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어와 한자

2017/10/18 17:19

우리가 쓰는 대부분의 2음절 개념어들은 19세기 후반에 일본이 서양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성립한 번역어들이다. 비록 사용된 글자 하나하나는 한자이고 종종 오리지날 어휘와 개념적으로 유사한 것으로 보일지라도 두 개의 한자가 하나로 결합되는 순간 구조적 변형이 일어난다. 이는 김용옥이 이미 오래 전부터 지적해온 바이다. experience의 번역어로 선택된 ‘경험’이란 단어의 뜻은 결코 經과 驗이란 어휘의 뜻을 통해서 얻어지지 않는다. 경험이란 단어를 이해하려면 經과 驗이란 한자어를 이해하기보다는 experience라는 영어 단어를 이해해야 한다는 역설적인 상황이다. 김용옥이 지적하듯이 조선 시대 텍스트에 나오는 經驗은 지금 우리가 쓰는 ‘경험’과는 다르다. 자연은 nature를 뜻하는 명사이지만 自然은 문장이고, 자유는 freedom을 뜻하지만 自由는 방종에 가까웠다. reason을 이성(理性)으로 번역하였다고 해서 reason을 이기(理氣)논쟁에서의 이(理)로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래서 개별 한자를 알면 한자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주장 자체는 이해는 하지만 과장된 측면이 많다. 우리말에서 한자 병기를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경우를 굳이 들자면 지나치게 많은 동음이의어를 구별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경우뿐이다(그마저도 문맥 속에서 구별되는 경우가 많지만). 즉, 한자를 괄호에 표기하는 것은 그 한자를 통해서 해당 어휘의 뜻을 이해하라는 측면보다 같은 모양을 가진 여러 단어 중에서 내가 원하는 단어를 가리키기 위한 목적이 더 강하다. 수소와 산소에 대한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물의 성질을 이해하는 데 별다른 도움이 안되듯이 개별 한자에 대한 지식과 2음절 이상의 한자어에 대한 이해는 별개이다. 한자 교육을 받지 않아서 우리말 텍스트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많다는 하소연은 수긍이 가지 않는다. 우리말 텍스트가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독서를 충분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한자교육을 받지 않아서가 아니다. 언어는 쓰이는 문맥 속에서 이해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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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문제 ; 밥과 반찬

2015/08/07 17:11

밥과 반찬을 한자로 주식, 부식으로 표현하다보니 영어로 번역할 때도 main dish, side dish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밥과 반찬을 서양의 main dish와 side dish로 번역을 하면 좀 곤란한 점이 생긴다. 서양요리에서 side dish는 보통 없어도 그만인 경우가 많다. 설령 꼭 있어야 하는 경우라도 사람의 주된 관심사는 아니다. 피클 먹을려고 피자시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 음식에서 반찬은 오히려 주된 관심사다. 아래 예를 보자.

1. 퇴근후 집으로 돌아가는 Tom. 아내가 저녁으로 무엇을 준비했는지 궁금하다. 이 경우 톰이 궁금한것은 main dish일까 side dish일까?

2. 퇴근후 집으로 돌아가는 홍길동. 아내가 저녁으로 무엇을 준비했는지 궁금하다. 이 경우 홍길동이 궁금한것은 밥이 쌀밥이냐 잡곡밥이냐일까? 아니면 반찬이 김치찌개냐 된장찌개냐일까?

위 두 예를 비교해보면 서양음식에서 주된 관심은 main dish이지만 우리는 반찬이다. 식당을 이햐기할 때도, 어떤 집은 스테이크가 맛있다, 돈까스가 맛있다, 피자가 맛있다, 추어탕 잘한다, 김치찌개 맛있다, 칼국수 맛있다 등등으로 말한다. 즉, 스테이크, 돈까스, 피자, 추어탕, 김치찌개, 칼국수 등은 우리의 사고에서 같은 층위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반찬을 side dish로 번역하기가 망설여지는 이유다. 어찌보면 차라리 반찬을 main dish라하고 밥을 side dish라 하고 싶을 지경이다. 또는 밥과 반찬을 모두 main dish라고 하는 것도 나름 타당해 보인다.

우리나라 음식은 냉면이나 칼국수처럼 하나의 그릇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밥'이 나오고 밥만 먹으면 곤란하니 밥을 맛있게 먹기 위해 이런저런 반찬이 나오는 걸로 이해할 수 있다. 샐러드 없이 스테이크만 먹을 수는 있지만 밥 없이 김치찌개만 먹는 경우 본 적 있는가?

나는 보통 외국인에게 설명할 때 밥은 primary dish라 하고 반찬은 main dish라고 말한다. 그리고 약간의 설명을 덧붙이는 정도다.

