 조끼를 입고 계시긴 했지만 다른 여권과 직원과 별반 다를 바를 느끼진 못했다. -_-;;) 거의 손이 발이 되게 빌다시피 해서 여권기간 연장에 성공. 그 직원분 왈. 이번엔 기간 연장이라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5년 후에 새로 여권을 발급받을 때는 분명 안 될 것이니 주민증을 만들라 하신다. 쳇, 5년 후의 일을 알게 머야. 그 동안 데모 열씨미 해야지...

 

그리고 1년 후 난 유럽으로 무대뽀 자전거 여행길에 올랐다. 그리고 돌아오기 얼마 전 파리의 몽마르뜨 언덕에서 가방을 도난당했고 물론 나의 하나밖에 없는 여권도 함께 잃어버렸다. 파리에서 한국으로 들어오기 위해 파리 영사관에 갔는데 영사관 직원 말 서울로 전화해서 주민증을 팩스로 보내라 한다. 주민증이 없다고 하니까 그럼 다른 신분증 카피본이라도 보내란다. 어떻게 내 신분을 확인할 수 있냐고 하면서...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하지만 아부와 비굴로 점철된 내 인생... 또 거의 울다시피 해서 단수여권(사실 여권처럼 생겨서 이렇게 말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여권이 아니라 임시여행증이다.)을 발급받는데 성공했다. 하마터면 국제미아 될뻔한 긴박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늘 먼가를 흘리고 다니는 칠칠맞은 성격땜에 쎄컨드 신분증이 하나쯤 있어야겠다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절실히 그 필요성을 절감했다.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여차저차 한국에 돌아왔다. 하지만 내 악몽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바로 여권을 신청하러 갔다. 10월 21일까지 유효한 단수여권(아니 임시여행증, 하지만 여권과 직원이 아닌 이상 이게 여권인지 임시여행증인지 구분 못한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구청가서 또 비굴하게 울고 빌어야지 생각하고 갔는데... 웬걸~! 이번엔 녹녹치가 않다. 울고 짜고 사정해도 소용없단다. 아예 이제 옆에 없는 걸로 생각하는지 무시하기까지 한다.

 

구청에서 나오면서 레이한테 전화를 걸었다. 여차저차하다고... 어찌함 좋겠냐고... 레이가 진보넷 은희씨랑 통화하고 전화를 줬다. 나같은 지문날인거부자들땜에 골치가 아파서 얼마 전부터 규정이 강화됐다고... 반드시 다른 신분증이 하나 더 있어야 하고 것두 딴 건 안되고 주민증이나 운전면허증만 된다고 한다. 나뿐만 아니라 최근에 다른 지문날인거부자들도 여권만들기 시도를 해봤는데 모두 실패했다면서 만약 내가 성공한다면 최초의 케이스가 되는 거라고... 그래서 레이가 제안한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다른 허술한(?) 구청에 다시 가서 빌어보든가 아님 속성으로 원동기나 운전면허를 따는 것!

 

나는 일단 전자의 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여기 저기 수소문한 끝에 강돌이 추천해준 구로구청! 아니나 다를까. 종로구청엔 내 앞에 200명이 줄 서 있었는데 구로구청엔 가니 바로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나한테 배정된 직원이 딱 봐도 알바거나 신참처럼 어리버리해보이는 분이었다. 올커니 이번엔 비굴모드가 아니라 쎈모드로 가야지.

 

오리 : (단수여권을 책상에다 탕하고 내려놓으며) 저는 지문날인거부자구요 절때 주민증 만들 수 없으니까 걍 이걸루 새여권 만들어주세요.

직원 : (당황한 기색을 역력히 보이며) 네? 아... 저... (하더니 갑자기 뒤로 사라진다, 오리 이 때 회심의 미소!!!)

직원 : 이 분하고 얘기해 보시겠어요? (뒤로 가서 높은 분은 델꼬 나온 것이었다. OTL)

높은분 : 무슨 일이시죠?

오리 : (일단 당당한 목소리로) 아 네 저는...

높은분 : (말을 가로막으며) 네, 제가 선생님의 신념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리 : @.@

높은분 :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오리 : @.@

높은분 : 지금 외교부에서 홍채인식 여권을 추진 중인데 선생님의 신념으로 봤을 때 차라리 지문을 찍는게 낳지 않을까요?

