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08'에 해당되는 글 4건

  1. 기억해두자. 2001/08/14
  2. 혀가 짧은 중국 남자애 2001/08/12
  3. 사랑 2001/08/10
  4. 당분간... 2001/08/03

기억해두자.

from 책에 대해 2001/08/14 14:46
나는 고등학교 때 책을 가장 많이 읽었다.
그 책들 가운데, 몇 권은 내가 갖고 있지만, 대부분은 어딘가 다른 곳에 있다.
대학을 들어간 뒤로는, 일정한 거처 없이 지내는 일이 많아서, 이리저리 옮겨다니다 보면,
아끼는 책이었는데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곤 했다.
때때로 그 책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찌릿찌릿하다.
다시 읽고 싶은 마음에 너무 괴로울 때도 있다.
책이 절판되어서, 더 이상 출판되고 있지 않은 경우라던가,
출판이 되고 있어도, 왠지 미심쩍은 출판사에서 나오고 있을 경우에는
다시 사서 볼 수도 없으니, 더더욱 괴롭다.

어쨌든, 그런 와중에, 늘 생각나는 책들이 몇 권 있다.
무언가 잊을 수 없는 것을 가진 책들.
고등학교 이후에, 다시 보지 못했지만, 꼭 다시 보려고 마음먹고 있는 책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글 쓰기에 진지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꼭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책들이다.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살로메] - 진정한 유미주의란 무엇인가를 느끼게 해 준 놀라운 작품이었다. 살로메가 이오카난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부분에서, 나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짧은 희곡이어서, 수 백 번도 더 반복해서 읽었고, 문장으로는 기억할 수 없지만, 완성된 연극처럼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다. 거대한 흑진주나, 다이아몬드처럼, 그 자체로 완결된, 나무나 꽃과 같은 자연물들처럼, 다른 그 무엇을 상상해 볼 수 없는, 그런 작품이다.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 가운데, [살로메]와 [장미와 나이팅게일]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알랭 로브그리예의 소설, [질투] - 이 책은 어린 나에게, 꽤나 충격이었다. 새로운 글 쓰기 방식이라는 것이 이런 식으로 존재하는 것이구나...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세밀한 묘사를 통해 화자의 심리가 나에게 전이되는 것을 느끼면서, '질투'라는 감정을 처음 느껴보기도 했다. 두 손가락 사이의 10cm 거리에 대해서, 혹은, 내 삶의 어떤 상황에 대해서 로브그리예 식으로 바라보는 버릇을 갖게 되기도 하였다. 상황을 마치, 사진을 찍어놓은 것처럼, 머리 속에서 멈추어 둔 채로 관찰하여 그 안에 든 미묘한 분위기를 읽어보려고 하는 것이다.

프랑소와즈 사강의 단편들 - 사실, 내가 무엇을 읽었었는지, 제목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고, 내용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녀의 글을 읽으면서, 이것이야말로 교과서이다...하고 생각했었던 기억이 난다. 아아~ 갑자기,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부각되면서, 너무나 다시 읽고 싶어진다. 하지만, 손바닥만한 세로쓰기 방식의 누런 책이 아닌, 깨끗하게 제본되어 큰 글씨로 쓰여진 사강의 책이란, 매력이 반감, 반감 되어버리는 것이다.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 성장 소설은, 성장기에 읽어야 가장 맛이 난다. [호밀밭의 파수꾼] 같은 책은, 그래서, 요새 다시 읽어보면 예전 같은 저릿함을 느낄 수가 없다. 나만 그런가? 어쨌든, [자기 앞의 생]은 성장 소설이 아니다. [살로메]와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 다른 글이라고 생각한다. 그 주제라는 것이, 흔하디 흔한 사랑과 죽음인데, 아름답게 사랑하고 아름답게 죽는 것에 대해 거리낌 없이 써나간 이런 책들을 읽으면서, 나는 내 삶을 지켜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문예 출판사에서 다시 장정하여 출판하고 있던데, 나는 내가 가진 2500원짜리 책이 더 맘에 들어.