 

생각난 김에 이른바 한식을 외국에 보급하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자. 뭐든지 오리지날부터 시작하면 안된다. 처음에는 눈높이를 낮춰서 일단 퓨전으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입맛이 점점 길들여지면 조금씩 조금씩 오리지날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 생각해보라. 우리가 첨부터 지금처럼 다양한 종류의 커피를 즐겼는가? 우리가 첨부터 지금처럼 다양한 파스타/피자를 즐겼는가? 아니다. 첨에는 아주 간단한 수준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원래의 오리지날에 대한 갈증이 생기면서 종류가 다양해졌다. 외국에 한식이 보급되는 것도 같은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지금처럼 밥과 다양한 반찬을 탁자에 진열하는 식은 곤란하다. 특히나 반찬이나 찌개를 같이 먹도록 하는 것은 정말 곤란하다. 기본반찬은 반드시 1인용으로 준비해야하고 갯수도 한두가지 정도로 줄여야한다. 핵심 요리(추어탕, 김치찌개 등과 같은 우리가 그 식당에 가는 근본 이유인 메뉴)가 나오고 곁들여서 '약간의' 밥이 제공되는 정도가 지금 내가 생각하는 기본 셋팅이다. 나아가 밥 대신에 면도 가능하다고 본다. 즉, 예를 들어 추어탕/찌개/잡채 등을 면과 함께 먹는 식이다. 방법이야 아주 많겠지만 일단 첨에는 현지의 음식 문화와 퓨전을 해야한다는 원칙이 중요하다. 우리가 지금 먹는 방식 그대로 들이대면 안된다는 거다. 외국 나가서 한국식당 가면, 대부분 현지인을 위한 한국식당이 아니라 한국인(주로 관광객)을 위한 식당이다.

얼마전 프라하에서 한국식당에 갔다. 모든게 한국과 같다. 심지어 기본반찬이 많이 나오고 남은 반찬을 재활용하는 것까지 똑같다. 그 식당에서 일하는 체코사람이 어떤 생각을 할까 궁금해졌다. 친구들에게 "한국식당에서는 남은 반찬을 다른 손님에게 제공한다"고 말할텐데 그 말을 들은 친구들이 한국식당에 가보고 싶을까....?

외국에서 현지인을 대상으로 하는 현지인이 요리를 하는 한국식당.... 내가 보고 싶은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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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그리고 名可名非常名

2013/04/23 17:53

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

 

장미는 '장미'라는 이름보다 먼저 존재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장미'라는 (껍데기뿐인 헛된) 이름에 집착한다.

 

대륙의 서쪽에서 리얼리즘에 대해 노미날리즘이 승리를 구가할 때, 대륙의 동쪽에서는 불교에 대해 유교(좌파)가 승리하면서 이제 진리는 형이상자에서 형이하자로, 피안에서 차안으로 넘어오게 된다. 물론 이것이 리얼리즘의 완전 파기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고 끊임없이 변종이 등장하였고 그리고 앞으로도 나타날 것이다.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 나는 '진리'를 '도'라고 부르겠다. 그러나 항상 '도'라고 불러야하는 것은 아니다.(너희들은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된다.) 어떤 사물을 특정 이름으로 부를 수는 있지만 항상 그 이름으로 불리어지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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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에 관하여

2012/10/12 09:53

질문 하나 : 한국어로 번역된 '죄와 벌'은 러시아 문학인가? 한국문학인가?

 

한국어로 번역된 '죄와 벌'은 한국문학이다. 결코 러시아문학이 아니다. 한국어로 번역된 '죄와 벌'은 한국인의 감성을 자극하며 한국문학의 밑거름으로 작용한다.

 

질문 한번 더 : 영어로 번역된 고은의 시는 영문학인가? 한국문학인가? 당연히 영문학이다.

 

한림원이 노벨문학상 선정할 때 어떤 판본으로 심사하는 지는 모르겠으나, 내 예상으로는 그들이 일어로 하루키를 읽고, 중국어로 모옌을 읽고, 한국어로 고은을 읽을 것 같지는 않다.

 

노벨문학상은 유럽언어로 쓰여진 문학을 대상으로 한다. 결코 세계의 모든 문학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노벨문학상을 받기 위해 유럽언어로 우리 문학을 많이 번역해야 한다고??? 미쳤냐? 그짓을 우리가 왜 하니? 우리가 미쳤다고 유럽문학을 살찌우냔 말이다? 우리 문학을 유럽 언어로 번역하는 건 지들이 할 일이다. 물론 우리가 거들어 줄 수는 있겠으나 우리가 주체일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 문학을 풍성하게 해야 한다. 즉, 우리는 세계문학을 우리글로 번역하는 것에 매진해야 한다.