오리 : @.@ (듣고 보니 맞는 소리 같아서) 네

 

이 얘기를 들은 울 엄마 은평구청에도 여권과가 생겼으니 가보라 한다. (안갔는데 안가길 잘 했다. 왜 그런지는 뒤에 나옴)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걍 눈 딱감고 주민증을 만드느냐 원동기든 운전이든 면허증을 만드느냐. 한 3일 정도 고민한 거 같다. 여러 가지 이유상 걍 주민증을 만드는 걸로 맘이 기울어가고 있던 와중이었다. 레이한테 이번 한 번만 눈감아 주겠다는 약조까지 받아냈다. 그/런/데/... 날맹 왈 (천진한 표정으로) '오리 어떻게... 면허증 만들어야겠다.... 그렇다고 지문날인을 할 수는 없잖아...' OTL

 

그래서 면허증을 따기로 맘을 바꿨다. 원동기는 값도 싸고 금방 딸 수 있을 거 같은데 다들 이왕 딸 거 운전면허증을 따라고 한다. 원동기 면허로는 할 게 없다는 거다. 정용욱 왈 '알아? 나중에 늙어서 마을버스 운전이라도 하게 될지?' 그래 이왕 딸 거 운전면허를 따자. 인터넷을 검색해보고 젤루 싼 곳, 온수역에 있는 운전전문학원에 영은이랑 같이 등록을 했다. 울 집에서 1시간 반 걸리는 거리다. 흑

오리 : 나 이래놓고 돈은 돈대로 날리고 면허는 면허대로 못따서 결국 지문찍게되믄 어카지?

영은 : 콱 뒈져버려!!!

 

운전학원 등록을 하고 아랫집에 정재훈이 놀러왔다. 파리에서부터 시작된 내 어드벤처와 불운을 다 듣고 결국 원동기 면허는 싸고 빨리 딸 수 있지만 쓸모가 없어서 걍 운전면허 따기로 했다고 하니 정재훈 왈 '어우 오리 이 바보! 원동기면허가 얼마나 쓸 데가 많은데... 짱깨도 있지 피자배달도 있지... 어우 이 바보!' OTL

 

하지만 지문괴담은 날 계속 따라다녔다. 운전학원에 첨 간 날, 데스크에 있는 어떤 막생긴 남자가 지문 안찍으면 곤란하다고 돈 돌려줄테니 돌아가란다. 누굴 놀리나? 그러다 옆에 있는 상냥한 언니의 도움을 받아 겨우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아침 8시 20분까지 새벽밥을 지어먹고 다니며 하루 3시간씩 운전을 하는데 정말 죽을 맛이었다.

 

어찌어찌 셤에 붙고(셤보던 날 떨려 죽는줄 알았다. 이게 글쎄 얼마만에 보는 셤이야?) 얼마전 당당하게 다시 여권을 신청하러 갔다. 엄마의 충고대로 은평구청에 갔는데... 글쎄... 여권과가 없단다 은평구청엔. OTL 그래서 다시 종로구청엘 갔다. 근데 또 종로구청에서 태클을 건다. 행자부 전산망에 내가 안뜨기 땜에 안된다고... 그래서...

 

또 빌었다. 결국 해줄테니 찾으러 올 때는 주민증 해가지고 와야지 안해오면 못 찾아간다는 소릴 듣고 돌아섰다. 11월 2일이다. 그 날도 또 빌러 가야 한다. 옆에 있던 레이랑 아침이 '빌지 말고 당당하게 법조항 보여달라고 그랫!!!' 한다. 이번에 갈 땐 꼭 그래야겠다. '법조항에 나와 있나요? 보여주세욧!'

 

암튼 짜잔~! 이렇게 내 손에 쎄컨드 신분증이 들어왔다. 쎄컨드를 가지고 있으니 미술관 옆 동물원 춘희의 표현을 빌자면 정말 1년치 식량을 쌓아놓은 것처럼 든든하다. 용욱 왈 '이제 운전하고 싶어 죽겠지?' 아침 왈 '면허를 따면 다들 운전하고 싶어한다던데 어때?' 우리집에 차가 없어서 그런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지금부터라도 좀 더 내 자전거를 사랑해줘야겠다.

 

ㅋㅋㅋ 자꾸 웃음이 난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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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우행시를 보고

아침님의 [우행시를 보고] 에 관련된 글.

