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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나쁜 날

 

 

 

 

AM

 

늦잠을 잤다.

눈을 뜨니 선명한 꿈한자락이 남았다.

 

만나서 좋을 일 없는 이와

너무나도 평온한 시간을 보냈다.

 

실제로 그와 마주치지 않게 된지 꽤 되며

나의 일상과 그와 매우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게 된지도 꽤 되며

꿈에서도 나오지 않게 된지 꽤 되는 데에도 불구하고

뜬금없이.

 

더군다나

그에대한 나의 절망감 따위는 

아랑곳없이.

 

 

 

꿈에서는 더할나위없이 달콤했지만

깨고나니 견디기어렵게 찝찌름했다.

 

 

 

 

 

PM

 

오늘은 하이텍알씨디코리아 500인 동조단식의 날.

늦잠으로 아침을 날리고 부랴부랴 근로복지공단으로 향했다.

 

하이텍알씨디코리아는 무선비행기 리모콘 등을 조립하는 회사이다.

부품조립회사인 만큼 여성이 대다수이다.

그녀들 중 몇은 노동조합 활동을 했다.

사람이 신진대사의 원활함을 위해 밥을 먹는 것처럼 노동자가 노조활동을 하는 것은 위험한 일도, 경거망동한 일도 아니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일테다.

 

그러나 하이텍의 노동조합원들은 회사로부터 갖은 수모를 당한다.

화장실 가는 시간도 통제를 당하고

식당앞에도 노조사무실앞에도 매달려있는 CCTV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며 살았다.
그렇게 4년동안 감시받으면서 노동자들이 얻은건 우울증과 정신질환이었다.


그녀들, 용감한 그녀들은 자신의 병을 스스로의 무력함으로 인한 질병으로 여기지 않았다. 노동자통제감시로 인한 산업재해라고 회사에 책임을 물었다. 인간답게 살 권리, 건강하게 일할 권리를 당당히 요구했다. 그러나 회사는 들은척도 안했고, 근로자들의 희망이 되어야 할 근로복지공단은 회사의 손을 들어주며 그녀들에게 산재불승인 판정을 내린다.

 

여기까지가 근로복지공단 앞에서 그녀들이 단식농성을 하게 된 경유이다. 그리고 내가 오늘 근로복지공단 앞에서 밥을 굶고 비에 젖고 하면서도 하루종일 그녀들과 함께 했던 이유이다.

 

사실 회사가 들은 척 안하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분노할 필요를 못느낀다. 원래 자본이란 이윤을 쥐어짜기 위해 수단방법 안가리는 법이니까.

 

그러나 화가 나는 것은 국가의 역할이다.

물론 국가도 일종의 억압적 통제기구이지만,

그래도 최소한, 분쟁이 극단으로 치닫지 않게끔 할 의무는 있는 것이다. 그러한 책임방기에 대해 분노하는 내가 잘못된 것인가?

 

 

오늘은 근로복지공단의 국감일이었다.

근로복지공단은 근로자들의 복지에 대해 힘을 쓰는 것을 제 역할로 하는 공단이다.

그러나 공단 앞에서 하이텍 노동자들은 수십일동안 목숨을 걸고 농성을 진행중이다. 일자리도, 평온함도, 자존감도, 나아가 건강마저도 다 빼앗긴 노동자들이, 단 하나 남은 목숨을 걸고 공단앞에서 스티로폼 하나 깔고 수십일을 보내는 동안 공단은 무얼 했나?

 

국감일에 우리는 할 말이 많았다.

 

그래서 공단 안에 좀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역시나 삼엄한 경비.

닭장차가 수십대 주변을 에워싸고.

 

 

그래서 지지단식을 하던 일부의 사람들은 정문의 경비병력을 유인하고자 공단 뒷편으로 향했다.

 

나도 거기 있었다.

 

불온한 세력이 공단 후문으로 들어오자

전경들이 바퀴벌레떼처럼 몰려들었다.

 

그리고.

우리가 구호를 단 한번,

외침과 동시에

 

그네들의 날카로운 방패날과 곤봉과 군홧발은 우리를 향해 날아왔다.

 

 

나는 운수 나쁘게도

전경의 군홧발에 밟혀

 

지금 호빵만한 혹을 이마에 달고 있게되었다 ㅡ_ㅡ

 

젠장맞을.

 

그 흔한 가식적인 경고도 없었다.

"여러분은 지금 불법적인 행동을 어쩌구 해산하시기 바랍니다 저쩌구"

그딴 말 들으면 재수없어지는게 사실이지만 그런 말도 없이 얻어맞으니 더 열받더라.

 

젠장맞을.

 

 

대체 우리가 왜! 왜 전경의 군홧발에 밟혀야 하는 건가??

 

 

 

 

혹이 심하게 부풀어오르자 사람들이 병원으로 나를 보냈다.

경황없이 병원에 와서 공단 쪽으로 연락을 하려고 보니

내 전화기를 두고 온것. 하여 그 쪽에 있는 후배님들 중에 외우는 번호의 아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그 아해 왈.

 

"저는 지금 닭차 안예요"

 

 

ㅡ_ㅡ젠장맞을.

 

하루종일 비맞으면서 굶으면서 공단 앞에 앉아있었던 것도 사람 잡아갈 이유인가? 병력을 유인하는 우리들이 박살이 남으로써 정문 쪽을 뚫고 들어가는 시도조차 불가능했던 상황인건데.

 

대체 우리가 왜! 왜 연행되어야 하는 건가??

 

 

 

 

 

군홧발에 채이고 밟힌 오른편 몸과

아스팔트에 부딪쳐 부어오른 이마와 머리통이 아우성을 치고

게다가 얼마전 발톱을 뽑아낸 자리가 종일 비에 절은 신발 속에서 퉁퉁 부은데다가 전경들에게 쫓기면서 충격이 가해져서 쿡쿡 쑤시고

 

했지만 병원에서 치료를 마치고 다시 공단으로 돌아갔다.

머릿속의 수많은 물음표들과

끌려간 이들에 대한 걱정으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을 독하게 만드는 건

바로 저들이다.

 

오늘은 500인 동조단식이었지만

앞으로는 더 더 더 더 더해질 것이다.

 

 

 

 

 

운수나쁜 날

 

오늘이 운수나쁜 날이었던 것은

꿈이 흉흉해서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그저 어쩌다 겪는 재수없는 일이 아니라는 것,

뭔가가 바뀌지 않고 세상이 이대로 굴러가면 누구나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일이라는 것.

 

그것이 현실이다.

 

하이텍노동자 산재승인 및 건강권 쟁취를 위한 500인 동조단식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점심무렵

하이텍 동지들이 꽤 추워하셨다.

 

비는 계속 오고

우비를 입고 비를 계속 맞노라니 당연히 추운 것이다.

 

게다가 연세가 좀 있는 아주머니들이고

농성을 한 시간이 꽤 되느니만큼

많이 추워하셨다.

 

추워하는 하이텍 동지들을 보며

와락 슬픔과 와락 분노가 몰려왔다.

 

중년의 인생에

거리로 내몰린 그녀들의 모습은

서럽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기에.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독기를 품지 않고도 살 수 있기 위해서

운수나쁜 날을 필연적으로 마주하지 않기 위해서

 

응급실에 누워있는 도중 내 머릿속을 가득 메웠던

그 물음표들은 반드시 해결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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