비평을 하려고 했던 것은 절대 아니고, 나는 소설의 비평을 절대로 읽지 않는 만큼, 쓰는 것도 정말 싫어한다. 그저, 기억해두고 싶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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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14 14:46 2001/08/14 14:46

혀가 짧은 중국 남자애

from 2001/08/12 15:03
상해의 작은 가게에서 이것 저것 물건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대나무로 만든 손톱 만한 인형에서 눈과 손과 발이 각각 튀어나오는 것을 신기하게 구경하고 있는데, 곁에 대나무 향이 풍기는 한 남자애가 다가와서는,
[도와줄까요?] 하고 영어로 물었다.
난 점원인 줄 알고 좀 부담스러워서 [아니오. 그냥 혼자 구경하려구요.]하고 대답했다.
[내가 사면 여기서 훨씬 더 싸게 물건을 살 수 있어요.]
혀 짧은 소리로 이야기하는 그 애는, 키가 크고, 얼굴이 하얗고, 입술이 붉었다.
[이걸 봐요.]
그는 대나무 손톱 인형을 살짝 살짝 흔들어 마치 그 인형이 살아있는 것처럼 팔 다리가 동작하게 했다. 가끔, 놀랐다는 듯 튀어나오는 눈이 너무 우스워서, 나는 한참동안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한국에서 왔나요?]
[응. 어떻게 알았어요?]
[나도 한국 사람이에요. 한국에 가본 적은 없지만.]
[아...]
가게를 한참 구경하고, 대나무 손톱 인형과 몇 개의 기념품을 더 고른 다음, 그가 주인과 값을 흥정해서,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싸게 물건을 사 주었다.
우리는 시끄러운 거리를 조용히 걸으면서 각자 무슨 생각인가에 잠겨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 부두가 나타나고, 거대한 건물아래, 햇살이 사라진 곳까지 걸었을 때, 나는 내가 그에게 키스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멈추어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내 이마에 키스를 해 주었다.
그 것만으로는 참을 수 없어서, 내 입술이 그의 입술을 찾아 헤매는데, 그는 얼굴을 돌려 내 입술을 피했다.
[난 혀 끝이 잘려나가고 없어요.]
혀 끝이 잘려나간 그의 혀를 느끼고 싶어 미칠 것만 같았다.
끝이 잘려나간 그 부분은 조금 매끄럽고, 편편했다. 눈을 감은 채로 그의 혀 구석구석을 느끼고 그의 입술을 잘근 잘근 빨아들였다.
눈을 떴을 때, 우리는 거대한 정원 안에 있었다. 중국식의 높은 돌담이 정원을 감싸고 있었고, 우리 뒤쪽으로는 커다란 기와집이 있었다. 돌담 아래에는, 마치 나무열매처럼, 잘려진 사람의 머리들이 즐비하게 떨어져 있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풍경에 당황해서 여기저기 둘러보고 있는데, '툭'하는 소리가 나면서 잘린 머리가 또 하나 떨어졌다. 나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보려는데, 그가 내 눈을 가리고 말했다.
[여기서는 하늘을 보면 안 돼요. 내 혀를 잘라서 먹어버린 마법사의 집이에요. 다행히 집에 그가 없는 것 같으니 빨리 빠져나가야겠어요.]
우리는 높은 담장을 기어올라, 돌담 위의 좁은 기와에 올라섰다.
기와 끝에는, 경직된 채로 기와를 꼭 붙잡고 죽어있는 머리가 잘려진 시체들이 매달려 있었다. 하도 많은 시체들이 있어서, 담을 타려고 해도 내려갈 틈새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시체들 틈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면서 내려갈 만한 공간을 찾기 시작했다. 나도 그를 따라 걷기 시작했는데, 발목에 부딪는 잘린 목과 가끔 실수로 밟게 되는 손 때문에 멈칫 멈칫 소름이 끼쳐왔다.
가까스로 시체들 틈에 한 사람이 내려갈 정도의 공간을 찾아, 우리는 담을 타고 내려왔다.