원래는 우행시를 볼 계획이 아니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815 특사로 햇빛을 보게 된 조정의민이 자기네 집 옥상에서 하루 날잡아 놀자고 했던 것을 몇몇 친구들이 낮에 볼링이나 치고 가자했던 것이 볼링장이 마침 또 폐업선언을 했던 것이 결국 우행시를 보게 만들었다.

 

대학로에 새로 생긴 극장(그 날 첨 들어가봤다)엔 사람도 바글바글. 겨우 그 회 막차를 잡아타고 젤 앞줄 젤 구석에 앉아 그 잘생겼다는 강동원 그 예쁘다는 이나영 얼굴이 한쪽으로 이그러져 보이는 시츄에이션으로 앉아서 우행시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듣던 소문대로 영화는 그저 그런 신파 멜로영화같았다. 물론 사형제도 폐지에 관한 시사적 주장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글쎄... 모르겠다. 수십만의 회원이 가입해 있다는 싸이의 '강동원 코피나요' 클럽 회원들은 강동원을 죽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사형제도 폐지를 목터져라 부르짖었을지 모를일...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 흔하고 그 오래된 논쟁거리인 사형제 폐지를 저렇게 80년대식으로 만들었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 영화였다고나 할까...

 

우행시를 보고 나니 같은 사형제 폐지를 다뤘지만 10여년 전 내가 사뭇 달리 봤던 데드맨워킹이란 영화가 생각이 났다. 우행시의 2% 부족한 연기력을 보여줬던 이나영 강동원 커플과는 다르게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를 지독한 감정이입과 또 지독하게 객관화시켜 볼 수 있게 했던 수잔 서랜든 숀 펜 커플의 느므 멋진 연기. 3번의 자살시도를 할 만큼 많은 사연을 갖고 있는 여성을 연기하기에 이나영은 너무 맑고 영롱하셨다. 어차피 사형을 받을만큼 죄를 지은 것이 아닌 순진남을 연기하기엔 강동원 정도면 괜찮았을라나? 모르겠다. 차라리 배종옥 유해진 커플 정도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ㅋㅋ

 

데드맨워킹의 하일라이트. 사형을 당하는 장면. 감독은 그 장면 중간중간에 숀 펜이 과연 어떤 죄를 저지른 사람인가를 관객에게 상기시킨다. 다시 떠올리기도 싫은 그 장면. 숀 펜과 그 일행은 공원에 놀러나온 커플을 남성이 보는 앞에서 여성을 윤간하고 빗자루만한 장총으로 그 둘을 쏴죽인다. 그 장면 내내 들렸던 숀펜의 소름끼치는 웃음소리... 감독은 사형을 집행하는 내내 그 장면을 오버랩시키며 관객에게 묻는다. 자! 이 놈은 이런 놈인데. 이런 찢어죽일 놈인데. 그래도 국가라는 이름으로 살인은 저지르는 것은 괜찮은가 하고. 아마도 그것이 미국식 사형(몸에 차례로 주사를 놓는 것으로 죽이는데 고통없이 죽을 수 있다고 한다 -_-;;) 장면이 아니라 우행시에 나오는 한국식 사형장면이었으면 그 시너지 효과가 더 했을 듯 싶다. -_-;;

 

하지만 우행시. 느므느므 순진해 보이는 강동원은 결국 친구의 죄를 자진해서 뒤집어 쓴 거였고 사실은 착실히 살아보려 했던 순수남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것두 자궁외 임신을 한 부인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그만 딱 한 번 했다가... 운이 없었던 게지... 10년의 시간차를 두고 (물론 미국과 한국이라는 공간차가 있긴 하지만) 겨우 죽여야 할 놈이 아닌 사람을 죽여놓고는 이제 어떻게 할거냐는 메세지라니...

 

하지만 나 너무 많이 울었다.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졌는데 옆에서 나동이 일어나지도 못하고 울고 있다. 너무 심하게 감정이입이 된 모양이다. 지난 번 평화주의자의 책읽기 모임에서 조정의민이 자기가 태어나서 이 영화보고 첨 울었다고 했던 말이 기억이 났다. 그는 지나가다 김천이란 글씨만 봐도(조정의민은 수감생활의 대부분을 김천교도소에서 보냈다) 가슴이 울렁거린다고 했다. 저녁에 조정의민네 옥상파리에서 만난 유호근도 태어나서 영화보고 울긴 처음이라 했다. 그랬을 거다. 병역거부 선언하고 조사받고 또 기다리고 기다리고 감옥에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며 20대 중반의 삶을 보낸 친구들... 우리 다같이 집단상담 한 번 받아보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다.