 

번역은 우리 문명의 과제다. 아주 중요한. 우리의 지난 문명도 번역해야 하고 유럽문명도 우리의 감성으로 직접 번역해야 한다. 19세기 일본이 했던 일을 지금 우리도 해야 한다. 한가로운 소리로 들리겠지만, 문명의 초석을 다지는 것.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시급한 과제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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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여의사,여선생,여검사 등등 굳이 성별을 밝히는 것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글을 보곤 한다. 매우 타당한 지적이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일 뿐 해결책은 신통치 않다. 그들은 대부분 우리 사회가 얼마나 남성중심적이면 여자**라고 꼭 여성임을 밝혀야 하겠느냐,  왜 남검사, 남선생이란 말은 하지 않느냐, 혹은 꼭 이렇게 성별을 따져야만 하는 우리네 사고의 후진성을 탓하면서 끝낸다. 아쉽지만 과녁에서 많이 벗어난 지적이다.

 

우리 글에서 이렇게 여검사, 여선생 등등 직업 앞에 '여'자를 붙이는 버릇(?)이 생긴 연유는 아주 단순하다. 우리말에 대명사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있다 해도 '그 사람' 할때의 '그' 정도인데 이 '그'에는 성별이 없다. 보통 우리가 성별을 밝히고자 할 때는 '그 남자', '그 여자' 등으로 표현한다. 성별을 밝혀야 직성이 풀리는 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인간의 언어에서 사람을 가리킬 때 성별을 구분하는 언어는 꽤 되지 않는가? 즉, 유럽 언어의 경우 맨 처음에 사람 이름이 등장하고 그 다음부터는 he/she 등으로 부르니 자연스럽게 성별이 드러난다. 따라서 직업 자체에 성별의 구별이 있는 단어가 아니더라도 굳이 teacher에 male teacher, female teacher 등의 구별은 필요 없겠다. 즉, "아무개가 있다. he 어쩌고 저쩌고..." 식으로 글이 전개되니 자연스럽게 아무개가 남성이라는 걸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말에는 이런 대명사가 거의 없다보니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 답답함이 인간 본연의 속성인지 아니면 서양식 사고에 익숙해졌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따라서 왜 굳이 직업에 '여'자를 붙이느냐고 따지지 말고 원인을 파악하고 그에 걸맞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게 맞겠다. 내 의견은 이렇다.

 

일단 신문이나 잡지에서의 대처 방안이다. 어떤 사람이 처음 등장할 때 괄호에 나이 등을 표기하는데 이때 성별을 표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는 내가 꾸준히 주장하듯이 '사람이름 + 씨'로 부르면 된다. 즉, "홍길동은 여가수다....."가 아니라 "홍길동(여, 26)은 가수다....."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우리 말과 글과 사고가 본격적으로 결합된 게 대략 60년 밖에 안된다는 걸 알아야 한다. 언문일치의 걸음마 단계로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국가나 그에 준하는 매우 권위있는 단체, 기구가 나서서 아주 시시콜콜한 것부터 규정을 해 나가야 한다. 철자나 발음 같은 건 사실 중요하지 않다. 결제면 어떻고 결재면 어떠냐? 우리말 어법이 어떻고 저떻고....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사회는 급속하게 산업화되고 사고방식도 급속하게 바뀌었고 바뀌고 있는 중인데 그에 걸맞는 언어의 진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생기는 문제가 훨씬 중요하고 훨씬 다급하지 않은가? 존칭, 호칭, 인칭대명사 등등의 문제를 풀어야 한다. 지금부터라도! Better later than n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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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이런 신문기사 : "...김대중대통령은 이명박전서울시장과 박근혜전한나라당대표를 만났고 이자리에에는 김영삼전대통령 시절 청와대수석비서관을 지낸 이재동(가칭)전수석비서관이 있었는데.....이날 박전한나라당대표는 이전서울시장과...또한 이전수석비서관은 김전대통령의 뜻을...김대통령은..." 뭐 대충 이렇다. 기사 뒤에 가면 성에 직함만 붙어 나온다. 정말 헛갈려 돌아버리겠다.

 

그런데 일반인들에 대한 기사는 이렇다. "...홍길동씨는...고길동씨를....이에 고씨는 홍씨를...."

 

일단 첫째 : 일반인들은 그냥 씨라 부르고 윗넘들은 다들 직함을 붙인다. 씨바 이게 말이되냐? 일반 시민들은 하대해도되고 관료들은 깍듯이 직함을 붙인다? 좃도 이건 말이 안된다. 이런 구역질나는 태도를 버려야한다.

 

두번째 : 애시당초 윗대가리넘들을 무슨무슨 직함으로 부르는 것 자체를 바꿔야 한다. 뭐? 우리말의 특징이라고? 좃을 까라! 그따위 특징은 버려도되지 않을까? 직함으로 부르는 관습을 혁명적으로 때려부숴야 할 때이다.

