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어와 한자

2017/10/18 17:19

우리가 쓰는 대부분의 2음절 개념어들은 19세기 후반에 일본이 서양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성립한 번역어들이다. 비록 사용된 글자 하나하나는 한자이고 종종 오리지날 어휘와 개념적으로 유사한 것으로 보일지라도 두 개의 한자가 하나로 결합되는 순간 구조적 변형이 일어난다. 이는 김용옥이 이미 오래 전부터 지적해온 바이다. experience의 번역어로 선택된 ‘경험’이란 단어의 뜻은 결코 經과 驗이란 어휘의 뜻을 통해서 얻어지지 않는다. 경험이란 단어를 이해하려면 經과 驗이란 한자어를 이해하기보다는 experience라는 영어 단어를 이해해야 한다는 역설적인 상황이다. 김용옥이 지적하듯이 조선 시대 텍스트에 나오는 經驗은 지금 우리가 쓰는 ‘경험’과는 다르다. 자연은 nature를 뜻하는 명사이지만 自然은 문장이고, 자유는 freedom을 뜻하지만 自由는 방종에 가까웠다. reason을 이성(理性)으로 번역하였다고 해서 reason을 이기(理氣)논쟁에서의 이(理)로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래서 개별 한자를 알면 한자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주장 자체는 이해는 하지만 과장된 측면이 많다. 우리말에서 한자 병기를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경우를 굳이 들자면 지나치게 많은 동음이의어를 구별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경우뿐이다(그마저도 문맥 속에서 구별되는 경우가 많지만). 즉, 한자를 괄호에 표기하는 것은 그 한자를 통해서 해당 어휘의 뜻을 이해하라는 측면보다 같은 모양을 가진 여러 단어 중에서 내가 원하는 단어를 가리키기 위한 목적이 더 강하다. 수소와 산소에 대한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물의 성질을 이해하는 데 별다른 도움이 안되듯이 개별 한자에 대한 지식과 2음절 이상의 한자어에 대한 이해는 별개이다. 한자 교육을 받지 않아서 우리말 텍스트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많다는 하소연은 수긍이 가지 않는다. 우리말 텍스트가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독서를 충분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한자교육을 받지 않아서가 아니다. 언어는 쓰이는 문맥 속에서 이해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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