 

우행시, 오랫만에 많은 생각이 들게 한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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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땅보다 돈이 더 소중하다는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평화연대 6월호에서

......................................

 

내가 평택에 처음 가 본 것은 지난 해 평화캠프 때였다. 그 이전부터 평택의 투쟁에 대해서는 많은 얘기들 들어왔었고 실지로 많은 친구들이 함께 활동하고 있었지만 통 함께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2000년부터 매년 평화캠프를 진행해오고 있는데 2005년 평화캠프를 대추분교에서 하기로 한 건 그 곳 주민들의 생존권을 지키는 것이 평화이고 기지 이전으로 군사력이 확장되는 것이 평화를 해치는 커다란 요인이란 점을 캠프를 준비하고 함께 하는 사람들이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2004년부터 평화캠프에는 비폭력직접행동을 위한 트레이닝을 주요한 프로그램으로 진행해왔다. 사실 우리에겐 직접행동이니 이걸 위한 준비 트레이닝이니 하는 것들은 아직까진 매우 생소한 개념이었다. 그래서 2004년에는 병역거부와 평화운동으로 2001년부터 꾸준히 연대해왔던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War Resisters' International, WRI)의 활동가이자 비폭력트레이너인 안드레아스 스펙(Andreas Speck) 씨를 모시고 함께 토론도 하고 게임도 하면서 여러 가지 기술들을 배우기도 했었다. 2005년엔 비록 아마추어지만 우리끼리 한 번 준비해보고 나름대로 발전시켜나가 보기로 하였다. 또 평택의 상황을 직접 보고 활동가를 모시고 얘기도 듣고 하면서 캠프 참가자들의 평택에 대한 이해도 높이고자 하였다.



 

4박 5일의 일정을 마치고 평택역에서 대추리, 도두리 상황에 대한 선전전을 진행하기로 한 날 갑자기 국방부에서 미군기지 이전에 관한 주민설명회를 한다며 대추분교로 무작정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주민들이 서둘러 모이시고 많지 않은 수였지만 캠프에 참가했던 사람들도 달라붙고 해서 정문을 막아보려 했지만 방패와 곤봉, 커티기을 쥔 많은 경찰들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어떤 친구들은 경찰이 방패로 손을 마구 찍어대는 와중에도 정문을 붙들고 놓지 않아서 퍼렇게 멍이 들고 부어오르기까지 하였다. 난 너무 겁이 나서 친구에게 다가가 다치니까 손을 빼라고 애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그 친구 손을 내 손이나 혹은 다른 무엇으로 그 상태 그대로 보호해줬어야 하나 싶기도 하지만 난 누구든 다치는 것이 싫다. 그게 나든 내 친구든 아니면 경찰이든… 그 날의 충돌로 주민 한 분이 실신하고 캠프에 참가했던 상용이 연행되었다. 나중에 캠프에 참가했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우리의 대응이 너무 소극적이었던 것이 아니냐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지만 나름대로 우리는 빠른의사결정이나 인간 브릿지(bridge) 등의 트레이닝 툴을 사용하면서 부산하게 움직였다. 첫째로 우리가 내린 결정은 주민보다 우리가 앞에 나서서 뭔가를 선동하거나 행동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국방부나 경찰로 하여금 외부세력 어쩌구 하는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한 것이자 동시에 이 투쟁의 주체가 어디까지나 주민들이라는 참가자들의 인식 때문이었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을 옥신각신 했지만 결국 경찰을 앞세운 국방부는 대추분교로 밀로 들어왔고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주민설명회를 시작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고민하다가 우리는 각종 칠 것을 이용해 시끄러운 소리를 내서 연설을 방해하기로 두 번째 결정을 내렸다. 당장 사람들이 학교 건물로 들어가 북이며 꽹과리며 장구, 징 등을 빌려다가 연단 앞에서 두드려대기 시작했다. 처음엔 주민들이 연단을 잘 볼 수 있도록 경찰이 연단 옆으로 줄을 지어 서 있었는데 우리가 풍물을 가지고 등장하자 경찰들이 연단을 빙 둘러 막아섰다. 경찰들의 숲 안에서 볼 수도 없이 소리로만 주민설명회를 하는 우스운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더 웃긴 것은 우리가 약간 물러가 주민들 옆에서 춤추고 놀면 다시 경찰대열을 열었다가 우리가 다시 연단 쪽으로 오면 다시 막고 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주변에서 관찰자 노릇을 잘 해준 매닉의 얘기를 들어보니 우리의 풍물 소리가 너무 작아서 연단에서 하는 소리를 효과적으로 막지는 못했다고 한다. 중간중간 체크를 해가며 다른 방법들을 강구했어야 했었는데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그렇긴 해도 나는 그 행동이 무척이나 맘에 들었다. 뭐 특별한 행동을 한건 아니었지만 내 나름대로는 그 행동에 ‘국가야 국방부야 짖어라. 우리는 열심히 놀겠다.’는 제목을 붙여주고 싶다. 한 번도 꽹과리를 쳐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 이후로 한 달 동안 왼손 검지가 퉁퉁 부어 구부러지지도 않는 후유증을 앓아야 했다.