외진 곳이어서 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도대체 어디에서 그 많은 시체들이 생겨난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나는 그에게 다시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몸이 떨려왔다.
내 허리를 감싸고 있는 그의 팔이 무겁게 몸으로 파고 드는 것 같았다.
긴장이 풀리면서 흐릿한 땀냄새와 함께 그의 대나무 향이 머릿속으로 파고 들자, 나는 이오카난의 아름다움을 숭배하는 살로메가 되었다.
*
그의 향기는 짙은 녹색 풀숲에 진주보다 영롱하고
수정보다 투명한 이슬을 묻힌 갈색 노루의 향처럼
신선하고 건강하고 따스하고 천진하오.
아니, 그의 냄새는 숨막히게 뜨거운 여름 막노동판에서
미적지근한 소주를 마시고 흘린 땀 냄새처럼,
힘든 육체노동 뒤에 찾아간 588 창녀촌의 늙은 사타구니에서
나는 저속하고 피로한 애액처럼 더럽고 세속적이오.
그의 젖빛 피부야말로 오래된 소나무 아래 모인
버섯처럼 풍성하고 폭신하고,
긴 겨울로부터 깨어난 흰토끼의 털처럼 부드럽고 포근하오.
아니, 그의 푸른 피부는 담배진으로 가득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데킬라의 뜨거운 공기처럼 음탕하고
흰 대리석 위로 소리 없이 기어가는 노란 뱀의 뱃가죽처럼
탐욕스럽고 의심스러울 따름이오.
그의 단단한 가슴에 비한다면!
가장 매끄럽게 세공한 보석보다도 매끄러우나,
여름의 거대한 바다보다도 따스하게 물결치는 그의 가슴에 비한다면!
아니, 그의 가슴 따위는 물컹거리는 썩은 사과에 불과하오.
갓 피어난 장미 꽃잎보다 더 붉은 그의 입술을 열면
신들의 질투와 시기에 희생당한 가엾은 그의 어린 혀가
어찌나 가볍게 떨리우는지,
아니, 그의 교활한 혀는 거짓이고 교만이고 믿을 수 없는 어떤 것.
깊은 우물처럼 끝을 알 수 없이 어두운 그의 눈동자를 본 적이 있다면,
그 심연에 담긴 푸른빛의 에메랄드를 향해 뛰어들 수만 있다면...
**
나는 담장 아래 눕혀지고 그의 몸을 받아들였다.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에서 마법사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에 놀라는 순간, 그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나는 인적이 없는 부둣가 건물의 그늘 속에 쓰러져 있었다. 파란 하늘이 있었다.

[*~**부분은 개토의 '당시의 상황에 대한 오스카 와일드의 증언'에서 부분 발췌 및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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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12 15:03 2001/08/12 15:03

사랑

from 우울 2001/08/10 14:56
'사랑'이라는 단어에서, 나는,
예리한 칼로 슥 베어 내, 생피를 뚝뚝 흘리는 나의 삶이 담긴 은쟁반을 떠올리게 된다.
사랑한다는 것은, 끝없이 모래로만 된, 거대한 섬에 둘만 난파되어서,
내가 가진 한조각의 빵을 그에게 건네야만 하는 상황이 끝없이 반복되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이제 한조각뿐이야. 하지만 그를 사랑해.
내 삶을 잘라내 그에게 건넨다.
그 조각이 작다는 것이 마음 아프다.

그런 사랑, 너무나 두렵고 괴로운 사랑.

내 하찮은 삶이 너무나 소중해서, 나는 그런 사랑을 못한다.
한조각 한조각이 너무 아까워서, 사랑을 포기하고 만다.

하찮다고 해도, 그것이 절실해서, 나를 사랑해주는 이를 만난다.
그의 삶을 조각조각 떼어 먹으면서, 그렇게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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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10 14:56 2001/08/10 14:56

당분간...

from 우울 2001/08/03 16:58
바쁘게 살아야 할 시기인지,
자꾸만 일거리가 들어와서 무언가 생각하고 글로 남길 시간이 거의 없다.
월요일부터, 3일째 하루종일 번역작업을 하고 있는데, 일정이 빠듯해서,
아마도 원고 마감 일인 9월 10일까지는 매일 이 일에만 매달려야 할 것 같다.
매주 토요일마다 포토샵 강의도 해야하고...

해서...당분간, 이곳에 무언가 흔적을 남기는 것이 어려울 것 같다.
번역이 끝나면, 좀 한가해지겠지...

번역은 나름대로 즐거운 일이다.
배우는 것도 많고, 단어를 고른다거나 문장을 만들어내는 일이
적성에 딱 맞는 일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인 것이다.
뭐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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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03 16:58 2001/08/03 16: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