 

이게 일반인들의 삶에서 실현되기는 매우 어렵다. 언론이 앞장서서 바꿔야한다. TV, 신문 등의 모든 공식 문서에서 관련된 사람을 씨로 불러야 한다. 직함이 필요한 경우는 이름 앞에 적으면 된다. 김영삼 전대통령이 아니라 전대통령 김영삼씨로 불러야 한다. 이건 가능하다. 그리고 두번째부터서는 그냥 김영삼씨로 부르면 된다. TV토론등에서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다보면 차츰 일반인들의 삶으로 퍼질 수 있게 된다.

 

또하나, 약간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드라마 등에서 이런 호칭을 쓰도록 권고하는 방법이 있다. 박정희,전두환 시절에나 쓸 수법이긴 하지만 드라마의 파급력을 생각했을 때 나는 쓸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드라마에서 사장을 홍사장님! 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홍길동씨! 라고 부르는 장면. 물론 처음에는 매우 낯설것이다. 당연하다. 수백년을 지켜온 버릇인데. 하지만 이렇게라도 바꿔야 한다. 1945년 이후, 우리말에 대한 전략 부재를 탓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지금부터라도 하나씩 바꿔나가야 한다. Better later than n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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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 생각해보는 영어공영어론

2011/10/09 19:50

90년대 후반에 영어공영어논쟁이 있었다. 복거일씨가 문제를 제기해서 발생했는데 찬성진영의 요지는 대략, 영어 잘해야 경제활동이 편해지고, 세계와 의사소통이 편해지고, 영어로 된 지식.정보를 좀더 쉽게 습득할 수 있다...뭐 대충 이런 것이었다.

 

영어로 된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 영어를 첨부터 모국어로 습득시키자는 주장인데, 영어로 된 텍스트가 많은 건 사실이지만 오리지날 텍스트가 영어인 것만 따지자면 조금 계산이 달라진다. 즉, 원 텍스트가 프랑스어이고 그걸 영어로 번역한 텍스트가 있다면 그건 프랑스어로 쓰여진 텍스트를 영어사용자가 이해한 것이다. 영어로 쓰여진 그 텍스트를 이해한다는 것과 원래의 프랑스어 텍스트를 이해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다시 말해, 영어로 쓰여진 그 수많은 텍스트는 영어사용자가 이해한 세상이지 세상에 대한 그 자체의 지식은 아니다. 물량공세에 현혹되어서는 안되는 법. 난 오히려, 영어로 된 텍스트를 잘 이해한다는 측면에서는 우리나라 사람이 영어사용자보다 더 유리한 측면도 있다고 본다. 약간의 역설이지만, 내 똥냄새를 맡아본 사람이 남의 똥 냄새도 더 잘 분별할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반대로 남의 똥 냄새를 맡아봐야 내 똥 냄새를 분별할 수 있게 된다는 뜻도 된다.

 

그러나 오늘 내가 하고싶은 이야기는 뭐 이런 세세한 내용이 아니다. 극단적으로 난 영어공영어론에 찬성하지도 않지만 발악발악 반대하지도 않는다. 뭐 우리가 한글을 지키기 위한 역사적 사명을 갖고 태어난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나는 당시 복거일씨가 좀더 근복적인 문제제기를 했기를 바랬다. 지금 대충 찬성론자의 말을 훑어보면 문제의식이 얼마나 얕은지 굳이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이다. 그럼 내가 바랬던 그 '근본적'인 문제제기란 무엇인가? 영어공영어론이 우리말의 약점을 공론화했다면 민족주의니 뭐니에 휩쓸려버리기보다는 좀더 우리말이 한단계 업그레이드되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는 뜻이다.

 

1945년 소위 해방이후 우리말에 대한 전략부재의 가장 대표적인 모습이 현대 산업사회에 걸맞는 존칭어법의 개발을 하지 못한 것이다. 아다시피 존칭은 우리말의 가장 큰 특징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문제는 많은 부분이 비산업사회에서 발생한 것이고 이는 현재의 산업사회에서 너무나 큰 불편함을 초래하고 있다. 이 부분을 국가와 국어학계가 개입해서 좀더 간편한 존칭어법을 개발하고 보급했어야 하며, 지금이라도 그렇게 해야한다. 극단적으로 반말을 표준으로 삼는 한이 있더라도 존칭때문에 우리 내부의 의사소통이 걸리적거려서는 안되는 것 아닌가?

 

생면부지의 상대방을 부르는 2인칭대명사의 부재도 문제다. 심지어 남영신씨는 영어의 '유'를 도입하는 한이 있더라도 남녀노소가 같이 쓸 수 있는 2인칭대명사의 개발을 요구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참고로 남영신씨가 쓴 국어사전 정말 강추다. 왜? 그 사전에서 '껍데기'라는 표제어를 보면 답이 나온다. 아마 오르가즘을 느낄 것이다.