그렇게 여름을 보내고 내가 기억하는 그 날의 상황을 다른 사람들은 다른 눈으로 비판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비판의 요지는 (내가 잘 이해한 것이라면) 캠프 참가자 내부에서도 잠깐 그런 얘기가 나왔었다고 앞서 소개했던 것처럼 너무 소극적이고 무기력했으며 심지어 캠프 참가자들이 적극적으로 달려드는 주민들을 막아섰다는 것이다. 할 얘기가 많았지만 하지 못했다. 평택 투쟁을 열심히 해오고 있는 그 친구에게 그저 주변이기만한 나로서는 한창 투쟁이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괜히 기운 빠지는 소리만 될성싶어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좀 더 시간이 지나면 대화를 나눠보려 한다.


그리고 5월 4일 최종 행정대집행이 있던 날 나는 대추분교 교문 앞에 다시 연좌를 하였다. 그 전날 거의 잠을 자지 못했기 때문에 몸이 무척이나 피곤했지만 긴장감에 하나도 졸립지가 않았다. 그 날의 비참했던 대추리는 이미 언론에 많이 보도가 되었기 때문에 내가 다시 상세히 설명하는 것은 불필요할 듯 하다. 다만 나는 앞서 2005 평화캠프에 대한 어떤 친구의 평가와 이번 평택 투쟁을 보면서 느낀 점 몇 가지를 그냥 나열해 보고자 한다. 이상하게 언젠가부터 글쓰기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는데 특히 이렇게 진행 중인 민감한 문제에 관해선 더욱 그렇다. 제일 두려운 건 열심히 활동하고 계신 분들이 상처받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긍정적 방향으로 토론이 되었으면 한다.


5월 3일 나를 제일 당황케 한 것은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던 발언들 속에서 ‘전쟁’, ‘결사항전’과 같은 단어들을 젤루 많이 들을 수 있었다는 거다. 단 한 순간도 마음을 가라앉히거나 내가 여기 왜 와 있는지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주어지지 않은 채 주로 남성연사들로 채워진 연단은 시종일관 결사항전을 주문했고 문화공연도 심장을 두근거리고 흥분시키게 하는 리듬의 노래 일색이었다. 차분히 내일을 준비하고 싶은 바램도 내일 연행되면 당황하지 않고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경험자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심정도 귀가 터져라 울리는 노래와 선동에 묻혀버렸다. 게다가 간간히 수원 어디 어느 조직에서 화염병을 만들기 위해 공병을 주으러 다닌다는 소문도 돌았다. 다음 날 날이 밝자 대추분교 운동장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고 마스크를 쓴 남성들이 줄을 지어 이동하는 것이 보였다. 그것으로 수가 모자랐는지 사람들 여기저기서 ‘남성 앞으로’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자랑스럽게 나가는지 마지못해 끌려가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그렇게 본대오를 이탈하는 남성과 잘 다녀오라고 손을 흔들어 배웅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오늘의 투쟁에서 여성인 나는 주체가 아닌 것마냥 느껴졌다. 분명 어제 아주 비밀스럽게 오늘의 전술을 전달받기로는 비폭력이고 끝까지 대추초교를 지키다가 장렬히 산화(?)하는 것이라 했는데 무엇 때문에 남성들을 따로 불러내는 것일까 의아했다. 실제로 대추초교 정문의 경우 경찰이 남성들을 먼저 끌어냈기 때문에 가장 끝까지 남아 있었던 것은 여성이었다. 게다가 1,000명도 안되는 지킴이들이 물리력으로 13,000여명의 병력을 막아내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


