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하나.

우리 동네 고등학교는 일요일이면 근처 교회의 주차장으로 변한다. 학교에 돈을 내고 학교주차장을 자신들의 주차장으로 쓰는 거다. 나는 이게 교육의 공공성을 해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학교장에게 항의를 하였더니 학교운영위의 결정사항이라고 답변하였다. 교육청에 민원을 제기하니(아마 열 번 정도는 한 듯 싶다) 담당이 전화를 해서 대충 아래와 같은 대화를 나눴다.

나 : 학교 운동장을 교회 주차장으로 쓰는 것은 교육적이지 않다.

담당 : 학교 운동장을 교회주차장으로 쓰는 것이 교육적이지 않은지의 판단은 교장의 권한이다.

나 : 그것이 교장의 권한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학교 운동장이 교회 주차장으로 쓰이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당신의 철학적 판단이 중요하다.

담당 : 내가 왜 그런 판단을 해야하는가? 그 판단은 온전히 교장이 하게 되어 있다. 규정이 그렇다.

나 : 무슨 소리냐? 지금 교육의 공공성이 무너지고 있는데 태평하게 규정 따지고 책임 따질때냐?

담당 : 왜 그러느냐? 혹시 조기 축구회원이냐? 축구 못해서 그러느냐?

 

학교 운동장을 교회 주차장으로 쓰는 결정 권한이 누구에게 있느냐가 그렇게도 중요할까? 교장은 학교운영위의 결정을 집행하는 영혼없는 한낱 쓰레기 부품에 불과한가? 교장의 결정에 교육청 관리는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야하는가?

 

관료주의의 역사는 동아시아에서 매우 길다. 나는 고려의 성립과 함께 관료주의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중국은 송, 일본은 도쿠카와 막부 정도라고 본다. 조선과 함께 후기관료주의의 막이 오르고 관료주의의 최고 번성기가 시작된다. 중국은 대충 명, 일본은 메이지유신 때 후기관료주의로 이행했다고 나는 본다. 메이지유신의 지향점은, 겉으로는 서양 배끼기를 모티브로 삼았지만 역사적 흐름에서 보면 ‘관료주의를 운영원리로 하는 강력한 중앙집권국가’ 바로 조선 되겠다. 메이지유신 이후 150년 동안의 일본의 번성은 일본이 처한 역사적 발전단계와 관료주의가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진 결과다. 우리로 치면 조선 전기 되겠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 관료주의의 약발은 임진란 이후 급격히 떨어진다. 임진란 이후 우리 역사의 방황은 관료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국가운영원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새로운 원리가 민주주의라는 것을 이미 안다. 문제는 민주주의를 어떻게 구현하느냐 되겠다. 관료주의 사회에서 개개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 의무, 책임으로 이해된다. 자신의 권한과 책임 너머의 일은 아몰랑!이다. 관료주의는 우리 사회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아주 흔히 볼 수 있는 인터넷 댓글 : 가수가 노래나 하지 왜 정치에 관여하냐? 우리 사회의 호칭 구조인 홍과장(님)은 홍이라는 성(집단의 이름)과 과장이라는 타이틀 즉, 그에 해당하는 책임과 권한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에게 홍길동은 매우 이상한 존재다. 이름 뒤에 과장이라는 타이틀이 붙어야 비로소 우리는 안심한다. 홍길동 시장, 홍길동 장관, 홍길동 타자, 홍길동 선수, 홍길동 기사……..

 

맨 앞의 장면에서 만약 교장이 “학교 운영비가 부족하여 부득이 교회에 임대하였다. 나도 못내 불편하다. 하루속히 이런 식의 수익사업을 하지 않고도 학생들이 여름에 편하게 냉방이 된 교실에서 공부할 수 있는 때가 오면 좋겠다”고 답했다면? 만약 교육청 관리가 “아! 그것 참 곤란한 상황이군요. 교장하고 의논해 보겠습니다.” 혹은 “당신의 민원을 보고 상황을 알아본 결과 당신의 문제의식에는 공감하지만 학교 운영 예산과 학생들의 공부환경 등을 종합해봤을 때 교장의 선택은 부득이한 것으로 보인다. 양해를 바란다.” 뭐 이런 식으로 답변했다면? 나는 이들을 칭찬하는 글을 지금 쓰고 있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시민으로서의 책무를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최대한 활용해야할 의무가 있다. 학교 안에서는 교장이고 학교 밖에서는 시민인 것이 아니다. 시민적 책무를 다하기 위해 교장이 된 것이고, 시민적 책무를 다하기 위해 장사를 하는 것이고, 시민적 책무를 다하기 위해 기자가 되는 것이다. 교장과 교육청 관리는 그 시민적 의무를 저버렸다. 자신들의 업무 분장내에서 그들은 무죄일 지 몰라도 공화국의 법정에서 그들은 유죄다.

 

율리우스 푸치크라는 체코 기자가 있다. 나치한테 끌려가 죽었다. 교수대의 비망록이라는 책을 남겼다. 그는 나치대원은 정열이라도 있지만 체코 간수나 행정관료는 영혼없는 나무 인형으로 비유한다. 관료주의는 인간의 영혼을 빨아먹는 암이다. 치밀한 업무 분장, 그럴듯한 책임과 권한의 분배로 이루어진 시스템을 보면서 흐뭇해할 지도 모르지만, 뼈와 뼈 사이에 관절이 필요하듯(그리고 문제는 거의 항상 이 부분에서 발생한다) 조직과 조직, 업무와 업무 사이에 반드시 관절이 있기 마련이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정부 관료의 답은 언제나 똑같다. 우리 관할이 아니다. 우리 업무 밖의 일이다. 우리는 매뉴얼대로 처리했다. 결국 아무도 잘 못한 사람은 없는데 일은 엉망이 되어 있는 현실만 우리는 갖게 된다.

 

이런 가정을 해보자. 만약 홍길동부장이 어떤 일을 해야 했는데 잊고 못했다. 혹은 잘못된 판단을 하였다. 그런데 이 사실을 홍길동과장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홍과장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결국 일이 잘못 되었다. 이 경우 당신은 누구를 해고할 것인가? 나는 당연히 홍과장을 해고한다. 홍부장은 단지 능력이 부족할 뿐이다. 그에 맞는 다른 일을 맡기면 된다. 그러나 홍과장은 조직의 암이다. 즉시 제거해야하는 악성 종양이다.

 

시민적 권리와 책임. 이보다 더 상위의 개념이 있을 수 있는가? 학교주차장 사용의 결정이 운영위에 있다면 교장은 넋놓고 바라봐야 하는가? 결정권이 교장에 있다면 다른 교사 혹은 교육청은 바라만 봐야 하는가?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니 국민은 그저 대통령이 하는 걸 지켜만 봐야 하는가? 그런데 왜 그토록 사람들은 청계광장에 모이는가? 그들을 광장으로 모이게 하는 것은 공화국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자신들이 공화국의 일원임을 믿기 때문이다. 국가의 중대사에 시민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와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전적으로 옹호한다.

 

유럽은 개인(individual)을 처음으로 개념화하였다. 그리고 그 개념은 자유주의라는 사상으로 자란다. 동아시아의 어떤 사회도 아직 개인을 개념화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나는 우리나라가 가장 먼저 하게 될 거라는 희망을 갖는다. 우리 문명 앞에 놓인 문명적 과제는 바로 인민각개의 탄생이다. 그때 우리는 사회의 단위를 더 이상 가정으로 보지 않고 개인으로 보게 될 터이고, 민주주의를 운영원리로 하는 공화국의 탄생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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