 

철자법을 보자. 우리나라 어느 누구도 'ㅔ'발음과 'ㅐ'발음을 귀나 입으로 구별하는 사람이 없다.(글쎄..몇명은 아직 가능할까?ㅋㅋ) 훈민정음 창제 초기에는 당연히 양자의 발음이 구별되었다.(구별되니 구별해서 썼겠지~) 그러나 지금은? 다른 예를 들어보자. '부부'의 경우, 앞의 ㅂ과 뒤의 ㅂ이 발음이 다르다. 귀는 구별못하지만 입은 구별해서 발음한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달리 발음한다는 뜻이 아니고 자연스럽게 달리 발음된다는 뜻이다. 뒤의 ㅂ은 순경음ㅂ이라고도 한다. 유성음과 유성음 사이에서 무성음ㅂ이 유성음화 되는 것이다. 이렇게 발음이 구별되지만 우리는 굳이 구별해서 쓰지 않는다. 그런데 'ㅔ'와 'ㅐ'는? 귀도 입도 구별못하는데 굳이 구별해서 써야할까?

 

이런 등등의 문제에 대해 해방이후 우리사회는 아무런 해법을 고민하지 않은 채 지금껏 흘러온 것이다. 이것에 대해 영어공영어 논쟁이 아주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영어공영어 진영에서 좀더 정확한 관점에서 문제제기를 했다면 말이다. 봐라. 우리말 존칭때문에 좃나 피곤하다. 영어쓰면 지위 고하에 크게 영향받지 않고 대화를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냐? 우리말 씨바 호칭때문에 좃나 피곤하다. 영어를 쓰면 아무나 상대방을 이름이나 '유'라고 부를 수 있으니 얼마나 좋냐? 뭐 대충 이렇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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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utiful의 뜻은 아름다운?

2011/10/08 17:15

심심풀이 퀴즈 하나 : beautiful의 뜻은 아름다운? 아니면 아름답다? daum이나 naver의 사전을 보면 beautiful의 뜻은 '아름다운'으로 나온다. 그런데 '아름다운'으로 검색을 하면(한영모드에서) '아름다운'이라는 표제어가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당연하다. 국어사전에 '아름다운'은 표제어로 등재되어 있지 않다. '아름다운'은 '아름답다'의 많은 활용형 중 하나일 뿐이니까. 다시 daum이나 naver의 한영사전에서 '아름답다'를 검색하면 beautiful이 나온다. 즉, 한영모드와 영한모드에 비대칭이 발생한다. beautiful의 뜻을 아름답다로 해야 하는가? 아니면 아름다운으로 해야 하는가?

 

우리말은 동사, 형용사, 체언(+서술형어미)이 서술어의 기능을 담당하지만 영어는 서술어의 기능을 동사가 독점한다. 예를 들어 "나 학생"이라는 글자의 집합을 보여주고 즉각 떠오르는 문장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아마 많은 우리나라 사람은 "나는 학생이다"라는 문장이라고 답할 것이다. 왜? 당연하다. 우리말은 체언이 서술어의 기능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나는 학생을 보았다"라는 문장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모르긴몰라도 드물것이다. 왜냐하면 '보다'라는 새로운 단어를 추가하기보다는 주어진 단어만 가지고 자족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더 빠를테니. 그런데 영어를 쓰는 사람들은 어떨까? 그들에게 "I student"(좀더 정확히는 I a student가 되겠지만)를 보여주면 그들도 "I am a student"라는 문장을 떠올릴까? 아마 우리보다 훨씬 다양한 답이 나올 것이다. "I saw a student" "I hit a student" 등등 말이다. 세상에 서술어 없는 언어는 없다. 영어는 동사가 서술어의 기능을 독점한다. 따라서 영어는 반드시 동사가 필요하다.

 

두개의 언어에서 일대일 대응이 되지 않는 단어들이 있다. 단적으로 우리말의 조사 중에 영어에 없는 것이 있다. '학교에"에서의 조사 '에'는 to로 번역되지만 '나는'에서 조사 '는'은 영어로 번역될 수 없다. 사실상 I 자체에 '는'이 포함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I의 뜻은 '나'라고 보기 보다는 '나는'으로 보는게 맞을 것이다. 일반명사인 경우는? Tom의 뜻은 무엇인가? 경우에 따라서 톰은, 톰을, 톰에게 등등을 뜻한다. 문장의 위치에 따라서 뜻이 달라진다는 거다.(그때 그때 달라요~)

 