평화인권연대에서 평택 관련한 회의를 할 때 현장에서 욱 해서 벌어지는 상황이 아닌 최소한 폭력을 준비하지는 말자는 것을 범대위 차원에서 합의를 할 순 없겠냐고 얘기했던 적이 있다. 폭력을 정의내리는 것은 아마 사람마다 다 다들 것이고 대항폭력에 대한 생각은 아마 더 복잡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정당한 무언가를 주장하는 투쟁에서 누구는 폭력투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할 수 있고 또 누구는 최소한의 대항폭력은 불가피하다고 할 수 있다. 내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나는 모든 폭력은 인간성에 반하는 행위라 생각하며 (물론 국가의 폭력과 시위대의 대항폭력을 한꺼번에 싸잡아 비판하자는 것은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시위대도 가능하면 사전에 치밀한 준비를 통해 비폭력적이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믿는다. 지난 1, 2, 3차 행정대집행을 온 몸으로 막아냈던 인권활동가들에 대한 시민의 지지는 그렇게 바른 방법을 통해 인간들의 선한 ‘마음’을 두드렸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번 집회에서만은 폭력을 준비하지 않기로 하자는 최소한의 합의가 정말로 불가능한 것일까. 화염병을 만들기 위해 공병을 줍고 다닌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물론 결과적으로 화염병은 등장하지 않았다) ‘남자 앞으로’를 당연히 외치는 활동가를 보면서 나는 여기 왜 와 있을까 잠깐 고민이 되었다. 내가 나의 투쟁에 대해 당당하지 못할 때 누굴 설득할 수 있겠는가. 어차피 거대한 국가폭력에 대항폭력을 맞선다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대추분교 정분에서 연좌를 하고 있을 때 시위대 안쪽에서 누군가가 ‘이건 성폭력이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직접 보질 못해서 어떤 상황인지 지금도 알지 못하지만 당시 내 앞에 있던 전경들이 갑자기 ‘뒷짐져’라고 계속 옆으로 말하며 차렷 자세에서 뒷짐 지는 자세로 자세를 바꿨던 것이 또렷이 기억이 난다. 혹여라도 언론이나 그 자리에 있었던 국가인권위원회 직원들에게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한 경찰들 나름대로의 대응수단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심지어 경찰도 시위대의 행동에 따라 대응방식이 이렇게 진화하는데 조·중·동을 비롯한 보수언론들의 작태를 뻔히 알고 있는 시위대가 그들에게 신나서 떠들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는 것은 세련되지 못한 것이라 생각했다. 어차피 누군가에게 위협조차 되지 못하고 단순히 경찰과의 거리 확보를 위한 긴 죽봉이었겠지만 조작과 왜곡의 대가인 보수언론들에게는 시위대를 음해하기 위한 좋은 먹이었을 것이다. 단 한 장의 사진에 의해 시민들에게 우리의 투쟁이 왜곡되게 전달이 되고 정당성이 가려진다면 너무나도 억울한 일이 아닐까.


김지태 이장님이 최근 구속이 되었고 이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문정현 신부님이 청와대 앞에서 단식에 들어가셨다. 평택의 투쟁이 어떻게 진행될지 잘 모르겠지만 우리 모두 보다 넓은 시야를 가졌으면 좋겠다. 쉬엄쉬엄 투쟁하자는 얘기가 아니라 큰 그림을 보며 투쟁하는 것과 한치 앞으로 내다보며 조급하게 투쟁하는 것은 분명 다른 얘기일거라는 거다. 나는 어쩌면 대추리와 도두리의 주민들은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기로 돈이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방식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는 평범한 농부들이란 것을 알려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승리했다고 생각한다. 모든 주민들이 그렇진 않았지만 그 중 땅을 일구는 것이 돈보다 값지다 생각하는 주민들이 있었다는 것을 사람들이 기억해주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결국 감옥에 갇혔지만 농부보다 미군이 소중하다는 이치를, 땅보다 돈이 소중하다는 자명한 진리를 끝까지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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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향기