나는 beautiful의 뜻을 '아름답다'로 사전에 실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I am beautiful"에서 am의 뜻은? 없다! 우리말로 번역이 안된다. 단지 문장의 주어와 시제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허사일 뿐이다. '아름답다'란 뜻은 beautiful이라는 단어에서 온전히 주어진다. 그러면 'a beautiful flower'는? 당근 '아름다운 꽃'이다. 이때 beautiful은 아름다운으로 번역될 뿐이다. 똑같은 Tom이 어떨때는 '톰은'으로 어떨때는 '톰을'로 번역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시시콜콜하다고? 물론 그렇다. 하지만 사전은 아주 시시콜콜해야한다. 아주 정교해야 한다. 우리말에 대한 매우 깊고 정교한 이해를 토대로 '영한'사전을 만들어야 한다. 아니 '만들었어야 했다...." 언제? 1945년 이후에. 해방후 아주 한참동안 영한사전은 영일사전을 그냥 그대로 베꼈다. 아주 쉬었다. 표제어, 뜻 할 것없이 그냥 그대로 베꼈다. 당시 울나라 지식인들 일어를 얼마나 잘했나? 영일사전 펼쳐놓고 영어단어 쓰고 옆에 일본어로 된 해석 한글로 옮기는 것..여반장이었을 것이다. 소위 해방후 울나라에 일한사전이 새로 출판된 것이 대략 1960년대 중반이다. 그 전까지 일한사전은 필요가 없었다는 말씀이다. 해방 후 태어난 아이들이 성인이 되기 시작하면서 일어를 모르는 이들을 위해 일한사전이 새로 편찬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우리말과 일어가 차이가 많았다면...  만약 그랬다면 우리는 좀더 주체적으로 세상을 받아들였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느낀다.  일본어는 우리말과 너무나 비슷하다. 영어. 프랑스어를 번역하는 것에 비하면 일본어번역은 정말 식은 죽 먹기다. 해방이후에도 수많은 서양책들이 일본어를 통해 번역된 소이연이다. 그말은 우리 스스로 주체적으로 서양을 이해하지 못하고 일본이라는 창을 통해 이해했다는 뜻이다. 너무 어처구니 없지 않은가...?

 

영일사전을 통째로 영한사전으로 베낀 결과 일본식 어휘들이 대거 우리말에 침투해 들어왔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해방이후 우리말에 대한 전략 부재'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즉, 국어학자들이 우리말 사전을 만드는 것도 중요했지만 영한사전을 만드는 과정에 아주 많은 참여를 했어야 했다. 생각해보시라! 당신은 일년에 국어사전 몇번이나 보는가? 그리고 영한사전은 몇번이나 보는가? 즉, 우리말을 갈고 닦는데 국어사전보다 오히려 영한사전이 더 효과적이라는 뜻이다! 제대로된 우리말을 가르치고 싶다고? 그렇다면 제대로된 영한사전을 만들여야 한다. 사전에서 anniversary 찾아보라. '기념일, 주기, 기념제..'등등이 나온다. 그런데 1891년 영국인 선교사 제임스 스콧이 만든 영한사전에는 '돌'이라는 풀이가 있다. blind 뜻풀이가 '발'로 나온 영한사전 본 적이 있는가?

 

시시콜콜하다고? 언어에 대해선 좀더 시시콜콜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우리도 일본인처럼 우리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democracy를 일본인들이 '민주주의'로 번역하였다는 것은 그들이 서양 근대국가의 작동원리를 완벽하게 이해했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democracy의 뜻을 이해하는가?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일본이 우리에게 알려준 '민주주의'일 뿐, 우리 스스로 이해한 democracy는 없다고 본다... 나는 이것이 슬프다. 우리 스스로 독자적으로 이해한 세상...나는 그것을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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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칭 어미 '시'를 폐지하자.

2011/08/18 19:35

좀 과격한, 또는 황당한 주장 되겠다.

 

"아~ 이 제품은 만오천원 되십니다." 뭐 이런 말 많이 듣는다. 여기저기서 이와 관련한 많은 지적을 하고 있다. 저렇게 말을 하는 사람도 사실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습관처럼 나오는 것일 뿐. 그래, 습관이다. 사람하고 바쁘게 이런저런 말 하다가 혹시라도 반말할까봐 두려워 그냥 전부 존칭을 써버리는 것이다. 저런 표현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 한번 가상 실험해봐라. 천천히 생각하면서 말 할때는 괜찮지만 바쁘게 수시로 말할 때 은근히 신경쓰인다. 결국 일종의 risk 관리 되겠다. 존칭과 비존칭을 정확히 구사하는데 수반하는 골치아픔과 깐딱 실수해서 존칭을 써야할 때 하대를 써 버림으로써 발생하는 치명적인 손실을 회피하기 위해 그~냥 전부 존칭으로 씨부려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일단 최악의 경우(존칭을 써야할 때 하대해버리는 경우)는 피할 수 있게 된다.

 

다른 예 들어보자 :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라는 문장을 보자. 체언+조사, 용언+어미의 형태이다. 죄다 존칭이다. 좀 너무하다는 느낌이다. 꼭 저렇게 모든 음절을 죄다 존칭으로 해야 하나 싶다. 사회가 지금보다는 훨씬 천천히 움직이던 시절에는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산업사회다. 아, 산업사회라 해서 인간관계의 기본이 무시되도 괜찮다..뭐 이런 주장하는 것 아니다. 다만 산업사회에 걸맞는 존칭을 정립하자는 것이다.

 

산업사회에 걸맞는 존칭, 이 문제에 대해 국어학자들의 책임이 참으로 크다. 그들의 책임이 절반을 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한글이 우리의 말과 글을 지배하기 시작한 게 대충 백년이라고 보았을 때 처음 절반은 일제 강점기의 수렁이었고 뒤 절반은 미군 강점기, 전쟁, 굶주림, 독재 등등으로 점철되면서 우리 말에 대한 어떤 정체성 혹은 미래를 생각하기엔 너무나 혼란스럽고 어찌보면 사치스러웠을 것이다. 한다는 것이 고작해야 소위 이미 굳어진 말들을 어거지로 우리말로 바꾸자는 식이었다. 70년대 잠깐 그런 적이 있었다. 또 국어학자들 우리말에 대해 이야기하면 거의 무조건 "원래 우리말은..." 뭐 이런 식이다. 원래 이러니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 기준을 잡고 중심을 잡는 것, 좋은 일이다. 하지만 세상이 변하면 언어도 변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1945년 이후 국어학자들이 뭐 이런저런 주장을 했다고 할지라도 그게 관철되었을 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분명한 건 45년이후 우리는 우리말에 대한 어떤 전략적 대응을 하나도 하지 못했다. 45년 이전 상황이 일제 강점기라는 너무나 혹독한 시기였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적절한 전략을 갖지 못했다. 예를 들면 보자. 45년 이후 우리말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당근 영어다. 즉, 영어가 우리말에 밀려들어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길목은? 그래. 영한사전이다. 하지만 해방 이후 상당한 기간동안 우리나라 영한사전은 영일사전을 그냥 뺐겼다. 참 쉬었을 것이다. 당시 지식인들이야 일어는 외국어도 아니었을 터이니 조일사전놓고 순서하나 빼먹지 않고 그냥 한글로 옮기면 되는 거였다. 이과정에서 일본식 한자가 해방이후 태어난 세대들에게도 학습된다. 아.. 너무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이건 나중에 다시 쓰겠다. 존칭, 호칭, 인칭대명사, 맞춤법 등등...

 

내가 말한 적절한 전략이란 해방이후 우리사회의 변화를 예측하고 그에 걸맞는 문법, 어법을 정립하는 것이다. 그중 지금 말한 존칭의 문제도 포함된다. 존칭을 줄이자. 이게 내 주장이다. Better later than never다. 각급학교에서 교육을 하고, 언론등을 통해 홍보 및 실천을 하면 개선할 수 있다. 처음에 예로 든 문장에서 존칭과 관련한 조사 및 어미를 제거하는거다. "아버지가 말씀했다" 뭐 이렇게 되겠다. 물론 어감상 '시'를 안쓰면 이상한 경우도 있다. 다만 큰 줄기에서 '시'를 쓰지 말자는 거다. 그렇게 교육하고 공공매체를 통해서 실천을 하면 된다. 그렇게 해서 조금씩 우리말에서 존칭을 줄여나가야 한다. 우리말. 존칭이 너무 많다.

 

한사람은 하대하고 한사람은 존대하고. 이렇게 해서 제대로 대화가 되겠나? 호칭도 없애거나 방식을 바꿔야 하고, 적절한 2인칭 대명사도 도입해야 하고, 입과 귀가 알아듣지 못하는 맞춤법도 손질해야한다. 그냥 저절로 변할 때까지 기다리자고?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 한시라도 빨리. 저 거대 중국의 글자도 바꾸는데 이건 아주 약과다. 무슨 글자 모양을 확 뒤집는 것도 아니고 약간의 표기와 어법을 바꾸는 것인데 나는 결코 어렵지 않다고 생각한다. 간단한 예 하나만 들자. 신문이나 방송에서 "이명박대통령은..." 뭐 이런다. 이것을 "대통령 이명박씨는...."으로 바꾸자는 거다. 이게 어렵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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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륀지? 오렌지?