 

솔향기는 안국역에서 현대본사사옥 쪽으로 쭉가다 현대본사 옆길로 들어가서 마주치는 4거리에 있다. 내가 솔향기에 첨 갔을 때 혹시 몰라 밥을 먹으러 가겠다고 전화를 드렸더니 주인 아주머니께서 창문으로 손을 흔드시며 반갑게 맞아주셨다. 솔향기는 그런 이미지다. 집에서 먹는 밥처럼 정갈하고 엄마처럼 푸근한 이미지. 솔향기에서 제공하는 모든 야채는 무농약 야채를 직접 이 집에서 기른 것이다. 지금은 겨울이라 야채가 상추 한 가지이지만 따뜻한 계절에는 다양한 야채가 정말 푸짐하게 나온다. 곁들여지는 물김치도 전혀 인공첨가물이 들어가지 않아 그 맛이 정말 끝내준다. 이 음식의 이름은 보리밥 정식.

 


 

이 집 장은 직접 담근 것이라 하는데 정말 맛있따. 실내가 어두워서 사진이 많이 흔들렸다.

 


 

물김치와 야채를 집어먹으며 기다리면 이렇게 푸짐하게 색색의 나물을 가져다 주신다. 오늘은 4명이 같이 갔기 때문에 이게 모두 4인분이다. 무슨 나물인지 다 세지도 못할만큼 가지수, 양 모두 많고 맛있다.

 


 

그리고 상추를 살짝 잘라 넣고 참기름을 떨어뜨린 큰 뚝배기와 보리밥이 나온다. 그러면

 


 

밥에 갖가지 나물을 넣고 된장국도 넣고 고추장도 넣고 비벼 먹으면 된다. 이 된장국도 맛이 끝내주는데 만일 생선까지 먹지 않는 채식가라면 미리 얘기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된장국에는 조개를 넣으시니까.

 


 

다 비비고 먹기 직전에 한 컷~! 역시 많이 흔들렸다.

 


 

밥을 다 먹으면 구수한 숭늉도 큰 사발로 내 주시고 말씀드리면 원두커피도 공짜로 주신다. 날씨 따뜻해지는 봄이 되면 가장 생각나는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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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양


 

신동양, 내가 젤루 조아라 하는 채식 식당 중 하나이다. 대부분의 채식 식당들이 한식 위주인데비해 외식은 집에서 해먹기 어려운 걸루!라는 내 생각에 딱 맞아 떨어지는 곳이다. 신동양은 보통의 중식당에서 먹을 수 있는 굉장히 다양한 메뉴들을 구비해 놓고 있는데 채식가들을 위해 주문할 때 얘기하면 그 음식들의 대부분을 채식으로 요리해 준다. 이곳의 채식짬뽕은 정말 환상이다. 깔끔한 국물에 갖가지 버섯과 유부, 야채 등이 어우러져 먹기에도 보기에도 먹음직스럽다. 화교출신 주인장이 운영하고 있으며 5호선 전철 여의도역 5번출구 여의도종합상가건물 5층에 있다.

 


 

이곳 채식짜장은 고기를 사용하는대신 밀고기를 넣어 맛을 낸다. 짜장의 양이 넉넉하기 때문에 공기밥을 한 그릇 시켜서 함께 멋으면 굿~!

 


 

맛있는 만두~! 역시 버섯과 야채, 밀고기 등이 들어간 채식만두이다. 지대루 바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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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을까...

무화과님의 [앞으로 몇 가지씩이나 남았을까?] 에 관련된 글.

자신 없다. 그래두...

 

Four Jobs I’ve had in my life(일생에 가졌던 네 개의 직업)

잠깐 다녔던 대학 앞 까페 (보이즈투맨 노래만 맨날 들어서 요즘도 보이즈투맨 노래만 나오면 그 시절 생각이 난다. 돈 없는 친구들 데려다 공짜로 음식 열나 제공했다. 결국 얼마 못가 짤림.)

자동차 부품 만드는 공장 (신상에 좋지 않은 일이 있어 싸돌아 댕기면서 가졌던 직업. 잔업까지 뛰어도 수중에 들어오는 돈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도 덕분에 내가 단순노동에 매우 소질이 있다는 것을 발견!)

워드 알바 (후배가 물어다 준. 눈알 빠지게 워드 침. 그래도 수입은 짭짤)

각종 과외 초암 논술학원 등 사교육 (...)

 

I can watch over and over(몇 번이나 다시 볼 수 있는 네 가지 영화)

가위손 (머라 말로 표현 못하겠다. 팀버튼 식 시니컬함과 유머러스함과 비판의식과 그로테스크함 등이 잘 어우러진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 (가족이란 무엇인가? 봐도봐도 안 질리는 조니 뎁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발견)

아비정전 (죽이는 대사들. 뭣보다 슬픈 장국영의 뒷모습)

베니와 준 (마지막을 뭘로 할까 고민했다. 너무 많은 리스트들이 있어러시... 걍 골랐다. 따뜻한 영화 하나쯤 고르고 싶어서. 역쉬 난 조니뎁에 꽂히긴 꽂혔나봐.)


Four places I have lived(살았던 적이 있는 네 곳의 장소)

서울 사당동 (내 유년시절의 추억. 연탄재와 비료푸대. 달고나와 뽑기.)

서울 수유리 (20대 중반까지 살았던 곳. 앞뒤옆집의 친구들)

경기도 원당 (집이 망해서 거의 쫒겨오다시피 했던 곳. 지금까지 살았던 집 중 지하철 역이 가장 가까웠다)

서울 연신내 (지금 살고 있는 곳. 북한산을 돈안내고 올라갈 수 있는 곳)

 

Four TV shows I love to watch(좋아하는 네 가지 TV 프로그램)

좋아했던 TV 프로그램

아줌마 (드라마 중 드라마)

네멋대로해라 (뒤가 약간 별루였지만 티비에서 보기 힘든 캐릭터들)

아일랜드 (네멋 때문에 꼭 챙겨보았음. 네멋보다 별루였지만 김민정의 발견)

꽃보다아름다워 (나도 울고 엄마도 울고)


Four places I have been on vacation(휴가 중 갔었던 네 곳의 장소)

최근 다녀온 곳 순으로

태국, 캄보디아 (날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느끼는 웬지모를 해방감. 절대빈곤을 목격하고 심히 당황하다)

제주도 (작년 여름 서울에서 제주까지 800km 자전거 여행. 자꾸만 떨어져가는 체력에 대한 자신감 완전 회복!)

지리산 (고즈넉한 겨울산. 여러가지 잡생각을 없애주었다.)

일본 후쿠오카 (얼마전 엄마 환갑기념 효도여행. 비싼 온천이어서 뽕을 빼느라 온몸이 팅팅 불어터지게 온천했음)

 

Four websites I visit daily(매일 방문하는 네 개의 웹싸이트)

평화인권연대 (익스플로러를 켜면 바로 보인다)

진보넷, 엠팔 (멜 체크, 요즘 블로그)

연대회의, 전쟁없는세상 (병역거부 관련 동향 체크 및 상업멜들 지우러)

구글 (몰르는 거 물어보러)


Four of my favorite foods(가장 좋아하는 네 가지 음식)

두부 (삶은 두부, 부친 두부, 두부 김치)

미역국 (국도 좋고 삶은 미역을 초장이나 양념간장에 찍어먹는 것도 굿!)

버섯 (대부분 걍 구워서 기름소금 찍어먹음.)

촉촉오징어, 순대 등 (예전엔 딱히 안먹으면 못사는 음식은 아니었는데 채식 이후 가장 먹고 싶은 음식 순위에 꼽힌다.)


Four places I would rather be right now(지금 있고 싶은 네 곳의 장소)
집 (핸펀 꺼놓고 할일없이 뒹굴뒹굴. 세상에서 젤루 행복하다.)

햇살 따뜻한 봄날 노천카페 (어디든 매연에 시달리지 않는 곳이면 굿. 책 한 권과 함께)

꽃피거나 단풍질 때 산 (아무 산이나 괜찮음. 단 사람이 버글거리면 곤란)

독일 (음하하하... 자전거 타고)

 

Four bloggers I’m tagging(태그를 넘기는 네 명의 블로거)

흠... 누구를 하지? 웬만한 사람들은 다...

강돌 (귀찮아... 귀찮아...)

레이 (이참에 다시 블로그를 여는 건?)

정용욱, 손상열 (에잇, 모르겠다. 쓸 사람이 없다. 모두 블로그가 없지만 이참에 블로그를 만드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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