2011/08/09 19:58

몇년전 어륀지에 관한 말, 우스개, 풍자, 비꼬기 등등이 이었다. 그 말을 한사람의 행실(국보위 위원, 명박이따까리)을 제외하고 생각하면 이 문제는 사실 아주 오래된 현상이며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논쟁이다.

 

혹시 아이오딘이란 말 들어봤나? 좀 나이든 사람은 '요오드'로 배웠으나 요즘 학생들은 '아이오딘'이라고 배운다. 세상이 주로 아이오딘이라하니 우리도 따라서 아이오딘이라고 하는 것이다. 크게 문제될 게 없다. 학교에서 요오드라 했다가 무슨 학회같은데 가서 아이오딘이라고 하면 헛갈리지 않은가?

 

風 : 이 한자 어떻게 읽나? 그래 '풍'이다. 뜻은? 그래 바람이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천년전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한자를 '바람'이라고 읽었다. 그런데 당시 선진국(송나라)으로 유학갔다온 사람들 야그가 "사람들아! 송나라 사람들은 이 한자를 '풍'이라고 읽는다. 우리도 '풍'이라고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소린가? 2천년 전에 중국 발음에는 '어두자음군'이란 게 있었다. 초성에 자음이 두어개 연속 오는 것이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중국 주변 지역의 언어를 연구한 결과이다. 즉, 우리말을 포함해 중국 주변의 언어는 일종의 고대 중국어의 화석같은 구실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 자음이 영어식의 consonant인지 우리식의 닿소리인지는 잘 모르겠다.(consonant는 홀로 소리가 나지만 닿소리는 그렇지 않다.) 어쨌든 당시 중국어에는 초성에 자음이 연속오는 경우가 있었다. 이걸 어떻게 발음했는지는 지금으로선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당시에도 우리나라 사람들(우리나라 사람? 이상타 대충 고.백.신 등등의 사람들을 염두에 둔 말이다.)은 자음 두개를 연속으로 발음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연속된 자음이 오는 경우에는 중간에 살짝 모음을 끼워넣어서 읽는 수밖에.... 즉, 風의 고대 중국 발음은 알파벳으로 표기하면 PLAM 뭐 이런 식이 되겠다.(혹은 ㅍ람) 문제는 우리는 ㅍ과 ㄹ을 연달아 발음할 수 없었으므로 중간에 모음을 하나 넣어서 '바람(혹은 파람)'이라고 읽었던 것이다. 이렇게 오랜 세월 바람이라고 읽어왔는데 난데없이 선진지식인이라는 자들이 '이런 무식한 것들~ 이 글자는 '풍'이라고 읽어야 한단 말이야! 이걸 '바람'이라고 읽으면 선진국사람들이 못알아 듣지!'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런 우라질~ 넘들이 알아듣든 말든 우리가 무슨 상관이람~ 뭐 이런 식의 반론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고 결국 타협을 본게 '좋다! 풍은 음이요 바람은 뜻이다' 뭐 대충 이렇게 된게다. 이런 식으로 고대 중국어 발음이 고려시대 전후에 뜻으로 그리고 동시에 순수한 우리말로 둔갑한 경우는 매우 많다.

 

오렌지. 이 단어는 orange와의 관련에서 이해할 필요가 없다. 오렌지든 orange든 그 단어들이 가리키는 사물의 이름으로 이해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처음에 오렌지라는 단어가 만들어졌을 때는 당근 orange와 깊은 관련이 있었겠지. 하지만 시간이 흐른거지. 그동안 orange를 발음하는 미쿡 혹은 영쿡넘들의  방식이 조금 바뀐거지. 그래서 지금 들어보니 어륀지로 들리는 거지. 그렇다고 우리도 그 과일의 이름을 어륀지로 바꿔야한다? ㅋㅋ 소가 웃다가 코뚜래가 빠질 주장이지. 이젠 양놈들이 그 과일을 뭐라 부르든 상관이 없어졌어. 세월이 아주 많이 흘러 ORANGE가 형태 및 발음이 엄청 바뀌어 버린 경우를 상상해보자. 형태는 ULOMK가 되고 발음은 뭐 대충 '울럼크'가 되었다고 하자. 그때가 되면 우리 아이들은 'ULOMK'가 우리말로 뭐지? 하고 물으면 '오렌지요!'하고 답할 것이다. 사전에는 ULOMK : 발음은 울럼크, 뜻은 오렌지...ㅋㅋ 그때가 되면 사전이 필요없어질려나?

 

어륀지... 이 말을 들었을 때 명박이와 그 주변 사람들의 철학이 얼마나 천박한지를 알겠더라고. 세상과 인간에 대한 눈꼽만큼의 고민과 이해가 보이지 않아. 그저 모든건 돈. 좀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잇속. 이것말고는 없는거야.

 

언어.... 우리끼리의 소통이 더 중요한가? 외부와의 소통이 더 중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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